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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김성윤
2024-12-14
조회 235

더 늦기 전에! (암 7:1∼9)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모스’는 남 왕국 출신으로 BC 8세기경 북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드고아’라는 지역 출신으로, 그의 직업은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는 농부였습니다.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아모스’의 이름 뜻은 →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자”입니다. 그는 시대의 무거운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던 선지자였기에 적절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는 불의로 가득한 시대에, 하나님의 공의를 온몸으로 선포한 정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5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 첫째: ‘황충이 모든 풀을 베어 먹는 환상’(암 7:1∼3) 둘째: ‘불이 모든 물을 사르는 환상’(암 7:4∼6) 셋째: ‘다림줄을 드리우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의 환상’(암 7:7∼9) 넷째: ‘여름 실과가 한 광주리에 담긴 모습의 환상’(암 8:1∼2) 다섯째: ‘성전이 무너지는 환상’(암 9:1∼6)입니다. 이 다섯 개의 환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는 징표들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세 번째인 ‘다림줄 환상’입니다.

 

1. 기준이 되는 다림줄

‘다림줄’은 건축에서 벽돌을 쌓거나 벽을 세울 때, 수직을 잡아주는 도구입니다. 실 끝에 무겁고 뾰족한 추를 달아서 중력의 법칙을 이용하여 정확히 수직을 잡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319ecbf48b80b.png<다림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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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 레벨기>

이 다림줄에 맞추어 담을 쌓아야! 견고하고, 무너지지 않고, 아름답게, 높이, 쌓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은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환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집을 짓는 자’에 종종 비유됩니다.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짓는 집’과 ‘모래 위에 짓는 집’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나,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을 짓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엡 2:20∼22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삶은! 거룩한 성전의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고,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기초와 모퉁이돌 위에 믿음의 벽돌을 쌓아서, 거룩한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일반적인 살림집도 잘 지어야겠지만,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을 지을 때는, 더더욱 정성을 들여 잘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림줄을 따라 정확하고 반듯하게 벽돌을 놓아야 할 것입니다.

다림줄이 있음에도 그 줄을 따르지 않고, 내 멋대로 벽돌을 쌓는다면! 결코 튼튼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삐뚤어진 벽돌은 다림줄에 맞추어서 바로 잡아야지, 그대로 놔둔 채 또 다른 벽돌을 쌓게 되면! 결국은 집 전체가 삐뚤어지게 되고, 마침내 허물고 다시 지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건축 기술도 상당히 발전했지만, 그러나 기술만 가지고는 좋은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짓는 사람의 인격과 마음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인격, 대충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다림줄의 선을 따르지 않으면, 잘 설계된 건축도면을 갖고 있더라도, 틀림없이 부실한 집, 아름답지 못한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림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다림줄’은 →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의 바르게 서 있는지, 아니면 기울어져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말씀의 다림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기준을! 이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인간적인 판단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판단의 기준은! 스스로는 바르고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 착각이나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 매일 매일의 삶을! 다림줄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확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쌓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마침내 보기에 아름답고 흠잡을 데 없는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께 칭찬받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개인의 신앙생활도 다림줄에 맞추어야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의 다림줄에 맞추어 자기 인생을 쌓는 것입니다. 좀 튀어나와 있으면 집어넣고, 들어가 있으면 밖으로 내어야 합니다.

조종사들에게는 ‘비행 착각’이라는 ‘착시현상’이 있습니다. 악천후나 야간 비행, 회전 비행, 오랜 시간 비행하다 보면! 감각에 이상이 생겨, 자신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착시현상은! 바다 위를 비행할 때, 자신과 비행기의 자세를 착각하여, 하늘이 바다 같고 바다가 하늘처럼 보여,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고 거꾸로 날아가는 현상입니다. 자신은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항공기의 추락이 대부분 이런 비행 착각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런 때의 기본 수칙은! 자기의 감각보다 계기판을 보고 계기판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앉아 있을 때, 옆 차가 앞으로 가면 순간 내 차가 뒤로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내 감각을 신뢰해서는 안 되고, 바깥의 고정물체나 계기판을 신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깊은 산속이나 사막에서 나침반을 신뢰하고 가야지, 자기 육감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벽돌을 쌓아야지 여기에서 틀어지면 튼튼하게 쌓을 수도 없고, 높이 쌓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이 건강하고 튼튼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의 다림줄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하는 것이 ‘경건 훈련’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므로! 자기라는 기초를 바로 세워가고, 기도로 다림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살펴서 바로 세워야, 그 위에 크고 든든하고 아름다운 인격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3. 공의롭고 동시에 사랑이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도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의의 다림줄’입니다. 권력자들은 이 정의의 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아모스가 다림줄을 띄워놓고 보니, 이스라엘이라는 건물이! 기울어도 한참 기울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메시지는! 이 상태 그대로 두면 무너질 것이니까, 다시 쌓던지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자들이 공의를 싫어하는 것은, 자기가 현재 잡고 있는 권력과, 그 편리함을 잃어버리기 싫어서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그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높이 쌓을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런 정의의 다림줄을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은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소리가 듣기 싫다고 억눌러 놓으면! 사회는 한순간에 망하거나, 구부러져 왜곡되어 발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자유, 비판의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다림줄에 맞추어, 쌓은 담을 측량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 담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의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패역한 상태임을 명백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암 7:8∼9 →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오늘 우리 시대도 하나님의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경제적인 성장을 높이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다림줄에 비추어볼 때 기울어져 있으면 어느 순간 우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계기판이요, 다림줄입니다. 이 다림줄에 맞추어 내 인생을 설계하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사업을 운영함으로! 반듯하고 건강하고 높이 쌓을 수 있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 시민 중 25세 미만의 사람들의 사고에 달려있다.” 이 말에 빗대어 보면!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장래는! 교회학교에 달려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나라의 장래도! 역시 청소년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는 신앙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부모들이 바로 서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했다면 이 시간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결단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자녀교육에 하나님의 다림줄을 대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삐뚤어져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다음 세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주의 자녀들로 세워져서, 공의와 사랑이 펼쳐진 복된 나라를 일으키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인생의 집을 짓는 자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할지를 나눠봅시다.

 

2.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므로 자기라는 기초를 바로 세워가고, 기도로 다림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경건훈련’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에게 맡기신 ‘창조세계보전’의 사명과 과제를, ‘더 늦기 전에’라는 시급성에 비추어서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2-07
조회 184

회복의 새날을 고대하며! (호 14:1∼9)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적으로 찾아오셔서 돌아서기를 권하고 계심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 호세아서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더럽고 추하게 된 고멜이 사는 길은! 호세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돌아오는 것인 것처럼, 패역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들을 사랑해 주시고, 고치시고, 복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 돌아오라! 부르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호세아의 마지막 설교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시고,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호 14:1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여기 ‘불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모든 지난날의 삶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참 야속한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그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에 잘 출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고, 인생의 목표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열정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방식을 신앙적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면, 그것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친구와 사귀고 있다면 그 친구와 헤어져야 하고, 직업이 나로하여금 죄짓게 한다면 그 직업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생활방식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 생활 습관을 뜯어고치라는 것입니다.

