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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김성윤
1일전
조회 88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창 25:23∼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의 순간적인 선택으로 그의 인생 전체가 어떻게 바뀌게 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종종! 길고 장대한 이야기보다, 아주 짧은 ‘순간의 선택’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드러내 줄 때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중요한 영적 진리’를 붙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육체의 욕구 때문에 쉽게 영적 가치를 팽개쳐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 당시 장자(Firstborn, 맏아들)는 가문의 대를 잇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법적·경제적·종교적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성경학자 카일(Keil)과 델리치(Delitzsch)에 의하면 ‘장자의 4가지 핵심 특권과 권리’는 ① 두 몫의 상속권 (Double Portion of Inheritance) ② 가문의 지도권과 통치권 (Leadership and Authority) ③ 영적 제사장 직분과 거룩한 구별 (Spiritual Sanctification) ④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을 권리 (Father's Special Blessing)입니다.

에서도 같은 문화권 속에서 살았기에, 이런 장자의 ‘특권과 권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고, 그것은 단순한 재산 이상의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장자인 자신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과 연결된 자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는 통로라는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장의 배고픔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육체적 욕구가 그의 판단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중요한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아는 대로 항상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피곤하고, 지치고,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 우리는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가 힘들 때, 배고플 때, 외로울 때, 분노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육체와 마음의 상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런 때에 나는 실수할 수 있고, 신앙인답지 못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스스로 알고, 경계해야 합니다.

즉, 힘들고 배고프고 외롭고 분노할 때야말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때이고, 마음을 지켜야 할 중요한 때라는 것을, 일부러 인식해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의식의 각성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육체적인 피곤함과 감정의 흔들림으로 인해서, 쉽게 영적 가치를 팽개쳐버리고, 엉뚱하게 가치 없는 선택을 하는 우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의 욕구 때문에, 쉽게 영적 가치를 내팽개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선택은 우리 인생을 수렁으로 몰고 들어가고, 실패의 인생으로 이어지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민한 분별력과 영적 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영적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선택은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동생 야곱은! 장자권의 특권과 그 복이 무엇이며 그 가치가 어떠한지를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형 에서가 장자인 이상, 자기가 그 장자권을 뺏을 수 없다는 것과, 설사 뺏으려 해도 아버지가 형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형 에서가 육체적인 힘도 훨씬 더 강했기 때문에, 질투심을 갖고 있었을 뿐 어찌할 뾰족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야말로 생각지도 않은 기회가 야곱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형 에서가 야곱이 요리한 팥죽을 달라고 했을 때, 그럼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라고 말한 것이,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치밀한 계획 가운데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사냥터에서 기진맥진해서 돌아온 한 형 에서에게 ‘장난 반, 진지함 반으로’ 그냥 한 번 던져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에서입니다. 그렇게 던져본 말을! 어리석게 덥석 물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32절입니다. 창 25:32 →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 볼 수 있는 에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장자의 명분을, 죽 한 그릇보다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현실의 배고픔에 미래의 축복을 쉽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한 번 던져본 말에 형 에서가 걸려들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에서에게 ‘그럼 맹세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에서는 생각 없이 그냥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창 25:33 →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그는 동생에게 낚인 줄도 모르고, 맹세까지 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의 평가가 다음절에 이어집니다. 창 25:34 →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성도 여러분! 이런 에서처럼 현실적인 것, 물질적인 것, 먹고 사는 문제가 영적인 가치보다 앞설 때,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든! 모든 것을 잃고 망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매일 이와 같은 선택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앞에도 ‘죽 한 그릇’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앞의 편안함일 수도 있고, 당장의 이익일 수도 있으며, 감정적인 만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선택은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창 25:34b →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 표현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에서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덜 중요한 것’과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단순한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왜곡이고 그에 따른 선택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동일한 위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더 쉽게 반응합니다. 당장의 이익, 눈앞의 기회, 즉각적인 만족은 매우 강력한 유혹이 됩니다.

우리의 선택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에서는 그 순간에는 배고픔을 해결했지만, 그는 평생 장자권을 잃어버린 아픔을 안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영적인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쉽고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가장 무겁고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은혜로 일하시지만 선택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지만,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며, 그 선택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성취되는 ‘신비로운 조화’의 관계, 즉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 욕구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었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이후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그것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고 선언합니다. 히 12:16∼17 →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히 팥죽을 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거룩한 것을 속된 것과 바꾸는 가치의 왜곡을 의미합니다. 에서는 영원한 언약 즉, 장자권을 일시적인 물질 즉, 팥죽보다 아래에 두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책임은! 바로 이 ‘가치 부여’에 있습니다. 무엇을 더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덜 귀하게 여기느냐가 그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며, 그 결정에 따른 결과는 고스란히 본인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책임을 그냥 없던 것으로 해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지만,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역사적·시간적 결과’까지 모두 삭제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를 받아주시지만, 그가 허비한 세월과 잃어버린 기회는 되돌려주지 않으십니다. 에서는 눈물로 구했으나, 회개할 기회! 즉 결과를 뒤집을 기회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선택의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선택의 자리에서 언제나 주저 없이 하나님을 선택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선택으로 믿음을 지키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가치를 붙드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며, 결국 우리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는 길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최근에 육체적으로 지치거나 감정적으로 예민해져서 ‘팥죽 한 그릇’과 같은 유혹 앞에서 나쁜 선택을 했었다면 나눠봅시다.

 

2. 죄를 ‘가치의 왜곡’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내가 영적 가치(예배, 말씀, 기도, 공동체 등)를 가볍게 여기고, 세상적인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긴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받은 영적인 ‘장자의 특권’ 중(① 두 몫의 상속권 ② 가문의 지도권과 통치권 ③ 영적 제사장 직분과 거룩한 구별 ④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을 권리) 가장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특권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6-04-11
조회 124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 (창 22:1∼14)

 

창세기 22장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 앞에 선 아브라함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실 때는, 그 시험을 통과할 힘과 함께, 그 너머에 숨겨진 ‘축복의 숫양’을 준비해 두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첫째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는 뜻이요, 둘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가져가는지 유심히 살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준비만 해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축복을 받아 누리는지 지켜보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첫째, 순종의 3일 길을 걷는 자에게는 준비된 것을 보는 ‘눈’을 주십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 22:1a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은 넘어뜨리기 위한 ‘유혹’이 아니라, 믿음을 드러내고 연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테스트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설명되지 않아도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해하고 나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을 향해 3일 길을 걷는 동안 그의 마음은 무너졌지만, 그의 발걸음은 순종의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80km가 넘어, 꼬박 사흘이 걸리는 길입니다.

성경에서 이 ‘3일’은 단순한 날 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한계점, 우리가 넘어야 할 고비의 끝을 상징합니다.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아브라함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돌아가자! 이런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3일의 고비를 끝내 넘겼습니다.

