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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김성윤
2023-11-04
조회 228

추수는 축복과 심판입니다. (마 3:10∼12)

할렐루야!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면 행복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풍성한 감사로! ‘행복’도 풍성한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감사는 ‘행복’입니다.

지난 목요일(2일) ‘다니엘기도회’ 둘째 날 강사로, 고등과학원 ‘김인강’ 교수님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유년 시절’은 참으로 처절했습니다. 충남 논산의 시골 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인강 교수는,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가난하여 치료 시기를 놓쳐 일어설 수도,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조차 술만 마시면 “저 쓸데없는 놈 갖다버리라!”라는 말을 해서, 우울한 시절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까지 거절당해서! 누구에게도, 어디로부터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는데! 그런 가운데도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머니의 손길이 있었기에, 죽고 싶었던 수 많은 날들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공부하는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재활원 선생님의 지도로 초등과정을 끝내고,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대학교 3학년 초, 목발을 짚고 무거운 가방을 멘 채 너무 많이 걷다 보니, 갈비뼈와 폐가 부딪쳐 폐에 큰 구멍이 났습니다. 그는 햇빛도 안 드는 반지하 단칸방에 누워서 거의 1년을 보냈고, 다시 목발을 짚고 겨우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그때의 느낌과 감사를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가을 하늘이 이렇게 투명하게 푸르렀던가?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황금 햇살이 이렇게 눈이 부셨던가? 뺨 위를 스치는 공기가 이렇게 가슴이 툭 터지도록 시원했던가?”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그때 가슴으로 체득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감사의 제목들이 참 많다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첫째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했던 부모님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분들의 가난 때문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한 그분들이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일찍부터 독립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자신이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더하기 빼기 등 대부분의 공부를 혼자 깨우쳤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불리해 보이는 많은 것들을 좋은 것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이 참 진리임을 알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여건과 환경이 좋아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세례요한이 외친 말씀 중에, 우리들의 심령을 울려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알곡과 쭉정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마 3:12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피시고 심판하실 때 아주 단순하게 구분하십니다. 오른편과 왼편, 양과 염소, 알곡과 쭉정이로 구분하십니다. 이 알곡과 쭉정이는 추수하는 날에 갈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2. 추수는 ‘심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추수 때는 ‘심판의 날’입니다. 추수가 무엇입니까?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것입니다.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가르는 것입니다. ‘창고에 들일 것’과 ‘아궁이에 던져질 것’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는 ‘심판’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 너무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9:27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가을에 추수하듯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생이 마쳐지는 날! 혹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추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추수는 말씀드린 대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분리하는 것’입니다. ‘가르는 것’입니다.

마 25:31∼33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네! 우리 성도들은 인생의 추수 때에 모두 다, 양의 편, 오른편에 속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는 상습적으로 도박을 했습니다. 도박에 중독되어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자기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발걸음은 또 경마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차를 하고 경마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렸을 적에 들었던 ‘찬송 소리’였습니다.

순간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증오심’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이런 무례한 사람들! 자기네 교회에서나 찬송가를 부를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경마장까지 와서 찬송을 부르고 소란을 떨어!” 욕이라도 한마디 해 주려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둘러서서 피켓을 들고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욕을 하려고 하는데! 피켓에 적혀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히브리서 9:27의 말씀이었습니다.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성경 말씀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에, 이 말씀이 칼처럼 꽂혔습니다. 자기를 향하여 “너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될 줄을 모르느냐?” 하는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자기 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즉시 경마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나를 이 죄악의 사슬에서 건져주세요.” 그는 용기를 내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판의 말씀에 찔림 받고, 자기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반드시 ‘심판대’에 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추수감사절’에 ‘영혼의 추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추수는 ‘심판’입니다. 우리 모두 다 ‘알곡’ 신자로, ‘양’으로, 그리고 ‘오른편’에 속한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추수는 ‘축복’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축복’이 임하는 절기입니다. 농부에게 가장 큰 날은 씨를 뿌리거나 심는 날이 아닙니다. 김매는 날도 아닙니다. 농약을 뿌리는 날도 아닙니다. 추수하는 날이 가장 큰 날입니다. 추수는 ‘축복’입니다. 일 년 동안 일한 ‘수고의 결과’를 보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추수의 날은! 가장 복된 날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에게, 인생의 결실과 풍성한 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사랑받는 것’이 축복일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것’이 축복일까요? 네! 둘 다 축복입니다. 그러나 사랑받는 축복은 ‘어린이의 축복’이고, 사랑하는 축복은 ‘어른스러운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행 20:35 →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만일 대통령이 ‘나를 기억하고’ 선물을 보내주었다면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내 사랑을 받고 싶다고’ 우리 집에 오신다고 하여, 내가 대통령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이 얼마나 더 큰 축복일까요?

추수감사절은 일 년 중에 하나님을 가장 크게 사랑할 수 있는 절기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사랑이 있다고 하셨는데! 추수감사절은 일 년 중에 가장 크게 헌금을 드리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11월 한 달이 감사의 달입니다. 감사로 하나님을 크게 사랑하여 365일 감사의 기적을 깜짝 놀라게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추수는 ‘영혼 구원’입니다.

추수는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를 가르는 절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추수하지 않는 농부는 농부가 아닌 것처럼, 영혼을 추수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추수 중에 추수는 ‘영혼 추수’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번 ‘교회의 본질’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요 전도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로 드리고, 다음 주일은 영혼을 추수하는 ‘새생명 전도축제일’로 삼았습니다. 이 시간 모두 마음속으로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에는 꼭 한 영혼이라도 추수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기대하시는 열매는 바로 사람 열매입니다. 잠 11:30 →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사람의 영혼보다 더 귀한 열매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잎도 필요합니다. 또한, 꽃의 향기로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직 남는 것과, 또한 생명을 확장시켜 가는 것은 ‘열매’ 밖에 없습니다. 전도의 열매, 사람 열매,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오늘 죽어도 알곡 신자로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만일 쭉정이의 요소가 있다면 그 모습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설 결단을 나눠봅시다.

 

2. 사랑받는 축복은 어린아이의 축복이고, 사랑하는 축복은 어른스러운 축복입니다. 나의 모습은 어떤지? 받은 은혜와 결심을 나눠봅시다.

 

3. 다음 주일은 영혼을 추수하는 즐거운 날 초청일입니다. 나의 손에는 영혼의 열매가 들려있는지? 나눠보고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김성윤
2023-10-28
조회 193

탐욕에 의한 불의와 폭력의 결과 (왕상 21:1∼10, 18∼19)


지난 주일 살펴본 대로 패배의 쓴잔을 마신 아합 왕이었지만,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이 이스르엘 평원에 있는 자기의 ‘별궁’엘 갔다가, 궁 가까이에 잘 가꾸어진 포도밭을 보게 됩니다. 그 포도밭이 얼마나 좋아 보이던지, 욕심이 난 아합 왕은 포도밭 주인 ‘나봇’을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합니다. 왕상 21:2 → “그대의 포도원이 나의 궁 가까이에 있으니, 나에게 넘기도록 하시오. 나는 그것을 채소밭(정원)으로 만들려고 하오. 내가 그것 대신에 더 좋은 포도원을 하나 주겠소. 그대가 원하면, 그 값을 돈으로 계산하여 줄 수도 있소.”