2∼3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와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 14:2∼3 →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①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② 말을 타지 아니하며 ③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네! 이것이 참된 회개와 마음의 결단입니다. 여기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라는 말은! 지금까지는 너의 판단, 너의 경험을 앞세워 살아왔지만, 이제는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버려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① 우선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강대국을 믿는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② 둘째, ‘말을 타지 아니하며…’ 말과 같은 군사력을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③ 셋째,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며…’ 한마디로, 헛된 우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오라’는 회개의 요청에, 이스라엘 백성의 바른 응답!은 무엇입니까? → 먼저 ① 이스라엘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길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입술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입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②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외세를 의지하거나, 세상적인 힘을 의지하지 않고, 또한 마음을 빼앗기고 살던 우상을 더는 섬기지 아니하고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로 돌아오라!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응답입니다. 이런 신앙적 결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돌아오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

자! 그러면 1) 하나님은 그분에게로 돌아온 백성을 어떻게 대우해 주십니까? 호 14:4 → “①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②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③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①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을 고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짓고자 하는 본성을 치료하신다는 뜻입니다. 본성이 치료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고는 어떻게 하십니까?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네! 심령이 고쳐진 사람에게, 한없는 사랑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③ 그리고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온 자에게는, “나의 진노가 떠났음이니라.” 다시는 진노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이전까지 징계의 대상, 심판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는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 이어지는 돌아오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들입니다. 호 14:5∼7 → “내가 이스라엘에게 ①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②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③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④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폭포수 같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전 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습은, 꽃으로 말하면 백합화처럼 향기 나는 삶이 되고, 그 안정성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가 깊이 내려 든든한 삶이 되고, 그 풍성함으로는 무성하게 열매 맺은 감람나무와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그래야만 참으로 위대하고 열매 맺는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도 믿고 또 동시에 세상적인 방법대로 살면, 둘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둘 다 잃어버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동경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그렇게 살아, 이런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를 변화 시키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그야말로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개망나니 같은 사람을,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사랑이야 말로, 참으로 위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은 다른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가장 악하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바꿔서,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잘해주는 무책임하고 눈먼 사랑이 아닙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추적하여, 그들과 싸워서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고치기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도, 끝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징계하시는 사랑입니다. 포기하고 그냥 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피눈물을 흘리시면서 때리고 쳐서라도 고치고야 마는 사랑이 바로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도 적당하게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고, 계속 간섭하시며, 꾸중하시며,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향기 나고 든든한 삶을 약속하시며 아낌없는 은혜를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9절 말씀처럼, 우리의 지식이나 총명으로 알 수 없는 사랑입니다. 호 14:9 →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세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창기를 아내로 삼았고, 그가 호세아의 사랑을 뿌리치고 세상 욕망을 따라 도망쳤을 때도 다시 값을 주고 사 왔고, 여전히 사랑했습니다.

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세상과 짝이 된 창기와 같은 삶을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고 육체의 욕심을 좆아 하나님을 버리고 나갔을 때, 우리를 사랑하사 그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당신을 떠난 백성들을 고치고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풍성한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도 타락한 이스라엘처럼 신앙은 형식만 남고,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택하여 살지는 않았습니까? 당신의 새 결심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회복에 앞서 먼저 선행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하나님 대신 강대국과 무력을 의지하고, 우상숭배를 했던 삶) 내가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죄와 허물은 무엇입니까?

 

3. 위대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혹은 부모의 사랑으로 변화된 혹은 변화 시킨 경험을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1-30
조회 284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6)

 

오늘 말씀에서 호세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호 6:1a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말은 죄악 된 길을 떠나,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Return하여 ‘바른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자’는 것이죠! 이 호세아서의 말씀에 근거하여,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는 ‘ad fontes’라는 대명제를 제시했습니다.

ad fontes란? 라틴어로 → ‘원천(근원)으로!’라는 뜻입니다. 여기 ad는 영어로 방향 지시사 ‘to’이고, fontes는 ‘fountains’ 혹은 ‘sources’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basics.)’ ‘근본으로 돌아가라. (Back to fundamentals.)’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명제는! 역사를 뒤흔드는 말이 되었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이 말은! 르네상스 곧 ‘문예부흥’의 신호탄이 되었고, 또한 기독교 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한 시대를 향한 선포이기도 하지만, 또한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강력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전자제품을 사면 사용설명서, 매뉴얼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제품의 사양은 어떻고, 주의사항은 뭐고, 주요 기능은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리고 고장 나면 서비스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등등…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네!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는 나의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시험당할 때, 고장 나면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모든 주의사항과 안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딤후 3:15~17입니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네! 성경은 우리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르게 이끌어 가는 매뉴얼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책입니다. 오늘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새로움을 갖고, 인생을 근원적으로 바르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네! 우리가 사는 길이 있습니다.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호 6:1의 말씀입니다.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아멘.

여기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장소적인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원함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변화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은 계속 해왔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언제 제사를 안 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일상에서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가는 자기 백성을 그냥 지켜만 볼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채찍을 드시고, 징계하신 것입니다. 히 12:8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주님은 개입하시고 징계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찢으셨다, 치셨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찢으셨던 하나님이시지만, 다시 낫게 해 주실 것이요,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네! 성경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를 치료하시는데, 어떻게 치료하십니까? 2절 말씀입니다. 호 6:2 →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틀 후에 살리시며, 셋째 날에 일으키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아주 빠른시간에 치료하시고 회복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크고 영광스럽게 바꿔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절 후반부 말씀처럼,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호 6:2b →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아멘. 오늘 이 예배 자리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마다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와 교계를 볼 때, 어쩐지 하나님과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고, 죄악의 불길은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대로는 안 됩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자!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말합니다. 호 6:3a →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패역한 길로 달려갔던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몰라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시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애굽의 왕자로 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양치는 목동으로 전락시킨 이유도,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이유도, 다 이런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출 14:4, 왕상 8:60, 신 4:35, 시 106:8 →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호세아서는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부정한 여인이었지만! 자기의 아내가 된 ‘고멜’에게 자기의 마음을 주고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고멜은 그런 호세아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또다시 방탕한 길로 나갔습니다.

