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감사가, 추수감사와 다른 점은! 맥추감사는 ‘첫 열매’ ‘첫 수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주신 ‘전체 열매’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지금도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하나?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은 농경사회의 유산이고, 지금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런 절기를 지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절기의 핵심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고, 절기 속에 담긴 뜻을 바로 알고, 오늘도 마땅히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절기’는 우리가 흔히 지키는 ‘기념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통 기념일은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기념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성경의 절기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정하시고, 그다음에 사건이 벌어집니다. ‘맥추감사절’ 역시,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제정하시고 그다음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럼 맥추절을 지키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신 때와 장소는 언제, 어디서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뒤 시내산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이때는 애굽에서 나온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있을 때이고, 아직 농사를 짓기도 전인데, 하나님은 감사절기를 정하고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즉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절기부터 제정하신 것입니다.
출 23:16 →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지금 너희 눈에는 광야만 보이고 아무런 열매도 보이지 않지? 그러나 아니야! 반드시 너희가 뿌리고 가꾼 열매를 거두게 될 날이 올것이다. 네가 그것을 믿고 감사하면, 반드시 그런 복이 임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수확하게 되는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한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을 우선순위의 첫 자리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당연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2순위 3순위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첫 열매 신앙과 믿음의 상관관계
그러면!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보면, 믿는 자들이 항상 첫 열매를 잘 드리며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첫 열매를 드리는 믿음이 있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 온도를 측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도 사라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첫 열매 신앙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은 함께 가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의 예를 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성읍마다 석상과 아세라 목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온 나라에 우상의 산당과 제단이 즐비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산당들을 제거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본연의 임무를 감당하게 합니다. 마침내 예배가 다시 세워져서 번제와 화목제가 드려지고, 찬양과 감사가 회복되었습니다.
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하게 회복시키고자 한 것은! 바로 ‘첫 열매 신앙’이었습니다. 대하 31:5 → “왕이 명령을 내리니, 유다에 와서 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각종 농산물의 첫 수확을 넉넉히 가져 왔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다.”(새번역)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이 불과 4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사랴 대제사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대하 31:10 → “사독의 자손인 아사랴 대제사장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백성이 주님의 성전에 예물을 드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먹을 것을 넉넉하게 공급받았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
이렇게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명령이었지만, 대부분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첫 열매도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유월절에 장자와 초태생을 살려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 사실을 다시 깨닫고, 첫 열매를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바로 맥추감사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퇴보에는 언제나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는 것이고 반대로,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할 때’, 믿음도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닫히고 식어버리게 됩니다. 주를 향한 사랑도, 믿음도, 주님이 주시는 복도, 다 닫히고 마는 것입니다.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가 드리고 바쳐야 할 첫 열매란?
‘처음 열매’라고 할 때 ‘처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카르(rk'B)인데, 처음(First)이라는 뜻이지만,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영어로 choice의 최상급인 choicest, 그러니까 고르고 고른 것 중의 최고의 것, 제일, 으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가장 좋은 것 Best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 Good 정도가 아니라 → 좀 더 좋은 Better도 아니고 → 최상급인 Best의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첫 것’과 동시에,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역시 그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첫 예물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는, 단지 첫 월급 혹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고, 이 물질을 벌 수 있음도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 주셨고, 건강 주셨기 때문임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첫 부분을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분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내 삶 전체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잠 3:9∼10 →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말씀은 “나에게 첫 것을 주면! 너의 나머지 전부에, 내가 넘치도록 복을 주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을 더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육신도 부모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자녀가 첫 월급 타가지고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좋은 선물을 주면, 부모는 그것을 받고 그냥 있습니까? 그 이상으로, 어떤 형식으로든 보상해 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첫 열매 봉헌’은 곡식이나 과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처음 얻은 새끼도 마찬가지입니다. 출 34:19∼20 →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맏아들은 모두 목사나 선교사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해결책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민 3:45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맏아들 대신 ‘레위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맏배 대신 레위 사람의 가축 맏배를 구별하여 세워라. 레위 사람은 나의 몫이다. 나는 주다.” 맏아들을 드리는 대신 하나님께서 주의 일꾼으로 세운 레위 사람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라는 말은 ‘나귀’와 같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부정한 동물은, 대신해서 어린양을 대속물을 드려서라도 반드시 첫 것은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맥추감사절의 ‘근원적 의미’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맏아들이나 첫 것은 ‘내 것, 하나님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하나님 당신의 것’을 꼭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내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나에게 있는 무엇이 하나님의 것입니까? 네! ‘첫 열매’와 ‘맏배’입니다.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다 내 것이다”라는 믿음은 우상숭배입니다. 내 재산이나 재능이나 내 자녀나, 심지어 내 생명과 영혼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소중하고 귀하면 귀한 것일수록 먼저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맏배를 드리는 것이요, 첫 열매 신앙입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영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내 모든 귀중한 가치는 세상이 아니요,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믿음과 신앙고백은 일 년에 한 번 맥추감사절 때만 기억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받은바 그 은혜를 잊지 맙시다. 감사하되 우리의 온전한 사랑을 담은 ‘첫 열매’와 ‘맏배’ 즉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풍성한 은혜와 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첫 것, 첫 열매를 당신께 드려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 심정은 무엇인지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우리가 첫 예물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단지 첫 월급 혹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신앙고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과정 중에 만난 ‘유라굴로’ 광풍 이야기입니다. 이미 겨울이 시작되어 역풍이 부는 때가 되어, 여러 날 걸려 지금의 그리스에 속한 가장 큰 섬인 그레데섬(크레타섬)의 ‘미항’이란 곳에 겨우 도착합니다. 바울은 더 이상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그때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만일 항해를 강행하면 화물과 배뿐 아니라, 인명 피해까지 생길 것이라고 경고까지 합니다.
1. 바울의 말(하나님의 말씀) 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백부장
하지만 호송 책임을 맡은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미항에서 약 65Km 정도 떨어져 있는 ‘뵈닉스’ 항까지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다가 큰 광풍 ‘유라굴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 인생이 광풍을 만나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따르고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대신 사람의 판단과 생각을 좇기 때문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행 27:11 →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vs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정인지도 모릅니다. 선장은 항해의 전문가이고, 선주 또한 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또 배에 실린 모든 화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단지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내린 결정만은 아닌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리기에 어디가 더 좋은 곳인가? 또한,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까지 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선주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의해 결정한 것입니다. 행 27:12 → “그 항구(미항)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여기 ‘불편하므로’라는 말은, 지금 도착해 있는 ‘미항’은 숙박 시설도 열악하고, 유흥장이나 놀이시설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뵈닉스까지 가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편안함,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육신 적으로 즐길 거리들, 즉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백부장을 비롯한 선장, 선주, 선원들의 결정이 잘한 결정처럼 보였습니다. 행 27:13 →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네! 뵈닉스를 향해 출발했을 때, 순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신이 났습니다. “봐라!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바울의 말을 듣고 그냥 미항에 있었더라면 어쩔 뻔했냐?” 하면서 바울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뵈닉스 항구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그곳에서 즐길 생각에 들떴을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을 보면! 갑작스럽게 상황은 변합니다. 행 27:14 →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여기 “얼마 안 되어”라는 단어가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닥칠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무서운 광풍을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2. 잘못된 결정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그들은 모든 짐을 버려야 했습니다. 행 27:18 →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아끼는 물건들, 소중한 것들을 다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하게 포장하고, 조심스럽게 배에 실었겠습니까? 하지만! ‘취급주의’라고 딱지를 붙인 귀중한 짐들, 값비싼 짐들도 다 버렸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중품이었던 것들이고, 소중했던 수화물이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현실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물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짐들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은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 같은 배의 기구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배를 운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들이어서, 생명처럼 소중한 기구들이었지만! 자기들의 손으로 버려야만 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행 27:19 →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의 여망은 없었고,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습니다. 행 27:20∼21a →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몰아치는 광풍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노련한 경험’도 소용없었습니다. 지금 ‘다수의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광풍이 불어오자! 인간의 모든 계획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습니다. 그저 풍랑에 밀려 이리저리 밀려다니게 되고 말았습니다. 행 27:15 →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가수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광풍이 몰려오면! 마치 유라굴로 광풍 만난 배처럼, 그냥 물결에 밀려 이리저리 쓸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인간의 의지, 인간의 지식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 누가 자기 인생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한 결과가 이렇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유라굴로 광풍을 극복하는 방법 : 회개, 신뢰, 역전
그러면 이처럼 인생의 유라굴로 광풍이 몰려올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① 회개: 유라굴로 광풍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행 27:21 →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유라굴로 광풍 앞에 모두 벌벌 떨고 있는 아수라장 가운데, 누가 나섭니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나섭니다. 그는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줄을 깨닫고, 이제라도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 꿇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아무리 실타래가 얽히고설켰어도 실마리를 찾으면 다 풀어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인생의 복잡한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호 6:1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해결됩니다.
