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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이재영
2024-01-13
조회 165

제목: 거룩한 루틴 만들고 확장하기! (고전 14:40, 눅 22:39∼40)


오늘은 ‘교회창립 49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동안 우리 자신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 왔다면, 이제 창립 50주년, 희년(禧年)을 맞이하는 우리교회는 더 많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선한 영향력을 펼쳐가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성숙’시켜 가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의 거목으로 자라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성도들 전체가 ‘엘림의 숲’을 이루어서, 풍성한 ‘열매’와 ‘그늘’과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의 사명을 재확인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웃들이 칭송하는 아름다운 교회,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성도들로 자라 가는, 은혜와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거룩한 루틴(routine) 만들기

강연이나 인터넷에서 ‘자기 계발’을 주제로 강의하는 분들이 강조하는 말은 “루틴(routine)한 일 말고, 창의적인 일을 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 제목에도 들어 있는 이 ‘루틴’(routine)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 이것은 ‘어떤 일을 꾸준히, 주기적으로 하는 습관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분초가 다르게 아주 빨리 변해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 아이템, 혁신적인 프로젝트에 목말라 하는 것이 세상의 흐름입니다. 그래서 루틴을 지켜 간다는 것은, 그저 판에 박힌 일상이어서! 지루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이러다가 세상에서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날마다 새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루틴’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서 날마다 새로 시작하고, 변화를 주어서, 달라지고 좋아진 것이 있습니까? 많이 있을 것 같지만! 실은 별로 없습니다. 2박 3일 바짝 뭘 해서는! 인식을 새롭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열매를 맺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인생을 바꾸고, 인생의 열매를 맺는 일은! 꾸준하게 변함없는 일상성으로 지속하는 일이 결국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DNA는 ‘빨리 빨리’는 잘하는데! 변함없이 꾸준하게 ‘일상성을 유지하는 일’은 잘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반짝하는 이벤트는 잘하지만! 성경적인 것을,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은 잘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질이 우리에게 있지만!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이벤트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거룩한 습관이!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합니다. 거룩한 루틴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루틴(routine)을 만들고 잘 지켜서! 그것이 자연스런 ‘습관’이 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오늘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도! 어디 뷔페에 가서 배 터지게 한번 잘 먹었다고 쑥 크는 게 아닙니다. 매일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꾸준히 먹으므로 건강하게 크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밭’도 비료 한번 잘 줬다고 해서 금방 옥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돌보고 가꿔야 옥토가 되고, 또한 옥토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 “세상에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이제 ‘거룩한 루틴’을 만드는 것, 두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습니다. 눅 22:39∼40 →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여기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라는 말은! 규칙적으로 꾸준히 ‘기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거룩한 습관, 거룩한 루틴을 따라 사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결심해야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당부를 기억하고, 매일의 시간 중에 어느 때 기도할 것인지를 정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생활이 나의 삶에 완전히 장착될 때까지, 일관되게 꾸준히 해서 거룩한 루틴이 되게 해야 합니다.

둘째, 성경 읽기입니다. 여기에는 ‘암송’과 ‘필사’까지 포함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완독할 작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꾸준하게 4장씩 읽고, 1절씩 암송하는 것이 습관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성경을 매일 읽는 것이 ‘습관’이 되기까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2∼3년이 걸립니다. 거룩한 습관이 몸에 익숙해지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 인생길을 비춰주는 등불이요, 바른길로 인도하는 나침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책의 사람!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기독교인의 ‘교과서’입니다. 교과서도 안 읽고 좋은 학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꼭 내 하루 일과 중 ‘어느 시간은 성경을 읽는 시간이다!’ 스스로 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잘하다가도, 이런 습관이 무너지는 것은 채 한 달도 안 걸립니다.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루틴을 지켜 가고,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습관으로 굳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매일 매일 게으름과 미루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만 합니다. 인간의 결심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것을 우리들은 다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만!’ 이런 말에 타협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넘어진 뒤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처음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모든 성도님들이 ‘거룩한 습관’을! 삶에 장착하는 2024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거룩한 루틴 확장하기


먼저, 나눠드린 ‘2024년도 목회 중점’이란 종이를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2024년 표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영역별 실천 과제>


여기 크게 ‘다섯’가지 ‘영역별 실천 과제들’을 표로 정리해 드렸는데! 우선은 ‘개인이 해야 할 일들’ 6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가 ‘영적밥먹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면! 약 40분 정도의 시간에 성경 읽기, 암송, 기도를 한 세트로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새가족교재’를 보시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개 ‘새가족’이 아니시기 때문에, 이 교재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 교회 홈페이지 ‘교회소식’란의 ‘자료실’과 ▶ 교회 밴드의 맨 위에 ‘공지’로 올려놓았습니다. 아직 밴드에 가입하지 않으신 분들은! 이 기회에 다 가입하시길 바랍니다. 방법을 모르시면! 교역자나 새가족 위원들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① ‘개인’이 결심하고 해야 할 일들에 이어서, ② ‘가정적’으로 해야 할 일 ③ ‘속회’와 ‘선교회’에서 해야 할 일 ④ ‘교회’ 전체적으로 진행되는 일에 참여해야 할 일 ⑤ ‘사회생활’ 속에서 개인이 해야 할 일, 이렇게 다섯 가지 영역으로 과제를 요약해서 실어 놓았습니다.

개별 항목으로는! 무려 16가지나 됩니다. 이걸 한꺼번에 다 하려고 하면 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 영역에서 한가지씩 시작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고르기 어려운 분들은 맨 앞에 있는 ① 번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 어떤 한 가지 거룩한 습관! 그것이 기도이든, 성경 읽기든, 암송이든, 일천번제든, 소그룹참여든!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 거기서 멈추지 말고, 또 다른 거룩한 습관을 추가해 나가야 합니다. 거룩의 시간을 조금씩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16가지 모든 일들이 내 일상의 삶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실천케 되는 ‘루틴’이 되고 ‘습관화’가 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성숙한 신앙인 되어, 남들이 알아보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적으로는 이 모든 영역의 일들을 8개 소주제로 나누어서 1∼6월, 9∼10월에 한 가지 주제씩 강조해 나갈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나눠드린 2024년 목회계획표! 를 참고하세요.>

※ 교회홈페이지 교회소식란의 ‘공지사항’에도 연간 목회계획표가 올라가 있습니다.

※ 교회 밴드에도 맨 위쪽에 연간 목회계획표를 올려 놓았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개인적인 거룩한 루틴을 만들고, 교회적인 영성확장 운동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분량에까지 이르는’ 2024년이 되어서,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세상에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라는 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나 경험에 대해 나눠 봅시다.


2. 오늘 설교를 통해 거룩한 루틴(습관)을 만들거나 확장해야겠다고 생각한 영역(기도, 성경 읽기, 전도 등)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교회에서 계획한 여러 가지 신앙프로그램 중에 개인적으로 꼭 참여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다면, 이에 대한 각오와 기대를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4-01-06
조회 172

제목: 품위 있고 질서 있게! (고전 14:40)


이번 토요일(13일) 오전 9시 30∼12시 30분까지 부천서지방 사경회가 우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사경회(査經會)란? ⇨ 조사 사(査), 글(성경) 경(經), 모일 회(會) 자(字)를 써서! 성경 말씀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우는 시간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한국교회는 이 사경회를 통해서, 성경을 잘 공부해서 ① 영적 각성과 ② 생활의 쇄신을 도모하고 ③ 신앙심을 깊게 하여, 교회의 질적 성장을 이루어 왔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참여한다는 마음으로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새해 표어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고전 14:40입니다. →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사도 바울이 교회와 성도들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1. 품위 있게 살라!