그런 자기의 ‘아내’를 보고, 자기 ‘민족’의 병을 진단했습니다. “도대체 왜 자기 남편과 하나님을 끝까지 믿지 못하는 건가?” “도대체 왜 고멜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떠나서, 끊임없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인가?” 진단 결과,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4:6절에서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아는 지식! 그 마음 중심을 아는 것이 신실함과 믿음을 지키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이요,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오늘 교독문으로 읽은 시 14:1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또 시 10:4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 “하나님을 힘써 알라!”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애(仁愛, 어질인, 사랑애)의 마음을 가지고 살자!

오늘 6절 말씀입니다. 호 6: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 ‘인애’(仁愛)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dseje)라고 합니다. 이 ‘헤세드’라는 말은 그 뜻이 단순하지 않고, 여러 말로 설명해야 그 담은 뜻을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인애, 긍휼, 자비, 사랑, 후대함…’ 등 아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배도 기뻐하시지만, 이 인애(仁愛)를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도 열심히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배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인애를 원하신다는 것은! 예배하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펼치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이 ‘헤세드’라는 말을 인칭대명사로 부르면 → ‘헤시드’가 됩니다. 즉 = ‘하나님의 인애를 베푸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말은! ‘헤세드’이신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어서 ‘헤시드’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호 6:4b → “너희의 인애가 아침 안개와,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한 마디로 쉽게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호세아는 사회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질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헤시드’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으로 진단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가 믿음이 없는 ‘불신사회’가 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인애’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헤시드! 참으로 성도다운 성도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마음을 다잡고, 내 소원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으로 살아갑시다. 또한,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헤시드’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문과 묵상

 

1.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나의 신앙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를 베푸는 사람인 ‘헤시드’로서의 사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르게 이끌어 가는 설명서인 ‘성경’을 암송하는 일에(성경암송 400) 속회가 같이 도전해 볼 계획을 세워봅시다.

김성윤
2024-11-23
조회 290

아름다운 완주! (딤후 4:5∼8)

 

신앙 인생의 완주를 위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딤후 4:7∼8a →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결론적으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있도다.” 네! 우리도 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최후를 맞을 준비를 하면서, 디모데에게 보낸 유언서와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순교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딤후 4:6 →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여기 ‘전제’(libation)란 말은, 양이나 비둘기 같은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고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민 15:5; 28:7).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포도주를 제단에 붓듯이, 자기의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순교의 제물이 되고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도 바울은! 일생 동안 눈물과 땀을, 피와 모든 생명을 다 쏟아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는 제물로서의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른 서신서들에서 ‘신앙인의 삶’을 ‘운동선수에 비유’해서 자주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①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 (고전 9:24, 갈 2:2, 빌 2:16, 3:13∼14) ② 권투선수 (고전 9:26) ③ 씨름, 레슬링선수 (엡 6:12) 그래서 바울은 지금, 자신의 지나온 생애도 운동선수와 비교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보았던 말씀인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세 마디의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7절로 8절입니다. 딤후 4:7∼8a →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있도다.”

우리말에는 ‘현재 완료형’이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의 번역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싸우고’와 ‘마치고’는 현재형으로 되어있고, ‘지켰으니’ 하나만 과거 시제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을 보면 세 단어가 모두 ‘현재완료형’으로 되어있습니다. →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I have kept the faith.”(NRSV)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자신은 신앙적인 인생을 완주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앞선 서신들에서는 신앙인의 자세는 운동선수와 같아야 한다고 ‘권유하는 형식’으로 표현했고, 시제 또한 ‘현재형’이나 ‘미래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현재 완료형’ 즉 이제 자신의 인생에서는 다 이루어진 일로 보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으로서 위대한 승리를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세 마디 → ‘① 싸웠고 ② 마쳤고 ③ 지켰노라.’라는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여기서 ‘싸웠다’는 의미는! 고대의 여러 운동 종목들 가운데 레슬링이나 씨름 경기와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끌어안고 땀을 흘리며 씨름하는 레슬링 선수처럼, 바울은 선한 싸움을 해왔습니다. 이 싸움은 그저 적당히 쉬면서 구경하면서 하는 싸움이 아니라, 목숨을 건 사투였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자기 동족 유대인들과 또한 이방인들과 고통스러운 싸움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굶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탔던 배가 파선을 당하여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기고, 한마디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와 같은 싸움을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하는 싸움이 ▸복음선포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며▸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 싸우는 선한 싸움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는 싸움이 ‘선한 싸움이어야’ 인생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공부하고, 왜 돈을 벌고, 왜 사업에 성공해야 하는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단지 나의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무슨 싸움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의롭고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모든 싸움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명한 사명을 자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거룩하고도 선한 싸움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번 다니엘기도회 간증자로 나왔던 임정택 대표! 그는 정신장애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히즈빈스’를 창업하고, 모든 난관을 뚫어내며 열심히 사업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구홍림 장로! 그는 우성염직의 대표이사로 ‘자신의 일터에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게’ 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업을 경영하고 있음을 간증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참 가치와,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목표로 사업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돈이나 명예나 권력, 이런 것에 굶주려서 싸우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좀 더 거룩하고 고상한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내 달란트로, 내 직업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겠다! 내 인생에 아픔과 상처가 많지만! 이것을 통해 오히려 세상에서 아파하는 사람들! 상처 입은 자들을 보듬고 세워가겠다!” 이런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갈 때, 우리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2.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이 말은, 달리기하는 선수가 끝까지 완주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이미지가 씨름이나 레슬링과 관계되어 있다면,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이미지는 달리기(race)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 경주 앞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때론, 비난과 모함 중상모략으로 심적인 고통을 당하여 일어설 수 없을 정도가 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바울은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 목표를 향한 달리기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17절 끝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딤후 4:17c →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바울이 얼마나 힘든 길을 달려왔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험하고 힘들기 짝이 없는 경주를 완주하고 마침내 결승선에 도착한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끝까지 하는 사람이 위대한 것입니다. 용두사미란 말처럼! 처음과 중간에는 잘했지만, 끝이 좋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견디어 내고 끝까지 잘해서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라톤 선수에겐 출발을 잘하는 것보다, 완주하는 것이 더 큰 과제입니다. 1968년 멕시코 시티에서 벌어진 하계 올림픽에서 한 선수가 한쪽 다리에 피가 흥건한 붕대를 감은 채, 다리를 질질 끌면서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탄자니아의 36살 선수, 잔 스태픈 아크와리(John Stephen Akhwari)였습니다. 아크와리 선수는 달리다가 넘어져서 무릎과 발목에 심한 상처를 입어, 도저히 더 달릴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주했던 것입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부상이 심한데, 왜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뛰었습니까?” 그때, 아크와리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고 분명했습니다. “내 조국은 경기를 시작하라고 나를 멕시코 시티에 보낸 것이 아니라, 끝내라고 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는 종점까지 가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달리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완주해야 합니다. 때로 낙심되고, 시험거리가 찾아오고, 환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 완주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믿음’이라고 할 때, 기독교가 가르치는 모든 신앙적 신조와 교리에 대해서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팎으로 닥쳐오는 유혹과 시련에 맞서 싸워야 했지만, 바울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지조를 굳건히 지키며,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리고, 믿음의 지조를 잘 지켜냈지만, 그렇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0절 이하를 보면 이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딤후 4:10∼11 →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또한, 이렇게 단지 바울 곁을 몰래 도망쳐 버린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못된 짓을 노골적으로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딤후 4:14∼15 →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한때는 바울의 제자요 동역자로서 예수를 잘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자 예수와 바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선한 싸움을 중단하고, 세상 물결에 휩쓸려간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지 못한 채, 중간에 기권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의 지조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지켜낸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8절입니다. 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이 신앙의 승리를 선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세 마디 ① 싸웠고 ② 마쳤고 ③ 지켰노라 라는 고백이 본인에게는 어떻게 다가오는지 나눠봅시다.

