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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관리자
2022-11-19
조회 536


2022년 11월 20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심을 믿는다면! (단 9:2∼3, 19∼23)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도의 사람’ 다니엘을 잘 배우고, 그의 모범을 잘 따라 함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후반부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단 9:2b →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칠십 년이 지나면 포로 생활은 끝이 나고,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런 확신과 믿음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2절 전반부에 나오고 있습니다. 단 9:2a →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네! 여기 책이란! 두루마리 성경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예레미야’서를 읽고 깨달은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이렇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렘 29:10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다니엘은 이렇게 예레미야서를 보면서,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 만에 그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 시절에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온 다니엘은, 어느새 나이가 80세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12세∼15세 정도의 나이 때에 포로로 잡혀 왔다면, 약속된 70년은 짧게는 2년! 길어야 5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진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루살렘의 회복이 정말로 실현되도록! 기도하며 간구할 것을 결심합니다. 단 9:3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아니!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꼭 기도해야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에 대답은 이것입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쌍방 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도! 우리가 그것을 원하고 바라야지! 원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데, 그냥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 36장입니다. 겔 36:37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약속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따라서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하며, 또한 축복하길 원합니다. 두 가지인데! 첫째는,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꼼꼼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꼼꼼히 읽는 방법 중에 제일 좋은 방법은! 성경을 ‘필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말씀이 나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깨달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진리로서의 말씀인 ‘로고스’가 아니라, 나에게 주신 ‘레마’의 말씀으로! 깨달아지고 확신이 생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여기고 기뻐하면서! “네, 주님! 그 약속이 저에게 실현되게 해주세요.” “그것을 저에게 주세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요 16:24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말씀에 근거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해야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늘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듣는 자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도 그렇게 이끌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먼저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우리가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데! 그 기도에도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회개의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약속은 ‘쌍방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도! 우리가 받을 만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실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엄마가! 아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냄새가 확 느껴졌습니다. 아이는 엄마! 하면서 주방으로 달려가 얼른 그 음식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의 손은 몹시 더럽고, 얼굴에도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다면! 그냥 음식을 줄 엄마는 없습니다. 먼저, 깨끗이 닦고 올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그것을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더러운 ‘죄’ 때문입니다. 이사야 59장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 59:1∼2 →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여,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요일 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먼저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단 9:3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그가 드린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2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단 9:20입니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단 9:20 → “내가 아뢰어 기도하면서 ① 나의 죄와 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고 ② 나의 하나님의 거룩한 산 성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주 나의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먼저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간구한 것입니다. 네! 다니엘은 자기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했습니다. 다니엘은 이 회개의 기도에서, 결코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았습니다. 꼭 자기를 포함시켜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 대상’을 “우리”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무려 55번이나 ‘우리’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했습니다. 단 9:5∼6 →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는 그저 한 개인일 뿐이지만,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혼자의 기도가 무슨 힘이 있겠어?” 이런 생각을 가질 것이 아니라, 다니엘! 한 개인의 기도가 이스라엘을 살린 것을 기억하고, 또한 모세! 한 개인의 기도가 이스라엘을 살린 것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가족과 조상과 민족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그 죄를 씻어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할 때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단 9:21∼22 →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그래서 그 지혜와 총명으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기는 그런 ‘예지의 은혜’를 여러분들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역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답입니다. 렘 33:2∼3 →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멘.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도, 모든 일을 만드시는 분도, 성취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지혜와 총명과 정답이 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시면! 아멘!

빌 4:6∼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지혜나 총명을 구하고, 길을 찾고 답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크고 은밀한 모든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약 1:5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이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그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해야! 힘 있고 능력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해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먼저 ‘회개의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해 나눠봅시다.

 

3. 말로 배워 되로 쓰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에 대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1-12
조회 716


2022년 11월 13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신앙 ! (단 6:1∼10)

 

신앙생활 도중에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너무나 쉽게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주인공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6장 후반부에 가면 그런 믿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23절 하반절입니다. 단 6:23b →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신앙생활의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산 결과는 무엇입니까? 단 6:22 →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다니엘을 모함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의 결백을 증거해 주셨고, 오히려 그들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단 6:24 → “왕이 말하여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들의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서뜨렸더라.” 네! 대역전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단 6:28 →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바벨론, 메대, 페르시아 왕조로 교체되었어도, 다니엘은 변함없이 왕 다음인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끝날까지 믿음을 지킨 자에게, 하나님은 영광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며 존귀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앙생활 했기에! 끝까지 승리했고, 형통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1. 삶의 현장과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벨론을 복속한 메대 사람 다리오 왕은, 고관 120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3명의 중앙 총리 세웠습니다. 다니엘은 그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지방 총독들을 감독하는 자로서, 국가 재정과 통치력의 누수를 막는 일을 했습니다. 다니엘은 이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 유익을 주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사람이 살아가야 할 모습이요,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창 12:2,3b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온 세상의 축복의 통로로, 복덩어리로, 유익을 끼치는 삶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롬 4:16) 그러기에 우리도 어느 곳에 있든지,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했고 탁월했습니다. 충성되게 일했습니다. 높은 관직에 있었기에 얼마든지 자기 이익을 챙기면서 살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권력 남용이나 비리 같은 것은 결코 없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다니엘처럼 살기로 결단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야 합니다. 이 사회 구석구석에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 3:22∼24 →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씀을 꼭 마음에 새기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공표하고 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다니엘은 참으로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왕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래서 왕이 전국을 다스리는 3명의 총리 중에 최고 높은 자로 세우려 했습니다.(3절) 다니엘을 질투하는 총리들과 고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를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으로는 다니엘의 흠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 믿음! 하나님과! 관련해서 함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충성하는 표시로, 한 달 동안은 다른 신에게 기도드리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 만약 이것을 어기면 사자 굴에 던져 넣도록 하는 법령을 선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왕의 도장이 찍힌 이 법령은 왕 자신도 취소할 수 없는 절대 변경 불가의 명령이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협과 압력 앞에서 다니엘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너무 귀한 말씀이기에! 다 같이 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단 6:10 →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사실 다니엘은 30일만 기도를 쉬거나, 문을 닫아 놓고 숨어서 속으로 기도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다니엘은 이렇게 한 것입니까? 적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은 숨어서 할 일도 아니고, 그런 때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공개적으로 자기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세상의 왕이 지상을 다스리는 최고의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세상의 역사를 다스리고 계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자기 삶에 가장 중요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할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왕상 8:48∼49 → “자기를 사로잡아간 적국의 땅에서… 성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소서.” 이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②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기도 시간에 맞추어서 기도한 것입니다. ③ 다니엘은 평생토록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했습니다. 기도생활과 경건생활은 어느 한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소년 시절 포로로 잡혀 온 때로부터 노구가 된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평생 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도의 내공이 쌓이고, 성령 충만한 다니엘이 되었고, 그러므로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다니엘의 기도를 본받기를 바랍니다.