일반적으로 ‘품위’하면 얼른 떠오르는 생각은! ‘옷을 잘 입고, 젠틀하게 행동하는 것’이 품위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품위 있게 하라”는 것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옷을 잘 입고 교양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정도를 넘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신앙적인 관점에서 ‘품위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위는!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곧 품위 있는 삶입니다.

오늘 주제인 ‘품위’와 ‘질서’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But everything should be done in a fitting and orderly way. 먼저 ‘품위’라는 말을 in a fitting 했는데, 여기 ‘Fitting’이란 말은! 여러분이 옷을 구입하러 가서 옷을 고르면, 옷이 자기 몸에 잘 맞는지 안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입어보는 작은 방을 ‘피팅룸(fitting room)’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양복도 맞춤 양복보다는 기성복을 사 입는데! 옷을 맞출 경우엔 몸 치수를 재고 며칠 뒤에 ‘가봉’을 하게 됩니다. 이때 가보면 아주 엉성한 옷을 가지고 나와서 입어보게 합니다. → 이때 어깨나 허리는 잘 맞는지? 소매 기장이 맞는지 살펴보고 ‘실핀’으로 잘 맞게 조절합니다. 이 가봉(假縫)을 일러 ‘fitting’이라고 합니다. 가봉을 하고 나서, 옷이 다되어 입어보면! 아주 깔끔하고 몸에 잘 맞는 어울리는 옷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면 품위도 있고, 맵시도 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가 ‘품위 없는’ 교회로 책망을 받게 된 까닭은! 무분별한 은사와 자기중심적 생각에 따른 결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도와 교회의 품위는, 성령께서 내 마음에 주시는 말씀과, 성경책을 통하여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성도로서 제 본분을 잘 감당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사회에서 ‘품위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한 사람의 ‘품위 없음’으로 인해서, 그가 속한 조직과 공동체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품위가 느껴지는 사람을 보면! 존중감이 가고, 신뢰가 가고, 호감이 갑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적대감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독교’로 취급받는 것은! 기독교 자체와 성경의 권위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답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아, 성도다운 ‘품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품위는 어떻게 드러나게 됩니까? → 그것은! 우리가 좀 더 온전한 성도가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서 ▸확실한 신앙적 가치관을 세우고 ▸그렇게 살아갈 때,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딤후 3:14∼17 →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①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②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③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2024년 새해에는, 성경의 기준에 우리를 맞춰 가는 가봉 Fitting을 잘해봅시다. 그래서 말씀의 사람!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실천해서 “참으로 품위 있는 꿈마을엘림교회 성도”라는 칭찬을!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듣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질서 있게 살라!

‘질서’는 → ‘차례 질’(秩) ‘차례 서’(序)자입니다. 즉 ‘차례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리와 순서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존재 자체가 삼위일체! ⇨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位格)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하나를 이루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사역도! → 혼돈과 무질서의 카오스(Chaos)를, 질서정연하고 보시기에 좋은 코스모스(Cosmos) 우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창 1:2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성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 1:3∼4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래서 우주 만물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은! 품위가 있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금년 우리 교회 표어를 정하고, 그 표지 디자인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을 바탕으로 한 것도, 그런 뜻이 있습니다. 산과 들과 물과 하늘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 아름답습니다. 거기에 이 자연을 ‘아름답게 관리하라’고 맡겨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고 가꾸어 가자!’는 의미로 중간에 ‘포도원’을 배치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자연과 해와 비와 바람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지만! 포도밭까지 만들어 주시지는 않습니다. 포도밭은! 우리들이 땀 흘리고 수고해서 ‘만들고 가꿔야’ 거기서 맛있는 포도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글로 씌여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지만, 그 말씀을 읽고 필사하고 묵상하고 암송해서, 그 말씀이 내 심령에서 살아 역사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사경회’도 참석해야 되고, 성서대학에도 등록해서 배워야 하고,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으로 은혜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딴 길로 빠졌지만! 만일, 해와 달과 별들이 무질서하게 제멋대로 운행된다면! 우주는 대혼란에 빠지고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과 우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 질서를 이룰 때, 몸이 건강합니다. 그러나 지체들이 균형을 잃고 무질서해지면, 병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질서를 이루는 곳입니다. 반면에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사탄을!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던 천사가 타락한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깨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려고 한 존재가 사탄입니다.

마귀(魔鬼), 악마(惡魔)를 → 영어로는 데블(Devil)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히브리어는 사탄(שָׂטָן), 헬라어로는 디아보로스(διάβολος)라고 해서 마귀(魔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탄과 마귀는 동의어이며, 사탄은 히브리어이고 마귀는 헬라어인 것입니다.

즉, 마귀란 단어인! → (헬)디아보로스(diabolos) ⇨ ‘dia’(사이에) + ‘bolos’(던지다) = 사이에 끼어들어 깽판을 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탄 ‧ 마귀’라는 이름의 뜻은! → 이간질하는 자, 분열시키는 자, 다툼을 만드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열과 다툼! 그 자체가 사탄의 현장입니다.

그 ‘사탄 ‧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려 혼란을 만들려고 합니다. → ① 하나님과 ↔ 사람의 아름다운 ‘믿음의 관계’를 깨뜨리고, ② 사람과 ↔ 사람의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고, ③ 사람과 ↔ 자연의 ‘상호의존과 돌봄의 관계’를 깨뜨리려고! 이간질하고, 미혹하고, 욕심을 부리게 하는 존재가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탄의 궤계는 결국 파멸되고, 사탄은 그야말로 무질서와 고통의 대표인 지옥 무저갱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내용을 보면! ⇨ 모두 다 ‘무질서를 질서로 회복시키시는 일’이었습니다. ▸병든 자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귀신 들려 어지러운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평안을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어 배부름의 평안을 주셨습니다. ▸죄에 눌려 있는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며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온전함으로의 회복’을 이루는 역사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자기가 익숙한 것을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 사탄이 이끄는 세상에 익숙한 삶은 ⇨ ‘타락한 삶’입니다. 자기 맘대로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 하나님께서 이끄는 세상에 익숙한 삶 ⇨ ‘경건한 삶’입니다. 말씀에 따른 삶을 살기 위해서 경건 훈련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사탄이 이끄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끄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에게 주신 ‘표어’를 함께 크게 외쳐보겠습니다. → 품위 있고 질서 있게!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이! 품위 있고 질서가 있도록 열심을 내는 한 해가 되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① 영적 각성과 ② 생활의 쇄신을 도모하고 ③ 신앙심을 깊게 하여, 질적 성장을 이루는 기회인 사경회 (査經會)에 참석하도록 서로 격려합시다.


2. 품위있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내 삶의 어떤 점을 가봉(fitting)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 그 결심을 나눠 봅시다.


