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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관리자
2022-09-10
조회 566


2022년 9월 11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엡 5:1∼2)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②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니!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하고, 그의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면!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 특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들은, 대부분 그 사랑 안에서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의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기의 이익과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 해도, 우리 믿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위해 희생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믿지 않는 가정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말 열일곱 마리를 유산으로 남기며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장남은 절반, 차남은 1/3, 막내는 1/9을 가지라.” 그런데 그 유언대로 따르려고 해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17÷2=8.5마리, 17÷3=5.66마리, 17÷9=1.88마리! 그러니까 장남의 몫은 8과 1/2 마리요, 차남은 5와 2/3 마리, 막내는 1과 8/9 마리가 됩니다. 그러니 산채로는 도저히 말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몫대로 나누려면 말 두 마리를 잡아서 나눠야 합니다.

옥신각신하다가 형제들은 마을의 목사님은 그래도 공평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목사님에게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연을 들은 목사님은 이렇게 처방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당신의 말, 한 마리를 내줘서 열여덟 마리의 말이 되게 했고, 아버지가 유언하신 원래의 비율대로 나누어 갖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각기 몫을 나눠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18÷2=9마리, 18÷3=6마리, 18÷9=2마리! 그리하여 장남은 아홉 마리, 차남은 여섯 마리, 막내는 두 마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나눈 모든 말의 숫자를 합하니, 신기하게도 열일곱 마리가 되었습니다. 9마리 + 6마리 + 2마리 = 17마리. 그렇게 나누고 보니, 목사님이 내주셨던 한 마리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더욱이 열일곱 마리를 가지고 나누려고 하던 때보다, 장남은 1/2마리, 차남은 1/3마리, 막내는 1/9마리를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의아해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드린 말은, 사랑의 한 마리입니다. 이렇게! →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될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해진답니다.” 목사님은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전했고, 형제들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답니다. 할렐루야!

 

1.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으라!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엡 5:1 →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❶ 우리는 어떤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까? 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5:2b →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는 말씀은 자신은 가장 비참한 것을 수용하시고, 우리에게는 가장 최고의 선물을 주신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시고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사실을 요약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롬 5: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베푸신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런 사랑은!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❷ 그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으라! 1절 말씀입니다. 엡 5:1 →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성도 여러분! 부모님이 희생적으로 자기를 사랑하신 것을 아는 자녀는! 그 귀하고 값진 사랑을 베푸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그분들을 닮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닮아가게 되어있습니다. 본받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본받다’는 단어는 “따라하다, 흉내내다, 모방하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미메테스’(mimhthv")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영어가 ‘imitate’ ‘모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모방해야 할 최종적인 목표! 롤모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더!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사모하고, 닮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닮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닮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 모두에게 뜨겁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고, 또 그것을 아는 자녀들은 어떻게 행동하게 됩니까?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고, 또한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닮아! 똑같이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을 보면, 그 특징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마음 깊은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이 흘러넘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같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 삶에 점점 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미국 스탠퍼드 대학병원에 희소병을 앓고 있는 ‘엘리자베스’라는 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얼마 전! 동일한 병을 이겨내고 면역력을 소유하게 된 다섯 살짜리 오빠의 피를 수혈받는 것뿐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오빠에게 그의 피를 나눠줘야만 여동생을 살릴 수 있음을 설명하고, 그렇게 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그 어린 오빠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호흡을 가다듬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린 두 남매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수혈하는 동안, 오빠는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곤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의사 선생님에게 “저는 언제 죽게 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 오빠는! 여동생에게 수혈해 준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런데도 동생을 살리기 위해 그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사랑의 모습!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기 원한다면, 이렇게 나 자신을 버리는 희생제물이 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저 사람은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판단과 미움의 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그럴 때는 먼저 이 기억을 떠올리셔야 합니다. →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로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을 실천하셨다.” 그렇습니다. 오늘 에베소서 2장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그 희생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5:13∼14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은 당신 말대로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런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적인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되면! 예수님께서 “어! 넌 정말 내 친구다!” 이렇게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좀 부끄럽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예수님 같은 그런 ‘희생적인 사랑’에 비춰본다면, 부끄럽고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작은 일일지라도,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리라! 다짐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전 생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쏟아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주신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이 허락해주신 가정과 자녀를 사랑하고, 주위에 있는 이웃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될 뿐 아니라, 더욱 풍성해진다”는 말과 같이,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나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우리가 따르고 모방해야 할 최종적인 목표! ‘롤 모델은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말에 따라, 당신이 닮아가기 위해 시도하고 있는 것들을 나눠봅시다.

 

3.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처럼! 나 또한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 는지?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9-03
조회 346


2022년 9월 4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복음! 그 위대한 선물 (엡 2:1∼9)

 

저는 오늘 비밀이 숨어 있는 ‘선물’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 선물은 ‘과거’에서 나를 해방시키고, ‘현재’를 감사로 바꾸고, ‘미래’를 희망으로 채워주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기쁨과 평안을 간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선물을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선물의 가치는, 우리가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 그 자리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선물은 나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내 가족과 이웃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인사하며,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갈 수 있게 합니다. 이 선물의 이름은 바로 ‘구원’입니다. 저는 오늘, 이 구원의 선물에 대해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구원은! 행위로는 얻지 못하는 선물입니다.

‘선물’은 문자 그대로 ‘선물’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그 노력의 대가로 무엇을 얻는다면, 그것은 노력에 대한 삯이지 선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는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8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 보면,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다음 절인 9절에서 좀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 2:9 →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한’ 아무도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행위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도 중요합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적인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베풀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여야 하지,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도, 우리보다 훨씬 더 선한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신 하나님 앞에서 보면, 인간의 행위는 오십보백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이 말하는 선과 악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가톨릭에서는 뛰어나게 착했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saint’ ‘성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성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성자’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3:23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저도 포함되고, 여러분도 포함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하기를!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떤 선물일까요?