 

3.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나고 영광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기도함으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지만, 그로 인해서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보호해 보려고 애썼지만,(14절) 대적자들은 법령을 근거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고 강압했습니다.(15절) 다리오 왕도 하는 수 없이 다니엘을 내줍니다. 그러면서도 다니엘에게 의미심장한 격려의 말을 합니다. 단 6:16 →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성도 여러분! 이 왕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의 신앙과 삶과 인격을 통해서, 이방 왕인 다리오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이방 왕이 밤이 새도록 금식합니다. 잠자기를 마다합니다. 19과 20절을 보면,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사자 굴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소리 질러 다니엘의 안부를 묻습니다. 단 6:20 →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어떻게 대제국의 왕이! 일개 신하를 이토록 신경을 쓰며, 안타까워하며, 사랑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다니엘이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평소 다니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살아계심을 경험하였기에,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가능성을 믿었던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리오 왕이 기대했던 바와 같이, 이번에도 역시 다니엘의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셔서 다니엘을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22절)(할렐루야!) 그러자 이방 왕 다리오는 자신이 보고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찬양하며 높이는 고백을 합니다. 단 6:26∼27 →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아멘!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 오시면서, 여러분도 고난과 역경과 축복을 통하여! 여러분과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다른 사람들이 보았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나를 통해서 주변 사람들과 동료와 친구와 친척들에게 하나님이 드러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고후 3:3 →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대사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내 삶이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도록! 그 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바른 믿음과 신앙생활이 되도록 다니엘을 본받아 살아 갑시다. 다른 어떤 것과 결코 주님을 바꾸지 않겠다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큰 상급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대적들도 인정할 만큼 다니엘은 총리로서 신실하고 충성되었습니다. 당신은 성도로서 일터에서도 신실함과 거룩함을 지켜가고 있습니까?

 

2. 다니엘처럼!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가치를 ‘지킬 것이냐? 버릴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섰던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다니엘은 하루 세 번, 시간을 떼어 기도하는 일을 생명줄처럼 여겼습니다. 예수님도 바쁜 사역 중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성도에게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1-05
조회 486


2022년 11월 6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여호와로 인하여 감사 ! (합 3:17∼19)

 

1. 밤하늘도 파랗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될 때, 우리의 삶이 마치 ‘캄캄한 밤과 같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캄캄하다고만 생각하는 밤하늘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까맣지 않고, 실은 파랗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밤하늘은 으레 까말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밤하늘을 새까맣게 칠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밤하늘도 파랗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진을 찍어보면 밤하늘도 파랗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는데! 휴대폰의 카메라로는 좀 어렵지만, 수동 카메라로 노출을 적게 열고 대신 셔터를 20초 정도로 길게 해서 밤하늘을 찍으면, 사진 속에 나타나는 하늘이 파랗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단지 밤하늘)  

(인천공항 전망대)



살다 보면! 누구나 캄캄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할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밤하늘을 바라볼 때! 조금 여유를 가지고 20초의 속도로 생각해 보면! 밤하늘도 캄캄한 까만 색깔이 아니라, 희망의 파란색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적 여유를 갖고! 인생을 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각도에서 인생을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가 되기도 하고, 원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달라져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달라져야만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으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어떤 여건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만일 환경이 바뀌고, 여건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 사람의 입에서는 결코 ‘감사’라는 말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소망 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냈던 믿음의 사람들!

성경에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소망 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냈던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비록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유하지 못했고, 세상적으로는 형통하지 못했어도, 말씀과 믿음에 관하여 부요하였기에! 저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은혜가 있었습니다. 감격이 있었습니다. 감사가 있었습니다. 구원이 있었습니다. 천국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증인들을 얼마든지 여러분 앞에 세울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하박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합 3:17∼18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본문에서 하박국은 ‘여섯 가지’가 없다고 했는데, 이것들은 없어서는 안 될 삶에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무화과는 양식이요, 포도는 음료수입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이요, 밭의 식물은 식량이요, 양털은 옷입니다. 소는 밭을 가는 일의 수단이요, 양은 제사의 제물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의식주 문제가 막막하다 할지라도! 나는 감사하며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정치 현실을 바라보면 암담하다 할지라도, 경제에 미래가 없다 할지라도, 사업이 캄캄하게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이 타락해서 썩었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곁에 살아 계심을 믿기에! 나는 그분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이런 차원 높은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박국은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합 3:19 →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기 “사슴과같이 높은 곳에 다니게 하셨다”는 말은! 생각의 수준이, 삶의 내용이, 신앙의 경지가! 세속적인 가치 기준과 세상의 영향력 속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수준에서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네! 우리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의 삶의 수준이! 바로 그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수준이, 우리의 믿음 수준이! 그와 같이 높아지면! 부하면 부한 대로, 비천하면 비천한 대로, 언제나 자족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높은 산과 거친 들에서도! 얼마든지 하늘나라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믿음과, 신앙과, 영적 풍성함을 유지하고 살아갈 때, 그 마음에 소망이 넘치고 넉넉함이 있고 감사하는 인생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손과 발엔 쇠고랑이 채워졌습니다. 얼마나 맞았던지! 온몸이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깊은 밤에 하나님 앞에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합니다.” 실라도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이 감사하며 찬송하는 가운데 쇠고랑이 끊어졌습니다. 옥문이 열렸습니다. 옥사장의 마음 문이 열리고, 그 가정이 구원받고, 빌립보 성의 전도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행 16:33∼34 →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할렐루야!

 

3. ‘감사’는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어

그렇습니다. ‘감사’라는 말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감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마음은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결코 쉬운 마음이 아닙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②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③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불신앙, 막힌 귀, 감사를 잃어버린 냉담한 마음, 이런 것들은! 분명 우리의 삶을 어둠 속으로 몰고 가는 도구와 통로입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축복된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반면에!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불평의 조건만 늘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거친 들도, 초막도,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은 빛이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은, 세상이 밤이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다고 하여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닥친 어려운 경제 여건을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도 그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경제불황을 극복하는 일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우리의 인생이 걸려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경제불황을 극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필요한 일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은! 경제가 회복되어야 숨을 쉬고 살 수 있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과 관계없이 언제나 승리와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43편 말씀입니다. 시 43:5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고백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힘과 능력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앞이 캄캄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힘들고 어려울 때! 그 진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밝은 대낮에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에 누구나 소망을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우리가 가진 믿음의 진가를 발휘할 때입니다. 캄캄한 밤에 하나님을 바라보심으로, 밤하늘도 파랗다고 외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니! 언제 어디서나 감사한다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그 소망으로, 어두운 밤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신비한 언어인 ‘감사’의 힘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하박국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슴과같이 높은 곳에 다니게 하셨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생각의 수준이, 삶의 내용이, 신앙의 경지가 고난으로 인해 높아졌음을 말합니다. 이와 동일 하거나 비슷한 나의 고백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없음으로, 잃어버림으로 더 큰 것을 발견하고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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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30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기적의 원천 (요 6:1∼13)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서 네 권에 다 기록된 유일한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조용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람들을 떠나, 배를 타고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가시는 방향을 보고는, 사람들이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 있었습니다. 벳새다 광야!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 남자 장정만 5천 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몰려든 무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마가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막 6:34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쉬려고 가신 곳이었지만, 오히려 저물 때까지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여기는 빈들입니다. 날도 저물어 가는데 사람들을 마을로 돌려보내시죠. 그래야 뭐든 사 먹기도 하고 끼니를 해결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막 6:37입니다.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그들이 동리로 돌아가도, 빵을 사서 먹을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일 음식이나 돈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실을 잘 아시면서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에는 분명히 ‘기적’이 있습니다. 신앙은 예수님 안에 있는 ‘무한한 능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졌어도,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어떻게 무리를 먹여야 할 것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빌립을 시험코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 6:6입니다.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그러니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해결 ‘방법’이 아니라, 해결하려는 ‘믿음’이었습니다. 네! 기적은 방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대단히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요 6:7입니다. →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환산해보면 일당을 10만 원만 쳐도 2천만 원입니다. 적어도 2천만 원의 돈이 있어야, 뭐라도 좀 사 먹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빌립의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장소는 ‘빈들’이라고 했는데! 빌립은 이 빈들만을 바라본 것입니다. 함께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고,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빌립은 이렇게 말했어야! 그가 참믿음의 사람입니다. “주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능히 이 군중들을 먹일 수 있음을 내가 믿나이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소서. 저희가 순종하겠나이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빈들에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빈들의 기적’을 일으키는 ‘원천’이 되었습니까?