3. 나의 신앙생활에 있어 균형을 잃고 무질서해서, 아름답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한 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고쳐갈 결심을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3-12-30
조회 190

또 다른 출발을 위하여! (빌 3:12∼16)


2024년 새해를 맞이하며 또 다른 출발을 위하여 우리는 어떤 생각, 어떤 실천적 결단을 해야 할까? 오늘 사도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거룩한 부족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설립자였던 사도바울은 그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직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완전히 다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에 있어서 미완성 단계에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빌 3:12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이런 사도 바울의 ‘미완성 의식’, ‘거룩한 부족 의식’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운동선수가 자신의 현재 기록에 만족한다면! 그에게서는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기록에 만족하지 않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현재의 기록을 갱신하려고 하는 선수에게만 진보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업을 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기술의 배우는 것도, 새로운 래시피의 음식을 배우는 것도! 미완성 의식, 거룩한 불만족을 가지고 계속해서 진보해 가야, 사업도 더 발전하고, 공부도 더 잘하고, 더 맛있는 음식이 탄생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에 하나였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계 3:17a →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주님의 진단은 달랐습니다. 계 3:17b → “너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미 다 된 것처럼,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엄중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실 신앙도, 교회생활도 ‘나는 잘하고 있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과정을 마쳤거나, 어떤 체험을 하고 난 후 ‘나는 다 안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내면적으로는 교만이 싹트고 외부적으로는 판단자로 서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영적 상태나, 성도로서의 삶에 대하여 ‘거룩한 불만족’, ‘부족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비전 ‧ 비전(Vision)! 하는데, 이 비전도 실은! 오늘 나의 삶에 대한 거룩한 불만족을 뜻하는 것입니다.

월트 디즈니란 사람이 서른다섯 살 때, 두 딸을 데리고 놀이공원엘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공원과 놀이 기구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야! 이거 너무 재미없다. 그리고 왜 이렇게 지저분하고 더럽지? 좀 더 밝고 깨끗하고 재미있는 멋진 공원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곳의 놀이공원에 대한 창조적인 ‘부족 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족한 것에 대하여 ‘불평 의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불만, 거룩한 불만은 어떤 현상에 대하여 단지 불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월트 디즈니는 18년 뒤 ‘디즈니랜드’라는 꿈의 놀이동산을 세우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더 알아 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에 대하여!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주님을 닮고자 하는 인격에 대하여! 거룩한 부족 의식, 미완성 의식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더 크고 넓은 마음을 주시옵소서. 환경을 뛰어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영적 거장이 될 수 있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보와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창조적 단절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3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 3:13b →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여기 ‘잊어버리고’라는 말은, 단순한 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의해서 더 이상 지배받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도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자신은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확신의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고후 5:14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렐루야!

이 확신은! 구약성경 이사야 43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포로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들의 잘못과 실수를 깨닫고 큰 죄책감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주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사 43:18∼19 →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사 43:25 →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아멘.

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과거 모든 죄도 용서되었음을 확신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그는 과거의 죄와 허물에 짓눌려 무기력함에 빠져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붙잡고 담대히 ‘사명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저와 여러분의 죄도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와 허물이 다 용서되었음을 믿고, 자유와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실패도, 부족함도 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자기 정죄와 열등감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것을 나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되씹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겠다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빌 3:13b∼14 → “(나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저와 여러분 역시! 과거의 부족과 허물과 죄에 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고, 부탁하시고, 기대하시고 있는, 사명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목표에 대한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오직’이란 단어를 3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빌 3:12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3 →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6 →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바울은 ‘오직’이라는 이 말을 통해서! 목표에 대한 자신의 ‘집중력’을 아주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모습에 안주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자기 발전과 성숙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2절 마지막 부분에, “달려가노라”는 표현은 이전 개역 성경에서는 “좇아가노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냥개가 표적을 따라가듯, 단거리 선수가 자기 몸을 앞으로 쭉 내밀고 두 눈은 푯대, 즉 골인 지점을 집중하여 바라보며 전력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13절의 “잡으려고”라는 말도 같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영적인 지식과 상태가 어느 수준이든 간에, 그 자리에서 목표를 향하여 최선과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봅시다. 나는 지금 현재 상태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핑계 대며 최선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고, 다시 신발 끈을 단단히 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고전 10:12 →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페달, 신앙의 페달을 계속해서 돌려야 쓰러지지 않고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봉사와 기도의 페달을 계속해서 돌려야 합니다. 안주하고 쉬면, 한번 이겼다고 자만하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고 결국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3년을 마치고 2024년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 우리의 사명과,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고, 전심전력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지금의 신앙 상태와 수준으로 만족하지 말고, 거룩한 불만족, 창조적 불만족을 가집시다. 신앙에 방해되는 과거를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창조적인 단절을 하십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과 사명을 대충 대충하지 말고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고, 신앙의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갑시다.

그래서 14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영상을 통해 본 솔개의 삶에 대하여 느낀 바를 나눠봅시다.

 

2. 거룩한 불만족에 대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예를 들자면!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그래도 내가 집사인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그런 거룩한 불만족!

 

3. 내 신앙에 진보가 없었다면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지? 오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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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성탄절 (빌 2:5∼11)

 

오늘 본문은 성도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을 4가지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빌 2:6 →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 ‘취한다’는 말은 움켜잡는다,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고집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고 포기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자기 권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자기주장이 너무나 강한 시대입니다. 고집이 너무 셉니다. 교회에서도 봉사는 열심히 하지만,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을 읽다가 전율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 특히 종의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7절의 말씀을 읽을 때입니다. 그때 이 말씀이 저에겐 “아! 예수님은 ‘동등함에서 스스로 강등되신 분’이구나!”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헌신하기는 하지만, 혹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지는 않습니까? 고집이 세지는 않습니까? 일은 잘하면서도 자존심이 세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주장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지도자일수록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벧전 5:2∼3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사도 바울은 부부 사이에도 서로 자기주장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전 7:3∼4 →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네! 우리의 인격 속에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내 자아가 주장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내 자아를 마음의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권좌에 합당하신 분인 예수님께 그 자리를 내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를 철저히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마구간에 태어나셨고, 일평생 머리 둘 곳도 없이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창 3:5) 이 얼마나 상반된 모습입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낮아지셨고, 인간은 자기 욕심을 채워 높아지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려면! 결국 자기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7절은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빌 2:7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여기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헬라어로 ‘케노오(kenovw)’인데, 통을 뒤집어 쏟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비운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착’은 대부분 욕망이나 탐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욕망이나 탐욕에 빠지면!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해집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살수록! 편안해집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자유롭습니다. 초연해집니다. 마음을 비울수록 오히려 부요해집니다. 마음이 커집니다. 행복지수가 높아집니다.

성도 여러분! 비움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낮출수록 평강이 임합니다. 반대로 위로 올라갈수록 불안해집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공격의 대상이 되고, 비판을 많이 받게 됩니다. 높은 산 정상에는 산소가 희박합니다. 이처럼 올라갈수록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대단한 존재로 여길수록 오히려 불행해집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을 비울수록 낮은 자리에 익숙해집니다. 예수님처럼 어느 자리에서도 자유롭습니다. 말석에 앉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나 자신을 비우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마음을 비우는 데서, 낮추는 데로 더 낮아지셨습니다. 그래서 7절과 8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 2:7∼8 →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성육신’(成肉身)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의인이 죄인이 되신 것이요, 주인이 종이 되신 것이요, 영광을 버리고 부끄러움을 입으신 것이요,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세상에서 하늘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과, 더 우뚝 높아지려는 우월감과 교만함, 그래서 세상은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농구 코치 ‘존 우든’(John Wooden)은 선수들에게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겸손하라. 명성은 인간이 주는 것이니, 감사하라. 자만은 자아가 주는 것이니, 조심하라.” 맞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전 10:12 →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성탄절에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낮아지는 마음’입니다.