② 신뢰: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는, 그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습니다. 행 27:23~24 → “내가 속한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여기 ‘내가 속한 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신뢰가 있으면, 우리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 43:1~2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속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심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이제 바울은 용기백배하여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행 27:25 →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은 믿음의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기적은 한 사람의 분명한 믿음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③ 역전: 바울이 리더십을 쥐고 이끌어가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 나타났습니다. 행 27:35~37 →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광풍이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바울은 마치 ‘성찬식’을 집례하듯, 떡을 들어 축사하고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14일간 굶었던 그들인데! 바울이 축복기도를 하고 나눠주자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받아먹었습니다. 그 후에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되는데 276명 전원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자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을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요, 성도들이 전도하는 이유입니다. 풍랑 만난 이 민족이! 한국교회 때문에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 때문에 풍랑 만난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울처럼 이 시대에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 소망을 주는 사람, 나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바로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의 현재 가치 판단 기준은 무엇이 1순위인지? 나눠보고 잘못된 결정으로 큰 손해나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바울이 담대할 수 있었던 근거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절망 속에서 소망을 주고, 캄캄한 앞길에 빛을 비추는 사람이었던 바울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빛과 소망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와 ‘전도’의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열심이었던 유대교 신자에서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간증하자, 바울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한 암살단원이 4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암살 음모와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유대교 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가 중심이 되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공회의 이름으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을 다시 심문하겠으니, 그를 공회에 출석하도록 군인들의 영내에서 나오게 해 달라는 공문을 천부장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을 공회로 이송하는 도중에, 암살대가 매복했다가 죽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2. 악인들의 암살 계획이 탄로나다.
하지만! 이런 암살 계획은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이 비밀 정보를 빼낸 사람은 바울의 ‘조카’였습니다. 행 23:16 →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바울의 조카가 예수를 믿었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바울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바울의 조카가 군인들의 영내로 들어가 바울에게 유대인들의 암살 계획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바울도 이 사실을 한 백부장에게 알렸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는데, 로마 시민권자가 암살당하면 일이 복잡해질 것을 직감한 백부장은, 바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직속 상관인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바울의 조카를 천부장에게로 보냅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의 조카를 맞아드려서 묻습니다. 행 23:19∼21 → “천부장이 그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천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만일 로마인인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천부장의 입장도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천부장은 필사적으로 바울을 보호하려고 애를 씁니다. 비록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일 뿐이지, 그 속은 100%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족인 유대인들은 악착같이 바울을 죽이려 하고, 이방인인 천부장은 악착같이 바울을 지키려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비밀 작전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최상의 호위병으로 호송하다.
천부장은! 바울의 암살 계획을 듣자마자, 바울을 당장 안전한 곳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물론 천부장 자신이 지키고 있는 ‘안토니아 요새’도 안전하긴 합니다. 천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천부장은! 그날 밤으로 바울을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고, 총독이 거주하는 훨씬 더 안전한 ‘가이사랴’로 호송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천부장의 바울 ‘호송 작전’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첫째, 호송 시간입니다. 23절에 ‘밤 제 삼시에’라고 했는데,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면 밤 9시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바울을 호송한 것은! 그만큼 긴급하게, 비밀리에 옮기겠다는 뜻입니다. 둘째, 호송하는 군사의 규모입니다. 역시 23절을 보면,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을 동원합니다. 합계 470명이나 됩니다. 죄수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병력이 동원된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셋째, 바울의 이송 방법입니다. 24절을 보면, 천부장은! 말을 준비하여 바울을 태워서 보냅니다. 보통 죄수를 그런 식으로 호송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사람은!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안전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생명의 위협을 받는 분들이 계십니까?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다른 어떤 종류의 위협을 받고 계십니까? 육신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위협을 받습니까? 명예가 위협받습니까? 어떤 종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실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행 23:11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 역시 로마로 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계획을 세우고, 방법까지 내가 다 정해 놓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걱정하고, 안달합니다. 왜 일이 이렇게 틀어졌을까? 한탄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을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방법대로 따라가세요.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로마로 가려고 했는데, 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죄수의 신세가 되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죄수가 되었다고 로마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수인 바울을, 자유인인 바울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로마로 보내셨습니다.
4. 바울의 무죄를 총독에게 편지로 알리다.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 총독부로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함께 보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벨릭스 총독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본문 행 23:25∼30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 로마시민인 바울이란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죽게 된 상황에서 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구해냈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보니, 단지 종교 문제일 뿐, 죽이거나 결박할 사안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당신께 보내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송사도 있으니, 당신이 심문해 보시고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런 내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부장이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변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벨릭스 총독도 비록 탐관오리였지만, 바울에 대해서 좋은 대접을 하게 됩니다. 행 24:23 →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참으로 놀랍고도 특별한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악한 사람도 나에게 악하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착한 대접을 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에스더를 왕비로 뽑은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은 폭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큰 유익을 끼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르면! 모든 사람이 내 편이 됩니다. 잠 16:7 →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이런 삶의 원리를 터득하시고, 원수라도 나를 돕는 자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하나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한, 내 삶의 길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로마 전도의 사명’을 주신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동안 모든 신상의 안전을 지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이 있는 한! 삶과 생명은 보장됩니다.
둘째, 로마로 가는 방법은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수로 가든지, 자유인으로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밤중에 가든지, 낮에 가든지 ▸즉시 가든지 머물다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육로로 가든지, 배를 타고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즐겁게 가든지, 괴롭게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셋째,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비하게 다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도 그렇습니다. 실패한 것 같지만 성공이었습니다. 마귀가 이긴 것 같은데,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모든 정죄를 이긴 것이고, 모든 사망을 이긴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런 신비로운 성취에, 우리의 삶을 다 맡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본문에는 우연인 것 같은 사건, 원수여야 할 사람이 바울은 돕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연이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 경험 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네가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약속하셨고, 바울 역시 소원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길은 결코 쉬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내십니다. 이에 대해 나눠봅시다.
3. 백부장, 천부장, 총독, 즉 세상 사람의 눈에 비친 바울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에 열심을 다 하는 것 외에는 흠을 찾기 어려운 성도가 됩시다.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에베소는! 당시 인구 30만 명이 넘는 굉장히 큰 도시였습니다. 이곳 도시 사람들이 섬기는 수호신은 여신인 ‘아데미’였습니다.
이 여신의 모습 중에 특이한 점은, 다산과 풍요의 여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방이 10여 개나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에게 생명의 젖을 먹여 기르듯이, 아데미 여신이 자기들에게 풍요와 다산의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에베소는 로마의 가장 중요한 무역항으로, 아시아 경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데미 신전 주변에는 몰려드는 여행객들을 위한 음식점과 숙박소,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했습니다. 특히 5월은 나무나 은으로 만든 아데미 여신상, 그리고 그것을 넣어두는 작은 함을 만들어 파는 장사들의 큰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너희들이 섬기고 가지고 있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얼마나 많이 설교했는지! 아데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업자들의 조합장 같은 사람인데, 데메드리오란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는 최근 매상이 부쩍 줄어든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그는 경기 변동과 시세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석한 결과!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 복음’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복음 전도가, 결국엔 우상으로 먹고사는 자기들의 사업을 망하게 할 수도 있음을 예견했습니다.