 

첫째, 헌신입니다.

13살 먹은 바비 힐(Bobby Hill)이란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에 주둔하던 미국 군인의 아들이었는데!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에 관한 책을 읽고 감동했습니다. 소년은 슈바이처 박사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유럽 지역 미 공군 사령관이었던 ‘리처드 린제이’ 장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산 아스피린 한 병을 보냅니다. 이 약을 아프리카에 계신 슈바이처 박사님의 병원에 낙하산으로 떨어뜨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년이 보낸 편지를 읽은 린제이 장군은, 그 편지를 방송국으로 보냈습니다. 방송국은 소년의 따뜻한 사랑이 담긴 사연을 그대로 방송했고, 감동한 유럽 사람들이 많은 돈과 약품을 보내왔습니다. 린제이 장군은 무려 $40만 불에 달하는 약품을 비행기에 실은 뒤, 아프리카 슈바이처 박사에게 보냈습니다. 물론 비행기 안에는 바비 소년이 동승했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손으로 직접 슈바이처 박사에게 의약품을 전달했습니다.

후일 슈바이처 박사는! 이 일을 기억하면서 “어린아이가 이런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비록 작은 어린아이의 헌신이었지만, 이 일이 아프리카 선교를 지속하게 한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본문 요 6:9입니다.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어린아이가 드린 것은 작은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귀하게 보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드린 것입니다. 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나에게 있는 시간, 재능, 지식, 물질,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온전히 헌신하면, 빈들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남들은 무엇을 하나? 얼마나 하나?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에 헌신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런 헌신의 사람들이 되시고,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순종입니다.

요 6:10입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사람들로 떼를 지어 오십 명, 백 명씩 앉게 하라.” 그런 후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떡과 물고기를 나눠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나누어주었더니, 놀랍게도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순종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언제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질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순종은 축복을 가져오는 열쇠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현재 삶의 형편이, 빈들과 같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감사입니다.

예수님은! 그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받으시고는, 두 손으로 높이 들고 큰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요 6:11입니다.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여기 “축사(祝謝)하셨다”는 말은! → 헬라어로 ‘율로게오’(ευλογεω)인데 → ‘축복하시고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한 아이의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축복하실 뿐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은! 감사의 결과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① 감사만 했는데도 ‘원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11절입니다. →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할렐루야! 감사하면 오늘도 ‘원대로의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② 감사만 했는데도 ‘배불리 먹고도 남는 풍요’가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감사 전과, 감사 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난의 언어’가 ‘부요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①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다”는 말이 ⇨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로 바뀌었습니다. ② “어린아이의 오병이어가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는 빈곤의 언어가 ⇨ “저희가 배부른 후에”라는 풍요로 바뀌었습니다. ③ “모자랄 것 같다”는 말이 ⇨ “남았나이다.”라는 즐거운 탄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병이어란 작은 것이! 감사를 통해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네! ‘빈들의 기적’은 ‘감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만드는 감사는! ⇨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는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고 하는 ‘선제적인 감사’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곱하기의 은혜’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인생의 빈 들에서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원망하며 절망하십니까? 그러나 빈 들에서도 섬김과 헌신을 내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를 향한 온전한 헌신과 순종이 있다면! 가는 곳마다, 행하는 일마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특별히! ‘선제적으로 감사할 때’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이런 감사는 ‘기적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축복의 상속자’가 되게 하십니다. 바라기는 헌신과, 순종과, 감사로, 날마다 기적을 만들어 가고, 체험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문과 묵상

 

1. 오늘 우리의 현실은 광야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문제도 많습니다. 내 인생에서도 배부르고 남는 기적이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은 바를 나눠봅시다.

 

2.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이 가진 도시락 전체를 드린 어린아이와 같은 ‘헌신’의 사람입니까? 감사로 헌신하여 기적과 기쁨의 주인공이 됩시다.

 

3. 하나님의 절대명령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에 적용하면서 살아가야 할, 가장 소중한 삶의 ‘거룩한 습관’은 무엇이어야 할지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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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3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교만으로 인한 징계를 회개로 벗어나라 (삼하 24:10∼14)

 

다윗의 전 생애는 ‘승리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곤경에 빠졌었음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범죄한 후 즉시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회개함으로 곤경에서 회복된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1. 교만에 빠져 인구조사를 시키는 다윗

다윗의 말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다윗이 심복 요압 장군에게 이스라엘의 군대가 얼마나 되는지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잠 16:18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오늘 성경과 평행본문인 역대상 1장에서는, 그 배후에 사단이 다윗을 충동질했다고 말합니다. 대상 21:1 →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그러니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고전 10:12) 말씀이 꼭 맞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스스로 선 줄로 알았지만, 과시욕과 교만에 빠지면 넘어지게 된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윗의 용맹성이 아니라, 다윗조차도 우리와 똑같이 사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것을 두고, 후회하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삼하 24:10 →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앞서는 인생,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이 앞서는 삶, 바로 이것이 ‘심히 미련한 인생’입니다. 다윗이 전쟁의 병법에서는 하나님의 병법을 사용했지만, 자기를 다스리는 데는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다가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2.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다윗이 군대조사를 할 때,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여기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자기의 백성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헤아릴 줄 아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자기의 부와 능력을 헤아리는 자는 하나님이 괘씸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을 헤아릴 줄 아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지만, 자기의 부를 헤아리고 사는 자는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참 순전한 사람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어허~! 하시니, 아이쿠 뭐가 잘못되었구나! 싶어서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책하면서 “하나님! 내가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고백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가졌던 신앙 장점입니다. 사울 왕같이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살길인 줄로 믿습니다.

사실 다윗의 이런 고백은 처음이 아닙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도,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 부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했을 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삼하 12:13 →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 하면서 엎드렸습니다. 권력을 쥔 왕이 이렇게 하기란 쉽지 않죠!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징계는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로 생긴 아이가 밧세바를 통해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이셨습니다.

