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인 서기 54년경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사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이 에베소에 가길 원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시고 유럽 쪽으로 인도하심으로, 돌아올 때에야 잠시 들를 수 있었던 곳입니다.(행 18:18∼23) 그러나 에베소야말로 선교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당시 이 에베소는! 아시아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크고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는, 이 에베소에 비교적 오랜 기간 머물면서 사역을 펼치게 됩니다. 서기 54년경부터 56년까지 약 3년 동안 이곳에 ‘두란노서원’을 개설하고, 목회자를 양성하여 배출했습니다.(행 19:8∼10) 그 결과! 소아시아 지역에 7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에베소 교회는 그 중심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정말 심혈을 기울였고, 눈물과 기도로 목회한 교회였습니다.(행 20:17∼38)
후일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도중 밀레도 항구에 기착했을 때, 본인이 에베소교회까지 올라가지는 못하고,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서 교회의 장로님들을 밀레도 항구로 청하여 만나는 장면이 사도행전 20장 17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 마지막 장면인 36절부터 38절까지를 읽어보면, 바울과 에베소교회 장로님들 간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 20:36∼38 →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을 한번 머리에 그림으로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뜨거운 눈물과 기도, 목회자와 성도 간의 끈끈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의 신뢰와 사랑이 뜨거웠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도 그런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요한계시록인데! 이 요한계시록의 기록 시기는 서기 100년경에 저술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교회가 세워진 지 4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에베소교회는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렸고 또한, 성도 간에 사랑도 식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면 과거 에베소교회는 칭찬거리가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계 2:2∼3 → “내가 ①네 행위와 수고와 ②네 인내를 알고 또 ③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④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⑤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⑥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네! 에베소교회는 ⇨ ① 주님을 위해 수고한 교회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②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고 핍박을 견뎌낸 교회입니다. 또한, ③ 이단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말씀의 진리로 무장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드러내는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점이 많은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가 책망받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계 2:4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이유는!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 머리는 가득 찼고 이성적인 판단과 분별은 잘하지만, 가슴엔 따뜻한 사랑이 없는 냉랭한 마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많이 식어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엔 믿음의 연조도 길고 꽤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속은 텅 빈, 형식적인 신앙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어떤 분이 신앙 상태를 음악과 비교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악보를 보면 다양한 기호들이 붙어 있는데, 그중에 ‘Crescendo’와 ‘Decrescendo’라는 ‘음악 기호’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호는! 음의 강약을 조절해줌으로써 악상을 살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벌어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 ‘Decrescendo’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리를 점점 줄어들게 연주하라’는 것이고, 모아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벌어지면 음악적인 용어로 ‘Crescendo’라고 하고, ‘소리를 점점 크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음악 기호’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본다면! 비록 처음에는 미약했다 할지라도, 점점 더 나아지고 뜨거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바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다, 크레셴도의 믿음! 점점 좋아지고 뜨거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하게도! 희망적인 것은,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다시 살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 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①생각하고 ②회개하여 ③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R로 시작하는 ‘세 단어’ ⇨ Remember, Repent, Restore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Remember’ -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가만히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에 대한 그 뜨겁고 순수하던 열정이 식었다면! 언제, 어느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아니면 취직하고 출세하고, 아니면!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목사가 되면서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이사하고, 돈 벌고, 아이 낳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맑씀읽기와 묵상 그리고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첫사랑과 같은 뜨거운 열정과 열심을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서,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Repent’ -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되돌아본 후!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유무에 따라서 인생이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후회’와 ‘회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잘못된 자리에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부인했고, 세 번째는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잘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라고 ‘후회’하며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잘못한 것을 깨닫고 후회는 했지만,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면! ‘후회’하고 아예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잘못된 자리를 털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Restore’- ‘회복하라(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했다 할지라도,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그 회개는 거짓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생활 속에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기도의 열심을 잃어버리셨습니까? 다시 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의 자리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용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기도의 십자가도 받았는데 기도 줄을 놓고 있었다면! 다시 기도의 십자가를 붙드시길 바랍니다. 봉사와 섬김의 열정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임명장을 받고, 직분을 가졌어도, 사명을 팽개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여러분이 서야 할 자리로 빨리 돌아오십시오.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면! 즉시,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입니다.
요 21:16 →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사랑을 확인하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에 서게 하신 예수님! 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회복’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충성하는 제자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계 2:5b →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 주님이 옮기시겠다고 하신 ‘촛대’란 ‘성령’을 의미하고 ‘구원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 은혜도, 구원의 역사도 깨닫지 못하는 개인! 결코,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 품었던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가운데 사라져가던 주님에 대한 첫사랑이 다시 한번 활활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발전하고 성숙해 가는 성도들이 되어,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귀히 여겨주시는 복된 천국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지금 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때, 잃어버리거나 식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앙의 요소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서로 나눠봅시다.
2. 10년 혹은 20년의 기간을 두고 봤을 때, 나 자신의 신앙의 성숙도와 열정이 깊어지고 뜨거워졌는지? 아니면 옅어지고 식었는지 서로 나눠봅시다.
3. 대장장이는 쇠가 빨갛게 달구어졌을 때, 망치로 내려쳐야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쇠가 식고 난 후에는 세게 내려쳐도 원하는 모양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망치질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딤후 3장에 보면, 말세가 되면! 이 세상이 더 살기가 힘들고 고통스럽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곧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이 되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딤후 3:1∼2, 5b →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5절에 결론적으로)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해도!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마음’과 ‘입술’과 ‘삶’에 늘 감사가 풍성한 사람들이 되어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감사를 잊지 맙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이 들어서 다 잊어버리고 기억 능력이 약화되어도, 이것만은 꼭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제가 확신을 갖고 말씀드리건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욕심에 빠져서, 늘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면! 상대적으로 치매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세 차례, 꼭 감사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감사절을 지키라고 하신 까닭은! 하나님이 무슨 물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감사하는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매년 3∼4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왜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어야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감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것은! 축복받고, 사랑받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역대상 16장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대상 16:8,10 →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 그리하면(감사하면)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마음의 즐거움, 하늘로부터 임하는 유쾌함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0장 말씀입니다. 렘 30:19 →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아멘. 감사하는 자를 번성하게 하시고, 수효가 늘어나게 하시고, 존귀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네! 감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빌 4:6∼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왜 그냥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감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감사가 체질화되고 습관화되어, 늘 감사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은혜의식을 가집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다윗의 감사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싶은 열망이 무척 컸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드릴까 생각하다가,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대상 29:11∼12 →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부와 권세와 만물이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신앙고백에 바탕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자세로 감사드렸습니다. 대상 29:14 →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여기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는 받을 자격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큰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다윗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기는 자격도 없는데 높은 지위와 큰 물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그 마음 중심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왔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이 있어야, 참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일용할 양식이! 내 수고로 모으고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켜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고백하면서 ‘감사합니다.’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것을 드린다는 교만함이 아니라, 다윗처럼 “우리가 주의 손으로부터 받은 것을, 주께 드릴 뿐입니다.” 고백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먼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금과 은을 드렸습니다. 대상 29:3 →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私有)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그런데, 다윗이 얼마만큼의 금ㆍ은을 드렸는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상 29:4 →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여기 금 3천 달란트는 무게로 치면 102톤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참고로, 2025년 3월 현재 우리나라의 금 보유량은 104톤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금 전체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거기다가 은 7천 달란트는 240톤이니, 엄청난 액수의 예물을 성전건축을 위해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다윗의 봉헌에 감동한 지도자들과 백성들도, 성전건축을 위해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대상 29:6,9 → “이에 모든 가문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관이 다 즐거이 드리되,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
그렇습니다. 왕과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거운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드릴 때 ‘즐거운 마음’과 ‘자원함으로’ 드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 기뻐하시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감사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감사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힘일까요? ‘감사는! 감사를 불러오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진짜 감사한 일이 생기고, “괴롭다, 죽겠다” 하면! 정말 괴로운 일, 죽을 일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 감사가 내 삶에 임하기를 바란다면! 감사의 말을 입에 달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429장이 있는데 그 1절 가사를 보십시다. 429장 1절 →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후렴)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1절 가사에 3번이나 받은 복을 세어보라고 했습니다. 네! 복은 세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받은 복이 뭐지? 감사할 일이 뭐가 있지? 하며 손가락으로 하나둘하고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금방 생각이 나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예수 믿게 된 것,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이렇게 적다 보면 30가지, 100가지도 적을 수 있게 됩니다. 남과 비교하여 없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역대상 29장을 보면 → “드렸노니, 드리되, 드리고, 드림으로, 드렸을 뿐, 드렸사오며” 여섯 번이나 ‘드린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롬 6:12∼13절에서는 →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나의 삶을 주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연주해 주십니다. 여기 ‘무기’라는 단어는 → 영어의 weapon이 아니라(X), ‘도구’라는 뜻의 instrument입니다.(O) 이 instrument라는 단어는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제가 연주하면 어떤 소리가 날까요? 서툴게 연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찬양대 반주자가 연주하면, 동일한 피아노이지만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붙들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다윗을 하나님이 붙들고 연주하시니까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은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주께 드림으로! 더 크게 쓰임 받았던 다윗과 같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감사하지 못함으로 행복을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나는 가정 식구들에게 감사의 신앙, 감사의 문화를 계승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원망과 불평의 문화를 계승 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고 나눠봅시다.
3. 당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금 내게 있는 육체, 마음, 신앙의 질병은 무엇인지? 각자 그 원인을 나눠봅시다.
사람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것을 알고, 일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존재입니다. 아니! 그런 존재여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람들 중에는 날 때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1. 다윗은 죽기 전에 무엇을 마무리하고 죽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 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솔로몬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고,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에게 있어서 그냥 차기 왕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했지만, 평생의 소원이었던 성전 건축을 자기를 대신하여 이룰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하고 심사숙고 끝에 여러 아들 중에 ‘솔로몬’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 “너는 성전을 건축하여라. 성전 건축은 나의 평생소원이었으나, 하나님은 나의 손으로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내 아들, 너를 통해 성전 짓기를 원하셨다. 성전 건축을 위한 금, 은, 놋, 철, 재목, 돌 등은 다 준비되어 있다. 그러니 너는 여호와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여 성전을 건축하라.”
둘째, 다윗은 새롭게 시작될 성전 시대에 맞도록, 레위인들의 직무를 새롭게 재편하여 ‘성전 예배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지막 열정을 새 시대, 새 성전의 질서를 세우는 데 쏟아부었습니다. 즉 레위 사람들의 직무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여, ‘성전 예배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이전까지 회막과 각종 기물들, 특별히 언약궤를 옮길 때 그들의 어깨로 메어 옮기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레위인들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성전이 세워지게 되면! 더 이상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이들에게 각기 새로운 사명을 부여한 것입니다.
제사장을 돕는 일부터, 성전의 각 영역을 관리하고,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며, 진설병과 소제물을 준비하는 구체적인 임무까지, 다윗은 예배의 모든 과정이 세밀하고 거룩하게 이루어지도록 재정비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행정적인 개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영광스럽고 질서 있게 드려져야 한다는 다윗의 신앙고백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개혁에는 언제나 개혁을 일으키는 개혁자가 중요합니다. 개혁자가 잘못되면 그 개혁은 엉터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정치와 종교를 개혁하는 일에 영적,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다윗 자신이 직접 진행하였습니다. 과거의 성막 시대의 체제와 조직을 새롭게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조치는, 가히 종교 개혁 수준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제도와 직임의 변화는 벌써 단행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광야를 이동하던 백성들이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동식 성막을 고정식 건물로! 즉 성전을 세우고, 거기에 맞게 제도를 만들고 직무를 배정했어야 마땅했습니다. 대상 23:26 →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에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필요가 없다 한지라.”
그런데, 사사 시대 400년, 사울의 통치 40년, 다윗의 통치 40년, 거의 500년이 되도록 성전도 짓지 않고, 제사 제도도 개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백성들의 책임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책임이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그냥 안일하게 있는 대로 안주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때, 거기에 잘 대처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 때에 우리 교회는 친환경적으로 교회를 리모델링 하고, 대면하여 모이지 못해도 유튜브를 통해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하고, 밴드와 카톡방을 통해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지역 중심의 속회를 예배 시간 중심의 속회로 바꾸고, 환경과 생태문제를 목회의 중요한 주제로 채택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한 단계 더 성장·성숙케 되었습니다. 시의적절하게 사역자들을 붙여주셨고, 좋은 아이디어와 생각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을 세워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 쇠퇴하고, 타락의 길로 가게 된 이유는! 환경과 시대에 맞는 개혁을 시도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 때에 이르러 드디어 이런 일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늙은 다윗’이 멋진 모습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그냥 쉬고 싶고, 책임을 내려놓고 싶어합니다. 아니면 반대로, 노년의 탐심과 탐욕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지막까지! 미래를 준비하고 조직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다윗이 개혁적인 일을 펼쳐 가는 데 있어서 가졌던 몇 가지 원칙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백성의 원로인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다 모으고, 또한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솔로몬 왕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대상 23:2 →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었고, 원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라와 백성들을 이끌어 온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솔로몬을 중심으로 새로운 리더들이 나타날 때까지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이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그들의 동의와 동감을 얻어 개혁을 시행한 것입니다. 어떤 큰일을 행할 때일수록 전 구성원의 마음을 얻어 일하는 것이 중요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레위인들에게 임무를 맡기되 기능별, 직능별로 맡겼습니다. 대상 23:6 → “다윗이 레위의 아들들을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에 따라 각 반으로 나누었더라.”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 중에서 택했고, 찬양을 맡을 사람은 음악가 집안인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택했습니다.(대상 25:1) 문지기를 뽑는 일조차도 사사로운 관계로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공(公)과 사(私)를 잘 구별했던 것입니다.