하지만 나봇은 아합에게 대답합니다. 왕상 21:3 → “제가 조상의 유산을 임금님께 드리는 일은, 주님께서 금하시는 불경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조상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나봇은 포도원 양도하기를 거절합니다. 아합은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왕궁으로 돌아와서는,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이세벨이 묻습니다. 왕상 21:5 → “무슨 일로 그렇게 마음이 상하여 음식까지 드시지 않습니까?”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은데 그가 내 제안을 거절해서 그렇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조금도 신앙적인 차원에서의 망설임이 없이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를 성 바깥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일어나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리로 내려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아합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상 21:19 → “아합! 네가 탐욕으로 살인을 하고, 재산을 빼앗았느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예후’를 통해서 아합 가문을 심판하셨는데! 그 심판은 아주 철저했습니다. ① 아합은 아람과의 전투 도중,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다가 저녁에 전사합니다. 얼핏보면 전쟁 중에 우연히 일어난 일 같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 22:37∼38 →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그렇습니다. 아합이 죽고, 그 피를 개들이 핥은 것은! 하나님 말씀의 성취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② 아합 왕의 아들 ‘요람’이 뒤를 이어 9대 왕이 되었지만 ‘예후’가 그를 바로 죽입니다.(왕하 9:24~25) ③ 그리고 ‘예후’는 10대 왕이 되어,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죽입니다.(왕하 9:33) ④ 또 아합의 아들들 칠십 명을 교육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렇게 시행되었습니다.(왕하 10:6) 결국 아합과 그 집안 모든 혈족은 전부 예후의 손에 의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나봇

아합 왕이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 것을 제의했을 때 나봇이 그것을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레 25:23 →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그러니까 나봇에게 있어서 포도원이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습니다. 나봇에게 포도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이요, 또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기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잘 가꾸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나봇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포도원을 잘 가꾸고 그 소산을 먹을 뿐이지, 그것을 사고파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포도원은 예배드리는 ‘성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봇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자기 가정에 주신 ‘기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전통’을 생명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그저 돈 많이 준다고 팔아넘기길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해보면! 나봇은 아합 왕에게 포도원을 비싸게 팔아 큰돈을 가지고 여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편안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결국 나봇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지키다가 죽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얼핏 보면 개죽음이고 불행한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이 땅의 기준으로만 평가할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와 아들들은 이 땅에서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큰 위로와 상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봇이 포도원을 팔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거룩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히 11:26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런 나봇의 삶은 우리에게 도전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의 평안과 행복만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도전과 유혹을 뿌리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탐욕에 빠져 불의와 폭력을 저지른 아합 왕

아합은 왕으로서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왕궁과 별궁, 아름다운 정원과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아합이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나봇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보았을 때, 그것을 빼앗아 가지려는 마음보다는, 내 별궁 옆에 이렇게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고 있는 나봇에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에게는 그런 감사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미 내게 있는 것에 대한 ‘만족과 감사’가 없으니, 끝없이!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아가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메마른 심령’은 참으로 ‘불행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없는 심령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길이 없기에, 늘 헛헛한 마음, 갈증 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많이 받았고,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이! 말년을 실패로 마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주신 것! 있는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추악한 탐욕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솔로몬이나 아합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들과 다름없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실패의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의지적인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감사할 거리를 찾아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 1:15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갈 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탐욕이 생길 때는! 그 탐욕이 나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그 탐욕이 크게 자라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합니다.

탐욕을 어떻게 자를 수 있습니까? 말씀으로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합 왕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성령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의 신 바알과 아세라를 좇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의 사람, 말씀 따라 사는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에 예민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오늘 말씀이 주는 교훈은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열매(심판)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합 가문을 심판하실 때, 심은 대로 심판하셨습니다. 시편 62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62:12 →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말씀을 했습니다. 갈 6:7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 속담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이 악하게 행했던 그대로! 아합에게 돌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기억하십시다. ‘코람 데오!(Coram Deo)’란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말인데! 여기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담대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은 피하고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이고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말씀대로 살아 가십시다. 그리고 탐욕에 눈이 멀어 불의를 행하고, 폭력이라도 써서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 ⇨ 언제나! 무엇에든지! 감사하는 사람이 되고, 말씀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봇에게 포도원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꼭 지키고 계승시켜가야 할 신앙의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오늘 말씀을 통해 똑똑히 보게 하셨습니다. 욕심과 감사!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3. 코람 데오(Coram Deo)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의 라틴어로,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신앙인으로서 느낀 ‘위로와 힘’ 혹은 ‘거룩한 두려움’이 생겼다면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3-10-21
조회 195

헛된 신을 향하여 기도하시겠습니까? (왕상 18:30∼46)


오늘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이었던 ‘아합’과 그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동했던 ‘엘리야’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약 208년간 존속했고, 19명의 왕들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한결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일 악한 왕은 ‘아합’이었습니다.

 

1.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원흉 - 아합 왕

성경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왕상 16:30 →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아합보다 더 악한 왕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합이 이렇게 악하고 못된 왕, 그런 인생이 되었을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왕상 21:25입니다. →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한마디로 아내 이세벨의 농간에 빠져,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합에게 전했습니다. 왕상 17:1 →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 말이 있고 난 뒤 정말 3년 반 동안 이스라엘 전역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가뭄으로 온 땅이 메마르고,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그 땅에 비가 오지 않는 이유가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신전을 곳곳에 세우고, 아세라 여신상을 세워, 백성들을 타락게 한 징벌로,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닫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이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다시 만났을 때, 그가 한 첫마디를 보십시오. 왕상 18:17 →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성도 여러분! 지금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원흉입니까? 책임을 돌리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 선지자는 정답을 말해 줍니다. 왕상 18:18 → “내가(엘리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아합)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이것은 엘리야의 편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단이고,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인 아합왕이 이렇게 악하게 살았지만, 그 시대의 백성들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성경 역사를 살펴보면, 왕이 타락했을 때 그 백성들도 함께 타락했습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이 그만큼 큰 것입니다. 시대가 악할 때 그 대세를 거슬러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세상에서 진실한 성도로 살고자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현실 부적응자’로 매도될 때가 많아 자괴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숙한 타협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현실도피자가 되거나, 혹은 능숙한 타협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2. 어떤 신이 진짜 신인지 결판을 보기로 제안한 ‘엘리야’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왕상 18:19 →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어떤 신이 진짜 신인지, 누가 믿는 신이 진짜 신인지 결판을 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의 제안을 받아들여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불러 갈멜산 꼭대기로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 맞짱 대결을 벌이는 현장에는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 뿐 아니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21절입니다. 왕상 18:21 →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엘리야는 지금 이스라엘이 망가진 것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백성들이 영적으로 깨어나고 정신을 차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왕상 18:21b →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거 보세요! 여호수아 시대에는, 그의 촉구 앞에 백성들이 바로 “우리도 여호와만을 섬기겠나이다” 대답했지만, 아합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의 안타까운 호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만큼 더 타락했고, 완악해졌고, 신앙의 병이 깊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 여호와의 선지자는 아무도 없고 나만 혼자 남았다. 하지만! 저 바알의 선지자는 무려 사백오십 명이나 된다. 제물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각자의 신의 이름을 불러, 불로서 응답하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여기자!”