이번 인구조사도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니 하나님은 용서할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징계는 하십니다. 선지자 ‘갓’을 보내어 세 가지 재앙을 내릴 것인데, 그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삼하 24:12∼13 →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① 땅에 칠 년 동안 기근이 있을 것 ② 왕이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 다닐 것 ③ 사흘 동안 전염병이 돌 것. 너는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이때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삼하 24:14 →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이 말의 뜻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징계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즉! 당시 전염병은 ‘하나님의 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의 손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시 30:5 → “그(하나님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가 기억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용서하시지만, 대개 죄에 따른 징계는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죄에 빠지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회개할 때 살아날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아파도,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회개하고 돌아가면 살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회개합니까? 삼하 24:17 →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범죄한 것은 나 다윗인데! 백성들을 이렇게 많이 죽이시니 웬일이십니까? 청하오니 나와 내 집을 치소서!” 한마디로 자신의 잘못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크게 돌이킨 다윗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에게 이렇게 명하십니다. 삼하 24:16 →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회개하고 책임지겠다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갓’ 선지자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삼하 24:18∼19 →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윗이 모리아산 위에 살고 있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가 있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그때 ‘아라우나’가 나와서 번제에 필요한 제물과, 땔 나무를 모두 무상으로 다윗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24:24∼25a →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즉 상당한 값, 은 오십 세겔을 지불하고 타작마당과 소를 사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삼하 24:25b →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할렐루야!

우리는 여기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주는 중요한 영적교훈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장소적으로 보면 아주 중요한 역사적 자리입니다. 대하 3:1 → “솔로몬이 ①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②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③ 여부스 사람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데! 어디에다 짓나 하면! ③ 여부스 사람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다 짓습니다. 그곳은 다윗이 값을 주고 산 곳이며, 또한 그곳에 성전을 지으라고 지정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②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죄로 인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던 곳’이고, 하나님께서 그 ‘예배와 기도를 들으시고 완전히 용서하신 곳’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① 바로 그곳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곳! 모리아 산’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 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의 제물로 드린 곳입니다. 그것은 ⇨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내가 가장 귀히 여기는 것, 내 인생의 웃음(이삭의 이름 뜻이 웃음)까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친 곳입니다. ⇨ 겉으론 이렇게 잔인한 희생과 죽음을 요구하는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 배후엔 부활과 생명이 약속된 곳이며, 여호와이레! 당신이 친히 준비하신 양! 축복이 예비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② 또한 다윗이 값을 지불하고 타작마당과 소를 사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하나님의 진노가 멈춰진 장소입니다. ⇨ 다윗은 바로 그곳을 성전 지을 장소로 솔로몬에게 지시했습니다. ③ 그래서 오늘날 ‘교회’를 상징하는 성전이 그곳! 모리아산 아나우나의 타작마당에 세워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의 죄와 허물이 인생 전체를 삼킬 정도로 많고 크다 할지라도! ⇨ 바로 이곳!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죗값을 지불하고, 당신이 친히 머릿돌이 되신 이 ‘교회’에서 우리가 회개하고 자백할 때, 완전한 용서를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교만함으로 지은 죄를, 회개로 용서받고 벗어났습니다. 우리들 또한! 이 교회에서 진심으로 회개할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①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며 ② 놀라운 영적 가문을 이루며 ③ 축복을 계승하여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과시욕과 교만이 있을 때, 사탄은 그것을 미끼로 우리를 죄로 넘어지게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과 연관지어 나눠봅시다.

 

2. 다윗의 신앙 장점은 죄를 지적받았을 때(깨달았을 때) 덮으려 하거나, 부인하거나 변명치 않고 즉시 회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죽을죄와 허물이 사해진 장소라는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교회와 같은 장소입니다. 다윗과 같이 영적 가문을 이루며, 축복을 계승해 갈 소망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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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6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략을 세우라! (삼하 17:1∼14)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놈은, 장자이며 이복형인 암논이 친동생 다말을 욕보이자, 그를 죽이고 어머니의 친정인 그술로 도망갑니다. 3년이 지난 뒤에, 요압 장군의 중재로 다윗의 허락을 받고 압살롬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다윗은 2년 동안이나 압살롬의 얼굴을 보지도 않습니다.

정치적 야심이 컸던 압살놈은, 요압 장군에게 나를 부르고 얼굴도 보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나를 죽이시라고 아버지 다윗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마침내 다윗은 압살롬을 불러 만나고, 용서의 표시로 입을 맞춥니다. 그로부터 4년 동안 압살놈은 차근차근 백성들의 마음을 사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하루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15:7∼9 → “왕이시여! 내가 그술로 피해 있을 때, 만일 나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로 헤브론으로 가게 하옵소서.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아브라함 때부터 영적인 고향인 ‘헤브론’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말로 알아들은 다윗이 허락했지만, 정작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핵심 측근들을 모아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다윗과 그를 따르는 세력까지 다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해 가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1. 위기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피할 지혜와 전략을 주신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예루살렘을 황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또 한 가지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최고 전략가인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 편에 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능한 책사였기에, 그가 압살롬에게 붙었다면 이 싸움은 이길 승산이 없다는 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낀 다윗은 즉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삼하 15:31b →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다윗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겨나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에게 지혜와 전략을 주셨습니다. 다윗에게는 또 한 명의 책사가 있었는데 ‘후새’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친구로서 도망가는 다윗을 감람산 마루턱에서 맞이합니다. 그때 다윗은 그에게 이런 부탁과 함께 돌려보냅니다. 삼하 15:34 → “그대는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가 압살롬에게 거짓으로 투항하고 있다가, 아히도벨이 모략을 세우면 그것을 무너뜨려 주시오.” 다윗이 ‘후새’를 압살롬에게로 보낸 것은 참으로 기막힌 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이제 압살롬에게는 다윗 왕의 책사였던 두 사람이 다 자기의 책사가 된 것입니다. 압살롬이 먼저 ‘아히도벨’에게 다윗을 죽일 전략을 말해 보라고 합니다. 그는 만 이천 명의 용사를 뽑아서 밤에 급습하여 다윗만 쳐서 죽이자고 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또 다른 책사인 ‘후새’를 불러 그의 계획도 들어보자고 합니다. 후새는 아히도벨의 전략은 좋지 않다고 하며 그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17:7∼14) “임금님의 부친과 그 신하들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용사들이요, 노련한 군인입니다. 다윗은 밤에는 백성들과 함께 잠을 자지도 않습니다. 틀림없이 지금쯤은 어느 굴속이나 다른 어떤 곳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온 이스라엘을 총동원하여 모래알처럼 많은 군인을 임금님이 친히 거느리고 나가서 마치 온 땅에 이슬이 내리는 것처럼! 그를 덮쳐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물론이고,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압살롬과 그 부하들은 ‘후새’의 전략이 ‘아히도벨’의 전략보다 더 좋다고 찬성합니다. 실은 변절자 아히도벨의 전략이 더 지혜로웠지만, 후새의 전략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께서 압살롬의 마음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라고 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결국 압살롬은 후새의 전략을 받아들이고, 그 밤을 그냥 보냅니다. 이로 인해 다윗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상황은 지나갔고, 결국엔 다윗이 전력을 정비하여 이기게 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17:14 →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아히도벨의 지혜가 당대에 최고였을지라도, 그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우리를 돕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이며, 운명을 좌우하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고난과 위기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실 것이고, 또한 우리를 도와 일할 사람을 붙여 주실 줄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희망이요, 특권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위기 때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은 위기 상황에 있던 다윗을 보호해주셨습니다. 후새는 아히도벨의 완벽한 전략이 혹시 실행에 옮겨질까 봐 염려되어, 다윗을 지지하던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말합니다. “어서 속히 아들들을 다윗에게로 보내서, 오늘 밤 광야 나루터에 머물지 말고 한시바삐 강을 건너라고 전하십시오.”

