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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관리자
2024-07-27
조회 233

제목: 적당히 믿으면서도 복 받기를? (렘 37:1∼10)


1.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하는가?

역대하 35장을 보면, 요시아 왕 당시 세계 판도는 ‘애굽’과 ‘바벨론’ 두 강대국이 양강을 이루어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역사를 움직이는 손길은 바벨론 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이래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받는 ‘요시야 왕’은 친 바벨론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요시야 왕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 ‘느고’가 세계의 열강으로 떠오르는 바벨론을 치러 올라오면서, 이스라엘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것을 유다의 ‘요시야’ 왕이 중간에서 막아서다가 애굽 군사가 쏜 화실에 맞아 죽고 맙니다. 이렇게 요시야 왕이 죽자, 백성들은 맏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똑똑한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17대 왕으로 세웁니다.(36장 1절), 하지만 애굽 왕이, 그도 아버지처럼 친 바벨론파 일 것으로 생각하고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대신 형이며 첫째 아들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36장 2∼4절).

이렇게 애굽 왕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야김’은 선대들의 ‘친 바벨론 정책’을 버리고, ‘친 애굽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렇게 되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은 바벨론에 있다고 주장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사사건건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그를 사로잡아 갑니다.(36장 5∼6절).

그리고 조카 고니야(여호야긴)를 거쳐 ‘시드기야’를 느브갓네살이 유다의 왕으로 세웁니다. 그는 처음 3년 동안은 ‘친 바벨론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백성과 신하들의 요구에 못 이겨, 결국 바벨론을 배반하고 ‘친 애굽 정책’을 쓰게 됩니다. 결국 분노한 느브갓네살 왕이 3차 공격을 해 오게 되고, 시드기야 왕과 유다의 운명은 끝이 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합니까? 바벨론 편에 서야 합니까? 아니면 애굽 편에 서야 합니까? 이것을 오늘 우리나라의 형편과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는 친 미국 정책을 펼쳐야 합니까? 아니면 친 중국 정책을 펼쳐야 합니까? 네! 이것으로 우리나라 역대 정권들이 서로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지금까지도 갈등 관계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정말 잘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친 바벨론 정책을 쓰느냐? 친 애굽 정책을 쓰느냐가 아닙니다. 친 미국 정책을 펼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친 중국 정책을 펼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친 하나님 정책’을 써야 합니다. 공의와 사랑의 정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지만! 시드기야 왕과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렘 37:2 →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 공의와 사랑을 잃어버린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나라의 운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정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틀림없이 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 바르게 살면,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고, 걱정스러운 일만 자꾸 하면, 틀림없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진정 회개하고 바르게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과! 우리나라의 흥망성쇠는! 미국에 달린 것도 아니고, 중국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 가사를 보십시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누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까? 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르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나라가 되도록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은 유보되어 있으나, 분명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예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나님은 유다를 회개케 하기 위해서 바벨론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진정 중요한 회개는 하지 않고, 우리는 바벨론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도, 거짓 선지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애굽’이라는 뒷배가 있다고 하면서, 장밋빛 미래만을 얘기했습니다.

이렇게 회개는 하지 않고,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닥친 현실은 무엇입니까? 배반한 ‘시드기야’ 왕에게 분노한 바벨론이 제3차 공격을 해오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급히 기도를 요청합니다. 렘 37:3 →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그리고 한편으론 애굽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렘 37:5 →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네! 유다의 요청에 애굽 군대가 출정하자, 바벨론 군대는 잠시 예루살렘 성에 대한 포위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거짓 선지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제 바벨론 군대는 물러갔다.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다”라며 떠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2가지로 답변을 합니다.

첫째, 애굽에 대한 기대는 헛것이 될 것이라. 렘 37:7c → “유다의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애굽에 대한 기대는 헛된 것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애굽 왕 ‘호브라’는 군대를 보내 유다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바벨론 군대에 대패하고 퇴각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을!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막아보고 해결해 보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일인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길이요 방법입니다. 회개 없는 기도 요청은 아무 소용 없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불사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렘 37:8 →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잠시 바벨론이 물러간 것 같지만, 그것은 애굽 군대와 싸우기 위한 전술적인 선택이었고, 그들은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고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들은! 유다 백성들처럼, 시드기야 왕처럼,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서 자손만대 아무 걱정 없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 24:21 →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예루살렘 성이 마지막에 불 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이 세상도 불 심판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벧후 3:7∼13 →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말씀 속에 ‘불’이라는 말씀이 4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끝 날은! 불 심판을 통해 끝날 것으로 하나님이 작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랍니다. 물론 그날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생각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을 비롯해서 유다 백성들은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끝 날이 불 심판으로 끝날 것을 믿는다면! ‘회개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의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서도,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회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죄와 허물을 감추거나 외면하는 자들이 아니라,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돌이키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눈물로 회개하고, 나라의 운명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는 성도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시고,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하고 외교적 줄타기로 살길을 도모하다가 결국 패망했습니다. 우리의 살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2.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은 받고 싶어했습니다. 순종은 없고 간구만 있는 그릇된 신앙에 대해 나눠봅시다.


3. 인생이 회복되고 밝은 미래를 여는 길은 얄팍한 처세가 아니라, 신실함과 진리를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내가 주로 선택하는 해결 방식에 대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7-21
조회 216

제목: 부르짖는 기도와 응답! (렘 33:1∼9)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남 유다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암흑기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약 40년간, 완고한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때의 일입니다. 친 애굽 정책을 펴왔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로부터 좋은 말,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은 죄악 때문에 곧 멸망하게 될 텐데, 바벨론에게 항복하고야 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취급해서 감옥에 투옥하고 맙니다.

투옥된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시 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애굽이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유다 역시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민족적인 비극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지어 부른 노래가 바로, 예레미야 애가(哀歌) 슬픔의 노래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다시 임합니다. 렘 33:1∼2 →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런데 이 말씀은! 예레미야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즉, 우리도 앞이 캄캄할 때,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응답하겠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르짖으라’고 기도를 명령하시면서 ‘세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응답하리라!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을 보여주시고,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계시하여 밝히 알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인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힘입어 살겠다는 신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인생이 더 복된 인생이 될지를 한번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보아도,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아도! 기도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들이 다 승리했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조지 뮬러(George Müller, 1805~1898)는 웨슬리 목사님보다 100년 후의 사람으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1829년 24세였던 조지 뮬러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영국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평생 영국에서 사역하게 됩니다.