 

2. 내 인생의 목표와 비전은 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원하심과 뜻을 깨닫고 세운 것인지 생각 해 보고, 새롭게 할 마음이 있는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이번 다니엘기도회에서 제일 마음에 와닿은 간증자의 고백을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1-16
조회 176

주가 쓰시는 사람은! (딤후 2:20∼26)

 

오늘 본문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행 9:15 →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님이 바울을 일러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께 꼭!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외모로 판단합니다. ‘금이냐? 은이냐? 나무냐? 흙이냐?’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삼상 16:7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는 그 ‘중심’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의 첫째는 ‘욕심없는 헌신’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이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서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께 대해서 인색한 사람은 쓰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죄의 뿌리가 ‘욕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 1:15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 욕심 때문에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욕심이 마음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명령도, 하나님의 요청에 대해서도 인색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온전한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십일조는! 쉽게 드릴 수 있는 분량의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쉽지 않은 드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훈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까지 부러워할 형통함의 축복을 약속하시고, 그렇게 되나 안되나! 하나님 당신을 시험해 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3:10∼12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①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②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③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제일주의’를 선언하시고, 하나님께 대해서 ‘인색한 마음과 싸워 이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의 두 번째는 ‘깨끗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도 아니요, 은그릇도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우리의 삶을 형통하지 못하게,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사용하는 무기와 전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하나님께 대해서 ‘인색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고 ②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판단해 볼 때, 사탄·마귀는 지금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두 번째 문제 즉, 사람을 더럽게 하는 전략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달려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요소는 바로 ‘깨끗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깨끗한 그릇으로 살아가기는, 점점 더 악하고 나쁜 세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양상은 시대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집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 정도로 가난할 때는, 보편적인 죄의 문화는 대개 돈과 관계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개인과 나라가 점점 부유하게 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죄의 문화는, 성(性)적인 타락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 우리를 공략하는 사탄의 코드는 ‘돈과 경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이때, 우리를 공략하는 사탄의 코드는 ‘성(性)’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정신 차리고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성적인 순결’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귀하게 여기시고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깨끗한 삶’을 위하여 두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 첫 번째 권면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딤후 2:22a →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여기서 “피하라”는 말은 ‘안전하게 도망하라’, ‘탈출하라’는 의미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피한 것처럼, 그렇게 피하라는 것입니다.

애굽 황실의 경호대장 보디발은, 요셉을 신임하여 그에게 모든 소유를 맡겼습니다. 즉 요셉은 비록 종으로 팔려왔지만, 인정받고 사랑받는, 안정된 자리를 확보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과 주인에게 죄짓지 않기 위해서 그 유혹을 뿌리칩니다. 그 결과, 보디발의 아내는 거절당한 수치심 때문에 요셉을 성폭행범으로 몰아, 처벌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유혹에 넘어갔고, 삼손은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요셉만은 그 큰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깨끗함을 잃느니, 차라리 수치와 감옥을 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 요셉을 크게 들어 쓰신 줄로 믿습니다.

 두 번째 권면은 ‘따르라’는 것입니다. 딤후 2:22b →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즉 적극적으로 ‘쫓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쫓으라는 것입니까?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쫓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혼자 결심하고 그렇게 살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하라”고 권하십니다. 즉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 ▸불의를 멀리하는 사람들 ▸의에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만,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려고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성공과 번영을 꿈꾸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회가 중요하고, 선교회가 중요하고,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소그룹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워야 하고,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뎌진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들은! 모두 다 죄에 대하여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회개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애통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마 5:4),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시 51:17)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그 괴로움이 지나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 ▸죄가 아프지 않은 사람 ▸죄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은! 결코,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혹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죄짓는 것이 생활화되었고, 별로 불편하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보편화된 죄의 문화에 익숙해져서!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하고, 세상을 따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다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 12:4 →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무슨 말입니까?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먼저 ①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주를 위하여 쓸 수 있을 때까지 ‘욕심’과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전하고 흠 없는 십일조에 도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싸워서, 헌신 된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②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지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윤리·도덕적으로 타락한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말씀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교독문으로 읽은, 시편 119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19:9 →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가시길 바랍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를 당신의 ‘그릇’으로 쓰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의 인생이 되어! 크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은 판단하신다고 하셨는데, ‘욕심’과 ‘깨끗함’이란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이 더 신경 써야 할 내용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는 십일조! 그 약속들을 열거해보고, 본인에게는 어떤 약속이 가장 소중한지? 나눠봅시다.

 

3.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하라고 권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속회와 선교회 등 소그룹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1-09
조회 219

경건을 훈련하는 성도가 되자! (딤전 4:5∼10)

 

‘경건’이 무엇인지? 큰 틀에서 아주 명쾌하게 정의를 내려주고 있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약 1:27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①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②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이 두 가지 면에 균형 잡힌 경건 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행 10장에 나오는 ‘백부장 고넬료’입니다. 행 10:2 →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네! 그의 경건한 삶의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① 기도의 ‘내적 훈련’과 ② 돌봄과 베풂의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을 수레에 비유하자면! 한쪽 바퀴가 ‘기도’라면, 다른 한쪽 바퀴는 ‘구제’라는 것입니다.