셋째, 그 대표적인 방법이 다윗이 많은 결정을 ‘제비뽑기’의 방법으로 결정했습니다. 특별히 그 순서를 정할 때,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했습니다. 이것은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 알고 시행하는 신앙고백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대상 24:5a,31b →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장자의 가문과 막내 동생의 가문이 다름이 없더라.” 제비를 요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차별 없이 행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넷째, 다윗은 사명을 줄 때 온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주었고, 특별히 말로만 하지 않고 구체적인 계획도를 주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전 짓는 사명을 솔로몬에게 줄 때 이렇게 합니다. 대상 28:8, 10 →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여호와께서 너를(솔로몬을) 택하여 성전의 건물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 하니라.”
그리고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대상 28:11∼12 → “다윗이 성전의 복도와 그 집들과 그 곳간과 다락과 골방과 속죄소의 설계도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또 그가 영감으로 받은 모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성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설계도를 주고!”
네!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영감으로 받은 성전의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주면서 짓도록 합니다. 그냥 “이거 중요한 일이니 잘해라!” 이런 식으로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설계도”를 주면서 이렇게 건축하라고 준 것입니다. 성전 건축의 열망만 컸던 것이 아니라, 그 준비가 철저했던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다윗에게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인수인계를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일은! 언제나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가 해 온 일을 그다음 사람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여호수아에게 잘 인계했습니다. 모세가 한평생 펼쳐 온 일은 여호수아가 마무리를 잘해서 완성 시켰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잘 인계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다윗왕의 인생 마무리는 참 아름답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 건축의 사명을 아들에게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집니다. 성전 건축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고, 또한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일이니, 꾹 참고 아들에게 그 일을 맡긴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다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은! 남아 있는 후대의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넘겨주어야 합니다. 뭐든지 내가 다 하려고 하면, 거기서부터 무리수가 나오고, 욕심이 개입하게 될 소지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배워야 할 진리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시대의 변화를 읽고 그 변화에 잘 대응하고, 때론 시대를 이끌어 가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나눠봅시다.
2. 개혁에는 언제나 개혁을 일으키는 개혁자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개혁자가 잘못되면 그 개혁은 엉터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라는 말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눠봅시다.
3. 내가 현재 맡고 있는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에서의 역할 속에서 어떻게 거룩한 질서를 세워갈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어떤 소원을 품고 사느냐?’ 이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품은 소원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 여러분의 품은 소원은 무엇입니까? 왜 이런 질문을 드리냐 하면! 오늘 본문이 ‘다윗이 품은 소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소원은 무엇이었고, 하나님은 그 소원에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2. 다윗의 소원
1) 성전 건축 - 오늘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된 후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온 후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마음먹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은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는 왜 이런 마음을 먹었을까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의 중심은 늘 하나님께 가 있었기 때문에! 언약궤, 즉 법궤가 그냥 저 시골 산 동네, 한 개인의 집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언약궤를 모실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을 건축할 마음으로 먹게 됩니다.
자신은 화려한 백향목 궁전에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천막 안에 모셔져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대상 17:1 →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그래서 다윗의 마음이 편안칠 않았던 것입니다. ‘성막’은 → 직물과 가죽으로 덮힌 천막입니다.
이 성막은! 출애굽 당시 모세가 하나님께 그 자세한 설계도를 받아서 제작한 ‘이동형 천막’입니다. 그때로부터 솔로몬 성전까지 약 500년간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처럼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길법한 데도, 하나님의 성소보다 자신의 거처가 더 화려하고 안락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누구의 요청이나 조언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성도 여러분! 이런 다윗의 마음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그동안 고생 많이 했고, 이제 좀 평안하게 잘 사는 것에 대해서, 그냥 “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평안하게 잘살게 되었구나! 참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참 예쁜 생각이죠!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빚진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거하실 처소를 지어드리고 싶은 소원을 품은 것입니다. 이전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고, 품지 않았던 소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나단은 다윗의 소원을 듣고는, 즉시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당연히 기뻐하실 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 17:2 → “나단이 다윗에게 아뢰되,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 왜냐하면! 선지자 나단이 보기에 그런 다윗의 생각과 소원은 너무나 귀하고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늘 주님께로 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무언가 좋은 것을 해드리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다윗처럼! 주님을 향한 소원, 교회와 복음을 향한 선한 소원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거절 -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아주 특별한 소원을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자기의 뜻을 밝혔고, 나단이 좋다고 한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은 나의 집을 건축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선하고 아름다운 소원! 이제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위대한 소원이 거절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다윗의 소원을 거절하셨을까요? 정말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물리치셨을까요? 그래서 다윗의 위대한 꿈과 소원이 쓰레기처럼 버려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상 17:5∼6의 말씀을 풀어쓰면 이런 말입니다. → “나는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천막이 아닌 집, 즉 성전에 있어 본 적이 없고, 언제나 이 장막과 함께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내 백성을 떠난 적이 없었다. 또 늘 옮겨 다녔어도 지금까지 한 번도 사사들에게나 그 누구에게도 나의 집을 지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책망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진 그 마음과 소원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 다른 것으로 응답하심 - 대상 17:7∼8 →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①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②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 즉 ③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아멘.
우선,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미 과거에 주신 복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양을 치던 ‘목동’ 시절부터 그와 함께하셨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도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쟁에서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우셨습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것보다 더한 일이 다윗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와 장차 주실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즉 다윗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국기는 ‘다윗의 별’이라 하여 다윗의 이름을 기리고 있으며, ‘메시아가 그의 후손으로 오시는 등’ 정말 다윗이 얼마나 존귀하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만들어 주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들에게 주실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대상 17:11∼14을 요약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네가 죽은 다음에는 네 자식 가운데 한 사람이 네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다. ▸내가 그 나라를 견고케 할 것이고, 그가 너의 소원인 ‘성전’을 지을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어,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윗의 위대한 꿈과 소원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소원은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다른 복까지 더하여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남다른 소원을 품은 다윗을 기뻐하셨습니다.
4) 다윗의 감사 -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윗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상 17:16 →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비천한 목동에 불과한 자신을 불러,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하신 것도 너무너무 감사할 일인데, 아들 대에 성전을 짓게 하시고, 또 자기 집안이 영원토록 이르게 하신다니….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다윗은 진심으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사람은 다윗만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 다윗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 인간적으로도, 자격과 조건 면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받은 사랑과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상 17:16, 18 →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영예에 대하여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네! 하나님. 저같이 보잘것없는 자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와 대우에 대해서 저로서는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 드려야겠다는 위대한 소원이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그 중심을 받아주셨고, 그 자녀들의 삶까지 보장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그 자녀들까지 복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소원을 품으십시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향한 소원으로 가득하여, 우리 인생에 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풍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에 품은 소원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나는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사는지?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다윗이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리려고 했지만, 그 순수한 의도를 기뻐 받으시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여러분이 베푼 선함이 오히려 더 크게 자신에게 큰 유익과 복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언약궤’는 →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성물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언약궤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품과, 그 위에 있는 천사의 모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히 9:4∼5 →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①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②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③ 언약(십계명)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천사들)이 있으니…”
그런데 ‘엘리’ 제사장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언약궤를 적군인 블레셋의 손에 뺏기고 맙니다. 그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긴 했지만, 높은 산동네 ‘기럇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이란 사람의 집에 들여놓게 됩니다. 이후 적어도 70년 동안 이 언약궤는 잊혀진 채 그냥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된 다윗 때에 이르러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윗은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곳에 왕궁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왕궁에 사는 다윗의 마음이 편안칠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은, 방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기로 결심했습니다.
1. 언약궤를 모셔오는 바른 방법
다윗은 무려 3만 명의 사람을 동원하고, 새 수레를 만들어 ‘아비나답’의 집으로 갔습니다. 드디어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집을 나서는데, ‘웃사’와 ‘아히오’ 형제가 소를 몰게 되었습니다. 그 집이 산꼭대기에 있었으니 길은 좁고 경사진 비탈길이었습니다. 그런 데다가,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의 겨리소가 수레를 끄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마침내 산비탈을 다 내려와 평평한 타작마당에 이르니 소들이 막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실려있던 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니까, 큰아들 ‘웃사’가 손으로 그 언약궤를 붙들었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은데! 만져서는 안 되는 언약궤에 손을 댄 ‘웃사’는 그만 현장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경사스럽고 중요한 날인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을 포기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두고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다윗은 돌아와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일찍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언약궤와 성소의 기물들을 다루는 방법들에 대해서 엄하게 명령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 4:15 →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아론과 그 자손들이 순서에 맞게 성물들을 다 싸면, 레위 지파 자손들이 해당 성물을 꼭 어깨로 메어서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때 절대로 성물을 만져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는 보아서도 안 된다고 명하셨습니다. 민 4:19∼20 →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다윗에게는 언약궤를 왕궁으로 모셔와야겠다는 열심은 있었지만, 실상 그 방법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마침내 언약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맡겨둔 ‘오벧에돔’의 집이 석 달 동안 엄청나게 재정적인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됩니다. 대상 13:14 →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그러자 다윗이 다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올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 15:12b∼13 →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과 ‘규례’를 잘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일을 더 크게 그르치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작년 표어대로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율법의 절차를 따라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에 모시게 되자 다윗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인생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늘 기뻐하는 인생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언약궤를 모셔오는 바른 자세
① 주신 사명을 즐거움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대상 15:25 →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네!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오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오벧에돔의 집에서부터 다윗성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웃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 올 때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분명히 ‘웃사’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짜증스럽고 험하게 다룬 것이 틀림없습니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멍에를 메고 비탈진 좁은 언덕길을 내려올 땐, 모는 사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소를 다뤄야 합니다. 그런데 웃사는 “아니 왕이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왔으면 그 사람들을 시켜서 갈 것이지 왜 나를 시켜?” 속으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덕에서도 소를 험하게 몬 것입니다. 그러다가 땅이 평평한 타작마당에 이르자, 소들이 막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그러다가 결국 죽기는 누가 죽습니까? 네! ‘웃사’가 죽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가져야 할 마음은! ‘즐거움’과 ‘자원함’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대상 15:25b∼26a →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아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언제나 즐거움과 자원함으로 감당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헌신하는 마음과, 함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또 중요한 마음은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대상 15:26 →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렸더라.” 구약의 제사에서 짐승을 잡아 드리는 것은 바로 ‘헌신’을 상징합니다. 앞장서서 일하는 교역자들과, 또 그것을 알아주고 기꺼이 헌신하는 평신도들의 아름다운 하나 됨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저는 우리 꿈마을엘림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라고 믿습니다.
또한, ‘찬양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이스라엘 무리는 목소리와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대상 15:27b∼28a → “노래하는 자와 그의 우두머리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뿔나팔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은혜로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성도들은 ‘박수와 아멘!’으로 크게 화답해야 합니다. 또, 찬양단이 앞서 찬양을 인도하면! 그냥 구경하는 자세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박수도 치고, 크게 입을 벌려 목소리를 내서 함께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찬양을 받으시길 원하시고, 그런 찬양 중에 거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③ 받은 은혜를 소중하고 값있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에게 사울 왕의 딸 ‘미갈’이라는 조강지처가 있었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면 내 딸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는 약속으로 얻은 아내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시기 질투로 다윗이 도망자의 삶을 사는 동안 사울 왕은 딸 미갈을 ‘발디’라는 사람에게 재혼시켜 버립니다. 아마 다윗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사울 왕가는 몰락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자 다윗은 제일 먼저 조강지처인 미갈을 찾아서 데려옵니다. 그러면 미갈은! 다윗이 아버지 사울이 한 일을 다 용서하고 다시 자기를 왕비로 맞이하는 다윗의 너그러움에 감사하고, 조강지처로서의 그 자리를 귀중하게 여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미갈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 다윗을 업신여기고 무시했습니다. 더욱이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신앙까지도 업신여겼습니다. 대상 15:29 →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이런 그녀의 모습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왕후가 되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 은혜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삼상 2:30b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삼하 6:23 →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다윗의 사랑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모시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던 다윗과 같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언제나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아무리 선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께 맡기신 일을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감당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언약궤를 꼭 어깨로 메어 옮겨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부모님을 섬길 때) 쉬운 방법이 아닌 몸으로 섬겨야 할 이유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왕도 백성도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유독 ‘미갈’만 이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예배하는 마음을 막는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를 보고 겪으면서 “아! 이것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구나!”라는 인식을 일반 대중들도 갖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2021년 코로나 팬데믹이 ⇨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임이 자유롭지 못하면서, 배달음식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택배를 통해 물건을 받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일회용품과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용기들이 엄청나게 소모되고 또한 쓰레기로 배출되었습니다.
