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불과 2달도 채 안 되는 52일 만에 무너진 성벽을 다 재건했습니다. 이제 유다 백성들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됨으로써, 외적들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방비벽은 구축되었지만, 더 위험한 것은! 내부의 적, 곧 백성들의 영적 태만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나?” “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나?”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성경 말씀을 읽고 강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데, 백성들은 일어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느 8:3 →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네! 새벽부터 정오까지 계속 낭독했다고 하니, 적어도 6시간 이상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선포될 때, 백성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 8:6 →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동시에 그 말씀에 비추어본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슬피 울면서 회개하였습니다. 느 8:9 →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그러나 이 백성들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만은 아니었습니다. 깨달음과 감격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말씀 앞에 깨달음과 눈물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렇게 깨달음과 눈물까지로 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냥 감정적인 터치만 있었지,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우리가 말씀으로 내적인 영적 재건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먼저, 지도자들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느 8:13 →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 이들이 언제 나왔습니까? ‘그 이튿날’에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날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새벽부터 정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6시간 이상 들었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죄를 회개했고, 심령이 새로워지는 큰 부흥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자리에 있던 그들은 모두 다 기쁨과 감동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즉 우리로 치면 주일이 지난 월요일에 백성 중에서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밝히 알기 위해서 학사 에스라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어제 주일날 받은 말씀으로 만족하지 않고, 월요일에도 말씀을 더 배워서 더 확실히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한 사람이 모범적인 ‘신앙’인 것을 언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한 사람의 진정한 믿음을 알아보려면! 주일 날 교회에서 말씀을 들은 후 ‘그 이튿날’! 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단지 주일날! 말씀을 듣고 은혜받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나는 성도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라는 듯이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결코 진정한 성도,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 말씀을 통해 깨달음과 은혜를 받은 후, 그 이튿날인 월요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한 마음으로 읽으면서,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더 변화되고 새로워지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주일 날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그 이튿날인 ‘월요일부터 한 주간동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그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주일날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우리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대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결단하는, ‘영적밥먹기’를 계속하고 계십니까? 또한, ‘성경을 암송’하고 ‘성경 필사’를 통해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일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아 그래! 그런 거 하면 좋겠다!” 깨닫기만 하고 그냥 아무런 변화 없이 사십니까? 모든 성도님들이 다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2) 그러면 누가 그 이튿날에도 나온 것입니까? 느 8:13 →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여기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영적 재건을 이루려면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장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교회에서 지도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단지 목사나 장로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란?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인도하고, 혹은 삶의 본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권사, 집사, 속회지도자, 선교회장, 교회학교 교사… 모두가 지도자입니다.
아니 먼저 믿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실은 영적 지도자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영적 지도자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적지도자인 것입니다.
2. 말씀대로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이 지도자들이 그 이튿날 나와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느 8:14 →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네! 저들의 관심사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그것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 최후의 권위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토론과 생각은 다 멈추고 그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지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 말씀을 듣고 또한 보니까, 하나님께서 유대력으로 7월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느 8:14 →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유다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느 8:16, 17a →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초막을 짓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진정한 영적 재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네! 말씀을 깨달은 후에, 그 말씀대로 살려고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듣고 감동 받고 깨닫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모든 백성이 다 함께 말씀에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몇 사람이나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했다고 했습니까? 17절입니다. 느 8:17a →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네! 모든 백성이 다 순종하였습니다. 몇 사람만 행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 동안 제대로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느헤미야 8장에는 “크게 즐거워했다, 크게 기뻐했다”는 말이, 12절과 17절에 두 번 나옵니다. 12절의 즐거움은 ⇨ ‘말씀을 깨닫게 됨으로 갖게 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17절의 기쁨은 ⇨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갖게 된 기쁨’이었습니다. 17절의 기쁨은 12절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 모두가 ‘말씀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뻐하는 경험’을 갖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매 주일마다 습관적으로 말씀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로 영광을 돌리고, 말씀 앞에서 내 죄와 상한 모습을 바라보며 ‘울어본 적’은 언제입니까?
그리고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 실천한 것’은 언제입니까? 성도 여러분! 주일 날 만의 신자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이루십시다.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성도가 성도답게! 교회가 교회답게 변화되어 가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주일 말씀을 듣고 은혜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목회자나 장로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영적 지도자’라고 했는데, 본인은 직장, 학교, 가정 등 삶의 자리 에서 영적인 지도자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함으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었다면 서로 나눠봅시다.
오늘의 주인공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었지만 페르시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그곳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늘 조상의 땅 유다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생과 몇 친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그곳 형편을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은 벌써 예루살렘이 무너진 지 거의 150년이나 되었는데, 성벽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고, 성으로 출입하는 문들도 불에 탄 채로 그냥 있고,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고생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슬퍼하면서 4개월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슬르월-니산월) 기도합니다. 왕의 측근이었기에 아닥사스 왕이 그의 얼굴이 초췌해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느 2:2 →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러자 느헤미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느 2:3 →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그러자 왕이 다시 말합니다. 느 2:4 →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때 이렇게 구합니다. 느 2:5 →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여 왕의 허락과 총독의 지위를 받은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사명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한 느헤미야는 어떻게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사명에 집중력을 가졌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그냥 성취될 일도 아닙니다. 건축 자재, 사람의 동원, 보수해야 할 문, 재건에 드는 예산 등 책상 앞에 앉아있는 탁상공론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귀국 후 3일 동안 조용히 지낸 것도, 일을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대면해보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3일의 시간을 집중하여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일어났습니다. 현장에 나가보기 위해 모두가 잠자는 시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느 2:12b →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자기가 감당할 일을 위해 밤중에 일어나는 사람! 그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적당히 일하는 사람은 큰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선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깨어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사명이라고 말하면서 집중하지 않는다면! 일도 제대로 이룰 수 없고, 그런 모습에는 어떤 감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책임을 맡은 것이 있다면 사명감으로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현장에 맞는 일이 되도록 점검하고 계획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 골짜기 문으로 나갑니다. 오늘 본문 2:13~16을 보면! 분문을 지나, 샘문을 지나, 왕의 연못이 있던 곳에 이르러보니, 느헤미야가 탄 짐승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짐승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을 살펴본 후에 되돌아 왔습니다.
느헤미야는! 공사를 하되, 짐승을 동원할 수 있는 현장, 사람이 걸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현장을 확인한 것입니다. 또한, 무너진 성벽을 따라가며 불에 타버린 문들을 확인하고 점검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를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는 책임이 맡겨졌을 때 현장이 어떤 상태이며, 무엇이 시급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직접 점검하므로 실수를 줄일 수 있고, 재료와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현장 점검을 도외시하는 사람은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현장감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좋은 지도자, 좋은 일군은 준비와 점검을 위해 현장으로 가보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의 역할이 신뢰받을 수 있게 하려고, 현장 점검을 실행했습니다. 현장 경험이 자신을 지혜롭게, 권위 있게 하는 것입니다.
현장을 모르는 지도자는 언제나 실수를 계속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권위도 안 서고, 존경도 받지 못합니다. 언제나 현장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자원하는 협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잠재된 하나님을 향한 꿈과 열정이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느 2:17 →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자! 이는 민족적 자존심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도우신 일과, 왕이 일러준 말씀을 전합니다. 느 2:18a →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무슨 말입니까? 내가 페르시아에서 고국의 무너진 소식을 듣고, 회개하고 금식하며 뜻을 세웠을 때, 하나님이 역사 하심으로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가 성벽 재건을 허락받는 응답의 열매가 주어졌다는 간증을 한 것입니다. 이 간증은 저들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느 2:18b →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네! “일어나 건축하자.” 하면서 힘을 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구구절절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일이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일이며, 느헤미야 한 사람만의 꿈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백성들 안에 타오르고 있던 열망이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성벽 재건은 ‘너희’가 아니라 ‘우리’의 일이며,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민족의 숙원 사업’이라는 것을 되새겨 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벨론에서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 폐허더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성을 회복하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이제 잠들어 있는 우리의 손과 발을 깨워,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꿈꾸었던 그 꿈을 다시 이루어 봅시다!” 희미해진 꿈,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는 외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느헤미야 3장엔! 사람들의 이름과, 예루살렘 성의 문과 지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약 40명의 개인 이름과, 그 외에 75명에 달하는 가족들과 지역대표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명단을 합하면 아마 3~4백 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의 직종을 분류해보면 15종류 이상의 다양한 전문 기능인들이 동원됩니다. 성직자, 정치인, 상인, 각종 기술자, 여성들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3:1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느 3:1b →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성별하였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 모두가 함께 일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부터 앞장서서 일하게 합니다. 동시에 모든 동료 제사장들이 함께 일하도록 했습니다. 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하여 함께 일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연합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수고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함께 할수록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함께함이 힘입니다. 할렐루야!
넷째, 비웃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새 힘을 얻고 일어나 성벽을 재건할 마음을 먹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방해세력! 일을 그르치려는 마귀의 궤계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느 2:19 →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비웃음을 일축하고 당당하게 맞섭니다. 느 2:20 →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일이든! 그 사역에 대한 비웃음과 반대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벽 재건을 위해 일어나는 일만 남았다. 나머지 이 일을 잘되게 하실 분은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책임과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일의 근거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자신의 귀국 이유도, 총독이 된 이유도, 왕의 허락을 받아낸 이유도, 유대 땅에서 해야 할 성벽 재건도, 다 하나님에 근거하여 진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믿음에 뿌리 박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손의 선하심 도움의 손길로 불과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단시간에 끝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 준비하는 사람! 협력을 이끌어 내는 사람, 하나님의 선한 손길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 인생을 승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두고 슬퍼하며 기도한 것처럼, 각자 삶에서 무너진 성벽, 회복이 필요한 부분(신앙, 관계, 건강, 재정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느헤미야가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증으로 나누어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냈듯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자녀, 부모, 교우, 친구 등)의 마음을 움직여 교회로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3. 느헤미야는 비웃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근거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반대나 비판을 마주했을 때, 신앙적으로 어떻게 반응할지 나눠봅시다.
우리는 모두 부끄러움이 없는 인생을 살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부끄러움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2차 귀환의 지도자인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무너졌던 성전 재건이 완성되자! 하나님은 ‘학사 에스라’를 페르시아에서 유다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네! 에스라는 율법에 능통한 학자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율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한, 상황을 살펴보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앞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너무 부끄러운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 부끄러운 심정을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 9:6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네! 에스라는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에스라는 무엇을? 왜? 그처럼 부끄러워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백성들의 배은망덕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는데, 여기서 살아남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었지만, 다시 고향 유다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그들이니,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격과 감사로 살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감격과 감사는 잠시뿐이었고, 금세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방 여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고, 심지어 제사장들을 위시해서 레위 사람들조차 그런 일에 동참했고,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그들이었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육체의 정욕만을 추구하며 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 우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합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보호하여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해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모르고 오히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세상에 빠져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건강을 주셨는데도 그 건강 때문에, 물질을 주셨는데도 그 물질 때문에, 더 범죄의 자리로 나아가는 일은 없습니까? 만일 세상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고 산다면!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은혜 의식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자유의 시간을 범죄의 기회로 삼은 백성들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기적적으로 풀어주시고 자유인으로 귀환케 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자유의 시간을 범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 왕들의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 당했던 유다 나라와 백성들이었는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다시 회복시켜 소생할 기회를 주었더니! 오늘의 모습은 과거 징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때와 동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기회를! 죄를 짓는 범죄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신앙의 기회를! 이방 여자들이나 취하는 타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회복의 기회를! 육신적인 즐거움에 도취하는 쾌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고, 이방 민족과 섞여 쾌락과 범죄를 일삼았고, 이방인과 선민의 울타리를 다 무너뜨려 버렸고, 선민의 거룩함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기회를 선용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또한 세속화, 형식화, 무력화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와 불신자의 분간이 없는, 섞여 있는 상태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시간을 방종의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거룩의 시간으로 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이 백성들에 의해서 무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죄할 때 회개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 버리면! 더는 긍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때는! 은혜를 타락으로 갚고, 긍휼을 배역으로 갚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할 때입니다.
스 9:9∼10 →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소생케 되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다시 죄악으로 빠져들어 간 삶을 살고 있으니, 어찌 다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탄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유다 백성들만의 이야기입니까? 실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자신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양심을 팔고 믿음에서 떠난 일은 없었습니까? ▸진리를 떠나 자기의 유익을 도모한 일은 없었습니까? ⇨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부끄러워하면서 회개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됩시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스 9:5 →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 여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네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경배를 의미합니다. 서양 사람들의 인사 방법은 허리를 편 채로 악수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는 굽혀서 인사를 합니다. 조금만 높이는 인사는 고개만 굽힙니다. 좀 더 공손히 인사할 때는 고개만이 아니라 허리까지 굽힙니다. 아주 극존칭으로 인사할 때는 목과 허리와 무릎까지 굽혀 절을 합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세배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세배입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경배’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최고의 경배를 드리는 의미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겸손의 사람, 경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항복을 의미합니다. 이긴 자가 진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법은 없습니다. 진 사람이 무릎을 꿇게 됩니다. 자기를 낮추고 항복할 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패장의 목은 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 내 방법 내 의지로 살았던 나를,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극기를 의미합니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은! 누구나 흔히 취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하지만, 무릎을 꿇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무릎을 꿇고 있으면! 근육이 경직되고 피가 잘 통하지 않아 통증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절에도 무리가 옵니다.