오늘 성경에 중요한 단어, 키워드가 하나 나옵니다.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된 단어인데, 바로 히브리어로 ‘라아’(ha;r;)라는 단어입니다. → ‘보다’, ‘바라보다’라는 말로, 영어로는 ‘see’ 또는 ‘look’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영어로 ‘see after’ 또는 ‘look after’라고 쓰면! →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돌)봐 준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전에도 ‘보아 주다’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거나 힘이 되어 주는 것” 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봅니다.’ 그리고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도 ‘보아주십니다.’ 먼저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창 22:4 →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기 처음 ‘라아’란 단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를 보나요? 그곳이 어딥니까? ‘모리아 산’이고 오늘 14절에 표현하고 있는 대로 ‘여호와의 산’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곳을 바라보면서, 누구를 생각하면서 보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냥 ‘산’을 보는 게 아니라, 믿음의 눈을 들어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로다!” 하는 마음으로 그 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기대와 소망! 믿음!이 8절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창 22:8 →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이레)하시리라 하고…” 여기 ‘준비하시리라’ 했는데! → ‘이레’(ha;r;)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라아’(ha;r) ‘보다’라는 단어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아주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는 말은 →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보아주실 거야!’ ‘도와주실 거야!’

네! 아브라함은 지금 눈을 들어서 자기를 ‘보아주시는 하나님!’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요?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하시지만, 우리가 시험당할 때 우리를 ‘보아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너 잘하나 한번 보자!’ 이렇게 뒷짐 지고 그냥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잘할 수 있도록 돌봐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준비하심은,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들고 있는 인생의 계산기를 내려놓고, 순종의 3일 길을 걸어 보십시오. 그때 비로소 ‘여호와 이레’의 지도가 펼쳐질 것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통과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은 3일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내리치려는 순간, 하나님이 다급하게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창 22:12b →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오히려 나에게 손해를 주는 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지만, 오래도록 소원을 들어주시지도 않고, 나중엔 가장 소중한 아들까지도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본래 모습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참 좋다!” 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통째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을, 아브라함을 위해 이삭을, 이삭을 위해 리브가를, 야곱을 위해 이스라엘을, 요셉을 위해 애굽의 총리 자리를, 에스더를 위해 왕후의 자리를, 심지어 요나를 위해 지중해 깊은 곳에 물고기까지 예비해 두신 분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성도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 드리기 힘든 ‘이삭’은 무엇입니까? 정성껏 키워온 자녀입니까? 평생을 바쳐 일군 사업체입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명예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들을 우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이 요청하시면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를 테스트 하십니다. 그리고 그냥 테스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테스트! 시험을 잘 통과하는 자에게 주실 아름다운 복을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 두고 계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움켜쥔 손을 펴지 않으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을 볼 수도 없고, 그것을 잡아 제물로 드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이삭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여호와 이레’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완성된 예비하심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양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할 때 올라왔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 아래에서부터 장작을 메고 올라올 때, 산 반대편에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숫양이 이미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3일 길의 과정 중에 포기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3일이 일 년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십 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거기까지만 가면! 예비해 두신 축복을 받을 수 있는데, 중간에 그냥 돌아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 장인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조금만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조금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이 덜커덩 손에 잡힌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은 수풀에 걸린 숫양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의 인생 반대편 언덕에서 축복의 숫양을 몰고 오고 계십니다. 13절입니다. 창 22:13 →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봅니다. 뭘 봤습니까? 한 숫양이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4절도 보겠습니다. 창 22:14a →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네! ⇨ “그 땅 이름은,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는 곳 하나님이 ‘보아주신 곳!’ ‘돌봐주시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정리해 보면! 믿음은!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신뢰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 이레’의 가장 깊고도 완전한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수풀에 걸린 숫양이 이삭을 대신했듯이, 갈보리 언덕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만 생각하면, 그것은 ‘저주이고 죽음이고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 뒤에 ‘부활과 영생’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이 확고하게 믿어지고 영적으로 보여야! 우리는 순종할 수 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관계’나 ‘모임’은 무엇이며,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얻는 유익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이삭’을 요구하셨습니다. 현재 내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거나, 너무 소중해서 하나님께 맡기기를 주저하는 ‘나만의 이삭(자녀, 건강, 사업, 명예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이나 기도의 제목 중 ‘3일 길의 고비’를 지나는 것 같은 일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처럼 여호와 이레의 체험이 있었다면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6-04-04
조회 125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찾는 것 (요 20:1∼18)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역사적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이들의 심령은! 부활에 대한 기대와 소망보다는, 상실감과 혼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그 아침에 사람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가?’라는 주관적인 갈망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 ‘마리아나 제자들이 찾고자 했던 것’과 vs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물’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역시, 매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만, 각자의 기대와 바람은! 주님이 의도하시고 원하시는 바와는 아주 동떨어진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붙잡아야 할 ‘참 신앙의 실체’는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1. 우리는 죽은 예수(과거의 유물)를 찾으나, 하나님은 살아 계신 주(현존의 능력)를 만나게 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간절했지만, 그 간절함의 대상은 놀랍게도 ‘살아계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의 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부활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이의 시신에 향유를 부어 자신의 마지막 정성이라도 기울이며, 그 곁을 잠시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도 갸륵하고 지극한 마음이긴 하지만, 정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주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부활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의 모습 속에는 이런 ‘무덤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을 저는 ‘박물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박물관에는 지금 살아 있는 것들이 있는 게 아니라, 지나간 유물, 과거의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박물관의 유물들’을 구경하면서 그냥 지나갑니다. 그리고 ‘아! 좋다. 대단하네.’ 감탄할 따름입니다.

이런 박물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대표적인 현상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 ① 신앙의 기복적 도구화: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관심 없고, 반대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예수님이나, 지친 마음을 달래줄 ‘위로용 예수님’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② 박제된 교리: 예수님에 대해서 머릿속의 지식이나, 과거의 뜨거웠던 체험 속에 가두어 두고 있지, 오늘 살아 역사하는 동적인 신앙은 없습니다. ③ 형식적 종교성: 주일 예배 참석이나 헌금을 드리면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섬김과 봉사 전도 같은 일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도자기 명장’이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그 스승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레와 도구들’을 정성껏 닦아서 전시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도구들을 보며 감탄했지만, 그 전시관에서는 더 이상 단 한 점의 도자기도 빚어지질 않았습니다. 도구는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움직일 ‘살아있는 명장의 손’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똑같습니다. 찬란한 전통, 아름다운 찬양, 화려하고 잘 정돈된 예배당 같은 ‘도구’는 소중하지만, 그것이 주님 자체는 아닙니다. 오히려 미숙한 손이라도 움직여, 오가는 사람들이 보게 될 화단을 가꾸고, 화장실이나 유아실을 깨끗이 관리하는 섬김의 일을 하고, 성악가 같은 목소리가 아니어도 찬양대나 찬양단에 합류하여 함께 찬양으로 영광 돌리고, 두렵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전도지나 전도물품을 전하면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행복하세요.’라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기대를 뒤엎고, 빈 무덤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내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 향수’에 매달리지 말고, ‘인격적인 만남’ ‘삶에서의 만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내 필요에 따라 불러내는 손님이 아니라, 내 삶의 주권을 쥐고 계신 주인(Lord)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배의 형식을 붙잡는 정성보다, 그 ‘형식 속에 임재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을 갈망하며,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리라는 거룩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는 사건의 해답(이성적 이해)을 찾으나, 하나님은 말씀을 온전히 믿는 믿음(전적인 신뢰)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력 질주하여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 안을 샅샅이 조사하며,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세마포와 수건이 잘 정돈 되어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성적으로 추론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이 “보고 믿었다”고 기록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성경의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라고 덧붙였습니다. 요 20:8∼9 →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vs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 ‘보고 믿더라’는 말은! ‘말씀’에 기반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눈으로 ‘본 것’에 기반한 ‘불완전한 믿음’ ‘반쪽짜리 믿음’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내 이성과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납득이 되는 것만 믿으려 하는 ‘합리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전적인 믿음과 신뢰’를 요구하시는 분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상황이라는 안개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아니라,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지도 삼아 발을 내딛는 용기를 말합니다. 상황이 내 기대와 정반대로 흘러갈지라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부활 신앙입니다.