그래서 동종 업자들과 직공들을 다 모아 놓고 이렇게 일장 연설을 합니다. 행 19:25∼27 →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①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②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③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러자 에베소 시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행 19:29 →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당시 에베소에는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지금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폭도들의 규모와 소동이 얼마나 컸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얼핏 보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vs 아데미를 믿는 ‘우상 신앙’과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아데미 신전과 아데미 상의 위엄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매출이 떨어져 경제적 이익이 줄어드는 것에 격분하여 이런 소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의 풍족함과 직업적 명예가 모두 아데미와 관련되어 있는데, 아데미의 위엄이 떨어지면 직업을 잃고, 지금껏 누려왔던 경제적인 안정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하니 눈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데미를 신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섬긴 것은 아데미 여신이지만, 사실은 ‘돈’과 ‘자기 쾌락’이라는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근본적으로 ‘자기 숭배’입니다.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에 탐닉하는 ‘탐심’이 곧 ‘우상 숭배’입니다. 골 3:5 →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크리스천의 영성에 독보적인 영향을 끼친 ‘리차드 포스터’ 목사님이 벌써 35년 전에 쓴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근자인 2017년에는 개신교 내에서 큰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는 ‘존 파이퍼’ 목사님이 거의 같은 제목의 책을 내셨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책의 제목처럼 ‘돈, 섹스, 권력!’ 이 세 가지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줄기’에서 수많은 죄의 ‘가지’들이 뻗어 나와, 거대한 ‘죄의 나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 섹스, 권력 중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요? 사람 따라, 나이 따라, 여건 따라, 다 다르겠지만! 점점 더 세상은 ‘돈’의 힘이 세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 가지 영역 중 자신이 가장 약한 영역은 어디인가? 스스로에게 늘 질문해야 합니다. “내 약점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하나 더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돈으로 연결되는 세상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돈이면 뭐든지 해결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스포츠나 오락이나 여행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상술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물론 행복을 누리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합니다. 소득과 명예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확장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헌신도 할 줄 알아야 참 성도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단지 자기 행복과 풍요를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라면, 우상 숭배자의 마음가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데메드리오 같은 선동가가 나타나면! 쉽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2. 복음과 말씀으로 인해 일어난 거룩한 소동
오늘 성경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한 절로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행 19:20 → “이처럼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여기 ‘바울의 전한 말’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말씀’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두란노서원을 세우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계속하니 에베소뿐 아니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과 헬라인들까지 주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능력과 병을 고치는 신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행 19:11∼12 →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 결과! 에베소 전역이 바울이 전파하는 말씀과, 행하는 능력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거룩한 소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복하고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행 19:17b∼18 →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깜짝 놀랄만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에베소에 있는 ‘마술사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행 19:19 →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할렐루야!
마술사들이 불태워버린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돈으로 정확하게 환산할 수는 없지만, 매우 큰 액수임은 틀림없습니다. 복음의 가치, 진리의 가치를 더 크게 여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되었기에, 더 이상 거짓을 붙잡고 살 수는 없기에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옛사람과 부끄러운 행위를 벗어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에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두 가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우상 업자 ‘데메드리오’가 자기의 경제적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일으킨 ‘세속적 소란’입니다. 자기 동네 에베소에서 복음의 놀라운 영향력을 발견했을 때, 마술사들처럼 우상숭배를 중단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동조자들을 모아 소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일으킨 ‘거룩한 소란’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누룩이 들어가면! 온 가족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됩니다. 온 직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고, 도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야 합니다.
네!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행 24:5 → “우리가 보니 이 사람(바울)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세상을 거룩하게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역사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서도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은 복음과 말씀을 따라 사는 데 필요한 손해라면, 기꺼이 감수할 신앙적 용기와 결단이 있습니까? 나눠봅시다.
2.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유혹인 ‘돈, 섹스, 권력’ 중에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나는 내 가정, 친척, 친구, 동료, 이웃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냥 ‘조용한 신앙인’입니까? 나눠봅시다.
오늘 성경의 사건은! 기독교 복음이 오랫동안 아시아 지역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이! 전 세계 - 온 땅끝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된 내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인 사도행전 16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 16:5 → “이에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이 말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이 잘 수행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6절부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행 16:6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또한,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인 16절 중반부터 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행 16:16b∼17 →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는데, 느닷없이 어느 날부터 가는 곳마다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힘써서 노력했지만 다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 주일 동안,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마게도냐 지역의 한 사람이 서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행 16:9 →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하나님의 계획은! 아시아보다 먼저, 유럽지역에 복음이 들어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본 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도의 방향을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바꿉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울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유럽 쪽으로 넘어가 ‘네압볼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육로로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는 큰 성읍이었지만! 유대인 회당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하기를 이곳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면, 안식일이 되면 반드시 정결예식을 위해서 사람들이 강가로 모일 것이다!’
과연 안식일에 강가로 나가봤더니, 여러 여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서 즉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옷감장사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말씀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할렐루야! 유럽지역에서 복음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3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도 바울처럼 자신을 향해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럽으로 복음이 확장되는 이 위대한 사건은 거창하게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것은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말하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네! 바울이 들은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은 그 음성을 잘 귀담아들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예민했고, 그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드디어 바울이 빌립보 성읍을 가로지르는 강가에, 여러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 말씀에 반응하고,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14절입니다. 행 16:14 →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 지라.” 네!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자가 심령의 문을 열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단지 한 여인이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그 한 사람 속에는 그의 ‘온 가족’이 담겨 있었습니다. 15절입니다. 행 16:15 →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아멘. 또한, 한 명의 간수가 예수를 믿었지만, 마침내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믿음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이후 33b∼34절에는 빌립보 간수가 회심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 16:33b∼34 →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네! 역시 그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속에 그의 가문이 담겨 있었고, 나아가서는 유럽 전체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문을 닫고 막으실 때, 때론 열려도 아주 작은 문이 열릴 때,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아시아로 가는 것은 막혔지만, 대신 유럽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 복음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동아시아로 전해지고 ▸우리 한국 땅에도 전해졌고, 이제 이 복음은 ▸전 세계 속으로 더 신속하고 넓게 퍼지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한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큰 사건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부르는 한 사람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한 사람의 필요를 느낄 수 있는 마음, 한 사람의 손짓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당장 수백, 수천, 수만 명을 전도하는 사람은 아니어도, 한 사람에 대한 열정만큼은 꼭 가져야 합니다.
네! 마게도니아 사람, 한 사람이 말하기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 유럽을 대표하는 한 사람, 세상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토이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 “바울이 승선하고 에게해를 건너던 그 배 위에, 유럽의 미래, 세계 인류의 미래가 있었다.”
성도 여러분에게는 어떤 ‘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내가 꼭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생각되는 그 한 사람이 생각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도 절대로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구원받을, 수많은 사람이 그 뒤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에게로 건너가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 마게도니아 사람의 부름을 듣고 바다를 건너 그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에게해! 바다만을 건너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건너갔던 것은! ▸‘자기의 생각’이었습니다. ▸자기의 ‘관심’을 건너간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의 기분, 자기의 감정, 이 모든 것들을 건너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계획을 건너,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따를 때, 하나님의 뜻은 위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웃에게 전도하려면 건너가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완고함’으로 막힌 마음의 담을 건너가야 합니다. ▸때로는 ‘체면과 자존심’도 건너가야 합니다. ▸또한, 나는 구원받았으니 됐다는 ‘영적 이기주의’를 건너가야 합니다. ▸혹시 내가 전도하는데 믿지 않고 대적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도 건너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낯선 쪽으로 건너는 모험을 감행하길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건너가야 합니다. 어색함도 건너가야 합니다. 체면과 자존심, 자기의 관심과 생각, 영적 이기주의를 건너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달 뒤인 7월 첫 주일인 7월 7일에 ‘보고 싶습니다’를! 그리고 10월 셋째 주일에는 ‘새 생명 전도축제’를 하려고 합니다. 아마 벌써부터 마음이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다른 것들은 다 하겠는데 제발 전도하라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건너가라. 가서 도우라. 구원하라.”…
셋째, 참된 도움은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예수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함으로 그들을 도왔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성도들을 향하여 더 많은 구제와 사회봉사를 펼치라고 요구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영생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성도와 교회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기관도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고, 궁극의 일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것을 믿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복된 일에, 모두가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이 전도함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2. 당신에게 전도가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와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당신이 건너야 하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 속회 나눔 시간에 내가 꼭 전도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나누고, 전도의 열매를 위해 서로 중보기도 합시다.