아비아달 제사장의 아들 ‘요나단’과, 사독 제사장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은밀하게 예루살렘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는 정보원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바깥의 한 샘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임무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수상하다고 압살롬에게 일러바칩니다. 두 사람은 재빨리 그곳을 떠나 바후림 동네의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는 그 집 안마당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 숨습니다. 그러자 그 집의 부인은 멍석을 가져다가 우물을 덮고, 그 위에 곡식을 널어놓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했습니다. 압살롬의 군인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서 부인에게 묻습니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 두 젊은이를 못 봤느냐?” 그러자 부인은 대답합니다. “방금 저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들이 황급히 뒤쫓아 갔지만, 찾지 못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두 사람은 우물에서 나와 다윗 왕께로 가서 소식을 전합니다. “아히도벨이 기습 계획을 세웠답니다. 책사 후새가 다른 제안을 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어서 빨리 강을 건너십시오.” 다윗과 그의 일행들은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으로 피신합니다. 만일 두 청년이 압살롬의 군사들에게 붙잡혔다면!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전략이 옳았음을 깨닫고 그날 밤에 다윗을 기습하여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인을 동원하여 두 청년을 보호해주셨고, 다윗과 그의 일행들을 피신케 하셨습니다. 사 41:10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위기 상황에서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 의로운 손으로 붙들어 주사 안전하게 보호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실제적인 체험과 간증을 가지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위기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

다윗과 일행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맨몸으로 예루살렘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니 얼마 가지 않아서 목마르고 배고프고 지치게 되었고, 압살롬이 기습 해 온다면, 맞서 싸울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더는 못 가고 지쳐서, 요단 나룻터에서 잠을 자려하는데, 다급하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래서 황급히 일어나서 밤새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에 이르렀습니다. 더 피곤하고 지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일행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도움의 손길이 등장합니다.

삼하 17:27∼29 →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다윗과 그의 일행들은 이 세 사람이 가져온 음식을 먹고, 씻고 정비했습니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의 생기를 회복했고, 이제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들을 도운 세 사람의 면면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암몬 족속 ‘소비’라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이방 족속인 암몬 사람의 마음도 감동시켜서 다윗을 돕게 했습니다. 둘째, 로드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마길’은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돌보아 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각한 왕 다윗! 그를 돕고 있습니다. 셋째,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입니다. 그는 부자였고 너그러운 노인이었습니다. 대부분 노인이 될수록! 더 자기중심적이고 인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바르실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도하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엡 3:20 →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이 세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도움의 손길들로,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압살롬과 그의 측근들이 ‘아히도벨’의 완벽한 전략을 채택하지 않고, ‘후새’의 전략을 채택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까?(17:14) 이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눠봅시다.

 

2.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15:31)라는 다윗의 기도가, 아히도벨의 지혜를 이겼습니다. 나의 지혜로는 해결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던 문제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풀린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또 극복하기 어려운 힘든 일이 있다면, 서로 나누고 함께 기도합시다.

 

3. 어려움에 빠진 다윗(므비보셋)을 도운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마음과 일들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10-08
조회 544


2022년 10월 9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죄가 더 큰 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삼하 13:21∼38)

 

1. 다윗의 일생 중에 ‘가장 슬픈 이야기’

오늘 본문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다윗의 일생 중에 ‘가장 슬픈 이야기’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부모로서 겪을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마음 아픈 사건을 다윗이 겪은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배다른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오늘 말씀과 연관되어있는, 첫째 아들부터 셋째아들까지 모두 배다른 형제들입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인데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고, 둘째 아들은 ‘길르압’인데 어리석은 부자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입니다. 셋째아들은 ‘압살롬’인데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를 통해 얻은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예쁜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복오빠이며 다윗의 맏아들인 ‘암논’이 그녀를 짝사랑하다 못해 상사병이 난 것입니다.

암논이 앓는 체하고 침상에 누워 있자! 예측대로 다윗 왕이 문병을 왔습니다. 암논은 아버지 다윗에게 “아버지! 누이 다말을 보내주십시오. 다말이 손수 구워주는 과자를 먹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다말이 사는 궁으로 사람을 보내어, 오라비 암논에게 가서 환자의 입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주라고 했고, 다말은 순종하여 오라비 암논의 궁으로 가서 가루로 반죽을 개어, 과자를 구워서 차려놓습니다.

암논은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다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는 다말을 끌어안고 동침하자고 요구합니다. 다말은 “오라버니!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나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에는 이런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바보짓입니다. 자신을 욕되게 만들면, 자신은 물론이고 암논 오라버니도 어리석은 자로 낙인찍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암논은 강제적으로 다말을 눕히고 욕을 보입니다.

그런데 암논은 다말을 성폭행 뒤, 금새 마음이 바뀌어 이렇게 소리칩니다. “어서 여기서 나가!” 그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고, 단지 육체의 끓는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했던 동물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에 다말은 “오라버니, 저를 이렇게 내쫓으시는 것은 방금 저에게 저지르신 일보다도 더 나쁜 일입니다.” 하지만, 암논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시중드는 하인을 불러 “이 계집을 내 앞에서 쫓아내고 문을 걸어 잠그라”고 합니다. 하인은 다말을 내보내고 문을 잠가버렸습니다. 다말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공주들이 입는 채색옷을 입고 있었는데, 입고 있던 채색옷을 찢으며, 부끄러움과 억울함을 숨기지 않고 머리에 재를 덮어쓰고, 목 놓아 울면서 돌아갔습니다.

평소에 맏형 ‘암논’이 자기 친동생 ‘다말’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압살론이 다말에게 묻습니다. “암논이 너를 건드렸지? 그렇지?…” 그렇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왕권에 흑심이 있었던 압살롬은 다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암논은 네 오라비니, 이 일은 입 밖에 내지 마라. 너는 이 일로 너무 마음 쓸 것 없다.” 압살롬은 셋째아들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왕권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압살롬은 이번 사건을 통해서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2. 죄에 대하여 ‘우유부단’했던 다윗이 만들어낸 비극

이복오빠 암논에게 몹쓸 짓을 당한 다말은, 이후 오빠 압살롬의 집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왜 압살롬이 2년을 기다렸을까?” 생각하면서, 여러 성경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았습니다. 대체로 이렇게 요약됩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왕의 처리를 기다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셨으니까! 아버지가 해결하시겠지! 아버지는 나라의 왕일 뿐 아니라 재판장이시니까! 아버지가 해결하시겠지!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었습니다.