이런 엘리야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왕상 18:24 →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백성들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 말이 옳도다’ 드디어 속 시원한 대답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백성들이 드디어 엘리야의 말에 동의 한 것입니다.

 

3. 응답이 없는 헛된 신과, 불로 응답하신 여호와 하나님

드디어 엘리야의 제안대로 엘리야 혼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칼로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하여 피를 내면서까지 부르짖었지만, 여전히 바알 신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의 열심이나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바알은 죽은 신! 헛된 신! 이기 때문에, 응답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달리, 엘리야는 혼자서 “여호와여!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기도하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에 가득 찬 물까지 말려버렸습니다. 할렐루야! 마침내 거짓 선지자들이 섬기는 바알 신은 죽은 신이고, 엘리야가 섬기는 하나님이야말로 살아계신 진짜 신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거기 모여 있던 백성들은 그제서야 이렇게 고백합니다. 왕상 18:39 →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엘리야는 그 백성들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왕상 18:40 →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성도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450:1로 싸워야 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불로써 임하여 엘리야가 승리케 하셨습니다. 이 승리는 엘리야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위대하신 결과입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한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어려운 세상이지만! 하나님 편에 서서 살고자 하는 자를, 외롭게 버려두거나 패하게 하지 않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4.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엘리야가 기도한 ‘기도의 내용’을 주목해 보고, 우리 또한 그런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왕상 18:36∼37 →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①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②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③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네! 엘리야는 세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으로 섬겨지고, 둘째, 내가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고, 셋째, 지금도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고 구원케 하옵소서! 이런 기도입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새생명 전도축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원하심과 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릴 일을 해야 합니다. 전도에 최선을 다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는 일에 앞장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주인을 택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리고 오늘 엘리야가,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양다리 걸치기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선택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밝혔습니다. 수 24:15c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엘리야’도! 분명하게 밝힙니다. 왕상 18:24 →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세상에 의해서 정복당했습 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나눠봅시다.

 

2. 엘리야는 36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기도했습니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진실한 성도로 인정받기 위한 자신의 결단을 나눠봅시다.

 

3.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c)했고, ‘엘리야’도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왕상 18:24) 했습니다. 자신과 가정의 신앙적 결단에 대해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3-10-14
조회 245

두 마음을 품은 사람 – 아사 (왕상 15:9~24)

 

오늘의 말씀의 주인공 ‘아사 왕’은 남왕국 ‘유다의 세 번째 왕’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열왕기서에는 짧게 16절로 언급되어 있지만, 역대하에는 14장부터 16장까지 무려 세 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많은 부분에서 역대기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아무튼 길든 짧든 ‘아사 왕’이 언급된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한 신실한 믿음의 사람 – 아사 왕

먼저, 역대기서의 세 장중 앞선 두 장인 역대하 14장과 15장에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 아사왕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고, 이방 우상들을 없애버리고,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잃었던 신앙을 다시 회복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친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자, 그는 그 우상을 찍어 가루로 만든 다음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버리고, 그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폐해버렸습니다. 대하 15:16 →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의 태후의 자리를 폐하고 그의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이처럼 아사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라를 다스리자,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5년 동안 나라가 평안했습니다. 한마디로 아사 왕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 사람의 손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한 – 아사 왕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아사 왕은 그동안 보여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6년이 되는 해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남왕국 유다와 국경지대인 ‘라마’에 성을 쌓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라마에 성을 쌓는 이유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켜가기 위한 고육책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백성들 가운데도 3대 절기 때만 되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인 ‘바아사’에 이르러서는, 아예 백성들의 왕래를 물리적으로 막기 위해서 라마에 성벽을 쌓으려 했던 것입니다.

자! 이러한 상황에서 ‘아사 왕’은 어떻게 했을까요? 하나님께 손 내밀기보다는, 사람에게 손 내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그 윗쪽에 있는 ‘아람 나라’는 서로 조약을 맺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북한이 더 북쪽에 있는 중국이나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남유다의 아사왕은 성전과 궁궐에 있는 금과 은을 다 모아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 북이스라엘과의 조약을 파기하고, 북이스라엘 대신 자기 나라와 조약을 맺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뇌물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뇌물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습니다. 아사왕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아람왕 벤하닷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지방인 단과 납달리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난 것입니다.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되어, 군대를 더는 남쪽 지방인 라마에 주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라마에 성을 쌓는 일을 중단하고 철수했습니다.

남유다 아사 왕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외교적인 노력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북이스라엘 군대가 라마에서 철수함으로 전쟁의 위험은 사라졌고, 이제 가까워진 아람 나라가 북쪽에서 이스라엘을 견제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사 왕’은 상황 분석이 뛰어난 정치가요, 외교적 수완이 좋은 왕처럼 보입니다.

 

3.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심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니’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사왕을 찾아와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아사왕이 보여주었던 신앙적인 행동을 상기시켜줍니다. 과거 아사왕은 구스의 세라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치러 왔을 때, 이런 기도를 드림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대하 14:11 →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결국 아사 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스의 100만 대군을 무찌르고, 엄청난 승리와 전리품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북이스라엘과의 문제는 훨씬 작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사왕은 하나님께 손 내밀기보다는 아람왕 벤하닷의 손을 잡았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일은 하나님 앞에서 망령된 일, 어리석은 일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아사왕은 회개는커녕 아사왕은 오히려 선지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어버렸고, 또한 선지자 편에 서 있는 백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대하 16:10 →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성도 여러분! 사람의 운명이 갈라지는 것은 바로 한순간의 차이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을 내고 폭거를 저지를 때, 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아사왕을 버리지는 아니하시고, 다시 한번 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인내가 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9년째, 그러니까 하나님께 손 내밀기보다 아람 왕께 손 내밀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지 3년 후에 그의 발에 병이 들게 하셨습니다.

 

4. 질병을 통해서 말씀하심

발에 병이 들었다는 것이 어떤 병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 증세는 아주 심했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고난이 있다고 무조건 정죄해서는 안 되겠지만, 고난이 닥칠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고난은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를 찾는 음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네! 이쯤 되면 아사왕은 깨닫고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여전히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하 16:12 →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질병의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들에게 구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하 16:13 → “아사가 왕위에 있은 지 사십일 년 후에 죽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병에 걸린 지 2년 만에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 나라와 조약을 맺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고, 병에 걸렸을 때 의사를 찾아 치료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사왕은 그야말로 ‘영적인 데’에 그 질병의 원인이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를 앞세웠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말년의 아사왕은! 하나님께 손 내밀기보다는 사람에게 손 내미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실패의 원인이고, 비극적인 종말의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께 손 내미는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기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을 유념해 보시기 바랍니다. 습 1:6 → “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손 내미는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당신이 아닌 세상에 손 내미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5. 하나님께 손 내미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손 내미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사람에게 손 내미는 것을 우리는 ‘구걸’이라 하고, 하나님께 손 내미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구걸은 초라한 것이지만, 기도는 거룩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12년 동안이나 피를 쏟는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무 효험도 보지 못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고, 도리어 병은 더 깊어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인이 예수님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에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고 질병은 떠나갔습니다. 할렐루야! 네! 하나님은 당신에게 손 내미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의 손, 치료의 손, 승리의 손을 믿음으로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아사왕처럼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제한된 사람에게 손 내밀지 말고, 완전하신 하나님께 손 내미시기를 바랍니다. 변하는 사람의 손을 붙잡았다가 실망하지 말고, 능력의 손, 권능의 손, 창조의 손, 치료의 손이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고 치료와 회복, 인도하심과 보호, 이끄심과 은혜를 맛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아사 왕과 같이 인생의 초반에는 하나님께 칭찬 듣다가 나중에는 초라한 신앙인이 되고 만 사람들의 예를 성경에서 찾아 나눠봅시다.