그런데도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즉 극기한다는 말입니다. 요가나 도를 닦는 사람들도 눕거나 서성거리면서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무릎을 꿇거나 정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무릎만이 아니라, 마음의 무릎을 꿇어 모든 죄악의 유혹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간구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땅에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왕상 18:42 →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기도했다는 것은! 3년 6개월 동안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려 주시라는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간절함입니다. 이런 간절한 기도를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것은! 절대 경배, 절대 항복, 철저한 극기, 절대 갈망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무릎 꿇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서 이 시대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개인과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지금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서로 나눠봅시다.
2. 우리가 받은 ‘자유’ 또는 ‘은혜’를 잘못 사용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이며, 이를 바르게 돌려세울 수 있는 실천적 대책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무릎을 꿇는 것의, 네 가지 의미를 경배·항복·극기·간구로 설명했습니다. 이 가운데 지금 우리의 삶 에서 가장 회복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 제국을 일으킨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의 모든 포로를 해방시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귀환한 백성들은 기쁨으로 성전 재건에 힘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쁨과 역사는 잠시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았고 또한, 너무 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방해 세력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관원들에게 끊임없이 모함하는 상소문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로, 3절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스 5:3 → “그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그러자 유다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은 페르시아의 초대 황제인 ‘고레스’가 허락한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방을 다스리던 총독이 2대 황제인 ‘다리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스 5:5b →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사실 귀환 초기에는 성전을 건축할 조건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조건이 좋았는지는 에스라 1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명령하고,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파사 제국 사람들도 물심양면으로 돕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좋다 보니,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성전건축은 결국 중단되었고, 기초만 놓고 16년 동안이나 흉물스럽게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에도,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① 상황이 좋아서 무엇을 하면 잘 되고 쉽게 될 것 같았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안 되는 분! ② 또한, 무엇을 하려고 했는데 안 되고, 또 그 기간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어 다시 해 보려는 의욕이나 용기마저 잃어버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네!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 당시 하나님이 세우신 두 선지자 중의 하나인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슥 4:6b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성전건축은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과 능은’ ‘누구의 힘과 능’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의 힘과 능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힘과 능력으로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왜 성공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조건과 상황만 따지고, 또한 내 힘으로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 “인간의 지혜로는 할 수 없다.” 네!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만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성전건축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무슨 일에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구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성전건축이 중단되고 영적 사역들이 중단되었을 때, 유다 땅에는 기근과 자연재해가 임했고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조금의 진전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1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성전 재건은 중단되고, 그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살 집을 짓고 농토를 일구기에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된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먼저 영적 사역에 치중해야 된다”라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앞서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보았는데, 이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겠습니다.
학 1:3∼5 →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자기들이 살 집은 열심히 지으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 1:2b →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주변 사람들의 방해도 많고, 아직 페르시아 제국에서 재차 허락을 받지도 못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경제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열정을 회복하고 싶고, 교회 사역을 열심히 하고 싶고,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서고 싶지만, 아직 환경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아직 배우자가 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직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돈을 조금 더 벌고 난 다음에 봉사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학개 선지자가 이를 지적한 것입니다. 학 1:2b →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성도 여러분! 개인의 삶에는 충실했지만, 하나님의 일은 한없이 뒤로 미룬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어떤 집에서 살고 있습니까? 학 1:4 →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여기 “판벽한 집에 거주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판벽(板壁)한 집’이란? → “벽면이 아름답게 치장된 주택”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집에 살아도, 너희에게 닥친 삶의 상황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학 1:6 →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네! 수고는 헛수고이며, 참 만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영적 생활에 열심을 내고, 영적 사역에 열심을 내었던 그때와 ↔ 오늘의 지금, 그저 내가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는 지금과 한 번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영혼의 만족이 있나요? ▸삶의 진정한 평안이 있나요?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한 삶을 누리고 있나요? 그렇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보면! 어떤 말씀이 됩니까?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잡혀야! 하나님과 그분을 위한 일을 앞세워야! 복된 삶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믿어지시면 아멘!
지금 자신을 살펴볼 때, 사명을 잃어버렸거나, 영적 생활이 중단되었거나, 사역이 중단되어 있다면! 빨리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는 그 날부터 하나님께서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이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앞서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이, 다리오 왕에게 선대 고레스 황제가 성전 재건을 허락했었는지를 확인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편지의 내용 요지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 나옵니다. 스 5:17b →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이 편지를 받은 다리오 왕은 조서를 내려 ‘문서 창고’를 다 뒤져 보라고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과연, 고레스 왕의 칙령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끌려 왔던 사람들을 다 귀환시킨다는 것, ▸과거에 성전에서 빼앗아 왔던 기물을 다 돌려보낸다는 것, ▸또한, 다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많은 돕는 자들을 붙여 주신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조서라고 하는 것까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오 황제는 지방 총독들에게 다시 자기의 조서를 내립니다. 스 6:7∼8 → “하나님의 성전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스 6:13∼15 →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아멘.
성도 여러분! 주의 일 하는데, 봉사하는데, 배우자가 반대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반대할 수도 있고, 심지어 자녀들이 반대할 수도 있어요. 직장 상사가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어나 다시 믿음으로 시작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반대했던 사람들을 오히려 돕는 자로 바꿔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전도사역이 되었든, 교회 여러 부서의 봉사가 되었든, 중단되었을 때는 내 삶 속에 만족은 사라집니다. 하늘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 백성들처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개인적인 안락함이나 다른 우선순위에 몰두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과 같이, 나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풀어낸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신앙생활이나 사역 중 여러 이유로 중단되었거나 잠시 멈춰 서 있는 영역이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지금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라 1:1을 보십시오. →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여기에 나오는 ‘바사 왕 고레스’는 세계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바벨론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라는 말은, 페르시아 제국의 문을 연 고레스의 통치 원년을 말합니다. 이때의 연도는 기원전 538년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해는 기원전 586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약 50년 정도 포로 생활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사상 3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1차로 주전 606년 여호야김 왕 때, 2차로 9년 뒤인 597년 여호야긴 왕 때, 3차로 11년 뒤인 586년 시드기야 왕 때 끌려갑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버리고 여러 우상들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깨우치고 돌이켜 미래에 희망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래서 오늘 본문 에스라 1:1에 →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범죄 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셨던 바벨론 제국은 망할래야 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 바벨론 제국을 파사를 통하여 하루아침에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당신의 뜻대로 역사를 바꾸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에스라 1:1절의 →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라는 말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새롭게 열린 파사 제국의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본토로 돌아가도록 조서를 내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다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고레스를 통하여 칙령을 내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그 칙령의 내용이 에스라서 1:2∼4에 나옵니다. 스 1:2∼4 →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②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③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① 이라고 표시한 본문 내용을 보면! 마치 고레스는 모태 신앙인인 것처럼 자기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언제 적부터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까? 그는 바벨론을 물리치는 날까지도,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런 고백을 하게 한 줄로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② 라고 표시한 본문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할 뿐 아니라, 귀환해서는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역시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는지? 그 성전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게 뭡니까? 그런데,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은! 역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일인 줄로 믿습니다.
③ 이라고 표시한 본문 내용을 보면! 성전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모든 재원이 마련될 수 있도록, 귀환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각양의 예물을 드려 성전 재건이 성취되도록 조치합니다. 이걸 보면! 마치 신앙생활 오래 한 헌신 된 장로님의 말씀 같아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이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회의하고 의심했습니다. 그 약속의 실현이 늦어지자! 사라는 자구책을 써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아 아브라함에게 안겨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려 해도 이젠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졌고, 아브라함은 늙어서 마른 나무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약속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신뢰하고 믿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렇게 살질 못합니다. 자주 의심하고, 자주 무시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하고,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은 멀고, 우리의 생각이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망 없어 보이고, 내 생각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알면서도, 내 뜻을 따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당신의 약속을 너무나도 신비스럽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신실함을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APEC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에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과 중국의 정상도 왔고, 그 외 세계 여러 나라의 대통령과 수상 그리고 각급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세상의 힘과 권력을 가진 나라가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 배후에서 여전히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통치하시고 섭리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이처럼 주전 538년! 고레스 황제는 바벨론 시절 강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포합니다. 그 후 2년간의 준비 끝에, 성경의 예언대로 70년이 꽉 찬 주전 536년, 그러니까 바벨론의 침략으로 다니엘을 비롯한 친구들이 1차로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6년으로부터 70년 만에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은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그러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루어짐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고레스 같은 놀라운 지도자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아 알 수 있느냐 하면! ‘고레스’보다 200년 앞서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고레스’ 왕이 나타나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사 45:13 → “내가 공의로 그(고레스)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습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고레스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고레스 왕 까닭에 바벨론으로 잡혀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만에 해방되어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시편 126편에서는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126:1∼2 →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네!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교회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죠! 바로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꿈같은 평화통일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강화도 교동에 건립되는 ‘평화통일 기도의 집’이 거의 다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끝까지 안전하게 잘 지어지고, 필요한 재정이 잘 채워지도록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팔 모양으로 지어진 기도의 집에서 성도들이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소리가 북녘땅에 울려 퍼지고 또한 하늘에 상달되어 꿈같은 평화통일의 날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 북녘땅에 무너진 교회들이 다시 재건되어 삼천리강산에 찬양이 울려 퍼지고, 끊어진 민족의 정기가 되살아나고, 근심으로 가득 찼던 백성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세계선교와 세계역사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인생의 행복과 축복의 문을 여는 매직 워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통하여, 실제 내 삶에 일어났던 일들을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내용들을 간증해 봅시다. (예: 일천번제 기도응답, 말씀의 응답 등)
3. 이스라엘을 기적적으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도 꿈꾸는 것과 같은 평화통일의 날을 주시 옵소서. 함께 기도하십시다.
오늘 본문은 히스기야 왕이 유다 백성들을 향해 외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에 대한 말씀입니다. 히스기야 왕에 관한 이야기는 역대하 29장부터 32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즉위하자마자 첫 한 달 동안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고, 두 달 만에 영적인 부흥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의 통치 초기에 이처럼 갑작스러운 부흥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놀랍게도 그의 아버지이며 선왕이었던 ‘아하스’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부친 아하스 왕은! 16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면서 직접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성전 기구들을 훼파하고, 마침내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들을 다 폐쇄해 버리고,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우상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가뜩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멀리 떠나게 하여’, ‘영적인 생명을 죽이는 악한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대하 28:22,23c →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1. 개인 및 성전의 성결과 예배의 회복
그런데, 이처럼 완악했던 아하스 왕이 죽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패역한 아버지 아하스의 아들인데,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과 비견되는 아주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짐작건대, 히스기야는 왕자로 자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뼛속까지 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가 망쳐 놓았던 일들을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가 이방 나라의 노략 거리가 된 원인이 여호와의 전을 더럽히면서 제사를 온전히 드리지 않았기 때문임을 선포하면서, 성전청결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뜻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개혁은 언제나 개인의 성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제사를 집례하기에 합당하도록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케 했습니다. 그래서▸폐쇄되었던 성전 문 들을 다시 열고,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대하 29:3∼5 →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쪽 광장에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먼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스스로를 성결케 합니다. 대하 29:15 → “그들이(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들의 형제들을 모아 성결하게 하고!” 이어서,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합니다. 대하 29:16 → “여호와의 전 안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하여,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을 끌어내어 여호와의 전 뜰에 이르매 레위 사람들이 받아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갔더라.”
네! 이렇게 시작하여 16일 만에, 성전을 깨끗게 하는 일을 마칩니다.(대하 29:17∼19) 히스기야 왕의 개혁은 성전을 청결케 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고 성결케 한 후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온 이스라엘을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속죄제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제사를 드림으로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의 회복을 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제물’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자원하여서 드린 제물이 너무 많아서, 그 제물을 처리할 제사장이 부족하여 레위인을 동원하여 그 일을 감당케 할 정도였습니다. (대하 29:31∼3) 이렇게 자원하는 예물이 넘쳤던 것은, 백성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컸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백성들의 감사 또한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히스기야가 믿음으로 성전제사를 회복하였을 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온 백성에게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었고 평강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 회복으로 인한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천국 백성이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주님의 몸된 성전인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십시오.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언약이 회복되도록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히스기야 왕의 개혁처럼 우리의 신앙에도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의 은혜’가 물결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히스기야 왕의 남 유다뿐 아니라 북녘 동포 초청
성전을 청결케 하고, 기본적인 예배가 회복되자! 히스기야 왕의 마음 가운데에는 오랫동안 우리가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으니, 유월절 명절을 지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1년에 세 차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명절을 지키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끊긴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것을 회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그 마음에 든 생각은! 자기가 다스리는 남쪽 왕국 유다 백성들만 모여서 유월절을 지킬 것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초청하여 같이 유월절을 지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이주 정책에 의해 이 민족들이 그 땅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때였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보발꾼(걸어 다니면서 공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을 통하여 편지를 보내서 남북의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자고 초청했습니다. 대하 30:1 →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초청에 대한 반응(10∼12) ⇨ 그런데, 이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조롱하며 비웃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하 30:10 →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예루살렘으로 내려와서 유월절 명절을 함께 지키자고 초청하는데, 그 초청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남쪽 왕국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멀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중요성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초청을 거부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슬픈 본문 가운데 하나가 호세아 5장 15절입니다. 호 5:15 →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굴을 보이고 계셨으나, 이제 등을 보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6장 24절 이하에 약속된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말씀입니다. 민 6:24∼26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우리를 향해 드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하 30:11 →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북쪽 왕국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채, 종교적으로 혼합적인 요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 좋은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 섬기는 신앙을 굳게 지켜가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람들을 일러 ‘남은 자’라고 합니다. 네! 그런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북한 땅에도 이런 남은 자들이 있음을 믿고 어서 속히 평화적인 통일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대하 30:8 → “그런즉 너희 조상들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와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의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개역 개정) 우리가 쓰는 ‘개역 개정판 성경’에는 내용이 빠졌지만, 이전의 ‘개정판’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대하 30:8 → “그런즉, 너희 열조 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귀순하여 영원히 거룩케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개역 성경) 귀순이라는 말은 분단 상황에서나 쓰는 말입니다.
