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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이재영
2023-01-28
조회 372

제목: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성도! (마 5:13∼16)


1.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시중에 파는 천일염 가운데 포장만 바꾸어 국산으로 파는 가짜가 많다고 합니다. 가짜 C급 소금으로 김치를 담그면! 맛이 쓰고, 김치가 쉬 물러져서 낭패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먹는 것으로 장난을 치나?” 분개하고 있고, 정말 세상에 마음 놓고 먹을 음식이 없다고 탄식하고 있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인정받고 있습니까? 불만 제로입니까? 아니면 문제가 많다고 C급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까? 냉정히 생각해 보면, 마치 오늘 말씀대로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버려지고 밟히는 존재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나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 본분과 사명을 되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순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부패하고 변질된 세상에서 순결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믿습니다. 현대사회는 정직의 표준, 양심의 표준, 도덕의 표준은 점점 낮아지고 있고, 반대로 죄악의 기준은 상향되고 있습니다. 웬만한 죄는 죄로 여기지도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은 도덕과 양심과 정직의 수준을 높게 유지하는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소금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소금은 비싸지 않지만 중요합니다. 소금은 안 보이지만 꼭 필요합니다. 생명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런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나게 존경받고, 귀중하게 여김 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없으면 세상은 더욱 부패하고 삭막하고 맛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너희는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등지고 혼자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영향력을 끼쳐야 할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맛을 내줍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교회와 성도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소금처럼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살맛 나게 하고,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소금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란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너희는 세상의 필수품이다. 소금은 모든 사람에게 매일 필요한 필수품입니다. 대신할만한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간장이 있지 않으냐?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간장도 소금 없인 간장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소금은 ‘원천’입니다. 소금은 대용품이 없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대용품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없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찬양대, 교회학교, 선교회나 속회에 없으면 안 됩니다. 뿐만아니라, 아파트나 동네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소금의 존재를 생각하게 됩니까? 싱겁거나 너무 짤 때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소금의 존재는 의식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사람이 있을 때는 그의 존재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없어지고 나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 귀한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2. 너희는 세상의 맛이다. 욥기의 말씀입니다. 욥 6:6 →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네! 무슨 음식이든! 아무리 좋은 양념을 많이 했더라도, 간이 맞질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은 ‘살맛 없는 세상을 살맛 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내려면 소금이 녹아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을 하려면 뿌려져야 합니다. 옛말에도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소금은 맛을 내야 하는 어딘가에 뿌려져야 합니다.

소금과 같은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찾아가서 접촉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희생하는 사람이 소금입니다. 겸손함과 낮아짐과 섬김으로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접받고 싶어 하는 마음, 섬김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세상에서 맛을 낼 수 없습니다. 희생하는 삶에서, 섬김의 삶에서, 낮아짐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소금으로서의 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3. 너희는 세상의 방부제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소금은 방부제입니다. 소금은 생선이나 고기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이 썩지 않게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은 절대로 부정하고 부패한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저속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리스도인이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되면 추하고 더러운 이야기는 멈춰져야 합니다. 남을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인이 가면,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스스로 부끄러워져야 합니다.

맛 잃은 소금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자기 신앙이 상하지 않게, 썩지 않게 스스로에게 소금을 쳐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먹었던 생각이 변질하지 않도록 소금을 쳐야 합니다. 우리의 신선하였던 결심이 썩지 않도록 소금을 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의 희망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1. 빛이 하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어두움을 환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어 있던 것들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러면 더러운 것도 드러나고, 잘못된 것도 드러납니다. 빛이 비치면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둘째, 빛은 밝음과 따뜻함을 가져다줍니다. 빛이 비치면 마음에 평안함과 기쁨이 생깁니다. 창 1:3∼4입니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네! 빛이 비치면 아름답고 따뜻하고 좋습니다.

셋째, 빛은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합니다. 등대의 불빛은 배가 항해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자동차의 전조등은 자동차가 운전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길을 보여주고 방향을 제시합니다.

2. 성도와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성도와 교회는 세상의 어두움을 비춰야 합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드러내고, 세상의 잘못된 제도와 죄악을 드러내고 고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138년 전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한국교회는 작은 불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땅에 존재하던 도덕적 사회적 죄악을 드러내는 일을 했습니다. 미신을 타파했고, 축첩 제도, 남녀 차별제도, 문맹을 타파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처음이나 지금이나 계속해서 잘하고 있는 일들도 많지만, 세상의 기대만큼 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빛으로서의 교회, 빛으로서의 성도의 제 모습을 회복해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그 역할의 선봉에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성도와 교회는 밝고 따뜻한 착함과 사랑의 빛을 비춰야 합니다. 이 빛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선행과 착함의 빛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5:16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면 어떻게 이 빛을 비출 수 있습니까? 돈도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① 우선, 얼굴에 ‘환한 미소와 웃음’을 지어 빛을 비춰야 합니다. ② 그다음에는 ‘부드러운 말과 칭찬의 말’을 하여 빛을 비춰야 합니다. 그리고 ③ 우리의 물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착하고 선한 일들’을 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착함과 사랑의 빛을 비출 때,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따뜻해지고 행복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은 ‘착함’과 ‘사랑의 일’입니다. 우리가 빛 된 삶을 살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고,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빛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성도와 교회는 방향을 잃고 혼돈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목적이고, 지위와 명예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힘써서 많이 벌고, 모으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명예를 얻어, 그 능력과 그 힘으로! 베풀고 섬기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목적을 가질 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이유도, 사업을 열심히 해야 할 명분도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시간 새롭게 다짐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세상의 소금이 되리라.” “내가 세상의 빛이 되리라.” 내 삶으로 그리스도가 빛나게 하리라” “내 삶으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게 하리라” 이렇게 다짐하고 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문과 묵상


1. 불량소금으로 인해 김치나 음식을 망쳐본 경험이 있습니까? 불량 크리스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보셨습니까? 또한 나의 영적 정체성과 삶에는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고 나눠봅시다.


2. 소금과 빛의 역할 중에서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느껴진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결심한 바를 나눠봅시다.


3. 우리교회의 2030 비전인 ‘행복을 나누는 교회’란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할 분야에 대해서 나눠 보고, 속회보고서에 건의사항으로 적어 냅시다.

이재영
2023-01-21
조회 230

제목: 신앙 여정에 필요한 세 가지 ! (민 10:29∼36)

 

오늘 우리가 읽은 민수기(民數記)는 = ‘백성들의 인구 조사 기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성경인 ⇨ 칠십인 역(LXX)의 이름인 ‘숫자들(Numbers)’을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본래 히브리어 성경의 이름은 미드바르(rB;d]mi)입니다. = 이것은 ‘광야에서’라는 뜻으로, ⇨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의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이름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출발하여 모압 땅에 있는 ‘느보산’까지 이동한 기록으로, 그야말로 ‘광야에서’ 유리방황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무려! 39년 동안의 기록입니다.