새벽 일찍 무덤으로 갔던 막달라 마리아나, 달려갔던 제자들은 실상 주님께서는 몇 번이나 ‘고난받고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말씀’ ‘성경’에 더욱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듣고 깨달아, 그 말씀의 부르심과 약속 위에 인생의 닻을 내리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는 잃어버린 과거(애착과 상처)를 찾으나,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파송의 미래)을 주십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이 곁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과거의 예수님, 즉 자신이 시중들고 돌보았던 ‘육신의 예수’를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울면서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요 20:16 →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주님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실 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김춘수의 꽃과 같은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눈이 떠져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또한 주님께 손을 뻗쳤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몸을 피하시면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20:17a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과거의 방식’으로는 주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과거의 예수님! 즉 자신이 시중들고 돌보았던 ‘육신의 예수님’을 되찾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은 이제 부활의 몸을 입은 분이시기에! ‘성령을 통한 소통의 방식’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는 주님과 소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과거로 돌아가거나, 현재에 묶여 있길 원치 않으심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20:17b →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 예수님은 마리아를 무덤가의 슬픈 여인으로 그냥 두지 않으시고, 인류 최초의 ‘부활의 증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사명의 자리로 밀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거룩한 등 떠 밈(Holy Push)’입니다. 이제 ‘나의 위로’를 구하는 단계에서, ‘타인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사명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찾아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단순한 마음의 평안입니까? 아니면 삶의 꼬인 타래를 풀어줄 기적입니까? 부활의 주님은!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너는 가서 내 형제자매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 명령 하십니다.

우리는 무덤의 종교에서 부활의 종교! 생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빈 무덤만 확인하고 허탈하게 돌아가는 종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세상으로 당당히 파송 받는 사명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일터에, 가정에, 고통의 현장에 살아계십니다. “가서 전하라!” 이 주님의 명령을 품고, 부활의 생명을 온 세상에 흘려보내는 거룩한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부활의 아침에 마리아와 제자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았듯이, 지금 나는 무엇을 가장 간절히 찾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바)인지 나눠봅시다.

 

2.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예전의 영광이나 혹은 과거의 상처나 실패라면 새로운 변화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창조적 미래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인지? 솔직하게 나눠봅시다.

 

3. 이번 부활절 이후, 내 삶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또한 ‘부활의 증인으로서 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자신의 결단을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3-28
조회 153

제목: 발을 닦고, 길을 닦아 보이다. (요 13:1∼15)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심으로, 그 제자들인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길’을 닦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 ‘시간적인 끝’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완전하게’ ‘최대로’ ‘목적을 이룰 때까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고 ▸중간에 멈추지 않는 사랑이며 ▸상대의 반응에 따라 바뀌지 않는 사랑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 계십니까? 곧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보통 큰 고난을 앞두거나, 누군가에게 배신당할 것을 알면 어떻게 반응합니까?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됩니다. 내 상처, 내 두려움, 내 억울함에 집중합니다. 즉 내 감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돌볼 여유는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길을 여신 ‘사랑의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발을 씻어 주는 대상 중에는 자신을 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고, 당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 할 베드로와, 결국엔 다 도망갈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 원수까지도 품는 ‘사랑의 길’을 먼저 닦아 보이신 것입니다.

하와이 몰로카이(Molokai)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던 다미안 신부는 33살의 나이로, 그 섬으로 들어가기를 자원해 700여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보게 됩니다. 그는 처음엔 나병 환자들에게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스스럼없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갔지만 “당신은 건강하고 깨끗하지만, 우리는 썩어가는 몸을 가졌는데, 당신이 우리의 고통을 어찌 알겠는가?”라며 냉소했습니다. 그러자 다미안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님 제가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저에게도 한센병을 허락하옵소서.”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다미안 신부도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첫 강단에 서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나병 환자 여러분!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가 ‘여러분’이 아닌 ‘우리’라고 부르는 순간! 온 회중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 발을 닦으신 것은!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우리의 ‘더러움’과 ‘낮음’ 속으로 완전히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우리’가 되셔서 사랑의 길을 닦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길 때 그 마음의 동기가 불순해서는 안 됩니다. 즉, 내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보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배신자들의 발까지 닦으시며 ‘끝까지 사랑하는 길’을 우리 앞에 닦아 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답게, 그 사랑의 길로 들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거절할 수 없는 ‘은혜의 길’을 닦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는 펄쩍 뛰었습니다. 요 13:8a →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베드로의 눈에는 주님의 그런 행동이 격에 맞지 않아 보였고, 송구스러웠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3:8b →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발을 내미는 것은! 나의 부끄러움과 허물을 주님 앞에 노출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 발은 ‘삶의 현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묻은 먼지, 죄, 상처, 피로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매일의 삶 속에서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 앞에 나아와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은 단번에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씻김 받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날마다 당신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도록 ‘은혜의 길’을 닦아 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께 첫 번째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요즘 주님께 발을 씻김 받고 계십니까? 즉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계십니까? ▸기도 가운데 마음을 씻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냥 그냥 살아가고 계십니까? 씻김 받지 않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 씻김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 날마다 발을 씻김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절대로 나를 못 씻깁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겸손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의를 지키려는 교만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주님이 닦아주시는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매일 발을 내밀어야 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 살면서 세상 욕심에 내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닦아 주시옵소서.” 이 고백을 드리므로,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은혜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먼저 행하여 ‘본을 보이는 길’을 닦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 옷을 입고 앉으신 예수님은! 이 세족식의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13:14∼15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는 말만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수건을 두르시고, 물을 떠 오시고, 허리를 굽혀 먼지 묻은 발을 만지시며 닦아주셨습니다.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야 할지 그 ‘길을 닦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말로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요 13:15 →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나는 이런 일과는 맞질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건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행하라.”

여기서 저는 여러분께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를 추구하십니까? ▸어디서든 낮은 자리를 찾으십니까? 아니면! 높은 자리를 추구하십니까? ▸보이지 않는 섬김의 자리를 선택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인정받고 드러나는 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진짜 신앙은! ‘어디에 앉아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3:17 →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네! 아는 것만으로는 복이 되지 않습니다. 발을 씻기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 역시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이웃의 발을 씻기기 위해 몸을 낮출 때, 그곳에 천국의 복이 임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닦아 놓으신 그 길을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 길은 낮은 곳으로 향하는 길이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씻어 주는 섬김의 길입니다. 주님처럼 낮아져서 섬김의 본을 보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가장 거룩한 손으로 가장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발을 닦으심으로써, 죽음조차 이기는 사랑의 길을 닦으셨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은혜의 길을 닦으셨고, ▸우리가 따라야 할 섬김의 본이라는 길을 닦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길을 뒤 따라가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이 닦아야 할 ‘발’은 누구의 발입니까? 미워했던 배우자의 발입니까? 이해되지 않던 자녀의 발입니까? 아니면 직장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동료나 상사의 발입니까? 실제 발을 씻는 것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의 허물을 들춰내는 대신 조용히 덮어주는 것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일에 먼저 손을 뻗는 것 ▸내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주님의 이름으로 한 번 더 참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의 ‘세족식’이며, ‘주님이 닦아 놓으신 길’을 걷는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음성을 가슴에 새기고, 이번 한 주간 낮은 곳에서 승리하시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의 삶에서 ‘끝까지 사랑하기 어려운 관계’는 누구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과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는지 나눠봅시다.