성도 여러분! ‘절제’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도 같습니다. 인생의 과욕을 조절하여,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품이 절제입니다.
1.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 → 절제
여러분은 첫 계명 하면! 어떤 계명이 떠오르십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神)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이죠! 그러나 이 계명은 출애굽 시대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계명이고,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은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인 ‘에덴동산’을 주셨는데, 그 안에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동산의 복을 누리고 지속해 갈 수 있도록! 한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절제의 계명’입니다. 창 2:16∼17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 창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행복원칙, 에덴의 계명은!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먹고 싶은 본능을 주셔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셨지만, 절제를 통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행하게도 에덴의 행복을 지키는 ‘절제의 계명’을 지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행복을 누리고 지킬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바로 이 ‘절제의 시험’을 통하여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호시탐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절제의 능력을 통하여 행복을 지키는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9:25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사탄은 언제나 인간의 본능에 따라 살라고 유혹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이용하라고 유혹합니다. 또한,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적을 달성하라고 유혹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절제의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모든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사람 아담은 이 본능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에덴의 행복을 지키고 누릴 수 있도록 주신 유일한 계명인 ‘절제’를 잘 지킬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몰랐던 사람 → 에서
식욕이라는 욕망 앞에 절제하지 못한 ‘에서!’ 그는 주어진 엄청난 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창 25:34 →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현실주의자, 향락주의자 ‘에서’에겐 ▸영적인 것, 미래적인 것, 신앙적인 가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현실을 얻기 위해! 신앙을 팔고, 미래를 팔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에서’였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2:16∼17 →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네! 이 사건으로 인해, 에서는 주류인생에서 비주류 인생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절제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갈림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는! ‘주어진 복을 지키는 그릇’입니다.
우리가 버리는 음식만 줄여도 전 세계적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수억 명의 배고픔을 면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음식 쓰레기는 ‘기후 위기’와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음식 쓰레기는 대부분 수분 함유량이 많으므로, 이것을 수거·처리 혹은 재활용할 때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일반 쓰레기의 3∼4배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간의 욕심과 무절제로, 지구가 얼마나 아파하고 힘들어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제는 전 지구적으로 인류가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생긴 자연재해로 벌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복과 미래에 약속된 복을 누리기 위해서, 절제의 삶을 살아 인생의 성을 잘 지킬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잃어버린 계명인 ‘절제’를 다시 찾아 지킵시다.
다니엘은 왕이 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음식을! 맛이나 영양의 관점으로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해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즉 신앙적인 이유로 왕이 주는 진미를 ‘자신을 더럽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먹는 행위는, 단순히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나, 맛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먹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음식이 자신의 식탁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에서는, 성경에서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여 먹지 못하게 한 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먹었으며, 피를 제거하지도 않은 채 먹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음식들은 그들이 섬기는 이방 신 앞에 바쳐진 후의 음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다니엘은 그런 음식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디에 뜻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식사기도와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잔반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이 식탁이 과연 나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농민을 죽이는 과정을 거쳐 온 것이라면! 우리도 다니엘과 같이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외면하거나, 모르거나, 부인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창조신앙에 무감각한 ‘생태적 문맹’의 소치인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먹거리를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 관심사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환경선교주일’로 지키면서 특별히 ‘그린하트액션 선포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을 ‘섭씨 1.5도’ 이내로 막지 못하면, 기후체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망가지게 된다는 것을 이미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1.2°c가 높아졌는데도! 전 지구적인 생태계의 질서가 흐트러져서 폭염, 폭우, 가뭄, 난데없는 우박, 기류변화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재난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크기로 자연의 공격을 받고 있어, 자연 세계가 점점 더 두려운 존재가 되어 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좀 더 확대되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창조신앙을 가지고 자연과 환경을 보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리고 동참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녹색 심장(Green Heart)을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이것을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은 없습니다. 부서별로 각 과제를 주보에 실어 들였는데! 특별히 우리 장년들이 해야 할 일은 아주 가볍습니다. 그동안 여선교회, 남선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 플로깅을 통해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해 왔는데! 이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탄소제로 녹색교회’ 운동을 소개하는 이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함께 자연을 잘 돌봅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꼭 플로깅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양복 옷깃에 단 녹색심장 브로치와, 여성들이 팔찌나 책갈피, 혹은 핸드백에 다는 장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코바늘 뜨개질로 만든 장신구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평상시에 달거나 걸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건 뭐예요?’라고 묻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녹색마음’을 전하시면 됩니다. <Ex: 서부연회 참석 – 브로치>
그런데! 잘 전할 자신이 없으면! 이 ‘전도지’를 주면서 ‘여기 QR코드를 찍어서 한 번 들어봐!’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쉽죠! 함께 하십시다. “전도는 쉽다!” “녹색심장 전하기도 쉽다!”
성도 여러분! 성경적인 관점에서 ‘파괴된 자연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은 → ‘욕심으로 타락한 인간이, 다시 창조신앙을 가진 인간으로 회복되면 자연도 회복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입니다. 본래 신앙과 욕심은 반(反)비례해야 정상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줄이고 절제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자연을 돌보고, 이웃과 공존하는 길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많이 가지고 누리고 소비하는 것을 복된 삶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회개하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에서 내려서야 합니다.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길이 좁아 찾는 사람들이 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절제의 길’, ‘청지기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환경문제의 현안들에 대하여 전체 10분 이내로 나눠봅시다. (예: 폭염, 폭우, 가뭄, 해수 온도 상승, 물과 대기오염 등)
2. 신앙인들에게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회복하는 사명’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지? 교회에서 진행하는 ‘그린하트액션’에 참여할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3. 교회적으로 환경을 살리고, 과소비를 줄일 수 있는 실천적 일들은 무엇일지? 속회마다 정리하여 교구장 에게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주제는 ⇨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복음전파를 가로막지 말자!”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선교하려면! 선교사 자신의 교만,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피선교지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 가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가족들의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인가귀도를 이루지 못한 성도님들은!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1. 성령의 역사 앞에 먼저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제자인 베드로를 변화시키고 있는 내용이 사도행전 10장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옥상 지붕 위로 올라가 낮 12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네 귀퉁이에 끈을 맨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네 발 달린 온갖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어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 ⇨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행 10:13)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즉각 ▶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을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행 10:14)라며 거부합니다.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려오기를 ⇨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행 10:15) 이런 과정이 세 번 반복된 다음에, 보자기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직접 “고넬료에게 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이상한 환상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베드로의 ‘영적 편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거듭 당부하셨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여전히! ⇨ 유대인만이 구원받은 백성이요,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 ‘영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여전히 속되고 부정한 존재’였습니다.