미국의 부흥사였던 무디(D. L. Moody) 목사님은, 모세의 생애를 세 단계로 분석해서 말씀했습니다. 모세의 처음 애굽 왕실에서의 40년 동안은, “나는 대단한 존재다!”라고 착각했습니다. 두 번째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광야 40년 동안은,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써 주신다”라는 사실에! 감격하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요즘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가 뭐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나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있어서, 얼마나 겸손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잃어버린 겸손을 되찾는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4.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을 감내하신 분이 아니라, 기꺼이 희생을 치르신 분이십니다. 본문 8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빌 2:8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네! 예수님의 강등의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등은! 잠시 동안 신분이 내려간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극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사랑의 절정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누리게 된 구원은, 우리 편에서는 ‘값없이 받은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게 하신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희생정신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옛날엔 ‘버마’ 지금의 ‘미얀마’ 최초의 선교사로서, 선교하다가 순교한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희생과 순교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별 희생 없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은 그 앞서 희생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만일 어떤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고 희생만 했다면! 그것은 그 후에 올 누군가가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닦아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누군가의 희생 덕택에 성공하게 되든지, 아니면! 우리의 희생이 어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희생과 헌신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열매를 맺습니다.

혹시 우리는 자녀들에게 세상적인 성공만을 위해서! 이기적인 야심만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코 손해 보지 마라. 약아야 한다. 실속이 있어야 한다. 바보처럼 희생양이 되지 마라.” 등등. 이런 가르침은 기독교적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죄사함 받았음을 주지시켜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부활의 승리와 영광을 가져온 발판이 되었음을 마음에 심어주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희생‧봉사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5. 하나님이 높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비워 낮아지시고,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 복종하시고, 자기를 희생하신 예수님!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마침내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겸손한 예수님을 하나님은 높이셔서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요, 망한 사람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이 높여주셨습니다. 빌 2:9∼11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이것이 역설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가 품어야 할 4가지 예수님의 마음을 하나하나 암송해 보십시다.

 

2. 예수님의 마음 4가지 중 내가 품기 가장 어려운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그리고 새 결심을 나눠봅시다.

 

3. 혹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고 행했더니, 인정받고 높여지게 된 경험이 있다면 나눠보고, 모두의 도전으로 삼읍시다.

김성윤
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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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난 후의 욥의 변화 (욥 42:1∼10)

 

욥은 하나님께 ‘동방의 의인’이라고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재앙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때, 고통받는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은 위로라기보다는 충고였고, 책망이었습니다. 번갈아 가며 자신을 정죄하는 가운데, 욥도 억울하기에 맞받아치며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 후 욥은! 지난주에 살펴봤듯이, 나는 의롭고 온전한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고난을 주시느냐고 스스로를 변호합니다. 그리고 다섯 장에 걸친 엘리후의 발언이 나온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할 말이 많았고, 불평이 많았던 욥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욥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서, 욥은 자기의 의를 주장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욥은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을 만난 다음, 욥의 변화와 치유, 축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욥은!

 

첫째,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고난의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은! 욥의 신앙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고난당하기 전까지 경험했던 하나님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욥 42:5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사실 고난 중에 있던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친구들과 논쟁하는 동안 그의 불만이 불쑥불쑥 튀어나왔습니다. 욥 13:23∼25 →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주께서는 줄곧 나를 위협하시렵니까? 나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을 뿐입니다. 주께서는 지금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나를 공격하고 계십니까?”

욥은 자신이 그토록 가혹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욥은 고난을 겪으면서 만나게 된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욥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왜 자기를 고난으로 이끄셨는지! 그 크고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을 갖고 난 다음! 그는 이렇게 회개합니다. 욥 42:3 →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즉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했던 자가 바로 욥!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함부로 말했습니다. 욥은 이런 회개의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회개도 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세상에서 자기가 의로운 줄 알고, 자기가 의로운 재판장이 되어 판단을 내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때에야, 비로소 “아! 나는 죄인이구나!”하는 사실을 알게 되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할 수 있는 깨달음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고 하는 것은 곧 회개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살면서 수많은 죄를 지으면서도 스스로는 의롭다고 생각하며 판단자로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2023년 한 해를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말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지은 죄들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알게 되고 깨달아지면! 불경했던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악한 판단을 했고, 부정적이고 악한 말로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깎아내린 자입니다. 나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하나님 앞에서 불경했던 죄를 회개해서! 용서받은 자로 성탄과 새해를 맞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사람! 즉 친구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욥 42:8 →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대개 용서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법입니다. 문제는, 상대방은 내게 상처를 입히고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나만 힘들고 괴로울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물을 가지고 먼저 욥에게 용서를 빌고, 번제물을 드려라! 그래서 욥이 너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을 용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욥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참 속 시원하게 용서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사람이 와서 용서를 구하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속상하고 용서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내 마음에서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힘든 것이 아니고 내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함’인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의 죄는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용서는!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용서하면! 내 기도의 문이 열리지만, 반대로, 용서하지 못하면! 기도가 막히고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하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면!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푸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부부관계, 가족 관계, 성도 간의 관계, 친척과의 관계, 동료와 친구와의 관계를 먼저 푸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10절입니다. 욥 42:10a →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드디어! 욥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던 친구들을 용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세 친구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무엇입니까? 욥 42:10b →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네! 욥이 친구들을 용서하고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을 때, 고통이 사라지고 질병이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또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무엇입니까? 욥 42:10c →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을 욥에게 주었더라.” 할렐루야!

우리는 욥이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친구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네! 욥은 친구들을 용서했습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그렇게 욥을 고통스럽게 했던 질병이 떠나갔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갑절의 축복을 욥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가 가져다주는 축복입니다.

 

셋째, 회복과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1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욥 42:10 → “욥이 주님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새번역성경)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정말 귀한 말씀 아닙니까? 친구들을 용서하는 기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린 욥을! 하나님이 받으셨을 뿐 아니라, 욥의 삶에 회복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고난받기 이전보다 갑절이나 더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열린 것입니다.

구약 사무엘상 1, 2장에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얻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편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고 하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을 많이 두었는데, 한나는 아이가 생기질 않았습니다. 늘 한나의 마음엔 자기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브닌나에 대해서는 ‘시기’와 ‘질투’와 ‘증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식 하나 낳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러니 한나의 마음엔 늘 원통함과 격분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나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격분된 마음을 가지고 브닌나와 대적하여 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사정과 형편을 아뢰며 기도하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한나는 남편 엘가나와 대적 브닌나와 떨어져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기도 후에, 한나의 마음에 있던 모든 원통함과 격분함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한나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새날이 밝았다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 아닙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다고! 새 삶이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새로운 축복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 요청에 ‘네!’라고 대답하십시오. 용서하고 사랑으로 덮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가 흘러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이 용서를 통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과 질문

 

1. 오늘 욥기를 보면서! 내게 닥친 현실을 이해할 수도 없고, 삶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울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피해자로서 용서하지 못함으로 겪은 아픔과 고통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용서에 있는 치유의 힘, 새 역사를 창조하는 힘, 놀라운 축복의 통로임을 경험해 봤다면 나눠보고, 함께 기도합시다.