하루는 뮬러가 브리스톨 거리를 걷다가, 많은 고아들을 보고 애쉴리 다운(Ashley Down)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고아원이 5개까지 늘어났고, 60년 동안 일만 명의 고아들을 돌본 고아의 아버지가 됩니다. 뮬러의 특별한 점은! 고아원 운영을 위해서 간증을 다니고, 사역을 알리며, 후원 요청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기도에만 집중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박물관에는 그가 기도의 응답으로 후원받은 물질과 물품은 현재 환율로 1억 파운드(1,793억) 이상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뮬러는 수많은 고아를 돌보다 보니, 기도 제목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 노트를 만들었고, 기도 제목이 생길 때마다 거기에 기록하고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기도 제목이 응답 되면 응답 된 표시를 하거나, 감사의 글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빽빽하게 쓴 기도 노트가 3천 페이지가 넘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기도 노트를 자세히 검토하여 보았더니, 무려 3만(5만) 번 이상 기도가 응답 된 것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기도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60년 동안 그의 기도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을 시대마다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한 땀과 눈물이 담긴 기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르짖는 기도가 복된 이유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 기도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여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기도로, 응답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고쳐 주리라!

본문 6절입니다. 렘 33:6 →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되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성을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잃은 것도 되찾게 하시고, 다시 새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불순종했고, 범죄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 고쳐 낫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병들었어도! 치료해서 고쳐 낫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다시 성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이고, 버림받았어도! 다시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렘 33:7 →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포로가 되어 붙잡혀 갔다 할지라도, 다 잃어버리고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들을 다시 세우고 축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네! 부르짖는 기도에 ‘해답’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시 30:2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고치시는 손길을 체험케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가운데! 고쳐 낫게 하시며, 무너졌던 것이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용서하리라!

렘 33:8 →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는 더 큰 죄, 더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상대방이 조금만 잘못하면, 힐책하고 나무랍니다. 용서할 줄 모릅니다.

남편은 아내를 용서할 줄 모르고, 아내는 남편을 용서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분쟁과 다툼, 갈등의 골만 깊어집니다. 그런 가정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고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며 기도하면 다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물론 우리 인간을 위한 사랑이요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 43:24b∼25 →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게 하는 우리 인간의 죄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악과 허물을 기억하고 용서하지 않고 속에 품고 있는 것은! 하나님조차도 힘들고 괴롭게 할 정도로 나쁜 것입니다. 하물며 연약한 우리 인간이야 어떻겠습니까? 네! 우리는 용서할 줄 아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할 때! 우리에게 평화가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에게 잘못한 것을 자꾸 되뇌고 기억하면! 누가 불행해집니까? 네!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기억하지 않는 용서’가 나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분노와 미움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죄를 용서하고, 자녀가 부모의 죄를 용서할 때, 부부가 서로의 죄를 용서할 때, 그 가정에 화평과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놀랍고 복된 소식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에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의롭게 여겨 주시고, 돌봐주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죄를 지었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나가 ‘부르짖어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받으시길’ 바랍니다. 주여! 나를 새롭게 하옵소서. 새 출발 하게 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 우리를 전과자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의롭다고 칭해 주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는 명령과 함께 주신 ‘세 가지 약속’을 열거해 보고,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응답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왜 꼭 기도하고 부르짖어야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겔 36:36∼27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기도의 응답으로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존 번연, 조지 뮬러, 윌리엄 부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받은 감동이나 자신의 다짐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7-13
조회 362

제목: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 (렘 31:31∼34)


1. 심판과 재앙의 선포로 가득 찬 예레미야의 메시지

오늘부터 다시 살펴보게 될 예레미야서는! 예언서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독설로 가득합니다. 이런 직설적인 책망은,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제사장들에게 매 맞고, 목에 나무 고랑을 찬 채, 감옥에 감금되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와 재앙의 선포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레미야는 이렇게 독선적인 길을 갔을까요? 그것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내가 말한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면서 선포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렘 31장만 봐도, 무려 16번이나(1, 2, 7, 14, 15, 16, 20, 23, 27, 31, 33, 34, 35, 36, 37, 38절) 나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한 메시지는 전체적으로 심판과 저주가 중심이어서 암울했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결론까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분량으로만 본다면 ‘심판 선언과 재앙의 위협’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의 선포 중에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명 ‘위로의 책’ ‘위로의 두루마리’라고 불리는 30∼33장까지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 ‘위로의 말씀’을 여는 메시지를, 우리는 29장에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마침표는 아닙니다. 바벨론에서 오히려 신앙이 회복되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7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망의 그늘에 앉아 울고 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귀환과 회복’이라는 희망의 말씀! 새 언약이 바로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위로의 두루마리’를 지배하는 메시지입니다.


2. 새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새 언약에 관해서 말하는 오늘 본문은! ‘위로의 두루마리’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데, 하나님께서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실 새로운 약속이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부터 계속 되풀이된, 같은 내용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본문 32절에 의하면 새로 세울 언약은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렘 31:32 → “이 (새)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아니! 내용이 똑같은데, 도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일종의 ⇨ ‘결혼서약’이었습니다. 남편 하나님과, 아내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부부간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신부인 이스라엘은! 남편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서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선지자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과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시듯이, 신앙적인 정절을 지키지 않는 아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는 않습니다. 어떻게든 다시 데려와 부부로 살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맺으려는 ‘새 언약의 대상자’는 변하지 않고, 그냥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남편이요 주인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아내였으나 결혼서약을 파기했던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결혼서약을 파기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그냥 ‘버림받은 아내’로 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편단심으로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버리고 간 여인인데도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여인’이라 부르시며, 또다시 아내로 맞아들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실 ‘징벌의 대상’인 이스라엘이, 다시 ‘새 언약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아내가 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는, 새 언약은 맺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순을 ‘용서’로 해결하십니다. 렘 31:34b →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런저런 다른 남편과 주인을 섬기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죄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순의 길’을 걸으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지 않는 용서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 언약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기억에서 지워버리지 못하면! 내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입혔던 사람과, 새 언약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아내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면서, 모든 죄를 기억조차 안 하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네! 이것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억하지도 않는 용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의 ‘속’과 ‘마음’에 두시고 기록하시는 새 언약