 

둘째, 구원은! 은혜로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다시 8절 말씀입니다. 엡 2:8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 첫 번째 강조된 단어가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은혜’ grace라는 단어의 뜻은 →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랑, 혹은 호의”를 말합니다. 그 ‘은혜’로 저와 여러분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 인간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2:7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자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 ‘자비’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네!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것은 알겠는데! 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들이지만 그저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아버지’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은혜가 베풀어졌고, 그 결과! 우리는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탕자와 탕자의 아버지를 잘 생각해 보시면, 하나님의 ‘자비’와 베푸시는 ‘구원’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유산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냅니다. 머잖아 돈은 다 떨어졌고 흉년까지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돼지 치는 곳에 품꾼이 되어 살지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때서야 탕자는 다시 아버지 집을 생각합니다.

가지고 나간 것 다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버지는 그가 자기 아들인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눅 15:20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자비)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사랑의 행동)…”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종에게 명하여 가장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에 신발을 신겨줍니다.

성도 여러분! 둘째 아들이 가지고 나간 유산으로 사업을 잘해서 큰돈으로 불려서 왔습니까? 성공해서 금의환향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큰아들의 말대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리고” 거지로! 부끄러운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렇게 격하게 그 아들을 맞아줍니까? 단지 이유는! 그는 ‘당신의 아들’이고, ‘당신은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아버지의 품을 떠난 죄인임에도 은혜로 다시 자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선물입니다. 네! 이 선물은 공짜입니다. 우리는 공짜라고 하면, 싸구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결코 싸구려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 선물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구원이 제공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아니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살이 찢어지고, 피 한 방울도 남지 않는 십자가에서의 희생, 그것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은 사람! 당신의 자녀를 위한 자비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시 강조해 말씀드립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가장 값비싼 선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자! 그러면, 이 구원의 선물은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셋째,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성경은 그 대답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8절입니다. 엡 2:8 → “너희는 ⇨ 그 ‘은혜’에 의하여 ⇨ ‘믿음’으로 말미암아 ⇨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들을 잘 보십시오. 먼저 붉은색으로 된 구절들을 주∼욱 붙여서 읽어보겠습니다. “그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선물이라.” 잘 이해되시죠! 그런데 중간에 ‘파란색’으로 ‘더 크게’ 쓰인 구절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믿음을 통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믿음’이라는 말은 “나는 너를 믿는다”는 식의,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주실 때, 그 선물을 받고자 ‘내미는 우리의 손’ 그 손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미는 손’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손을 내미는 것은, 공로가 아닙니다. 업적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주시는 선물로 알고, 그것을 받기 위해 손 내미는 과정이 있어야 선물이 내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구원의 선물을 주실 때, 우리는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하고, “하나님! 나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선물을 받는 순간입니다.

나아가서 성경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행 16:31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번 주간 우리는 ‘추석 명절’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가족 가운데, 아직 마음을 열지 않고, 구원의 은혜!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손 내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믿은 여러분들이, 믿음과 구원의 출발점이 되셔야 합니다. 복음의 출발점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먼저 믿었으니, 다른 가족들도 믿을 수 있도록 이끄셔야 합니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인 출발점이 되셔야 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이 받은 가장 ‘기억나는 선물’과 ‘구원의 선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탕자에게 용서와 구원이 베풀어진 이유에 대해서 나눠보고,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3. 당신이 믿음과 구원의 출발점이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된 가족이나 사람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8-27
조회 498


2022년 8월 28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더불어 성장하고 거룩하라 (살전 5:12∼14)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 7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로 본이 됨으로 성장합니다.

대부분,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께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은! 결코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성숙한 인격은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의 본을 보고 자랍니다. 부모의 본이 자녀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 긍정적인 사람들과 교제합니다.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합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반대로 시험 든 사람,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머잖아 그 사람도 시험 들고, 부정적이 되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닮아갑니다. 그러므로 먼저 긍정의 본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고, 또 그런 사람과 교제하시기를 바랍니다.

 

2. 서로 격려함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말로서 상대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리는 말보다 죽이는 말을 더 쉽게 합니다. 죽이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네가 만들었으니 오죽하겠니! 네가 하는 일이 잘될 리가 없지…” 이런 말을 들으면, 듣는 사람은 마치 독을 먹은 것처럼! 의욕이 꺾이고, 소망이 사라지고,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너의 삶은 귀중하고 목적이 있어!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실거야…” 이런 말을 들으면, 듣는 사람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새 힘이 납니다. 도전하게 됩니다.

이런 격려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격려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에게도, 주의 일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에게도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정에도, 속회와 선교회에도, 그리고 일터와 직장에도, 나의 격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격려자로 살기를 결심하십시오. 만나는 사람들의 장점을 찾고,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입으로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복된 마음과 혀를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서로 가르침으로 성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는 배우기를 힘써야 하지만, 배우면서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가르쳐야 하고, 성도들에게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배움은 축복입니다. 사람은 배운 만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주님을 배운 만큼 성장하는 것입니다. 요 17:3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 ‘안다’는 것은 곧 ‘배움’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이 어린 사람, 신앙 연조가 길지 않은 사람들이, 선배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목회자와 중직자들 그리고 믿음의 연조가 오래된 성도들을 통해서 뒤따라오는 성도들이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앞선 사람, 중직자들은 “나는 많은 사람의 주목의 대상이고, 바른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골로새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골 3:16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이 말씀을 보면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전제가 되는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가르치는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지혜로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가르침의 기준입니다. 자기 생각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배우는 사람 또한, 말씀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자기 속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되고, 성장·성숙할 수 있습니다.

 

4. 서로 권면함으로 성장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영적인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나에게 권면해준다면! 영적인 사고 없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사각지대를 보고서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영적인 사고를 일으키게 될 것이고, 상대는 침묵하므로 나를 사고자로 만드는 ‘방관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면’은 ‘사랑’입니다. 권면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관심이 없다면, 절대로 권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충고를 한다면,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우리들은 남의 훈계 즉 권면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인이 나에게 권면하면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설교를 통해서 훈계를 받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권면이 있는 공동체라야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권면을 받는 사람은 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 3:13 →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네! 권면을 잘 하기도 하고, 잘 받기도 하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5. 서로 존중함으로 성장합니다.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상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가정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역기능 가정’ 혹은 ‘순기능 가정’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여기서 역기능과 순기능은, 학력이나 경제적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부부관계, 부자관계, 형제자매관계가 깨져 있으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고학력자들이라도 그 가정은 역기능 가정입니다. 반면에 가난하더라도 온 가족이 사랑으로 연결되어있는 가정은 순기능 가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기능으로 성장하는 교회는! 성도의 수, 경제력, 건물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 교역자와 성도와의 관계,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가 얼마나 건강하고 신앙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매우 중요합니다. 상대를 빈부귀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으로 보고,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천국의 상속자로 보는 것입니다. 상대의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대하면, 가정은 순기능적인 가정이 될 것이고, 교회는 순기능적인 교회가 될 것입니다.