 

2. 사람의 운명이 갈라지는 것은 바로 한순간의 차이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하므로 망한 사람들을 성경에서 찾아 나눠봅시다.

 

3.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실리와 vs 믿음 사이에서 두 마음을 품게 될 때, 당신은 어느 쪽의 사람입니까?

김성윤
2023-10-07
조회 217

사람이 겁나 하나님을 버린 못난 사람 (왕상 12:25∼33)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위에 오른 ‘여로보암’입니다. 그는 평범한 가정의 건실한 아들이었습니다. 솔로몬이 밀로 성을 건축할 때, 여로보암은 현장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그의 탁월한 부지런함이 솔로몬의 눈에 띄어 지도자로 발탁됩니다. 왕상 11:28 →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청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더니…”

이렇게 여로보암이 현장 감독자가 되어 보니,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솔로몬 왕에게 진언하며, 백성들을 좀 돌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백성들의 편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언하고 예루살렘에서 다시 공사 현장으로 돌아가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히야’라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여로보암에게 전해집니다. 그 내용은 장차 너는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여로보암은 더욱더 백성들의 편에서 일했고, 솔로몬 왕은 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에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망명합니다. 왕상 11:40 →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사실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을 택하신 이유는, 그의 ‘탁월함’이나 ‘부지런함’ 때문이 아니라, ‘솔로몬의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솔로몬 왕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4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백성들은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애굽으로 망명 갔던 여로보암을 앞세워, 힘들었던 문제를 다시 호소했지만,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사람들의 자문대로 “더 엄격하게 통치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이런 르호보암 왕의 말에, 백성들은 실망합니다. 이후 르호보암이 공사 현장이 잘 돌아가는지 살피기 위해 시찰을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안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르호보암은 현장 감독이었던 아도람을 시켜, 일을 빨리하게 하라고 독려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왕상 12:18 → “르호보암 왕이 역군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엄격하게 감독해서 기강을 잡으려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12지파 중에서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를 제외하고, 10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아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웁니다.

 

1. 불안과 욕심 때문에 언약을 버린 - 여로보암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은, 제일 먼저 ‘세겜’에 수도를 세웁니다. ‘세겜’은 이전에도 이후로도 계속해서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니 북왕국 이스라엘이 시작되면서 나라의 ‘정당성’을 갖기에 적절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여로보암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예배하는 문제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두 왕이 각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신앙적으로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합법적인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통치하는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3대 절기에는 남쪽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에 여로보암은 문제의식을 가집니다.

이렇게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자주 다니다가, 남 유다와 다윗 왕가에 대해 호의를 가지게 될까 봐 걱정합니다. 이런 걱정은 거의 노이로제가 되어, 심지어 이렇게까지 생각합니다. 왕상 12:27 →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나님의 뜻으로 왕위에 오른 여로보암이었지만,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생각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입니다. 왜냐하면! 여로보암은 일찍이 아히야 선지자로부터, 장차 열 지파의 왕이 될 것을 예언을 받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그 왕위를 견고케 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율례와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치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을까요? 그것은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 중심! 자기중심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내 편이시냐? 아니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준행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기 마음대로 계획하고 일을 저지른 사람 – 여로보암

여로보암이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 잘못된 일을 했습니다.

첫째, 금송아지를 만들고, 임의의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왕상 11:28 →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십계명 중 제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남쪽인 ‘벧엘’과, 가장 북쪽인 ‘단’에 임의의 제단을 세우고, 거기에 금송아지를 안치하여 예배드리게 했습니다.

둘째,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여로보암이 우상과 잘못된 제단을 만들자, 레위인들은 대부분 그 정책에 반대하여 남쪽 유다로 내려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은 그야말로 아무에게나 제사장의 직임을 맡깁니다. 왕상 12:31 →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오늘날 신학교도 안 나온 사람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격입니다.

셋째, 절기를 임의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본래 유대력으로 7월 15일이 ‘장막절’인데, 그것을 8월 15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왕상 12:33 →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장소’, 그리고 ‘예배의 주관자와 예배 시간’을 ‘임의로’,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 여로보암은 불성실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의롭게 살려는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부지런함’이나 ‘의로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 영적 암흑시대라 불리는 사사시대를 일러 성경은 뭐라고 정의하고 있습니까? 삿 17:6 → “그때에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렇게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을 때,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에 치우친 삶을 살고, 우상을 숭배했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따라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왕상 12:30 →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네! 여로보암이 저지른 근원적인 죄,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여로보암은 ① 잘못된 ‘예배’와 ‘제단’ ② 잘못된 ‘제사장’ ③ 잘못된 ‘절기’를 제정하는, 이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고민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로보암은 그저! 자기 마음대로, 자기에게 유익한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들 또한 같습니다. 마음으로는 항상!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오면! 어느새 ‘나의 기쁨, 나의 유익’이 선택의 기준이 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기쁨을 선택하는 것이, 당장에는 나에게 손해 되는 것 같고, 어리석은 일인 것 같지만, 결국은 복되고 형통한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유사 종교’로 전락시키는 죄를 지었습니다. 왕상 12:32 →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①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②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③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여기 ‘비슷하게’란 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로보암은 ① 유다와 비슷하게 ‘절기’를 정하고 ② 예루살렘 성전과 비슷한 ‘제단’을 단과 벧엘에 만들었습니다. 또한 ③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 가운데 ‘제사장’을 세워 비슷하게 제사를 집례케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똑같지 않고 비슷한 게 바로 ‘이단’입니다.

여로보암의 문제는! 자신을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과 친밀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어 두려고 힘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할 때, 죄가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내 생각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를 살펴보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산 여로보암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상 14:10 → “너의 집 안에 남자는 한 명도 남김이 없이 쓸어버리되, 거름을 쓸어버림 같이 말갛게 쓸어버림을 당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버린 ‘여로보암’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아, 인정받고 세우심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신뢰하지 못한 채, 스스로 안정을 추구하려 발버둥 치는 여로보암의 모습이, 내게도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나눠봅시다.