그럼 다윗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다윗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대로 하자면 ‘왕위를 물려줘야 할, 맏아들 암논을 죽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님! 한 성읍에 가난한 사람이 양 한 마리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면서 길렀는데, 이웃에 사는 부자가 그 양 한 마리를 빼앗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끊으며 이렇게 반응합니다. “아니!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 그런 나쁜 놈이 있단 말인가?” 소리치고는, 다윗은 왕으로써, 재판장으로써 판결을 내립니다. “그런 놈은 당장 잡아다가 죽여야 한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뭐라 말합니까? 삼하 12:7,9 →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도다. 네가 헷 사람 우리아를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어떤 계명으로 치리해야 합니까? 레 20:10 →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다윗은 이 계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윗은 왕의 권세나 힘으로 무마하려고 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고 침상에 곰팡이가 슬기까지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징계는 하셨지만, 다윗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자기와 마찬가지 죄를 지은 것입니다. 배다른 누이동생을 강간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계명 또한 죽음입니다. 레 20:17 → “누구든지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그의 어머니의 딸을 데려다가, 그 여자의 하체를 범하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들의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죽이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가 있던 다윗!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점이 바로 자신의 맏아들! 왕위 계승자에게서도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단호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2년의 세월을 그냥 보냈습니다. 그냥 집안 문제이니, 흐지부지되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동안에 압살롬은 철저한 계획을 세워 아버지께 대들기 시작합니다.

압살롬이 에브라임 근처의 ‘바알하솔’에서 양털을 깎을 때, 그는 왕자들을 모두 그곳으로 초대했습니다. 압살롬은 이미 자기 부하들에게 명령해 두었습니다. “잘 들어라! 암논이 포도주를 마시고 취기가 오를 때, 내가 ‘암논을 치라’는 신호를 하면 그를 죽이라. 내가 명령한 일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내라.” 그러자 부하들은 압살롬이 명령한 대로 암논을 죽입니다. 놀란 다른 왕자들은 일어나 노새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형 암논을 죽인 압살롬 역시 도망쳐 그술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3년을 지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을 보면 암논의 성폭행 사건 이후, 다윗의 가정에 불행한 일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시작은 다윗의 우유부단함 때문입니다. 암논의 사건을 보고 받고서 심히 노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삼하 13:21 →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화가 났지만, 암논이 사랑하는 맏아들이라! 기분 상할 말을 하지 않았다.”(공동번역)

 

3. 죄가 더 큰 죄로 이어지지 않게 합시다.

다윗왕은 암논의 죄를 묻기 위해서 성경적인 조치를 했어야 마땅합니다. 죽이는 것이 어려웠다면! 적어도 이런 조치는 취했어야 합니다. 출 22:16 → “어떤 사람이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 그 여자와 동침하였다면, 반드시 신붓값을 지불하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다윗은 이도 저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다윗 자신은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가 죽은 이후,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여 평생 같이 살았지만, 암논은 죄를 지은 이후 다말을 하루도 못 돼서 버렸습니다. 자식 대에 가서는 죄가 더 악하게 발전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물리적 징계를 권하고 있습니다. 잠 23:13∼14 →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식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경적인 징계를 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히 12:11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엘리 제사장도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잘못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저 안타까워하는 일로 그쳤다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들뿐만 아니라 엘리 제사장 집안이 다 망하고, 이스라엘 민족적으로도 수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악에 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No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불의한 이익에 대해서도 No 해야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 대해서도 No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내 자녀일 수도 있고, 내 아내나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나 형제, 좋은 친구들, 때로는 같은 교회 성도일 수도 있고, 저 같은 목회자에게는 성도들일 수도 있습니다. 거절할 때, 그 아픔과 섭섭함은 잠시뿐입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다윗의 치명적인 약점은 ‘성(性)적인 유혹에 약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악순환 이 되었습니다. 죄가 더 큰 죄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과 취할 조치는 무엇입니까?

 

2. 죄에 대한 ‘우유부단함’이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당신은 죄에 대해서 단호하십니까?

 

3. 당신의 치명적인 약점은 무엇입니까? 돈, 이성, 명예, 혈기, 교만, 이기적인 성격, 거짓말, 게으름, 약속을 안 지키는 것, 지저분한 것, 그 어떤 것이든지 당신 대에서 끊도록 결단하십시오.

관리자
2022-10-01
조회 465


2022년 10월 2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가장 비천한 자를 왕자처럼 (삼하 9:3∼8)

 

1. 배경 이야기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건국한 사울 왕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사울 왕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를 좋아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골리앗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사울은 다윗에 대한 강한 반감과 시기심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마음먹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마음을 알고, 다윗이 도망가도록 도왔습니다. 마지막 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 20:42 →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이후 다윗은 도망하는 삶을 10년 넘게하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온 나라를 찾아다녔지만, 결국은 사울이 먼저 죽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사울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지난주에 드렸던 말씀입니다. 7년 반에 걸쳐 이스라엘 12지파를 통합하고, 다윗은 공식적인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다윗의 왕국은 점점 더 견고해졌고, 안정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에 갑자기 요나단과의 언약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삼하 9:1 →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그래서 찾게 된 사람이 바로, 오늘 말씀의 또 하나의 주인공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입니다.

‘므비보셋’의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왕가에서 태어나,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황태자를 아버지로 둔 므비보셋! 장래가 보장된 ‘행운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보장된 미래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요나단과 할아버지 사울 왕이 전쟁에서 한꺼번에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중증 장애인이 되는 ‘불행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므비보셋의 장래 인생은 과연 어떤 미래가 펼쳐지게 될까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은혜 갚을 줄 알았던 사람들!

우리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길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수소문 끝에 사울 왕의 종 ‘시바’를 찾았고, 그를 통하여 ‘므비보셋’을 찾아냅니다. 므비보셋을 찾을 즈음에는 다섯 살이던 므비보셋에게 ‘미가’라는 아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삼하 9:12), 다윗이 왕이 된 지 적어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인 것 같습니다.

다윗이 찾기 전 므비보셋은 ‘로드발’이라는 곳의,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은혜를 기억하고 갚는 감동적인 사연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건은 사울이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 부음만 받고, 아직 정식으로 왕이 되지는 못했던 때에 일입니다. 삼상 11장의 이야기인데, 암몬 족속이 요단 동편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를 요구합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대항할 힘이 없으니 항복하겠다고 하였지만, 암몬 왕은 “너희 오른 눈을 모두 뽑아야 항복을 받아주겠다”고 하면서, 항복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기가 막혔지만! 일주일 기한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하고는, 뒤로는 급히 전령을 보내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삼상 11:4∼5 → “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

이 말은 들은 사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삼상 11:6∼7 →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사울은 독려에 순식간에 33만 명의 군대 자원자들이 몰려왔고, 암몬 군대를 쳐서 물리치고, 야베스 사람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줍니다. 이 일로 인해 백성들의 신임을 얻은 사울은 정식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로부터 40년의 긴 세월이 지났습니다. 블레셋과의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울과 아들들이 전사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야베스 사람들은 이렇게 합니다. 삼상 31:11∼13 →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여기 ‘에셀 나무’ 아래에 묻었다고 했는데! ‘에셀’은 ‘도움’이란 뜻으로, 이전의 사울의 도움을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 왕이 베푼 오래전의 은혜를 그렇게 갚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한 주인공! 므비보셋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로 숨어 들어가 살았습니까? 바로 요단 동편 길르앗 땅 야베스 사람들이 사는 근처인 ‘로드발’이었습니다. 그곳의 ‘마길’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던 것도, 이전에 ‘사울 왕’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는 차원에서 기꺼이 ‘므비보셋’을 받아주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에게 받은 은혜’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선한 씨앗을 많이 뿌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바로 여러분이 뿌린 그 씨앗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때론 자신이 먹지 못하게 되면, 자식들에게라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도 은혜 받은자로서, 은혜에 감사하며 삽시다.