 

6. 서로 고백함으로 성장합니다.

죄는 우리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영적인 성장도 방해하고, 관계의 성장도 방해합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방해를 받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죄라는 담 때문에 깊은 교제가 불가능하고 피상적인 교제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고백’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주님은 곧바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십니다. 요일 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고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런데 이 고백(자백)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것으로 좁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 5:16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같은 속회나 선교회원에게 서로 죄를 고백하면서 기도하면, 병 고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의 질병만을 고쳐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깨어진 관계도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과의 화목도 이뤄지고, 심령이 온전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속회나 선교회, 이런저런 소그룹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7. 서로 용서함으로 성장합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하고 아주 가까이 살고 있는 가족, 교우, 직장 동료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십시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듯이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요, 선택입니다. 나를 공격한 사람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빚을 탕감해주고,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사면해주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용서의 혜택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받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한 그루의 나무로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독목불성림,獨木不成林)라는 한자 성어가 있습니다. 네! 홀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불어 성장하고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오늘 말씀 중 본인에게 가장 중요 하게 여겨진 것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2. 격려란 말은 익숙한 단어이지만, 실제로 격려하는 일은 힘듭니다. 격려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 상대를 보는 눈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용서하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자신이고, 용서하면 가장 큰 수혜자 역시 자신이라는 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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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1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하나님께 꼼수 쓰지 맙시다 (레 27:1∼13)

 

레위기 27장은 서원에 관한 규례인데,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고, 나중에 무르려고 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서원의 무름’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서원(Vow)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이 무언가 조건을 내걸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면, 그 보답으로 이렇게 하겠다고 약속할 때 그것을 ‘서원’이라고 합니다. 물론,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인 헌신을 약속하는 서원도 있습니다.

1) 먼저, 성경에 나타난 서원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❶ 첫째는 위기서원입니다. → 인생의 큰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이번 위기에서 건져 주시면, 내가 이런 일을 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 밧단 아람으로 갈 때, 벧엘이라는 들판에서 야곱이 서원합니다. 창 28:20~22 →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①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②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③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위기 가운데 드린 서원’입니다.

또 사사기 11장을 보면, 사사 입다가 암몬과의 전투에 임하면서 이런 서원을 합니다. 삿 11:30∼31 →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역시 위기 가운데 드린 서원입니다. 그런데 입다의 서원은 경솔한 서원이었습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자기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맨 먼저 나와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입다는 그 딸을 여호와께 바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회했지만, 영적으로 무지하여 보속(補贖)으로 서원을 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딸을 바치고야 말았습니다.

❷ 또 하나는 감사서원입니다. → 간절한 인생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소원에 응답해 주시면, 나도 감사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서원입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가 이런 서원을 합니다. 삼상 1:11 →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의 이 서원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사무엘입니다. 한나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습니까?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뗀 후, 그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삼상 1:26∼28 →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한나는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성전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서원을 지킨 한나에게 하나님은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삼상 2:21 →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할렐루야! 사무엘은 커서 위대한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원을 지키면, 더욱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서원으로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합니까? 그것은 → 자기 자신이나 가족(3∼8절), 가축(9∼13절), 집(14∼15절), 토지(16∼25절) 등을 드릴 수 있습니다.

3) 그러면 서원은 꼭 갚아야 합니까? 네, 꼭 갚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 23:21 →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전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 5:5∼6 →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성도 여러분! 서원한 것은 꼭 갚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서원을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져서, 혹은 서원의 대상자가 거부하므로 서원한 내용을 지킬 수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2. 서원을 무르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은 ‘서원의 네 가지 종류’에 따라, 각 경우에 따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1) 사람을 두고 한 서원의 경우입니다.(2∼8) 자신이나 자녀를 드리겠다고 서원해놓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면 → 보속금(補贖金)! 일종의 ‘벌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벌금은 성별에 따라 다르고, 나이에 따라 다릅니다. 남자 어른은 50세겔, 여자 어른은 30세겔, 남자아이는 5세겔입니다. 한 세겔이 은 11g인데, 이것은 노동자 4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50세겔이면 노동자의 200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서원한 사람이 만약에 그 금액을 감당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8절을 보겠습니다. 레 27:8 →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한마디로 서원자에게 돈이 없다면 디스카운트! 깎아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성품입니다.

2) 가축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입니다.(9∼13) 하나님께 서원해서 바친 가축은 거룩한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어느 특정 가축을 바치기로 서원했는데, 그 가축과 너무 정이 들어서 바칠 수가 없다고 하면, 그 가축 값에다가 오 분의 일의 범칙금을 더해서 제사장에게 드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의도로 서원의 내용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 송아지였을 때 하나님께 서원했는데, 이 송아지가 너무 잘 먹고 잘 커서 아주 튼실한 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마음이 바뀌어서 “하나님! 이 소는 내 것으로 하고, 다른 소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바꿀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 27:10 → “그것을 변경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가축으로 가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불순한 의도로 나쁜 것으로 드리려고 하면, 둘 다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꼼수를 쓰면 안 되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산이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3) 집이나 밭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경우입니다.(14∼25) 집이나 밭은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원소유주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쳤는데 다시 무르고 싶을 때는 →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해서 그 가격에다 오 분의 일의 벌금을 더해서 드리면, 무를 수가 있게 됩니다.

4) 그런데,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해서 드릴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26∼33)

① 맏아들과 첫 새끼입니다.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서원해서 드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께서 당신 것이라고 선언하신 물건이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성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기생 라합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죽이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은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셨고 다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특정하게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서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③ 십일조는 서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해 주시면, 저는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이런 서원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당연히 드려야 할 것입니다.