그때, 환경문제가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고,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개입하고 변화시켜나가야 할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교회에서도 열심히 창조세계 보전과 녹색교회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그렇게 만 4년을 열심히 활동했더니, 금년 2025년에 이르러서는 교계에서도 우리의 그런 열심과 헌신을 알아주게 되었고! 지난 5월 20일 ‘한국교회협의회’를 통하여 공식 ‘녹색교회’로 인증받아 앞서 보셨듯이 인증서와 패를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점에 이르러서, 다시 한번 ‘환경문제’가 왜 ‘교회’에서 다뤄져야 할 주제인지? ‘신학적 성경적 관점에서의 문제의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인 1967년에, 전 기독교계가 깜짝 놀랄만한 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바로 린 화이트(Lynn T. White Jr.)란 분이 →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라는 제목으로 사이언스(Science)지에 논문을 발표했는데, 오늘날 환경위기, 생태위기의 주범은 ‘기독교’이고 그 책임은 ‘기독교인’에게 있다는 논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① 기독교는 인간과 자연을 차원이 전혀 다른 존재로 구별했다. ②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자신의 발전과 목적을 위해서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분의 주장은! 기독교가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창 1:28 →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을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훼손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적에 주목하고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 우리 인간은 자연을 가꾸고 돌볼 책임을 맡은 위임자, 관리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 우리는 자연의 ‘소유자’나 ‘주인’이 아니고(X), 자연을 관리할 ‘청지기’(O)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2:15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 → ‘경작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바드’(עָבַד)인데 이는 ⇨ “일한다, 봉사한다, 가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 ‘지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미르’(שָׁמַר)인데, 이는 ⇨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연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 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이며, 파괴되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할 사명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듯이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의식을 버리고, 자연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작품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우선!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가장 큰 사명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전도, 복음, 구원’ 같은 단어들이 떠올려지실 텐데, 이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답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 얻게 하는 것”입니다. 네! 아주 완벽한 대답입니다. 주님께서도 이와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6:15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우리는 말씀을 오직 ‘사람’을 향한 명령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즉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라는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뜻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의 범위는 훨씬 더 넓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막 16:15을 여러분의 성경으로 찾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 “만민에게”라는 단어 앞에 작은 숫자로 3)이란 ‘각주’ 표시가 되어 있고, 성경 아래쪽에는 그 3)번 각주를 설명하는 부분이 보일 것입니다. 거기를 보면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헬, 온 창조세계에”라고 되어있습니다. 네! 그러면 이 본래의 뜻을 잘 살려서 번역하면 어떤 말씀이 되겠습니까? 막 16:15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실제 헬라어 성경에서 사용한 단어는 → 'πᾶς κτίσις' (파스 크티시스)인데, 이는 ‘모든 피조물에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를 ‘만민에게’로 번역한 우리말 성경은, 순전히 인간 중심적으로 번역한 결과인 것입니다. 영어 번역본들을 살펴보아도, 한결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곧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만물’을 포함한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 주님이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은 ⇨ 단지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창조세계’로 그 범위가 훨씬 더 넓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 ‘복음으로 회복시켜야 할 대상과 그 범위’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성도들이 회복시켜야 할 대상은 ⇨ 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②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즉 자연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바르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사명’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 “자연을 대할 때 이기적이고 제 욕심만 채우려는 지배자의 자세가 아니라, 자연의 관리자, 청지기로서, 자연을 잘 가꾸고 보살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생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해와 달, 숲과 바람, 물과 들풀, 작은 생명 속에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돌봄의 사명, 즉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탐욕과 무관심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파괴해 왔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주 만물 가운데서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창조세계가 아파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깨지고 다치고 억눌리고 파괴되면서 소리치는 탄식소리와 그 상처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만물을 다스리도록 위탁받은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8:19∼22 →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네! 모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모든 피조물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야 피조물들이 인간의 썩어질 욕심으로 인한 파괴와 착취에서 벗어나 영광의 자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나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깨달은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모범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서 선도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이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펼쳐갈 ‘애국운동’은 ⇨ 바로 절제와 자기희생으로 ‘지구와 창조세계’를 잘 보전하는 ‘좁은 길’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나만 잘살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와 나의 후손, 우리 공동체가, 함께 복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생명운동’에 앞장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도전하는 말씀으로 신명기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 30:19 →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나눔과 묵상
1. 각자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가장 심각한 ‘환경문제’는 무엇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눠봅시다.
2. ‘소유자’와 ‘주인’이 vs ‘청지기’와 어떻게 다른지 얘기해 보고, 그동안 환경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어디에 가까웠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나눠봅시다.
오늘 6월 첫째 주일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 ‘평신도’입니다. 그래서 평신도의 위치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자는 취지에서 정한 주일입니다.
사실 2천 년 교회 역사 가운데, 시작 단계였던 초대교회 때를 빼놓고는 대부분 ‘성직자’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황 중심의 가톨릭교회’에 항거하여, 1517년 종교개혁으로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방향을 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진단한 당시 가톨릭교회의 문제는! 평신도들이 성경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교황이나 신부가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평신도’들도 성경을 읽고 볼 수 있도록, 라틴어로 되어있는 성경을 자국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활발하게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번역된 성경은! 때마침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기’ 덕분에 대량으로 인쇄할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평신도들이 ‘영적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된 평신도들은 더 이상 잘못된 교리나 왜곡된 전통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고, 또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하는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평신도’가 ‘성경을 잘 알아야!’ ‘건강한 성도’, ‘바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 성도님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읽고, 암송하고, 필사하여 주님의 뜻을 마음에 잘 새기고, 그 뜻대로 준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서, 주님의 동역자들로 그 이름이 천국에서 빛나는 이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고마운 분들!
성도 여러분! 어느 시대든 사람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 전제 앞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맡겨 일할 사람을 찾으시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가?” 저 스스로를 생각할 때, 저는 부족한 것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저의 부족함을 채워줄 좋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시마다 많이 붙여주셨습니다. 그런 덕분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벌써, 제가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지 26년이 지나 27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교회를 위해서 목회자를 위해서 정말 헌신적으로 충성하시는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제가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그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밝힐 수는 없으나,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분들입니다. 제가 다 갚을 수 없지만, 선지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결단코 그 상급을 잃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더 크게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사역을 펼쳐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일 필요한 것은 역시, 선교의 동역자인 ‘사람’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사도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로 협력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나바,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 루디아, 실라, 누가, 디모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외에도 로마서 16장에 언급한 사람의 숫자만 해도 ⇨무려 29명에 이릅니다. 이들을 일러 일명 Romans List = ‘로마서 16장에 언급된, 잊을 수 없는 동역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시간 바라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역사와 함께! 목회자의 마음에, 성도와 교우들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좋은 동역자요, 감사한 성도’로 기억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교회는 어울림의 공동체!
성도 여러분! “천국은 ⇨ ‘개별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각자 개인의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없는데,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내 입으로 그렇게 신앙고백을 해야!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받은 후에는,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에 속해서, ‘함께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정의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공동체 생활’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내 믿음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과 성도의 교제를 등한히 하거나,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영적 공동체’를 불편하게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 4:2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다, 빌립보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큰 여성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에는 모든 성서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첫 설립자 루디아를 비롯해서 여성지도력이 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주도권 경쟁’을 하면서 하나 되지 못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과 기쁨은 관계의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 되었을 때 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 4:3c →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나와 갈등을 겪고 있는 그 사람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빌 4:5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계적 갈등을 극복하려면!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용(寬容)이란 말뜻은 → 너그러울 관, 넓을 관 자에, 얼굴 용자입니다. 그러니까 ‘얼굴을 넓게 편다’는 뜻입니다. 남에 대하여 얼굴을 찌푸리고 미간을 좁게 하고, 눈을 뱁새눈으로 째려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넓게 펴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관용입니다.
사도 바울도 젊었을 때는 ‘마가’가 1차 선교 여행 도중 힘들다고 돌아 가버린 일로 인해서 그에 대해서 마음에 선을 딱 그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호했던 바울이 세월이 흘러 지금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빌 4:5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다투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해서, 바울 자신이 마가를 용납한 것처럼, 너희도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받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네!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전략은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서로 취향이 다르고 기호가 다르며 생각하는 방식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더 잘 맞는 성도가 있고, 서로 다른 면이 많아서 대하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와 다름’이 ‘틀림과 분쟁’으로 확대돼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바울과 같이 상대방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서로 사모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품어야 할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빌 2:5∼8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품으셨던 마음! 그 겸손과 낮아짐이 사람 사이에 있는 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의 모양을 취하셨습니다. 피조물 중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거기서 더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주셨습니다. 모든 권세를 갖게 하시고,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이며 또한 사모해야 할 영광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이 분란과 다툼의 주동자로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성도들과 더불어 동역한 아름다운 사람으로 불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 자신의 인격과 신앙 모습 속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고쳐서 바로 잡을 것’과 ‘발전시켜 성숙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천국은 ‘개별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라는 말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해석을 나눠봅시다.
3. 오늘 말씀을 듣고 나 자신이, 혹은 가정적으로 어떤 일과 사역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 속도원들과 나눠봅시다.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모여서 예배드렸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의자에 앉으시니, 회당 관리인이 두루마리 성경을 꺼내와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두루마리가 이사야서인 것을 아시고, 두루마리 거의 마지막 부분인 61장 1절과 2절 말씀을 찾아서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예언대로,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회당에서 그대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이사야서의 말씀을 누가복음에서 그대로 인용하였기에, 저는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을 택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실 사역을 4가지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눅 4:18~19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①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②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③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④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이 사역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 ‘주의 은혜의 해’란 ⇨ ‘희년’을 의미합니다. 희년은! 율법서인 레위기 25장에서 명령한 절기로서,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그다음 해, 곧 오십 년째 되는 해를 말합니다.
이 ‘희년’을 ‘은혜의 해’라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① 살다 보면! 식구 중에 누가 심한 병에 걸린다든지, 가장이 다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일도 생기겠죠! 그럼 그 집은 가난해져서 부득불 분배받은 땅을 팔아야만 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 정로 끝나질 않고 ② 땅을 팔았는데도 형편이 좋아지기는커녕, 그동안 이웃에게 꾼 돈도 갚을 수 없는 형편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 종살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을 팔고, 남의 집 종이 된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희년이 돌아오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가난해진 사람에게 땅을 샀던 사람은 그 본래의 주인에게 땅을 돌려줘야 하고, 종이 되어 남의 집 살던 사람도 해방되어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희년은! 가난하여서 잃어버렸던 모든 재산과 권리를 회복하게 되고, 신분도 회복하게 되니 ‘희년(禧年, 경사 희, 복 희/ 해 년)’ 말 그대로 이 얼마나 ‘기쁘고 복된 해’입니까!
그러나 ‘희년(禧年)’은 단지 이렇게 ⇨ ‘① 재산권이나 ② 신분의 환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③ 앞을 못 보게 된 사람이 다시 보게 되고 ④ 죄로 인해 눌려 살던 사람이 마음의 자유함을 얻게 되는 해가 또한 희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네 번째 사명 ④ 죄에 눌려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자유함을 누리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사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들이 받아 누릴 기업의 영광과 풍성함이 얼마나 큰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 가운데, ‘영적인 시각장애인’이 한 사람도 없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복음 전하는 사명이 크고 귀하지만, 이 세 번째 사명을 영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 ③ 실제로 앞을 못 보게 된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하는 사명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시각 장애인 가운데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선천적 시각 장애인’도 있지만, 그 비율은 10%밖에 안 된답니다. 대부분인 90%는 후천적으로 사고나 질병으로 시각 장애인이 된 경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천적 시각 장애인’이 되지 않도록! 미리 검진을 통해 예방하는 일도 중요하고, 수술이나 기타 의학적인 방법으로 시력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은! 메시아적 사역을 감당하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50주년 기념음악회’를 단순한 음악회가 아닌 ⇨ ‘사랑나눔 음악회’로 계획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헌금하신 ‘사랑나눔 헌금’은 교파를 초월하여 선교사님들이 정밀 눈 검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과, 백내장 수술을 받으면 시력을 회복할 수 있음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치료받지 못하는 국내외 목회자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잘 하고 있는 우리 감리교회의 기관이 있습니다. 바로 ‘웨슬리 사회성화 실천본부’입니다. 잠시 뉴스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https://youtu.be/-I-M6KO0WzY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셨기에 우리는 죄와 사망과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모든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이루어 주신 주님께 감사와 함께, 주님의 제자로서 메시아적 사명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담아 감사와 영광, 다짐의 박수를 우리 주님께 올려드리겠습니다.