출애굽 당시의 언약은 ‘돌 판에 새겨’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억하지 않는 용서를 통해 새롭게 맺으시는 언약은! 어디에 어떻게 새겨지게 됩니까?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31:33 →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 새 언약은 속과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 ‘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법에서는 ‘내장’으로 번역되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짐승의 내장은 다 태우라고 율법으로 규정하셨습니다. 내장을 태우는 ‘언어적 용례’는 우리말에도 있습니다. ‘속을 태우다’, ‘애를 태우다’는 표현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 내장, 오장육부는! 구약성경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기관’으로 간주합니다. 한의학에서도 인간의 오장육부가 단순히 그 장기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에서 그쳐서도 안 되고, 마음에 깨닫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을 내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속에 두며, 마음에 기록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 말씀이! 그냥 눈으로 입으로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을 먹어 모든 내장 기관까지 내려가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하고,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추동물처럼! 말씀을 되씹고 곱씹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의 진미가 우리의 오장육부에 제대로 스며들게 되고, 말씀의 깊은 맛으로 우리의 체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속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둔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됩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가 됩니다. 여기서 ‘앎’이란!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저절로, 자연적으로 몸으로 알고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직관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직관적인 앎은! 모든 복잡한 것을 소화시켜, 지극히 평범한 앎으로 단순화시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작은 자이든 큰 자이든, 많이 배운 자이든 그렇지 않은 자이든, 모두 다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렘 31:34 →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이런 단순하고 직관적인 앎에서는! 앎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앎입니다. 앎과 삶이 따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억하지 않는 용서’ 같은 사랑이, 하나님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나도 행하게 되는 현실적인 용서가 됩니다. 나와 너를 새롭게 갱신하여, 보다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관계로 성숙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성경을! 그냥 ‘책’으로 알거나, ‘머리’로 알거나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나의 ‘몸’이 되고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나 자신이 ‘말씀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고,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속’과 ‘마음’에 당신의 말씀을 두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네! 그렇게 살겠습니다.’ 고백하여! 새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고, 영적 성숙의 경지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결혼서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와 엮어서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기억하지 않는 용서’에 대해서 나눠보고, 내 삶에서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와 그 결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속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둔 사람은,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런 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숙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각자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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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절 - 첫 열매를 바치는 신앙 (출 23:14∼19)

맥추감사가, 추수감사와 다른 점은! 맥추감사는 ‘첫 열매’ ‘첫 수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주신 ‘전체 열매’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지금도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하나?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은 농경사회의 유산이고, 지금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런 절기를 지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절기의 핵심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고, 절기 속에 담긴 뜻을 바로 알고, 오늘도 마땅히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절기’는 우리가 흔히 지키는 ‘기념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통 기념일은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기념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성경의 절기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정하시고, 그다음에 사건이 벌어집니다. ‘맥추감사절’ 역시,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제정하시고 그다음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럼 맥추절을 지키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신 때와 장소는 언제, 어디서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뒤 시내산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이때는 애굽에서 나온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있을 때이고, 아직 농사를 짓기도 전인데, 하나님은 감사절기를 정하고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즉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절기부터 제정하신 것입니다.

출 23:16 →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지금 너희 눈에는 광야만 보이고 아무런 열매도 보이지 않지? 그러나 아니야! 반드시 너희가 뿌리고 가꾼 열매를 거두게 될 날이 올것이다. 네가 그것을 믿고 감사하면, 반드시 그런 복이 임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수확하게 되는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한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을 우선순위의 첫 자리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당연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2순위 3순위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첫 열매 신앙과 믿음의 상관관계

그러면!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보면, 믿는 자들이 항상 첫 열매를 잘 드리며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첫 열매를 드리는 믿음이 있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 온도를 측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도 사라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첫 열매 신앙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은 함께 가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의 예를 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성읍마다 석상과 아세라 목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온 나라에 우상의 산당과 제단이 즐비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산당들을 제거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본연의 임무를 감당하게 합니다. 마침내 예배가 다시 세워져서 번제와 화목제가 드려지고, 찬양과 감사가 회복되었습니다.

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하게 회복시키고자 한 것은! 바로 ‘첫 열매 신앙’이었습니다. 대하 31:5 → “왕이 명령을 내리니, 유다에 와서 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각종 농산물의 첫 수확을 넉넉히 가져 왔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다.”(새번역)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이 불과 4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사랴 대제사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대하 31:10 → “사독의 자손인 아사랴 대제사장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백성이 주님의 성전에 예물을 드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먹을 것을 넉넉하게 공급받았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

이렇게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명령이었지만, 대부분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첫 열매도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유월절에 장자와 초태생을 살려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 사실을 다시 깨닫고, 첫 열매를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바로 맥추감사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퇴보에는 언제나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는 것이고 반대로,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할 때’, 믿음도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닫히고 식어버리게 됩니다. 주를 향한 사랑도, 믿음도, 주님이 주시는 복도, 다 닫히고 마는 것입니다.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가 드리고 바쳐야 할 첫 열매란?

‘처음 열매’라고 할 때 ‘처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카르(rk'B)인데, 처음(First)이라는 뜻이지만,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영어로 choice의 최상급인 choicest, 그러니까 고르고 고른 것 중의 최고의 것, 제일, 으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가장 좋은 것 Best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 Good 정도가 아니라 → 좀 더 좋은 Better도 아니고 → 최상급인 Best의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첫 것’과 동시에,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역시 그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첫 예물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는, 단지 첫 월급 혹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고, 이 물질을 벌 수 있음도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 주셨고, 건강 주셨기 때문임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첫 부분을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분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내 삶 전체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잠 3:9∼10 →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말씀은 “나에게 첫 것을 주면! 너의 나머지 전부에, 내가 넘치도록 복을 주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을 더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육신도 부모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자녀가 첫 월급 타가지고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좋은 선물을 주면, 부모는 그것을 받고 그냥 있습니까? 그 이상으로, 어떤 형식으로든 보상해 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첫 열매 봉헌’은 곡식이나 과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처음 얻은 새끼도 마찬가지입니다. 출 34:19∼20 →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맏아들은 모두 목사나 선교사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해결책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민 3:45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맏아들 대신 ‘레위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맏배 대신 레위 사람의 가축 맏배를 구별하여 세워라. 레위 사람은 나의 몫이다. 나는 주다.” 맏아들을 드리는 대신 하나님께서 주의 일꾼으로 세운 레위 사람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라는 말은 ‘나귀’와 같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부정한 동물은, 대신해서 어린양을 대속물을 드려서라도 반드시 첫 것은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맥추감사절의 ‘근원적 의미’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맏아들이나 첫 것은 ‘내 것, 하나님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하나님 당신의 것’을 꼭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내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나에게 있는 무엇이 하나님의 것입니까? 네! ‘첫 열매’와 ‘맏배’입니다.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다 내 것이다”라는 믿음은 우상숭배입니다. 내 재산이나 재능이나 내 자녀나, 심지어 내 생명과 영혼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소중하고 귀하면 귀한 것일수록 먼저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맏배를 드리는 것이요, 첫 열매 신앙입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영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내 모든 귀중한 가치는 세상이 아니요,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믿음과 신앙고백은 일 년에 한 번 맥추감사절 때만 기억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받은바 그 은혜를 잊지 맙시다. 감사하되 우리의 온전한 사랑을 담은 ‘첫 열매’와 ‘맏배’ 즉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풍성한 은혜와 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첫 것, 첫 열매를 당신께 드려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 심정은 무엇인지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우리가 첫 예물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단지 첫 월급 혹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신앙고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사람에게든 하나님께든 ‘감사’하므로 ‘더 풍성한 감사’ ‘행복의 은혜’를 누린 경험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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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광풍 (행 27:9∼25)