소나 양 같은 가축도, 열 마리 중에 한 마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많은 가축 가운데 하나님 것을 구별하는 방법은, 외양간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에 막대기를 가로 놓고서, 가축들에게 자유롭게 지나가게 합니다. 그중에 열 번째 지나가는 것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조작해서, 소나 양을 억지로 줄을 세워서 열 번째 것을 제일 비리비리한 것이 지나가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에 속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레 27:32∼33 →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열 번째 지나갈 가축을 보니까 아주 실한 놈입니다. 이때 “아이고 왜 저렇게 튼실한 놈이 하필 거기 있어?” 하면서 그것을 빼고, 빈약한 것을 집어넣어서 순서를 바꾸면, 하나님이 그 둘 다를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기 27장의 주제는 ⇨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꼼수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신앙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책임 있는 삶입니다. 나의 신앙을 점수로 매겨본다면 몇 점을 줄 수 있겠습니까?

 

2. 서원을 이행하는 도중에 욕심이 생겨서 약속을 자기 입맛대로 변경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내 임의대로 축소했거나, 지키지 못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은 아주 정확하신 분(꼼수가 통하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 앞에, 새롭게 다짐하고 결심한 내용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8-13
조회 483


2022년 8월 14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희년의 복음 (레 25:8∼12)

 

오늘은 안식년이 7번 반복되고 그 이듬해인 50년이 되는 해, 즉 ‘희년’(Jubilee)에 대해서 ‘네 가지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희년 제도의 기본은 ‘안식년 제도’에 있습니다.

안식년에 관해서 출애굽기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 23:10~11 →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6년 동안은 씨를 심고 열매를 거두는 일에 힘써야 하지만, 7년째 안식년이 되면, 씨를 뿌리지도 말고 열매도 거두지 않음으로 일절 농사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파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열매가 있지만, 그런 열매는 자기 땅에서 난 것이라고 해도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에 열린 열매나 곡식은 특정 주인이 없는 것이고, 누구나 가져가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는 절도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심지어 짐승들까지 돌봐야 한다는 것이 ‘안식년의 첫 번째 정신’입니다.

나아가서 신명기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 15:1~2 →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형제나 이웃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안식년 끝에 가서도 빚을 갚지 못하면 탕감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면제년’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렇게 면제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식년은 가난한 사람이나 빚진 사람에게 엄청나게 좋은 해입니다.

또 신명기 15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신 15:12 →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러니까 종이 되었어도 6년 동안만이고, 7년째에는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이 되면, 토지도 쉬고, 사람도 쉬고, 빚도 면제해 주고, 노예로 삼았던 사람도 풀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안식년을 주신 목적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둘째, 사람이나 땅이나 6년을 일하고 사용했다면, 1년은 쉬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인간도 쉬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넷째, 재물을 쌓는 재미와 탐심에서 벗어나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다섯째,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은 천국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 희년의 기본정신은 ‘자유를 공포하는 것’입니다.

희년이 되면 자유를 공포해야 됩니다. 레 25:10 →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이 희년의 자유를 세 가지 ‘R’로 시작되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Return(돌아가다)입니다. 레 25:13 →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여기 ‘소유지’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2지파별로 배분해 준 땅을 일컫습니다. 이 땅은 대대로 팔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아프거나 가정사로 인해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그 땅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땅은 다가올 희년을 기준으로 값이 매겨졌습니다. 즉 희년이 40년 남았으면 40년 만큼의 값, 10년 남았으면 10년 만큼의 값으로 팔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희년이 되면 도로 원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땅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복음입니다.

둘째, Release(풀어 놓다)입니다.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에게 빚을 져 종이 되었다면 6년 동안 일하고 안식년에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6년이 채 안 됐는데 중간에 희년이 찾아오면, 그래도 무조건 자유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레 25:39~41 →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희년이 오면 무조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을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고도 하였습니다.

셋째, Rejoice(크게 기뻐하다)입니다. 희년은 기쁨을 되찾는 해입니다. 자유를 되찾은 자에게 가장 큰 감정은 ‘기쁨’입니다. 잃었던 땅과 자유를 되찾는 사람에게 큰 기쁨이 있을 수밖에 없죠! 희년을 히브리어로는 ‘요벨’이라고 하는데, 이 요벨은 ‘양각 나팔’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희년에는 양각 나팔을 불면서, 자유의 기쁨과 회복을 누리는 복된 해인 것입니다.


3. 희년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주일 날에 특별히 장사가 잘되는 직종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일날 문을 닫고 쉬기로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쉰다는 것은 곧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영업의 존폐를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이 있는 성도는 6일 동안 일하면, 주일에 쉬어도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니! 세상일을 쉬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배하는 삶이 진짜 복임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이 안식일의 개념을 잘 알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창 2:2 →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기 하나님께서 그가 하시던 일! 즉 ‘천지창조’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했습니다. 천지창조를 6일 동안에 이루고, 일곱째 날엔 그냥 쉬셨다, 노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날에 천지창조의 일을 ‘마치셨다’는 것은, 그날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말은, 어떤 일을 ‘완성, 마무리, 마감’하고 그것을 축하하고 기뻐하셨다는 뜻입니다. 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하신 일의 완성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난 6일 동안 수고하며 일한 것이, 진정 나에게 아름다운 결실이 되고, 완성이 되고,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려면, 그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 주셨고, 일터를 주셨고, 건강을 지켜주셨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신,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이 의미 있고, 감사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그냥 쉬려면 당연히 걱정되겠죠! 성경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 25:20 →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무슨 말입니까? 일하지 않고도 먹을 재주 있나?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레 25:21 →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할렐루야!

안식일이나 안식년을 지키기 위해서도 큰 믿음이 요구되지만, 희년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49년째가 안식년이고, 이어 50년째는 희년이기 때문에, 연속해서 두 해를 안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희년은 일종의 믿음 테스트 기간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믿음의 원리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이런 믿음을 하나님께 확실히 보여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년을 잘 지켰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노예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탐욕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희년은 차치해 두고 안식년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해서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가기까지, 490년 동안에 70년이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70년의 안식년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댓가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 동안 함으로써, 그 땅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대하 36:21 →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놀랍고 무섭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년을 지키지 않은 것을 하나님은 다 계수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보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안식년과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첫 설교에서 자신이 온 목적이, 희년을 선포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4:18~19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은 ‘나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의 은혜의 해가 오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으면, 죄로부터의 자유, 마귀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잃어버린 천국을 되찾게 되는 희년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안식년이나 희년을 지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까?