모세가 이 민수기를 기록한 이유는! ① 광야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출애굽 1세대들의 불순종과 원망으로 말미암은 ‘심판’이, 단순한 과거로 잊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고 ②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 1세대 조상들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불순종에 빠져, 가나안의 풍습과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자! 이 둘째 세대! 즉 첫 번째 인구 계수 때 20세 이하였던 자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의 신앙 여정에 꼭 필요했던 세 가지

 

1. 하나님의 인도하심 (언약궤와 구름기둥 ‧ 불기둥)

광야 길을 걷는 이스라엘에게 첫 번째로 필요했던 것은, 언약궤와 구름기둥 ‧ 불기둥이었습니다. ①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민 10:33 →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네! 하나님은 언제나 앞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정착해 있을 때’의 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행진할 때’는!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대열을 이루어 갔습니다. 맨 앞에 언약궤(고핫 자손)가 선두를 선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궤’가 이스라엘 행진의 선두에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고, 또한 앞장서서 이스라엘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따르라’는 명령은!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고, 인간의 판단대로 살려고 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인생 ‘광야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지! 내가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약궤를 따른다는 말은,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길이요, 실패하지 않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려 38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1세대 사람들이 다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인간의 판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앞세운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② 이 언약궤와 같은 메시지를 주는 것이 바로 구름기둥 ‧ 불기둥입니다. 3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민 10:34 →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출애굽기의 말씀입니다. 출 13:21∼22 →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광야라는 환경에서 ① 하나님은 구름기둥을 통하여 한낮의 뜨거운 더위를 막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 밤에는 불기둥이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고, 광야의 추위를 막아주는 난방장치 역할도 했습니다. ② 구름기둥은 길이 없는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가이드 역할을 했습니다. 구름기둥이 멈추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머물 곳이 거긴 줄 알고 진을 쳤고,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이스라엘 백성도 장막을 거두어 따라 움직였습니다. ③ 그리고 이 구름기둥 ‧ 불기둥은, 광야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없도록 호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구름기둥 ‧ 불기둥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다양한 방법, 다양한 형태의, 구름기둥 ‧ 불기둥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때로는 유력한 사람을 통해, 때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때로는 직접적인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고 느끼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당당하게 인생의 발걸음을 내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환경과 사람을 선용하는 지혜 (처남인 호밥에게 동행하기를 요청함)

광야 길을 걷는 이스라엘에게 두 번째로 필요했던 것은 ‘환경과 사람을 이용하는 지혜’였습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모세가 그의 처남 호밥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합니다. 민 10:29 →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이드로)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겠다고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호밥’은 그곳 광야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러니 미디안 광야의 지형과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도 그곳에서 40년을 함께 살았지만, 본래 어려서부터 광야를 살아온 처남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처남 호밥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민 10:31 →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런 상황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할 것이니, 전적으로 나를 신뢰하고 내 인도대로만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난데없이 처남 호밥에게 ‘우리의 눈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모세의 요청은 불신앙이요, 잘못된 것 아닙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큰 그림으로 인도하신다면! 병든 환자들이나 출산하는 사람을 위해서! 굴을 찾는 일, 위험한 독초를 피하고 필요한 약초를 구하는 일 등! 세세한 부분에서는 호밥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철저히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광야의 지형과 사정에 맞게 백성들을 세심히 돌보는 일은 여전히 모세의 중요한 책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백성을 인도하시되 ‘상황’과 ‘환경’과 ‘사람’을 이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환경’이나 ‘사람’을 이용하는 것도 ‘믿음’이고 ‘지혜’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딤전 4:4 →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네! 하나님은 다양한 환경과 사람을 이용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만들어나가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도 환경과 사람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기도 (떠날 때와 머물 때, 모세는 늘 기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광야 길을 걷는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도’였습니다. 모세는 자기 처남 호밥에게 동행해 주기를 요청하면서도, 여전히 중심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요청하시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언제 기도했습니까? ‘궤가 떠날 때’와 ‘궤가 머물 때’ 기도했습니다. 시작과 끝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무리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민 10:35 →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이것은 출발할 때의 기도인데, 우리가 광야 길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멈출 때도 기도했습니다. 민 10:36 →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머물러 진을 칠 때도,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기도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도,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한 것도, 하늘에서 메추라기가 내려오게 한 것도,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도, 모두 기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모세와 같이, 기도로써!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성공적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정하신 진영을 갖춰 광야를 행진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삶 에서 혹은 우리 공동체에서 질서를 갖춰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나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인간의 판단에 따라 살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반대로 승리한 경험도!)

 

3. 모세는 기도로 행진을 시작하고 기도로 행진을 끝냈습니다. 내 하루의 시작과 끝에 어떤 기도를 드리면 좋을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3-01-15
조회 343

제목: 나실인의 정신으로 ! (민 6:1∼8)


이솝우화 중에 “파리와 좀 나비”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파리가 달콤한 냄새가 나는 꿀 항아리에 앉아서 꿀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것이라서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장자리에서 조금씩 빨아먹었는데, 그 꿀맛이 얼마나 좋던지 유혹받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아예 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몸이 맘대로 움직여지질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날개가 꿀에 붙어서 움직일 수도 없고, 날아가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꿀 속에 파묻혀서 꼼짝달싹 못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파리’의 모습을 보고선 핀잔을 합니다. “야 이놈아! 아니 조그만 놈이 가장자리에서 빨아먹으면 되었지, 욕심에 눈이 멀어 꿀 항아리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그 모양이 됐냐? 아이고! 미련한 놈!”

빈정대는 좀 나비 앞에 파리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등불을 보고선 좀 나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좀 나비들은 불 가까이로 모여들면서, 좀 더 밝은 곳으로, 좀 더 밝은 곳으로! 하다가 그만 그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꿀 속에 파묻혀 있던 파리가 이러더랍니다. “아이고! 너는 나보다 더 바보다.” 결국은 ‘단맛에 대한 욕심’, ‘불빛의 환한 유혹’에 이끌려 갔던 둘 다 죽었습니다.