2. 유대인은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유대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생각은! 배타적이며, 부정적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은 ⇨ 유대인으로서는 심지어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 하더라도, 생각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고, 뚫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의 근원으로 택하고 부르셨습니다. 창 12:2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네!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모든 민족이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 하나님의 축복이 단 한 방울도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세계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독선과 욕심의 장벽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선민의식이고, 유대주의의 병폐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세 번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익숙하고, 인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바랐고, 그 범위를 벗어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런 편견과 고정 관념을 먼저 깨뜨리시고, 복음전파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겸허하게 경청하며,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3.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
드디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 이 사건은 선교사(宣敎史)적으로 대 전환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사건은, 외형적으로 보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혁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비로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처음으로 ‘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행 11:18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서 성령과 세례를 받는 이야기이고, 11장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 곧 자기가 이방인 백부장을 만나 그를 개종시킨 일의 경과를 보고하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행 15장에 가서는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되는 길에 대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15:11∼20 요약 → “우리는 그들이(이방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온 무리가 가만히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① 우상의 더러운 것과 ② 음행과 ③ 목매어 죽인 것과 피째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옳으니…” 네! 마침내 이방인들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지켜야 하는 규정에서 벗어나,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이방인 고넬료 가정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마치 드라마처럼 아주 세세한 내용들을 이 이야기 속에 담아놓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흥미로운 사실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던 곳이 ‘욥바’라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행 10:5∼6 →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성도 여러분! ‘욥바’ 하면 성경에서 생각나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네! ‘요나’입니다. ‘욥바’는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이방 땅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이 지시한 이방 땅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배를 타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욘 1:3 →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는 이방인을 회개시켜 구원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바로 그 ‘욥바’ 항구 도시에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베드로의 본래 이름이 무엇입니까 ‘시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바요나 시몬”, 즉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소개합니다. 마 16:17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Simon son of Jonah) 네가 복이 있도다.”
그런데 요나의 아들인 그 ‘시몬’이 구약성경의 요나처럼, 바로 그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서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욥바’란 지명이 갖고 있는 이런 의미 때문에,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을 만나 개종시키는 이야기에 이 ‘욥바’라는 지명을 6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행 10:5, 8, 23, 32, 행 11:5, 13 이것은 구약성경의 요나가 ‘욥바에서’ 이방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일을 상기시킴으로써, 사도행전에서의 요나의 아들인 시몬 베드로는 “욥바에서” 성령의 지시를 따라 이방인 백부장을 개종시킨 일을 ‘대조하여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 그러면 어떻게 복음은 유대인 장벽을 넘게 되었습니까? ⇨ 먼저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베드로의 회심’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행 10∼11장의 내용을 가리켜 일반적으로는 “고넬료의 회심”(X)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베드로의 회심”(O)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그의 온 집안 식구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베드로의 신앙과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던 ‘유대주의’를 떨쳐내고, 변화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선! 먼저 이런 베드로의 변화와 회심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저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그가 구원받기는 글렀어!”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네!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로 작정하고 천국의 보자기에 담아 주신 이방인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신 환상에 순종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변화와 회심이 있었기에 고넬료 가정의 구원이 가능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와 전도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까지 어떤 감정의 앙금이 있거나, 어떤 선입견과 편견이 있습니까? 혹은 어떤 이념과 사상의 간극이 있어서입니까? 오늘 선포된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십시다. 그래서 복음을 우리의 생각에 가두어 두지 말고, 세상 모든 삶이 구원 얻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자신에게 있는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관계가 틀어졌던 일이 있다면 나눠봅 시다. 그리고 누가 먼저 변해야 할 사람인지? 그 변화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모든 민족이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독선과 욕심의 장벽을 쌓았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구약의 요나 선지자와 vs 사도행전의 요나의 아들 베드로의 차이점에 대해서 나눠보고, 나는 ‘하나님의 뜻과 원하심’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 나눠봅시다.
사도행전은 글의 짜임새가 매우 치밀한 책입니다. 먼저, 행 1:8에 저 유명한 예수님의 명령과 위임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 “오직 ⇨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예루살렘과 ⇨ 온 유대와 ⇨ 사마리아와 ⇨ 땅끝까지 이르러 ⇨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대로 사도행전의 첫머리에는, 제자들을 비롯한 120문도에게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성령강림절’로 지키는데! 바로 그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념하고, 우리 또한 그런 성령충만함을 사모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 그리고 유대 땅에서 펼쳐가는 사도들의 사역이 소개됩니다. 처음 예루살렘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부흥 성장하고 은혜로웠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히브리어를 쓰는 본토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헬라어를 쓰는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끼리 친밀하고 사랑하고 나누면서 살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 같지만! 결국 구심력만 강한 친교 공동체는 내적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에 따라, 낯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확장해 가는 원심력을 가진 선교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그런 갈등조차도 복음전파를 위해 이용하시는 놀라운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의 전개를 보면, 앞에서 보셨듯이 ▸성령이 임재하신 뒤에, 먼저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이어서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복음전파가 확산 되는 일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사도들조차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 주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처럼 복음전파는 예루살렘과 유다라는 장벽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행 6∼7장에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유대인 사이에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사람을 쓰시는데, 바로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상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들에 비해서,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헬라어를 쓰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집사로 뽑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일곱 집사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위한 목회자로 선출된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은 교회 안에서는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으로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힘썼지만, 그의 사역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교회 밖으로 나가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지난주에 살펴본 베드로와 요한처럼 ‘산헤드린 공회’로 끌려갑니다. 거짓 증인을 앞세워 작정하고 함정을 파서 스데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행 6:10∼13a →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하지만 성령충만한 스데반의 마음과 얼굴은 평안했습니다. 행 6:15 →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은 차분하고도 담대하게 과거 조상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으로 얼마나 강퍅하게 살았는지, 조목조목 지적하며 설교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조차 죽였다고 책망합니다.
그러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부인하려는 듯이, 이를 갈며 스데반에게 무차별적으로 돌을 던졌습니다. 그렇게 스데반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유대교인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성경에서는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행 7:60 →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왜 스데반이 죽었는데 ‘잔다’라고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죽음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잠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것처럼,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잠시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잠잔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장차 부활 후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복락의 삶이 시작될 그 날을 기다리며, 잠시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죽음 때문에 무너질 수 없고, 중단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루살렘과 유다를 뛰어넘어서 이방 세계로 전파되는 복음!
스데반의 순교는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뛰어넘게 되었고, 힘 있게 이방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둑이 무너진 뒤 물이 논으로 밭으로 집으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밀려 들어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끝까지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일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행 8:1b입니다. →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유대교 신자들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박멸할 태세로 거세게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행 8:4입니다. →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피난 가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흩어져 가면서 입을 닫고 있어야 하고, 조용히 숨어야 상식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을 전하며 흩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에 영향받은 결과입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이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가게 됐던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행 8:1a입니다. → “사울이 그(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고,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장의 시작에, 굳이 이 말을 써 놓았을까요? 그것은 사울이 표면적으로는 변화되지 않았지만, 이때 그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9장에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이때 마음의 동요를 주님께서 보시고 그를 전격적으로 만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의 회심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어 이방 세계, 곧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복음전파는 대규모로 진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놀라운 영적 영향력을 끼친 죽음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전파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면서 복음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아울러 죽어서도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 어떤 위협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의 각오로 나서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한, 복음의 확산은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스데반과 같이 성령충만 하여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여, 주의 나라 확장에 크게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람은 세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자연인 ②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③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충만 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에 대해 나눠봅시다.
2. 구심력만 강한 ‘친교 공동체’는 내적 갈등에 휩싸이게 되고, 원심력을 가진 ‘선교 공동체’가 되어야, 건강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음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거룩한 복음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자신의 각오와 다짐을 나눠봅시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요 의사였던 ‘누가’는 신약성경의 두 권을 저술했는데!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는 이 두 책을 ‘데오빌로’라고 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썼습니다.
‘누가’는 첫 번째 저술인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가르치고 행하신 일,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에 대해서’ 기록했고, 두 번째 저술인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약속대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를 통해 복음이 증거되는 과정을 자세히 통해 적었습니다. 만일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는 유다와 갈릴리 지역에 머물던 교회가 어떻게 세계로 확장되어 갔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5월과 6월, 2달 동안 다루게 될 사도행전은! 사실 ‘사도행전’이라는 이름보다는 ‘성령행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임한 ‘성령강림’은 사도행전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인 ‘선교와 교회 성장을 이끈 원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도들이 방언을 말하게 하고, 각종 기적을 행하게 했으며, 예수 부활을 담대하게 증언할 용기를 주신 ‘증언의 영’이셨습니다. 또한 ‘선교의 영’으로 전도할 열심을 갖게 하시고, 헌신케 하시고, 전도를 위해 제자들을 특정한 지역과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때론 그들이 계획했던 여정을 가로막아 하나님이 계획하신 다른 방향으로 돌려 그곳에서 전도하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전도의 주도권을 ‘성령’께서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이라기 보다는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것이 더 걸맞다는 것입니다.