2. 교회와 가정, 일터에서 나는 ‘발을 닦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발을 내미는 사람’입니까? 나의 모습에서 바꾸고 달라져야 할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3. 우리는 먼저 주님께 씻김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을 씻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냥 그냥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3-21
조회 133

제목: 믿으면 보이는 것들! (요 11:38∼46)


오늘 본문 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 11:38a →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예수님은 왜 비통해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생명의 주관자인 당신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이라는 권세 앞에 압도당해 절망하고 있는 인간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절망의 돌문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오늘 그 돌문 앞에 서 계시며, 우리에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 마음의 돌문이 옮겨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목격하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현실의 돌문을 믿음으로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 서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겠다”라는 선포가 아니었습니다. 의외로 “돌을 옮겨 놓으라”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요구였습니다. 사실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돌문이 저절로 굴러가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사람들에게 그 무거운 돌을 옮기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지만, 사람은 사람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그 기적의 마중물은 인간의 ‘순종’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반응을 보십시오. 39절에서 그녀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요 11:39b →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마르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은 ‘상식’이고 ‘과학’이며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 ‘합리성’이 오히려 주님의 기적을 가로막는 ‘돌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사람이 죽고 3일까지는 영혼이 그 주변을 맴돌고 있지만, 4일째는 완전히 떠나 부패가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즉, 마르다의 말은 “이제는 주님이 오셔도 소용없는 ‘완전한 끝’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늦었어.” “상황이 너무 악화됐어.”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 와서”라며 스스로 한계를 정합니다. 내 이성과 경험이라는 ‘돌문’을 닫아놓고, 주님이 일하실 공간을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항공 역학적으로 보면! 꿀벌은 결코 날 수 없는 신체 구조를 가졌다고 합니다. 몸체는 크고 무거운 데 비해, 날개는 너무 작고 약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꿀벌이 인간의 ‘항공 역학 법칙’이라는 상식에 갇혀 있었다면, 평생 땅 위를 기어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꿀벌은 자신이 날 수 없다는 과학적 계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저 날기 위해 날개를 세차게 휘젓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웽’ 소리와 함께 공기 저항을 이겨내고, 하늘을 날며 꽃의 꿀을 땁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통계와 의학적인 소견, 경제의 전망이라는 ‘상식의 법칙’은! 우리에게 “너는 날 수 없어, 너는 끝났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날개를 저어라, 돌을 옮겨라.” 하실 때, 그 상식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자만이 중력을 거스르는 은혜의 비행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의 상식의 돌을 옮겨라. 네 경험의 돌을 옮겨라. 네가 붙들고 있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의 돌을 옮겨라!” 사실! 돌을 옮기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땀이 나고 손이 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돌을 옮길 때 비로소, 무덤 안의 생명이 밖으로 나올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종이 기적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환경 너머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봐야 합니다.

본문 40절에서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십니다. 요 11:40 →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는 보통 ‘보여주면 믿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원리는 반대입니다. ‘믿어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안목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무덤 안의 ‘시체’와 ‘냄새’라는 환경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무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계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눈앞의 환경이라는 안개를 뚫고,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안개가 자욱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 문제, 직장 문제, 건강 문제라는 안개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 환경은 ‘죽었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환경 너머에서 이미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커다란 대리석 바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계십니까? 제가 보기엔 그저 큰 돌덩어리일 뿐인데!” 미켈란젤로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이 돌덩어리 안에 갇혀 있는 다윗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 다윗을 가로막고 있는 불필요한 돌을 깎아내어, 그를 자유롭게 해주길 원합니다.” 거장의 눈에는 투박한 돌덩어리 너머에 숨겨진 걸작품이 이미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빚으시는 위대한 조각가이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시련을 보며 “저 인생은 이미 깨진 돌덩어리다.” 이렇게 조롱하지만! 주님은 그 고난을 깎아내어 만드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뜬다는 것은! 문제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크기를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네! 지금 당장은! 냄새가 나고 암담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반드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라고 선포하며 나아가십시오.

안개가 걷히면 찬란한 태양이 나타나듯, 믿음의 안목으로 인내할 때 여러분의 삶에 감추어둔 보화가 드러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제 마침내 기적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41절에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요 11:41 →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직 나사로는 무덤 속에 있고, 기적은 일어나기 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이루어진 줄 믿고,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주를 진동시키는 권세 있는 음성으로 외치십니다. 요 11:43b →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이 한마디에 죽음의 사슬이 끊어졌습니다. 썩어 들어가던 세포가 살아나고,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이 부르심은! 단순히 한 개인을 부르는 소리가 아닙니다. 죽음의 통치 아래 있는 온 인류를 향한 ‘생명의 선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서 이름을 지정하지 않고 그냥 “나오라”고 하셨다면, 인류 역사상 죽었던 모든 자가 다 무덤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성서학자들의 해석이 있을 만큼, 이 음성에는 창조주의 권능이 담겨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한 마디를 더 하십니다. 요 11:44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이 말씀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생명을 얻었으나, 여전히 죽음의 굴레인 ‘수의’에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생명은 얻었으되 누림이 없고, 살아났으되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구원의 확신은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 가난의 저주, 열등감이라는 수의를 입은 채, 뒤뚱거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이 단순히 ‘지옥 안 가고, 천국 가는 존재’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묶고 있는 모든 결박이 풀려 ‘자유롭게 다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사로를 칭칭 감고 있던 수의 베를 풀어주듯, 오늘 이 시간! 성령의 가위가 여러분의 마음을 묶고 있는 근심의 끈을 끊어 내기를 바랍니다. “나는 원래 이래”, “우리 집안은 안 돼”라는 저주의 수의를 벗어 던지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생명의 능력은 우리를 무덤 밖으로 이끌어 낼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절망을 희망으로 뒤집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우울함, 열등감, 경제적인 위축감에서 당당히 걸어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주신 생명은! 무덤 속에 갇혀 있는 생명이 아니라, 힘차게 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역동적인 생명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으면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내 삶을 향한 주님의 계획이 보이며,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이 보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무덤 속에 머물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의 빛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 나가는 승리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마르다의 ‘상식’이 기적을 가로막는 돌문이 되었던 것처럼, 현재 내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나만의 상식이나 경험의 돌문’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플로렌스 채드윅이 안개 때문에 포기했던 것처럼, 요즘 나의 믿음의 눈을 가리고 있는 ‘인생의 안개(건강, 경제, 관계 등)’는 무엇인가요? 그 안개 너머에 계신 주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3.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수의에 묶여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옭아매고 있는 ‘과거의 습관, 상처, 혹은 부정적인 생각’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3-14
조회 152

제목: 선한 목자 -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 (요 10:11∼15)


<선한 목자의 세 가지 증거>


1. 이름을 알고 부르시는 목자 (인격적 관계)