세상에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일시적인 쾌락과 자기만족을 추구하다가, 결국 파리와 좀 나비와 같은 신세가 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탄‧마귀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세상 것들을 가지고,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려고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탄‧마귀가 성도들을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몇 가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마음에 잘 새겨두시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① 첫 번째 말은,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말입니다. 살다가 보면 성도라도 작은 실수를 할 수 있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사탄‧마귀는 위로하는 척하면서 “이 정도는 괜찮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죄에 대해서 이 말을 자신에게 적용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것이 올무가 되어 큰 함정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② 두 번째 말은, “딱 한 번만!”이라는 말입니다. 사탄‧마귀는 두 번이나 세 번이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딱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이 말을 유혹의 미끼로 사용합니다. 얼핏 듣고는 “그래! 이번 딱 한 번만이야.” 하면서 그냥 넘어가는데, 그러나 악은 결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딱 한 번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③ 세 번째 말은, “넌 아직 젊어!”라는 말입니다. 사탄‧마귀는 열심히 영적인 생활을 하려고 하는 성도들의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넌 아직 젊어. 좀 더 나이를 먹은 다음에 열심을 내도 늦지 않아! 벌써부터 헌신할 필요는 없어!” 이 사탄‧마귀의 말에 수많은 사람이 속아서 황금 같은 시간을 허송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④ 네 번째 말은, “다들 그렇게 사는데 뭘 그래!”입니다. 그야말로 제대로 마음먹고 “이제부터는 바르게 살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되자!” 하면 사탄‧마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남들 다 편하게 사는데, 뭘 너 혼자 그렇게 특별하게 살려고 그래?” “믿어도 적당하게 믿고, 교회를 다녀도 적당하게 다녀!” 이런 말입니다. 얼핏 들으면 솔깃합니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이! 누구도 그렇고, 누구도 그렇게 사는데 뭘! 내가 뭐 대수라고…” 그런단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에 혹해서 진실하게 살지 못하고, 성도답지 못하고, 제대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세상에서 사탄‧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진실한 성도로 살아가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성도가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고 진실하게 사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구별된 성도다!’ 이 생각! 즉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나실인의 정신’을 가지고 살 때 가능합니다. 오늘 성경은 ‘나실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실인’이라는 말은 → 히브리어로 ‘ryzIn:’(나지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구별된 자’라는 뜻으로 ⇨ “세상의 욕망을 끊어버리고,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나실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씀하기 위해서 강조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몸을 구별하여”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민수기 6장 전체에서는 12번이나 강조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만도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 2절 끝에 “자기 몸을 구별하여”, 4절 처음에 “자기 몸을 구별하는”, 5절 중간에 “자기 몸을 구별하여”, 6절 처음에 “자기 몸을 구별하여”, 7절 중간 이후에 “자기 몸을 구별하여”, 8절 처음에 “자기 몸을 구별하는” 네! 이렇게 많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에 걸쳐서 기록하신 이유는! 나실인의 핵심은 ‘자기 몸을 구별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나실인이 지켜야 할 규칙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①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심지어 포도즙이나 건포도나 포도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② 둘째,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아야 합니다. 머리카락이 길다고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길어도 서원하여 거룩하게 구별한 날 동안에는 자르지 말아야 합니다. 나실인이라는 외적 표시입니다. ③ 셋째,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 형제가 죽었을 때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면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이 나실인의 규례를 정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구별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먹는 것과, 하는 일과, 모이는 장소를 구별되게 하여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도 이 ‘나실인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것이나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먹을 것이 있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네! 먹는 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 곳이나 가서도 안 됩니다. 성도들이 가도 되는 장소가 있고, 가지 말아야 할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 일이나 해서도 안 됩니다. 돈 버는 일이라고!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서! 아무 일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분별력을 잘 발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술 먹고 담배 피우는 것이 죕니까? 성경에 담배 얘기는 없던데요” 물론 법이 없다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담배도 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건강을 위해서 금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고, 자기 몸을 구별하는 데 문제 되는 것은 무엇인지? 예민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대서양을 최초로 비행기로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Charles Augustus Lindbergh, 1902∼1974)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인데! 지금으로부터 96년 전인 1,927년 5월에, 25살의 나이로 뉴욕에서 파리까지 횡단했습니다. 조그만 경비행기로 33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요즘이야 별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린드버그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미국과 유럽은 그야말로 난리였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린드버그가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국민들은 그가 오기 전부터 먼저 환호하느라고 난리고, 언론들도 취재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때 한 담배회사 사장이 한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린드버그가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는 사진을 찍으면, 전 세계에 자기 회사 담배가 선전되어 장사가 잘되겠구나!’ 생각하고 그에게 제의했습니다. “당신이 영국에 도착할 때, 우리 회사의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사진 딱 한 장만 찍읍시다. 그러면 그 대가로 5만 불을 주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CF 사진 한 장 찍고 5만 불이니, 아주 파격적인 조건입니다. 요즘도 5만 불이면 큰돈이지만, 1920년대의 5만 불은 60배 이상의 가치라고 하니, 그야말로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런데! 제안을 들은 린드버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긴 합니다만, 저는 세례교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담배 선전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못 합니다.” 딱 거절했습니다.

이 소식이 그다음 날 신문에 보도되었고, 이에 감동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린드버그는 신앙을 5만 불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를 위해 모금합시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헌금한 돈이 10만 불이 됐고, 그 돈을 린드버그에게 기쁨으로 전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은! ‘세상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구별된 사람들은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구별된 사람들이 비록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산다고 해도, 그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 거룩한 사람들은! 가정이면 가정, 직장이면 직장, 학교면 학교, 그곳에서 구별된 나실인의 자세로 살아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여러분 모두! ‘나실인의 정신’을 가지고, 그것을 잘 지켜나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크신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결단과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유혹이란 관점에서 자신에게 제일 약한 영역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이길 결심을 나눠봅시다.


2. 우리는 부모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녀나 다음 세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적 가치관과 분별력을 가르칠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3.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죄를 경계하고, 자신을 성결케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재영
2023-01-07
조회 292
  • 제목: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② (사 43:18∼21)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② 교회적으로 회복하고 힘써야 할 네 가지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탄소제로 녹색교회로 창조세계 보존


1. 지구의 위기 - 생명의 요람인 지구! ‘돌보며 더불어 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연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삶의 양식을 따르다가, 그만 지구를 병들게 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어느덧 ‘창조 세계의 암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2. 환경파괴에 대한 기독교인의 사명 -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생명운동, 환경을 지키는 운동에 동참할 것인가? 그 ‘성경적인 원리’를 말씀드립니다. 먼저, 우리 인간은 자연의 위임자, 관리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소유자’나 ‘주인’이 아니고, 자연을 관리할 ‘청지기’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대 사명’(Great Mission)을 주셨습니다. 막 16:15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런데 이 사명을 우리는 오직 ‘사람만’을 향한 명령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즉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라는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성경의 ‘만민에게!’란 말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막 16:15’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만민에게”라는 단어 앞에 작은 숫자로 3)이란 ‘각주’ 표시가 되어 있고, 성경 아래쪽에 3)번 각주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를 보면 “온 창조세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뜻을 살려서 번역하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대 사명’(Great Mission)은 단지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범위가 훨씬 더 넓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성도들이 회복시켜야 할 대상은 → 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②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려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즉 자연까지를 포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사명’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 “자연을 대할 때 이기적이고 제 욕심만 채우려는 지배자의 자세가 아니라, 자연의 관리자, 청지기로서, 자연을 잘 가꾸고 보살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탄소제로 녹색교회’를 선언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펼쳐갈 ‘애국운동’은 바로 절제와 자기희생으로 ‘지구와 생태계’를 잘 보전하는 ‘좁은 길’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생애주기별 교육을 통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세워가기

이 시대에 가장 큰 위기는 ‘생태환경 위기’와 함께,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가정의 붕괴’입니다. 사탄‧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가정을 제1의 공격 대상으로 삼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교회는 사명감을 가지고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지키고 세워가기 위해서 ‘가정중심의 목회’를 천명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 ‘가정사역원’을 개설하였습니다.

우리교회 가정사역원의 공식 이름은 ‘패밀리세움센터 소올’입니다. → ‘소올’이란 뜻은 ⇨ 영어로는 ‘Soul’로 하나님의 생기가 가정에 들어가 살아나고 새롭게 된다는 뜻이고, ⇨ 한자로는 ‘蘇兀’로 (소생할 소, 우뚝할 올)자를 써서 ‘소생하여 우뚝선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에 저의 일곱째 일천번제 기도제목이 “가정사역의 정착과 확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만큼 관심이 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행해 왔던 대로, 생애주기를 따라 교육하여 가정중심의 목회를 착실하게 실천해 갈 것입니다.


▶ 가정사역의 방향

① 회복과 치유 – 개인, 부부, 부모‧자녀 관계의 회복과 성숙 / 회복된 삶을 통해 →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만들기 / 성숙된 가정으로 변화되어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사역 감당 / 가정사역 프로그램의 섬김이로 사역(평신도 사역자 양성) ② 특별한 목회적 돌봄과 힐링 - 암환자 가족, 홀로된 사람들, 탈북자 & 사할린 귀국동포를 대상으로! - 이혼, 재혼, 다문화, 장애우 등 ③ 전도와 섬김의 통로 - 교회 내 성도들에서, 지역사회로 참여자를 확대해서!