귀순(歸順)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정의를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적이었던 사람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돌아서서 복종하거나 순종함” 네! 그러나 이 말은 정치적인 경우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다른 이방 신을 섬기고, 세상 향락에 취하여 살던 삶은 지금까지로 충분하고, 이제 돌이켜 하나님께로 귀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때이고, 귀순시켜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시고 회복 시켜 주시고,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성결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내 가정에서 성결케 해야 할 잘못된 습관은 무엇인지 찾아보고 돌이킬 것을 나눠봅시다.
2. 이웃 초청주일은 지났지만, 히스기야와 같이 하나님께로 귀순시켜야 할 영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내려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신앙을 더 자라게 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에, 구체적으로 한 가지 실천할 것을 정하고 나눠봅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형통’을 소망합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일터가 견고하고, 교회가 사랑과 진리 가운데 튼튼히 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웃시야 왕은 실제로 크게 형통했던 왕입니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성벽을 보수하고, 망대를 세우고, 군대를 정비하고, 새로운 전쟁 무기를 개발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그 성공의 비밀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대하 26:5b →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네! 시작은 분명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인생은 매우 슬프게 끝나고 맙니다. 그는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성전에서의 분향을 자신이 하려다가, 제사장들이 제지하자 분노를 발합니다. 그러자 바로 그 자리에서 이마에 나병이 발하여 왕궁 밖으로 쫓겨나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시작은 은혜였는데, 끝은 나병으로 인한 ‘격리와 고립’ 생활이었습니다. 이 극적인 반전의 이유를 오늘 성경은 ‘교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대하 26:16 →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자! 그러면 은혜로 시작한 사람이 왜 교만으로 넘어질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끝까지 은혜의 질서를 지켜, 시작도, 과정도, 끝도 은혜롭게 살 수 있을지? 웃시야 왕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성공의 근원 — 하나님을 찾을 동안!
웃시야는 열여섯 살에 남 왕국 유다의 열 번째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사실 52년간 왕위에 있었다는 것만 해도 굉장한 일입니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많은 일을 했고, 유다를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거의 다 회복시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웃시야는 블레셋과 싸워 이겨서, 블레셋 여러 도시에 유다 성읍들을 건축했습니다.(대하 26:6) 늘 블레셋 때문에 괴롭힘을 당해왔던 유다가 오히려,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곳에 성읍들을 건축한 것입니다.
또한, 웃시야는 예루살렘 성 곳곳에 망대를 세워 국방을 견고하게 했습니다.(대하 26:9) 광야에도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파서 가축을 길렀으며, 산을 개간하여 포도원을 만들고, 밭을 일궈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대하 26:10) 또한, 웃시야에게는 용맹하고 건장하며 싸움에 능한 지휘관들이 있었고, 그 휘하에는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나 되는 용사들이 있었습니다.(대하 26:11~13)
이렇게 웃시야가 강성하여지고, 그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대하 26:15b →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그렇습니다. 웃시야는 ⓐ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었고 ⓑ 하나님이 형통케 한 왕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 하나님이 도와주신 왕으로, 그 도우심으로 국력이 강해지는 복을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힘입어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웃시야가 형통케 되어,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뒤에서 영적으로 돕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스가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 스가랴는 포로기 이후에 활동했던 선지자! 성경의 저자 스가랴는 아니고, ‘동명이인’입니다.
아무튼, 그는 5절 말씀을 보면! 대하 26:5 →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스가랴가 웃시야의 영적 스승으로서 그를 지도하고 인도할 때, 웃시야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만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가랴가 먼저 죽었고, 웃시야 왕 곁에는 영적 지도자가 없어졌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교만함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는 변질 되었습니다.
2. 웃시야가 말년에 그토록 교만하게 변질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힘이 생기자 교만해졌습니다. 16절입니다. 대하 26:16a →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네! 하나님의 은혜로 강성한 나라를 이루었으니, 더욱 그 은혜를 감사하며 겸손해야 했는데! 그렇질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조금만 힘이 생기고, 조금만 됐다 싶으면 교만해져서 목이 뻣뻣해집니다. 그리고는 마치 자기 힘으로 된 줄로 착각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의 선물인 교만으로 넘어지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예배 생활을 등한히 함으로 교만해졌습니다. 5절입니다. 대하 26:5 →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웃시야가 스가랴의 지도를 받을 때는 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여기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은, ‘예배하는 삶에 열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웃시야는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웃시야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지속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웃시야가 왜 하나님을 잘 찾지 않고,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되었을까요? 한마디로 너무 잘 나갔기 때문입니다. 잘 나가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요? 잘 나가므로 너무 바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을 망각하게 되고, 자기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런 ‘교만한 생각’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돌이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교만한 자는 어떤 짓을 합니까? 교만의 특징은 ‘무시’입니다. 교만은 ‘절대가치를 무시’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릇된 행동을 합니다. 무엇을 무시할까요?
⑴ 예배를 무시합니다. 웃시야가 교만함으로 저지른 죄악은, 제사장과 선지자만의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분향은!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직무였습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교만하여 자기가 직접 집례하려고 했습니다. 대하 26:16 →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그러자 제사장들이 제재하고 나섭니다. 17~18절입니다. 대하 26:17~18 →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자! 이런 경고를 받았으면 곧바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하는데, 웃시야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오히려 화를 내며 계속하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은 다 각각 그 역할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분에 한하여 책임 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하면 그 영역을 침범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냥 두시질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를 귀중히 여기고, 구별된 직분을 귀중히 여기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⑵ 책망을 무시합니다. 웃시야가 성전으로 들어가 자신이 직접 분향을 시도할 때 ‘아사랴’ 제사장이 웃시야를 책망합니다. 하지만 웃시야는 그 책망을 무시합니다. 19절입니다. 대하 26:19a →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웃시야가 영성이 살아 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면 그 책망을 듣고 돌이켰을 텐데, 웃시야는 교만하여 그 책망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즉석에서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대하 26:19b →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한센병, 즉 나병에 걸리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버림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천하의 웃시야 왕 조차도 왕위에서 곧바로 쫓겨나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말씀에 찔림이 있거나 거슬리는 말로 들리면, 제발 사람의 말로만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열린 귀가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웃시야의 말년과 우리를 향한 권고
결국, 예배를 무시하고 제사장의 책망을 무시한 웃시야 왕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웃시야는 1) 나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2) 왕권이 박탈되었습니다. 3) 별궁으로 유배당했습니다. 4) 죽어서도 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① 건강을 잃었습니다. ② 권력도 잃었습니다. ③ 인간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④ 죽어서도 예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⑤ 다시는 예배드릴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네! 교만하면,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말년은 ‘격리와 고립’이었습니다. 시작은 화려했으나 끝은 쓸쓸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 “그러면! 너의 인생의 끝은 어떠하겠느냐?” 네!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합니다. 은혜로 시작했다면, 끝도 은혜여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 영적으로 겸손한 성도들이 되셔서,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을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는 말씀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혹 나 자신 또한 강성해져서 공동체의 경고나 하나님의 멈춤 신호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자리와 경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최근 내가 넘보거나 혼동했던 경계가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나눠봅시다.
3. 은혜의 수단과 회복의 통로인 - 말씀, 기도, 예배, 찬양, 묵상, 나눔 - 중 최근 가장 약해진 통로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오늘의 주인공은 35세에 유다의 4번째 왕이 된 ‘여호사밧’입니다. 그는 25년 동안 유다를 다스리면서 나라를 견고히 하고 평화를 이룩했습니다. 그래서 남 왕국 유다의 스무 명 왕 중에서, 히스기야(13번째 왕) 다음으로 위대한 왕으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 족속이 연합하여,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남 왕국 유다를 쳐들어온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대개 이럴 때 당황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왜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기지?”하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다가 원망과 불평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능력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시험과 위기의 때를 → ① 내 믿음을 키우고 ② 하나님을 체험하고 ③ 간증이 있는 신앙으로 바꾸어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위기를 승리와 평화의 때로 만들길 원하십니다.
네! 이런 승리와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적용해야 할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이 원리를 마음에 새겨 시험의 때,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기도의 원리
말씀드린 대로, ‘모압’과 ‘암몬’과 ‘마온’ 3개국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두려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과 군대로는 3개국 연합군과 싸워서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여호사밧은 온 나라에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뜰 앞에 모여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대하 20:3~4 →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그렇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올 때 여호사밧이 행한 첫 번째 전쟁 준비는 바로 ‘기도’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준비한다고 하면, 무기를 챙기고 군사를 모으는 것인데, 여호사밧 왕은 ‘기도’로 전쟁 준비를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도’는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로 바꾸는 최고의 방법이요 원리임을 여호사밧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가 닥쳐오고 시련이 몰려오면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통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찾아갈 분이 따로 계십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녀의 신분으로서 하나님께 당당히 요청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네! 기도는 시험의 때,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도록 명한 후, 자신도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6절부터 12절에 나오는데 두 절만 살펴보겠습니다. 대하 20:9 →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대하 20:12b →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우리의 힘으로는 원수를 대적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마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오니 들어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뭐라고 응답하셨습니까? 대하 20:15b →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네! 기도하니,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처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들 모두, 우리에겐 ‘기도’라는 강력한 방법과 원리가 있음을 잘 알고, 이것을 사용하여 인생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찬양의 원리
두 번째,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바꾸는 ‘찬양’이라는 방법과 원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이 원수를 물리치기 위하여 사용한 두 번째 원리는 ‘찬양’이었습니다. 대하 20:19 →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21절도 보겠습니다. 대하 20:21 →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네! ‘찬양’하였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22~24절입니다. 대하 20:22~24 →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대신 싸우셨고, 연합군끼리 싸웠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사밧은 ‘기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무기가 ‘찬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찬양대를 앞세운 여호사밧의 군대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사실 군대는 한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적군들이 서로 쳐 죽여서 그야말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일방적으로 승리했습니다. 찬양은!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 됨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적군이 남긴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전리품을 챙기는 데만 3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제4일째 되는 날, 한 골짜기에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송축합니다. 대하 20:26 →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네! 여기 “브라가”라는 말은 → “송축”이라는 뜻입니다. 이 ‘송축’이라는 말은 = “경사를 기리고 축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한 골짜기였던 곳이 “브라가 골짜기” 즉, “송축의 골짜기”가 된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승리를 감사하고 축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① 힘드십니까? 어려우십니까? 답답하십니까? 그렇다면 찬송가를 펴시고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② 위기와 시련이 닥쳐왔습니까? 그래서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③ 병들어 아프십니까? 낙심하고 지쳤습니까? 그렇다면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 찬양에는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있습니다.