요 10:14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목자는 양들을 ‘떼’나 ‘무리’로 보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특징을 알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표현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깊은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선한 목자는! 양을 그냥 한 집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느 양의 다리가 약한지, 어떤 양이 겁이 많은지, 어느 양에게 상처가 있는지 그 형편과 사정을 속속들이 압니다. 마찬가지로, 양도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압니다. 이는 훈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저 목소리를 따라가면! 푸른초장과 쉴 만한 물가가 나온다”는 경험적 신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기능’이 아닌 ‘생명’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성도를 향한 ‘관심과 책임’ 그리고 성도의 ‘신뢰와 순종’이 어우러진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목사는 단순히 설교하는 사람이고, 성도는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영혼이 연결되어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 ‘영적 가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성도의 이름이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그 성도가 지내온 교회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는 유창한 설교나 세련된 행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기도해 주는 목자이다.” “목사님은 내 이름을 알고 불러준다.” 이렇게 성도의 신뢰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또한, 양도 목자가 앞서가면 그 뒤를 따르듯, 목사가 말씀의 길을 앞서 걸어갈 때 성도들도 기꺼이 그의 영적 지도력을 신뢰하고 말씀을 따르는 순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동의 한 선교사가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한밤중에 커다란 동굴에 여러 목자의 양 떼가 뒤섞여서 잠을 잤습니다. 아침이 되자, 한 목자가 동굴 밖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휘파람 소리를 내서 양들을 불러냈습니다. 그러자 수백 마리의 양 떼 가운데, 신기하게도 그 목자의 양들만 줄지어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가 신기해서 그 목자의 옷을 빌려 입고 똑같이 휘파람 흉내를 냈지만, 양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옷’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자도 자기 양을 알지만, 양도 자기 목자를 알아야 진정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우리를 ‘교인 1, 교인 2’로 보지 않으십니다.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인 것처럼 소중히 여기며 이름을 부르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아픔, 남모를 눈물, 그리고 가장 깊은 갈망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3:1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또 응답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끝까지 곁을 지키는 목자 (책임과 보호)

요 10:12∼13 →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여기 ‘삯꾼’과 ‘목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양이 자기의 것이 아니고, 자기의 안전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쪽으로 다가가서 양들을 보호하고 돌봅니다.

삯꾼은 위기 상황에서 ‘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위기 상황에서 ‘양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시는 주님이심을, 오늘 성경은 ‘양의 문(門)이 된 목자’라는 표현에 담았습니다. 요 10:7 →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밤이 되면 돌을 쌓아 만든 우리로 양들을 들여보냅니다. 그런데 이 우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사방은 돌벽으로 막혀 있지만, 양들이 드나드는 통로에는 정작 ‘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성지 순례객이 그런 모습을 보고 목자에게 물었습니다. “문도 없는데, 밤사이에 사나운 짐승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목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바로 문입니다.” 밤이 깊어 양들이 다 잠들면, 목자는 그 좁은 출입구 바닥에 자신의 몸을 누입니다. 목자가 그 통로를 온몸으로 막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늑대 같은 사나운 짐승이 양을 잡아먹으려면, 반드시 목자의 몸을 밟고 지나가야만 합니다. 목자는 밤새 찬 이슬을 맞고, 맹수의 으르렁거림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양들의 잠자리를 지킵니다. 목자에게 양은 ‘관리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서라도 지켜야 할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 인생의 위기 앞에서 뒷짐 지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단이 우리를 삼키려 할 때, 주님은 당신의 몸으로 그 공격을 직접 막아내시는 ‘살아있는 문’이 되어 주십니다. “내가 너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나를 통과하지 않고는 그 어떤 절망도 너를 건드릴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 ‘책임감 있는 사랑’이 오늘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세상 모두가 나를 떠나도, 끝까지 우리를 지키며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치가 없을 때 우리 곁을 떠나지만, 주님은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목숨을 버려 생명을 주시는 목자 (희생적 사랑)

요 10:11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단순히 직업적인 책임감을 넘어선 숭고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선한 목자의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는 ‘희생’ victim이 아니라, 양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내어줌’ offering입니다. 세상의 리더십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랫사람을 희생시키지만, 주님의 리더십은 양들의 생존을 위해 목자가 먼저 죽는 리더십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입니다.

한 젊은 엄마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영국 웨일스 남부의 언덕길을 걷다가,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사방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목적지에 도착하질 못했습니다. 눈보라가 잦아든 후 수색대는 눈더미 속에서 그녀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품에 있는 아기는 살아 있었고 건강했습니다. 엄마가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아기를 감싼 덕분에 엄마의 온기와 덮어싼 옷이 체온을 보존하여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 아기가 자라, 훗날 세계 1차대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 수상(1916∼1922)이 되어 승리로 이끈 ‘데이빗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입니다.

이렇게 ‘자기 목숨을 버려,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고 신비입니다. 양을 살리기 위해 목자가 죽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의 눈보라를 주님이 온몸으로 막아내셨기에, 오늘 우리는 따뜻한 생명의 품 안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 한 사람도 하찮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친히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셨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당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위험을 감수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양을 살리기 위해 목자가 죽는 것은, 세상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보통은 양이 희생되고 목자가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목자가 죽고 양이 삽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분이 버려지심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분이 정죄 받으심으로, 우리가 용서받았습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도전이 있습니다. 먼저는, ‘위로’입니다. 혹시 삶이 두렵고 외롭습니까? 버려진 것 같습니까?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 것 같습니까?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목자다. 나는 너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뒤에는 이미 죽음까지 건너오신 목자가 서 계십니다.

다음으로 ‘도전’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의 양이라면, 그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 속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짜 사랑은 말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시간의 대가, 물질의 대가, 때로는 자존심의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주님이 나의 형편과 사정,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 못한 내 마음의 응어리를 다 알고 계신다고 느껴졌던 따뜻한 위로의 순간이 있었다면 나눠봅시다.


2.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로이드 조지 수상처럼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고백을 들을 때, 나의 삶의 태도나 가치관에서 변화가 필요한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세상의 수많은 소리가 있지만, 선한 목자의 음성을 더 선명하게 듣기 위해서 내가 실천해야 할 영적 습관 (예: 새벽 혹은 금요기도, 5분 묵상, 감사 일기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3-07
조회 169

제목: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 (요 9:1∼8)