 

1. 먼저, 내적인 ‘경건 훈련’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훈련입니다. -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딤전 4:5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우리가 매일 식사를 세 번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을 하루에 3장은 읽고 묵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1년에 성경을 완독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삶이 거룩해지고 경건해집니다. 그 결과,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직장이나 세상에서 신앙인 다운 정신과 자세로, 바르게 일하고 넘어지지 않고 살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고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다니엘 기도회 강사 ‘이요셉 작가’의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2) 기도하는 훈련입니다. - 다시 5절 말씀입니다. 딤전 4:5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기도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통로입니다. 차를 마실 때도 기도하고, 과일을 먹을 때도 기도하고, 밥을 먹을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쉬지 않을 때, 성도는 경건해집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식사할 때도, 숨지 말고 의도적으로 먼저 기도하고 밥을 먹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고 지켜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면! 부담스럽고 손해 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로 여기고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식사기도라든지, 가정예배 때 대표기도를 하도록 훈련 시켜야 하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의 시련이 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3) 헌금 드리는 훈련입니다. -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도, 중요한 경건의 훈련입니다. 헌금의 기본은 십일조입니다. 소득 전체를 10으로 보면 그중에 1은 하나님의 것으로 믿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신앙인의 기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적인 고백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내가 번 돈은 전부 다 내 것이라고, 자신과 자신의 삶의 둥지를 아름답고 안전하게 하는 일에만 써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헌금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합니다. 학생들도 청년들도 이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복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는 일입니다. 축복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심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은 30배 60배 100의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헌신은 결코 허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엄청난 축복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삶 속에서 체험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고후 9:6 →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4) 좋은 언어훈련입니다. - 딤전 4:7 →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성도는 좋은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 망령된 말, 허탄한 말, 들으면 실족 될 말, 욕, 독설, 거짓말, 남을 헐뜯는 말,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나아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형제자매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고 신바람 나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입에서 언제나 축복의 말, 칭찬의 말이 나오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입의 종교입니다. 입으로 하는 말대로 됩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곧 자기의 앞날이 되는 것입니다. 입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그냥 입 자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의 지시를 받아 밖으로 표현하는 인격의 대표로, 우리 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을 몸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에 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한 나라가 잘되고, 사회가 잘되고, 가정이 잘되고, 개인이 잘 되는 건! 전부 입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입을 보고 계십니다. 감사하는 입이 되시고, 믿음의 입이 되시고, 성령 충만한 입이 되어서, 축복의 문을 여는 복된 입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다음은, 외적 경건 훈련입니다.

1) 봉사하는 훈련입니다. - 성경에 보면 ‘봉사하라, 섬기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섬김을 받을 때 기뻐하기도 하고, 반대로 섬길 때 삶의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갖게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후자! 즉 ‘섬기면서 누리는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0:45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사람과 세상을 섬기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길 때 우리는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Joy in God!’ ‘희락’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섬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Ex.) 1924년 10월 1일생으로 금년에 만 100세를 넘겨, 최장수 전직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사랑의 집짓기’(해비타트)운동.

봉사와 섬김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교회, 행복한 나라는 봉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2) 가치 있는 인생의 목표를 위해 전심전력하는 훈련입니다. 딤전 4:10 →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2024년 다니엘기도회 지난 화요일(5일) 간증자는 임정택씨 였습니다. 그는 히즈빈스 창업자이며, (주)향기내는 사람들의 대표이사로 다양한 장애인들을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로 훈련시켜 까페를 열고, 직원으로 채용하여 자립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장애인들이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하나님의 꿈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한동대학교 대학생 때에, 지극히 작은 소자 한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시대의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 섬기리라! 꿈을 꾸고 그가 발견한 대상이 바로 ‘장애우’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오랜 시간 대화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직업’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의 영향으로 대부분 ‘바리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발로 뛰면서, 그들을 교육시켜 줄 강사를 찾고, 개업할 장소를 찾고, 후원할 기업과 사람을 찾아 까페를 열어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모든 어려움과 난제를 극복해가면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큰 꿈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많은 도전을 주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나는 무엇으로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으리라고 믿습니다.

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선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수고하고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요,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는 여정에는 수많은 도전과 시련이 있지만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꿈을 이루려면! 그 꿈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내와 헌신과 훈련이라는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합니다.

월터 헨릭슨(Walter A. Henrichsen)이 쓴 책 가운데 ‘훈련으로 되는 제자’(Disciples are made not Born)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결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훈련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영적인 훈련을 계속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 속에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건은! 조용하고 차분한 품위 있는 ‘신앙적 성품’을 가지는 것과 함께,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돌봄과 베풂의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에 모범이었던 백부장 고넬료를 하나님은 어떻게 대우해 주셨습니까? →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행 10:4)고 성경은 말합니다. 네!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자기의 가정뿐 아니라, 일가친척, 자기의 부하들과 친구들까지 다 구원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경건의 두 가지 영역(①내적인 영적훈련과 ②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자신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오늘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는 것”이라는 정의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구현해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먼저 ‘가치 있는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1-02
조회 303

나의 감사일기! (시 100:1∼5)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성도님들과 가정과, 우리 교회와 나라를 지금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아울러 어려운 일들 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까지 믿음으로 살아오셨고, 또 더 큰 믿음으로 살아가실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이 더욱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국가적으로 그 어떤 때보다도 어려운 경제 현실과, 소망을 주지 못하는 정치현실 속에서, 많은 분들이 사업과 직장과 건강과 가정적인 어려움 속에서 맞이하는 감사절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비범한 감사, 수준 높은 감사, 차원 높은 감사, 뜨거운 감사를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1. 절대감사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감사 찬양인 시편 100편의 고백이 그대로 또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는 감사의 찬송이 우리들의 마음에, 성전 안팎에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시편 100편에는 우리가 감사 찬양을 드려야 할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2절 말씀과 같이, ①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에게 감사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②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으로서 ③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마지막 5절, ④ 여호와는 선하셔서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확실한 관계성에 근거하여 드리는 감사를 ‘절대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절대 감사는 상황이 바뀌고, 고난 속에 던져질지라도 결코 변할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 감사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절대감사’가 더욱 새로워지고 확실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가지 제안

그동안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감사함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① 많은 것을 잃어버렸어도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됨을 감사한 청교도들의 감사 ② 강도를 맞아 다 빼앗기고 매 맞았어도 자신이 강도가 아님을! 또한, 가장 귀한 생명을 빼앗기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메튜헨리 목사님의 감사

③ 독일 재무장관을 지내고 존경받는 마르티 바덴(Marty Baden)의 젊은 시절 이야기인데, 어디를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서 묵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누군가가 자신의 구두를 훔쳐 간 것이었습니다. 마침 주일이었는데, 여관 주인이 헌 구두를 하나 주며 같이 예배에 참석하자고 권해서 신고 투덜거리며 예배에 참석했는데, 앞에 앉은 한 남자가 감격스럽게 찬송을 부르고,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리며, 말씀에 아멘 아멘!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덴은 오히려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예배 후에 그가 두 발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는 깜짝 놀라, 신발을 신을 두 발이 없는데도 저렇게 감격하면서 살아가는데! 나는 헌 신발을 신게 되었다고 불평하고 원망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 그때부터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원망 불평 대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살아 마침내 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었다는 이야기

④ 손양원 목사님이 공산당에게 아들 둘을 잃고도 하나님께 드린 아홉 가지의 감사,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 3. 삼남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4. 또한,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5.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 이리요.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 7. 나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8.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이상의 모든 감사들은! 역경 속에서 고백 된 감사의 고백들이기에 더욱 감격하며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다른 사람의 ‘감사고백’을 듣기만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감사의 간증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 모두 매일 매일 ‘감사 일기’를 써 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날은 건너뛸 수도 있겠지만, 매일 매일 내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감사를 찾아 글로 적어보는 감사의 일기를 써 간다면, 확언컨대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제안은, 주일 날 ‘감사헌금’을 드릴 때 그저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그 한 주간에 감사했던 일들을 더듬어 그 감사의 내용을 정성껏 봉투에 적어서 드려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확신하건대! 여러분의 삶 속에 감사할 일들이 차고도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누가?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까?