▶ 교육프로그램

① 결혼코칭 → ② 태교학교 → ③ 영·유아 부모교실(라떼파파) → ④ 부부행복학교(아내행복교실, 러빙유) → ⑤ 사춘기 부모교실(이모션코칭) → ⑥ 마더와이즈(지혜, 자유, 회복) → ⑦ 부(父)라보 스쿨(아버지학교) → ⑧ 가족(특정계층)힐링캠프 → ⑨ 웰리빙스쿨(천국준비교실)

이 ‘가정사역 프로그램’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몰라서! 혹은 오랜 습관으로! 어그러진 삶을 배우고 고쳐, 새롭게 세워가는 ‘실천교육’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프로그램이 개설될 때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한 번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다시 참여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소그룹 공동체(속회 선교회 등) 모임의 활성화

개인주의의 팽배와 더불어, 지난 3년간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전 세계 교회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분야는 바로 ‘소그룹 모임의 침체’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이런 와중에도 지난해에는 가장 내실 있는 속회모임을 진행해 왔다고 자평합니다. 보고하기 위한 속회는 대부분 사라졌고, ‘진지한 나눔과 토론’, ‘서로를 위한 조언과 중보의 기도’가 속회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속회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다 보니, 금년에 새로 조직하여 나눠드린 속회에 대해서 ‘바꿔달라! 빼달라!’ 하시는 분이, 단 한 분도 없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를 ‘공동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성도의 교제’가 잘 이루어지는 교회였음을 우리에게 증거해 줍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 서로서로 말씀교제, 식탁교제, 삶의 나눔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구절마다 ‘모두 다’ ‘서로서로’라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 ‘믿는 것(believing)’보다 ‘소속하는 것(belonging)’이 더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과의 사귐 못지않게, 사람과의 따뜻한 교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서먹서먹해서 뛰어들지 못하고, 또한 팔을 벌려 환대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보면! 환대에 문제가 있기보다는 뛰어들지 못하는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혹 이 자리에도 스스로 ‘방문자’나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면! 뛰어드는 용기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금년에는 그동안 중단됐던 모임과 행사들을 많은 영역에서 재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단위는 대그룹 중심에서 중‧소그룹으로 작게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교회는 ⇨ 더 크게(larger) 성장하는 동시에, 또한 더 작게(smaller) 친밀도를 높여가는! 소속감이 높은 건강한 교회로 만들어 가십시다.


4. 믿지 않는 가족, 친구, 이웃을 초청하여 영혼구원과 침체자들의 예배회복

우리 교회는 지난 20년 동안 ⇨ ‘이웃초청주일’ ‘가족초청 천국잔치’ ‘새생명 전도축제’ ‘고구마전도’ ‘해피데이 전도축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신자를 ‘태신자로 품고’, 그 영혼을 전도하여 구원하는 전도프로그램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지난 몇 년 동안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가장 마음 아파하실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코로나 초기에 발생한 사건이 전도의 입을 꽉 막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대구 신천지 장막성전’에서 5천 명이 넘는 집단 감염자가 발생했고, 전국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를 확산시켜 ‘1차 대유행’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 때문에! ‘이단’이 뭔지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기독교를 다 똑같은 ‘반사회적 집단’으로 매도했고,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위축된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숨은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전도’의 입은 벌릴 수도 없었습니다.

사실상!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낯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입으로 전도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도의 사명을 그냥 놔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가 우리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살전 1:3,7∼8)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점점 그 소문이 넓어져 갔습니다. 이와 같이 삶의 현장인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아파트에서, 동네에서 얼굴을 알고 생활을 아는 사람들에게 믿는자로서 선한 영향력을 펼쳐가는 일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실천해 가야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때! 전도의 입을 여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또 이전에는 교회에 잘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잘해 왔는데, 지금은 침체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가정에도, 선교회와 속회에도 있을 것입니다.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이들의 믿음이 회복되도록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가장 큰 ‘환경과 기후 재앙’의 문제는 무엇인지? 이에 대한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본인이 참여해 본 ‘가정사역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 소감과 필요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본인이 참여하고 있는 ‘소그룹 모임’에서 더 잘해야 할 ‘영역’이나 ‘일’은 무엇인지? 또한 개인과 소그룹이 할 수 있는 ‘전도’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3-01-01
조회 262

제목: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① (사 43:18∼21)


2023년 우리교회 표어로 “이제 다시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정했습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①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② 교회 중심의 여러 활동에 많은 위축이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동안 핵심적으로 행해왔던 ‘신앙운동들’을 되짚어보고,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1. 영적밥먹기 – ‘육신’을 위해 세끼 밥을 먹는 데는 적어도 2시간이 소비됩니다. 그렇다면 ‘영’을 위해서도 매일 ‘영적인 밥’을 먹어야 하고, 이를 위해 시간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적밥먹기를 위해 → 하루 40분∼1시간, 가장 좋은 시간을 3개쯤 정하라.

그렇게 할 때 규칙적인 말씀 묵상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3개의 시간대를 정하는 이유는! 첫째 시간에 못하게 되면! 둘째, 셋째, 시간대에 해서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영적밥먹기를 위한 복습 ① 먼저 결심하라. → ② 시간과 장소를 정하라. → ③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알게 하라. → ④ 꾸준히 실천하라.

진행 → 1분, 기도(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 25분, 성경 읽기(읽으면서 중요한 은혜 되는 말씀에 밑줄 치기)

→ 4∼5분 동안, 밑줄 친 성경 구절들을 다시 읽고, 한 절 암송하기

→ 10분간, 밑줄 친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 기도하기

유익 → ▸매일 말씀의 양식을 먹게 되어, 심령으로 강건케 된다.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기도하게 되어, 기도의 영역과 기도의 언어가 풍성해 진다.

▸1년이면 성경을 1번 통독하게 되고, 스스로 영적성장을 느끼게 된다.


2. 일천번제 작정기도 - ‘받은 증거’가 있는 힘 있는 신앙생활을 위해!

일천번제 작정기도 복습 - 우리가 드리는 ‘일천번제 작정기도’는 솔로몬이 드렸던 일천번제와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一千燔祭)의 번(燔)자는 사를 번, 태울 번(燔)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드리는 일천번제(一千番祭)의 번(番)자는 차례 번, 숫자 번(番)입니다. 즉 천번, 천회의 헌금을 드리며, 응답받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일천번제 작정기도를 하기 위해 ① 먼저 기도가 마쳐질 때까지 꼭 응답받고 싶은 ‘기도제목’을 한가지 만 정한다.(약 3년) → ② 기도 때마다 드릴 헌금을 정하되! 무리한 액수를 하지 마라. ③ 기도할 시간을 정하고, 그 제목의 기도에 집중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 ④ 가족이나 영적 멘토가 될만한 사람에게 알려 중보해 주기를 부탁하라. → ⑤ 꾸준히 실천하는 가운데 응답 되면, 중보자들과 간증을 나누라. → ⑥ 다 마쳐지기 전에 응답 되었으면 중단치 말고, 기도내용을 ‘감사’로 바꾸라!


유익 → ▸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기 때문에, 응답여부를 확실히 알게 된다.

▸ 기도 응답으로 영적 확신과 기쁨을 갖게 된다.

▸ 다른 사람에게도 간증할 수 있는 받은 증거 있는 간증의 사람이 된다.

▸ 신앙명가(信仰名家)의 기초를 닦게 된다.


3. 성경암송과 필사 – 생수의 근원이신 말씀에 인생의 뿌리를 대는 일이다.

성경암송과 필사 복습 -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식 전수 방법은 ‘암송’과 ‘필사’입니다. 암송과 필사는 느린 속도만큼, 생각이 머물고 익을 수 있는 시간을 주어 유익이 큽니다.

① 성경 암송을 하면! 두뇌가 입체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놀랍게 발달하여 기억력과 판단 능력을 높여줍니다. 암송을 위하여! 입으로 ‘중얼거림’은 언어와 사고력, 창의력을 담당하는 뇌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늙지 않는 건강한 두뇌를 유지할 수 있어 치매 예방에 결정적입니다.