나눔과 묵상
1. 메시아의 사역 4가지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땅을 팔거나 종살이를 시작하게 될 때, 희년이 돌아오는 해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에 따라서 땅값이나, 종살이의 기간이 정해지는 점에 비해서 오늘의 제도인 ‘영구적인 소유권’의 차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창립 50주년기념 ‘사랑나눔 음악회’에서 좋았던 점들과 보완 시정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속장님은 이것에 대해서 교구장이나 교구 목사에게 카톡으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페르시아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주전 500년 전, 유다인 에스더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집에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미모와 믿음과 지혜가 뛰어나,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하만’이라는 총리대신이 있었는데, 하만은 유다 민족을 미워했고, 특히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고,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치밀한 음모를 꾸몄고, 마침내 전 유다인을 학살해도 좋다는 결재를 아하수에로 왕에게서 받아냅니다. 하만은 쾌재를 부르며, 각 지방 총독과 관리들에게 조서를 보냅니다. 그 조서의 내용인즉, 12월 13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유다인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는 이 무시무시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에스더 왕비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중대한 충고의 말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 4:13절입니다. →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들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1. 나만 혼자 안전할 수 없다.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런 민족적 위기는 높은 자리에 있다고 살고, 낮은 자리에 있다고 죽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스더를 향한 모르드개의 이 충고는 2,500년 전의 상황만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한 권고입니다.
즉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남한에 살고 있고,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고, 하루하루를 편히 산다고 해서,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 혼자 편안히 잘 먹고 잘산다 해서, 숱한 우리 민족의 문제를 외면한다면! 반드시 민족의 역사는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말은 우리는 ‘공동 운명체’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 운명체’란? 마치 망망대해 태평양에 떠있는 한 척의 배와도 같습니다. 배가 침몰하면 선장도 갑판장도 선원도 승객도 다 함께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이와같이 나라가 잘되어야 개인이나 가정이 잘되는 것은! 하나의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운명이! 반드시 공동체의 운명일 수는 없지만, 공동체의 운명은! 그대로 개인의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개인도 같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조국이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라의 백성으로서, 조국을 위해 기도해야 할 거룩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망해 가는 조국 이스라엘과 수도 예루살렘의 미래를 생각하시고는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자! 그럼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는 충고에 대한 에스더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16절입니다. 에 4:16a →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수산 궁을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있는 모든 유다인이 금식하며 합심하여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문제에 대하여, 모두 하나가 되어 기도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위대한 민족은 위대한 기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지금까지 여러분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나의 일만 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만 즐겨왔다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 내가 나라를 망치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가 조금 어렵다고 민족이 망하지는 않습니다. 사업이 안 된다고 굶어 죽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나라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 역사의 문을 닫으십니다. 그날이 바로 민족이 망하는 날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와 세계의 정세를 볼 때, 온 국민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일찍이 나라 사랑에 생애를 바쳤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이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습니다.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내가 새로워지면, 나라도 새로워짐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축복을 사명으로 아는 인재를 키우자.
에 4:14 →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에스더는 ‘왕비’라는 높은 직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높은 지위의 축복’은 ‘사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동족이 어려움 당하면! 당연히 도와주어야 할 ‘사명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왕에게 나아가 구명운동을 벌여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에스더! 네가 만일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망하리라”고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경고했습니다. 이는 축복을 사명으로 여기지 않을 때, 심판이 임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올바로 이끌어갈 영성과 실력을 겸비한 지도자들을 키워 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 한국교회는 조국을 사랑하는 인재를 많이 키워 냈는데, 요즘은 너무 개인주의에 치우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신문에 실린 한 기사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는 제목의 편지였습니다.
→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는다.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이렇게, 참 신앙의 도리를 아는 어머니가 계셨으니, 훌륭한 아들이 나온 것입니다. 실로 자신의 목숨을! 무엇을 위해 바쳐야 할지, 목숨을 구걸하거나 비굴하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믿고 사신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과 특권들, 은사와 재물, 가정과 직장이! 모두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맡겨 주셨고, 또한 그 자리에 세워주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임 받는다면,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런 소명감이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의 자녀손들에게 심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기도하는 백성에게 영광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가장 큰 방법은! 조국이 잘 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민족이 처한 위기의 소식을 듣고, 나는 3일간 온전히 금식하며 기도하겠다고 선포하고,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왕께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에 4:16 →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그런데, 기도하는 에스더와 유다인들을 하나님이 버리셨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① 유다인을 죽이려고 세워두었던 높은 장대에 대적 하만이 달리는 통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② 에스더는 왕비로서 왕의 사랑을 더욱 받게 되었고, 그 지위가 더 높아졌습니다. ③ 모르드개는 하만이 앉았던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신나는 일입니까?
에스더서의 결론인! 마지막 절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에 10:3 → “유다인 모르드개가 ①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②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③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④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⑤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할렐루야!
민족적인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백성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위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민족적 위기, 공동체의 아픔을 십자가 앞으로 가져오면! 오늘도 하나님은 영광으로 바꾸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나라에도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있도록, 우리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는 애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주권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위기를 가장 큰 영광의 기회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민족과 내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내용을 나눠 봅시다.
2. 에스더서의 명언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네가 ( )을 가진(얻은) 것은 곧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 느냐?” 이 말이 나에게 주는 감동, 교훈, 결단을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 민족의 영광, 위대한 공동체를 이루는데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 중 감동적이었던 것을 나눠봅시다.
성경에서 가장 긴 시편 119편을 한 절로 요약한다면, 이 105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119:105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여기 ‘등’과 ‘빛’이란 말은!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지만, 실은 기능적으로 구별됩니다. 등(燈, Lamp)은 ‘바로 내 앞을 비춰줍니다.’ 그래서 매 순간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빛(Light)은 등대와 같이 ‘멀리서 비춰 내가 가야 할 방향과 목적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내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올바른 방향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나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람, 말씀의 사람인 것을 드러내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킬 수 있게 합니다. 이제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내 발에 ‘등’이신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걸음에 등불(燈, Lamp)이 된다는 것은, 삶의 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구덩이에 빠져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이라는 길은! 곧고 평탄하고 환하지만은 않습니다. 어두운 길, 구부러진 길, 울퉁불퉁 거친 길, 유혹의 골목길들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가야 할 바른길, 안전한 길이 어딘지를 비춰줍니다. 그 빛은 작고 조용하지만, 확실하고 충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보십시오. 기준이 무너지고, 진실이 흔들리며, 무엇이 옳은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 아닙니까? 세상의 소리는 크고 요란하지만, 그 소리들 속에 참된 길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깊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은 흑암을 비추는 ‘빛’이며, 혼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등(燈)’ Lamp라고 한 것은! 말씀 가까이에 있는 자만이 그 빛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등불이 비취는 범위는! 그저 작은 방 하나 정도를 밝게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빛이 비출 수 있도록 펼치고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매일 매일 말씀을 펼쳐서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5:15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됫박)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등잔대)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등불인 말씀을! ‘말’ 즉 ‘됫박’ 아래에 두면! 빛이 가려져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등불을 켠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집 안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 말은 주중에는 한 번도 성경을 펼쳐 읽지 않고, 교회에 와서도 화면만 보지! 본인 성경은 펼쳐 보지도 않는 사람은! 성경을 그 손에 들었으나 마치 말 밑에 둔 등불 같은 것입니다.
2. 내 길에 ‘빛’이신 말씀!
앞서 빛(Light)은 등대와 같이 멀리서 비춰, 내가 가야 할 방향과 목적지를 알려주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광야’로도 비유하지만 ‘길’이라고 자주 말씀합니다. 인생의 여정,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길을 걷다 보면, 항상 밝은 대낮은 아닙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밤에 더 많은 일을 하고 밤길을 걸어 다닙니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밤길이 안전한 나라이지만, 사실 ‘밤에 길을 다닌다. 어두운 길을 다닌다’는 것은 ‘위험과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사실 ‘길’은 늘 두렵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인지,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걸을수록 불안은 커집니다. 그러나 ‘빛’이신 말씀이 있으면! 그 두려움은 이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단지 길을 비춰줄 뿐 아니라, 그 길 가운데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고백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혼란한 세상 길을 걷는 인간의 실존적인 고백입니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저 멀리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도!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어떤 길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길을 걷든, 우리는 그냥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두리번거리거나 엉뚱한 쪽으로 가지 않도록 우리의 시선을 바르게 합니다. 읽지는 못했지만, 오늘 본문 말씀 바로 뒤에 이어지는 10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 119:109 →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앞의 말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를 직역하면 → “내 목숨이 언제나 내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의역하면 → “나는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유혹의 길, 잘못된 길, 사망의 길을 두리번거리고 탐하면서 걷는 인생이라, 스스로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때, 말씀이 빛이 되어서 우리를 그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고 바른길로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않겠습니다.” “말씀을 항상 내 앞에 두고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이 시편 기자의 고백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길이! 바른길, 생명의 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의 빛을 통해 누리는 ㉮ 삶의 유익과 ㉯ 영적 성장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 정리’해 보겠습니다.
㉮ 말씀을 따라가는 삶의 유익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시편 기자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 얻는 삶의 유익은 무엇일까요?
① 평안과 담대함: 세상 풍파가 아무리 거세도, 말씀이 비춰주는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근원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약속하는 진리를 믿기 때문에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② 분별력의 향상: 삶에서 여러 갈림길을 만날 때, 말씀을 기준 삼아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으니, 혼란이 줄어듭니다. 세상의 소리에 휩쓸려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보다,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일관되게 행동하게 됩니다.
③ 관계의 회복: 말씀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 용서, 배려, 공감 등 관계를 회복시키는 진리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자연스럽게 가족·친구·직장 동료와의 관계가 한층 더 건강하고 깊이 있게 변화됩니다.
④ 지속적인 성장: 말씀이 빛이 되어주니, 자기 인생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모든 상황을 배움의 기회로 삼고, 실패나 부족함도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니, 결국! 영적·인격적으로 큰 진보가 일어나게 됩니다.
㉯ 말씀을 따라갈 때 얻는 영적성장
말씀을 단지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마음 깊이 묵상하고, 삶에 적용할 때,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영적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① 관점의 변화: 말씀을 읽을수록, 세상에 대한 관점이 달라집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보이게 되어 가치관과 세계관이 새로워집니다.
② 성품의 변화: 말씀은 우리의 마음 밭을 서서히 변화시킵니다. 분노, 질투, 염려 등으로 가득 차 있던 내 속이, 말씀에 젖어 들면서 용서, 사랑, 평안, 희망 같은 열매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③ 사명의 발견: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달란트와 그 목적을 분별하게 됩니다. 나의 재능과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할지, 그리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어 삶의 열정과 목표를 재정비하게 됩니다.
④ 결단과 순종: 말씀을 머리로만 깨닫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결단’과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차량을 운행할 때 자동차의 ‘등’(燈, Lamp)이 필요하고, 선박이 항해할 때는 등대의 ‘불빛’(Light)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인생 여정에는, 우리 자신의 주변과 앞길을 비춰주는 빛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과 같이 내 삶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요소들을 보게 합니다. 또한, 말씀은 전조등처럼 우리 앞길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그 빛의 인도를 받으며 걷는 자는! 죄의 올무와 세상의 유혹을 피하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길의 마침이! ‘생명과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런 인생길을 걷고 또한 영광스러운 종착역에 이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찬송 579장 2절 → “아침 저녁 읽으시던 어머니의 성경책! 손때 남은 구절마다 모습 본듯합니다. 믿는 자는 누 구든지 영생함을 얻으리! 들려주신 귀한 말씀 이제 힘이 됩니다.” 이 가사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2. 말씀의 빛을 통해 누리는 ㉮ 삶의 유익과 ㉯ 영적 성장 각 4가지씩을 살펴보면서 도전받게 되는 점이 무엇 인지 나눠봅시다.
3. 말씀을 내 발의 등, 내 길의 빛으로 삼고 싶다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예: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하기보다, 먼저 성경 한 장이라도 읽어 보자! 들어 보자!)