‘찬양은 곡조가 붙은 기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큰 문제와 장기적인 어려움에 처하다 보면, 기도할 힘도 의욕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 찬양을 하면 기도할 힘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늘의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친히 일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바꾸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3. 감사의 원리
마지막으로,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이 사용한 방법과 원리는 바로 ‘감사’입니다. 네! 시험의 때,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바꾸는 힘이 ‘감사’에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수많은 무기로 무장한 적군들이 앞에 진을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라’고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감사’를 좋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찬양대를 전쟁 마당의 가장 앞자리에 세워서,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무엇이었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21절입니다. 대하 20:21c →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전쟁은 시작도 안 했고, 작은 승리라도 한 것이 아닌데, 감사부터 올리고 있습니다. 네! 여기에 승리의 비밀이 있습니다. 싸우기도 전에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은, 이미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감사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면 보통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일이 잘돼서 감사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이런 감사는 ‘나중 감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나중 감사’는 믿음이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진짜 감사는! 이렇게 일이 다 끝난 후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드리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를 일러 ‘미리 감사’라고 합니다. 이런 ‘미리 감사’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감사를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이런 ‘미리 감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기뻐하시고 더 크고 놀라운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미리 감사’는 ‘나중 감사’보다, 더 엄청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힘과 능력입니까? → ① 인생에 닥쳐오는 모든 위기를 극복할 힘 ② 어려움이나 문제를 능히 극복할 힘 ③ 그 어떤 원수도, 그 어떤 공격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감사 신앙 특히 ‘미리 감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미리 감사’ 신앙으로 무장한다면,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 어떤 어려움도 위기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감사보다 위대한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 ‘기도’와 ‘찬송’과 ‘감사’의 신앙으로 무장해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전도가 무거운 ‘의무감’으로만 남지 않도록, ‘와 보라!’고 선포할 대상과 ‘새생명 전도축제’에 임하는 나의 계획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시험과 위기의 때를 ① 내 믿음을 키우고 ② 하나님을 체험하고 ③ 간증이 있는 신앙으로 바꾸어가도록, 우리에게 주신 3가지 영적 무기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3가지 영적 무기 중에서 내가 약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더욱 예리하고 강력한 무기가 되도록 발전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내 친구 가운데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의 이름과 그 얼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나는 사람이 떠올랐습니까?> 그러면! 중풍병자와 네 친구 이야기와 연관 지은 ‘세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 첫째, 나의 친구가 처한 ‘영적인 중풍’ 상태를 나는 얼마나 절박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둘째, 그 친구를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과연 나는 ‘지붕을 뚫을’ 만큼의 믿음과 행동력을 가지고 있는가? 셋째, 나의 전도로 그 친구에게 임할 전인적인 구원과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일에 대한 기대가 있는가? 이 질문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생명을 살리는 귀한 ‘친구 전도의 사명자’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우정, 생명을 향한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막 2:3∼4 →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어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병자가 아닌 그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친구의 절박한 상황을 외면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바로 이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우정’과 ‘생명을 향한 절박함’입니다.
둘째, 지붕을 뚫는 행동하는 믿음, 한계를 넘어서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막 2:4∼5a →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친구들은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기상천외한 방법 즉 ‘지붕을 뚫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과감하고 헌신적인 ‘행동하는 믿음’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지붕을 뚫는’ 것과 같은 용기와 헌신입니다.
셋째, 친구에게 임하는 전인적인 구원과 하나님께 돌려지는 영광을 봅시다. 막 2:5b,10c∼12 →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가 치유 받은 순서를 보면! 먼저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은 후에, 이어서 육체의 치유가 뒤따랐습니다. 중풍병자는 완전히 회복되어 자신의 상을 들고 걸어갔고, 이 모든 것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외쳤습니다.
한 영혼의 온전한 구원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을 넘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분을 찬양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킴을 믿고, 이에 헌신하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남 왕국 유다의 세 번째 왕이 되어, 41년간 통치한 ‘아사’ 왕입니다. 이 아사 왕의 일대기는 역대하 14~16장에 걸쳐서 나오는데,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사 왕의 초창기 삶의 모습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아사 왕은 41년이나 되는 긴 통치 기간 중, 초반부에는 주님이 보시기에 ‘선과 정직’을 행하며 백성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그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즉 인생의 어느 단계나 시점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은 무엇인지?’ 그 지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아사 왕의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핵심 메시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 마음의 ‘우상’을 제거하는 영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대하 14:2∼3 →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그렇습니다. 아사 왕의 통치 초기에 가장 먼저 행했던 일은!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우상들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겐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된 우상숭배는 없지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며,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는 ‘영적인 우상’들이 있습니다.
30∼50대 성도님들께는 ‘SNS의 좋아요’에 일희일비하거나, ‘커리어를 쌓는 성공’에 모든 정열을 쏟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혹은 ‘완벽한 육아’에 매몰되어 성경이나 교회보다 맘 카페의 의견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와 판단의 기준이 되는 등, 우상 같지 않은 우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멈춰 서서 나의 내면을 스스로 살펴봐야 합니다. 나를 조급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마음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어 그런 것인가? 스스로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60대 이상 성도님들께는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경험과 연륜’ 자체를 맹신하거나, 자녀와 손주에 대한 ‘지나친 염려’로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리거나, 안정된 삶의 ‘편안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우선되는 것이 영적인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우상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아사 왕이 단호하게 우상들을 제거했듯, 우리 마음과 삶에 깊이 뿌리내린 우상들을 걷어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욱 순전하고 자유로운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함이 필요합니다.
대하 14:4 →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아사 왕은 개인적인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유다 백성 전체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율법과 명령을 따르도록 명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고, 수많은 가치관들이 혼재한 시대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변치 않는 ‘기준’과 ‘길잡이’가 꼭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아사 왕의 지침은! 단지 한 시대의 왕의 명령을 넘어, 삶의 기준이 흔들릴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하고 견고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제시한 것입니다.
30∼50대 성도님들은, 직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육아와 자녀 교육,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세상의 유행이나 성공 공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내비게이션’이자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쁜 일상 중에도, 매일 매일 말씀 한 구절이라도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60대 이상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름 삶의 풍파를 겪으며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다 있지만, 궁극적으로 흔들림 없는 삶의 ‘나침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임을 다시금 상기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참된 평안과 위로를 찾고, 자녀와 손주들에게도 말로만이 아닌, 실제의 삶 속에서 말씀을 따라 사는 믿음의 본을 보여주어, 귀한 영적인 유산을 남기는 사명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평안의 때’를 ‘믿음의 성을 견고히 쌓는 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하 14:6∼7 →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그들이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아사 왕과 유다 백성이 주님 보시기에 선과 정직을 행하고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놀라운 ‘평안’을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사 왕이 그 ‘평안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나라의 내실을 다지고 견고한 성읍을 건축하는 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의 때를 쉼과 휴식의 때가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30∼50대 성도님들은 직장이나 가정에서 잠깐의 ‘숨통’이 트이거나, 작은 ‘여유’가 생겼을 때, 이를 단지 피로를 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적 성장을 위한 ‘투자’의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 신앙 서적을 읽거나, 성경 공부에 참여하여 영적 내공을 쌓는다면, 앞으로 다가올 인생의 또 다른 도전에 대비할 ‘믿음의 성’을 든든히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60대 이상 성도님들께는! 이제 삶의 많은 짐을 내려놓고 ‘평안과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시기로 접어 들어갈 것입니다. 이 귀한 시간을 단순히 안락함에 머무르지 말고, 영적인 헌신과 섬김의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믿음의 다음 세대들을 격려하고 이끌어주며, 그들에게 귀한 ‘영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지혜와 경험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평안의 때를 ‘믿음의 성을 견고히 쌓는 때’로 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크고 작은 ‘평안의 시간’들을 영적인 성숙과 공동체를 세우는데 투자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아사 왕의 고백처럼 대하 14:7 →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삶에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사 왕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진정한 ‘평안’과 ‘형통’으로 이끄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0대의 열정으로, 40대의 책임감으로, 50대의 지혜로, 그리고 60대의 연륜으로, 70대의 너그러움으로, 80대의 영성으로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내가 전도해야 할 ‘친구’에 대해서 서로 나누고, 그 열매를 위하여 함께 중보합시다.
2. 내 삶에서 버리고 제거해야 할 나의 우상에 대해서, 그리고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하여 다시 시작해야 할 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30대의 열정, 40대의 책임감, 50대의 지혜, 60대의 연륜, 그리고 70대의 너그러움과 평안, 80대의 영성과 감사까지, 삶의 각 단계마다 우리는 소중한 덕목들을 쌓아갑니다. 지금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 거나, 혹은 지금부터 더욱 깊이 가꾸고 싶은 덕목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성도 여러분! 행 16:31 말씀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잘 알고 익숙한 말씀이죠? 그런데 이 말씀은, 한편으론 ▸‘나로 인해 우리 가정이 다 구원받겠구나!’ 하는 큰 ‘축복의 말씀’으로 들리고, 다른 한편으론 ▸‘먼저 믿은 나에게 주어진 영적인 책임’의 말씀으로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행 10장의 백부장 고넬료는 집안 사람들과 친척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까지 다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모이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충만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 10:43∼44 →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 16장의 빌립보 간수의 집이 구원받는 과정도 보십시다. 행 16:31∼34 →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그렇습니다. 고넬료도 간수장도! 자기 가정의 모든 식구들이 복음을 듣고 믿도록! 말씀의 자리 은혜의 자리로 이끄는 ‘책임과 사명’을 잘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나 한 사람이 믿으면 가족이 자동으로 구원된다”는 보장이 아니라, ▸가족이 복음을 듣고 믿음에 응답하도록 하나님의 은혜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명적 초대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은 가정의 첫 번째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나 자신이 먼저 믿음을 가지고 굳게 서고, 말씀과 기도로 식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갈 때, 하나님께서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은혜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있는 성전
솔로몬이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건축물을 세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과 소망이 담긴 ‘거룩한 공간’이었습니다. 성전 봉헌식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중요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핵심은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하 7:16 →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그런데 이 약속은! 과거 솔로몬 당시의 ‘성전’을 향해 주신 말씀만이 아닌,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주신 것이고 또한,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 ‘각 개인’에게도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있는’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며, 또한, 우리 개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성’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성전을 짓는데 솔로몬과 백성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성전을 거룩하게 하시며, 그곳에 당신의 눈과 마음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 인간의 공로나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특정한 공간에 계시거나 갇혀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당신의 백성과 소통하며 만나주시는 특별한 장소를 허락하셨습니다. 즉, 구약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이었고,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가 바로 그곳이며 또한,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의 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건물로서의 교회도, 성도의 모임인 공동체도, 우리 각 개인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겸손히 우리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며, 적극적인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계실만한 신령한 개인과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내가 먼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 가정이 구원받는다’는 축복의 약속도 생각해야 하지만, 내가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자칫 먼저 믿는 내가 잘못 믿으면, 우리 가정의 구원의 문을 닫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무조건적인 은혜이지만, 그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을 넘어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①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함’과 ② ‘기도’입니다.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가치관, 탐욕, 이기심 개인주의와 같은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적극적인 회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머무는 개인과 영적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기준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머무시도록 내가 떠나야 할 ‘악한 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③ 위선이 사라지고 진정성이 살아있는 공동체와 개인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하신 시선(視線)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눈이 교회에 머문다는 말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내면과 공동체의 민낯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에 대한 ‘실제적 변화의 내용’은 이런 것들입니다.
(목사와 리더)▶ 투명하고 책임감 있는 리더십 : 지도자는 하나님의 시선 아래에서 모든 행정과 의사결정에 있어서, 더욱 투명하고 윤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재정 사용의 투명성’을 유지해야 하고, 지도력의 행사나 동역자들과 성도들을 대할 때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내려놓고’ 인격적으로 대우해서 진정한 권위를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소그룹 공동체) ▶ 가면을 벗은 관계 : 성도들은 서로에게 완벽한 모습만을 보이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누며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에만, 교만과 비판은 줄어들고, 서로를 향한 긍휼과 이해를 깊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 ▶ 표리부동함이 없는 삶 : 주일 예배 때의 모습과 주중의 삶의 괴리가 줄어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 - 모든 곳에 함께하심을 생각하며, 직장, 가정, 사회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④ 기도가 살아있는 성도, 기도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중요하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사람, 기도하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15절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하 7:15 →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그렇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제사이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소통 통로입니다. 이에 대한 ‘실제적 변화의 내용’은 이런 것들입니다.
▶ 깊이 있는 기도 공동체 : 교회와 성도가 고난과 위기를 만났을 때, 인간적인 해결책만을 찾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하 7:14b →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그러니까 문제 해결의 근원적 열쇠는 ‘기도하는 것’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자세로 간구할 때!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게 될 줄로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공감과 돌봄의 확장 :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성도들에 대해서 교회와 소그룹 공동체가 더 깊이 공감하고 실질적인 돌봄을 제공해야 합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쉽고 평안한 때는 없었지만, 요즘들어 특별히 삶의 무게와 어려움을 크게 느끼는 성도들이 많아졌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럴 때, 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자는 말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당신과 똑같은 고민과 문제 속에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 그에게 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공감공동체’임을 확신시켜 주면! 스스로 힘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가정사역’과 더불어 ‘생애주기별 교육’에 힘쓰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성을 강화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 역경을 통한 성장과 성숙 : 위기와 실패를 단순히 부정적인 경험으로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영적인 배움의 기회로 삼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견고해지고 영적으로 성숙한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단지 ‘심리적 위안’이나 ‘종교적 의식’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영적인 동력’임을 우리는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나눔과 묵상
1. ‘나 한 사람이 믿으면 가족이 자동으로 구원된다’는 보장이 아니라, 가족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나의 가족을 위한 구체적인 전도 계획이나 기도의 제목을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머무는 개인, 소그룹 공동체, 교회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점은 무엇이 라고 생각하는지 나눠봅시다.
3. ‘깊이 있는 기도 공동체’와 ‘공감과 돌봄의 확장’을 통해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따라, 중보기도나 실질적인 돌봄을 실천했던 경험이나 계획을 나눠봅시다.