 

오늘 말씀은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과정 중에 만난 ‘유라굴로’ 광풍 이야기입니다. 이미 겨울이 시작되어 역풍이 부는 때가 되어, 여러 날 걸려 지금의 그리스에 속한 가장 큰 섬인 그레데섬(크레타섬)의 ‘미항’이란 곳에 겨우 도착합니다. 바울은 더 이상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그때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만일 항해를 강행하면 화물과 배뿐 아니라, 인명 피해까지 생길 것이라고 경고까지 합니다.

 

1. 바울의 말(하나님의 말씀) 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백부장

하지만 호송 책임을 맡은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미항에서 약 65Km 정도 떨어져 있는 ‘뵈닉스’ 항까지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다가 큰 광풍 ‘유라굴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 인생이 광풍을 만나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따르고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대신 사람의 판단과 생각을 좇기 때문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행 27:11 →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vs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정인지도 모릅니다. 선장은 항해의 전문가이고, 선주 또한 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또 배에 실린 모든 화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단지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내린 결정만은 아닌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리기에 어디가 더 좋은 곳인가? 또한,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까지 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선주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의해 결정한 것입니다. 행 27:12 → “그 항구(미항)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여기 ‘불편하므로’라는 말은, 지금 도착해 있는 ‘미항’은 숙박 시설도 열악하고, 유흥장이나 놀이시설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뵈닉스까지 가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편안함,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육신 적으로 즐길 거리들, 즉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백부장을 비롯한 선장, 선주, 선원들의 결정이 잘한 결정처럼 보였습니다. 행 27:13 →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네! 뵈닉스를 향해 출발했을 때, 순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신이 났습니다. “봐라!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바울의 말을 듣고 그냥 미항에 있었더라면 어쩔 뻔했냐?” 하면서 바울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뵈닉스 항구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그곳에서 즐길 생각에 들떴을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을 보면! 갑작스럽게 상황은 변합니다. 행 27:14 →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여기 “얼마 안 되어”라는 단어가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닥칠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무서운 광풍을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2. 잘못된 결정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그들은 모든 짐을 버려야 했습니다. 행 27:18 →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아끼는 물건들, 소중한 것들을 다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하게 포장하고, 조심스럽게 배에 실었겠습니까? 하지만! ‘취급주의’라고 딱지를 붙인 귀중한 짐들, 값비싼 짐들도 다 버렸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중품이었던 것들이고, 소중했던 수화물이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현실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물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짐들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은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 같은 배의 기구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배를 운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들이어서, 생명처럼 소중한 기구들이었지만! 자기들의 손으로 버려야만 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행 27:19 →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의 여망은 없었고,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습니다. 행 27:20∼21a →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몰아치는 광풍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노련한 경험’도 소용없었습니다. 지금 ‘다수의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광풍이 불어오자! 인간의 모든 계획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습니다. 그저 풍랑에 밀려 이리저리 밀려다니게 되고 말았습니다. 행 27:15 →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가수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광풍이 몰려오면! 마치 유라굴로 광풍 만난 배처럼, 그냥 물결에 밀려 이리저리 쓸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인간의 의지, 인간의 지식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 누가 자기 인생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한 결과가 이렇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유라굴로 광풍을 극복하는 방법 : 회개, 신뢰, 역전

그러면 이처럼 인생의 유라굴로 광풍이 몰려올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① 회개: 유라굴로 광풍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행 27:21 →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유라굴로 광풍 앞에 모두 벌벌 떨고 있는 아수라장 가운데, 누가 나섭니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나섭니다. 그는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줄을 깨닫고, 이제라도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 꿇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아무리 실타래가 얽히고설켰어도 실마리를 찾으면 다 풀어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인생의 복잡한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호 6:1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해결됩니다.

② 신뢰: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는, 그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습니다. 행 27:23~24 → “내가 속한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여기 ‘내가 속한 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신뢰가 있으면, 우리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 43:1~2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속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심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이제 바울은 용기백배하여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행 27:25 →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은 믿음의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기적은 한 사람의 분명한 믿음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③ 역전: 바울이 리더십을 쥐고 이끌어가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 나타났습니다. 행 27:35~37 →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광풍이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바울은 마치 ‘성찬식’을 집례하듯, 떡을 들어 축사하고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14일간 굶었던 그들인데! 바울이 축복기도를 하고 나눠주자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받아먹었습니다. 그 후에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되는데 276명 전원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자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을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요, 성도들이 전도하는 이유입니다. 풍랑 만난 이 민족이! 한국교회 때문에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 때문에 풍랑 만난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울처럼 이 시대에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 소망을 주는 사람, 나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바로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의 현재 가치 판단 기준은 무엇이 1순위인지? 나눠보고 잘못된 결정으로 큰 손해나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바울이 담대할 수 있었던 근거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절망 속에서 소망을 주고, 캄캄한 앞길에 빛을 비추는 사람이었던 바울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빛과 소망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와 ‘전도’의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6-22
조회 253

하나님의 비밀 작전 (행 23:11∼32)

 

1.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암살단이 조직되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열심이었던 유대교 신자에서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간증하자, 바울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한 암살단원이 4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암살 음모와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유대교 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가 중심이 되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공회의 이름으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을 다시 심문하겠으니, 그를 공회에 출석하도록 군인들의 영내에서 나오게 해 달라는 공문을 천부장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을 공회로 이송하는 도중에, 암살대가 매복했다가 죽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2. 악인들의 암살 계획이 탄로나다.