② 또한 필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쓰고, 마음으로 읽게 되어, 성경을 깊고 꼼꼼하게 이해하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디지털 세상은 빠르게 결과를 요구하지만, 필사는 천 년 전 중세 수도원의 필경사가 된 것 같아, 과정까지 만족감을 줍니다.

성경암송과 필사를 하기 위해 ① 먼저! 성경 전체를 도전하지 말고, 암송하거나 필사하기 좋은 성경 본문을 택합니다. (잠언, 시편, 복음서 등) ② 익숙한 본문부터 시작해야 중간에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③ 핵심 400구절은 ⇨ 구원의 말씀 100절, 헌신의 말씀 100절, 신앙계승의 말씀 100절, 축복의 말씀 100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구약과 신약의 핵심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구약 ⇨ ① 구원의 말씀(출 13:1∼10) → “여호와께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② 헌신의 말씀(출 13:11∼16) → “구별하여 여호와께로 돌리라!” ③ 신앙계승의 말씀(신 6:4∼9) → “여호와를 사랑하라. 자녀들에게 신앙을 잘 가르치라.” ④ 축복의 말씀(신 11:13∼21) →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주어 풍족케 하시리라.”

신약 ⇨ ① 구원의 말씀(요 3:16~17) →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② 헌신의 말씀(롬 12:1~2)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③ 신앙계승의 말씀(마 28:19~20) →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④ 축복의 말씀(요삼 1:2)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영혼, 범사, 강건)

유익 → ▸ 담대한 말씀 선포자가 될 수 있다. (사명회복)

▸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어 하나님과 소통하는 인생이 된다. (영성회복)

▸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머리가 되는 인생이 된다. (지적능력)

▸ 하나님의 축복으로 메마른 초목이나 떨기나무 같은 인생이 아니라, 거목(巨木) 인생으로 발 전하게 된다. (축복의 상속자)

▸ 빠른 디지털 시대에 디톡스가 되어, 정서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안정된다. (육체와 정신 의 건강)


4. 원포인트 말씀나눔을 통한 가족예배 회복 – ‘쉐마의 명령’을 준행하여 하나님의 축복 받는 가정이 된다.

쉐마의 명령(신 6:4∼9)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Impress them) 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② 길을 갈 때에든지 ③ 누워 있을 때에든지 ④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Talk about them)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장소와 시간과 여건에 상관하지 말고! ⇨ 말씀을 나누라!)

원포인트 말씀나눔 – 우리 교회는 유아부로부터 장년부까지 7명의 설교자들이 매 주일 ‘같은 본문’ ‘같은 제목’으로 설교합니다. 물론 나이에 따라 설교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핵심 포인트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에 가족이 같이 왔다면! 어느 부서에서 예배를 드렸든지 같은 주제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본문 같은 주제의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 공통의 주제를 갖게 되었으니, 그것을 매개로 영적인 대화(가족예배)를 나누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시대는 가족이라도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이 2명만 함께해도! 누가 시작하든지 ‘주일 설교에서 들은 말씀’을 매개로 영적인 대화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소통이 시작되고, 영적 성장과 가정의 화목이 이뤄지며, 교회에 머무는 말씀이 가정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원포인트 말씀나눔을 통한 가족예배 회복을 위해 ① 먼저 가족 모두가 주일성수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② 때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영적인 대화를 시도하십시오. ③ 자신이 받은 은혜와 결심을 먼저 말하십시오. ④ 아직 신앙 수준이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하여 ‘질문’ ‘대화’ ‘토론’ ‘논쟁’이 계속 이어지게 하십시오. ⑤ 나아가서는 신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생의 비전, 진로, 역할 같은 것까지 대화의 폭을 넓혀 나가십시오.

유익 → ▸ 자녀 세대에게 성공적인 신앙계승을 하게 된다.

▸ 마음을 나누는 대화로 가정 식구 간에 관계의 회복과 신뢰가 깊어진다.

▸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소통의 능력이 향상되고, 대화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 영적, 지적, 사회적 감수성의 수준이 높아지고 통달하는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나눔과 묵상


1. 위 4가지 중 본인이 실천하고 있는 것과 그 유익을 나눠봅시다.


2.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시작해야 되겠다고 결심케 된 것은 무엇입니까?


3. 서로를 격려하고 잘 실천해서 영적 유익과 성장을 이뤄갑시다.

관리자
2022-12-24
조회 578


2022년 12월 25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믿음에서 사랑으로! (요일 4:17∼21)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요한 사도는 ‘믿음으로 얻는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복음에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요 5: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후 서신서에 가서는 이 ‘믿음’을 ‘사랑’이란 말로 바꾸었습니다. 요일 3:14 →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사도 요한이 이렇게 ‘믿음’을 ‘사랑’으로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거짓말쟁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웃을 미워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믿지 않는 자라고 사도 요한은 선언한 것입니다.

오늘 요절 말씀입니다. 요일 4:20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는, ‘믿음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증거인 ‘사랑’이 자신에게 있는지 스스로를 확인하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믿고 영접해야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오심으로, 그의 삶이 달라졌다는 증거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요일 4:7∼8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면!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 사랑을 어떻게 사람에게 나타내셨습니까? 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희생적인 사랑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 역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명이 있음을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일 4:11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속으로 느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느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실천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무명에 지나지 않았던 바울에게 공개적으로 책망받은 적이 있습니다. 갈 2:11 →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베드로는 이방 지역인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 성도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곳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베드로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피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로부터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행동을 바울은 ‘위선적인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이 일은!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일로 인해 바울과 다투거나 그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바울의 리더십을 인정해 주었고 또한 사랑하였습니다. 그 증거가 그의 서신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벧후 3:15 →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네! 자신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킨 바울에 대해서 물론 화가 났겠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인내로 잘 참아냈고’, 바울을 향하여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움의 마음’이 베드로를 지배하지 못했고, 오히려 사랑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격이 급한 베드로였지만,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함을 받은 이후 그는 변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선한 영향력이, 한 성질 하는 바울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울도 자기주장이 세고 자존심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고전 13:1∼2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이처럼 성경에는 ‘사랑’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성도들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희미할까요? 그것은 천국, 지옥, 심판에 대해서 듣기만 했지, 자신의 현실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웃을 미워하고, 원수 맺고, 싸우며 살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계 21:8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 사망! 즉 영원한 지옥 유황불에 던져질 사람으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보다 앞서 언급된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이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대체 어떤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까? 이 답을 알려면 역시, 요한이 쓴 말씀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요일 4:18 →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 “사랑하며 살지 못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사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온갖 것을 다 가지고 누리며 살아도! 근원적인 두려움이 그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지옥’에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당연한 두려움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이 ‘두려움’은 어떻게 해야 사라질 수 있습니까? 우선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살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늘의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맨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난 후에, 사랑 장인 고전 13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고전 12:31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어떤 것이 ‘더 큰 은사’입니까? 방언보다, 통변보다, 예언보다, 신유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큰 은사입니다.

혹시! ‘나는 사랑하며 살 자신이 없어!’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까? 네! 사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하며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은사’를 주셔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갈 5:22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면!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할 자신이 없음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갈망’이 없음을 걱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 예수님은 이제 ‘구원자’로서가 아니라 ‘심판 주’로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도 물론 보시겠지만, 우리의 ‘사랑’을 면밀하게 살펴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실천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축복의 길’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많은 사랑을 모아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장난감이나 어린이에게 필요한 물품들도 많이 모아주셨고, 사랑나눔 헌금으로 동참하신 분들도 많아 상당한 헌금이 모아졌습니다.