1. 고난의 이유를 미래에서 찾자! ⇨ 관점이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즉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요 9:2 →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고통당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판단에는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단정적으로 전제하고’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생각과 태도는! 정죄하고, 판단하고, 공격하며, 고통받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절입니다. 요 9:3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네! 맹인 당사자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선언하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이 불행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현재의 불행을 → “과거의 죄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의 불행을 → “미래의 행복을 위한 밑거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해석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도약의 기회로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은! →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통해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를! 과거의 죄나, 과거의 원인으로 풀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사라지고 정죄만이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말은! → ‘무슨 일이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과 계획이 있다는 ‘미래’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성경 이야기’입니다. ▶ 모세는 애굽의 궁중에서 40년간 왕자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모든 학문과 문물을 배우고, 많은 혜택을 누리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이후 40년간을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하며 살게 되었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저지른 ‘살인죄’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동족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화가 나서 한 대 쳤는데,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결국 모세는 왕궁에서 도망쳐 나와, 광야 40년간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아! 그때 내가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그때 내가 철이 없어서… 참 재수도 없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세가 왕궁에서 나와 광야생활 40년을 하게 된 것은, 살인을 저지른 것이 원인이 아닙니다. 그가 광야에서 고생한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지도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야 40년은 미래를 위한 훈련이요,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 ‘돈을 많이 번 부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 “내가 돈을 많이 번 것은! 내가 땀 흘리고, 고생하고, 노력해서, 열심히 일해서 번 것이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적인 해석’입니다. 이것을 ‘미래적인 해석’으로 한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나에게 돈을 많이 벌게 하셨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서 나에게 이런 번영을 허락하셨는가?” 이런 질문을 할 줄 알 때, 비로소 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그것이 고난이든 형통이든, 그것을 미래적으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 “나를 통해 일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다!” 이런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살아, 진정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오늘을!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며 살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9:4a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여기 ‘아직 낮이매!’라는 말은, ‘아직 내가 살아있으니!’라는 말입니다. 살아있으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는 구절을 → 영어 성경은 ‘We must do’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일들은 전기밥솥이나, 세탁기나, 청소기나 컴퓨터, 파출부가 대신 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의 ‘섬김’은 남이 해줄 수가 없고, 자신이 직접 해야만 합니다. / 즉! 자기 예수, 자기 말씀,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 자기 천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남의 예수가 아닌 자기 예수님이 되어야 하고, 밖의 예수가 아니라 내 안의 예수님이 되셔야 하고, 어제나 혹은 내일 일하는 자가 아니라, 오늘 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세 가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 ① 하나님이 왜 나에게 ‘생명’을 주셨는가? ② 하나님이 왜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는가? ③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오늘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오늘을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자세로 살기를 주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시간을 계수할 줄 아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 90:12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사도 바울은 오늘을 성실하게 살라고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엡 5:16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성도 여러분! ‘오늘’ 내가 그 무엇인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일할 때,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지! 다음에,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그때 잘하겠다는 말은 허무한 말일 뿐입니다.

여기 ‘낮일 때’라는 말은! ⇨ ‘책임을 맡았을 때’를 말합니다. ‘기회를 가졌을 때’를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일을 맡고 계십니까? 어떤 책임을 맡고 계십니까?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일해야 합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충성해야 합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요 9:4b →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네! 밤이 오면 일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인간에게는 일할 수 없는 밤이 찾아옵니다. ① 건강의 밤이 찾아옵니다. ② 죽음의 밤이 찾아옵니다. ③ 재물의 밤이 찾아옵니다. ④ 기회가 다 사라지는 밤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밤이 오기 전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때를 잘 사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있을 때 하나님께 잘해야 합니다. 건강이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재물이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능력이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활동력이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밤이 오기 전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밤이 오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네! 지금은 일할 수 있는 낮입니다. 오늘을 성실하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나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명감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맹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실로암’의 뜻이 무엇입니까? 요 9:7 →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이 맹인이 순종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보냄을 받은 그곳! 실로암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라고 한 대로 그 진흙을 물로 씻어냈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열려 밝은 눈이 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사람마다 ‘자신의 실로암’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깝건, 멀건 간에, 내가 보냄을 받은 곳,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의 현장은 어디인가?’ ‘나의 실로암은 어디인가?’ ‘오늘 나에게 맡겨진 일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냄을 받은 그곳이! ▸자기가 원하는 곳이 아니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시 봅시다.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의 행동이나 명령이 이해되십니까? - 아니! 시각장애인인 이 사람이, 어떻게 멀리 실로암 연못까지 가서 씻으라는 것입니까? 그냥 말씀만으로도 낫게 해주신 적이 많았는데, 이왕 낫게 해주실 거면 그냥 간단하게 처리해 주시면 안 됩니까? 어디가 어딘지도 잘 분간 못하는 맹인인데, 꼭 거기까지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 이것은 맹인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잘 이해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맹인은! 보냄을 받은 곳으로 가서,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따지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떠졌습니다.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할렐루야!


나눔과 묵상


1.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문제’나 ‘고난’을 주로 과거의 탓(자신의 잘못, 환경, 타인)으로 돌리지는 않았 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문제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실 기회’로 본다면, 어떻게 새롭게 해석할 수 있 을지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은 “밤이 오기 전에 낮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낮(기회, 건강, 재능, 직분 등)’은 무엇이며, ‘나중에’가 아닌 ‘오늘’ 내가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섬김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맹인이 눈에 진흙을 바른 채 실로암까지 가는 과정은 번거롭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현재 나의 삶의 자리(가정, 일터, 교회)에서 “내 생각에는 이해되지 않지만, 주님이 보내셨기에 순종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2-28
조회 205

제목: 빈들의 기적 (요 6:1∼13)


벳새다 광야!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 엄청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남자 장정만 5천 명이니,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쉬기는커녕 또 인파에 휩싸이게 된 예수님의 일행은 좀 짜증이 날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몰려든 무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마가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막 6:34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쉬려고 가신 곳이었지만, 오히려 저물 때까지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제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여기는 빈들입니다. 날도 저물어 가는데 사람들을 어서 마을로 돌려보내시죠. 그래야 뭐든 사 먹기도 하고 끼니를 해결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막 6:37입니다.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얼마나 황당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믿음에는 분명히 ‘기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어떻게 무리를 먹여야 할 것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 6:6입니다.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그러니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해결 ‘방법’이 아니라, 해결하려는 ‘믿음’이었습니다. 네! 기적은 방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요 6:7 →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대답이었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환산해 보면 일당을 10만 원만 쳐도 2천만 원입니다. 한마디로! 빌립의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기적이 일어난 장소는 ‘빈들’이라고 했는데! 빌립은 빈들과 빈 주머니만을 생각했지, 함께 계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빌립이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이미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그 능력으로 능히 이 군중들을 먹일 수 있음을 내가 믿습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소서. 저희가 순종하겠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오늘 ‘빈들의 기적’이 일어난 요인은 어떤 것들입니까?


첫째, 헌신입니다.

오늘 본문 요 6:9입니다.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어린아이가 제자 안드레에게 드린 것은 작은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거기엔 어린아이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면 크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헌신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드린 것입니다. 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나에게 있는 시간, 재능, 지식, 물질,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온전히 헌신하면, 빈들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수고, 이런 섬김과 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는 성도들이 계십니까? 남들은 어떻게 하나? 무엇을 하나?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손에 올려진 일상의 헌신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문제를 만나면 먼저, 계산을 합니다. 돈이 얼마나 있나? 시간이 얼마나 있나? 가능성이 있나? 제자들도 똑같이 계산했습니다. ‘여기는 빈들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에 헌신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둘째, 순종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많은 ‘계산’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자녀의 미래, 노후 준비, 직장에서의 생존 등 빌립처럼 현실적인 수치와 가능성을 따져야 하는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제가 말씀드릴 ‘사막의 펌프 이야기’를 이미 들어 보셨을 줄로 압니다. 여행자가 마중물로 병의 물을 부은 것은 ‘도박’이 아니라, ‘글로 적은 말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내 ‘경험’이라는 마개를 열고, ‘말씀’이라는 펌프에 순종의 마중물을 붓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한 병의 물’을 쪽지에 적힌 대로 순종했을 때, 자신뿐 아니라 다음 사람도 마실 수 있는 풍요의 기적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우리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산더미처럼 만들어 놓고 나눠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떡을 나눠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을 나눠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나눠주었더니, 놀랍게도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순종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순종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축복을 가져오는 열쇠입니다.


셋째, 감사입니다.