제목: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까? (계 2:1~7)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인 서기 54년경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사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이 에베소에 가길 원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시고 유럽 쪽으로 인도하심으로, 돌아올 때에야 잠시 들를 수 있었던 곳입니다.(행 18:18∼23) 그러나 에베소야말로 선교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당시 이 에베소는! 아시아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크고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는, 이 에베소에 비교적 오랜 기간 머물면서 사역을 펼치게 됩니다. 서기 54년경부터 56년까지 약 3년 동안 이곳에 ‘두란노서원’을 개설하고, 목회자를 양성하여 배출했습니다.(행 19:8∼10) 그 결과! 소아시아 지역에 7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에베소 교회는 그 중심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정말 심혈을 기울였고, 눈물과 기도로 목회한 교회였습니다.(행 20:17∼38)
후일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도중 밀레도 항구에 기착했을 때, 본인이 에베소교회까지 올라가지는 못하고,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서 교회의 장로님들을 밀레도 항구로 청하여 만나는 장면이 사도행전 20장 17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 마지막 장면인 36절부터 38절까지를 읽어보면, 바울과 에베소교회 장로님들 간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 20:36∼38 →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을 한번 머리에 그림으로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뜨거운 눈물과 기도, 목회자와 성도 간의 끈끈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의 신뢰와 사랑이 뜨거웠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도 그런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요한계시록인데! 이 요한계시록의 기록 시기는 서기 100년경에 저술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교회가 세워진 지 4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에베소교회는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렸고 또한, 성도 간에 사랑도 식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면 과거 에베소교회는 칭찬거리가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계 2:2∼3 → “내가 ①네 행위와 수고와 ②네 인내를 알고 또 ③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④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⑤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⑥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네! 에베소교회는 ⇨ ① 주님을 위해 수고한 교회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②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고 핍박을 견뎌낸 교회입니다. 또한, ③ 이단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말씀의 진리로 무장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드러내는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점이 많은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가 책망받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계 2:4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이유는!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 머리는 가득 찼고 이성적인 판단과 분별은 잘하지만, 가슴엔 따뜻한 사랑이 없는 냉랭한 마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많이 식어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엔 믿음의 연조도 길고 꽤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속은 텅 빈, 형식적인 신앙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어떤 분이 신앙 상태를 음악과 비교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악보를 보면 다양한 기호들이 붙어 있는데, 그중에 ‘Crescendo’와 ‘Decrescendo’라는 ‘음악 기호’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호는! 음의 강약을 조절해줌으로써 악상을 살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벌어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 ‘Decrescendo’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리를 점점 줄어들게 연주하라’는 것이고, 모아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벌어지면 음악적인 용어로 ‘Crescendo’라고 하고, ‘소리를 점점 크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음악 기호’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본다면! 비록 처음에는 미약했다 할지라도, 점점 더 나아지고 뜨거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바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다, 크레셴도의 믿음! 점점 좋아지고 뜨거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하게도! 희망적인 것은,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다시 살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 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①생각하고 ②회개하여 ③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R로 시작하는 ‘세 단어’ ⇨ Remember, Repent, Restore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Remember’ -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가만히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에 대한 그 뜨겁고 순수하던 열정이 식었다면! 언제, 어느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아니면 취직하고 출세하고, 아니면!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목사가 되면서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이사하고, 돈 벌고, 아이 낳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맑씀읽기와 묵상 그리고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첫사랑과 같은 뜨거운 열정과 열심을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서,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Repent’ -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되돌아본 후!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유무에 따라서 인생이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후회’와 ‘회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잘못된 자리에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부인했고, 세 번째는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잘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라고 ‘후회’하며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잘못한 것을 깨닫고 후회는 했지만,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면! ‘후회’하고 아예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잘못된 자리를 털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Restore’- ‘회복하라(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했다 할지라도,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그 회개는 거짓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생활 속에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기도의 열심을 잃어버리셨습니까? 다시 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의 자리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용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기도의 십자가도 받았는데 기도 줄을 놓고 있었다면! 다시 기도의 십자가를 붙드시길 바랍니다. 봉사와 섬김의 열정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임명장을 받고, 직분을 가졌어도, 사명을 팽개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여러분이 서야 할 자리로 빨리 돌아오십시오.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면! 즉시,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입니다.
요 21:16 →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사랑을 확인하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에 서게 하신 예수님! 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회복’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충성하는 제자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계 2:5b →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 주님이 옮기시겠다고 하신 ‘촛대’란 ‘성령’을 의미하고 ‘구원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 은혜도, 구원의 역사도 깨닫지 못하는 개인! 결코,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 품었던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가운데 사라져가던 주님에 대한 첫사랑이 다시 한번 활활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발전하고 성숙해 가는 성도들이 되어,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귀히 여겨주시는 복된 천국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지금 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때, 잃어버리거나 식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앙의 요소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서로 나눠봅시다.
2. 10년 혹은 20년의 기간을 두고 봤을 때, 나 자신의 신앙의 성숙도와 열정이 깊어지고 뜨거워졌는지? 아니면 옅어지고 식었는지 서로 나눠봅시다.
3. 대장장이는 쇠가 빨갛게 달구어졌을 때, 망치로 내려쳐야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쇠가 식고 난 후에는 세게 내려쳐도 원하는 모양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망치질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제목: 감사함이 축복입니다. (대상 29:1∼14)
딤후 3장에 보면, 말세가 되면! 이 세상이 더 살기가 힘들고 고통스럽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곧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이 되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딤후 3:1∼2, 5b →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5절에 결론적으로)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해도!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마음’과 ‘입술’과 ‘삶’에 늘 감사가 풍성한 사람들이 되어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감사를 잊지 맙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이 들어서 다 잊어버리고 기억 능력이 약화되어도, 이것만은 꼭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제가 확신을 갖고 말씀드리건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욕심에 빠져서, 늘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면! 상대적으로 치매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세 차례, 꼭 감사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감사절을 지키라고 하신 까닭은! 하나님이 무슨 물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감사하는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매년 3∼4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왜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어야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감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것은! 축복받고, 사랑받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역대상 16장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대상 16:8,10 →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 그리하면(감사하면)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마음의 즐거움, 하늘로부터 임하는 유쾌함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0장 말씀입니다. 렘 30:19 →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아멘. 감사하는 자를 번성하게 하시고, 수효가 늘어나게 하시고, 존귀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네! 감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빌 4:6∼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왜 그냥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감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감사가 체질화되고 습관화되어, 늘 감사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은혜의식을 가집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다윗의 감사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싶은 열망이 무척 컸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드릴까 생각하다가,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대상 29:11∼12 →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부와 권세와 만물이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신앙고백에 바탕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자세로 감사드렸습니다. 대상 29:14 →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여기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는 받을 자격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큰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다윗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기는 자격도 없는데 높은 지위와 큰 물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그 마음 중심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왔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이 있어야, 참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일용할 양식이! 내 수고로 모으고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켜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고백하면서 ‘감사합니다.’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것을 드린다는 교만함이 아니라, 다윗처럼 “우리가 주의 손으로부터 받은 것을, 주께 드릴 뿐입니다.” 고백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먼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금과 은을 드렸습니다. 대상 29:3 →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私有)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그런데, 다윗이 얼마만큼의 금ㆍ은을 드렸는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상 29:4 →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여기 금 3천 달란트는 무게로 치면 102톤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참고로, 2025년 3월 현재 우리나라의 금 보유량은 104톤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금 전체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거기다가 은 7천 달란트는 240톤이니, 엄청난 액수의 예물을 성전건축을 위해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다윗의 봉헌에 감동한 지도자들과 백성들도, 성전건축을 위해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대상 29:6,9 → “이에 모든 가문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관이 다 즐거이 드리되,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
그렇습니다. 왕과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거운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드릴 때 ‘즐거운 마음’과 ‘자원함으로’ 드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 기뻐하시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감사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감사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힘일까요? ‘감사는! 감사를 불러오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진짜 감사한 일이 생기고, “괴롭다, 죽겠다” 하면! 정말 괴로운 일, 죽을 일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 감사가 내 삶에 임하기를 바란다면! 감사의 말을 입에 달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429장이 있는데 그 1절 가사를 보십시다. 429장 1절 →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후렴)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1절 가사에 3번이나 받은 복을 세어보라고 했습니다. 네! 복은 세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받은 복이 뭐지? 감사할 일이 뭐가 있지? 하며 손가락으로 하나둘하고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금방 생각이 나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예수 믿게 된 것,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이렇게 적다 보면 30가지, 100가지도 적을 수 있게 됩니다. 남과 비교하여 없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역대상 29장을 보면 → “드렸노니, 드리되, 드리고, 드림으로, 드렸을 뿐, 드렸사오며” 여섯 번이나 ‘드린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롬 6:12∼13절에서는 →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나의 삶을 주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연주해 주십니다. 여기 ‘무기’라는 단어는 → 영어의 weapon이 아니라(X), ‘도구’라는 뜻의 instrument입니다.(O) 이 instrument라는 단어는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제가 연주하면 어떤 소리가 날까요? 서툴게 연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찬양대 반주자가 연주하면, 동일한 피아노이지만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붙들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다윗을 하나님이 붙들고 연주하시니까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은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주께 드림으로! 더 크게 쓰임 받았던 다윗과 같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감사하지 못함으로 행복을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나는 가정 식구들에게 감사의 신앙, 감사의 문화를 계승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원망과 불평의 문화를 계승 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고 나눠봅시다.
3. 당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금 내게 있는 육체, 마음, 신앙의 질병은 무엇인지? 각자 그 원인을 나눠봅시다.
새 시대 새 환경에 맞는 제도와 직무! (대상 23:1∼6, 24∼32)
사람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것을 알고, 일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존재입니다. 아니! 그런 존재여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람들 중에는 날 때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1. 다윗은 죽기 전에 무엇을 마무리하고 죽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 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솔로몬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고,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에게 있어서 그냥 차기 왕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했지만, 평생의 소원이었던 성전 건축을 자기를 대신하여 이룰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하고 심사숙고 끝에 여러 아들 중에 ‘솔로몬’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 “너는 성전을 건축하여라. 성전 건축은 나의 평생소원이었으나, 하나님은 나의 손으로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내 아들, 너를 통해 성전 짓기를 원하셨다. 성전 건축을 위한 금, 은, 놋, 철, 재목, 돌 등은 다 준비되어 있다. 그러니 너는 여호와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여 성전을 건축하라.”
둘째, 다윗은 새롭게 시작될 성전 시대에 맞도록, 레위인들의 직무를 새롭게 재편하여 ‘성전 예배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지막 열정을 새 시대, 새 성전의 질서를 세우는 데 쏟아부었습니다. 즉 레위 사람들의 직무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여, ‘성전 예배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이전까지 회막과 각종 기물들, 특별히 언약궤를 옮길 때 그들의 어깨로 메어 옮기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레위인들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성전이 세워지게 되면! 더 이상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이들에게 각기 새로운 사명을 부여한 것입니다.
제사장을 돕는 일부터, 성전의 각 영역을 관리하고,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며, 진설병과 소제물을 준비하는 구체적인 임무까지, 다윗은 예배의 모든 과정이 세밀하고 거룩하게 이루어지도록 재정비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행정적인 개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영광스럽고 질서 있게 드려져야 한다는 다윗의 신앙고백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개혁에는 언제나 개혁을 일으키는 개혁자가 중요합니다. 개혁자가 잘못되면 그 개혁은 엉터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정치와 종교를 개혁하는 일에 영적,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다윗 자신이 직접 진행하였습니다. 과거의 성막 시대의 체제와 조직을 새롭게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조치는, 가히 종교 개혁 수준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제도와 직임의 변화는 벌써 단행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광야를 이동하던 백성들이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동식 성막을 고정식 건물로! 즉 성전을 세우고, 거기에 맞게 제도를 만들고 직무를 배정했어야 마땅했습니다. 대상 23:26 →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에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필요가 없다 한지라.”
그런데, 사사 시대 400년, 사울의 통치 40년, 다윗의 통치 40년, 거의 500년이 되도록 성전도 짓지 않고, 제사 제도도 개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백성들의 책임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책임이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그냥 안일하게 있는 대로 안주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때, 거기에 잘 대처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 때에 우리 교회는 친환경적으로 교회를 리모델링 하고, 대면하여 모이지 못해도 유튜브를 통해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하고, 밴드와 카톡방을 통해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지역 중심의 속회를 예배 시간 중심의 속회로 바꾸고, 환경과 생태문제를 목회의 중요한 주제로 채택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한 단계 더 성장·성숙케 되었습니다. 시의적절하게 사역자들을 붙여주셨고, 좋은 아이디어와 생각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을 세워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 쇠퇴하고, 타락의 길로 가게 된 이유는! 환경과 시대에 맞는 개혁을 시도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 때에 이르러 드디어 이런 일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늙은 다윗’이 멋진 모습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그냥 쉬고 싶고, 책임을 내려놓고 싶어합니다. 아니면 반대로, 노년의 탐심과 탐욕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지막까지! 미래를 준비하고 조직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다윗이 개혁적인 일을 펼쳐 가는 데 있어서 가졌던 몇 가지 원칙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백성의 원로인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다 모으고, 또한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솔로몬 왕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대상 23:2 →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었고, 원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라와 백성들을 이끌어 온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솔로몬을 중심으로 새로운 리더들이 나타날 때까지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이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그들의 동의와 동감을 얻어 개혁을 시행한 것입니다. 어떤 큰일을 행할 때일수록 전 구성원의 마음을 얻어 일하는 것이 중요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레위인들에게 임무를 맡기되 기능별, 직능별로 맡겼습니다. 대상 23:6 → “다윗이 레위의 아들들을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에 따라 각 반으로 나누었더라.”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 중에서 택했고, 찬양을 맡을 사람은 음악가 집안인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택했습니다.(대상 25:1) 문지기를 뽑는 일조차도 사사로운 관계로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공(公)과 사(私)를 잘 구별했던 것입니다.