어디에 이 사랑을 전할까? 찾는 중에, 작년에 소올과 여선교회가 바자회를 통해 지원했던 굿네이버스의 ‘저소득 가정의 소녀들에게 생리대후원’ 사업에 지원하고, 또 가까운 부천역 근처에 어린이만을 위한 ‘무료 식당’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120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찾아오는데, 대부분 이주민 가정과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들이라고 합니다. 헌금과 장난감이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 살아,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증거! 곧 ‘사랑’이 자신에게 있는지 스스로를 확인 하라!”는 말씀에 대해 나눠봅시다.

 

2. 공개적인 망신을 당하여 ‘상처 입었던 경험’이나, 반대로 당신의 삶에 용기를 갖게 하고 새롭게 하였던 ‘사랑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사랑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차갑게 식은 세상을 따뜻하게 데울 나(속회, 선교회)의 사랑의 실천 계획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2-17
조회 567


2022년 12월 18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늦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라! (전 12:1∼8, 13)

 

솔로몬은 전도서 12장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 12:1∼7 →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표준새번역) 저는 오늘 이 말을 한 솔로몬보다는, 모세와 야곱을 중심으로 말씀을 풀어가려고 합니다.

 

1. 네 나이가 얼마뇨? - 육체의 한계를 알고 살자!

모세가 쓴 유일한 시편인 시편 90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시 90:12 → “우리에게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기 “날을 계수 한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나의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말년에 이른 모세는 자신의 ‘남은 시간’을 늘 따지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므리바’ 사건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반복되는 백성들의 불순종과 원망의 태도에 화가 난 나머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민 20:12 →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너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나안 땅 입구까지만 가고, 거기서 너는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곳! 느보산 꼭대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본 후에 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므리바 사건 이후, ‘모세의 시간 계산’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할 때가, 바로 자신이 죽을 때임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모세는! 하루씩 줄어가는 자신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모세의 날은 그만큼 줄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줄어드는 날들을 생각하는 그에게,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모세의 ‘날 계수함의 지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모세만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나안 땅은 ‘천국’입니다. 모세의 날들만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날들도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루씩 줄어드는 계산은 기쁜 일일까요? 아니면 괴로운 일일까요? 제대 날짜를 기다리는 군인들은!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시간 계산도! 바로 제대 날짜를 기다리는 군인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우리는 천국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고, 앞서간 성도들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뇨?” 사실 이 질문은 애굽의 바로 왕이,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 물은 질문입니다. 국무총리였던 요셉은 아버지를 바로 왕 앞에 모셔 “이분이 저의 부친이옵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아마 야곱의 얼굴에는 산전수전을 겪어온 인생의 자국이 거칠게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대뜸 바로 왕이 야곱에게 묻기를 “그대의 나이가 얼마뇨”라고 했습니다.

그때 야곱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창 47:9 →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이 얼마나 실감 나는 표현입니까?

그런데! “네 나이가 얼마뇨?” 이 말은 단순히 나이를 묻는 말만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① 그동안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느냐? 는 질문이기도 하고, ② 지금 너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느냐? 는 질문이기도 하고, ③ 또한 앞으로 너는 어떤 인생을 살 계획을 하고 있느냐? 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시간을 역으로 계산하면서 살아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대단히 큰 유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나간 세월’이 아니라, ‘남아있는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남은 세월 동안에 잘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겔 18:24 →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반면에 지난날에 잘못 살았다고 하더라도, 남은 세월 동안 잘하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습니다. 겔 18:21 →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남은 세월’이 중요합니다. 지난 세월을 자랑할 것 없습니다. “미래는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입니다. 미래는 아름다운 과거도 지웁니다. 반대로, 미래는 부끄러운 과거도 지웁니다.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전 인생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쪼록! 부끄러운 과거는 지우고, 아름다운 인생을 써가는 우리의 남은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 네 나이가 얼마뇨? - 우리의 영적인 나이는 몇 살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경험을 한때는 언제부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씨름을 통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기도로 승리했습니다. 브니엘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영적으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를 쳐서 환도뼈(대퇴골)가 위골(違骨)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다리를 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야곱으로 하여금 성숙케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겪는, 환도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고통과 아픔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냥 의미 없는 아픔일 뿐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믿고, 내 열심을 믿고, 내 능력을 의지하던 모습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바꾸어 가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면! 그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드리는 것이, 진정 축복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올 한해를 공쳤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혹은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건강을 잃으셨습니까? 아니면! 내일의 문제 때문에,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불안하십니까? 그러나 야곱을 보십시오. 바로의 눈에는 초라하게 보였고, 스스로도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한 야곱이, 왕궁을 떠나면서 바로 왕을 축복합니다. 창 47:10 →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애굽 왕을! 보잘것없는 늙은이요, 외국에서 이민 온 야곱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축복할 수 있습니까? 내가 가진 것이 더 많고 풍성하다고 믿을 때, 남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현실은 지금 가난한 사람입니다. 바로에게 땅을 얻어야 하고, 양식도 얻어야 살아갈 수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 복의 근원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자신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축되지 않았고 당당하게 바로 왕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중반까지 야곱은 ‘받는 자’ ‘빼앗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빼앗고, 취하고, 모으는 것이, 얍복강까지의 야곱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때부터 서서히 ‘주는 자’로 변신해 가기 시작합니다. 창 49장을 보면 야곱이 죽음 직전에 최후로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녀 손들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녀들을 축복했습니다. 모든 것을 주고 간 것입니다.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 그가 전도서를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전 12:13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어린아이같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어른 같은 성숙함으로 나아갑시다.

사도 바울도 일에 대한 욕심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냉철했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3:11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네, 성숙한 신앙인답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어른이기에 못하는 것도 있어야 하고, 참아야 하는 것도 있어야 하고, 손해 보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목사이기에, 장로이기에, 권사이기에, 집사이기에, 성도이기에 못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안 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손해 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신앙인이기에 해야 할 일이 있고, 손해 봐도 감수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함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하여 드리는 삶으로의 ‘방향 전환’과 ‘나아감’이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제대 날짜를 기다리는 군인같이, 나의 남은 인생의 날을 세어 가며 산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나눠봅시다.

 

2. 여러분이 겪는,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지는 것과 같은 고통과 아픔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영적으로 유익할 것에 대해 나눠봅시다.

 

3. 나잇값은! 도리를 알고 실천하여 인격이 존경받는 삶의 가치입니다. 내가 영적 나잇값을 하는데 부족함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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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4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복종하는 지혜를 얻으려면! (전 8:1∼8)

 

우리의 매일 매일의 일상에,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겠다는 삶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종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세 가지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말씀의 지혜로 내 삶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전 8:1 →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어떤 문제가 바르게 해석되지 않으면, 그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이런 의문을 갖게 될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래도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왔는데! 불신자들도 당하지 않을 일을, 하나님은 왜 나에게 허락하셨는지? 나쁘고 거짓되게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형통하는 것 같은데! 성도요, 집사요, 권사요, 장로요, 목사인 나는! 왜 이렇게 일이 풀리지 않는지? 의문을 가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삶이 답답하고, 때론 신앙에 회의가 밀려오기도 합니다. 혹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의 문제와 숙제가, 말씀을 통해 깨달음이 오고, 그 문제의 뜻이 해석될 때! 본질적으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아! 이 고난 속에는 이런 하나님의 뜻이 있구나!” 이렇게 문제가 해석되고, 깨달음이 오고, 해결된 사람의 특징은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얼굴’은 우리 내면의 ‘얼의 꼴’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내 삶의 문제와 의문이 해석되면! 그때부터 ‘얼굴에서 빛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고난과 어려움으로 사납게 변한 얼굴이어도, 얼굴이 해처럼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해석되면! 더 이상 고난 가운데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로 삶이 해석되면! 얼굴에 광채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고난으로 지치고 각박한 현실 앞에 사나워졌던 얼굴이 변하여 평안하게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의 삶은, 말씀으로 해석되고 계십니까? 또 온전히 말씀 앞에 서 계십니까? 그리고 나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어둡게 하고, 굳어지고, 사납게 만드는 사람입니까?