김성윤
2023-12-09
조회 170

의롭고 온전한데, 왜 고난을? (욥 31:35∼40)

 

도대체 욥은 어떤 삶을 살았길래, 하나님께서 ‘가장 의롭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사람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롭고 온전한 욥의 삶이 어땠는지, 욥 31장에서 욥 자신의 입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성(性)적인 순결함을 가진 사람 - 욥!

욥은 성적인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아 올린 자신의 신앙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는 이런 성적인 범죄에 대해서, 욥은 단호하게 처신했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욥은! 성적인 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적인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자신과 한가지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은 바로 눈과의 약속! 악한 것이나 미혹될 만한 것은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욥 31:1 →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해서, 성적인 죄에 대해서 아주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마 5:28∼29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예수님은 단순히 여자를 바라보는 것을 죄라고 하지는 않으셨고,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을 죄라고 하셨습니다. 욥이 말한 ‘주목한다’라는 말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음욕을 품고 본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변에서 혹은 매스컴을 통해서, 성적인 순결함을 지키지 못해서 가정이 깨지고, 명예와 권력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흔하게 보고 듣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눈’이 바른 것만을 바라보며, 순결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자녀들이 바른 것,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며 자라도록 기도하고 지도해야 합니다. 성적인 타락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변해가는 이 시대에, 욥처럼! 성적인 순결을 지킬 수 있는 우리, 우리 자녀들, 우리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공의로운 사람 - 욥!

성적인 타락을 막기 위해서! 보는 것을 조심했던 욥은, 계속해서 자신의 공의로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욥 31:5 →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욥 31:13 →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욥은 지금껏 남을 속이거나 거짓으로 자신의 이익을 취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정직하게 사람들을 대했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있는 것을 없다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스스로 결코 위선자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종들에게도 그들의 권리를 결코 침해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럼 왜 욥은 이렇게 공의로운 삶을 살았을까요? 욥은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모든 인간을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행하지 않고 조심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내 이익을 위해 남을 속였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회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공의로운 삶이며, 경건한 삶입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코람데오’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선행을 베풀며 산 - 욥!

성적인 순결함을 지키고, 공의롭게 행함으로써 경건한 삶을 살았던 욥은, 마지막으로 자신은 누구에게든지 선행을 베풀었다고 말합니다. 욥 31:16 →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이 말은, 욥이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을 외면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원’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페츠’(חֵפֶץ)입니다. 이 말은, ‘기쁨’이라는 뜻인데, 가난한 자가 기쁨을 갖게 하는 것! 즉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도록 욥이 도왔다는 것입니다. 과부나 고아나 나그네의 고통을 돌아보고, 최소한 굶지 않고 벗고 다니지 않게 도왔던 것입니다. 네! 욥은 자기에게 손을 내밀 때 결코 외면치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가 도움의 눈길로 자신을 쳐다볼 때 그 눈길을 외면치 않았으며, 몸을 덮을 것이 없어 떨고 있는 자에게 양털로 된 옷을 입혔습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모두 다 공급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렇게 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신 10:18∼19 →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네! 욥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런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잘 지켰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자신만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욥 1:21 →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유는 나만의 것이 아닌,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 생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도록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재산에 대한 청지기적 사명감을 가지고 베풂과 나눔에 인색하지 않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욥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에 관해서 설명했습니다. 마치 완벽한 욥의 ‘자기소개서’ 같은 내용입니다. 성적으로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악한 것은 쳐다보지도 않기로 결심하였고, 누구를 속여 이익을 취하지 않았고, 사람 취급 못 받는 종들의 권리까지도 지켜주었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면서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욥의 이런 모습은! 그야말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할 정도입니다. 이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 4:17 →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도의 경건한 삶이 어떤 것인지, 욥을 통해서 잘 알았습니다. 성적으로 순결하고, 공의로우며,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알고서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죄 임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생각합시다.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이 부당하고 답답한 상황을 정리해 주시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이제 이런 자기의 의(義)로 하나님께 도전장을 냅니다. 욥 31:35 →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욥은 자신의 의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자신에게 응답하기를 바랐습니다.

욥은 자기의 순전함을 확신하고, 덧붙여 이렇게 말합니다. 욥 31:38∼40 → “내가 가꾼 땅이 훔친 것이라면, 땅 주인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라면, 땅에서 나는 소산을 공짜로 먹으면서 곡식을 기른 농부를 굶겨 죽였다면! 내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거나, 보리 대신 잡초가 돋아나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겠다.” 이 말은 욥 자신이! 자기 말처럼 의롭지 않은 점이 있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네! 욥은 완벽하고 온전한 의인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한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욥은! 법정에 선 피고인이자 변호인처럼, 자신에 대해서 당당히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겐 이런 욥의 셀프 변호가 참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야! 하나님도 하실 말이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갖게 되는 마음은! “그래! 나도, 우리들도, 욥처럼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성도 여러분! 욥의 이야기를 성경에 넣은 이유는! ▸ 하나님을 믿기에 이유 없이 고난당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고 ▸ 하나님을 믿으니까 더 온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 구원을 흔들고 훼방하는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마침내 승리하고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인내로 이긴 성도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 더 깊은 믿음 ▸ 더 완전한 믿음 ▸ 하나님을 더 많이 알 수 있는 믿음의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은 사실! 불신자의 가치관으로 보면, 현실적으로 아무런 유익이 없는, 가치 없는 복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알 수 있는 복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만큼은 아닐지라도, 지금 여러분 가운데도 많은 어려움과 고관 속에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자신의 무슨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하시어, 온전한 하늘 백성 삼으시려는 깊은 뜻으로 주신 고난이요 시련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련’으로 인해 낙망하고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더 의롭고 경건하고 온전한 자가 되는 ‘디딤돌’로 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과 질문

 

1. 오늘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해 가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욥의 자기소개서 중 가장 도전되는 내용을 서로 나눠봅시다.

 

2.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따라, 오늘 새롭게 결심한 것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이 인내로 고난을 이긴 성도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과, 그것의 유익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3-12-02
조회 219

흔들리지 않는 희망 (슥 9:9)


오늘은 ‘기독교의 새해’라 할 수 있는 ‘대림절’이 시작되는 주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의 기간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의 의미를 잘 새기는 가운데, 여러분의 삶에 드리운 어둠이 빛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1. 허망한 기대

 

예전에 자주 지나다니던 지하보도에는 복권을 파는 작은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 이런 문구를 붙여 놓았습니다. <연금복권 40억. D-30> 처음에는 전혀 살 생각이 없었는데, 그 앞을 자꾸 지나며 <D-15, D-3> 이렇게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점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구입도 하지 않았는데 속으로는 “당첨되면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고, “더 늦기 전에 사야하지 않을까?”를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스스로 생각할 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고 약하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상황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이런 종류의 기대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생각이 죄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품을 기대가 단지 이런 정도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6일은 기대에 부풀다가, 하루 만에 꺼져버리는 일을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스가랴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흔들리지 않는 희망’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이스라엘이 품은 기대 - 스룹바벨

 

스가랴서는 포로기 이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백성들은 <① 무너진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함으로 ② 과거 다윗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될 지도자가 필요했는데, 당시 귀환 공동체에는 최적의 인물인 스룹바벨이 있었습니다. 스룹바벨은 페르시아 황제로부터 유다 총독으로 임명을 받은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상징성입니다.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기대는 다시금 다윗 왕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인데, 그들의 지도자가 ‘다윗의 후손 스룹바벨’이니, 백성들의 기대는 당연히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었겠죠.