셋째, 그 대표적인 방법이 다윗이 많은 결정을 ‘제비뽑기’의 방법으로 결정했습니다. 특별히 그 순서를 정할 때,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했습니다. 이것은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 알고 시행하는 신앙고백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대상 24:5a,31b →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장자의 가문과 막내 동생의 가문이 다름이 없더라.” 제비를 요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차별 없이 행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넷째, 다윗은 사명을 줄 때 온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주었고, 특별히 말로만 하지 않고 구체적인 계획도를 주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전 짓는 사명을 솔로몬에게 줄 때 이렇게 합니다. 대상 28:8, 10 →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여호와께서 너를(솔로몬을) 택하여 성전의 건물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 하니라.”
그리고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대상 28:11∼12 → “다윗이 성전의 복도와 그 집들과 그 곳간과 다락과 골방과 속죄소의 설계도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또 그가 영감으로 받은 모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성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설계도를 주고!”
네!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영감으로 받은 성전의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주면서 짓도록 합니다. 그냥 “이거 중요한 일이니 잘해라!” 이런 식으로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설계도”를 주면서 이렇게 건축하라고 준 것입니다. 성전 건축의 열망만 컸던 것이 아니라, 그 준비가 철저했던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다윗에게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인수인계를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일은! 언제나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가 해 온 일을 그다음 사람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여호수아에게 잘 인계했습니다. 모세가 한평생 펼쳐 온 일은 여호수아가 마무리를 잘해서 완성 시켰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잘 인계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 바울은 디모데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의 왕위가 굳건히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다윗왕의 인생 마무리는 참 아름답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 건축의 사명을 아들에게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집니다. 성전 건축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고, 또한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일이니, 꾹 참고 아들에게 그 일을 맡긴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다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은! 남아 있는 후대의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넘겨주어야 합니다. 뭐든지 내가 다 하려고 하면, 거기서부터 무리수가 나오고, 욕심이 개입하게 될 소지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배워야 할 진리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시대의 변화를 읽고 그 변화에 잘 대응하고, 때론 시대를 이끌어 가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나눠봅시다.
2. 개혁에는 언제나 개혁을 일으키는 개혁자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개혁자가 잘못되면 그 개혁은 엉터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라는 말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눠봅시다.
3. 내가 현재 맡고 있는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에서의 역할 속에서 어떻게 거룩한 질서를 세워갈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소원을 품자! (대상 17:1∼15)
1. 소원이 삶을 결정짓는다
‘어떤 소원을 품고 사느냐?’ 이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품은 소원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 여러분의 품은 소원은 무엇입니까? 왜 이런 질문을 드리냐 하면! 오늘 본문이 ‘다윗이 품은 소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소원은 무엇이었고, 하나님은 그 소원에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2. 다윗의 소원
1) 성전 건축 - 오늘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된 후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온 후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마음먹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은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는 왜 이런 마음을 먹었을까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의 중심은 늘 하나님께 가 있었기 때문에! 언약궤, 즉 법궤가 그냥 저 시골 산 동네, 한 개인의 집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언약궤를 모실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을 건축할 마음으로 먹게 됩니다.
자신은 화려한 백향목 궁전에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천막 안에 모셔져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대상 17:1 →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그래서 다윗의 마음이 편안칠 않았던 것입니다. ‘성막’은 → 직물과 가죽으로 덮힌 천막입니다.
이 성막은! 출애굽 당시 모세가 하나님께 그 자세한 설계도를 받아서 제작한 ‘이동형 천막’입니다. 그때로부터 솔로몬 성전까지 약 500년간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처럼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길법한 데도, 하나님의 성소보다 자신의 거처가 더 화려하고 안락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누구의 요청이나 조언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성도 여러분! 이런 다윗의 마음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그동안 고생 많이 했고, 이제 좀 평안하게 잘 사는 것에 대해서, 그냥 “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평안하게 잘살게 되었구나! 참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참 예쁜 생각이죠!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빚진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거하실 처소를 지어드리고 싶은 소원을 품은 것입니다. 이전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고, 품지 않았던 소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나단은 다윗의 소원을 듣고는, 즉시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당연히 기뻐하실 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 17:2 → “나단이 다윗에게 아뢰되,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 왜냐하면! 선지자 나단이 보기에 그런 다윗의 생각과 소원은 너무나 귀하고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늘 주님께로 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무언가 좋은 것을 해드리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다윗처럼! 주님을 향한 소원, 교회와 복음을 향한 선한 소원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거절 -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아주 특별한 소원을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자기의 뜻을 밝혔고, 나단이 좋다고 한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은 나의 집을 건축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선하고 아름다운 소원! 이제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위대한 소원이 거절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다윗의 소원을 거절하셨을까요? 정말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물리치셨을까요? 그래서 다윗의 위대한 꿈과 소원이 쓰레기처럼 버려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상 17:5∼6의 말씀을 풀어쓰면 이런 말입니다. → “나는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천막이 아닌 집, 즉 성전에 있어 본 적이 없고, 언제나 이 장막과 함께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내 백성을 떠난 적이 없었다. 또 늘 옮겨 다녔어도 지금까지 한 번도 사사들에게나 그 누구에게도 나의 집을 지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책망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진 그 마음과 소원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 다른 것으로 응답하심 - 대상 17:7∼8 →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①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②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 즉 ③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아멘.
우선,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미 과거에 주신 복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양을 치던 ‘목동’ 시절부터 그와 함께하셨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도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쟁에서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우셨습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것보다 더한 일이 다윗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와 장차 주실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즉 다윗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국기는 ‘다윗의 별’이라 하여 다윗의 이름을 기리고 있으며, ‘메시아가 그의 후손으로 오시는 등’ 정말 다윗이 얼마나 존귀하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만들어 주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들에게 주실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대상 17:11∼14을 요약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네가 죽은 다음에는 네 자식 가운데 한 사람이 네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다. ▸내가 그 나라를 견고케 할 것이고, 그가 너의 소원인 ‘성전’을 지을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어,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윗의 위대한 꿈과 소원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소원은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다른 복까지 더하여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남다른 소원을 품은 다윗을 기뻐하셨습니다.
4) 다윗의 감사 -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윗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상 17:16 →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비천한 목동에 불과한 자신을 불러,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하신 것도 너무너무 감사할 일인데, 아들 대에 성전을 짓게 하시고, 또 자기 집안이 영원토록 이르게 하신다니….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다윗은 진심으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사람은 다윗만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 다윗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 인간적으로도, 자격과 조건 면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받은 사랑과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상 17:16, 18 →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영예에 대하여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네! 하나님. 저같이 보잘것없는 자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와 대우에 대해서 저로서는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 드려야겠다는 위대한 소원이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그 중심을 받아주셨고, 그 자녀들의 삶까지 보장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그 자녀들까지 복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소원을 품으십시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향한 소원으로 가득하여, 우리 인생에 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풍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에 품은 소원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나는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사는지?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다윗이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리려고 했지만, 그 순수한 의도를 기뻐 받으시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여러분이 베푼 선함이 오히려 더 크게 자신에게 큰 유익과 복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언약궤를 맞이하는 자세! (대상 15:25~29)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언약궤’는 →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성물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언약궤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품과, 그 위에 있는 천사의 모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히 9:4∼5 →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①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②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③ 언약(십계명)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천사들)이 있으니…”
그런데 ‘엘리’ 제사장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언약궤를 적군인 블레셋의 손에 뺏기고 맙니다. 그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긴 했지만, 높은 산동네 ‘기럇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이란 사람의 집에 들여놓게 됩니다. 이후 적어도 70년 동안 이 언약궤는 잊혀진 채 그냥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된 다윗 때에 이르러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윗은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곳에 왕궁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왕궁에 사는 다윗의 마음이 편안칠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은, 방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기로 결심했습니다.
1. 언약궤를 모셔오는 바른 방법
다윗은 무려 3만 명의 사람을 동원하고, 새 수레를 만들어 ‘아비나답’의 집으로 갔습니다. 드디어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집을 나서는데, ‘웃사’와 ‘아히오’ 형제가 소를 몰게 되었습니다. 그 집이 산꼭대기에 있었으니 길은 좁고 경사진 비탈길이었습니다. 그런 데다가,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의 겨리소가 수레를 끄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마침내 산비탈을 다 내려와 평평한 타작마당에 이르니 소들이 막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실려있던 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니까, 큰아들 ‘웃사’가 손으로 그 언약궤를 붙들었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은데! 만져서는 안 되는 언약궤에 손을 댄 ‘웃사’는 그만 현장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경사스럽고 중요한 날인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을 포기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두고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다윗은 돌아와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일찍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언약궤와 성소의 기물들을 다루는 방법들에 대해서 엄하게 명령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 4:15 →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아론과 그 자손들이 순서에 맞게 성물들을 다 싸면, 레위 지파 자손들이 해당 성물을 꼭 어깨로 메어서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때 절대로 성물을 만져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는 보아서도 안 된다고 명하셨습니다. 민 4:19∼20 →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다윗에게는 언약궤를 왕궁으로 모셔와야겠다는 열심은 있었지만, 실상 그 방법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마침내 언약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맡겨둔 ‘오벧에돔’의 집이 석 달 동안 엄청나게 재정적인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됩니다. 대상 13:14 →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그러자 다윗이 다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올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 15:12b∼13 →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과 ‘규례’를 잘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일을 더 크게 그르치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작년 표어대로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율법의 절차를 따라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에 모시게 되자 다윗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인생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늘 기뻐하는 인생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언약궤를 모셔오는 바른 자세
① 주신 사명을 즐거움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대상 15:25 →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네!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오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오벧에돔의 집에서부터 다윗성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웃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 올 때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분명히 ‘웃사’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짜증스럽고 험하게 다룬 것이 틀림없습니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멍에를 메고 비탈진 좁은 언덕길을 내려올 땐, 모는 사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소를 다뤄야 합니다. 그런데 웃사는 “아니 왕이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왔으면 그 사람들을 시켜서 갈 것이지 왜 나를 시켜?” 속으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덕에서도 소를 험하게 몬 것입니다. 그러다가 땅이 평평한 타작마당에 이르자, 소들이 막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그러다가 결국 죽기는 누가 죽습니까? 네! ‘웃사’가 죽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가져야 할 마음은! ‘즐거움’과 ‘자원함’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대상 15:25b∼26a →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아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언제나 즐거움과 자원함으로 감당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헌신하는 마음과, 함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또 중요한 마음은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대상 15:26 →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렸더라.” 구약의 제사에서 짐승을 잡아 드리는 것은 바로 ‘헌신’을 상징합니다. 앞장서서 일하는 교역자들과, 또 그것을 알아주고 기꺼이 헌신하는 평신도들의 아름다운 하나 됨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저는 우리 꿈마을엘림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라고 믿습니다.
또한, ‘찬양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이스라엘 무리는 목소리와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대상 15:27b∼28a → “노래하는 자와 그의 우두머리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뿔나팔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은혜로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성도들은 ‘박수와 아멘!’으로 크게 화답해야 합니다. 또, 찬양단이 앞서 찬양을 인도하면! 그냥 구경하는 자세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박수도 치고, 크게 입을 벌려 목소리를 내서 함께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찬양을 받으시길 원하시고, 그런 찬양 중에 거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③ 받은 은혜를 소중하고 값있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에게 사울 왕의 딸 ‘미갈’이라는 조강지처가 있었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면 내 딸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는 약속으로 얻은 아내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시기 질투로 다윗이 도망자의 삶을 사는 동안 사울 왕은 딸 미갈을 ‘발디’라는 사람에게 재혼시켜 버립니다. 아마 다윗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사울 왕가는 몰락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자 다윗은 제일 먼저 조강지처인 미갈을 찾아서 데려옵니다. 그러면 미갈은! 다윗이 아버지 사울이 한 일을 다 용서하고 다시 자기를 왕비로 맞이하는 다윗의 너그러움에 감사하고, 조강지처로서의 그 자리를 귀중하게 여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미갈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 다윗을 업신여기고 무시했습니다. 더욱이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신앙까지도 업신여겼습니다. 대상 15:29 →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이런 그녀의 모습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왕후가 되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 은혜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삼상 2:30b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삼하 6:23 →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다윗의 사랑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모시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던 다윗과 같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언제나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아무리 선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께 맡기신 일을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감당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언약궤를 꼭 어깨로 메어 옮겨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부모님을 섬길 때) 쉬운 방법이 아닌 몸으로 섬겨야 할 이유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왕도 백성도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유독 ‘미갈’만 이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예배하는 마음을 막는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오늘은 1984년에 제정되어, 올해 42회째 지키는 ‘환경선교주일’입니다.