아무튼 이렇게 숨어 사는 므비보셋에게 어느 날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다윗 왕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마 몸이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자손인 그를 살려 둘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9:7입니다. →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①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장애인’을 대하는 다윗의 지혜로운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므비보셋을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주는데, 두 가지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나는 경제적인 도움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입니다. 다윗은 정확하게 므비보셋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의 눈높이에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그를 높여줍니다. 지금까지 장애인으로 숨을 죽이며 살아왔던 므비보셋을, 자기의 밥상에서 함께 먹도록 배려합니다. 그것은 자식과 똑같이 여기겠다는 인격적인 존중이요, 최고의 사랑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가장 비천한 자의 삶에서, 왕자의 자리에 오르는 기쁨과 축복을 얻게 됩니다.

모르긴 모르되 므비보셋은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위해 가장 극적인 자리와 시간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므비보셋’이란 이름의 뜻은? → “부끄러움을 없이하는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므비보셋의 모든 부끄러움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경제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왕의 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는 왕자의 자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실은 우리들도 므비보셋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으므로, 우리는 죄인으로! 영혼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고, 하나님을 피해 숨어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이 왕을 피해 숨어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피하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베풀려고 다윗이 므비보셋를 찾아 나섰던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찾아 나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 앞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재산을 돌려줄 뿐만 아니라,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해 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 때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이라는 말을 되풀이 합니다. 우리가 은총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언약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는 말과 ⇨ “요나단으로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는 말은 같은 형식,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이 행하신 십자가의 희생에 근거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비천한 죄인 된 우리를, 왕자처럼 대우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이 은혜를 갚으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다윗은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약속과 관련하여 감동했거나 실망한 일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2. 다윗이 중증·중복 장애인에게 대한 태도를 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은총이 무엇인지 나눠보고, 당신에게 주어진 지위, 물질, 권한을 다른 사람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데 사용할 의지를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9-24
조회 480


2022년 9월 25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하나 된 나라를 이룬 다윗 (삼하 5:1∼5, 10)

 

성경 역사 속에 분열된 나라가 통일된, 단 한 번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통일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삼하 1:1 → “사울이 죽은 후에…” 그러니까 사무엘상의 맨 마지막 장인 31장엔, 사울 왕가의 몰락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삼상 31:1∼2 →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얼핏 생각하면! ‘사울도 죽고, 그의 유력한 세 아들들도 죽었으니, 이제 다음 왕으로는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이, 바로 승계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울 왕에게는 넷째 아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군사령관이었고, 사촌 동생이기도 한 아브넬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될 사람은 자기 조카 ‘이스보셋’이 정당하다고 선언합니다. 놀랍게도 유다 지파를 제외한 다른 11 지파 사람들이, 사울 왕의 막내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제2대 통치자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겪어왔던 도망자의 삶이 이제 끝나고, 새 왕조를 출범시킬 일만 남은 것 같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유다 지파만을 이끄는 통치자가 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아니라 도지사가 된 것입니다.

이후 통일왕국의 왕권을 두고 7년 동안이나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다윗은 점점 강성해졌고, 사울의 집은 급격하게 쇠퇴해갔습니다. 삼하 3:1 →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일시키고 통합하는 일을 이루었습니까? →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의 대적, 원수들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마다 그들을 각별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들이 죽었을 때마다 기뻐하기는커녕 울며 금식하며 애통해했고, 진심과 정성을 다해서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이것으로 다윗은 이스라엘 12 지파 전체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 중요한 예,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지난 주일에 살펴본 사울 왕의 죽음과 장례입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죽는 혼란기에는, 언제나 사기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다윗 앞에 사울의 왕관과 사울의 팔찌를 가지고 와서는 “내가 당신 원수인 사울 왕을 죽였다”고 하면서, 상급을 바라고 나온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죽음을 확인한 다윗은 옷을 찢고 웁니다. 성도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좋아해야 할 상황입니다. 원수가 죽었으니 얼마나 기뻐할 일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슬픔의 노래를 지어 부르며, 사울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그 아들 요나단과의 우정을 기립니다.

다윗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본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실까?’ ‘나의 마음과 행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것을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왕관과 사울의 팔찌를 가지고 온 청년을 향하여, “네가 어찌 감히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을 죽였느냐!” 호통치고, 그 사람을 죽이라 명령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온 백성들과 함께, 사울 왕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엄숙하게 치룹니다. 다윗의 인격과 품격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고, 이를 통해 더 멀어질 사람들의 마음을 다윗에게로 향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일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의 장례가 더 이어집니다.

둘째, 북이스라엘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죽었을 때, 역시 국가장으로 승격하여 치러줍니다. 북이스라엘 왕 이스보셋의 오른팔이요,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아브넬이 사울 왕의 첩을 겁탈한 사건으로 이스보셋과 아브넬 양자 간에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불화가 생기고 맙니다. 그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점점 더 다윗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아브넬 장군은 스스로 판단해 봅니다. 이미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다윗에게로 가 있고, 자기가 세웠고 섬겼던 이스보셋 왕마저 자기를 질책하니, 차라리 선제적으로 다윗과 화친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11 지파의 장로들을 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3:17∼18 →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무슨 말입니까? 열한 지파의 장로들 대부분이, 이스보셋 대신 다윗을 왕으로 삼자는 뜻을 진작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어 아브넬 장군은 먼저 전령을 다윗이 머물고 있던 헤브론으로 보내서 이렇게 자기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나 아브넬 장군은 다윗왕에게 북이스라엘 전체를 이끌고 귀순할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첫 아내였던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그의 귀순을 허락합니다.(삼하 3:6∼21)

전령이 돌아와서 보고하니, 이제 아브넬이 직접 다윗을 찾아갑니다. 다윗은 아브넬 장군 일행을 환대합니다. 삼하 3:20 →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여기에 화답하여 아브넬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3:21 →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이에 다윗은 아브넬을 평안히 돌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귀순 의사를 밝힌 아브넬을 다윗왕이 흔쾌히 받아들이고 평안히 돌아가게 했다는 소식을, 전장에서 돌아오던 다윗 왕의 군사령관인 ‘요압’ 장군이 듣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귀순하면 다윗 왕이 그를 자기와 동급의 장군으로 받아 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요압 장군은 급히 마나하임으로 돌아가고 있는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도록 전령을 보냅니다. 그리고는 되돌아온 아브넬에게 요압은 뭔가 조용히 말하려는 척하면서, 준비한 칼로 아브넬의 배를 찔러 죽입니다. 그야말로 ‘앗’ 소리도 못 하고 북이스라엘의 군사령관이 죽은 것입니다.

이 일 역시 보통 사람 같으면 좋아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는 일은 ‘떼 놓은 당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오히려 요압 장군의 잘못을 꾸짖고 만천하에 공개합니다. 그리고 대적하던 북이스라엘의 장군 아브넬의 장례를 극진한 예를 다해서 치릅니다.