또, 하나님도 스룹바벨을 지도자로 인정하셨습니다. 학 2: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도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이제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① 하나님도 인정한 지도자 ② 다윗의 후손이라는 상징성 ③ 스룹바벨을 통해 성전이 재건>되면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졌던 성전이 다시 재건됩니다. 첫 번째 성전인 ‘솔로몬 성전’ 이후 이 때 지어진 성전의 이름이 ‘스룹바벨 성전’인데, 성전에 누군가의 이름이 수식된다는 것만 보아도, 스룹바벨의 위상이 어땠는가를 보여줍니다. 스룹바벨은 이스라엘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로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스가랴 4장까지 등장했던 스룹바벨. 그리고 성전의 완공까지 관여했던 스룹바벨이 그 이후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스가랴 4장 이후, 성경은 더 이상 스룹바벨을 언급하지 않는데, 성경에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는 않지만, 학자들은 스룹바벨이 다시 페르시아로 소환되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는데, 자꾸만 커지는 스룹바벨의 영향력에 부담을 느끼게 되면서 다시 불러들였다는 것이죠. 참 황당합니다. 이스라엘의 재건자, 영광을 회복할 적임자로 한껏 기대를 받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허무합니까?

 

3.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런 이스라엘의 상황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이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절망’ 절망이 뭡니까? 한자로 보면 (끊을 절, 바랄 망)인데, 기대를 가지고 바라봤던 것이 끊어져 버려서,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게 된 것이 절망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스가랴서를 읽어보면, ‘망’ 곧 바라보는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바라본 것이 누구입니까? 스룹바벨! 더 엄밀히는 <그의 혈통과 지위>에 기대를 걸었던 것 아닌가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스룹바벨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다시 페르시아로 돌려보내심으로 이스라엘의 희망을 끊어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말하려는 진정한 희망은 스룹바벨이 사라진 다음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슥 8:7~8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구원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내가 구원하여 내고,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한 마디로, 스룹바벨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룹바벨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주체가 되시고, 하나님 자신이 온 열방의 희망이 되시는 것이 이 모든 구원 스토리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대림절 첫 번째 초의 의미는 ‘기다림과 소망’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또 어디에 소망을 두고 계십니까? 스룹바벨이 아닙니다. 또, 스룹바벨 같이 여기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은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왕이요, 인도자요, 동행자가 되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우리 믿는 자들의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생활이 익숙해지고, 바쁜 연말을 지내다 보면, 정작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과 오심의 의미를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에 머물지 않고, 친히 이 땅에, 또한 내 심령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대림절 첫 번째 초와 같이 여러분의 심령과 삶 속에 환한 빛이 점등되어, 모든 어두움이 다 물러가고,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4. 흔들리지 않는 희망

 

오늘은 그림 하나를 보면서 설교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입니다.

 (QR코드에 휴대폰 카메라를 대시고, 링크를 누르시면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빛을 사용하는 자신만의 기법으로, 두 왕을 그려놓았습니다. 첫 번째 왕은 뒤에 있는 헤롯입니다. 햇빛 가리개를 쓰고, 권세를 상징하는 홀을 들고, 따르는 군인/신하들과 함께 기세등등하게 서 있습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헤롯을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어둠에 가두어 놓고는 “그에게 주목하지 마라! 그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렘브란트가 건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작고 약한 아기 예수. 헤롯과 비교하자면, 마치 튼튼한 명마(名馬) 앞의 작은 나귀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 예수를 통하여서 이 땅에 희망의 역사를 이어가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가랴의 핵심 예언이었어요.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룹바벨이 사라진 후 하나님은 진정한 희망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예언하셨어요. 그리고 이 예언이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이어진 그의 십자가 구속을 통하여, 예수님은 온 인류의 진정한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림을 봅시다. 잘 보시면 이 그림의 조명이 누구를 중점적으로 비추고 있나요? 예수님이 아니라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동방박사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시죠. 그런데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통해 더욱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희망을 바라보는 동방박사’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나요? “헤롯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히려 헤롯은 아기 예수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동방박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굴 믿고, 누구에게 희망을 두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시편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제는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희망을 얻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승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기대했던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거나 실망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램브란트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감상하면서, 각자 느꼈던 바를 나눠봅시다. 내가 의지했던 스룹바벨은 누구(무엇)였습니까? 내가 두려워했던 헤롯은 누구(무엇)였습니까?

 

3. 각자에게 힘을 주는 희망의 말씀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또한 속원들과 함께 대림절 기간 동안 <말씀과 기도>의 경건생활을 작정하고, 각자의 시간과 장소를 공유함으로 결단해 봅시다.

김성윤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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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의 아픔 속에서! (욥 19:13∼27)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누구든지 다 ‘소외’라는 ‘마음의 아픔’을 경험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늘 만나고 함께하는 시간은 많지만! 실상 속마음을 나누는 친밀함은 없이 홀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사귐과 소통’의 근간이어야 할 가족과 형제자매 간에도, 또한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는 교회 안에서도 ‘소외’라는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주인공 욥 역시! 모든 것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소외’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욥은▸하루아침에 열 명의 자녀를 다 잃고 말았습니다. ▸또한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자기 몸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 깨진 기왓장으로 북북 긁어, 피고름이 흘러야 시원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아내조차도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고 ▸신뢰 관계에 있던 친구들도 욥의 진실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들이닥친 엄청난 일들로 인하여 욥은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렇게 욥이 겪은 배척과 소외, 관계의 파탄을! 오늘 성경은 아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교차대구법’적인 구조를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친밀함의 강도가 먼 사람에게서 시작해서 가까운 사람에게로, 그리고 가장 가까운 아내와 친형제에게서 정점을 찍고, 다시 이웃에게로! 그리고 더 먼 사람으로 확대되어 갑니다. 이런 구조는! 욥이 인간관계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아내’와 ‘친형제들’로부터도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즉, 가장 친밀한 사람으로부터도 버림을 받는데! 하물며, 다른 지인들로부터의 소외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욥에게 내적인 고통과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작아 보였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욥은! 이런 총체적인 ‘소외’의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20절에서 이렇게 토로합니다. 욥 19:20 → “뼈에 가죽만 남아,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이 신세!” 심적·육체적 고통으로 바싹 마르고, 이빨마저 다 빠져 겨우 잇몸으로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욥의 ‘소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소외가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6절, 8절, 12절을 보면 ‘그’로 표시된 ‘하나님’이! 욥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입니다. 욥이 외친 말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욥 19:8∼12 → “하나님이 내가 가는 길을 높은 담으로 막으시니, 내가 지나갈 수가 없다. 내 가는 길을 어둠으로 가로막으신다. 내 영광을 거두어 가시고,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겨가셨다. 내 온몸을 두들겨 패시니, 이젠 내게 희망도 없다. 나무뿌리를 뽑듯이, 내 희망을 뿌리째 뽑아 버리셨다. 하나님이 내게 불같이 노하셔서, 나를 적으로 여기시고, 나를 치시려고 군대를 보내시니 그 군대는 나를 치려고 길을 닦고, 내 집을 포위하였다.”(새번역성경)