2. 성도는 무엇으로 담대해질 수 있는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힘써 기도하던 제자들을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담대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엡 5:18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이 왜 술 이야기와 성령 충만함의 이야기를 했을까요? 이유는 술 취함과 성령 충만함이 현상적으로 비슷한 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가 바로 둘 다 용감무쌍해 진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비겁했고, 무능했고, 주님께 근심이 됐던 복음서의 제자들이, 어떻게 사도행전에 가서는 담대한 제자들이 되어 복음 전파에 거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바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충만함’을 받기 이전과 이후의 사람들로 나눠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온전하고 능력 있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겠다고 하신 주님께서 충만하게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한 걸인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여 그를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약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과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산헤드린 공회를 열었습니다.
먼저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는가?”라고 질문합니다(7절).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8절 말씀대로!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담력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말할 것을 생각나게 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해서 거침없이 변론하는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 산헤드린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병 고침을 받은 못 걷던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었으므로, 무슨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14절). 그러자 산헤드린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는 엄명과 함께 경고했습니다.
점잖은 훈계 정도가 아니라, 위협이었습니다. 17절입니다. 행 4:17 →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또한 29절입니다. 행 4:29 →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당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자기들이 내린 경고와 말의 위협이 통하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매질과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때로는 재산을 빼앗거나 투석형을 가했고, 심지어는 목숨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이런 심문과 위협 앞에서 사도들이나 당시 초대교회 신앙인들이 보여주었던 태도가 잘 드러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13절의 ‘담대하게’라는 단어입니다. 행 4:13 →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네! 베드로와 요한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행 4:19∼20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즉, 우리는 죽는다고 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이렇게 용기 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 공회원, 빌라도 총독, 헤롯 왕 앞에서 부인한 것도 아닙니다. 대제사장 집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아이 앞에서 부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이전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했을 때는!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 그들은 지금 죽어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의 위협과 협박이 있었지만,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담대함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선지자들은! 당시 권력자들이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목숨을 빼앗으려는 위험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 당시의 개혁자들 역시 담대히 복음의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교황이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복음을 붙잡는 일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그들은 담대히 그렇게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또한, 성령충만함으로 담대한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코람데오 의식을 가지고 살자!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말이 있습니다. ‘Coram’은 ‘∼앞에’란 뜻이고, ‘Deo’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Coram Deo’ 하면!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1521년에 독일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를 5세는 마틴 루터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루터에게 질문합니다. ‘네가 주장하는 95개 조항을 철회할 의사가 있느냐?’
그때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사로잡혀 있고,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주장을 철회할 수도 없거니와,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앙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나를 도우시옵소서. 아멘” 루터는 사람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종교개혁자들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신념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력 때문도 아니고! 어떤 지식이나 깨달음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은! 바로 코람데오(Coram Deo)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행 4:19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네,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서 있었고, 그러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보다 사람이 기뻐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 서 있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믿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봉독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갈 1:10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고 초대교회를 이끌면서, 그는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성도는 무엇으로 담대해질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을 근거로 답을 나누시고, 또한 그 은혜받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2. 성령이 충만하면! 담력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하나님께서 말할 것을 생각나게 하심을 경험해 보셨습 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권능의 삶을 살아갑시다.
3. 오늘 우리의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것입니다. 코람데오(Coram Deo) 믿음에 대해 나눠봅시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귀한 이름으로 여겨, 스스로를 그의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본래부터 그렇게 위대한 이름의 사람은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목동 집안인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막내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고, 그의 이름을 높여주셨을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늘 피해를 주는 이웃 나라인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군대’를 모욕합니다. 다윗의 마음에는 의분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아니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다니!” 그는 사울 왕이 입혀주는 갑옷과 칼을 다 버리고, 단지 물매 돌만을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섭니다.
그리고는 담대하게 외칩니다. 삼상 17:45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46 →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목을 베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한마디로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게 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나선 것입니다. 네!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다윗의 마음 중심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2. 우리의 자녀·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가 되게 합시다.
처음에는 좋은 신앙의 사람이었고, 높은 영적 직분도 가졌지만, 나중에는 치욕적인 이름과 가문으로 몰락한 가정의 예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가정’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조목조목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상 2:12 →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둘째, 그들은 제사(예배)를 무시했습니다. 삼상 2:17 →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셋째, 그들은 성소에서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삼상 2:22 →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넷째, 그들은 다른 사람까지 범죄케 했습니다. 삼상 2:24b →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다섯째,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삼상 2:25 →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하나님은 엘리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삼상 2:31, 33b~34 →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네 집에서 출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결국, 그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3만 명의 병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들은 같은 날에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4:11). 이런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 역시 충격을 받아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죽음으로 40년 동안의 사사 생활을 마감했습니다(삼상 4:18). 또한, 둘째 아들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었는데,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놀라 갑자기 해산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고 그도 역시 죽었습니다. ‘이가봇’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삼상 4:21)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또한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유산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영적유산을 물려주시길 바랍니다.
3. 신사임당·이율곡이 근 현대사에 가장 높은 명문가를 이룬 이유는?
저는 우리나라 근 현대사에서 가장 높은 명문가는 신사임당·이율곡의 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돈, 지폐의 표지 인물로 이 모자(母子)가 등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지폐는 4종류로 1천 원, 5천 원, 1만 원, 5만 원권입니다. 이 지폐들의 표지 인물이 누구입니까? → 1천원 - 퇴계 이황 (1501~1570년) / 5천원 - 율곡 이이 (1536~1584년) / 1만원 – 세종대왕 (1397∼1450년) / 5만원 – 신사임당 (1504~1551년)
이들 네 사람은 모두, 불교국가였던 고려가 망하고, 유교국가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율곡 집안이 명문가가 된 데에는 예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곡은 효성이 지극한 분이었는데, 그의 아버님 제사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모자라는 부인이 제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슬금슬금 집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문중 선비들의 눈에 이 광경이 얼마나 한심하고 기막히게 보였겠습니까? 참다못한 문중의 다른 이들이 율곡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아! 이 사람아! 좀 말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불평스럽게 얘기하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율곡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둡시다. 선친께서는 비록 모자라지만 저 며느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데, 당신의 제상에 오른 음식 좀 집어 먹었다 해서, 그를 책망하고 나무라면 제사 받으시는 아버님 마음이 어찌 기쁘시겠습니까?”
유학자 율곡이 공자의 가르침에 본질을 꿰뚫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 중에 ‘祭如在(제여재)’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 “죽은 사람을 제사할 때, 마치 그 사람이 거기 살아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제사를 드려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율곡은 예법이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사 받으시는 아버님이 마치 살아서 거기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제사와 예배를 동일시하게 취급할 수는 없지만 “제사 때에는 죽은 이가 살아서 거기 있는 듯 대한다”는 ‘祭如在(제여재)의 정신’을 우리의 예배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여기 오셔서 예배를 받으시고 지켜보신다’는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우리의 자녀·손들이 화폐의 표지 인물로 선정되는 꿈을 꾸어봅시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현재 우리 시대의 돈의 표지 인물은 모두 ‘유교문화가 배출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네 명 가운데 가장 늦게 태어난 사람이 율곡 이이로, 그는 유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45년이 지난 1,537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올해로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된 지 139년이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의 자녀 손들 가운데, 장차 우리나라 ‘지폐의 표지 인물’로 등재될, 위대한 인물들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꿈을 꾸고 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제가 이런 설교를 해왔지만!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속으로 “에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겠어!?”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미국에서 이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난 2024.04.20. <조선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한국계 첫 미국 화폐 인물 스테이시 박”이란 제목입니다.