말씀으로 내적인 영적 재건 (느 8:1∼6, 12∼18)
유다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불과 2달도 채 안 되는 52일 만에 무너진 성벽을 다 재건했습니다. 이제 유다 백성들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됨으로써, 외적들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방비벽은 구축되었지만, 더 위험한 것은! 내부의 적, 곧 백성들의 영적 태만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나?” “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나?”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성경 말씀을 읽고 강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데, 백성들은 일어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느 8:3 →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네! 새벽부터 정오까지 계속 낭독했다고 하니, 적어도 6시간 이상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선포될 때, 백성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 8:6 →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동시에 그 말씀에 비추어본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슬피 울면서 회개하였습니다. 느 8:9 →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그러나 이 백성들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만은 아니었습니다. 깨달음과 감격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말씀 앞에 깨달음과 눈물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렇게 깨달음과 눈물까지로 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냥 감정적인 터치만 있었지,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우리가 말씀으로 내적인 영적 재건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먼저, 지도자들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느 8:13 →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 이들이 언제 나왔습니까? ‘그 이튿날’에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날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새벽부터 정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6시간 이상 들었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죄를 회개했고, 심령이 새로워지는 큰 부흥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자리에 있던 그들은 모두 다 기쁨과 감동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즉 우리로 치면 주일이 지난 월요일에 백성 중에서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밝히 알기 위해서 학사 에스라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어제 주일날 받은 말씀으로 만족하지 않고, 월요일에도 말씀을 더 배워서 더 확실히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한 사람이 모범적인 ‘신앙’인 것을 언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한 사람의 진정한 믿음을 알아보려면! 주일 날 교회에서 말씀을 들은 후 ‘그 이튿날’! 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단지 주일날! 말씀을 듣고 은혜받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나는 성도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라는 듯이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결코 진정한 성도,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 말씀을 통해 깨달음과 은혜를 받은 후, 그 이튿날인 월요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한 마음으로 읽으면서,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더 변화되고 새로워지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주일 날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그 이튿날인 ‘월요일부터 한 주간동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그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주일날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우리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대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결단하는, ‘영적밥먹기’를 계속하고 계십니까? 또한, ‘성경을 암송’하고 ‘성경 필사’를 통해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일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아 그래! 그런 거 하면 좋겠다!” 깨닫기만 하고 그냥 아무런 변화 없이 사십니까? 모든 성도님들이 다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2) 그러면 누가 그 이튿날에도 나온 것입니까? 느 8:13 →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여기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영적 재건을 이루려면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장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교회에서 지도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단지 목사나 장로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란?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인도하고, 혹은 삶의 본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권사, 집사, 속회지도자, 선교회장, 교회학교 교사… 모두가 지도자입니다.
아니 먼저 믿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실은 영적 지도자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영적 지도자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적지도자인 것입니다.
2. 말씀대로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이 지도자들이 그 이튿날 나와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느 8:14 →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네! 저들의 관심사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그것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 최후의 권위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토론과 생각은 다 멈추고 그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지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 말씀을 듣고 또한 보니까, 하나님께서 유대력으로 7월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느 8:14 →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유다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느 8:16, 17a →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초막을 짓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진정한 영적 재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네! 말씀을 깨달은 후에, 그 말씀대로 살려고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듣고 감동 받고 깨닫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모든 백성이 다 함께 말씀에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몇 사람이나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했다고 했습니까? 17절입니다. 느 8:17a →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네! 모든 백성이 다 순종하였습니다. 몇 사람만 행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 동안 제대로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느헤미야 8장에는 “크게 즐거워했다, 크게 기뻐했다”는 말이, 12절과 17절에 두 번 나옵니다. 12절의 즐거움은 ⇨ ‘말씀을 깨닫게 됨으로 갖게 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17절의 기쁨은 ⇨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갖게 된 기쁨’이었습니다. 17절의 기쁨은 12절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 모두가 ‘말씀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뻐하는 경험’을 갖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매 주일마다 습관적으로 말씀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로 영광을 돌리고, 말씀 앞에서 내 죄와 상한 모습을 바라보며 ‘울어본 적’은 언제입니까?
그리고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 실천한 것’은 언제입니까? 성도 여러분! 주일 날 만의 신자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이루십시다.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성도가 성도답게! 교회가 교회답게 변화되어 가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주일 말씀을 듣고 은혜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목회자나 장로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영적 지도자’라고 했는데, 본인은 직장, 학교, 가정 등 삶의 자리 에서 영적인 지도자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함으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었다면 서로 나눠봅시다.
힘을 내어 함께 선한 일을! (느 2:11∼20)
오늘의 주인공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었지만 페르시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그곳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늘 조상의 땅 유다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생과 몇 친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그곳 형편을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은 벌써 예루살렘이 무너진 지 거의 150년이나 되었는데, 성벽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고, 성으로 출입하는 문들도 불에 탄 채로 그냥 있고,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고생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슬퍼하면서 4개월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슬르월-니산월) 기도합니다. 왕의 측근이었기에 아닥사스 왕이 그의 얼굴이 초췌해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느 2:2 →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러자 느헤미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느 2:3 →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그러자 왕이 다시 말합니다. 느 2:4 →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때 이렇게 구합니다. 느 2:5 →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여 왕의 허락과 총독의 지위를 받은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사명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한 느헤미야는 어떻게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사명에 집중력을 가졌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그냥 성취될 일도 아닙니다. 건축 자재, 사람의 동원, 보수해야 할 문, 재건에 드는 예산 등 책상 앞에 앉아있는 탁상공론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귀국 후 3일 동안 조용히 지낸 것도, 일을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대면해보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3일의 시간을 집중하여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일어났습니다. 현장에 나가보기 위해 모두가 잠자는 시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느 2:12b →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자기가 감당할 일을 위해 밤중에 일어나는 사람! 그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적당히 일하는 사람은 큰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선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깨어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사명이라고 말하면서 집중하지 않는다면! 일도 제대로 이룰 수 없고, 그런 모습에는 어떤 감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책임을 맡은 것이 있다면 사명감으로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현장에 맞는 일이 되도록 점검하고 계획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 골짜기 문으로 나갑니다. 오늘 본문 2:13~16을 보면! 분문을 지나, 샘문을 지나, 왕의 연못이 있던 곳에 이르러보니, 느헤미야가 탄 짐승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짐승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을 살펴본 후에 되돌아 왔습니다.
느헤미야는! 공사를 하되, 짐승을 동원할 수 있는 현장, 사람이 걸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현장을 확인한 것입니다. 또한, 무너진 성벽을 따라가며 불에 타버린 문들을 확인하고 점검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를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는 책임이 맡겨졌을 때 현장이 어떤 상태이며, 무엇이 시급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직접 점검하므로 실수를 줄일 수 있고, 재료와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현장 점검을 도외시하는 사람은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현장감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좋은 지도자, 좋은 일군은 준비와 점검을 위해 현장으로 가보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의 역할이 신뢰받을 수 있게 하려고, 현장 점검을 실행했습니다. 현장 경험이 자신을 지혜롭게, 권위 있게 하는 것입니다.
현장을 모르는 지도자는 언제나 실수를 계속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권위도 안 서고, 존경도 받지 못합니다. 언제나 현장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자원하는 협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잠재된 하나님을 향한 꿈과 열정이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느 2:17 →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자! 이는 민족적 자존심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도우신 일과, 왕이 일러준 말씀을 전합니다. 느 2:18a →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무슨 말입니까? 내가 페르시아에서 고국의 무너진 소식을 듣고, 회개하고 금식하며 뜻을 세웠을 때, 하나님이 역사 하심으로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가 성벽 재건을 허락받는 응답의 열매가 주어졌다는 간증을 한 것입니다. 이 간증은 저들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느 2:18b →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네! “일어나 건축하자.” 하면서 힘을 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구구절절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일이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일이며, 느헤미야 한 사람만의 꿈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백성들 안에 타오르고 있던 열망이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성벽 재건은 ‘너희’가 아니라 ‘우리’의 일이며,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민족의 숙원 사업’이라는 것을 되새겨 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벨론에서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 폐허더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성을 회복하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이제 잠들어 있는 우리의 손과 발을 깨워,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꿈꾸었던 그 꿈을 다시 이루어 봅시다!” 희미해진 꿈,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는 외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느헤미야 3장엔! 사람들의 이름과, 예루살렘 성의 문과 지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약 40명의 개인 이름과, 그 외에 75명에 달하는 가족들과 지역대표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명단을 합하면 아마 3~4백 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의 직종을 분류해보면 15종류 이상의 다양한 전문 기능인들이 동원됩니다. 성직자, 정치인, 상인, 각종 기술자, 여성들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3:1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느 3:1b →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성별하였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 모두가 함께 일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부터 앞장서서 일하게 합니다. 동시에 모든 동료 제사장들이 함께 일하도록 했습니다. 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하여 함께 일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연합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수고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함께 할수록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함께함이 힘입니다. 할렐루야!
넷째, 비웃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새 힘을 얻고 일어나 성벽을 재건할 마음을 먹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방해세력! 일을 그르치려는 마귀의 궤계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느 2:19 →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비웃음을 일축하고 당당하게 맞섭니다. 느 2:20 →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일이든! 그 사역에 대한 비웃음과 반대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벽 재건을 위해 일어나는 일만 남았다. 나머지 이 일을 잘되게 하실 분은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책임과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일의 근거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자신의 귀국 이유도, 총독이 된 이유도, 왕의 허락을 받아낸 이유도, 유대 땅에서 해야 할 성벽 재건도, 다 하나님에 근거하여 진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믿음에 뿌리 박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손의 선하심 도움의 손길로 불과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단시간에 끝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 준비하는 사람! 협력을 이끌어 내는 사람, 하나님의 선한 손길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 인생을 승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두고 슬퍼하며 기도한 것처럼, 각자 삶에서 무너진 성벽, 회복이 필요한 부분(신앙, 관계, 건강, 재정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느헤미야가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증으로 나누어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냈듯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자녀, 부모, 교우, 친구 등)의 마음을 움직여 교회로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3. 느헤미야는 비웃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근거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반대나 비판을 마주했을 때, 신앙적으로 어떻게 반응할지 나눠봅시다.
부끄러움을 알고 무릎을 꿇읍시다. (스 9:1∼10)
1.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모두 부끄러움이 없는 인생을 살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부끄러움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2차 귀환의 지도자인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무너졌던 성전 재건이 완성되자! 하나님은 ‘학사 에스라’를 페르시아에서 유다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네! 에스라는 율법에 능통한 학자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율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한, 상황을 살펴보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앞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너무 부끄러운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 부끄러운 심정을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 9:6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네! 에스라는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에스라는 무엇을? 왜? 그처럼 부끄러워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백성들의 배은망덕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는데, 여기서 살아남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었지만, 다시 고향 유다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그들이니,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격과 감사로 살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감격과 감사는 잠시뿐이었고, 금세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방 여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고, 심지어 제사장들을 위시해서 레위 사람들조차 그런 일에 동참했고,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그들이었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육체의 정욕만을 추구하며 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 우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합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보호하여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해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모르고 오히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세상에 빠져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건강을 주셨는데도 그 건강 때문에, 물질을 주셨는데도 그 물질 때문에, 더 범죄의 자리로 나아가는 일은 없습니까? 만일 세상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고 산다면!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은혜 의식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자유의 시간을 범죄의 기회로 삼은 백성들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기적적으로 풀어주시고 자유인으로 귀환케 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자유의 시간을 범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 왕들의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 당했던 유다 나라와 백성들이었는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다시 회복시켜 소생할 기회를 주었더니! 오늘의 모습은 과거 징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때와 동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기회를! 죄를 짓는 범죄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신앙의 기회를! 이방 여자들이나 취하는 타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회복의 기회를! 육신적인 즐거움에 도취하는 쾌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고, 이방 민족과 섞여 쾌락과 범죄를 일삼았고, 이방인과 선민의 울타리를 다 무너뜨려 버렸고, 선민의 거룩함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기회를 선용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또한 세속화, 형식화, 무력화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와 불신자의 분간이 없는, 섞여 있는 상태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시간을 방종의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거룩의 시간으로 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이 백성들에 의해서 무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죄할 때 회개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 버리면! 더는 긍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때는! 은혜를 타락으로 갚고, 긍휼을 배역으로 갚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할 때입니다.
스 9:9∼10 →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소생케 되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다시 죄악으로 빠져들어 간 삶을 살고 있으니, 어찌 다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탄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유다 백성들만의 이야기입니까? 실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자신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양심을 팔고 믿음에서 떠난 일은 없었습니까? ▸진리를 떠나 자기의 유익을 도모한 일은 없었습니까? ⇨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부끄러워하면서 회개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됩시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스 9:5 →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 여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네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경배를 의미합니다. 서양 사람들의 인사 방법은 허리를 편 채로 악수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는 굽혀서 인사를 합니다. 조금만 높이는 인사는 고개만 굽힙니다. 좀 더 공손히 인사할 때는 고개만이 아니라 허리까지 굽힙니다. 아주 극존칭으로 인사할 때는 목과 허리와 무릎까지 굽혀 절을 합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세배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세배입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경배’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최고의 경배를 드리는 의미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겸손의 사람, 경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항복을 의미합니다. 이긴 자가 진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법은 없습니다. 진 사람이 무릎을 꿇게 됩니다. 자기를 낮추고 항복할 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패장의 목은 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 내 방법 내 의지로 살았던 나를,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극기를 의미합니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은! 누구나 흔히 취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하지만, 무릎을 꿇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무릎을 꿇고 있으면! 근육이 경직되고 피가 잘 통하지 않아 통증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절에도 무리가 옵니다.