하지만! 이런 암살 계획은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이 비밀 정보를 빼낸 사람은 바울의 ‘조카’였습니다. 행 23:16 →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바울의 조카가 예수를 믿었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바울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바울의 조카가 군인들의 영내로 들어가 바울에게 유대인들의 암살 계획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바울도 이 사실을 한 백부장에게 알렸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는데, 로마 시민권자가 암살당하면 일이 복잡해질 것을 직감한 백부장은, 바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직속 상관인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바울의 조카를 천부장에게로 보냅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의 조카를 맞아드려서 묻습니다. 행 23:19∼21 → “천부장이 그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천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만일 로마인인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천부장의 입장도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천부장은 필사적으로 바울을 보호하려고 애를 씁니다. 비록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일 뿐이지, 그 속은 100%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족인 유대인들은 악착같이 바울을 죽이려 하고, 이방인인 천부장은 악착같이 바울을 지키려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비밀 작전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최상의 호위병으로 호송하다.

천부장은! 바울의 암살 계획을 듣자마자, 바울을 당장 안전한 곳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물론 천부장 자신이 지키고 있는 ‘안토니아 요새’도 안전하긴 합니다. 천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천부장은! 그날 밤으로 바울을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고, 총독이 거주하는 훨씬 더 안전한 ‘가이사랴’로 호송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천부장의 바울 ‘호송 작전’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첫째, 호송 시간입니다. 23절에 ‘밤 제 삼시에’라고 했는데,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면 밤 9시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바울을 호송한 것은! 그만큼 긴급하게, 비밀리에 옮기겠다는 뜻입니다. 둘째, 호송하는 군사의 규모입니다. 역시 23절을 보면,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을 동원합니다. 합계 470명이나 됩니다. 죄수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병력이 동원된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셋째, 바울의 이송 방법입니다. 24절을 보면, 천부장은! 말을 준비하여 바울을 태워서 보냅니다. 보통 죄수를 그런 식으로 호송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사람은!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안전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생명의 위협을 받는 분들이 계십니까?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다른 어떤 종류의 위협을 받고 계십니까? 육신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위협을 받습니까? 명예가 위협받습니까? 어떤 종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실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행 23:11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 역시 로마로 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계획을 세우고, 방법까지 내가 다 정해 놓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걱정하고, 안달합니다. 왜 일이 이렇게 틀어졌을까? 한탄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을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방법대로 따라가세요.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로마로 가려고 했는데, 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죄수의 신세가 되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죄수가 되었다고 로마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수인 바울을, 자유인인 바울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로마로 보내셨습니다.

 

4. 바울의 무죄를 총독에게 편지로 알리다.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 총독부로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함께 보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벨릭스 총독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본문 행 23:25∼30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 로마시민인 바울이란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죽게 된 상황에서 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구해냈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보니, 단지 종교 문제일 뿐, 죽이거나 결박할 사안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당신께 보내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송사도 있으니, 당신이 심문해 보시고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런 내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부장이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변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벨릭스 총독도 비록 탐관오리였지만, 바울에 대해서 좋은 대접을 하게 됩니다. 행 24:23 →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참으로 놀랍고도 특별한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악한 사람도 나에게 악하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착한 대접을 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에스더를 왕비로 뽑은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은 폭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큰 유익을 끼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르면! 모든 사람이 내 편이 됩니다. 잠 16:7 →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이런 삶의 원리를 터득하시고, 원수라도 나를 돕는 자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하나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한, 내 삶의 길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로마 전도의 사명’을 주신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동안 모든 신상의 안전을 지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이 있는 한! 삶과 생명은 보장됩니다.

둘째, 로마로 가는 방법은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수로 가든지, 자유인으로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밤중에 가든지, 낮에 가든지 ▸즉시 가든지 머물다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육로로 가든지, 배를 타고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즐겁게 가든지, 괴롭게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셋째,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비하게 다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도 그렇습니다. 실패한 것 같지만 성공이었습니다. 마귀가 이긴 것 같은데,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모든 정죄를 이긴 것이고, 모든 사망을 이긴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런 신비로운 성취에, 우리의 삶을 다 맡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본문에는 우연인 것 같은 사건, 원수여야 할 사람이 바울은 돕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연이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 경험 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네가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약속하셨고, 바울 역시 소원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길은 결코 쉬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내십니다. 이에 대해 나눠봅시다.

 

3. 백부장, 천부장, 총독, 즉 세상 사람의 눈에 비친 바울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에 열심을 다 하는 것 외에는 흠을 찾기 어려운 성도가 됩시다.

김성윤
2024-06-15
조회 475

거룩한 소동을 일으키자! (행 19:8∼29)

 

1. ‘아데미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일으킨 소동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에베소는! 당시 인구 30만 명이 넘는 굉장히 큰 도시였습니다. 이곳 도시 사람들이 섬기는 수호신은 여신인 ‘아데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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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신의 모습 중에 특이한 점은, 다산과 풍요의 여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방이 10여 개나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에게 생명의 젖을 먹여 기르듯이, 아데미 여신이 자기들에게 풍요와 다산의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에베소는 로마의 가장 중요한 무역항으로, 아시아 경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데미 신전 주변에는 몰려드는 여행객들을 위한 음식점과 숙박소,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했습니다. 특히 5월은 나무나 은으로 만든 아데미 여신상, 그리고 그것을 넣어두는 작은 함을 만들어 파는 장사들의 큰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너희들이 섬기고 가지고 있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얼마나 많이 설교했는지! 아데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업자들의 조합장 같은 사람인데, 데메드리오란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는 최근 매상이 부쩍 줄어든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그는 경기 변동과 시세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석한 결과!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 복음’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복음 전도가, 결국엔 우상으로 먹고사는 자기들의 사업을 망하게 할 수도 있음을 예견했습니다.