 

2. 안식년과 희년은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과 약자! 심지어 동물과도 함께 더불어 살라는 정신이 깃들어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입장은 무엇이었습니까?

 

3. 희년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십니까?



관리자
2022-08-06
조회 546


2022년 8월 7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더 높은 거룩성을 요구하신다. (레 21:1∼9)

 

여러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가 요구된다는 뜻입니다. 평소에 고위층으로서의 사회적 존경과 특권을 누리는 만큼, 사회가 어려울 때 그들이 누구보다 먼저 자기를 희생하고, 앞장서서 의무를 다하기를 국민들은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불러내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별된 백성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려야 하는 ‘제사장’들은 더욱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에, 거룩함의 수준이 더 높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제사장이란 직임은 신약에 와서도 일차적으로는 영적 지도자! 즉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모든 성도들은 다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벧전 2:9 →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새번역 성경)

그렇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서 구별된 영적 제사장 된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삶으로 보여주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사실은!

 

1. 영적 권위는 직책이나 지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삶에서 나옵니다.

레 21:4 →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백성의 어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단지 제사를 집례하는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모든 면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 임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더욱 성결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제사장이라는 직책이나 지위만으로는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참된 권위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권위는! 오직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에만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별 됨이 없이 단지 높은 지위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 권위를 발휘하려고 한다면, 당장에 거부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직책이나 지위에만 근거한 권위는 결코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권위 아래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있던 권위는 어떤 권위였습니까? 예수님에게 높은 지위나, 화려한 경력,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권위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거룩한 삶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바른길로 인도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위에 순복하게 해야 할 지도자들은, 먼저 자신의 성결에 힘써야 합니다. 자신이 성별 된 삶을 살지 않으면서, 바른 삶, 정결한 삶을 살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것은 허공을 치는 소리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2. 구체적으로 어떤 거룩함을 요구하십니까? - 제사장의 성결규례

 

① 시체 접촉금지 레 21:1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죽은 사람의 몸을 만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일반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직계 가족의 장례가 생기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 자녀 형제, 그리고 결혼하지 않는 누이의 장례식입니다.

죽은 자의 ‘성경적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신이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는 비위생적이고 불결합니다. 특히, 전염병으로 죽은 자는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와의 접촉금지 명령은, 거룩한 제사장을 육체적으로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내려진 명령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죽은 자의 의미’는 ‘영혼이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죄인은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에 묻혀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러한 세상 가치관과 세상 문화에 젖어 사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물들 수 있기 때문에, 제사장의 영혼이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12:2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생활 하라는 뜻인 것 같지만,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서 살되 구별되게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꼭 배와 물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배는 물 없이는 무용지물입니다. 꼼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지, 물에 침몰하면 그 역할은 끝입니다. 세상 속에 사나 세상 풍조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은 비싸거나 화려한 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② 과도한 애도 금지 레 21:5 →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이 말씀은 당시 이방인의 장례 풍습과 같이, 가족이 죽었다고 해서 머리털을 대머리같이 빡빡 깎거나, 수염 양쪽을 밀어서도 안 되고,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는 표시로 자기 살을 베는 자해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슬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정신 건강에도 좋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슬픔 가운데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슬픔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적절한 답을 주고 계십니다. 살전 4:13 → “형제들아 자는 자들(죽은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③ 제사장 자신의 결혼규례 레 21:7 →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니라.” 여기 부정한 창녀란? 당시 이방 신전에서 매춘하는 여자들을 말하며, ‘이혼당한 여인’이란 음행의 부정행위로 인해 쫓겨난 여인을 말합니다. 합법적인 이혼증서를 가진 여인과 결혼할 수 있었던 일반인과 비교해 보면, 좀 더 강화된 규례입니다.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④ 제사장의 딸이 음행하면 불사르라. 레 21:9 → “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 제사장의 가족들에게도 더 엄격하게 거룩함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죽이라고까지 명령한 것은, 가정을 거룩한 신앙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딤전 3:4∼5, 12, 딛 1:6) 모든 성도들은 자녀들을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로 길러 가기 위해, 스스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⑤ 제사장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늘 생각하며 살라. 레 21:4 →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네! 제사장은 그 나이와 상관없이 백성들의 어른이므로, 스스로를 잘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딤전 4:12 →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레 21:6 →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한 마디로, 제사장은 예배를 주관하는 자이니 더욱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배자로서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⑥ 백성들은 제사장을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알아주라. 레 21:8 →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네! 일반인들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일반인을 대신하여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구별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제사장들은 그 사명과 권위에 걸맞게 구별되고 거룩한 삶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할 때 시대는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특권은 책임이다!” 제사장직은 감투로 주어진 직분이 아니라, 헌신하라고 주어진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지고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영적 분별력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눔과 묵상

 

1. 영적 리더에게 요구되는 조건들에 대해서 나눠 보고, 우리 자신들의 삶을 비춰봅시다.

 

2. 자신이 세상에서 거룩함과 구별됨을 지켜 가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이며,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서로 나눠봅시다.

 

3. 평신도는 적당히 해도 된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세상의 제사장들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더 높은 거룩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2-07-30
조회 298

제목: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자 (시 89:46∼52)

 

오늘 본문 시편 89편은, 하나님이 다윗과의 언약에 근거해서, 지금 열방의 조롱거리가 된 다윗 왕조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고 성취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89편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대해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시 89:3∼4 →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은 오늘 성경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앞의 말씀인 시 89:19∼37까지의 말씀인데, 길지만 3번으로 나눠서 읽어 보겠습니다.