1. 창조세계 보존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과 인식변화
최근 몇 년 사이에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를 보고 겪으면서 “아! 이것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구나!”라는 인식을 일반 대중들도 갖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2021년 코로나 팬데믹이 ⇨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임이 자유롭지 못하면서, 배달음식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택배를 통해 물건을 받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일회용품과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용기들이 엄청나게 소모되고 또한 쓰레기로 배출되었습니다.
그때, 환경문제가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고,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개입하고 변화시켜나가야 할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교회에서도 열심히 창조세계 보전과 녹색교회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그렇게 만 4년을 열심히 활동했더니, 금년 2025년에 이르러서는 교계에서도 우리의 그런 열심과 헌신을 알아주게 되었고! 지난 5월 20일 ‘한국교회협의회’를 통하여 공식 ‘녹색교회’로 인증받아 앞서 보셨듯이 인증서와 패를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점에 이르러서, 다시 한번 ‘환경문제’가 왜 ‘교회’에서 다뤄져야 할 주제인지? ‘신학적 성경적 관점에서의 문제의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인 1967년에, 전 기독교계가 깜짝 놀랄만한 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바로 린 화이트(Lynn T. White Jr.)란 분이 →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라는 제목으로 사이언스(Science)지에 논문을 발표했는데, 오늘날 환경위기, 생태위기의 주범은 ‘기독교’이고 그 책임은 ‘기독교인’에게 있다는 논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① 기독교는 인간과 자연을 차원이 전혀 다른 존재로 구별했다. ②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자신의 발전과 목적을 위해서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분의 주장은! 기독교가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창 1:28 →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을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훼손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적에 주목하고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 우리 인간은 자연을 가꾸고 돌볼 책임을 맡은 위임자, 관리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 우리는 자연의 ‘소유자’나 ‘주인’이 아니고(X), 자연을 관리할 ‘청지기’(O)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2:15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 → ‘경작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바드’(עָבַד)인데 이는 ⇨ “일한다, 봉사한다, 가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 ‘지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미르’(שָׁמַר)인데, 이는 ⇨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연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 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이며, 파괴되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할 사명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듯이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의식을 버리고, 자연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작품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우선!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가장 큰 사명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전도, 복음, 구원’ 같은 단어들이 떠올려지실 텐데, 이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답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 얻게 하는 것”입니다. 네! 아주 완벽한 대답입니다. 주님께서도 이와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6:15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우리는 말씀을 오직 ‘사람’을 향한 명령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즉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라는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뜻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의 범위는 훨씬 더 넓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막 16:15을 여러분의 성경으로 찾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 “만민에게”라는 단어 앞에 작은 숫자로 3)이란 ‘각주’ 표시가 되어 있고, 성경 아래쪽에는 그 3)번 각주를 설명하는 부분이 보일 것입니다. 거기를 보면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헬, 온 창조세계에”라고 되어있습니다. 네! 그러면 이 본래의 뜻을 잘 살려서 번역하면 어떤 말씀이 되겠습니까? 막 16:15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실제 헬라어 성경에서 사용한 단어는 → 'πᾶς κτίσις' (파스 크티시스)인데, 이는 ‘모든 피조물에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를 ‘만민에게’로 번역한 우리말 성경은, 순전히 인간 중심적으로 번역한 결과인 것입니다. 영어 번역본들을 살펴보아도, 한결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곧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만물’을 포함한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 주님이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은 ⇨ 단지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창조세계’로 그 범위가 훨씬 더 넓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 ‘복음으로 회복시켜야 할 대상과 그 범위’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성도들이 회복시켜야 할 대상은 ⇨ 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②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즉 자연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바르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사명’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 “자연을 대할 때 이기적이고 제 욕심만 채우려는 지배자의 자세가 아니라, 자연의 관리자, 청지기로서, 자연을 잘 가꾸고 보살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생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해와 달, 숲과 바람, 물과 들풀, 작은 생명 속에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돌봄의 사명, 즉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탐욕과 무관심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파괴해 왔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주 만물 가운데서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창조세계가 아파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깨지고 다치고 억눌리고 파괴되면서 소리치는 탄식소리와 그 상처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만물을 다스리도록 위탁받은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8:19∼22 →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네! 모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모든 피조물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야 피조물들이 인간의 썩어질 욕심으로 인한 파괴와 착취에서 벗어나 영광의 자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나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깨달은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모범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서 선도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이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펼쳐갈 ‘애국운동’은 ⇨ 바로 절제와 자기희생으로 ‘지구와 창조세계’를 잘 보전하는 ‘좁은 길’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나만 잘살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와 나의 후손, 우리 공동체가, 함께 복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생명운동’에 앞장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도전하는 말씀으로 신명기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 30:19 →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나눔과 묵상
1. 각자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가장 심각한 ‘환경문제’는 무엇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눠봅시다.
2. ‘소유자’와 ‘주인’이 vs ‘청지기’와 어떻게 다른지 얘기해 보고, 그동안 환경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어디에 가까웠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나눠봅시다.
동역자로서 함께! (빌 4:1∼7)
창립 50주년 기념 사랑나눔 음악회 전체 실황 ⇨ <홈페이지→ 엘림TV → 특별행사>
1. 평신도 주일
오늘 6월 첫째 주일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 ‘평신도’입니다. 그래서 평신도의 위치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자는 취지에서 정한 주일입니다.
사실 2천 년 교회 역사 가운데, 시작 단계였던 초대교회 때를 빼놓고는 대부분 ‘성직자’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황 중심의 가톨릭교회’에 항거하여, 1517년 종교개혁으로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방향을 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진단한 당시 가톨릭교회의 문제는! 평신도들이 성경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교황이나 신부가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평신도’들도 성경을 읽고 볼 수 있도록, 라틴어로 되어있는 성경을 자국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활발하게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번역된 성경은! 때마침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기’ 덕분에 대량으로 인쇄할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평신도들이 ‘영적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된 평신도들은 더 이상 잘못된 교리나 왜곡된 전통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고, 또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하는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평신도’가 ‘성경을 잘 알아야!’ ‘건강한 성도’, ‘바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 성도님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읽고, 암송하고, 필사하여 주님의 뜻을 마음에 잘 새기고, 그 뜻대로 준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서, 주님의 동역자들로 그 이름이 천국에서 빛나는 이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고마운 분들!
성도 여러분! 어느 시대든 사람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 전제 앞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맡겨 일할 사람을 찾으시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가?” 저 스스로를 생각할 때, 저는 부족한 것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저의 부족함을 채워줄 좋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시마다 많이 붙여주셨습니다. 그런 덕분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벌써, 제가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지 26년이 지나 27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교회를 위해서 목회자를 위해서 정말 헌신적으로 충성하시는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제가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그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밝힐 수는 없으나,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분들입니다. 제가 다 갚을 수 없지만, 선지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결단코 그 상급을 잃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더 크게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사역을 펼쳐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일 필요한 것은 역시, 선교의 동역자인 ‘사람’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사도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로 협력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나바,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 루디아, 실라, 누가, 디모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외에도 로마서 16장에 언급한 사람의 숫자만 해도 ⇨무려 29명에 이릅니다. 이들을 일러 일명 Romans List = ‘로마서 16장에 언급된, 잊을 수 없는 동역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시간 바라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역사와 함께! 목회자의 마음에, 성도와 교우들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좋은 동역자요, 감사한 성도’로 기억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교회는 어울림의 공동체!
성도 여러분! “천국은 ⇨ ‘개별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각자 개인의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없는데,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내 입으로 그렇게 신앙고백을 해야!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받은 후에는,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에 속해서, ‘함께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정의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공동체 생활’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내 믿음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과 성도의 교제를 등한히 하거나,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영적 공동체’를 불편하게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 4:2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다, 빌립보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큰 여성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에는 모든 성서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첫 설립자 루디아를 비롯해서 여성지도력이 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주도권 경쟁’을 하면서 하나 되지 못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과 기쁨은 관계의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 되었을 때 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 4:3c →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나와 갈등을 겪고 있는 그 사람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빌 4:5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계적 갈등을 극복하려면!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용(寬容)이란 말뜻은 → 너그러울 관, 넓을 관 자에, 얼굴 용자입니다. 그러니까 ‘얼굴을 넓게 편다’는 뜻입니다. 남에 대하여 얼굴을 찌푸리고 미간을 좁게 하고, 눈을 뱁새눈으로 째려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넓게 펴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관용입니다.
사도 바울도 젊었을 때는 ‘마가’가 1차 선교 여행 도중 힘들다고 돌아 가버린 일로 인해서 그에 대해서 마음에 선을 딱 그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호했던 바울이 세월이 흘러 지금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빌 4:5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다투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해서, 바울 자신이 마가를 용납한 것처럼, 너희도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받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네!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전략은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서로 취향이 다르고 기호가 다르며 생각하는 방식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더 잘 맞는 성도가 있고, 서로 다른 면이 많아서 대하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와 다름’이 ‘틀림과 분쟁’으로 확대돼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바울과 같이 상대방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서로 사모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품어야 할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빌 2:5∼8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품으셨던 마음! 그 겸손과 낮아짐이 사람 사이에 있는 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의 모양을 취하셨습니다. 피조물 중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거기서 더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주셨습니다. 모든 권세를 갖게 하시고,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이며 또한 사모해야 할 영광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이 분란과 다툼의 주동자로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성도들과 더불어 동역한 아름다운 사람으로 불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 자신의 인격과 신앙 모습 속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고쳐서 바로 잡을 것’과 ‘발전시켜 성숙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천국은 ‘개별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라는 말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해석을 나눠봅시다.
3. 오늘 말씀을 듣고 나 자신이, 혹은 가정적으로 어떤 일과 사역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 속도원들과 나눠봅시다.
희년의 복음 (눅 4:18~19)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모여서 예배드렸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의자에 앉으시니, 회당 관리인이 두루마리 성경을 꺼내와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두루마리가 이사야서인 것을 아시고, 두루마리 거의 마지막 부분인 61장 1절과 2절 말씀을 찾아서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예언대로,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회당에서 그대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이사야서의 말씀을 누가복음에서 그대로 인용하였기에, 저는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을 택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실 사역을 4가지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눅 4:18~19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①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②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③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④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이 사역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 ‘주의 은혜의 해’란 ⇨ ‘희년’을 의미합니다. 희년은! 율법서인 레위기 25장에서 명령한 절기로서,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그다음 해, 곧 오십 년째 되는 해를 말합니다.
이 ‘희년’을 ‘은혜의 해’라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① 살다 보면! 식구 중에 누가 심한 병에 걸린다든지, 가장이 다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일도 생기겠죠! 그럼 그 집은 가난해져서 부득불 분배받은 땅을 팔아야만 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 정로 끝나질 않고 ② 땅을 팔았는데도 형편이 좋아지기는커녕, 그동안 이웃에게 꾼 돈도 갚을 수 없는 형편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 종살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을 팔고, 남의 집 종이 된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희년이 돌아오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가난해진 사람에게 땅을 샀던 사람은 그 본래의 주인에게 땅을 돌려줘야 하고, 종이 되어 남의 집 살던 사람도 해방되어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희년은! 가난하여서 잃어버렸던 모든 재산과 권리를 회복하게 되고, 신분도 회복하게 되니 ‘희년(禧年, 경사 희, 복 희/ 해 년)’ 말 그대로 이 얼마나 ‘기쁘고 복된 해’입니까!
그러나 ‘희년(禧年)’은 단지 이렇게 ⇨ ‘① 재산권이나 ② 신분의 환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③ 앞을 못 보게 된 사람이 다시 보게 되고 ④ 죄로 인해 눌려 살던 사람이 마음의 자유함을 얻게 되는 해가 또한 희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네 번째 사명 ④ 죄에 눌려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자유함을 누리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사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들이 받아 누릴 기업의 영광과 풍성함이 얼마나 큰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 가운데, ‘영적인 시각장애인’이 한 사람도 없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복음 전하는 사명이 크고 귀하지만, 이 세 번째 사명을 영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 ③ 실제로 앞을 못 보게 된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하는 사명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시각 장애인 가운데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선천적 시각 장애인’도 있지만, 그 비율은 10%밖에 안 된답니다. 대부분인 90%는 후천적으로 사고나 질병으로 시각 장애인이 된 경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천적 시각 장애인’이 되지 않도록! 미리 검진을 통해 예방하는 일도 중요하고, 수술이나 기타 의학적인 방법으로 시력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은! 메시아적 사역을 감당하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50주년 기념음악회’를 단순한 음악회가 아닌 ⇨ ‘사랑나눔 음악회’로 계획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헌금하신 ‘사랑나눔 헌금’은 교파를 초월하여 선교사님들이 정밀 눈 검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과, 백내장 수술을 받으면 시력을 회복할 수 있음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치료받지 못하는 국내외 목회자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잘 하고 있는 우리 감리교회의 기관이 있습니다. 바로 ‘웨슬리 사회성화 실천본부’입니다. 잠시 뉴스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https://youtu.be/-I-M6KO0WzY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셨기에 우리는 죄와 사망과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모든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이루어 주신 주님께 감사와 함께, 주님의 제자로서 메시아적 사명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담아 감사와 영광, 다짐의 박수를 우리 주님께 올려드리겠습니다.