 

2. 예배를 존중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믿음과 인생을 무너뜨리기 위해 예배를 소홀히 여기도록 만듭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이전에 가졌던 초심과, 왕이 된 이후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고, 끝까지 충성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3-09-30
조회 215

지혜자 솔로몬의 어리석음 (왕상 10:21∼26, 11:1∼5)

 

솔로몬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점차 그는 초심을 잃어버리고, 왕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들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왕이 해서는 안 될 것 세 가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400여 년 전에, 왕이 된 자가 해서는 안 될 것 세 가지를 신명기 17장에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우선 ▶ ‘왕이 될 사람의 자격’을 말씀하십니다. 신 17:14b∼15 →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즉, 하나님을 모르는 타국인을 왕으로 세워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 ‘왕이 해서는 안 될 것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신 17:16∼17 → ①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②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③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이 말씀은 너무나 명확해서 따로 풀어 말할 것도 없지만!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말(馬)을 많이 두지 말라. 당시 말(馬)은 그 나라의 군사력을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임할 때 ‘말이나 군사’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면! 전쟁이 일어날 이유도 없습니다.

둘째, 아내(妻)를 많이 두지 말라. 아내를 많이 두게 되면! 그 아내들로 인하여 다툼이 일어나고, 미혹 받게 되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은금(銀金)을 많이 쌓아 놓지 말라. 왕이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사리사욕을 추구하게 되면, 그 나라는 부패하여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 ‘한 가지 명령을 추가’하십니다. 이 말씀을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신 17:18∼19 →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자! 그러니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은,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하신 이 세 가지는! 반드시 지키면서 살아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 말씀을 읽는 것도 소홀해지고, 말씀대로 사는 일에서도 멀어졌습니다. 이렇게 솔로몬 왕도 쓰러졌다면, 우리들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산다면, 반드시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삼가고 삼가야 할 것입니다. 고전 10:12 →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제 솔로몬 왕이 ‘왕으로서 해서는 안 될 것 세 가지’를 어떻게 범하면서 살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솔로몬은 자기를 위해 은과 금을 많이 가지고 살았습니다. 왕상 10:21, 27 → “솔로몬 왕이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성도 여러분! 금이든 돈이든, 그것은 ‘사용의 대상’이 되어야지 ‘숭배의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 “돈이 종일 때는 선한 종이지만, 돈이 주인이 되면! 악한 주인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솔로몬은 처음 왕위에 오른 후, 적어도 성전을 완공하기까지 10년 넘게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높여주셨고, 부귀와 영화도 함께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지혜’가 출중하고, 완공된 ‘성전’이 심히 아름답다는 소문이 각처 사방으로 퍼졌고, 솔로몬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시초가 ‘스바 여왕’의 방문입니다. 왕상 10:1∼2, 10a → “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금 일백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왕에게 드렸으니…”

이 스바 여왕뿐만 아니라,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 10:23∼25 →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그들이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그리하였더라.”

이렇게 되자! 그동안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았던 솔로몬이, 차츰 마음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고, ‘재물’에 마음을 두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지혜를 주심으로 물질을 얻게 되었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 괜한 말씀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신 8:17∼18 →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그렇습니다.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는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물질로 인한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물질에 대해서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즉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둘째, 솔로몬은 말을 많이 모으면서 살았습니다. 왕상 10:26 →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이것은! 왕은 말을 많이 가지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인간적인 계산이 앞섰습니다. 그 당시 병거와 마병은 오늘날의 기갑부대와 같아서, 일반 보병부대를 압도하는 군사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모아 군사력을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말(馬)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 까닭은, 말이 많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가 보유한 말을 의지하고 자랑하면서 전쟁에 나갈 위험이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은근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면서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신 하나님 앞에 그 교만한 죄를 회개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셋째, 솔로몬은 아내를 많이 두어 미혹을 받았습니다. 왕상 11:1, 3 →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하신 경고의 말씀을 무시한 채, 숱한 이방 여인을 사랑하고 연애하면서, 정욕과 향락에 붙들린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이방 여인들이 자기 나라의 ‘우상’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고, 심지어 ‘산당’까지 지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솔로몬에게 진노하시면서, 두 번씩이나 직접 나타나시어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왕상 11:9b∼11 →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시기 전에 먼저 ‘경고의 사인’을 보내십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의 경고를 다 무시해 버렸고,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경고등이 들어올 때는 즉시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손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을 지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여색에 빠지자 그 손으로 우상의 ‘산당’을 지었습니다. 결국 솔로몬의 최후는 너무나 추하고 비참하게 마무리됩니다.

 

2. 솔로몬 왕에 대한 후대의 평가

바벨론 포로기에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총독이며 영적 지도자인 ‘느헤미야’는, 솔로몬에 대하여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느 13:26 →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느헤미야는 솔로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이방 여인들을 사랑함으로 ‘우상숭배’에 빠져, 결국 그 마침은 ‘영적으로 실패한 사람’이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복이 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복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솔로몬을 반면교사 삼아! 복을 받으려고 하지만 말고, 또한 복을 많이 받았다면 ‘은혜 의식’을 가지고 겸손하게 살아, 최후 승리자가 되어 칭찬과 면류관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솔로몬에게 있던 문제 (①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계속행함 ②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버리거나 양다리 신앙을 갖게 됨)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내가 특별히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 있다면, 그것을 서로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이 주신 복을 화로 바꾸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고, 반대로 악조건에서도 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사후 평가를 보면서 본인이 갖게 된 다짐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11월 5일 “보고 싶습니다”와 12일 “새생명전도축제”에 내가 인도해 와야 할 영혼의 이름을 속도원들과 공유 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김성윤
2023-09-23
조회 225

솔로몬의 성전봉헌식 기도 (왕상 8:22~30)

 

연을 날릴 때, 연이 높게 날려면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① 바람이 적당하게 불어줘야 하고 ② 연줄이 튼튼해야 하고 ③ 그 연줄을 조종하는 사람의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든지, 연줄이 끊어지면, 연은 추락하고 맙니다.

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이룰 수 있습니다. 연을 붙잡고 막 달리면! 연이 뜹니다. 하지만 ‣ 바람이 불지 않으면 이내 떨어지고 맙니다. 또한 ‣ 바람이 잘 불어서 높이 날아올랐는데! 연줄이 약하면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줄이 끊어져서 맥없이 추락하고 맙니다. 또한 ‣ 연을 조종하는 사람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바람의 방향을 알고, 줄에서 느껴지는 장력의 강도를 알아, 어느 정도 높이로 연을 날려야 할지, 그 한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은 연줄에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연줄에서 끊어지면, 연의 생명도 끊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의 연줄’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끊어진 인생은 추락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 “기독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교’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만한 사람이고, 그래서 추락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기도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간절함’이 ‘응답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지?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말씀과 언약에 근거한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봉헌식을 하면서, 솔로몬이 드린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솔로몬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당신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솔로몬은 성전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이 성전을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24절입니다. 왕상 8:24 →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시는 주님!…”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틀림없이 이루고야 마시는 분인데, 지금 완공된 이 성전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본래 성전을 짓고자 하는 열망은,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상 5:5 →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솔로몬이)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솔로몬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이 성전을 건축했지만, 이것은 ‘내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성취’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말씀하신 것을 틀림없이 이루시는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깊이 생각하면서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또한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남달라야 합니다. 요 1:1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창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르시되 ∼라 하시면 그대로 되니라.” 마 5:18 →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신다.” 이렇게 ‘말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말씀을 앞세우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솔로몬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왕상 8:27∼28 →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그리고 이어서 성전에 하나님께서 실제로 임재하시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왕상 8:29b →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임재)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지금 솔로몬은 ‘두 가지 중요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의 중요성’을 알고, 하나님이 ‘성전에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 “거기 있으리라(임재) 하신 곳! 이 성전” // 바로 이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최선을 다해 지은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이지만, 하나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 작고 부족할 뿐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친히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면, 이 건물은 그야말로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네! 솔로몬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이 성전 되려면! 하나님이 거기 계셔야 됩니다.