그런데도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즉 극기한다는 말입니다. 요가나 도를 닦는 사람들도 눕거나 서성거리면서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무릎을 꿇거나 정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무릎만이 아니라, 마음의 무릎을 꿇어 모든 죄악의 유혹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간구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땅에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왕상 18:42 →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기도했다는 것은! 3년 6개월 동안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려 주시라는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간절함입니다. 이런 간절한 기도를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것은! 절대 경배, 절대 항복, 철저한 극기, 절대 갈망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무릎 꿇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서 이 시대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개인과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지금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서로 나눠봅시다.
2. 우리가 받은 ‘자유’ 또는 ‘은혜’를 잘못 사용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이며, 이를 바르게 돌려세울 수 있는 실천적 대책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무릎을 꿇는 것의, 네 가지 의미를 경배·항복·극기·간구로 설명했습니다. 이 가운데 지금 우리의 삶 에서 가장 회복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일어나 다시 시작하라! (스 5:1∼5)
1. 스룹바벨의 성전건축 - 조건은 좋았는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 제국을 일으킨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의 모든 포로를 해방시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귀환한 백성들은 기쁨으로 성전 재건에 힘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쁨과 역사는 잠시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았고 또한, 너무 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방해 세력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관원들에게 끊임없이 모함하는 상소문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로, 3절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스 5:3 → “그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그러자 유다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은 페르시아의 초대 황제인 ‘고레스’가 허락한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방을 다스리던 총독이 2대 황제인 ‘다리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스 5:5b →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사실 귀환 초기에는 성전을 건축할 조건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조건이 좋았는지는 에스라 1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명령하고,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파사 제국 사람들도 물심양면으로 돕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좋다 보니,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성전건축은 결국 중단되었고, 기초만 놓고 16년 동안이나 흉물스럽게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에도,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① 상황이 좋아서 무엇을 하면 잘 되고 쉽게 될 것 같았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안 되는 분! ② 또한, 무엇을 하려고 했는데 안 되고, 또 그 기간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어 다시 해 보려는 의욕이나 용기마저 잃어버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네!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 당시 하나님이 세우신 두 선지자 중의 하나인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슥 4:6b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성전건축은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과 능은’ ‘누구의 힘과 능’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의 힘과 능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힘과 능력으로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왜 성공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조건과 상황만 따지고, 또한 내 힘으로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 “인간의 지혜로는 할 수 없다.” 네!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만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성전건축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무슨 일에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구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성전건축이 중단되고 영적 사역들이 중단되었을 때, 유다 땅에는 기근과 자연재해가 임했고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조금의 진전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1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성전 재건은 중단되고, 그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살 집을 짓고 농토를 일구기에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된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먼저 영적 사역에 치중해야 된다”라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앞서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보았는데, 이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겠습니다.
학 1:3∼5 →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자기들이 살 집은 열심히 지으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 1:2b →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주변 사람들의 방해도 많고, 아직 페르시아 제국에서 재차 허락을 받지도 못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경제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열정을 회복하고 싶고, 교회 사역을 열심히 하고 싶고,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서고 싶지만, 아직 환경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아직 배우자가 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직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돈을 조금 더 벌고 난 다음에 봉사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학개 선지자가 이를 지적한 것입니다. 학 1:2b →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성도 여러분! 개인의 삶에는 충실했지만, 하나님의 일은 한없이 뒤로 미룬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어떤 집에서 살고 있습니까? 학 1:4 →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여기 “판벽한 집에 거주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판벽(板壁)한 집’이란? → “벽면이 아름답게 치장된 주택”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집에 살아도, 너희에게 닥친 삶의 상황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학 1:6 →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네! 수고는 헛수고이며, 참 만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영적 생활에 열심을 내고, 영적 사역에 열심을 내었던 그때와 ↔ 오늘의 지금, 그저 내가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는 지금과 한 번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영혼의 만족이 있나요? ▸삶의 진정한 평안이 있나요?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한 삶을 누리고 있나요? 그렇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보면! 어떤 말씀이 됩니까?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잡혀야! 하나님과 그분을 위한 일을 앞세워야! 복된 삶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믿어지시면 아멘!
지금 자신을 살펴볼 때, 사명을 잃어버렸거나, 영적 생활이 중단되었거나, 사역이 중단되어 있다면! 빨리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는 그 날부터 하나님께서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이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앞서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이, 다리오 왕에게 선대 고레스 황제가 성전 재건을 허락했었는지를 확인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편지의 내용 요지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 나옵니다. 스 5:17b →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이 편지를 받은 다리오 왕은 조서를 내려 ‘문서 창고’를 다 뒤져 보라고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과연, 고레스 왕의 칙령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끌려 왔던 사람들을 다 귀환시킨다는 것, ▸과거에 성전에서 빼앗아 왔던 기물을 다 돌려보낸다는 것, ▸또한, 다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많은 돕는 자들을 붙여 주신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조서라고 하는 것까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오 황제는 지방 총독들에게 다시 자기의 조서를 내립니다. 스 6:7∼8 → “하나님의 성전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스 6:13∼15 →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아멘.
성도 여러분! 주의 일 하는데, 봉사하는데, 배우자가 반대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반대할 수도 있고, 심지어 자녀들이 반대할 수도 있어요. 직장 상사가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어나 다시 믿음으로 시작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반대했던 사람들을 오히려 돕는 자로 바꿔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전도사역이 되었든, 교회 여러 부서의 봉사가 되었든, 중단되었을 때는 내 삶 속에 만족은 사라집니다. 하늘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 백성들처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개인적인 안락함이나 다른 우선순위에 몰두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과 같이, 나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풀어낸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신앙생활이나 사역 중 여러 이유로 중단되었거나 잠시 멈춰 서 있는 영역이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지금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약속대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스 1:1∼6)
1.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라 1:1을 보십시오. →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여기에 나오는 ‘바사 왕 고레스’는 세계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바벨론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라는 말은, 페르시아 제국의 문을 연 고레스의 통치 원년을 말합니다. 이때의 연도는 기원전 538년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해는 기원전 586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약 50년 정도 포로 생활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사상 3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1차로 주전 606년 여호야김 왕 때, 2차로 9년 뒤인 597년 여호야긴 왕 때, 3차로 11년 뒤인 586년 시드기야 왕 때 끌려갑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버리고 여러 우상들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깨우치고 돌이켜 미래에 희망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래서 오늘 본문 에스라 1:1에 →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범죄 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셨던 바벨론 제국은 망할래야 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 바벨론 제국을 파사를 통하여 하루아침에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당신의 뜻대로 역사를 바꾸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에스라 1:1절의 →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라는 말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새롭게 열린 파사 제국의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본토로 돌아가도록 조서를 내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다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고레스를 통하여 칙령을 내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그 칙령의 내용이 에스라서 1:2∼4에 나옵니다. 스 1:2∼4 →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②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③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① 이라고 표시한 본문 내용을 보면! 마치 고레스는 모태 신앙인인 것처럼 자기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언제 적부터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까? 그는 바벨론을 물리치는 날까지도,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런 고백을 하게 한 줄로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② 라고 표시한 본문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할 뿐 아니라, 귀환해서는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역시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는지? 그 성전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게 뭡니까? 그런데,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은! 역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일인 줄로 믿습니다.
③ 이라고 표시한 본문 내용을 보면! 성전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모든 재원이 마련될 수 있도록, 귀환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각양의 예물을 드려 성전 재건이 성취되도록 조치합니다. 이걸 보면! 마치 신앙생활 오래 한 헌신 된 장로님의 말씀 같아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이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회의하고 의심했습니다. 그 약속의 실현이 늦어지자! 사라는 자구책을 써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아 아브라함에게 안겨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려 해도 이젠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졌고, 아브라함은 늙어서 마른 나무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약속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신뢰하고 믿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렇게 살질 못합니다. 자주 의심하고, 자주 무시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하고,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은 멀고, 우리의 생각이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망 없어 보이고, 내 생각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알면서도, 내 뜻을 따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당신의 약속을 너무나도 신비스럽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신실함을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APEC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에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과 중국의 정상도 왔고, 그 외 세계 여러 나라의 대통령과 수상 그리고 각급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세상의 힘과 권력을 가진 나라가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 배후에서 여전히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통치하시고 섭리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이처럼 주전 538년! 고레스 황제는 바벨론 시절 강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포합니다. 그 후 2년간의 준비 끝에, 성경의 예언대로 70년이 꽉 찬 주전 536년, 그러니까 바벨론의 침략으로 다니엘을 비롯한 친구들이 1차로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6년으로부터 70년 만에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은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그러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루어짐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고레스 같은 놀라운 지도자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아 알 수 있느냐 하면! ‘고레스’보다 200년 앞서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고레스’ 왕이 나타나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사 45:13 → “내가 공의로 그(고레스)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습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고레스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고레스 왕 까닭에 바벨론으로 잡혀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만에 해방되어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시편 126편에서는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126:1∼2 →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네!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교회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죠! 바로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꿈같은 평화통일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강화도 교동에 건립되는 ‘평화통일 기도의 집’이 거의 다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끝까지 안전하게 잘 지어지고, 필요한 재정이 잘 채워지도록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팔 모양으로 지어진 기도의 집에서 성도들이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소리가 북녘땅에 울려 퍼지고 또한 하늘에 상달되어 꿈같은 평화통일의 날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 북녘땅에 무너진 교회들이 다시 재건되어 삼천리강산에 찬양이 울려 퍼지고, 끊어진 민족의 정기가 되살아나고, 근심으로 가득 찼던 백성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세계선교와 세계역사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인생의 행복과 축복의 문을 여는 매직 워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통하여, 실제 내 삶에 일어났던 일들을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내용들을 간증해 봅시다. (예: 일천번제 기도응답, 말씀의 응답 등)
3. 이스라엘을 기적적으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도 꿈꾸는 것과 같은 평화통일의 날을 주시 옵소서. 함께 기도하십시다.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대하 30:1∼6)
오늘 본문은 히스기야 왕이 유다 백성들을 향해 외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에 대한 말씀입니다. 히스기야 왕에 관한 이야기는 역대하 29장부터 32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즉위하자마자 첫 한 달 동안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고, 두 달 만에 영적인 부흥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의 통치 초기에 이처럼 갑작스러운 부흥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놀랍게도 그의 아버지이며 선왕이었던 ‘아하스’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부친 아하스 왕은! 16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면서 직접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성전 기구들을 훼파하고, 마침내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들을 다 폐쇄해 버리고,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우상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가뜩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멀리 떠나게 하여’, ‘영적인 생명을 죽이는 악한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대하 28:22,23c →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1. 개인 및 성전의 성결과 예배의 회복
그런데, 이처럼 완악했던 아하스 왕이 죽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패역한 아버지 아하스의 아들인데,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과 비견되는 아주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짐작건대, 히스기야는 왕자로 자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뼛속까지 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가 망쳐 놓았던 일들을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가 이방 나라의 노략 거리가 된 원인이 여호와의 전을 더럽히면서 제사를 온전히 드리지 않았기 때문임을 선포하면서, 성전청결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뜻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개혁은 언제나 개인의 성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제사를 집례하기에 합당하도록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케 했습니다. 그래서▸폐쇄되었던 성전 문 들을 다시 열고,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대하 29:3∼5 →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쪽 광장에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먼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스스로를 성결케 합니다. 대하 29:15 → “그들이(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들의 형제들을 모아 성결하게 하고!” 이어서,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합니다. 대하 29:16 → “여호와의 전 안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하여,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을 끌어내어 여호와의 전 뜰에 이르매 레위 사람들이 받아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갔더라.”
네! 이렇게 시작하여 16일 만에, 성전을 깨끗게 하는 일을 마칩니다.(대하 29:17∼19) 히스기야 왕의 개혁은 성전을 청결케 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고 성결케 한 후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온 이스라엘을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속죄제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제사를 드림으로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의 회복을 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제물’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자원하여서 드린 제물이 너무 많아서, 그 제물을 처리할 제사장이 부족하여 레위인을 동원하여 그 일을 감당케 할 정도였습니다. (대하 29:31∼3) 이렇게 자원하는 예물이 넘쳤던 것은, 백성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컸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백성들의 감사 또한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히스기야가 믿음으로 성전제사를 회복하였을 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온 백성에게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었고 평강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 회복으로 인한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천국 백성이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주님의 몸된 성전인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십시오.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언약이 회복되도록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히스기야 왕의 개혁처럼 우리의 신앙에도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의 은혜’가 물결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히스기야 왕의 남 유다뿐 아니라 북녘 동포 초청
성전을 청결케 하고, 기본적인 예배가 회복되자! 히스기야 왕의 마음 가운데에는 오랫동안 우리가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으니, 유월절 명절을 지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1년에 세 차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명절을 지키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끊긴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것을 회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그 마음에 든 생각은! 자기가 다스리는 남쪽 왕국 유다 백성들만 모여서 유월절을 지킬 것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초청하여 같이 유월절을 지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이주 정책에 의해 이 민족들이 그 땅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때였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보발꾼(걸어 다니면서 공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을 통하여 편지를 보내서 남북의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자고 초청했습니다. 대하 30:1 →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초청에 대한 반응(10∼12) ⇨ 그런데, 이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조롱하며 비웃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하 30:10 →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예루살렘으로 내려와서 유월절 명절을 함께 지키자고 초청하는데, 그 초청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남쪽 왕국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멀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중요성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초청을 거부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슬픈 본문 가운데 하나가 호세아 5장 15절입니다. 호 5:15 →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굴을 보이고 계셨으나, 이제 등을 보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6장 24절 이하에 약속된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말씀입니다. 민 6:24∼26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우리를 향해 드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하 30:11 →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북쪽 왕국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채, 종교적으로 혼합적인 요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 좋은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 섬기는 신앙을 굳게 지켜가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람들을 일러 ‘남은 자’라고 합니다. 네! 그런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북한 땅에도 이런 남은 자들이 있음을 믿고 어서 속히 평화적인 통일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대하 30:8 → “그런즉 너희 조상들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와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의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개역 개정) 우리가 쓰는 ‘개역 개정판 성경’에는 내용이 빠졌지만, 이전의 ‘개정판’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대하 30:8 → “그런즉, 너희 열조 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귀순하여 영원히 거룩케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개역 성경) 귀순이라는 말은 분단 상황에서나 쓰는 말입니다.