제자 안드레가, 한 어린아이가 드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예수님께로 가져왔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은 그까짓 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비웃거나 핀잔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받으시고는, 높이 들고 큰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 6:11입니다.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여기 “축사(祝謝)하셨다”는 말은 → 헬라어로 ‘율로게오’(ευλογεω)인데, ‘축복하시고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근 2만 명을 앉혀 놓고, 작은 것! 한 아이의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하나님께 큰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은, 감사의 결과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축복이 따라왔습니다. ⇨ 이것이 감사의 능력입니다. ① 감사만 했는데도 ‘원대로’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11절입니다. →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할렐루야! 감사하면 오늘도 ‘원대로의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② 감사만 했는데도 ‘배불리 먹고도 남는 풍요’가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감사 전과, 감사 후가 180°달라졌습니다. ⇨ 가난의 언어가 부요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①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다”는 말이,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로 바뀌었습니다. ② “어린아이가 가진 오병이어가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는 빈곤의 언어가, “저희가 배부른 후에”라는 풍요로 바뀌었습니다. ③ “모자랄 것 같다”는 말이 “남았나이다.”라는 즐거운 탄성으로 바뀌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병이어 작은 것이! 감사를 통해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만드는 감사는,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는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고 하는 선제적인 감사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곱하기의 은혜’를 주십니다.

땅의 법칙은 ‘더하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곱하기’입니다. 이 두 법칙의 차이를 보시기 바랍니다. → 1+1=2입니다. 그런데 1×1=그냥 1입니다. 그러니까 곱하기보다 더하기가 더 큰 숫자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법칙보다 땅의 법칙이 더 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해볼까요? 2+2=4입니다. 2×2도=4입니다. 여기서는 같습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세상의 원리나 믿음의 원리나 달라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단계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4+4는 8이지만 4×4는 16입니다. 2배 차이가 납니다. 이런 식으로 해보면, 10,000+10,000은 20,000이지만, 10,000×10,000은 1억입니다. 무려 5천 배의 차이가 납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세상의 셈법(더하기)으로는 결코 빈들을 채울 수 없지만, 주님의 셈법(곱하기)은 우주적 풍요를 만드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할 때,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감사는 기적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축복의 상속자’가 되게 하십니다. ‘헌신과 순종과 감사’로 날마다 기적을 만들어 가고, 체험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현재 나의 삶(가정, 일터, 신앙 등)에서 ‘아무것도 없는 빈들’처럼 느껴져 마음이 삭막하거나 불안한 영역은 어디이며, 문제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던 빌립의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최근의 경험을 나눠봅시다.


2. 사막의 펌프 이야기처럼, 당장의 갈증(유혹)을 참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어야 할 나의 ‘마중물’(시간, 재능, 물질, 용서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주님이 이미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오늘 내가 먼저 선포하고 싶은 ‘감사의 제목’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2-21
조회 167

제목: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믿음 (요 5:1∼15)


1. 베데스다! ‘자비의 집’인가? ‘절망의 정글’인가?

오늘 본문 2절에 나오는 양문(羊門)은 예루살렘 성으로 출입하는 7개의 문 중의 하나로, 이 문은 특별히 제물로 사용할 양들을 끌고 들어갈 때 주로 사용하는 문이라 양문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양문으로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병자들은 이 연못에서는 ‘특별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는데, 그때 제일 먼저 물에 뛰어든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연못은 간헐천과 연결되어 있어서, 때때로 치료성분이 있는 온천이 솟아올랐다고 봅니다. 이렇게 이 연못에서 치유의 은혜를 입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상상력을 동원해서 지금 ‘베데스다 연못 가’에 수많은 환자가 침상을 깔아 놓고 눌러살고 있는 모습을 머리에 한 번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쉽게 그려지시지요!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그곳의 실상은, 전혀 자비롭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 ① 기약 없는 기다림의 곳이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을 때 1등으로 들어가는 사람만 낫는다는 소문 때문에, 수 많은 환자들은 그저 물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② 그곳은 무한 경쟁의 장이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선 옆에 있는 환자를 밀쳐내고서라도 먼저 들어가야만 하는 곳, 그것이 베데스다의 민낯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남들보다 앞서야 성공한다는 경쟁 사회 속에서, ‘언젠가 내게도 행운이 오겠지’하며 막연한 희망을 품지만, 실상은 점점 지쳐갑니다. 겉으로는 ‘자비’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시기하고 원망하는 세상,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판 ‘베데스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이 찾아오셨고, 마침내 그 이름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2. “네가 낫고자 하느냐?” : 무기력과 원망을 깨뜨리는 질문

예수님은 축제의 중심지인 성전보다, 절망이 깊게 배인 베데스다를 먼저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38년 동안 누워있던 한 병자 앞에 서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38년!’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긴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일어날 힘도, 도와줄 사람도 없어, 무기력하게 그냥 남아있는 ‘완벽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은 좀 어색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환자에게 낫고 싶냐고 묻는 건 이치에 맞질 않죠! 하지만, 이 질문엔 두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① 학습된 무기력을 깨뜨리는 질문입니다. 38년이라는 세월은, 그에게서 ‘소망’을 완전히 빼앗아 갔습니다. 그는 이제 ‘낫겠다는 의지’보다는 그냥 체념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② 핑계와 원망을 깨뜨리는 질문입니다. 지금 이 환자는 “내 발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나를 넣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남이 먼저 내려갑니다.”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뜨리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 된다.”, “누구 때문이다”라는 ‘학습된 무기력’과 ‘타인에게 원인을 돌리는 책임전가’는 우리를 계속 그 자리에 머물게 만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는 정말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길 원하느냐?”, “환경 탓, 남 탓만 하던 그 자리를 떠날 준비가 되었느냐?”

주님께서 병자를 보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이든, 떠난 사람이든, 다 싸잡아서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생각은! 가장 오랜 기간 머물러 있는 자기가 들어가야 맞는데, 불공평하게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먼저 들어간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긴 자비의 연못이 아니라 정글의 법칙만 통용되는 ‘생존 투쟁의 장’이라고 푸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병을 낫고자 하는 본래의 목적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불가능한 현실만 늘어놓으며, 안될 이유만 털어놓고 있습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에게도 안 될 상황, 불가능한 조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런 조건에만 매여 있는 인생은 38년이 아니라, 380년을 그 자리에 있어도 병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지금의 내 형편과 처지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것을 박차고 일어날 믿음과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 병자는 지금, 자기 앞에 서서 질문을 던지는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다만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이 사람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 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행하신 일들도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이 38년 된 병자와 똑같이 무기력하고, 원망이나 핑계만 대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절망의 자리에 그냥 머무르게 하는! 그 무기력한 생각과 핑계와 원망을 떨쳐버리고, 믿음으로 일어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저는 약하고 무력하나, 주님이 함께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무기력해진 다리가 펴지기 전에, 먼저! 생각이 펴지고, 믿음이 펴져야,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아무 변화 없이 그저 38년 된 병자에게 해 주셨듯이, 그런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건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주님을 의지하여 내가 깔고 뭉개고 있는 자리, 무기력과 핑계와 원망을 떨쳐버리고 일어나게 하옵소서.” “무기력한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성령충만 받은 후의 제자들처럼! 담대하게 하시고, 능력 있는 자로 서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고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 입은 자의 책임 :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병자의 무기력과 핑계와 원망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38년 된 저주의 사슬이 끊어졌습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오늘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그를 다시 만난 주님은 그에게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5:14 →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주님의 말씀은! 병이 나았어도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에 대한 ‘경고’이며 또한 ‘사랑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기적적으로 완쾌된 뒤에도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면! ⇨ 이 사람의 경우, 병에 걸렸던 이유가 ‘죄와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자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한 것은! ⇨ ① 죄의 무거움을 알고, 육체의 고침을 받은 것으로 다됐다고 여기지 말고, 네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길 원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② 은혜를 핑계 삼아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님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네! 이 병자는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무슨 공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 그런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감사도 모르고 다시 죄의 습관으로 돌아간다면, 더 비참한 영적 질병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다 건강하고 조화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늘 평안 속에 건강한 영적 생활을 하고, 도덕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고, 또한 육체적으로도 건강한 삶을 위해 몸을 잘 간수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갈 5:13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네! 죄의 결과는 반드시 우리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줍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기 위해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로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시길 바라는 경건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런 믿음의 기본기가 잘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역자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늘 환자의 병을 고쳐주시고 하신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 해도 ‘죄의 성향’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가 노력해야 합니다. 죄의 성향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갈라디아서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5:19∼21 →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아멘.