저는 이 제안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면서 ▸누가 이런 일에 동참해야 할까? 그리고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까? 생각하면서, 이런 기대를 가져봅니다.

먼저, ▸누가 이런 일에 동참해야 할까? ⇨ 하나님께서는 이 감사의 장에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이들과 학생들과 청년들의 감사가 넘치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1:16 →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이 말씀처럼, 부모님들이 대신 내주는 감사헌금이 아니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써서 자신들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어린이, 학생, 청년들이 많이 생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서부터 감사를 드리며 성장하는 어린이들, 경제적으로 아직 독립하지 못했으면서도 정성스런 감사를 드리는 학생들과 청년들의 삶을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까?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며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학생들의 일천번제와 감사헌금에 하나님은 어떤 응답을 주실까? 아들과 딸의 좋은 배필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님의 정성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감사하며 기도의 소원을 아뢰는 청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실까? 저는 확신 하건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까?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 절대감사가 가장 많기를 기대하실 줄 믿습니다. 앞서 ‘절대감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드리는 감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네! 우리들이 드리는 감사 사연에는, 이런 절대감사가 가장 많기를 기대합니다. 좋은 일이 있어서 드리는 상대적 감사는! 다 이 절대감사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즉 절대감사가 풍성해질 때! 생활 속에서의 감사, 상대적인 감사의 제목들은 더욱 차고도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 미리 드리는 감사가 많아지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신명기 16:15의 말씀입니다. →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 이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시작된 한 주간도, 승리의 한 주간 될 줄 믿고 감사.’ ‘새 달도 온전히 주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대로, 역사하여 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 ‘새로 시작한 일, 번창하게 하실 줄 믿고 감사’ 이렇게 확신 가운데 믿고 미리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 어려움 가운데서도 드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가 많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병상에서, 곤고함 가운데서, 무거운 짐을 지고도 드리는 성숙한 감사를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청교도들의 감사, 메튜헨리 목사님과 마르티 바덴 재상,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이 드렸던 감사는 모두 하박국 선지자처럼 역경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렸던 감사였습니다. 이런 성숙한 감사가 우리에게도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 ‘신앙생활의 성장과,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감사’가 많아지기를 기대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의 결심을 갖게 된 것 감사, 성경통독 감사, 성경암송 감사, 전도하게 된 것 감사, 인가귀도 감사, 교사와 성가대, 선교회 임원, 속회 지도자로 섬길 수 있게 됨을 감사, 세례받음을 감사, 성찬에 참석케 된 것 감사, 새벽을 깨워 기도할 수 있게 됨을 감사, 일천번제를 시작케 하심을 감사 그리고 마치게 됨을 감사, 심방을 기쁨으로 받게 하심을 감사, 속회가 부흥하고 선교회가 활성케 됨을 감사… 그렇습니다. 이런 신앙의 부흥과 성장으로 인하여 드리는 감사가 풍성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목들, 그리고 그 내용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천국 창고를 여는 축복의 열쇠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에서 매일, 매 주일, 감사의 기도와 간증이 고백되어지고 커져가서, 풍성한 감사, 비범한 감사로 넘쳐나는 성도와 교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 자신의 ‘절대 감사’의 지수(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한 감사)는 얼마나 될지? 스스로 점검해 보고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잠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한 일들을 생각해보고(적어 보고), 매 주간 감사한 내용을 적어 감사 헌금을 드려보는 결심, 그렇게 할 때 가져올 변화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절대 감사, 미리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 이런 감사 가운데,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감사는 어떤 것인지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10-26
조회 198

나라를 위한 중보기도! (애 3:55∼66)

 

오늘 ‘예레미야 애가’서를 통해서 배울 교훈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탄식하며 눈물 흘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눈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유다왕국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는 그래도 ‘유다’가 평화로웠습니다. 악한 왕들이 많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나는 선한 왕들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나라를 다스려 영적으로·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뿌리 깊은 곳까지 썩어버린 ‘유다’와 그 백성들은 온전하게 서질 못하고, 파멸의 길로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예레미야는 식음을 전폐하고, 밤잠을 설쳐가면서,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라가 망한 광경을 보면서! 탄식하며 지은 시가 바로 예레미야애가서입니다. 눈물로 외치던 예레미야! 본문에서 그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애 3:48∼49 →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네! 예레미야는 많이 울었습니다. 얼마나 애간장이 탔는지 이렇게까지 표현했습니다. 애 2:11 →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1인칭으로 “나, 내,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는 예레미야 그 자신 즉 한 개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슬픔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유다를 일체화’해서 1인칭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나라가 망한 것은! 곧 예레미야에게 닥친 슬픔이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성전을 부수고, 무수한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갔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으로서 이렇게까지 비참해진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비통한 일이었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 조국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자유롭고 안전한 나라로 유지되도록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무릎으로 하는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한반도 주변 상황은! 구한말의 국제정세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시대, 위기의 땅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실 모든 애국자가 다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애국자여야만 합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서 총칼을 들고 나가 싸우는 것만이 애국은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중보하며 ‘기도’하는 것도,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애국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맡겨주신 특별한 사명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유다 민족이 페르시아 제국의 총리대신 ‘하만’의 시기로 인해, 전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외삼촌 모르드개는 왕비가 되어 수산 궁에 살고 있는 에스더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에 4:13∼14 →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여기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지 말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와 유다 민족은 ‘공동운명체’라는 것입니다. ‘공동운명체’란? 마치 태평양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와도 같습니다. 배가 침몰하면! 선장도 갑판장도 선원도 승객도 다 함께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나라가 망하면!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다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자! 외삼촌 모르드개의 ‘편지’를 받은 에스더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에 4:16 →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한 마디로, 민족의 위기 앞에 모든 유다인이 함께 금식하며, 합심하여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문제이니만큼, 모두 하나가 되어 같이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려던 장대에 ‘하만’이 달리고, 유다인은 전부 새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성경의 위인들은! 위기 때마다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민족은! 위대한 기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백성은! 위대한 회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는! ‘위험’이란 말과 ‘기회’란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즉, 위기는! 위험도 되지만 기회도 됩니다. 민족적인 위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회로 삼으면 새로운 살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국제정세를 보면, 미국은 언제나 우리보다는 일본 편인 것 같고,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 편이고, 우리는 딱히 어딜 의지할 곳 없고 하나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곧 다가오는 미국의 대선 결과도 우리의 운명을 많이 흔들 것 같습니다. 이런 때에, 온 국민이 하나님께 무릎 꿇어 기도하는 애국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민족공동체의 위기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영광의 기회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기를 기회로 교환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도 ‘우는 것’ ‘손드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그렇게 합시다.