귀순(歸順)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정의를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적이었던 사람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돌아서서 복종하거나 순종함” 네! 그러나 이 말은 정치적인 경우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다른 이방 신을 섬기고, 세상 향락에 취하여 살던 삶은 지금까지로 충분하고, 이제 돌이켜 하나님께로 귀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때이고, 귀순시켜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시고 회복 시켜 주시고,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성결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내 가정에서 성결케 해야 할 잘못된 습관은 무엇인지 찾아보고 돌이킬 것을 나눠봅시다.
2. 이웃 초청주일은 지났지만, 히스기야와 같이 하나님께로 귀순시켜야 할 영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내려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신앙을 더 자라게 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에, 구체적으로 한 가지 실천할 것을 정하고 나눠봅시다.
시작도 과정도 끝도 은혜로! (대하 26:15∼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형통’을 소망합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일터가 견고하고, 교회가 사랑과 진리 가운데 튼튼히 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웃시야 왕은 실제로 크게 형통했던 왕입니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성벽을 보수하고, 망대를 세우고, 군대를 정비하고, 새로운 전쟁 무기를 개발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그 성공의 비밀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대하 26:5b →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네! 시작은 분명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인생은 매우 슬프게 끝나고 맙니다. 그는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성전에서의 분향을 자신이 하려다가, 제사장들이 제지하자 분노를 발합니다. 그러자 바로 그 자리에서 이마에 나병이 발하여 왕궁 밖으로 쫓겨나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시작은 은혜였는데, 끝은 나병으로 인한 ‘격리와 고립’ 생활이었습니다. 이 극적인 반전의 이유를 오늘 성경은 ‘교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대하 26:16 →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자! 그러면 은혜로 시작한 사람이 왜 교만으로 넘어질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끝까지 은혜의 질서를 지켜, 시작도, 과정도, 끝도 은혜롭게 살 수 있을지? 웃시야 왕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성공의 근원 — 하나님을 찾을 동안!
웃시야는 열여섯 살에 남 왕국 유다의 열 번째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사실 52년간 왕위에 있었다는 것만 해도 굉장한 일입니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많은 일을 했고, 유다를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거의 다 회복시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웃시야는 블레셋과 싸워 이겨서, 블레셋 여러 도시에 유다 성읍들을 건축했습니다.(대하 26:6) 늘 블레셋 때문에 괴롭힘을 당해왔던 유다가 오히려,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곳에 성읍들을 건축한 것입니다.
또한, 웃시야는 예루살렘 성 곳곳에 망대를 세워 국방을 견고하게 했습니다.(대하 26:9) 광야에도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파서 가축을 길렀으며, 산을 개간하여 포도원을 만들고, 밭을 일궈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대하 26:10) 또한, 웃시야에게는 용맹하고 건장하며 싸움에 능한 지휘관들이 있었고, 그 휘하에는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나 되는 용사들이 있었습니다.(대하 26:11~13)
이렇게 웃시야가 강성하여지고, 그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대하 26:15b →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그렇습니다. 웃시야는 ⓐ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었고 ⓑ 하나님이 형통케 한 왕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 하나님이 도와주신 왕으로, 그 도우심으로 국력이 강해지는 복을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힘입어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웃시야가 형통케 되어,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뒤에서 영적으로 돕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스가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 스가랴는 포로기 이후에 활동했던 선지자! 성경의 저자 스가랴는 아니고, ‘동명이인’입니다.
아무튼, 그는 5절 말씀을 보면! 대하 26:5 →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스가랴가 웃시야의 영적 스승으로서 그를 지도하고 인도할 때, 웃시야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만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가랴가 먼저 죽었고, 웃시야 왕 곁에는 영적 지도자가 없어졌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교만함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는 변질 되었습니다.
2. 웃시야가 말년에 그토록 교만하게 변질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힘이 생기자 교만해졌습니다. 16절입니다. 대하 26:16a →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네! 하나님의 은혜로 강성한 나라를 이루었으니, 더욱 그 은혜를 감사하며 겸손해야 했는데! 그렇질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조금만 힘이 생기고, 조금만 됐다 싶으면 교만해져서 목이 뻣뻣해집니다. 그리고는 마치 자기 힘으로 된 줄로 착각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의 선물인 교만으로 넘어지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예배 생활을 등한히 함으로 교만해졌습니다. 5절입니다. 대하 26:5 →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웃시야가 스가랴의 지도를 받을 때는 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여기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은, ‘예배하는 삶에 열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웃시야는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웃시야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지속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웃시야가 왜 하나님을 잘 찾지 않고,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되었을까요? 한마디로 너무 잘 나갔기 때문입니다. 잘 나가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요? 잘 나가므로 너무 바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을 망각하게 되고, 자기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런 ‘교만한 생각’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돌이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교만한 자는 어떤 짓을 합니까? 교만의 특징은 ‘무시’입니다. 교만은 ‘절대가치를 무시’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릇된 행동을 합니다. 무엇을 무시할까요?
⑴ 예배를 무시합니다. 웃시야가 교만함으로 저지른 죄악은, 제사장과 선지자만의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분향은!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직무였습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교만하여 자기가 직접 집례하려고 했습니다. 대하 26:16 →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그러자 제사장들이 제재하고 나섭니다. 17~18절입니다. 대하 26:17~18 →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자! 이런 경고를 받았으면 곧바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하는데, 웃시야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오히려 화를 내며 계속하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은 다 각각 그 역할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분에 한하여 책임 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하면 그 영역을 침범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냥 두시질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를 귀중히 여기고, 구별된 직분을 귀중히 여기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⑵ 책망을 무시합니다. 웃시야가 성전으로 들어가 자신이 직접 분향을 시도할 때 ‘아사랴’ 제사장이 웃시야를 책망합니다. 하지만 웃시야는 그 책망을 무시합니다. 19절입니다. 대하 26:19a →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웃시야가 영성이 살아 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면 그 책망을 듣고 돌이켰을 텐데, 웃시야는 교만하여 그 책망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즉석에서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대하 26:19b →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한센병, 즉 나병에 걸리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버림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천하의 웃시야 왕 조차도 왕위에서 곧바로 쫓겨나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말씀에 찔림이 있거나 거슬리는 말로 들리면, 제발 사람의 말로만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열린 귀가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웃시야의 말년과 우리를 향한 권고
결국, 예배를 무시하고 제사장의 책망을 무시한 웃시야 왕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웃시야는 1) 나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2) 왕권이 박탈되었습니다. 3) 별궁으로 유배당했습니다. 4) 죽어서도 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① 건강을 잃었습니다. ② 권력도 잃었습니다. ③ 인간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④ 죽어서도 예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⑤ 다시는 예배드릴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네! 교만하면,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말년은 ‘격리와 고립’이었습니다. 시작은 화려했으나 끝은 쓸쓸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 “그러면! 너의 인생의 끝은 어떠하겠느냐?” 네!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합니다. 은혜로 시작했다면, 끝도 은혜여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 영적으로 겸손한 성도들이 되셔서,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을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는 말씀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혹 나 자신 또한 강성해져서 공동체의 경고나 하나님의 멈춤 신호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자리와 경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최근 내가 넘보거나 혼동했던 경계가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나눠봅시다.
3. 은혜의 수단과 회복의 통로인 - 말씀, 기도, 예배, 찬양, 묵상, 나눔 - 중 최근 가장 약해진 통로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브라가 골짜기를 누리는 세 가지 원리! (대하 20:20∼30)
오늘의 주인공은 35세에 유다의 4번째 왕이 된 ‘여호사밧’입니다. 그는 25년 동안 유다를 다스리면서 나라를 견고히 하고 평화를 이룩했습니다. 그래서 남 왕국 유다의 스무 명 왕 중에서, 히스기야(13번째 왕) 다음으로 위대한 왕으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 족속이 연합하여,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남 왕국 유다를 쳐들어온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대개 이럴 때 당황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왜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기지?”하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다가 원망과 불평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능력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시험과 위기의 때를 → ① 내 믿음을 키우고 ② 하나님을 체험하고 ③ 간증이 있는 신앙으로 바꾸어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위기를 승리와 평화의 때로 만들길 원하십니다.
네! 이런 승리와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적용해야 할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이 원리를 마음에 새겨 시험의 때,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기도의 원리
말씀드린 대로, ‘모압’과 ‘암몬’과 ‘마온’ 3개국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두려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과 군대로는 3개국 연합군과 싸워서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여호사밧은 온 나라에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뜰 앞에 모여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대하 20:3~4 →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그렇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올 때 여호사밧이 행한 첫 번째 전쟁 준비는 바로 ‘기도’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준비한다고 하면, 무기를 챙기고 군사를 모으는 것인데, 여호사밧 왕은 ‘기도’로 전쟁 준비를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도’는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로 바꾸는 최고의 방법이요 원리임을 여호사밧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가 닥쳐오고 시련이 몰려오면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통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찾아갈 분이 따로 계십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녀의 신분으로서 하나님께 당당히 요청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네! 기도는 시험의 때,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도록 명한 후, 자신도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6절부터 12절에 나오는데 두 절만 살펴보겠습니다. 대하 20:9 →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대하 20:12b →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우리의 힘으로는 원수를 대적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마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오니 들어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뭐라고 응답하셨습니까? 대하 20:15b →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네! 기도하니,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처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들 모두, 우리에겐 ‘기도’라는 강력한 방법과 원리가 있음을 잘 알고, 이것을 사용하여 인생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찬양의 원리
두 번째,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바꾸는 ‘찬양’이라는 방법과 원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이 원수를 물리치기 위하여 사용한 두 번째 원리는 ‘찬양’이었습니다. 대하 20:19 →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21절도 보겠습니다. 대하 20:21 →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네! ‘찬양’하였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22~24절입니다. 대하 20:22~24 →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대신 싸우셨고, 연합군끼리 싸웠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사밧은 ‘기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무기가 ‘찬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찬양대를 앞세운 여호사밧의 군대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사실 군대는 한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적군들이 서로 쳐 죽여서 그야말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일방적으로 승리했습니다. 찬양은!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 됨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적군이 남긴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전리품을 챙기는 데만 3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제4일째 되는 날, 한 골짜기에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송축합니다. 대하 20:26 →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네! 여기 “브라가”라는 말은 → “송축”이라는 뜻입니다. 이 ‘송축’이라는 말은 = “경사를 기리고 축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한 골짜기였던 곳이 “브라가 골짜기” 즉, “송축의 골짜기”가 된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승리를 감사하고 축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① 힘드십니까? 어려우십니까? 답답하십니까? 그렇다면 찬송가를 펴시고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② 위기와 시련이 닥쳐왔습니까? 그래서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③ 병들어 아프십니까? 낙심하고 지쳤습니까? 그렇다면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 찬양에는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있습니다.