결론: 이제 여러분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십시오. 오늘 주님은! 여러분 삶의 베데스다에 찾아오셨습니다. 원망의 자리를 걷어치우십시오. 사람 탓, 환경 탓하던 마음을 버리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채 종교적인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거룩을 결단하십시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붙들고, 크리스천다운 단정한 삶, 정직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오랫동안 깔고 앉아 있던 그 절망의 이부자리를 들고 일어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강과 축복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명절이나 축제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더 쓸쓸하거나 소외감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서로 나눠봅시 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이런 마음을 가진 이들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배려는 무엇일지 나눠봅시다.


2. 내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 핑계 대고 있는 ‘나만의 38년 된 병’ 혹은 환경과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주님은 병을 고쳐주신 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가 은혜받은 자로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단정한 삶’을 살기 위해 끊어내야 할 습관이나 결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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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쁨의 인생이 되는 세 가지 원리 (요 2:1∼11)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결혼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축제 분위기가 식고 기쁨을 상실할 위기에, 예수님께서 평범한 물을 극상품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베푸심으로, 더 큰 잔치의 기쁨을 누리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 ‘축제의 인생,’ ‘기쁨의 인생’으로 바뀌는 기적을 맛보고 싶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드리는 3가지 원리를 잘 적용해서, 기쁨의 인생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삶의 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곳에 예수님이 초청받으셨고,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네! 우리 인생이 기쁨으로 가득 차고, 필요할 때 기적이 일어나려면! 먼저 예수님을 내 인생에 초청하고 모셔 들여야 합니다. 요 2:2 →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예수님을 초청하여,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행사, 예수님이 함께 하는 자리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든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만일 그 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거든, 여러분도 거기 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힘들어도 여러분이 안 갈 수 없는 자리, 그리고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예수님께 함께 가달라고 요청하십시오. 예수님은 기꺼이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자리를 복되게 하시고 필요하면 기적도 행하실 것입니다.

또한, 결혼식 같은 큰 행사뿐 아니라, 일상의 식사 자리, 부부나 자녀와의 대화 시간, 직장에서의 회의 시간에도 예수님을 ‘VIP’로 모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내가 주도권을 쥔 자리가 아니라, 주님이 역사하시는 자리가 될 때, 그 자리는 은혜와 기쁨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 내주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늘 하늘로부터 임하는 기쁨이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가정도, 어느 공동체도 문제는 다 존재합니다. 오늘 가나 혼인 잔치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완전히 피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자크 펄만(Itzhak Perlman)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가 뉴욕 링컨 센터에서 공연하던 중, 갑자기 바이올린 줄 하나가 ‘퍽’하고 끊어져 버렸습니다. 바이올린은 네 개의 줄로 연주하는 악기인데, 그중 하나라도 없으면 제대로 된 연주가 불가능합니다. 청중들은 당연히 그가 연주를 중단하고, 줄을 교체하거나 다른 악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지휘자에게 계속 진행하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남은 세 개의 줄만으로 그 어려운 곡을 완벽하게 재구성하여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줄 하나가 없기에! 낼 수 없는 음역대를 다른 줄로 대체하며,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새롭고 신비로운 선율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연주가 끝난 후,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로는, 남은 것들만 가지고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음악가의 사명입니다.” 네! 우리 인생도 연주 도중 줄이 끊어지듯, 예상치 못한 결핍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부족함의 역설이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줄이 끊어진 것은 위기였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세 개의 줄로 만드는 ‘새로운 기적의 소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줄이 끊겼을 때 이자크 펄만이 연주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포도주가 바닥났을 때! 우리는 절망하는 대신 그 ‘끊어진 상황’을 주님께 ‘기도’로 가져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바닥난 상황’을 ‘기적의 무대’로 바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바닥은! 오히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부족할 때, 그때가 바로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에 봉착했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까? 그 문제를 주님께로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마리아는 잔칫집의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 포도주가 없다”(3절)고 잔칫집의 문제를 직고(直告)했습니다. 마리아의 기도는 길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라는 간단한 고백이었습니다. 기도는! 주님께 나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고, 그 기도는 기적의 시작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6:24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아멘.


3.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소개하는 기적의 결정적인 열쇠는 ‘순종’이었습니다. 특히 하인들의 ‘순종’이 돋보입니다.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요 2:5 →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은혜받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순종’이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하인들을 보십시오. 7절입니다. 요 2:7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어서 8절입니다. 요 2:8 →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네! 하인들은 물을 채우기만 한 게 아니라, 그것을 들고 연회장에게로 갔습니다. 아마 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맹물’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의 발걸음을 중단치 않았을 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맹물은 극상품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의 기적은! ‘믿음의 기적’이었고 ‘순종의 기적’이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끝까지 가는 것이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합리적인 이성을 존중해야 되지만, 이성에만 묶여있고 매여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믿는다’는 말과 ‘순종한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별개가 아닙니다. 믿으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순종의 대가는 생명이고 축복입니다. 순종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에 문제가 있습니까? 부족함이 있습니까?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처럼, 맹물 같은 우리 인생을 포도주와 같은 복된 인생으로 바꾸어주시길 원하십니다. ‘물’과 vs ‘포도주’는! 맛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용도나 가치도 다릅니다. 놀라운 전적인 변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물 같은 옛사람은 사라지고, 포도주 같은 값진 존재로 변화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맛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쓰임새도 달라집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으나, 예수 믿고 난 이후엔 맛있는 인생, 색깔도, 표정도, 인상도 달라진 인생,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게 기독교입니다.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을 얻게 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 점점 더 좋아지는 은혜와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표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결정적으로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믿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1절입니다. 요 2:11 →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가 처음 제자들을 위해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실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예수님에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순종을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도, 우리 가정도, 우리 교회도, 갈수록 칭찬받고, 갈수록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고, 그런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가나 혼인 잔치에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여러분의 삶의 영역(가정, 직장, 자녀, 개인적 고민 등) 중 예수님을 가장 먼저 초청하고 모셔야 할 곳은 어디인지 나눠봅시다.


2. 마리아는 문제가 생겼을 때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문제를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문제를 만났을 때 스스로 해결하려 애쓰는 편인가요? 아니면 즉시 주님께 기도로 가져가는 편 인가요?


3. 하인들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명령에도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최근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순종 중, 이성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순종의 결단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