삼하 3:31∼32 →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다윗은 대적의 죽음에 금식하며 울고 애도했습니다.

이런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장례식으로 인해 북쪽 11 지파 사람들도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백성들은 다윗을 신뢰하게 됩니다. 삼하 3:36∼37 →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물론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아브넬이 죽은 것을 계기로, 다윗이 군대를 몰고 올라갔으면, 금방 물리적으로 통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때도 기다렸습니다. 영토의 통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의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셋째, 북이스라엘의 왕 이스보셋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러줍니다. 다윗은 묵묵히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문제는 북 왕국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레갑’과 ‘바아나’라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이스보셋 왕 옆에서 호위하던 장수들입니다. 이들도 생각합니다. 아브넬 군사령관이 죽었고,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결과는 뻔한데, 이제 남은 마지막 수순은 이스보셋 왕만 없어지면, 모든 권력이 다윗에게로 넘어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은 머리를 굴려, 낮잠을 자고 있던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서 다윗에게 가지고 갑니다.

하지만 다윗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은 죄인들이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합당치 않다며, 당장 이 두 사람을 처단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시체! 그의 머리는 헤브론에 있는 아브넬의 무덤에 정중하게 장사했습니다(삼하 4:5∼12). 이스보셋의 장례 역시, 국장으로 치러준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적이나 원수에게도 긍휼을 잃지 않았습니다. → 정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통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통일된 조국을 열망하고 있잖습니까? 사랑하는 내 자녀손들에게 통일된 한국을 물려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기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 반대편에 있던 사람, 그리고 현재도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과 자비를 계속 베풀었습니다. 자기에게 기회가 왔지만, 그 기회를 비겁하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정정당당한 승리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패배한 사람조차도 흔쾌히 그 패배를 인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화적인 통일!’이라는 우리 민족의 숙원을 해결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통일된 이스라엘을 만들었던 다윗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원수라도 품어내는 그 마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마음입니다.

 

나눔과 묵상

 

1.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때’(카이로스)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때가 오기까지 인내로 잘 기다렸습니다.

나의 시간표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2.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 3:1) 이 말씀이 당신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3.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북한이 진정 ‘사람이 하나 되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요?

관리자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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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8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활 노래에 담긴 다윗의 신앙인격 (삼하 1:17∼27)

 

다윗의 신앙 인격을 본받자!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극도의 애통과 슬픔을 가눌 길 없어, 옷을 찢고 울면서 금식했습니다(11∼12). 그는 애가(哀歌) 즉 슬픔의 노래를 지어, 두 용사 -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리고는 노래의 이름을 ‘활 노래’라 하였고, 모든 유다 족속에게 가르쳐 부르게 했습니다. 이 노래를 ‘활 노래’라고 한 것은! 사울 왕과 요나단이 활을 잘 쏘는 용사였고, 그들을 추모하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활 노래에는 다윗의 아름다운 신앙 인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다윗의 아름다운 신앙 인격을 배우고 본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는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십수 년을 쫓아다닌 생명의 원수입니다. 그런 사울 왕의 죽음은! 다윗에겐 곧 고난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기쁨과 감사의 말이 그 입에서 나올 법한 상황인데! 다윗은 오히려 애통해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결코 의도적이거나 가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사울의 죽음을 슬퍼했던 것은! 개인적인 이해관계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민족의 운명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활 노래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칭하면서, 그렇기에 그들의 죽음은 곧 이스라엘의 수치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할례받지 못한 이방 군대 블레셋에게 패배한 것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행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중심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두 용사!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노래에 담은 것입니다. 삼하 1:20 →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엎드러진 것! 즉 이스라엘의 수치가 이방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조치는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 소년 시절 때도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과 그 백성을 경멸하자, 불타는 의분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 17:26b →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렇게 외치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나가서 골리앗과 싸워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투철한 자긍심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십수 년이 지나서도 오늘 활 노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리고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울 왕이! 할례 없는 이방 블레셋 군대의 발굽 아래 짓밟힌 현실을! 불타는 신앙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슬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는 다윗의 참된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2. 지도자를 끝까지 존경한 충성심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삼하 1:19 →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말은, 사울의 죽음은! 곧 다윗 자신과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손실이요 재난이라고, 비통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진심으로 아끼고 귀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탁월한 지도자로 인정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안전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으며, 그들의 존재는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고 칭송합니다.

그런 이유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광인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한 길보아 산들을 저주했습니다. 삼하 1:21 →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이렇게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의 영광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지도자를 존경했던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스러운 업적을 회상하며, 칭송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삼하 1:22 →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인격을 흠모합니다. 삼하 1:23 →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사울에 대한 원한은커녕, 고상하고 탁월한 성품에 대한, 거짓 없는 흠모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고, 그것을 또한 뭇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울의 통치로 인한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화’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삼하 1:24 →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사실 초기의 사울은 용기 있고 덕망도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사울의 통치하에서 군사적인 승리를 많이 누렸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이 같은 점을 기억하고, 그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사울의 단점을 기억하거나 그의 실정이나 폭정을 떠올리기보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은 사울에게서 갖은 고난과 애매한 핍박을 많이 당했지만, 여하튼 사울을 모셨던 신하로서 끝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다윗의 충성심을 배워야 합니다. 조그만 이익이나 기분 때문에 배신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신실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친구와의 우정을 끝까지 지킨 신의의 사람이었습니다.

‘활 노래’의 마지막 부분은 다윗이 요나단과 나누었던 각별한 우정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26절에서 다윗은 요나단과의 우정이 ‘여인과의 사랑보다 더 큰’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삼하 1:26 →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참으로 다윗에게 있어 요나단은 친구 이상의 관계였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에 맞서서 생명을 내걸고 다윗을 변호하였을 뿐만 아니라(삼상 24:30∼34), 사울의 계략을 다윗에게 알려줌으로써, 다윗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참으로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은 ‘여인의 사랑’보다 크고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우정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우정 또한 못지않게 신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죽은 후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 모든 지파들이 다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고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다윗의 측근들은 과거 사울 왕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갑니다. 이렇게 사울 왕가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하게 숨어 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 왕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입니다.

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삼하 4:4 →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요나단의 아들로서 다리 장애를 입은 ‘므비보셋’이 살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조가 안정되었을 때, 사울 왕가에서 시종으로 일했던 ‘시바’라는 사람에게 묻고 이런 조치를 내립니다. 삼하 9:1∼7a 요약 →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그의 할아버지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 누리던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왕자들과 함께 한 식탁에서 식사하며, 죽을 때까지 왕의 아들로 인정받고, 대접받으며 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우정은, 요나단의 죽음 이후에도 그 빛을 발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다윗처럼, 신실한 우정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대가 악하니, 고귀한 우정도 헌신짝처럼 내어버리고, 배신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참된 성도는, 우정에 대해서도 신실한 법입니다. 우리는 신실하게 우정을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질문과 묵상

 

1. 당신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투철한 자긍심과 신앙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2. 당신이 싫어하거나, 당신에게 해를 끼친 원수 같은 사람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는데(행 13:22), 당신이 다윗에게서 꼭 본받고 싶은 점이 무엇 입니까? 서로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