두 번째, 솔로몬은 “이 성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부르짖어 기도할 때 ‘응답받는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 “보시오며” “들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① 하나님! 하나님 없는 성전이 성전이 아니듯, 하나님 없는 내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혹 제가 곁길로 가거나 넘어지려고 할 때, 나를 ‘지켜봐 주시고’ 붙들어주옵소서. ② 하나님! 내가 세상에서 살다가 죄악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 내가 그 죄로 인하여 아파하고 회개할 때,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는 이곳 성전’이 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기도 아닙니까? ① 우리가 삶에 지치고, 갈 길을 몰라 방황하게 될 때, 조용히 찾아와 ‘하나님!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성전입니다. ② 내가 외롭고 힘들 때 찾아와,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하고, 하나님을 가만히 부를 수 있는 곳이 성전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③ 겉으로는 의로운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이 불꽃 같은 눈으로 나의 속사람을 살피시고 책망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④ 결정적으로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만나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이런 ‘성전 의식’이 내 삶에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견고하며,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고,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성전이 저와 여러분에게! ‣ 새 삶의 출발점이 되는 곳! ‣ 삶의 중심이 되는 곳! ‣ 삶의 회복이 일어나는 특별한 곳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솔로몬은 30절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왕상 8:30 →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은 성전에서 자신과 백성들이 지은 죄를 회개할 때, 용서와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용서하길 원하는 것’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시고, 간절한 바람입니다. 에스겔 33:11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네! 하나님은 스스로 맹세하시면서까지, 악한 짓을 일삼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딤전 2:4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네! 하나님의 소원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 하나님의 소원(wish)이며 하나님의 뜻(will)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일입니다. 즉 외양간 밖으로 나가 있는 양들을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과, 믿지 않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오늘부터! 두 번째 ‘보고 싶습니다’와 ‘새생명 전도축제’를 선포하고, 앞으로 6∼7주 동안 ‘심방’과 ‘전도’에 힘쓰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① 사랑하는 가족들을 최우선적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② 그리고 믿다가 낙심한 성도들, 열심을 잃어버린 성도들을 다시 교회로 인도해 오시길 바랍니다. ③ 그리고 아직 구원의 방주에 승선하지 못한, 친구와 이웃들을 교회로 초청해 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랑과 열심을 보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솔로몬이 백성들을 위한 ‘듣는 마음’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귀’와 ‘영광의 삶’을 보너스로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함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기독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교’다.”는 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2. 솔로몬의 기도를 하나하나 되새겨보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기도는 어떤 기도인지 나눠봅시다.

 

3. 개인적으로, 속회적으로, 찾아야 할 ‘잃은 양’의 이름을 적고, 또한 전도해야 할 ‘태신자’ 명단을 만들어, 함께 기도하며 전도할 방법을 모색합시다.

김성윤
2023-09-16
조회 339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솔로몬 (왕상 5:1∼18)

 

왕위에 오른 지 4년째에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소원이자, 하나님의 약속이었던 성전건축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은!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몇 가지 자세와 행동’을 살펴보면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간증으로 영광 돌리는 솔로몬

솔로몬은 두로 왕 히람에게 성전 지을 재료를 부탁하기에 앞서, 그간 있어 왔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간증’하였습니다. 왕상 5:3∼5a →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솔로몬)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히람 왕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왕상 5:7 → “히람이 솔로몬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르되, 오늘 여호와를 찬양할지로다. 그가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도다.” 히람 왕은 솔로몬의 간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네! 이런 솔로몬의 간증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러 사람과 만나야 하고, 거래해야 하고, 교제의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벧전 3:15 →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소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우리도 기회 있는 대로! 내가 만난 하나님과 예수님,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하심에 대해서 간증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명을 감당하는 솔로몬

솔로몬은 왕이 된 후에, 자신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인 성전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성전건축은 솔로몬이 소원이 아니라, 아버지 다윗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솔로몬 본인은 간절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소원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전건축의 사명을! 자신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마음속으로 계획하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 히람 왕의 축하 사절이 오자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히람 왕은 솔로몬의 부탁을 듣고는 흔쾌히 백향목뿐만 아니라, 잣나무까지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이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히람 왕 같은 도울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인도하셨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왜 이 시대에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왜 부천에 살게 하셨고, 꿈마을엘림교회를 다니게 하셨는지! 그리고 나에게는 어떤 사명이 있는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궁극의 사명, 대 사명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입니다. (마 28:19∼20) 그렇습니다. ‘전도의 사명’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맡기신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마음속으로 계획하고 필요한 것을 구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울 사람을 붙여주실 것이며, 필요한 것과 또한 구하지 않은 것까지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전도하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세상 끝날까지 함께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대를 읽고, 상황을 살펴! 하나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솔로몬처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협력을 이끌어 내는 솔로몬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준비하면서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두로 왕 히람에게 요청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이스라엘 땅에는 나무를 잘 베는 사람이 없으니, 두로의 벌목공들을 지원해달라고 했습니다.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의 요청에 기쁘게 반응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건축에 필요한 건축 기술자들을 대거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거의 충격적으로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첫째는,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재료를 이스라엘 국산, 이스라엘 기술자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국내에 부족한 재료들과 기술자들을 외국에서 수입하여 성전건축을 진행한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동원되었지만, 성전건축에는 이스라엘 사람만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일에는 많은 이방 기술자와 숙련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왕상 5:18 → “솔로몬의 건축자와 + 히람의 건축자와, 그발 사람이 그 돌을 다듬고, =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재목과 돌들을 갖추니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매우 부정하게 여기고 멀리했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이방 지역의 재료와 이방인들이 참여한다는 것은, 율법적으로 보면 아주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마음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글로벌 마인드’였습니다. 인종과 혈통과 언어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이방인들도 성전건축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열린 마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자신의 이름대로 ‘평화의 왕’이면서, ‘협력과 화목’을 이끌어 낸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서 기자는 이 일을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의 결과’라고 평가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솔로몬과 같이, 지혜롭고 열린 마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솔로몬이 수고하는 사람들의 복지에 신경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성전건축은 대단히 규모가 큰 사업이었기에, 수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왕상 5:13∼14 → “이에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역군을 불러일으키니 그 역군의 수가 삼만 명이라. 솔로몬이 그들을 한 달에 만 명씩 번갈아 레바논으로 보내매, 그들이 한 달은 레바논에 있고 두 달은 집에 있으며…”