그래서 동종 업자들과 직공들을 다 모아 놓고 이렇게 일장 연설을 합니다. 행 19:25∼27 →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①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②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③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러자 에베소 시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행 19:29 →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당시 에베소에는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지금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폭도들의 규모와 소동이 얼마나 컸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얼핏 보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vs 아데미를 믿는 ‘우상 신앙’과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아데미 신전과 아데미 상의 위엄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매출이 떨어져 경제적 이익이 줄어드는 것에 격분하여 이런 소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의 풍족함과 직업적 명예가 모두 아데미와 관련되어 있는데, 아데미의 위엄이 떨어지면 직업을 잃고, 지금껏 누려왔던 경제적인 안정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하니 눈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데미를 신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섬긴 것은 아데미 여신이지만, 사실은 ‘돈’과 ‘자기 쾌락’이라는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근본적으로 ‘자기 숭배’입니다.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에 탐닉하는 ‘탐심’이 곧 ‘우상 숭배’입니다. 골 3:5 →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크리스천의 영성에 독보적인 영향을 끼친 ‘리차드 포스터’ 목사님이 벌써 35년 전에 쓴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근자인 2017년에는 개신교 내에서 큰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는 ‘존 파이퍼’ 목사님이 거의 같은 제목의 책을 내셨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책의 제목처럼 ‘돈, 섹스, 권력!’ 이 세 가지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줄기’에서 수많은 죄의 ‘가지’들이 뻗어 나와, 거대한 ‘죄의 나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 섹스, 권력 중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요? 사람 따라, 나이 따라, 여건 따라, 다 다르겠지만! 점점 더 세상은 ‘돈’의 힘이 세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 가지 영역 중 자신이 가장 약한 영역은 어디인가? 스스로에게 늘 질문해야 합니다. “내 약점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하나 더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돈으로 연결되는 세상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돈이면 뭐든지 해결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스포츠나 오락이나 여행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상술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물론 행복을 누리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합니다. 소득과 명예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확장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헌신도 할 줄 알아야 참 성도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단지 자기 행복과 풍요를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라면, 우상 숭배자의 마음가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데메드리오 같은 선동가가 나타나면! 쉽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2. 복음과 말씀으로 인해 일어난 거룩한 소동

오늘 성경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한 절로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행 19:20 → “이처럼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여기 ‘바울의 전한 말’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말씀’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두란노서원을 세우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계속하니 에베소뿐 아니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과 헬라인들까지 주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능력과 병을 고치는 신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행 19:11∼12 →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 결과! 에베소 전역이 바울이 전파하는 말씀과, 행하는 능력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거룩한 소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복하고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행 19:17b∼18 →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깜짝 놀랄만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에베소에 있는 ‘마술사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행 19:19 →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할렐루야!

마술사들이 불태워버린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돈으로 정확하게 환산할 수는 없지만, 매우 큰 액수임은 틀림없습니다. 복음의 가치, 진리의 가치를 더 크게 여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되었기에, 더 이상 거짓을 붙잡고 살 수는 없기에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옛사람과 부끄러운 행위를 벗어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에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두 가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우상 업자 ‘데메드리오’가 자기의 경제적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일으킨 ‘세속적 소란’입니다. 자기 동네 에베소에서 복음의 놀라운 영향력을 발견했을 때, 마술사들처럼 우상숭배를 중단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동조자들을 모아 소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일으킨 ‘거룩한 소란’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누룩이 들어가면! 온 가족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됩니다. 온 직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고, 도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야 합니다.

네!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행 24:5 → “우리가 보니 이 사람(바울)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세상을 거룩하게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역사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서도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은 복음과 말씀을 따라 사는 데 필요한 손해라면, 기꺼이 감수할 신앙적 용기와 결단이 있습니까? 나눠봅시다.

 

2.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유혹인 ‘돈, 섹스, 권력’ 중에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나는 내 가정, 친척, 친구, 동료, 이웃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냥 ‘조용한 신앙인’입니까?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4-06-08
조회 428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행 16:5∼15)

 

오늘 성경의 사건은! 기독교 복음이 오랫동안 아시아 지역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이! 전 세계 - 온 땅끝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된 내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인 사도행전 16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 16:5 → “이에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이 말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이 잘 수행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6절부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행 16:6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또한,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인 16절 중반부터 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행 16:16b∼17 →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는데, 느닷없이 어느 날부터 가는 곳마다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힘써서 노력했지만 다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 주일 동안,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마게도냐 지역의 한 사람이 서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행 16:9 →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하나님의 계획은! 아시아보다 먼저, 유럽지역에 복음이 들어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본 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도의 방향을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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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울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유럽 쪽으로 넘어가 ‘네압볼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육로로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는 큰 성읍이었지만! 유대인 회당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하기를 이곳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면, 안식일이 되면 반드시 정결예식을 위해서 사람들이 강가로 모일 것이다!’

과연 안식일에 강가로 나가봤더니, 여러 여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서 즉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옷감장사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말씀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할렐루야! 유럽지역에서 복음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3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도 바울처럼 자신을 향해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럽으로 복음이 확장되는 이 위대한 사건은 거창하게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것은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말하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네! 바울이 들은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은 그 음성을 잘 귀담아들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예민했고, 그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드디어 바울이 빌립보 성읍을 가로지르는 강가에, 여러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 말씀에 반응하고,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14절입니다. 행 16:14 →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 지라.” 네!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자가 심령의 문을 열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단지 한 여인이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그 한 사람 속에는 그의 ‘온 가족’이 담겨 있었습니다. 15절입니다. 행 16:15 →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아멘. 또한, 한 명의 간수가 예수를 믿었지만, 마침내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믿음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이후 33b∼34절에는 빌립보 간수가 회심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 16:33b∼34 →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네! 역시 그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속에 그의 가문이 담겨 있었고, 나아가서는 유럽 전체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문을 닫고 막으실 때, 때론 열려도 아주 작은 문이 열릴 때,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아시아로 가는 것은 막혔지만, 대신 유럽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 복음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동아시아로 전해지고 ▸우리 한국 땅에도 전해졌고, 이제 이 복음은 ▸전 세계 속으로 더 신속하고 넓게 퍼지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한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큰 사건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부르는 한 사람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한 사람의 필요를 느낄 수 있는 마음, 한 사람의 손짓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당장 수백, 수천, 수만 명을 전도하는 사람은 아니어도, 한 사람에 대한 열정만큼은 꼭 가져야 합니다.

네! 마게도니아 사람, 한 사람이 말하기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 유럽을 대표하는 한 사람, 세상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토이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 “바울이 승선하고 에게해를 건너던 그 배 위에, 유럽의 미래, 세계 인류의 미래가 있었다.”