오늘 본문 19장에 이르기까지 욥이 경험한 하나님은! 자신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시고, 희망을 뿌리째 뽑아 버리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욥의 인생길을 높은 담으로 막고, 어둠으로 막아 지나갈 수 없게 합니다. 또한 욥을 치려고 군대를 보내서 집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이 군대는! 욥을 삶의 자리에서 소외시키는 가까운 지인들입니다. 심지어!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는 그의 아내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군사입니다. 여기에 욥의 절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욥이 만난 하나님이며, 우리가 만나기도 하는 하나님입니다. 은총의 모습! 자비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오죽했으면, 욥이 이런 하나님을 7절에서 자신을 ‘폭행하는 하나님’이라고 고발했겠습니까? 사람들을 사주하여 자신을 ‘왕따시키는 하나님’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겠습니까?

욥은! 자기 입의 ‘말’로 하나님을 고발하고 절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고발이 ‘글’로 기록되기를 갈망했습니다. 그것도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바위에 새겨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말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욥기가 구약의 정경으로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절규는 우리의 절규가 되어, 오늘도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의 고발은 우리의 고발이 되어, 하나님을 공개적인 법정에 세우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법정에 세운다.’ 좀 과한 말처럼 들리시죠? 그러나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욥과 같이 하나님을 법정에 세워야 합니다.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신다’고 믿는 우리에게! 그렇지 않은 세상을 그대로 두고 계시는 하나님을 고발해야 합니다. 자! 욥의 절규를 들어보겠습니다. 역시 ‘새번역 성경’으로 21장 7∼33까지의 말씀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욥 21:7∼33 →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된 적이 있느냐? 폭풍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된 적이 있느냐? 그들은 그렇게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조용하게 스올로 내려간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항상 살아남는 자는 ‘악한 사람’이다. 그가 죽어 화려하게 꾸민 무덤으로 갈 때는! 수도 없이 많은 조객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고, 골짜기 흙마저 그의 시신을 부드럽게 덮어 준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욥의 통찰이 맞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도, 욥의 고발은 유효하지 않습니까? 돈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원리는! 선인은 쪼그라들고, 악인은 더 활개 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인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말은 ‘아주 새빨간 거짓말’ 아닙니까?

그래서 욥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됩니다. ▸실패한 자로, 상처받은 자로! 오히려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에 도전합니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에 밀린 자로,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홀로 남은 자로 싸움을 합니다. 그 싸움은 무모한 싸움처럼 보입니다.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에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욥처럼 벼랑 끝에 설 때가 있습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 갇힐 때도 있습니다. 모든 위로가 거절된 절망의 유배지에 홀로 남을 때도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도 외면당하고,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무인도에 던져진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삶 속에는 욥과 같은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때로는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네! 욥은 자기를 두들겨 패며, 폭력을 가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를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소외시키는 하나님이, 그에게 임하는 마지막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도 믿었습니다.

▸ 그래서 그는, 언젠가 오게 될 새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욥 19:25 →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공동번역)

▸ 질병으로 인해 살이 다 뭉그러진다고 할지라도, 일그러진 육체를 가지고서라도, 욥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욥 19:26 →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공동번역)

▸ 이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하고 그의 마음에 요동을 치는지, 자신의 간장이 다 녹을 지경이라고 고백합니다. 욥 19:27 →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공동번역)

또한,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②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막 15:34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욥을 통해서 들었던 외침을, 이 예수님의 외침 속에서 듣는 듯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이신 하나님조차도 예수를 외면하고, 철저하게 ‘소외’와 ‘고독’과 ‘아픔’을 겪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소외와 절망은 결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지 삼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처절한 절망의 십자가가, 부활과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욥 19:25 →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그렇습니다. 욥도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조차 응답이 없으시지만, 때가 되면! 자기의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풀어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비록 욥의 현실은 참으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었지만! 우리는 욥기서를 통해 그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지만! 부활로 승리케 하셨던 것처럼, 욥을 회복시켜 주셨고 갑절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증거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죽음조차 끝이 아닙니다. 욥을 기억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하며, 무슨 일을 만나도! 그리스도인답게 믿음으로 살아내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욥이 겪었던 ‘소외’는 욥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혹 자신도 소외의 경험을 했다면,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나눠봅시다.

 

2. 혹 나 자신도 욥의 친구들과 같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고,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필요한 도움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까닭 모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고통을 풀어주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기다렸던 욥의 믿음은, 나에게 어떤 도전을 주는지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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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욥 10:1∼12)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이 환난을 만나 부르짖는데도 침묵하고 계시다면!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야 3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그 무엇을 구하면 기꺼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7:11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나의 현실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나 자신이 혼자 독백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아!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이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다.’ ‘하나님과의 대화다.’라는 말이 무색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신 것 같고,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있을까? 이런 의심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됩니까? 그 구체적인 방법! 몇 가지를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먼저, 내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내놓는 것입니다. 괜히 사람들을 들볶거나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받아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 분노, 두려움, 슬픔, 혼란 그리고 모든 궁금증을 다 감당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렇게 했습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욥 10:1 →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네! 욥은 고통과 불평을 그냥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다 발설 했습니다. 다 내어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속상하면 속상한 대로,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미우면 미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한나처럼 원통하면 원통한 대로,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 고통과 감정을 숨기고 가슴에 품고만 있으면, 오히려 병이 됩니다. 어떤 문제든지 다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7장에서도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 7:11 →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이것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하고 괴로워서,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내어놓음을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2절입니다. 욥 10:2 →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그렇습니다. 간단한 구절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혼자 탄식하거나, 사람에게 아무리 하소연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사람 앞에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절망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함이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 벌어진 상황이야 어찌하겠습니까? 그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세요. 죽을 지경인 걸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변함없이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는 겁니다. 어찌 보면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여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자만을 사랑하실까요? 반대로, 당신께 대드는 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아픔과 원망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털어놓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는 일을 주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움직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한결같으신 분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상황이나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머릿속에 자꾸 떠올려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을 아시며,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삶과 미래에 대해서 멋진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은! 그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을 때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의심치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결국 그분은 선하시며 사랑이 많은 분이시라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욥 10:12 →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이 고백뿐이 아닙니다. 욥기서 전반을 보면, 이런 찬양의 고백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욥 37:5, 23, 42:2) “내 삶의 모든 구체적인 부분까지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욥 23:10, 31:4) “내 삶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며(욥 23:14), 마침내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욥 19:25) 고백을 쉼 없이 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심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굳게 신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멀게 느껴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지날 때, 우리는 자신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굳세야 하고,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깊은 신앙의 단계로 이끌고 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감정에 바탕을 둔 믿음은! 그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내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하나님의 속성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느끼든 못 느끼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편에 서 계십니다.