그러니까 성전건축에 동원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노동 강도가 높은 일이었기에, 벌목하는 레바논 파견 역군의 경우! 한 달 동안 일하면 두 달간은 집에서 쉴 수 있도록 노동환경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참 잘한 일입니다. 일을 맡기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살피고, 그들의 복지를 증진할 방법과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초반기에 열린 마음과 듣는 귀가 있었고,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는 솔로몬이었지만! 말년에 가서는 솔로몬이 변했습니다. 역군들의 복지를 돌보지 않고, 도리어 혹사시켰습니다. (왕상 12:4) 이 일은 결국 나라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상 12:14∼17) 이 자리에! 사장님이나 일을 시키는 입장에 계신 분들은 잘 새겨들으시길 바랍니다.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이 건강해야, 그 조직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딜 가든지 “나 때문에 평화와 화평이 조성되고” “아랫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내가 있으므로 인해서 웃음꽃이 피어나고, 어색함이 사라지고, 대화와 소통이 증진되는 역할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 우리를 구분 짓고 제외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일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탄소제로 녹색교회’ 기치 아래 행하고 있는 ‘플로깅’이라든지! ‘생태환경보호단’ 같은 일은, 지역 주민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선한 일에 이웃과 함께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 스스로를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과연 화평케 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화목케 하시는 평화의 사람, 화평케 하라는 말씀을 부탁받은 사람들임을 고후 5:1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라기는 솔로몬처럼 화평과 협력을 이끌어 내서,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준비하면서 우리에게 ‘세 가지 도전’을 주었습니다. 첫째, 우리도 기회 있는 대로 간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둘째,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잘 감당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셋째, 협력을 잘 이끌어 내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순혈주의자나 배타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노고를 살피고, 그들의 복지에 신경 쓸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 되십시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은 시대와 상황에 맞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응답하신 경험과, 응답을 기다 리는 과정에서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 나눠봅시다.

 

2.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재료를 이스라엘 국산, 이스라엘 기술자로 한정하지 않고, 이방 재료와 사람들과 협력하여 이룬 일에 대하여 본받을 점을 나눠봅시다.

 

3. 벌목하는 일군들이 한 달 일하면 두 달간은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했던 솔로몬이, 나중에는 혹사시켜(왕상 12:4) 결국 나라가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입장에 대해서 그리고 건강한 조직 문화와 노동환경에 대해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3-09-09
조회 294

제목: 다윗의 유언이 주는 교훈 (왕상 2:1∼4)

 

‘유언’은 한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고 있던 ‘인생관’ ‘세계관’ ‘신앙관’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핵심적인 ‘말’입니다. 이 유언을 통해 교훈을 받기 위해서, 먼저 ‘두 가지 대 전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단 한 번뿐인 인생!

네! 이 땅에서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인식하고, 영적으로 잘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 9:27 →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② 땅에서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이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바른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단 한 번밖에 허락되지 않은 이 땅에서의 삶! 바른 믿음으로 살아서, 모두 다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죽음은 축복 중의 축복!

원래 죽음은 죄의 값이었습니다. 롬 6:23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했습니다. 네! 죽음은 죄인에게 주어진 형벌이며 저주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회피하고, 마주 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죽음이 도리어 축복과 영생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롬 8:2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네! 우리가 바른 믿음 안에 살지 않을 때, 죽음은 확실히 우리에게 저주이고 형벌입니다.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으므로” 성도에게 죽음은! 영광의 세계,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된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한 ‘믿음의 자매’가 죽었을 때,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 “나의 자매의 죽음을 인하여 / 주를 찬양할지라. / 죽음에서 피할 수 없음은 / 축복 중의 축복이니 / 두 번째 죽음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리라. /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긴 자여 / 그대에게 축복이 있으리라.”

프란체스코는 이 시를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초월한 자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 저주와 형벌이요, 지옥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하여 무기력했던 과거와 달리, 오히려 죽음이 우리에게서 무력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일컬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요 5: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따라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를 괴롭히던 사망을 향하여 이렇게 담대히 외칠 수 있습니다. 고전 15:55, 57 →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할렐루야!

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에게, 죽음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하여!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지옥이 아닌 천국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다윗의 유언이 주는 교훈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전제를 생각해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합니다. 다윗의 유언을 통해서 잘 살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① 늘 죽음을 인식하며 살라. 먼저 다윗은! ‘죽음의 일반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전반 절입니다. 왕상 2:2a →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여기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죽음의 ‘일반성’과 ‘보편성’을 잘 알고, 인식하고 살았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지혜입니다.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거부할 수 없이 따라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죽음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므로 ‘잘 죽기 위하여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을 완전히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배가 물 위에 떠 있으나!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잘 막아내야 항해할 수 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나! 세상 죄악이 우리의 삶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며, 세상 쾌락과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굳센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② 힘써 대장부가 되라. 왕상 2:2b →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이 말은! 인생이 죽음 앞에 서 있는 존재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허무하거나, 뜻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대장부’로서 이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즉! ‘힘써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대장부가 되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되는 것이 대장부가 되는 것일까요? 생각을 크게 가지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의 좌우명입니다. → “하나님께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

또한 19세기 미국 최고의 설교자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너는! 너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 시 81:10에도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했습니다. 네! ‘대장부가 되라’는 말은! ‘생각을 크게 하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유언을 잘 지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왕상 4:29 →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넓은 마음, 큰마음은! 수련이나 훈련을 통해서도 형성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넓은 마음’이라야,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의 일을 구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 마리의 소를 번제! 태워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얼마나 대장부다운 헌물입니까? 스무 살도 안 된 청소년이! 왕이 되자마자 1,000마리의 소를 드릴 생각을 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엄청난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솔로몬은 즉위 4년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여, 7년 공사 기간을 통해 완공했습니다.(왕상 6:38) 그래도 성전규모에 비해서는 짧은 기간에 끝났는데, 그 이유는 엄청난 인력을 투입했기 때문입니다. 왕상 5장을 보면, 성전건축에 동원된 일군들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올 일꾼으로 3만 명, 짐꾼이 7만 명, 돌 뜨는 이가 8만 명, 감독이 3,300명, 모두 18만 3,300명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하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계획하고 진행하면서! 자기가 다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추진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보다 크고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고전 1:25)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함에 머무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대장부의 큰마음’을 가지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라. 대장부가 되는 확실한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여 살면! 대장부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 2:3 →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말씀의 강력한 능력을 체험하며 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을 때, 골리앗이 다윗을 향하여 “너 누굴 믿고 그렇게 까부니?” 했습니다. 성경엔 까분다는 말은 없고,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업신여겼다(삼상 17:42)고 했지만, 그 말이 그 말입니다. 이에 대한 다윗의 대답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삼상 17:45, 47b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까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장부가 되는 비결’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우리 성도들은 ‘잘 죽기 위하여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들 솔로몬에게 준 다윗의 유언처럼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준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잘 사는 길이며 또한 죽음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고 상급 받는 길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성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정리해 보십시다. 그리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나눠봅시다.

 

2. 믿음의 대장부는 어떤 사람이며, 또 어떻게 대장부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생각(꿈과 비전)을 가지고 어떤 실천을 할 믿음의 대장부가 될 것인지 나눠봅시다.