① 먼저, 하나님께서 다윗을 직접 택하셨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셨은즉, 원수와 대적이 다윗을 해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시 89:20∼24 →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② 이어서,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인자하신 분으로서 언약을 굳게 지킬 것이지만, 만일 자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회초리와 채찍으로 사랑의 징계를 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시 89:28∼32 →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③ 이렇게 사랑의 징계를 할지언정, 결코 하나님의 언약을 폐하거나 깨뜨리지 않고 다윗의 후손을 장구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시 89:33∼37 →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그런데 38절부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집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어조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분명하게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는 것을 토해 놓습니다. 시 89:38∼41 →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약속하셨으면 지켜주셔야지! 이게 뭡니까? 항의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하실 때, 다윗의 후손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징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0∼32절에서도 그랬고, 사무엘하 7:13∼16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원수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은 웬일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지금 ‘당돌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연거푸 하나님께 질문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시 89:46, 49 →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前)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이런 기도는 사실 그냥 읽기에도 좀 가슴이 떨립니다. “불경스럽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기도해도 되나?” 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자녀 된 성도가 누리는 은혜요, 특권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걸 붙들고 기도하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단 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되어 이방 민족에게 끌려간 지 어언 60여 년이 흘렀습니다. 다니엘의 나이도 80세 가까이 되어, 이제는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희망도 희미해지고, 기도할 힘조차 빠졌을 때입니다. 다니엘이 왕의 서고에 들어가 이 책 저 책 살펴보다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두루마리 성경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읽다가 깜짝 놀랄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 9:1∼2 →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그때 다니엘이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날부터 다니엘은 금식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단 9:3∼4, 17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러니 약속하신 것을 지켜주세요!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황폐한 예루살렘 성을 회복시켜 주세요.” 이렇게 약속을 붙잡고 기도한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를 위하여! …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해방과 예루살렘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니, 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곧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담대함의 표현인 것입니다. 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할 때는, 이런 담대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다니엘의 기도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견고하게만 보이던 바벨론 제국이, 신흥 제국 메대에 순식간에 망하고, 곧이어 페르시아 제국에 복속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했습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당돌해 보이는 이런 기도는! 다니엘 같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동일하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네!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은혜와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드리는 기도’와 vs 그저 ‘힘듭니다.’ ‘괴롭습니다.’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는 기도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 66년 동안, 오만 번 이상의 기도 응답과, 일만 명이 넘는 고아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던 ‘조지 뮬러’ 목사님은, 세 개의 성경구절을 ‘약속의 말씀’으로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① 시 68:5 →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② 빌 4:19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③ 마 17:20 →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고 기도했기에, 그는 그 큰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 또한, 아프리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선교사 ‘리빙스턴’은 주님께서 주신 두 가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 승리했습니다. ① 요 14:18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② 마 28:20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너무나도 중요한 ‘자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글로 써서 주신 ‘보증서’와 같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땅문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곳엘 가보니, 어떤 사람이 그 땅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땅문서를 보여 주면서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찾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바로 그와 같은 책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약속을 나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믿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후 1:20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을 여러분 심령에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성도 여러분! 낙심하고 좌절하고 계십니까? 살기가 힘들고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안 하셨다면, 이제부터라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미래를 환하게 여는 확실한 길이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약속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와 특권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말씀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여 응답받고 승리한 오늘 예시된 사람들 중에 가장 본인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나,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7-23
조회 593


2022년 7월 24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백성 (히 12:28∼29)

 

이 세상에 완전한 나라는 없습니다. 지금도 많은 나라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홍콩, 우크라이나, 스리랑카 같은 나라뿐 아니라,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미국도 유럽도 다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 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서 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단 2:44 →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소망해야 할 본향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 눈물도 없고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고 고통도 없고, 괴로움이 없는 저 ‘하늘나라’, 하나님이 계신 ‘천국’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6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저 천국이, 하늘나라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1.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히 12:28 →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욱 빨리 모든 것들이 변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개념도 바뀌고, 정치 이념도 바뀌고, 가치의 개념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뀌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면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① 우리가 믿고 섬기는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②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지만,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고 우리의 요새가 되십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영원한 지옥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두 길은 죽음 이후에 갈라집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과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고! 죽음이 내게 다가오는 날! 저 천국에서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근에도 여러 가정의 식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의 가정이 드리는 ‘천국 환송예배’는 세상 사람들의 초상집과는 다릅니다. 물론, 육신적으로는 사랑하는 가족을 보내는 일이니 슬프고 아프지만,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다시 기쁨으로 만날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처럼 막 울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감사한 일입니다.

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은혜!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그것이 은혜입니다.

② 이렇게 넘치는 은혜를 받은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히 12:28의 → “¹은혜를 ²받자”는 말씀에는 이런 관주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밑에 해설을 보면 1) ‘또는 감사하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28절 말씀은 →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감사하자.”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NIV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히 12:28 → “Let us be thankful.” “감사합시다”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은혜를 받자”는 말과 “감사하자”는 말은 실상 같은 말입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첫째도 감사요, 둘째도 감사요, 셋째도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하지만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은! 있던 복도 다 잃어버립니다. 늘 불평하는 사람, 부정적이고, 남을 물어뜯고 끌어내리는 사람은, 결국 인생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피다가 말고 시든 꽃처럼, 저물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쁨과 감사로 살아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2. 경건함으로 살라.

두 번째,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길 때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 12:28 →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여기 ‘경건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을 신학적으로 ‘중생’ ‘거듭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평생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중생하긴 했는데, 성화의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십 년, 이십 년 지났는데도, 별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달라져야 하고,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야 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권면한 말씀이 있습니다. 벧후 1:4∼7 →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믿음의 기초위에 ‘신앙의 집’을 지어 가는데, 제일 꼭대기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신앙의 형제자매인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믿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갈등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사랑의 사람, 돌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늘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히 4:16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늘 주님 앞에 엎드려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는데! 주님의 기대대로! 믿는 자답게! 살지 못하는 부족한 우리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

히브리서 12장 28절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히 12:28c →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3가지입니다. ① 절대 믿음 ② 절대 긍정 ③ 절대 감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11:6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절대 믿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절대 긍정),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절대 감사).” 할렐루야! 이 3가지를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모토로 삼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남 탓을 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또한 합력하여 선한 결과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 그런 긍정의 마음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세계 전체가 경제적인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어려움은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때에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주님을 꼭 붙잡고 믿음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두 개의 성경구절을 드립니다. 고전 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마태 6:33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도 여러분! 인생의 풍파가 많고 시련이 많으나, 만세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굳게 서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서 뒤흔들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만세 반석이신 주님이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가면 우리는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흔들리지 않는 터전입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젊음입니까?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터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터전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살다 영원한 천국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혹 이것은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그렇지 않음을 깨닫거나 경험한 것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부활과 천국의 소망이 있는 믿음의 사람과, 세상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비교해 보며, 믿음의 소중함에 대해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① 절대 믿음 ② 절대 긍정 ③ 절대 감사 중에, 본인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나눠보며 새 다짐을 가집시다.