성도 여러분! ① ‘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인간의 힘이나 재주를 내려놓고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됩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매달리는 것이 눈물이요, 울음입니다. 우리가 눈물로 통곡하며,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찾을 때,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의 눈에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과 눈물이 메말라 있음을 느낍니다. 그만큼 우리의 영성이 메마르고, 강퍅해졌다는 것입니다. 갈수록 눈물이 메말라 가는 이 세대 속에서, 우리는 다시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의 소중함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일랜드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흐르는 눈물이 괴로우나,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다.” 네! 눈물 그 자체는 괴로운 것이지만, 눈물을 잃어버린 것은 더더욱 큰 문제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눈이 메마른 눈이 아니라, 기도의 눈물로 적셔진 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싸움이나 전쟁에서 손을 드는 것은 → ‘항복’을 의미합니다. 내가 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적인 전쟁에서는! 두 손 들고 항복하면 승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에게 항복합니다. “나는 사령관이 아닙니다. 나는 지휘관이 아닙니다. 이 전쟁의 승패는 오직 하나님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내 사업장에 사장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 가정에 주인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에게 항복합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손을 들었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아무리 피곤해도 기도를 멈추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우리 가정과 나라에 승리가 올 것이지만, 내가 피곤하여 기도의 손을 내리면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손을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문제 앞에서 해야 할 일은 ‘걱정’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사람을 찾아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애 3:48∼50 →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네! 눈물로 기도하는데, 나를 살피시고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기도가 반드시 응답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애 3:56∼57 →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시 39:7 →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오직 주께 소망을 두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신음 소릴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대하 7:14 →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아멘.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먼저 우리들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종교인이 아니라,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는 ‘공동운명체’라는 말의 의미와 오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고치고 새롭게 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 신앙적인 관점에서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현재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눈물의 기도가 필요합니까?

 

3. 지금은 성도인 우리들이 깨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제목을 내놓고 함께 기도합시다.

김성윤
2024-10-19
조회 238

내 인생의 새창조 (창 1:1∼5)

 

오늘 우리는 성경의 가장 앞부분인, 창세기 1장 1절∼5절까지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성경의 이 첫 장 첫 절인, 1절 말씀을 믿을 수 있다면! 성경 전체의 말씀을 다 믿을 수 있습니다. 창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보다 더 위대한 신앙고백은 없습니다.

우주 만물이 우연히 생겼거나, 사람은 원숭이가 진화되어 오늘의 우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과 설계 가운데! 천지와 만물, 그리고 우리 인간을 다 각각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다른 모든 것들도 다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 믿어지시면 ‘아멘!’으로 화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그 모든 피조물들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감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1:31 →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자!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느끼실까요? “참 좋구나!”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안타깝게 보시면서 “너! 삶이 참 힘들구나! 너무 어둡구나! 참 복잡하구나!”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각자의 답이 다를 수 있겠지만! 세상에 문제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좋은 인생은 업습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물질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더더욱 아름다운 삶이 되지 못하고, 혼동하고 공허하며, 어두움 속에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 속에서 살아갈 때 ▸혼돈이 질서로 ▸공허가 충만함으로 ▸어두움이 빛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 ‘질서’와 ‘충만함’과 ‘생명’으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이 세상의 처음 상태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캄캄’했습니다. 창 1:2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리고 ‘생명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물러갔습니다. ⇨ ▸모든 것이 정돈되고 ▸각종 생물이 창조되면서 // 죽음의 세상은! ⇨ 생명이 약동하는 세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이 모든 것을 그렇게 바꿔놓은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을 등지고 죄악의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혼돈과 공허와 캄캄함에 맞닥뜨리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에 빛이 비취임으로 만물이 소생하고 활력을 갖게 되었듯이,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 가운데 살던 사람에게! 빛 되신 하나님이 그 마음에 들어오시면! 삶의 질서가 잡히고, 생명을 얻고, 텅 빈 마음이 기쁨과 충만함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물이나 사람이나, 다 똑같이! 빛이 비춰야만 소생하고 활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 빛이신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면 ⇨ 어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까요?

 

첫째, 하나님은 인생의 혼돈을 질서로 바꿔주십니다.

‘혼돈’이란 히브리어 토후(WhTo)나, 헬라어 카오스(χάος)의 뜻은! → ‘형태가 없음, 무질서’란 뜻입니다. 혼돈의 반대말은 → 코스모스(κόσμος)인데 ‘질서’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질서, 전체의 질서, 세계의 질서뿐만 아니라, 질서 있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올해 우리교회의 표어가 ‘품위 있고, 질서 있게!’인데! 바로 하나님 안에서 정돈된 신앙과 인생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표어인 것입니다.

벌써 20년이 지났는데, 태풍 ‘매미’로 인해 엄청난 재해를 입은 경남 마산에 복구작업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가서 보니, 한마디로 ‘혼돈’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습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바로 이런 혼돈입니다.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보지만,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모르고, 바쁘게 일하기는 하지만 방황할 뿐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의 역사를 보더라도 너무나도 질서 정연하게 일을 처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한 완전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 인생에 무질서가 생기고, 혼돈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27:1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여러분과 모든 식구들이 다 ‘질서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의 질서가 회복되고, 참된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생의 공허를 충만으로 바꿔 주십니다.