 

3. 나는 자녀들에게 어떤 유언과 어떤 교훈을 남기는 부모가 될 것인지? 한 번 써보고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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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하나님이 세우신다. (왕상 1:5∼10)


오늘은 다윗 왕의 넷째 아들이며,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아도니야’의 생애를 통해서 교훈을 얻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도니야’는 다윗과 학깃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체격과 용모가 준수했습니다. 또한, 아버지 다윗 왕으로부터 평생 단 한 번도 섭섭한 말을 들은 적이 없을 만큼, 귀여움을 받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개인적으로 아들 ‘솔로몬’에게 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밧세바’에게 약속한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아도니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도니아’는 자파의 세력을 모아, 일종의 ‘왕의 출정식’을 갖습니다. 소헬렛 바위 곁에서 소와 양을 잡고 ‘솔로몬’을 제외한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들을 초청합니다.(왕상 1:7∼10) 여기에 ‘요압 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도 합세했습니다. 이러한 ‘아도니아’의 행위는! 아직 생존해 계신 부왕 다윗에 대한 반역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밧세바와 솔로몬의 감정만 돋운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밧세바’는 자기 아들 ‘솔로몬’을 왕위에 세우려고, 급히 ‘선지자 나단’에게 도움을 구하고, ‘다윗’ 왕을 직접 찾아가 직언합니다.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지금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 하니 이것이 어인 일입니까? 왕이시여! 예전에 저에게 하신 약속!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하신 것을 기억하소서!”(17절 이하) 그때 ‘나단’ 선지자도 들어와 “저에게도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셨는데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다니, 이게 왕께서 지시하신 일입니까?” 묻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이 침상에서 일어나, 즉시 ‘제사장 사독’과 ‘나단 선지자’ 그리고 친위대장 ‘브나야’에게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세우도록 지시합니다. 이들은 솔로몬을 ‘기혼 샘물’로 인도하여, 거기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뿔 나팔을 불며,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3대 왕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왕이 된 솔로몬은! 처음엔 아도니아에 대하여 관대한 처분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다윗 왕 사후에 이 ‘아도니아’가 왕위를 양보했으니, 아버지 다윗의 마지막 아내였던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에게 요구합니다. 이런 요청은 인륜에도 어긋나는 일일 뿐 아니라, 후일 자신이 왕권을 차지할 목적이 있는 계략이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솔로몬은! 사람을 보내어 ‘아도니아’를 죽여버립니다.
 
1. 아도니야와 솔로몬
‘아도니야’와 ‘솔로몬’을 비교하자면!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 권위를 위임받은 왕과 vs 스스로 왕이 되기를 꾀하는 자의 대결이라 할 것입니다. 사실 왕이 될 수 있는 외적인 조건을 보자면! ‘솔로몬’보다는 ‘아도니야’가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가졌습니다. 즉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는 당시 생존한 왕자들 가운데서는 최연장자였습니다. 그러니 장자권 계승으로 왕위에 오른다면! 서열 1위에 해당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용모 또한 준수한 자로 외적인 매력도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솔로몬은 다윗의 10번째 아들로서, 서열상으로도 왕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20세가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자신의 외적인 조건만 믿고, 선왕 다윗이 자신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치도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왕위를 넘보고 반란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출세 지향적인 인물인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도 그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에 따라 ‘아도니야’가 왕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제사장 ‘아비아달’도 동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이을 차기 계승자로 ‘솔로몬’이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대상 22:8∼9 →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그러니까 ‘나단’을 비롯한 충신들은 솔로몬이 차기 왕이 되리라고 믿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섭리를 거부하고 솔로몬의 왕위를 가로채려고 했던 ‘아도니야’를 폐하시고, ‘솔로몬’의 대관식이 무사히 집행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 ‘아도니야’로 하여금 솔로몬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참 진리입니다. 잠 16:9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마침내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2. 강한 자의 패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패배하고 실패한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성경 속의 인물 중 ‘골리앗’은 거인이었고 용감한 군인이었지만, 어린 다윗에게 패배하여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도니야’도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1)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왕상 1:5 →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여기 ‘스스로 높여서’라는 말은 다른 말로 ‘교만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교만으로 말미암아 정죄 받았으므로(딤전 3:6), 교만한 자는 마귀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고, 반드시 벌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잠 16:5 →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성도 여러분! 교만한 자는 아무리 유리하고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해도 인생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꼭 기억하시고 겸손하길 바랍니다.
2) 훈련과 지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왕상 1:6 → “그의 아버지(다윗)가 네가(아도니아)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이 말은 다윗은 아도니야의 말이나 행동을 제재한 적이 없으며, 체벌을 가한 적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히 12:6, 8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책망하지 않는 것을 자녀를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참 조심스런 말이지만! 우리는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잠 13:24 →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무지막지하게 다루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어 성경에는 careful discipline이라고 했습니다. 신중하게 지도하는 마음으로 책망할 줄 아는 부모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이런 훈련과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인생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정 자신과 자녀들의 삶에 있어서 성공을 원한다면! 아도니야의 실패의 원인을 깊이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3. 아도니야의 실패를 통해 배울 교훈
① 아도니아의 모반은 주도면밀하게 준비되었습니다.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50명을 준비하였고(왕상 1:5),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거사의 핵심 인물로 포섭하였으며, 거사의 장소와 대관식을 축하하는 잔치 자리까지 다 예비했습니다. 하지만! 이같이 치밀한 준비를 통한 아도니야의 거사도, 결코 하나님이 작정하신 왕! 솔로몬의 즉위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인간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대적할지라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호리도 어김없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② 아도니아의 왕위계승을 위한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동생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잠 19:21 →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③ 아도니아가 왕위계승에 실패하고 죽임을 당한 것은, 세상을 향한 ‘헛된 욕망’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적인 욕심은 무익합니다. ④ 부왕 다윗이 죽기도 전에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것은! 너무나 성급한 처사였습니다. 잠 19:2 →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실력이나 지식을 의지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의 결과는 형벌임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왕상 1장 41~53절을 보면! 아도니야와 그 일당들의 잔치가 끝날 즈음에, 솔로몬이 다윗왕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명받아서 왕으로 선포되었으며,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그 잔치는 엉망이 되었으며, 일당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는 잠깐이었지만, 두 왕이 존재했습니다. 즉 자의적으로 왕이 된 아도니아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왕이 된 솔로몬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러나 한 나라에 ‘두 왕’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통성 있는 왕의 즉위를 알리는 양각 나팔 소리는, 거짓 왕을 추종했던 자들에게는 패망과 슬픔의 소리였고, 참 왕을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도 ‘두 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반역하고 쫓겨나 세상 권세를 잡은 사단과, 하나님의 아들이자 언약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두 세력 간의 갈등으로 항시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완전히 해결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 나팔 소리는 성도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을,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패망과 슬픔을 알리는 신호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단’과 ‘예수그리스도’ 중에 누구를 왕으로 섬겨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잠깐의 쾌락을 위하여 사단을 좇는다면 멸망에 이를 것이요, 생명을 좇아 인내하며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긴다면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의 축복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출세 지향적이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다 드러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서로 나눠봅시다.
 
2.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패배하고 실패한 사람들의 원인에 대해 나눠 봅시다.
 
3. 이 세상에도 ‘두 왕’(사탄 vs 예수그리스도)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계십니까?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는 사람인가요? 그에 따른 어려움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