성도 여러분에게는 어떤 ‘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내가 꼭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생각되는 그 한 사람이 생각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도 절대로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구원받을, 수많은 사람이 그 뒤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에게로 건너가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 마게도니아 사람의 부름을 듣고 바다를 건너 그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에게해! 바다만을 건너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건너갔던 것은! ▸‘자기의 생각’이었습니다. ▸자기의 ‘관심’을 건너간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의 기분, 자기의 감정, 이 모든 것들을 건너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계획을 건너,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따를 때, 하나님의 뜻은 위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웃에게 전도하려면 건너가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완고함’으로 막힌 마음의 담을 건너가야 합니다. ▸때로는 ‘체면과 자존심’도 건너가야 합니다. ▸또한, 나는 구원받았으니 됐다는 ‘영적 이기주의’를 건너가야 합니다. ▸혹시 내가 전도하는데 믿지 않고 대적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도 건너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낯선 쪽으로 건너는 모험을 감행하길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건너가야 합니다. 어색함도 건너가야 합니다. 체면과 자존심, 자기의 관심과 생각, 영적 이기주의를 건너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달 뒤인 7월 첫 주일인 7월 7일에 ‘보고 싶습니다’를! 그리고 10월 셋째 주일에는 ‘새 생명 전도축제’를 하려고 합니다. 아마 벌써부터 마음이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다른 것들은 다 하겠는데 제발 전도하라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건너가라. 가서 도우라. 구원하라.”…

 

셋째, 참된 도움은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예수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함으로 그들을 도왔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성도들을 향하여 더 많은 구제와 사회봉사를 펼치라고 요구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영생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성도와 교회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기관도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고, 궁극의 일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것을 믿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복된 일에, 모두가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이 전도함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2. 당신에게 전도가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와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당신이 건너야 하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 속회 나눔 시간에 내가 꼭 전도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나누고, 전도의 열매를 위해 서로 중보기도 합시다.

김성윤
2024-06-01
조회 315

주신 복을 지켜주는 계명 – 절제 (고전 9:25)

 

성도 여러분! ‘절제’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도 같습니다. 인생의 과욕을 조절하여,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품이 절제입니다.

 

1.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 → 절제

여러분은 첫 계명 하면! 어떤 계명이 떠오르십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神)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이죠! 그러나 이 계명은 출애굽 시대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계명이고,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은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인 ‘에덴동산’을 주셨는데, 그 안에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동산의 복을 누리고 지속해 갈 수 있도록! 한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절제의 계명’입니다. 창 2:16∼17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 창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행복원칙, 에덴의 계명은!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먹고 싶은 본능을 주셔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셨지만, 절제를 통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행하게도 에덴의 행복을 지키는 ‘절제의 계명’을 지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행복을 누리고 지킬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바로 이 ‘절제의 시험’을 통하여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호시탐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절제의 능력을 통하여 행복을 지키는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9:25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사탄은 언제나 인간의 본능에 따라 살라고 유혹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이용하라고 유혹합니다. 또한,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적을 달성하라고 유혹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절제의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모든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사람 아담은 이 본능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에덴의 행복을 지키고 누릴 수 있도록 주신 유일한 계명인 ‘절제’를 잘 지킬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몰랐던 사람 → 에서

식욕이라는 욕망 앞에 절제하지 못한 ‘에서!’ 그는 주어진 엄청난 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창 25:34 →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현실주의자, 향락주의자 ‘에서’에겐 ▸영적인 것, 미래적인 것, 신앙적인 가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현실을 얻기 위해! 신앙을 팔고, 미래를 팔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에서’였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2:16∼17 →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네! 이 사건으로 인해, 에서는 주류인생에서 비주류 인생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절제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갈림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는! ‘주어진 복을 지키는 그릇’입니다.

우리가 버리는 음식만 줄여도 전 세계적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수억 명의 배고픔을 면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음식 쓰레기는 ‘기후 위기’와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음식 쓰레기는 대부분 수분 함유량이 많으므로, 이것을 수거·처리 혹은 재활용할 때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일반 쓰레기의 3∼4배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간의 욕심과 무절제로, 지구가 얼마나 아파하고 힘들어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제는 전 지구적으로 인류가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생긴 자연재해로 벌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복과 미래에 약속된 복을 누리기 위해서, 절제의 삶을 살아 인생의 성을 잘 지킬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잃어버린 계명인 ‘절제’를 다시 찾아 지킵시다.

다니엘은 왕이 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음식을! 맛이나 영양의 관점으로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해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즉 신앙적인 이유로 왕이 주는 진미를 ‘자신을 더럽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먹는 행위는, 단순히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나, 맛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먹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음식이 자신의 식탁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에서는, 성경에서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여 먹지 못하게 한 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먹었으며, 피를 제거하지도 않은 채 먹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음식들은 그들이 섬기는 이방 신 앞에 바쳐진 후의 음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다니엘은 그런 음식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디에 뜻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식사기도와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잔반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이 식탁이 과연 나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농민을 죽이는 과정을 거쳐 온 것이라면! 우리도 다니엘과 같이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외면하거나, 모르거나, 부인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창조신앙에 무감각한 ‘생태적 문맹’의 소치인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먹거리를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 관심사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환경선교주일’로 지키면서 특별히 ‘그린하트액션 선포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을 ‘섭씨 1.5도’ 이내로 막지 못하면, 기후체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망가지게 된다는 것을 이미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1.2°c가 높아졌는데도! 전 지구적인 생태계의 질서가 흐트러져서 폭염, 폭우, 가뭄, 난데없는 우박, 기류변화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재난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크기로 자연의 공격을 받고 있어, 자연 세계가 점점 더 두려운 존재가 되어 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좀 더 확대되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창조신앙을 가지고 자연과 환경을 보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리고 동참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녹색 심장(Green Heart)을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이것을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은 없습니다. 부서별로 각 과제를 주보에 실어 들였는데! 특별히 우리 장년들이 해야 할 일은 아주 가볍습니다. 그동안 여선교회, 남선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 플로깅을 통해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해 왔는데! 이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탄소제로 녹색교회’ 운동을 소개하는 이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함께 자연을 잘 돌봅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꼭 플로깅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양복 옷깃에 단 녹색심장 브로치와, 여성들이 팔찌나 책갈피, 혹은 핸드백에 다는 장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코바늘 뜨개질로 만든 장신구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평상시에 달거나 걸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건 뭐예요?’라고 묻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녹색마음’을 전하시면 됩니다. <Ex: 서부연회 참석 – 브로치>

그런데! 잘 전할 자신이 없으면! 이 ‘전도지’를 주면서 ‘여기 QR코드를 찍어서 한 번 들어봐!’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쉽죠! 함께 하십시다. “전도는 쉽다!” “녹색심장 전하기도 쉽다!”