관리자
2022-07-16
조회 609

2022년 7월 17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서로 돌아보아 모이기에 힘씁시다. (히 10:19∼25)

 

오늘 본문 말씀은 세 가지를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1. 우리 함께 하나님께 가까이 가자.

히 10:22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기서 말하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십자가의 도를 믿는 믿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땅에 발을 디디고 사나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필요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꼭 필요한 의식주 문제만 해결된다고 해서 사람이 만족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온통 세상 것으로 그 마음이 가득 찬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그 방향과 목적의식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물질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유와 평등, 복지나 인권의 신장 같은 주제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이루어지고 구현된다고 해서,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천국에 이르는 길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참 마음’은 어떻게 하든지 긁어모으고 부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현실의 인생을 즐기려 하지 말고, 솔로몬이 말년에 고백한 것과 같이,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전 12:13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은 서로 간에, 참 마음과 바른 믿음을 갖고 살도록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늘 만나는 사이라도 피상적으로 “저 사람은 장로님 딸이니까 당연히 믿음이 좋겠지! 저 사람은 모태 신앙이니, 내가 그의 믿음에 관하여 관심 가질 필요가 없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믿음이 충만하다가도, 어떤 계기로 시들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직분도 높고, 겉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참 잘하는 것 같이 보이는데! 보기와는 달리 거의 믿음이 없거나, 의심과 회의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 믿음의 말로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믿음을 확인하고, 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네 믿음이 참 아름답다”라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함께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격려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 함께 소망을 굳게 붙잡자.

히 10:23 →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새번역) →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이 세상의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에 참여하고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천국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겪는 고난과 역경과 핍박이 제아무리 크더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 6:19 →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부활과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이 있으면, 어떤 풍랑과 비바람에도 그 인생의 배를 안전하고 확실하게 붙들어 주는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과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면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낙심치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견고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교인들 가운데도 많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믿음으로 격려하고 돌아보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권고하는 성경 구절 두 군데를 보겠습니다. 욥 4:3∼4 →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성도 여러분! 물질이나 구체적인 도움도 필요하지만, 대부분은 말로 하는 ‘격려’만으로도 다시 소망으로 일어서게 하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히 12:12∼13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성도들 가운데도 너무 힘들고 지쳐서 기력이 없고, 똑바로 걸을 힘조차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다리가 아주 어그러지지 않도록, 사랑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님! 집사님! 많이 힘드시죠! 그래도 힘을 내십니다. 주님이 성도님의, 집사님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한 결과로 열매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더욱 기도하며 도전합시다. 저도 뒤에서 기도로 중보할께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놀라운 미래와 계획을 갖고 계심을 믿고 다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한다면! 낙심했던 사람도 새 용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서로를 돌아보아 모이기를 격려합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모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권고하기를 ‘서로 격려하여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십니다. 히 12:24∼25 →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장작도 모여야 불이 잘 타오릅니다. 성도들도 함께 모여야 영적 힘을 얻습니다.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쁘다는 이유로 예배를 등한히 여기고, 이런저런 이유로 예배를 건너뛰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열심히 모이지 않고 신앙이 성장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영적으로 충만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열심으로 모이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바쁘지만, 부득이한 일들이 많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모여야 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격려합시다. 속회에 빠지지 않도록, 선교회 모임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격려합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핍박 속에서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날마다 모여 찬양했습니다. 날마다 모여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모여 애찬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렇게 자주 모였기에 능력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지난 7월 5일에 우리교회에서 후원하고 있는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보내온 통계 자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온라인 예배’가 대세이니, 그 흐름을 꺾으려고 애쓰지도 말고, 결단이란 명목으로 유튜브 온라인을 중단하지도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온라인으로도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82%에 이른다는 통계 조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자료들을 보는 가운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82%가 ‘온라인으로도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대답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코로나 펜데믹이 오기 전에 현장 중심의 예배, 성경공부, 속회, 선교회, 소그룹 모임 등을 통해 이미 견고한 유대 관계와 공동체성을 확보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온라인을 통해서도 “아! 나는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 간에 소통하고 있으며, 유익한 영적 정보들을 공급받고 있으며, 목회적 돌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만일! 이런 ① 성도 간의 ② 목회자와 성도 간의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온라인을 통해서만은 결코 신앙적인 성장과 성숙!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사람으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든지 ① 온라인에 숨어 있거나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② 현장 예배공동체를 통하여 은혜 받게 하고, ③ 소그룹 공동체에 참여하여, 함께 나눔과 교제, 섬김의 기쁨을 맛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수고하신 교구장님 속장님, 선교회장님과 임원들! 모두 모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그런 열심과 수고와 헌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예배의 현장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대로 시대의 조류가 그렇다고! 그것이 편하다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권하여 함께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 침체에 빠졌던 사람들이 회복될 것입니다. 성장을 멈췄던 사람들이 다시 성장할 것입니다. 용기를 잃었던 사람들이 다시 활력을 얻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서로를 향한 진정한 영적 격려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솔로몬이 누렸던 부귀영화로도 인간의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땅에 발을 디디고 사나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함이 깨달아졌다면 나눠봅시다.

 

2. 신앙이 성장하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소그룹 활동’과 ‘격려 사역’이 매우 중요함을 나눠봅시다.