Stacey Park Milbern Quarter Dollar
기사를 요약해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장애인 인권 향상에 앞장섰던 스테이시 박 밀번(Stacey Park Milbern, 1987~2020, 한국 이름 박지혜)이란 여성의 얼굴이 새겨진 25센트 동전이, 2025년에 미국 조폐공사에서 발행한다는 것입니다. 스테이시 박 밀번은 주한미군인 백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1987년 5월 서울에서 태어났고,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딸아이가 혹시라도 남들과 다른 처지에 주눅 들까 염려해, 늘 성경 구절을 인용한 말로 용기를 북돋워 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만들어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은 뜻하신 바가 있어서란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일이니!…” 초등학교 때부터 장애인 인권 관련 글을 쓰고, 블로그를 운영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의 감리교대학을 졸업한 이후 미 전역을 다니며 열성적으로 장애인 인권 개선을 위해 일해왔던 여성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명가를 꿈꾸며, 기도의 씨앗을 심읍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자녀들의 대에서는 더 높아지고 좋아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믿었던 하나님, 부모가 받아들인 복음의 씨앗이, 대(代)를 더하면서 숲을 이루고, 산을 이루는 성장과 성숙이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는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 안에서 높아지고 넓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서 가지고 나갔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맷돌 vs 하나님의 이름) 이를 통해 느낀 바와 결심한 바를 나눠봅시다.
2.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불량자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보면, 부모의 직분이나 신앙연조가 영적인 가문을 이어가는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녀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할 일에 대해 나눠봅시다.
3. 우리의 자녀·손들이 장차 화폐의 표지 인물로 선정되는 꿈을 꾸어보자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나눠봅시다.
맥추절 - 첫 열매를 바치는 신앙 (출 23:14∼19)
맥추감사가, 추수감사와 다른 점은! 맥추감사는 ‘첫 열매’ ‘첫 수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주신 ‘전체 열매’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지금도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하나?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은 농경사회의 유산이고, 지금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런 절기를 지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절기의 핵심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고, 절기 속에 담긴 뜻을 바로 알고, 오늘도 마땅히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절기’는 우리가 흔히 지키는 ‘기념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통 기념일은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기념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성경의 절기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정하시고, 그다음에 사건이 벌어집니다. ‘맥추감사절’ 역시,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제정하시고 그다음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럼 맥추절을 지키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신 때와 장소는 언제, 어디서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뒤 시내산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이때는 애굽에서 나온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있을 때이고, 아직 농사를 짓기도 전인데, 하나님은 감사절기를 정하고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즉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절기부터 제정하신 것입니다.
출 23:16 →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지금 너희 눈에는 광야만 보이고 아무런 열매도 보이지 않지? 그러나 아니야! 반드시 너희가 뿌리고 가꾼 열매를 거두게 될 날이 올것이다. 네가 그것을 믿고 감사하면, 반드시 그런 복이 임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수확하게 되는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한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을 우선순위의 첫 자리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당연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2순위 3순위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첫 열매 신앙과 믿음의 상관관계
그러면!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보면, 믿는 자들이 항상 첫 열매를 잘 드리며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첫 열매를 드리는 믿음이 있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 온도를 측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도 사라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첫 열매 신앙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은 함께 가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의 예를 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성읍마다 석상과 아세라 목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온 나라에 우상의 산당과 제단이 즐비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산당들을 제거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본연의 임무를 감당하게 합니다. 마침내 예배가 다시 세워져서 번제와 화목제가 드려지고, 찬양과 감사가 회복되었습니다.
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하게 회복시키고자 한 것은! 바로 ‘첫 열매 신앙’이었습니다. 대하 31:5 → “왕이 명령을 내리니, 유다에 와서 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각종 농산물의 첫 수확을 넉넉히 가져 왔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다.”(새번역)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이 불과 4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사랴 대제사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대하 31:10 → “사독의 자손인 아사랴 대제사장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백성이 주님의 성전에 예물을 드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먹을 것을 넉넉하게 공급받았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
이렇게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명령이었지만, 대부분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첫 열매도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유월절에 장자와 초태생을 살려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 사실을 다시 깨닫고, 첫 열매를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바로 맥추감사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퇴보에는 언제나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는 것이고 반대로,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할 때’, 믿음도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닫히고 식어버리게 됩니다. 주를 향한 사랑도, 믿음도, 주님이 주시는 복도, 다 닫히고 마는 것입니다.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가 드리고 바쳐야 할 첫 열매란?
‘처음 열매’라고 할 때 ‘처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카르(rk'B)인데, 처음(First)이라는 뜻이지만,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영어로 choice의 최상급인 choicest, 그러니까 고르고 고른 것 중의 최고의 것, 제일, 으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가장 좋은 것 Best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 Good 정도가 아니라 → 좀 더 좋은 Better도 아니고 → 최상급인 Best의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첫 것’과 동시에,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역시 그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첫 예물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는, 단지 첫 월급 혹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고, 이 물질을 벌 수 있음도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 주셨고, 건강 주셨기 때문임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첫 부분을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분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내 삶 전체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잠 3:9∼10 →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말씀은 “나에게 첫 것을 주면! 너의 나머지 전부에, 내가 넘치도록 복을 주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을 더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육신도 부모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자녀가 첫 월급 타가지고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좋은 선물을 주면, 부모는 그것을 받고 그냥 있습니까? 그 이상으로, 어떤 형식으로든 보상해 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첫 열매 봉헌’은 곡식이나 과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처음 얻은 새끼도 마찬가지입니다. 출 34:19∼20 →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맏아들은 모두 목사나 선교사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해결책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민 3:45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맏아들 대신 ‘레위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맏배 대신 레위 사람의 가축 맏배를 구별하여 세워라. 레위 사람은 나의 몫이다. 나는 주다.” 맏아들을 드리는 대신 하나님께서 주의 일꾼으로 세운 레위 사람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라는 말은 ‘나귀’와 같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부정한 동물은, 대신해서 어린양을 대속물을 드려서라도 반드시 첫 것은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맥추감사절의 ‘근원적 의미’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맏아들이나 첫 것은 ‘내 것, 하나님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하나님 당신의 것’을 꼭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내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나에게 있는 무엇이 하나님의 것입니까? 네! ‘첫 열매’와 ‘맏배’입니다.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다 내 것이다”라는 믿음은 우상숭배입니다. 내 재산이나 재능이나 내 자녀나, 심지어 내 생명과 영혼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소중하고 귀하면 귀한 것일수록 먼저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맏배를 드리는 것이요, 첫 열매 신앙입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영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내 모든 귀중한 가치는 세상이 아니요,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믿음과 신앙고백은 일 년에 한 번 맥추감사절 때만 기억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받은바 그 은혜를 잊지 맙시다. 감사하되 우리의 온전한 사랑을 담은 ‘첫 열매’와 ‘맏배’ 즉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풍성한 은혜와 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첫 것, 첫 열매를 당신께 드려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 심정은 무엇인지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우리가 첫 예물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단지 첫 월급 혹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신앙고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사람에게든 하나님께든 ‘감사’하므로 ‘더 풍성한 감사’ ‘행복의 은혜’를 누린 경험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인생의 광풍 (행 27:9∼25)
오늘 말씀은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과정 중에 만난 ‘유라굴로’ 광풍 이야기입니다. 이미 겨울이 시작되어 역풍이 부는 때가 되어, 여러 날 걸려 지금의 그리스에 속한 가장 큰 섬인 그레데섬(크레타섬)의 ‘미항’이란 곳에 겨우 도착합니다. 바울은 더 이상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그때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만일 항해를 강행하면 화물과 배뿐 아니라, 인명 피해까지 생길 것이라고 경고까지 합니다.