모쪼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내 인생에 내가 선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섭리와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 사람임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주님! 이 일에도 하나님의 뜻이 계심을 깨닫습니다. 미련하여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짜증 부리고, 화를 내고, 얼굴은 굳어지고, 사나워졌던 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겠습니다. 이런 참 지혜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셔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복종하는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이 100% 옳으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2절입니다. 전 8:2 →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왕의 명령을 지키는데! 왕의 무서운 권세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맹세! 그 권세와 권위를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그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롬 13:1∼2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그렇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 때문에 순종할 수 있어야!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명령과 질서를 따라야 함과 같이! 부모의 질서에, 남편의 질서에, 가족의 질서에, 교회의 질서에, 직장 상사의 질서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유교적 질서’를 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의 순종은! 이런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이 100% 옳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에 기초하여’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이니 억지로라도 순종 해야 한다! 생각하고 순종하지만, 해도 해도 안 변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결국 포기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반복됩니다. 가만히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그 순종은 인간적인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00% 옳으신 말씀이라는 ‘신앙고백적인 순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인정하고 받아줄 수 없는 부모님의 강압, 배우자의 외도, 도박 중독, 감당할 수 없는 자녀의 불순종, 뜻하지 않은 질병과 사고, 갑작스런 죽음 … 이런 인생의 문제들이 나에게 닥칠 때마다, 넘어지고 상처 입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광풍과 같은 사건들이 내 앞에 닥쳐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100% 옳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나아가게 되면, 때가 이르매 그 광풍과 같은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그런 일을 만나게 하셨는지? 말씀으로 해석이 되는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은혜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3∼4절 말씀입니다. 전 8:3∼4 →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나보다 능력 있고 힘 있는 사람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괴롭고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질서 속에 잘 머물러 있어야만 배울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잠잠할 때와 말할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되고, 행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게 되고, 내가 그 위치에 있게 될 때 ‘나는 어떻게 하리라’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3∼4절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대입해서 풀어보면 이런 말입니다. 직장 상사가 부당하게 나에게 대하고, 시어머니나 시누가 괜한 꼬투리를 잡아 속을 뒤집어 놓고, 내 편을 들어줘야 할 남편이 그야말로 남의 편을 들어주고, 자식들은 아버지인 나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듯하고!… 설령 이런 일이 일어나도, 쉽게 화를 내고 뛰쳐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100% 옳으신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매, 다 드러나게 하시고, 풀어 주시고, 세워 주시는 날이 올 것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도저히 하나님이 100% 옳다고 인정할 수 없는 사건과 문제, 고난들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입으로는, 겉으로는!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다 옳으신 건 아니야. 하나님이 틀리셨어. 이 일은, 이 사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이렇게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기 때문에, 또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100% 옳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보다는 나의 판단이 앞서고, 나의 행동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적인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믿음을 약화시키고, 심령의 평안을 흔들어,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광풍은 여전히 나에게 계속되고,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를 빼앗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다 판단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100%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복종하는 지혜를 얻으려면!) 때와 판단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전 8:5 → “5.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인생의 시기마다 주어진 질서와 역할에 순종하는 자는 불행을 겪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적으로 볼 때 무조건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말씀에 순종하며, 때와 판단을 분별해도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씀으로 해석 받으리라!’ 하며, 묵묵히 인생길을 가다 보면, 반드시 해석되는 날이 올 것이며, 그것은 우리를 평생 흔들리지 않게 하는 신앙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때와 판단을 아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생의 때와 판단을 가장 잘 아시는 지혜자 중의 지혜자이십니다. 지혜!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고, 그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으로 인류를 구원하셨고, 또한 순종으로 인해! 그 이름 앞에 모든 사람들이 무릎 꿇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때와 판단을 누구에게 묻고 계십니까? 여러분 스스로 독단으로 결정합니까? 아니면 세상 전문가입니까?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성경을 해석하도록 세우신 주의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지금 내 얼굴은 사나운 얼굴인가요? 아니면 광채가 나는 얼굴인가요? 아직 해석이 안 되어, 해결되지 않는 나의 고통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당신보다 힘 있고, 능력 있는 권세자는 누구입니까? 그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싫어서, 뛰쳐나가고 싶은 적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렇게 실행 했을 때의 결과를 나눠봅시다.

 

3. 당신은 하나님이 100% 옳으심을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의 판단과 경험을 더 의지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은 바를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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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4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자족하는 행복 ! 

(전 4:4∼8, 잠 30:7∼9, 빌 4:11∼12)

 

1. 솔로몬의 자족에 대한 고백

솔로몬이 누린 부귀와 영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전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정점은 10절입니다. 전 2:10 →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한 마디로 눈이 원하는 것! 마음이 원하는 것! 모든 것을 다 구비하고 누리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인생 전체를 살펴보면, 그 부귀와 영화 때문에 그의 인생 결말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누리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누구든 공허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 것으로 겉을 치장해 보아도, 속은 언제나 공허합니다. 전 1:8 →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영혼의 공허를 채울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온갖 것들로 공허를 채우려 했으나, 부질없는 짓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 말년에 쓴 것이 전도서입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 1:2∼3 → “전도자(솔로몬)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오늘 본문인 전 4장에서도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전 4:6∼8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 4:8b →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vs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성도 여러분! 솔로몬을 통하여 이 진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손에 쥐려고 하는 마음을 통해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두 손에 다 쥐려고 하지 않고, 한 손의 것은 이웃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 나눌 때, 거기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앎이나 지식적인 믿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받는 기쁨’에서 ⇨ ‘나누는 기쁨’ ‘주는 행복’을 실천하고, 또한 자녀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에게 부탁드립니다. ⇨ 다가오는 성탄에 식구들과 자녀손들에게 선물을 준비하실 때, 추가로 1개를 더해서 교회로 가져오시면! 불우이웃과 시설 아동을 위해 전달하겠습니다. 장난감이든! 동화책이든! 어떤 것이든 환영합니다. 대상이 마땅치 않아 선물을 준비할 계획이 없는 분들도 ⇨ 주보에 넣어드린 ‘성탄 사랑나눔 봉투’에 헌금해주시면, 역시! 어려운 이웃과 시설에 전달하는 데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에게만 매여 있으면 안 됩니다. 이웃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눈을 떠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혼자 소유하고 누림으로 만족하려고, 경쟁과 아귀다툼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위로부터 주시는 만족과 충만함을 누리고, 주신 것을 나누는 행복을 사모하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굴의 소원을 우리의 소원으로!

