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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2월 6일 말씀묵상지

이재영
2022-02-05
조회수 368

제목: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요 11:1∼8, 17∼27)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이런 말은 신앙이 아예 없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이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정말 의지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면서, 축복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참고 참던 인내심이 바닥날 때,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것 같고 속상해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사로 가정도 그랬습니다. 베다니에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가 살았는데, 가장인 나사로가 병들어 위독해졌습니다. 그러자 누이들이 80km 떨어진 요단강 건너편의 예수님께 긴박하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틀 동안이나 늦장을 부리고 오시질 않았습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속상하고 실망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똑같이 이렇게 한탄합니다. 요 11:21, 32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에 대한 실망과 탄식은, 두 자매만의 일은 아닙니다. 우리 삶 가운데도 예수님이 빨리 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두 자매는 믿음이 없거나 약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지만, 주님이 계시기만 했다면 났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늦게 오심으로 오빠는 죽었고, 그래서 “주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 부분 2절을 보면,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일 년 치 월급)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또한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정성껏 섬겼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올 때마다 자기 집으로 영접해서, 음식을 차려 먹이고 잠자리도 제공했습니다.(눅 10:38) 그런데 이런 자매의 친오빠가 죽었으니 속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주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너무 서운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코로나 팬데믹을 3년째 견뎌가고 있는데 어떠십니까? ‘감사’가 나오나요? ‘감사’라는 단어보다 오히려 맘과 입에 ‘실망, 원망’이라는 단어가 맴돌고 있지는 않은가요? 자! 이런 상황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첫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이런 전갈을 보냅니다. 요 11:3 →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filevw)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런데 여기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에 ‘필레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전갈을 받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요 11:5 →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ajgapavw)하시더니…” 두 구절에 같은 ‘사랑’이란 단어를 썼지만, 예수님은 ‘필레오’란 단어 대신 ‘아가파오’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필레오’(filevw)는 부모, 형제, 친구 간의 ‘관계적인 사랑’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아가파오’(ajgapavw)는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필레오’의 사랑보다 ‘아가파오’가 더 크고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누이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좋은 인간관계 속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고 절대적인 사랑, 마르다와 마리아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 우리에게 닥쳐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 서운하고 실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진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날 사랑하시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나를 사랑하시고, 더 애타게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은 식지 않았고, 멈추지 않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요 11:4 →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도 여러분! ‘죽을 만큼 아픈 병도, 죽을 만큼 실망스런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씀이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모르지만, 주님은 큰 그림, 큰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도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만큼 서운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고후 11:23, 27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런데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 8:38∼39 →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아무리 실망할 일이 많아도, 날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때인데, 오히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 1:21 →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했을까요? 이어지는 후반 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욥 19:25∼26 →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새번역) 네! 나는 죽어도, 날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을 지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과 욥이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했다면, 우리 또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우리 또한 주님께서 하신 감사를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늦게 나사로의 집에 오신 예수님을 보고, 사랑한다면서 죽게 방치했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도 죽음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구나! 하면서 무력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힌 무덤으로 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1:39 →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 희망은 없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요 11:41 →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서 부패하여 썩고 있는데, 주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썩는 냄새가 나는데! 나사로가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 먼저 감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감사기도를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크게 외치자,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할렐루야! 감사하니 무덤에서 생명이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소원을 성취해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순서를 바꿀 때가 많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5천 명이 굶주려 있을 때, 예수님 손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지만, 그 떡과 물고기를 들고 감사했습니다.(요 6:11) 턱도 없이 부족한데, 감사하셨습니다. 배 불리 먹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굶주릴 때 감사하셨습니다. 그러자 빈들에 넘치는 양식이 생겼습니다. 할렐루야!

기적이 감사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감사가 기적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소원성취로 감사하는 게 아니라, 감사로 소원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다고 감사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애굽에서 10가지 기적의 재앙을 보았고,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고, 만나의 기적, 반석의 샘물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이 많았습니다. 기적에 감사하기보다,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며 원망했습니다. 더 나은 기적, 더 좋고 더 많은 복에 욕심부리고,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를 반복했습니다.

♬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왔냐고! 왜 이런 슬픔이 찾아왔냐고!” 외쳐 보지 않은 성도가 어디 있겠습니다? 이 찬양은 그 외침과 눈물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성도 여러분! “감사가 답입니다!” 감사하면서 주님 손잡고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무덤 앞에서도 감사하는 주님의 감사가 나의 감사가 되게 하시옵소서.” 아멘.


나눔과 묵상


1.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께 실망했던 적이 있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 바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믿어지고 감사했던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소원성취로 감사하는 게 아니라 감사로 소원성취를 하는 것이며, 기적이 감사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감사가 기적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선언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