욥은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 23:12∼14 →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욥의 믿음은 고통 속에서도 강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믿음 때문에, 욥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껴지지만, 그런 자신의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계속 신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깊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을 당하시는 동안, 하나님은 그 고난의 현장을 외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사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구원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침묵하고 계셨을까요? 왜 눈을 돌리셨을까요? 왜 예수님의 모진 고난과 고통을 외면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옥 갈 우리 인생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요,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인하여 감사해야 되냐?’고 고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대체 감사할 일이 무엇이 있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감사할 일이 없다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사건! 그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아멘.

욥은 이 모든 고통과 고난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올려드려야 할 고백을, 욥은 이미 1장에서 했습니다. 욥 1:21 →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아멘.

사실 욥 자신도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고, 깊어지면서, 자신의 고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 1:10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할렐루야! 욥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욥의 감정, 욥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은 심정이고, 그런 형편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여전히 나를 붙드시며,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가장 깊은 경지의 예배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시험을 당할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 삶을 드리며 ▸그분이 멀게 느껴질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욥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서 그 감정을 하나님께 털어놓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문제를 하나님께 혹은 사람에게 털어놓았던 경험과 결과를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이 침묵하시더라도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믿음은 어느 정도 성숙했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할 수 있게 하옵소서! 함께 기도합시다.

김성윤
2023-11-11
조회 272

가장 좋은 선물인 예수님! (요 3:16)

 

1. 시간의 두 가지 종류

시간에는 ‘두 종류의 시간’이 있습니다. → 헬라어에서는 이를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라는 단어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 ‘크로노스’(chronos)란 시간은! →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하루 24시간, 한 달 30일, 1년 12달 식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내가 어떻게 보내던지 상관없이 규칙적으로 흘러갑니다. 내가 성실했든지, 게을렀든지 상관없이 그냥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반면에 ▶ ‘카이로스’(kairos)란 시간은 → 의미의 시간, 가치의 시간, 내가 붙잡은 시간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드리는 예배의 시간은 ‘크로노스’적으로는 1시간이 지나면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시간이 그저 답답하고 무의미한 시간으로 흘러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에 중대한 의미와 변화를 주는 ‘가치의 시간’, ‘의미의 시간’이 되었다면! 이 한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이 우리 인생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무의미’의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된다면! 아무리 시간적으로 80년 90년, 오래 장수한다고 할지라도, 실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산 것은 못 됩니다. 반면에!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느껴지질 않습니다. 예를 들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미술관에서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그림 앞에 섰을 때, 기막힌 연주와 하모니에 넋을 잃고 있을 때, 하는 일과 내가 하나 되어 온 열정을 바쳐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바로 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시간, 의미로 가득한 시간, 창조의 시간! 이런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예배의 시간이! 여러분에게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두 가지 종류의 미래

시간과 연관 지어서, 우리가 또 하나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미래’, 즉 우리의 ‘장래’에 관한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미래’에도 ‘두 종류의 미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네! 미래에도 ‘두 종류의 미래’가 있습니다. → 하나는 우리가 ‘나아가는 미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입니다.

그러면 ▶ ‘나아가는 미래’란 무엇입니까? → 그것은 ‘우리가 계획하고 설계해서 만들고 이루어 가는 미래’입니다. 이달 말에 김장하고, 겨울옷 꺼내고, 겨울 이불로 바꾸고! 이렇게 내가 계획하고 준비하는 미래를 라틴어로 휴추럼(futurum)이라고 합니다. 이 라틴어는, 과거에서 출발해서 → 오늘을 거쳐 → 내일로 나아가는 미래를 의미하며 ⇨ 영어의 ‘future’가 이 말에서 나왔습니다.

반면에 ▶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가 있습니다. → 이 미래는! 사람이 만들고 계획하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미래입니다. 내 생각과 계획과는 상관없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미래입니다. 이런 미래를 라틴어로 애드밴투스(Adventus)라 하고 ⇨ 영어로는 ‘advent’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천 년 만년 이 땅에서 영원토록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게는 이미 계획된 미래가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고 피하고 싶어도, 나에게 다가오는 ‘죽음’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미래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설정하셨고 가지고 오시는 미래입니다. 그 미래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에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천국의 도래’라고 말합니다. 이 도래는 우주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the Advent)으로 이뤄지고 완성될 것이고, 우리 개인적으로는 ‘죽음’과 함께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이 미래는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며!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미래입니다.

이 ‘나아가는 미래’와, ‘다가오는 미래’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 ‘시간의 주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아가는 미래’는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이루어 가는 것이지만, 반면에 ‘다가오는 미래’는 ▸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하신 하나님은 이 미래가 우리 모두에게 복된 미래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3. 하나님은 우리의 복된 미래를 위해서 천국을 준비하시고,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예수님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는! 우리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까지 포함하는 미래로, 이 땅에서의 행복한 삶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영원한 미래인 ‘천국’으로 초청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죄인인 채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죄의 값인 죽음’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이 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말씀! 복음 중의 복음의 말씀인 요 3:16입니다. 요 3: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요 1:12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네! 예수님을 구세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영원한 미래, 천국에서의 삶을 약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 3: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이처럼”이란 말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가장 비싼 값을 주시고”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롬 6:23 →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죄지은 우리 인간은 죗값으로 죽어야 하고, 멸망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영원한 미래’!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우리를 대신해서 죗값으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온갖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 십자가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사건이란 걸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누가 이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는 자마다”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예외 없이 구원을 얻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일컬어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을 열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그 풍성한 사랑은 바로 그 사람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죽으면 끝이지, 그다음에 있기는 뭐가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네!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는 끝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머니 태중에서의 생명으로 열 달을 살고, 이 세상에 태어나듯이! ▸이 세상에서의 7∼80년의 삶을 마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또 다른 미래, ‘영원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일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다가오는 미래의 날 즉, ‘죽음의 날’은 마치 도적같이 준비하지 않은 때에 임하여서, 영원한 심판과 파멸의 날이 될 것임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날이 곧 ‘천국으로 입성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세계는! 모두 아름답고 신비한 곳입니다. ▸우리를 어머니 뱃속에서 처음 만드실 때부터 ‘자궁’이라는 신비한 우주 공간에서 자라게 하셨고,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삶을 위해서도! 아름답고 신비와 경이로 가득 찬 ‘지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한 믿는 자를 위해 예비한 ‘천국’은! 영생복락을 누릴 곳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곳입니다.

이렇게 섬세하게 하나님은 ① 신비한 어머니의 자궁과 ② 아름다운 지구와 ③ 영원한 천국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니! ‘나’를 사랑하십니다. ⇨ 이제 어머니의 ‘모태’를 거쳐 ⇨ 이 ‘지구’에서 살고있는 우리가 ⇨ 최종적으로 가야 할 곳은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이 ‘천국’에 오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현재만이 아니고, 영원한 미래까지 우리가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며, 값진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인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인 ‘죽음’도 극복하고, 영원한 ‘천국’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이 은혜를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예수를 잃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요, 예수를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어떤 감사를 드릴 것인지 나눠봅시다.

 

2. 선물이란 손을 내밀어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내 것이 되는 게 선물입니다. 혹 아직도 믿음의 손을 내밀지 못한 분이 내 가족이고 이웃이라면 꼭 받게 할 다짐을 나눠봅시다.

 

3. 우리가 인도한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교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개인과 속회가 힘을 합쳐 사랑으로 돌봐 주기로 다짐하고 함께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