아굴은 먼저 7절에서 이렇게 기도의 문을 엽니다. 잠 30:7 →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이어서 8절과 9절에서 자신의 기도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한나처럼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히스기야처럼 죽을병에서 낫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상황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도 아닙니다. 아주 ‘순박한’ 기도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라는 말로, 그 속에 ‘간절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이어지는 기도입니다. 잠 30:8b∼9 →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8절을 보면, 전반부에서는 ‘~을 내게 해주지 말라’는 소극적인 요청의 기도를 드린 후에, 후반부에서는 ‘~을 허락해 주시옵소서’하는 적극적인 요청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먼저 내게 있는 부조리한 것을 제거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받겠다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언뜻 생각하면, 적당히 중간 정도로만 살게 해달라는 기도처럼 생각됩니다. 물론 그런 뜻도 있겠습니다만! 더 깊은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잘 살고 못 사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즉 잘 살아서 하나님이 누구냐?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만용을 부리면서, 하나님을 떠난 자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잘 살고 똑똑하며, 많이 배움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오라는 곳이 많아지는 환경은 하나님을 떠나기 좋은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내가 잘살든 못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삶이 하나님을 떠나는 불신앙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하나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인간의 한계를 잘 아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드리는 기도이며, 하나님을 떠나면 결코 바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드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아굴의 생각은 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므로 인해 하나님을 멀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부자 된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부자인 사람이 아무런 연고 없이 순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은 드문 일이 분명합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9:24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아굴이 염려한 것은! 세상적인 탐욕으로 얼룩진 부를 축적하게 되면, 한편으론 양심에 걸림이 되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피하게 되든지, 아니면 자기 능력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됨을 걱정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재물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어 영혼을 망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진정 행복한 부자는! 모든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개인의 부를 인정하지만, 재물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실 앞에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대상 29:12입니다. →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아멘.

여러분의 계획으로, 여러분의 머리로, 인생을 계산하지 마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를 의지하여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도 바울의 자족함에서 오는 행복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빌 4:12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참으로 귀한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나친 욕심 때문입니다. 나에게 없는 것만 보지 말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에 집착해서 가슴 아파할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족은 소유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자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삶의 방식처럼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의 형편과 상황에 자족한다면,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보여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계신 곳에, 행복과 기적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육신을 입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요가 충족되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전 6:6~9 →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만족과 행복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만족과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소유와 누림’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전도서 마지막에 이렇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전 12:1 →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심령에 있어야 공허가 채워지고 만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명한 시편 23:1에서는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했고, 고린도후서 3:5에서는 →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 붙들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모든 것을 다 구비하고 누리면, 만족하고 행복할 줄 알았던 솔로몬의 인생관과 자신의 현재 모습과 비교해 봅시다.

 

2. 받는 기쁨에서 ⇨ 나누는 기쁨, 주는 행복을 실천할 계획을 세워보고, 또한 자녀손에게도 격려합시다.

 

3. ‘아굴’과 ‘사도 바울’의 인생관과 삶의 방식에서, 자신이 따르고 배울 것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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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7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임 마 누 엘! (마 1:18∼23)

 

오늘 본문 말씀인 마 1:23을 보면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면서, 그 뜻을 풀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이 말씀에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위로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야드 바셈’(Yad Vashem)이라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기억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히틀러 시절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절대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하자는 뜻에서 세운 기념관입니다. 내부를 관람하고 바깥으로 나오면, 한 어른이 어린 학생 10여 명을 끌어안고 있는 조형물이 있습니다. 코르작(Janusz Korczak)은 폴란드의 동화작가이며 선생님이었습니다. 나치가 폴란드의 유대인 학교를 급습했습니다. 교실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이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코르작은 아이들을 양팔로 감싸 안으며 안심시켰습니다. 독일군 장교가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선생은 물러나고, 유대인 아이들만 내놓으시오!” 그러나 코르작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끝내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탑니다. 스승으로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마침내 가스실에도 함께 들어가,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줍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말합니다. “선생님,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끝까지 선생님이 함께해 주시니 평안해요. 하나님이 지켜주시니 더는 두려워 떨지 않을 거예요.” 네! 이 코르작 선생님은 ‘임마누엘’ 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표현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즉 임마누엘의 은혜를 힘입은 사람은 평안하고, 담대하고, 기쁨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성하게 됩니다. 역대상 11:9에 →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강하게 된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다윗은 양치기 목동 출신이었지만,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신 까닭에 그를 해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죽이고 나라를 구했습니다. 다윗은 군인으로서 수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윗을 대항하여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13:6 →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또한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 5:18 →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한 마디로 노터치(No Touch)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다지’라는 말 아시죠? 금덩어리, 금맥이라는 말입니다. 구한말 평북 운산에 금광이 있었는데, 이 운산 광산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금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큰 금광이었습니다. 당시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었는데, 미국 사업자가 금광채굴권을 따냈습니다. 미국인 감독이 조선인 인부들을 데리고 작업을 하다가 금덩어리가 나오면 상자에 담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노터치!’ 이 말이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노다지’로 들린 겁니다. ‘노터치!’ 무슨 말입니까? “내 것이니까, 건드리지 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를 이렇게 금덩어리 같이 대우하십니다. 이사야서 43:1입니다. →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어서 4절에서는 →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세상의 어떤 문제와 마귀의 시험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을 누가 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변함없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유언이 된 말씀입니다. →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런 ‘임마누엘’ 은총을 힘입을 수 있을까요?

마 1:19입니다. →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말씀에서 성경은 요셉을 가리켜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첫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라는 처녀와 약혼했는데, 어느 날 약혼자인 마리아가 자기와 상관없는 아이를 뱄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약혼자가 남의 아이를 가졌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요셉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그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며, 그가 낳을 아기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만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이,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리아에 자신에 대한 신뢰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마리아에 대한 동정심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기쁜 마음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마 1:20∼23절의 말씀은, 천사가 요셉에게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사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사 7:14(마 1:23)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사야 7:14의 말씀을 마태가 인용하여 마 1:23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요셉에게 먹혀 들어갔습니다. 말씀이 먹혀 들어가는 마음은 복 있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쌓인 사람들! 쓸데없는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겐 말씀이 먹혀 들어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보세요. 말씀을 잘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과 같이! 말씀에 대한 수용력이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못 믿을 일을, 요셉은 주의 사자의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즉시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 “성탄에 있어서 가장 큰 기적은!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한 것이 아니라, 요셉이 그러함을 믿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한 것보다 더 큰 기적은, 바로 그렇다는 것을 믿은 요셉의 믿음입니다.

결국 이 믿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요셉 같이 말씀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또한 그런 사람과 임마누엘로 동행하시길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요셉은 ‘살리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당신이 사랑해서 결혼하기로 결심한 약혼자에게, 다른 연인이 생겼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지 않습니까? 요셉에게도 이 일은 너무나 큰일이고 놀랄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마리아! 그녀는 순결한 여인이 아닌가? 그런데 애라니? 의분이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율법이 정한 방법대로 처리하고픈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내가 그렇게 한다면 마리아는?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당할 수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하게 이어져 갔습니다.

분명한 것은, 요셉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침착하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베풀기 위해 고민하였습니다. 마 1:19절에서도 →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여기 ‘생각했다’는 말은 ‘고민했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한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은 요셉의 입장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그날로 파혼을 선언하고 마리아를 율법에 고발하면 됩니다. 마리아의 임신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민’하였습니다. 자기를 위한 고민이 아니라, 마리아와 그의 가족을 위한 고민이었습니다. 이렇게 남을 위한 고민이 있었기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려졌던 것입니다. 잠 17:9절에 보면 →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했습니다.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주려는 의로운 마음을 가진 요셉!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과 ‘임마누엘’로 함께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요셉을 본받아야 합니다. 요셉과 같이 거룩한 고민과 침착함, 배려를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관계를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셔서, 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문과 묵상

 

1. 하나님의 지켜주심과 보호로 인생의 위기를 벗어나, 임마누엘 하나님을 경험한 이야기들을 나눠봅시다.

 

2. 반대로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시간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렇다면 그것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지 나눠봅시다.

 

3. 오늘 설교 중에 당신의 마음에 와닿는 말씀이나 사람이 있다면 무엇이고, 누구이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