성도 여러분! 성경적인 관점에서 ‘파괴된 자연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은 → ‘욕심으로 타락한 인간이, 다시 창조신앙을 가진 인간으로 회복되면 자연도 회복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입니다. 본래 신앙과 욕심은 반(反)비례해야 정상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줄이고 절제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자연을 돌보고, 이웃과 공존하는 길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많이 가지고 누리고 소비하는 것을 복된 삶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회개하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에서 내려서야 합니다.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길이 좁아 찾는 사람들이 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절제의 길’, ‘청지기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환경문제의 현안들에 대하여 전체 10분 이내로 나눠봅시다. (예: 폭염, 폭우, 가뭄, 해수 온도 상승, 물과 대기오염 등)

 

2. 신앙인들에게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회복하는 사명’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지? 교회에서 진행하는 ‘그린하트액션’에 참여할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3. 교회적으로 환경을 살리고, 과소비를 줄일 수 있는 실천적 일들은 무엇일지? 속회마다 정리하여 교구장 에게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성윤
2024-05-25
조회 253

복음은 가둘 수 없다 (행 10:9∼16, 34∼48)

 

오늘의 주제는 ⇨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복음전파를 가로막지 말자!”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선교하려면! 선교사 자신의 교만,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피선교지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 가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가족들의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인가귀도를 이루지 못한 성도님들은!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1. 성령의 역사 앞에 먼저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제자인 베드로를 변화시키고 있는 내용이 사도행전 10장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옥상 지붕 위로 올라가 낮 12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네 귀퉁이에 끈을 맨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네 발 달린 온갖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어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 ⇨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행 10:13)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즉각 ▶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을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행 10:14)라며 거부합니다.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려오기를 ⇨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행 10:15) 이런 과정이 세 번 반복된 다음에, 보자기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직접 “고넬료에게 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이상한 환상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베드로의 ‘영적 편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거듭 당부하셨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여전히! ⇨ 유대인만이 구원받은 백성이요,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 ‘영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여전히 속되고 부정한 존재’였습니다.

 

2. 유대인은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유대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생각은! 배타적이며, 부정적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은 ⇨ 유대인으로서는 심지어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 하더라도, 생각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고, 뚫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의 근원으로 택하고 부르셨습니다. 창 12:2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네!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모든 민족이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 하나님의 축복이 단 한 방울도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세계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독선과 욕심의 장벽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선민의식이고, 유대주의의 병폐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세 번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익숙하고, 인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바랐고, 그 범위를 벗어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런 편견과 고정 관념을 먼저 깨뜨리시고, 복음전파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겸허하게 경청하며,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3.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

드디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 이 사건은 선교사(宣敎史)적으로 대 전환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사건은, 외형적으로 보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혁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비로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처음으로 ‘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행 11:18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서 성령과 세례를 받는 이야기이고, 11장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 곧 자기가 이방인 백부장을 만나 그를 개종시킨 일의 경과를 보고하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행 15장에 가서는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되는 길에 대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15:11∼20 요약 → “우리는 그들이(이방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온 무리가 가만히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① 우상의 더러운 것과 ② 음행과 ③ 목매어 죽인 것과 피째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옳으니…” 네! 마침내 이방인들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지켜야 하는 규정에서 벗어나,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이방인 고넬료 가정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마치 드라마처럼 아주 세세한 내용들을 이 이야기 속에 담아놓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흥미로운 사실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던 곳이 ‘욥바’라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행 10:5∼6 →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성도 여러분! ‘욥바’ 하면 성경에서 생각나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네! ‘요나’입니다. ‘욥바’는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이방 땅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이 지시한 이방 땅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배를 타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욘 1:3 →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는 이방인을 회개시켜 구원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바로 그 ‘욥바’ 항구 도시에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베드로의 본래 이름이 무엇입니까 ‘시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바요나 시몬”, 즉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소개합니다. 마 16:17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Simon son of Jonah) 네가 복이 있도다.”

그런데 요나의 아들인 그 ‘시몬’이 구약성경의 요나처럼, 바로 그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서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욥바’란 지명이 갖고 있는 이런 의미 때문에,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을 만나 개종시키는 이야기에 이 ‘욥바’라는 지명을 6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행 10:5, 8, 23, 32, 행 11:5, 13 이것은 구약성경의 요나가 ‘욥바에서’ 이방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일을 상기시킴으로써, 사도행전에서의 요나의 아들인 시몬 베드로는 “욥바에서” 성령의 지시를 따라 이방인 백부장을 개종시킨 일을 ‘대조하여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 그러면 어떻게 복음은 유대인 장벽을 넘게 되었습니까? ⇨ 먼저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베드로의 회심’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행 10∼11장의 내용을 가리켜 일반적으로는 “고넬료의 회심”(X)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베드로의 회심”(O)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그의 온 집안 식구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베드로의 신앙과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던 ‘유대주의’를 떨쳐내고, 변화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선! 먼저 이런 베드로의 변화와 회심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저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그가 구원받기는 글렀어!”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네!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로 작정하고 천국의 보자기에 담아 주신 이방인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신 환상에 순종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변화와 회심이 있었기에 고넬료 가정의 구원이 가능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와 전도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까지 어떤 감정의 앙금이 있거나, 어떤 선입견과 편견이 있습니까? 혹은 어떤 이념과 사상의 간극이 있어서입니까? 오늘 선포된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십시다. 그래서 복음을 우리의 생각에 가두어 두지 말고, 세상 모든 삶이 구원 얻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자신에게 있는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관계가 틀어졌던 일이 있다면 나눠봅 시다. 그리고 누가 먼저 변해야 할 사람인지? 그 변화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모든 민족이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독선과 욕심의 장벽을 쌓았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구약의 요나 선지자와 vs 사도행전의 요나의 아들 베드로의 차이점에 대해서 나눠보고, 나는 ‘하나님의 뜻과 원하심’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