나눔과 묵상
1. 메시아의 사역 4가지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땅을 팔거나 종살이를 시작하게 될 때, 희년이 돌아오는 해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에 따라서 땅값이나, 종살이의 기간이 정해지는 점에 비해서 오늘의 제도인 ‘영구적인 소유권’의 차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창립 50주년기념 ‘사랑나눔 음악회’에서 좋았던 점들과 보완 시정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속장님은 이것에 대해서 교구장이나 교구 목사에게 카톡으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국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에 4:1∼17)
페르시아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주전 500년 전, 유다인 에스더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집에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미모와 믿음과 지혜가 뛰어나,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하만’이라는 총리대신이 있었는데, 하만은 유다 민족을 미워했고, 특히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고,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치밀한 음모를 꾸몄고, 마침내 전 유다인을 학살해도 좋다는 결재를 아하수에로 왕에게서 받아냅니다. 하만은 쾌재를 부르며, 각 지방 총독과 관리들에게 조서를 보냅니다. 그 조서의 내용인즉, 12월 13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유다인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는 이 무시무시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에스더 왕비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중대한 충고의 말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 4:13절입니다. →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들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1. 나만 혼자 안전할 수 없다.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런 민족적 위기는 높은 자리에 있다고 살고, 낮은 자리에 있다고 죽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스더를 향한 모르드개의 이 충고는 2,500년 전의 상황만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한 권고입니다.
즉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남한에 살고 있고,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고, 하루하루를 편히 산다고 해서,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 혼자 편안히 잘 먹고 잘산다 해서, 숱한 우리 민족의 문제를 외면한다면! 반드시 민족의 역사는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말은 우리는 ‘공동 운명체’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 운명체’란? 마치 망망대해 태평양에 떠있는 한 척의 배와도 같습니다. 배가 침몰하면 선장도 갑판장도 선원도 승객도 다 함께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이와같이 나라가 잘되어야 개인이나 가정이 잘되는 것은! 하나의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운명이! 반드시 공동체의 운명일 수는 없지만, 공동체의 운명은! 그대로 개인의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개인도 같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조국이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라의 백성으로서, 조국을 위해 기도해야 할 거룩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망해 가는 조국 이스라엘과 수도 예루살렘의 미래를 생각하시고는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자! 그럼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는 충고에 대한 에스더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16절입니다. 에 4:16a →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수산 궁을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있는 모든 유다인이 금식하며 합심하여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문제에 대하여, 모두 하나가 되어 기도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위대한 민족은 위대한 기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지금까지 여러분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나의 일만 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만 즐겨왔다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 내가 나라를 망치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가 조금 어렵다고 민족이 망하지는 않습니다. 사업이 안 된다고 굶어 죽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나라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 역사의 문을 닫으십니다. 그날이 바로 민족이 망하는 날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와 세계의 정세를 볼 때, 온 국민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일찍이 나라 사랑에 생애를 바쳤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이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습니다.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내가 새로워지면, 나라도 새로워짐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축복을 사명으로 아는 인재를 키우자.
에 4:14 →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에스더는 ‘왕비’라는 높은 직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높은 지위의 축복’은 ‘사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동족이 어려움 당하면! 당연히 도와주어야 할 ‘사명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왕에게 나아가 구명운동을 벌여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에스더! 네가 만일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망하리라”고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경고했습니다. 이는 축복을 사명으로 여기지 않을 때, 심판이 임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올바로 이끌어갈 영성과 실력을 겸비한 지도자들을 키워 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 한국교회는 조국을 사랑하는 인재를 많이 키워 냈는데, 요즘은 너무 개인주의에 치우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신문에 실린 한 기사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는 제목의 편지였습니다.
→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는다.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이렇게, 참 신앙의 도리를 아는 어머니가 계셨으니, 훌륭한 아들이 나온 것입니다. 실로 자신의 목숨을! 무엇을 위해 바쳐야 할지, 목숨을 구걸하거나 비굴하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믿고 사신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과 특권들, 은사와 재물, 가정과 직장이! 모두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맡겨 주셨고, 또한 그 자리에 세워주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임 받는다면,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런 소명감이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의 자녀손들에게 심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기도하는 백성에게 영광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가장 큰 방법은! 조국이 잘 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민족이 처한 위기의 소식을 듣고, 나는 3일간 온전히 금식하며 기도하겠다고 선포하고,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왕께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에 4:16 →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그런데, 기도하는 에스더와 유다인들을 하나님이 버리셨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① 유다인을 죽이려고 세워두었던 높은 장대에 대적 하만이 달리는 통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② 에스더는 왕비로서 왕의 사랑을 더욱 받게 되었고, 그 지위가 더 높아졌습니다. ③ 모르드개는 하만이 앉았던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신나는 일입니까?
에스더서의 결론인! 마지막 절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에 10:3 → “유다인 모르드개가 ①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②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③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④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⑤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할렐루야!
민족적인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백성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위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민족적 위기, 공동체의 아픔을 십자가 앞으로 가져오면! 오늘도 하나님은 영광으로 바꾸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나라에도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있도록, 우리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는 애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주권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위기를 가장 큰 영광의 기회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민족과 내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내용을 나눠 봅시다.
2. 에스더서의 명언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네가 ( )을 가진(얻은) 것은 곧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 느냐?” 이 말이 나에게 주는 감동, 교훈, 결단을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 민족의 영광, 위대한 공동체를 이루는데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 중 감동적이었던 것을 나눠봅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 내 길에 빛 (시 119:105)
성경에서 가장 긴 시편 119편을 한 절로 요약한다면, 이 105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119:105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여기 ‘등’과 ‘빛’이란 말은!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지만, 실은 기능적으로 구별됩니다. 등(燈, Lamp)은 ‘바로 내 앞을 비춰줍니다.’ 그래서 매 순간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빛(Light)은 등대와 같이 ‘멀리서 비춰 내가 가야 할 방향과 목적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내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올바른 방향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나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람, 말씀의 사람인 것을 드러내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킬 수 있게 합니다. 이제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내 발에 ‘등’이신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걸음에 등불(燈, Lamp)이 된다는 것은, 삶의 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구덩이에 빠져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이라는 길은! 곧고 평탄하고 환하지만은 않습니다. 어두운 길, 구부러진 길, 울퉁불퉁 거친 길, 유혹의 골목길들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가야 할 바른길, 안전한 길이 어딘지를 비춰줍니다. 그 빛은 작고 조용하지만, 확실하고 충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보십시오. 기준이 무너지고, 진실이 흔들리며, 무엇이 옳은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 아닙니까? 세상의 소리는 크고 요란하지만, 그 소리들 속에 참된 길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깊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은 흑암을 비추는 ‘빛’이며, 혼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등(燈)’ Lamp라고 한 것은! 말씀 가까이에 있는 자만이 그 빛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등불이 비취는 범위는! 그저 작은 방 하나 정도를 밝게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빛이 비출 수 있도록 펼치고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매일 매일 말씀을 펼쳐서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5:15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됫박)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등잔대)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등불인 말씀을! ‘말’ 즉 ‘됫박’ 아래에 두면! 빛이 가려져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등불을 켠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집 안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 말은 주중에는 한 번도 성경을 펼쳐 읽지 않고, 교회에 와서도 화면만 보지! 본인 성경은 펼쳐 보지도 않는 사람은! 성경을 그 손에 들었으나 마치 말 밑에 둔 등불 같은 것입니다.
2. 내 길에 ‘빛’이신 말씀!
앞서 빛(Light)은 등대와 같이 멀리서 비춰, 내가 가야 할 방향과 목적지를 알려주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광야’로도 비유하지만 ‘길’이라고 자주 말씀합니다. 인생의 여정,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길을 걷다 보면, 항상 밝은 대낮은 아닙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밤에 더 많은 일을 하고 밤길을 걸어 다닙니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밤길이 안전한 나라이지만, 사실 ‘밤에 길을 다닌다. 어두운 길을 다닌다’는 것은 ‘위험과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사실 ‘길’은 늘 두렵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인지,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걸을수록 불안은 커집니다. 그러나 ‘빛’이신 말씀이 있으면! 그 두려움은 이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단지 길을 비춰줄 뿐 아니라, 그 길 가운데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고백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혼란한 세상 길을 걷는 인간의 실존적인 고백입니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저 멀리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도!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어떤 길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길을 걷든, 우리는 그냥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두리번거리거나 엉뚱한 쪽으로 가지 않도록 우리의 시선을 바르게 합니다. 읽지는 못했지만, 오늘 본문 말씀 바로 뒤에 이어지는 10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 119:109 →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앞의 말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를 직역하면 → “내 목숨이 언제나 내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의역하면 → “나는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유혹의 길, 잘못된 길, 사망의 길을 두리번거리고 탐하면서 걷는 인생이라, 스스로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때, 말씀이 빛이 되어서 우리를 그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고 바른길로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않겠습니다.” “말씀을 항상 내 앞에 두고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이 시편 기자의 고백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길이! 바른길, 생명의 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의 빛을 통해 누리는 ㉮ 삶의 유익과 ㉯ 영적 성장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 정리’해 보겠습니다.
㉮ 말씀을 따라가는 삶의 유익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시편 기자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 얻는 삶의 유익은 무엇일까요?
① 평안과 담대함: 세상 풍파가 아무리 거세도, 말씀이 비춰주는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근원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약속하는 진리를 믿기 때문에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② 분별력의 향상: 삶에서 여러 갈림길을 만날 때, 말씀을 기준 삼아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으니, 혼란이 줄어듭니다. 세상의 소리에 휩쓸려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보다,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일관되게 행동하게 됩니다.
③ 관계의 회복: 말씀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 용서, 배려, 공감 등 관계를 회복시키는 진리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자연스럽게 가족·친구·직장 동료와의 관계가 한층 더 건강하고 깊이 있게 변화됩니다.
④ 지속적인 성장: 말씀이 빛이 되어주니, 자기 인생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모든 상황을 배움의 기회로 삼고, 실패나 부족함도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니, 결국! 영적·인격적으로 큰 진보가 일어나게 됩니다.
㉯ 말씀을 따라갈 때 얻는 영적성장
말씀을 단지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마음 깊이 묵상하고, 삶에 적용할 때,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영적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① 관점의 변화: 말씀을 읽을수록, 세상에 대한 관점이 달라집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보이게 되어 가치관과 세계관이 새로워집니다.
② 성품의 변화: 말씀은 우리의 마음 밭을 서서히 변화시킵니다. 분노, 질투, 염려 등으로 가득 차 있던 내 속이, 말씀에 젖어 들면서 용서, 사랑, 평안, 희망 같은 열매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③ 사명의 발견: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달란트와 그 목적을 분별하게 됩니다. 나의 재능과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할지, 그리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어 삶의 열정과 목표를 재정비하게 됩니다.
④ 결단과 순종: 말씀을 머리로만 깨닫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결단’과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차량을 운행할 때 자동차의 ‘등’(燈, Lamp)이 필요하고, 선박이 항해할 때는 등대의 ‘불빛’(Light)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인생 여정에는, 우리 자신의 주변과 앞길을 비춰주는 빛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과 같이 내 삶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요소들을 보게 합니다. 또한, 말씀은 전조등처럼 우리 앞길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그 빛의 인도를 받으며 걷는 자는! 죄의 올무와 세상의 유혹을 피하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길의 마침이! ‘생명과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런 인생길을 걷고 또한 영광스러운 종착역에 이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찬송 579장 2절 → “아침 저녁 읽으시던 어머니의 성경책! 손때 남은 구절마다 모습 본듯합니다. 믿는 자는 누 구든지 영생함을 얻으리! 들려주신 귀한 말씀 이제 힘이 됩니다.” 이 가사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2. 말씀의 빛을 통해 누리는 ㉮ 삶의 유익과 ㉯ 영적 성장 각 4가지씩을 살펴보면서 도전받게 되는 점이 무엇 인지 나눠봅시다.
3. 말씀을 내 발의 등, 내 길의 빛으로 삼고 싶다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예: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하기보다, 먼저 성경 한 장이라도 읽어 보자! 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