‘찬양은 곡조가 붙은 기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큰 문제와 장기적인 어려움에 처하다 보면, 기도할 힘도 의욕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 찬양을 하면 기도할 힘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늘의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친히 일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바꾸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3. 감사의 원리
마지막으로,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이 사용한 방법과 원리는 바로 ‘감사’입니다. 네! 시험의 때, 위기의 때를 승리의 기회로 바꾸는 힘이 ‘감사’에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수많은 무기로 무장한 적군들이 앞에 진을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라’고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감사’를 좋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찬양대를 전쟁 마당의 가장 앞자리에 세워서,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무엇이었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21절입니다. 대하 20:21c →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전쟁은 시작도 안 했고, 작은 승리라도 한 것이 아닌데, 감사부터 올리고 있습니다. 네! 여기에 승리의 비밀이 있습니다. 싸우기도 전에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은, 이미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감사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면 보통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일이 잘돼서 감사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이런 감사는 ‘나중 감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나중 감사’는 믿음이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진짜 감사는! 이렇게 일이 다 끝난 후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드리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를 일러 ‘미리 감사’라고 합니다. 이런 ‘미리 감사’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감사를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이런 ‘미리 감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기뻐하시고 더 크고 놀라운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미리 감사’는 ‘나중 감사’보다, 더 엄청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힘과 능력입니까? → ① 인생에 닥쳐오는 모든 위기를 극복할 힘 ② 어려움이나 문제를 능히 극복할 힘 ③ 그 어떤 원수도, 그 어떤 공격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감사 신앙 특히 ‘미리 감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미리 감사’ 신앙으로 무장한다면,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 어떤 어려움도 위기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감사보다 위대한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 ‘기도’와 ‘찬송’과 ‘감사’의 신앙으로 무장해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전도가 무거운 ‘의무감’으로만 남지 않도록, ‘와 보라!’고 선포할 대상과 ‘새생명 전도축제’에 임하는 나의 계획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시험과 위기의 때를 ① 내 믿음을 키우고 ② 하나님을 체험하고 ③ 간증이 있는 신앙으로 바꾸어가도록, 우리에게 주신 3가지 영적 무기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3가지 영적 무기 중에서 내가 약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더욱 예리하고 강력한 무기가 되도록 발전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주님의 평안을 누렸던 아사 왕의 지혜! (대하 14:1∼7)
※ 지붕을 뚫는 친구의 믿음, 생명을 향한 우리의 사명 (막 2:1∼12)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내 친구 가운데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의 이름과 그 얼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나는 사람이 떠올랐습니까?> 그러면! 중풍병자와 네 친구 이야기와 연관 지은 ‘세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 첫째, 나의 친구가 처한 ‘영적인 중풍’ 상태를 나는 얼마나 절박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둘째, 그 친구를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과연 나는 ‘지붕을 뚫을’ 만큼의 믿음과 행동력을 가지고 있는가? 셋째, 나의 전도로 그 친구에게 임할 전인적인 구원과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일에 대한 기대가 있는가? 이 질문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생명을 살리는 귀한 ‘친구 전도의 사명자’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우정, 생명을 향한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막 2:3∼4 →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어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병자가 아닌 그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친구의 절박한 상황을 외면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바로 이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우정’과 ‘생명을 향한 절박함’입니다.
둘째, 지붕을 뚫는 행동하는 믿음, 한계를 넘어서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막 2:4∼5a →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친구들은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기상천외한 방법 즉 ‘지붕을 뚫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과감하고 헌신적인 ‘행동하는 믿음’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지붕을 뚫는’ 것과 같은 용기와 헌신입니다.
셋째, 친구에게 임하는 전인적인 구원과 하나님께 돌려지는 영광을 봅시다. 막 2:5b,10c∼12 →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가 치유 받은 순서를 보면! 먼저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은 후에, 이어서 육체의 치유가 뒤따랐습니다. 중풍병자는 완전히 회복되어 자신의 상을 들고 걸어갔고, 이 모든 것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외쳤습니다.
한 영혼의 온전한 구원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을 넘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분을 찬양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킴을 믿고, 이에 헌신하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남 왕국 유다의 세 번째 왕이 되어, 41년간 통치한 ‘아사’ 왕입니다. 이 아사 왕의 일대기는 역대하 14~16장에 걸쳐서 나오는데,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사 왕의 초창기 삶의 모습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아사 왕은 41년이나 되는 긴 통치 기간 중, 초반부에는 주님이 보시기에 ‘선과 정직’을 행하며 백성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그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즉 인생의 어느 단계나 시점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은 무엇인지?’ 그 지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아사 왕의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핵심 메시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 마음의 ‘우상’을 제거하는 영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대하 14:2∼3 →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그렇습니다. 아사 왕의 통치 초기에 가장 먼저 행했던 일은!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우상들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겐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된 우상숭배는 없지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며,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는 ‘영적인 우상’들이 있습니다.
30∼50대 성도님들께는 ‘SNS의 좋아요’에 일희일비하거나, ‘커리어를 쌓는 성공’에 모든 정열을 쏟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혹은 ‘완벽한 육아’에 매몰되어 성경이나 교회보다 맘 카페의 의견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와 판단의 기준이 되는 등, 우상 같지 않은 우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멈춰 서서 나의 내면을 스스로 살펴봐야 합니다. 나를 조급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마음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어 그런 것인가? 스스로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60대 이상 성도님들께는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경험과 연륜’ 자체를 맹신하거나, 자녀와 손주에 대한 ‘지나친 염려’로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리거나, 안정된 삶의 ‘편안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우선되는 것이 영적인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우상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아사 왕이 단호하게 우상들을 제거했듯, 우리 마음과 삶에 깊이 뿌리내린 우상들을 걷어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욱 순전하고 자유로운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함이 필요합니다.
대하 14:4 →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아사 왕은 개인적인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유다 백성 전체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율법과 명령을 따르도록 명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고, 수많은 가치관들이 혼재한 시대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변치 않는 ‘기준’과 ‘길잡이’가 꼭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아사 왕의 지침은! 단지 한 시대의 왕의 명령을 넘어, 삶의 기준이 흔들릴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하고 견고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제시한 것입니다.
30∼50대 성도님들은, 직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육아와 자녀 교육,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세상의 유행이나 성공 공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내비게이션’이자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쁜 일상 중에도, 매일 매일 말씀 한 구절이라도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60대 이상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름 삶의 풍파를 겪으며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다 있지만, 궁극적으로 흔들림 없는 삶의 ‘나침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임을 다시금 상기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참된 평안과 위로를 찾고, 자녀와 손주들에게도 말로만이 아닌, 실제의 삶 속에서 말씀을 따라 사는 믿음의 본을 보여주어, 귀한 영적인 유산을 남기는 사명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평안의 때’를 ‘믿음의 성을 견고히 쌓는 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하 14:6∼7 →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그들이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아사 왕과 유다 백성이 주님 보시기에 선과 정직을 행하고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놀라운 ‘평안’을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사 왕이 그 ‘평안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나라의 내실을 다지고 견고한 성읍을 건축하는 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의 때를 쉼과 휴식의 때가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30∼50대 성도님들은 직장이나 가정에서 잠깐의 ‘숨통’이 트이거나, 작은 ‘여유’가 생겼을 때, 이를 단지 피로를 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적 성장을 위한 ‘투자’의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 신앙 서적을 읽거나, 성경 공부에 참여하여 영적 내공을 쌓는다면, 앞으로 다가올 인생의 또 다른 도전에 대비할 ‘믿음의 성’을 든든히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60대 이상 성도님들께는! 이제 삶의 많은 짐을 내려놓고 ‘평안과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시기로 접어 들어갈 것입니다. 이 귀한 시간을 단순히 안락함에 머무르지 말고, 영적인 헌신과 섬김의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믿음의 다음 세대들을 격려하고 이끌어주며, 그들에게 귀한 ‘영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지혜와 경험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평안의 때를 ‘믿음의 성을 견고히 쌓는 때’로 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크고 작은 ‘평안의 시간’들을 영적인 성숙과 공동체를 세우는데 투자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아사 왕의 고백처럼 대하 14:7 →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삶에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사 왕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진정한 ‘평안’과 ‘형통’으로 이끄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0대의 열정으로, 40대의 책임감으로, 50대의 지혜로, 그리고 60대의 연륜으로, 70대의 너그러움으로, 80대의 영성으로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내가 전도해야 할 ‘친구’에 대해서 서로 나누고, 그 열매를 위하여 함께 중보합시다.
2. 내 삶에서 버리고 제거해야 할 나의 우상에 대해서, 그리고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하여 다시 시작해야 할 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30대의 열정, 40대의 책임감, 50대의 지혜, 60대의 연륜, 그리고 70대의 너그러움과 평안, 80대의 영성과 감사까지, 삶의 각 단계마다 우리는 소중한 덕목들을 쌓아갑니다. 지금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 거나, 혹은 지금부터 더욱 깊이 가꾸고 싶은 덕목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제목: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있는 교회! (대하 7:11∼16)
1. 먼저 믿은 자로서, 가정 구원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자. (행 16:31∼32)
성도 여러분! 행 16:31 말씀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잘 알고 익숙한 말씀이죠? 그런데 이 말씀은, 한편으론 ▸‘나로 인해 우리 가정이 다 구원받겠구나!’ 하는 큰 ‘축복의 말씀’으로 들리고, 다른 한편으론 ▸‘먼저 믿은 나에게 주어진 영적인 책임’의 말씀으로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행 10장의 백부장 고넬료는 집안 사람들과 친척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까지 다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모이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충만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 10:43∼44 →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 16장의 빌립보 간수의 집이 구원받는 과정도 보십시다. 행 16:31∼34 →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그렇습니다. 고넬료도 간수장도! 자기 가정의 모든 식구들이 복음을 듣고 믿도록! 말씀의 자리 은혜의 자리로 이끄는 ‘책임과 사명’을 잘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나 한 사람이 믿으면 가족이 자동으로 구원된다”는 보장이 아니라, ▸가족이 복음을 듣고 믿음에 응답하도록 하나님의 은혜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명적 초대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은 가정의 첫 번째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나 자신이 먼저 믿음을 가지고 굳게 서고, 말씀과 기도로 식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갈 때, 하나님께서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은혜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있는 성전
솔로몬이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건축물을 세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과 소망이 담긴 ‘거룩한 공간’이었습니다. 성전 봉헌식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중요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핵심은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하 7:16 →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그런데 이 약속은! 과거 솔로몬 당시의 ‘성전’을 향해 주신 말씀만이 아닌,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주신 것이고 또한,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 ‘각 개인’에게도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있는’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며, 또한, 우리 개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성’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성전을 짓는데 솔로몬과 백성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성전을 거룩하게 하시며, 그곳에 당신의 눈과 마음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 인간의 공로나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특정한 공간에 계시거나 갇혀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당신의 백성과 소통하며 만나주시는 특별한 장소를 허락하셨습니다. 즉, 구약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이었고,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가 바로 그곳이며 또한,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의 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건물로서의 교회도, 성도의 모임인 공동체도, 우리 각 개인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겸손히 우리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며, 적극적인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계실만한 신령한 개인과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내가 먼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 가정이 구원받는다’는 축복의 약속도 생각해야 하지만, 내가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자칫 먼저 믿는 내가 잘못 믿으면, 우리 가정의 구원의 문을 닫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무조건적인 은혜이지만, 그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을 넘어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①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함’과 ② ‘기도’입니다.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가치관, 탐욕, 이기심 개인주의와 같은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적극적인 회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머무는 개인과 영적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기준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머무시도록 내가 떠나야 할 ‘악한 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③ 위선이 사라지고 진정성이 살아있는 공동체와 개인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하신 시선(視線)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눈이 교회에 머문다는 말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내면과 공동체의 민낯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에 대한 ‘실제적 변화의 내용’은 이런 것들입니다.
(목사와 리더)▶ 투명하고 책임감 있는 리더십 : 지도자는 하나님의 시선 아래에서 모든 행정과 의사결정에 있어서, 더욱 투명하고 윤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재정 사용의 투명성’을 유지해야 하고, 지도력의 행사나 동역자들과 성도들을 대할 때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내려놓고’ 인격적으로 대우해서 진정한 권위를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소그룹 공동체) ▶ 가면을 벗은 관계 : 성도들은 서로에게 완벽한 모습만을 보이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누며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에만, 교만과 비판은 줄어들고, 서로를 향한 긍휼과 이해를 깊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 ▶ 표리부동함이 없는 삶 : 주일 예배 때의 모습과 주중의 삶의 괴리가 줄어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 - 모든 곳에 함께하심을 생각하며, 직장, 가정, 사회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④ 기도가 살아있는 성도, 기도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중요하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사람, 기도하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15절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하 7:15 →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그렇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제사이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소통 통로입니다. 이에 대한 ‘실제적 변화의 내용’은 이런 것들입니다.
▶ 깊이 있는 기도 공동체 : 교회와 성도가 고난과 위기를 만났을 때, 인간적인 해결책만을 찾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하 7:14b →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그러니까 문제 해결의 근원적 열쇠는 ‘기도하는 것’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자세로 간구할 때!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게 될 줄로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공감과 돌봄의 확장 :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성도들에 대해서 교회와 소그룹 공동체가 더 깊이 공감하고 실질적인 돌봄을 제공해야 합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쉽고 평안한 때는 없었지만, 요즘들어 특별히 삶의 무게와 어려움을 크게 느끼는 성도들이 많아졌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럴 때, 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자는 말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당신과 똑같은 고민과 문제 속에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 그에게 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공감공동체’임을 확신시켜 주면! 스스로 힘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가정사역’과 더불어 ‘생애주기별 교육’에 힘쓰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성을 강화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 역경을 통한 성장과 성숙 : 위기와 실패를 단순히 부정적인 경험으로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영적인 배움의 기회로 삼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견고해지고 영적으로 성숙한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단지 ‘심리적 위안’이나 ‘종교적 의식’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영적인 동력’임을 우리는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나눔과 묵상
1. ‘나 한 사람이 믿으면 가족이 자동으로 구원된다’는 보장이 아니라, 가족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나의 가족을 위한 구체적인 전도 계획이나 기도의 제목을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머무는 개인, 소그룹 공동체, 교회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점은 무엇이 라고 생각하는지 나눠봅시다.
3. ‘깊이 있는 기도 공동체’와 ‘공감과 돌봄의 확장’을 통해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따라, 중보기도나 실질적인 돌봄을 실천했던 경험이나 계획을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