‘공허’란 히브리어 보후(oWhBo)의 뜻은! ‘텅 비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뭔가 속이 휑하게 비어있는 허전한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자리’를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빈자리를 세상의 것들! 즉, 물질이나 명예나 향락 같은 것으로 채워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채운 만족은! 잠시뿐이지 이내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빈자리’는 오직 하나님이 자리하셔야만 채워질 수 있는 자리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불행이 왜 오는 것입니까? 세상에 대한 ‘소유욕’ 때문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는 공허한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람이 탐욕의 종으로 전락해 버리면! 천하를 다 주어도 부족합니다. 그 무엇으로 채우려 해도! 그 공허를 다 채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게 살았던 사람은, 이스라엘의 3번째 왕이었던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그의 최종 삶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세상 것으로 겉을 치장해 보아도 속은 여전히 공허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쓴 전도서를 보면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전 1:8 →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왕’이었기에! 눈에 좋게 보이는 것, 귀에 좋게 들리는 것을, 다 가져보고 누려 봤지만!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영혼의 공허를 채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전 2:11 →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도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인생의 결론으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전 12:1 →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여러분의 삶에 공허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의지하여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공허’가 ‘만족함과 충만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3:5 →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느니라.” 더 이상 원함이 없는 마음, 이것이 ‘충만한 삶’입니다.

주 안에서 누리는 이런 풍요함이 여러분에게 넘쳐나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인생의 어두움을 빛으로 바꿔 주십니다.

‘흑암’이란 히브리어, 호셰크(&v,jo)의 뜻은! 단순히 ‘어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죄악, 허무, 무지, 맹목을 뜻합니다. 이런 ‘흑암’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2절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한 것은, 천지가 다 캄캄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이 바로 이런 캄캄한 마음, 어두운 마음, 허무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1:21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렇게 어두운 마음은! 어두운 생각을 낳으며, 어두운 생각은! 죄질 계획을 갖게 하고, 죄질 계획은! 죄의 행위를 낳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를 죄짓게 하는 죄의 독소는,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제약회사마다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발만 되면,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제약회사도! 죄의 독을 치료할 신약개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고 고백하면! 사망과 저주, 무질서와 허무는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 죄의 권세가 더는 우리를 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해야만 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 살전 5:4∼5 →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낮에 속한 자요,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창조주 하나님!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 혼돈의 삶을 마감하고, 공허함을 해결하고, 흑암의 세계에서 나와 빛의 세계로,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여러분들의 인생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구나!’입니까? 아니면 “너 왜 그렇게 힘드니? 왜 그렇게 어둡니? 왜 그렇게 복잡하니?”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2.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채울 수 없는 마음의 빈자리를 느껴보셨나요? 당신은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 오셨 나요?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면 나누어 봅시다.

 

3. 이번에 초청한 태신자(예비신자)들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김성윤
202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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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새롭게! (왕하 22:8∼11, 23:21∼25)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는! 불과 8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20대 중반부터는 선대왕들과는 달리 말씀으로 나라를 새롭게 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8년이 지난 스물여섯 살 때, 퇴락한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그 말씀을 읽고 영적인 깨달음을 갖고, 그날부터 나라를 새롭게 변화시켜 나갑니다. 이 요시야가 행한 개혁의 특징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어디에 근거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들을 파괴하는 일은, 요시야가 개인적으로 세운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원하심을 요시야가 행한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왕하 23:21 →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네! 요시야의 개혁은 언약책,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시야 왕이 훌륭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요시야의 진심이 오늘 본문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24절입니다. 왕하 23:24 →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둘째, 25절입니다. 왕하 23:25 →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여기 밑줄 친 부분은 신명기 6장에 나오는 ‘쉐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 6:5∼6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실천하려고 힘썼던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2. 자신의 삶과 지경을 넘어서까지 개혁했습니다.

사실 요시야의 개혁은! 자기 자신을 갱신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시야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은 것은, 개혁의 대상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2:11)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새롭게 하려고 하면, 먼저 자신부터 새로워져야 합니다. 요시야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시야의 개혁은! 자기 자신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발견된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읽어주고, 그들도 다 그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왕하 23:2b∼3 →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그런데 그의 개혁은 자기가 다스리는 ‘유다’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 땅에 세워진 우상과 산당들까지 불사르고 헐어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왕하 23:15 →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왕하 23:19 → “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네! 이렇게 요시야의 개혁 행보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벧엘이나 사마리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속한 땅입니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정복되어, 그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니 벧엘과 사마리아 지역의 산당과 우상들을 불태우고 제거하는 일은, 자칫 정치적인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유다의 안위와 안전을 생각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몸을 사리지 않았고, 진리 추구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계산하거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했으며, 영적 타락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시야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상황과 여건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한 영혼을 향한 거룩한 사랑을 품고, 어디든 가셨고, 누구든 만나셨습니다. 눅 19:10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가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삭개오의 집에도 들어가셨고, 남편이 다섯이었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도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열정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습니까? 복음의 능력이 어느 한 지역이나 민족에 머물거나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 온 인류에 확산되어,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영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있을 ‘새 생명 전도축제’에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요시야 한 사람의 거룩한 결단으로 인해, 죄와 타락에 빠져 있던 수많은 백성이 진리 안으로 돌아오고, 삶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가 ‘왕’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왕’이기 때문에 더 큰 죄악에 빠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믿는 ‘믿음이 컸기에’ 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작은 불씨가 큰 산을 태우듯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의 불씨를 자기 안에서만 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영적인 새로움이 확산하여,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번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한 새로움의 위대한 역사가 여러분으로 인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유월절을 회복시켜, 예배와 감사를 회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요시야가 온 백성으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도록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여호와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였지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그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간 것! 즉 유월(踰越, Passover)한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바로 왕은 이 열 번째 재앙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절기로, 이 유월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되게 살면서부터, 이 절기와 예배를 서서히 잊어버렸습니다.

오늘 성경 22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왕하 23:22 →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사사시대로부터 통일왕국시대, 분열 왕국시대까지 ‘유월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절기를 지키고 예배드리는 것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시야는 이 잃어버린 유월절을 회복시킴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는 ‘예배’를 회복시키고, 자신들이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한 것입니다. 왕하 23:23 →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서를 발견한 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도 요시야의 가슴에 불붙었던 ⇨ ‘예배신앙’ ‘감사신앙’ ‘은혜 의식’이 꼭 필요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는 거룩한 통로이며, 하나님과 기쁨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장입니다. 또한, ▸‘감사’는! 구원의 감격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또한 ▸‘은혜 의식’이 있어야 예배도 감사도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 감사하는 자! 은혜를 아는 자!’를 사랑하시고,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유월절을 회복시킨 요시야의 신앙을 거울삼아,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요시야는 단순하고 일관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켰습니다. 요시야는 이렇게 말씀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런 왕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내 삶을 바르게 하고,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감사와 은혜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타락으로 굴곡져 있던 유다의 상황을 타개하고 온전히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요시야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응답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마음의 밭을 열매 맺는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뽑아버리고, 잘라버리고, 뒤집어 엎어야 하는지? 깨달은 것을 나눠봅시다.

 3. 요시야가 누렸던 가장 큰 축복은 그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성취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특히 ‘새생명 전도축제’와 연관하여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