 

3. 성도 간에, 목회자와 성도 간에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온라인을 통해서만은 결코 신앙적인 성장과 성숙!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사람으로 자랄 수 없다는 것과, 이들을 향한 우리의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7-09
조회 504


2022년 7월 10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영원한 대제사장이 주시는 소망! (히 7:11∼19)

 

 

1. 예수님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히 7장은 ‘구약의 제사장’과 ‘신약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압도적인 우월성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제사장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율법’과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제사장들은 이 율법 없이는 아예 그 직분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제사장이라는 직분자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규정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즉 제사장은 어떤 지파의, 어떤 가문의 사람들이, 어떤 절차에 의해 임명되고, 어떤 예복을 입어야 하며, 또한 그가 행할 주 임무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집례해야 하는지? 이 모든 것들이 다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철두철미하게 율법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고, ‘율법과 상관없는 제사장’이나 ‘율법에서 벗어난 제사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열렸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일어난 대변혁입니다.

오늘 본문 히 7:12에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입니다. →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즉 예수님은 율법의 규정에 매이지 않는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지배하고 있던 율법을 초월하고 완성시키는 분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5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제사장 ‘멜기세덱’에 대해서 알아봐야 합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이 시날 왕을 비롯한 다섯 연합군들을 물리치고, 사로잡혀갔던 조카 롯을 비롯한 재물과 부녀자들과 친척들을 찾아서 돌아올 때, 그를 맞이했던 살렘(샬롬) 왕이며 제사장인 사람입니다. 그는 아브람을 향하여 이렇게 축복합니다. 창 14:18∼20a →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이 ‘멜기세덱’을 일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점입니다. 성경은 그가 어떻게? 언제부터? 무슨 근거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의 족보나 부모에 대해서,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냥 갑자기 나타나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을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아브람 시대였으니까!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이나 율법이 세워지기 훨씬 전, 레위 지파가 생기기도 전, 아론이 첫 제사장이 되기도 훨씬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이란 제사장은! 율법에 의해 세워진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하게 세우신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바로 멜기세덱과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보내시고 세우신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7:15 →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 제사장처럼 ‘율법과 아무 상관 없는’ 별다른 제사장! 아주 특별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6절에서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히 7:16 →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제사장들을 규정하기 위하여 있는 ‘계명의 법’을 따라서 제사장이 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던 구약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율법을 완전히 초월하여 대제사장이 되신 ‘아주 특별한 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대신 무엇에 의하여, 혹은 무엇을 근거로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십니까? 그 대답이 16절 하반 절에 있습니다. 히 7:16b →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바로 이 말씀인데, 여기 ‘불멸의 생명’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영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의 능력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운 힘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예수님이 율법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서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면, 아무리 제사장들 중에서 최고로 훌륭한 대제사장이라 해도! 여전히 율법 아래에 있는 존재, 율법이라는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제사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분명히 정죄하는 죄인을 특별 사면 시키고, 율법이 엄격히 저주하는 죄인에게 영생과 구원을 거저 베풀어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완전히 초월한 대제사장이 되셨던 것이며,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세워지신 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① ‘율법이 임명해 주어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자존 하시는 생명의 능력’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며, 또한 ② ‘율법이 선포하는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율법이 저주하는 자에게도 영생과 구원을 선포해 주실 수 있는’ 실로 놀라운 대제사장이신 것입니다.

테니스의 4대 메이저 대회 중 ① 호주 오픈 ② 윔블던 ③ U.S.오픈에서는 ‘호크아이’라는 비디오 장비로 테니스 공이 아웃(Out)인지 인(In)인지를 판정합니다. 하지만 ④ 프랑스 오픈에서는 여전히 사람의 눈으로 판단하는 콜을 따르고 있습니다. 매 경기마다 중앙의 높은 심판석에 주심이 앉아 있고, 베이스라인과 서비스라인을 판정하는 선심들이 따로 서 있습니다. 이때 선수들이 친 공의 ‘인아웃’(in-out)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선심이 판정을 내리고 ‘콜’(call)을 합니다. 하지만 주심은 선심의 판정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오버룰’(overrule)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 ‘오버룰’이란 선심이 내린 판정을 번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같은 심판이라도 주심이 모든 선심들 위에 있는 최고의 심판이며, 최종적인 판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선심이 ‘인’이나 ‘아웃’을 ‘콜’했다 하더라도, 주심이 ‘오버룰’을 선언하면 그 주심의 판정만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 역시 ‘율법의 판정’대로 한다면, 모두 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의 공의’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이미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율법의 ‘콜’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오버룰’ 해 버리신 것입니다. 분명히 ‘죄인’인데 ‘의인’이라고 칭해 주시고, 당연히 ‘지옥 형벌’에 떨어져야 마땅한 인생인데도 ‘영생의 특사’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그렇게 ‘칭의’와 ‘구원’을 선포하시면, 율법이 내렸던 정죄의 판정은 더 이상 효력이 없으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무죄 선고만이 최종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고도 고마운 일이 아닙니까? 나 같은 죄인을 끝까지 옭아매려 하는 ‘계명을 폐하기’ 위해서 아예 ‘육체에 상관된 율법을 좇지 아니하고’ 그 대신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2. 완벽한 중보자가 되어 주신 대제사장 예수님!

히 7:25 한 절 말씀을 보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히 7:25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여기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라는 표현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만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시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심을 뜻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디모데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전 2:4∼5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과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삯인 사망의 값은 완전히 치러졌고, 구원의 길은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예수님의 공로로, 그 이름을 인하여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시원하게 해방시켜 주신 분이 바로 ‘새 언약의 멜기세덱’이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히 7:25입니다.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네!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날마다 우리를 위하여 대변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예수님이 하나님 옆에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땅에서 나를 믿고 세례받은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입니다. 보혈의 공로를 입은 사람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중보하시는 예수님! 정말 멋지고, 믿음직하고, 고맙기 짝이 없는 대제사장 예수님 아니십니까? 이 예수님을 인하여! 늘 담대하고 소망 가운데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멜리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새로운 제사장! 예수님이 세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율법이 결코 우리에게 소망이 되지 못하고, 은혜가 소망인 이유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주심은 선심의 판정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오버룰’(overrule)을 선언하여, 선심이 내린 판정을 번복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이 선언하신 ‘오버룰’에 대해서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