1. 바울의 말(하나님의 말씀) 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백부장
하지만 호송 책임을 맡은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미항에서 약 65Km 정도 떨어져 있는 ‘뵈닉스’ 항까지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다가 큰 광풍 ‘유라굴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 인생이 광풍을 만나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따르고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대신 사람의 판단과 생각을 좇기 때문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행 27:11 →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vs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정인지도 모릅니다. 선장은 항해의 전문가이고, 선주 또한 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또 배에 실린 모든 화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단지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내린 결정만은 아닌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리기에 어디가 더 좋은 곳인가? 또한,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까지 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선주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의해 결정한 것입니다. 행 27:12 → “그 항구(미항)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여기 ‘불편하므로’라는 말은, 지금 도착해 있는 ‘미항’은 숙박 시설도 열악하고, 유흥장이나 놀이시설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뵈닉스까지 가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편안함,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육신 적으로 즐길 거리들, 즉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백부장을 비롯한 선장, 선주, 선원들의 결정이 잘한 결정처럼 보였습니다. 행 27:13 →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네! 뵈닉스를 향해 출발했을 때, 순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신이 났습니다. “봐라!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바울의 말을 듣고 그냥 미항에 있었더라면 어쩔 뻔했냐?” 하면서 바울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뵈닉스 항구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그곳에서 즐길 생각에 들떴을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을 보면! 갑작스럽게 상황은 변합니다. 행 27:14 →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여기 “얼마 안 되어”라는 단어가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닥칠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무서운 광풍을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2. 잘못된 결정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그들은 모든 짐을 버려야 했습니다. 행 27:18 →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아끼는 물건들, 소중한 것들을 다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하게 포장하고, 조심스럽게 배에 실었겠습니까? 하지만! ‘취급주의’라고 딱지를 붙인 귀중한 짐들, 값비싼 짐들도 다 버렸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중품이었던 것들이고, 소중했던 수화물이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현실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물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짐들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은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 같은 배의 기구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배를 운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들이어서, 생명처럼 소중한 기구들이었지만! 자기들의 손으로 버려야만 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행 27:19 →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의 여망은 없었고,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습니다. 행 27:20∼21a →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몰아치는 광풍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노련한 경험’도 소용없었습니다. 지금 ‘다수의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광풍이 불어오자! 인간의 모든 계획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습니다. 그저 풍랑에 밀려 이리저리 밀려다니게 되고 말았습니다. 행 27:15 →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가수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광풍이 몰려오면! 마치 유라굴로 광풍 만난 배처럼, 그냥 물결에 밀려 이리저리 쓸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인간의 의지, 인간의 지식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 누가 자기 인생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한 결과가 이렇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유라굴로 광풍을 극복하는 방법 : 회개, 신뢰, 역전
그러면 이처럼 인생의 유라굴로 광풍이 몰려올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① 회개: 유라굴로 광풍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행 27:21 →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유라굴로 광풍 앞에 모두 벌벌 떨고 있는 아수라장 가운데, 누가 나섭니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나섭니다. 그는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줄을 깨닫고, 이제라도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 꿇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아무리 실타래가 얽히고설켰어도 실마리를 찾으면 다 풀어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인생의 복잡한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호 6:1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해결됩니다.
② 신뢰: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는, 그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습니다. 행 27:23~24 → “내가 속한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여기 ‘내가 속한 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신뢰가 있으면, 우리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 43:1~2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속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심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이제 바울은 용기백배하여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행 27:25 →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은 믿음의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기적은 한 사람의 분명한 믿음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③ 역전: 바울이 리더십을 쥐고 이끌어가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 나타났습니다. 행 27:35~37 →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광풍이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바울은 마치 ‘성찬식’을 집례하듯, 떡을 들어 축사하고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14일간 굶었던 그들인데! 바울이 축복기도를 하고 나눠주자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받아먹었습니다. 그 후에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되는데 276명 전원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자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을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요, 성도들이 전도하는 이유입니다. 풍랑 만난 이 민족이! 한국교회 때문에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 때문에 풍랑 만난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울처럼 이 시대에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 소망을 주는 사람, 나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바로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의 현재 가치 판단 기준은 무엇이 1순위인지? 나눠보고 잘못된 결정으로 큰 손해나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바울이 담대할 수 있었던 근거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절망 속에서 소망을 주고, 캄캄한 앞길에 빛을 비추는 사람이었던 바울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빛과 소망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와 ‘전도’의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하나님의 비밀 작전 (행 23:11∼32)
1.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암살단이 조직되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열심이었던 유대교 신자에서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간증하자, 바울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한 암살단원이 4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암살 음모와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유대교 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가 중심이 되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공회의 이름으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을 다시 심문하겠으니, 그를 공회에 출석하도록 군인들의 영내에서 나오게 해 달라는 공문을 천부장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을 공회로 이송하는 도중에, 암살대가 매복했다가 죽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2. 악인들의 암살 계획이 탄로나다.
하지만! 이런 암살 계획은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이 비밀 정보를 빼낸 사람은 바울의 ‘조카’였습니다. 행 23:16 →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바울의 조카가 예수를 믿었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바울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바울의 조카가 군인들의 영내로 들어가 바울에게 유대인들의 암살 계획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바울도 이 사실을 한 백부장에게 알렸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는데, 로마 시민권자가 암살당하면 일이 복잡해질 것을 직감한 백부장은, 바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직속 상관인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바울의 조카를 천부장에게로 보냅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의 조카를 맞아드려서 묻습니다. 행 23:19∼21 → “천부장이 그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천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만일 로마인인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천부장의 입장도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천부장은 필사적으로 바울을 보호하려고 애를 씁니다. 비록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일 뿐이지, 그 속은 100%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족인 유대인들은 악착같이 바울을 죽이려 하고, 이방인인 천부장은 악착같이 바울을 지키려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비밀 작전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최상의 호위병으로 호송하다.
천부장은! 바울의 암살 계획을 듣자마자, 바울을 당장 안전한 곳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물론 천부장 자신이 지키고 있는 ‘안토니아 요새’도 안전하긴 합니다. 천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천부장은! 그날 밤으로 바울을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고, 총독이 거주하는 훨씬 더 안전한 ‘가이사랴’로 호송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천부장의 바울 ‘호송 작전’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첫째, 호송 시간입니다. 23절에 ‘밤 제 삼시에’라고 했는데,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면 밤 9시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바울을 호송한 것은! 그만큼 긴급하게, 비밀리에 옮기겠다는 뜻입니다. 둘째, 호송하는 군사의 규모입니다. 역시 23절을 보면,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을 동원합니다. 합계 470명이나 됩니다. 죄수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병력이 동원된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셋째, 바울의 이송 방법입니다. 24절을 보면, 천부장은! 말을 준비하여 바울을 태워서 보냅니다. 보통 죄수를 그런 식으로 호송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사람은!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안전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생명의 위협을 받는 분들이 계십니까?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다른 어떤 종류의 위협을 받고 계십니까? 육신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위협을 받습니까? 명예가 위협받습니까? 어떤 종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실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행 23:11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 역시 로마로 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계획을 세우고, 방법까지 내가 다 정해 놓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걱정하고, 안달합니다. 왜 일이 이렇게 틀어졌을까? 한탄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을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방법대로 따라가세요.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로마로 가려고 했는데, 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죄수의 신세가 되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죄수가 되었다고 로마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수인 바울을, 자유인인 바울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로마로 보내셨습니다.
4. 바울의 무죄를 총독에게 편지로 알리다.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 총독부로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함께 보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벨릭스 총독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본문 행 23:25∼30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 로마시민인 바울이란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죽게 된 상황에서 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구해냈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보니, 단지 종교 문제일 뿐, 죽이거나 결박할 사안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당신께 보내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송사도 있으니, 당신이 심문해 보시고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런 내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부장이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변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벨릭스 총독도 비록 탐관오리였지만, 바울에 대해서 좋은 대접을 하게 됩니다. 행 24:23 →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참으로 놀랍고도 특별한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악한 사람도 나에게 악하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착한 대접을 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에스더를 왕비로 뽑은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은 폭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큰 유익을 끼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르면! 모든 사람이 내 편이 됩니다. 잠 16:7 →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이런 삶의 원리를 터득하시고, 원수라도 나를 돕는 자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하나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한, 내 삶의 길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로마 전도의 사명’을 주신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동안 모든 신상의 안전을 지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이 있는 한! 삶과 생명은 보장됩니다.
둘째, 로마로 가는 방법은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수로 가든지, 자유인으로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밤중에 가든지, 낮에 가든지 ▸즉시 가든지 머물다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육로로 가든지, 배를 타고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즐겁게 가든지, 괴롭게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셋째,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비하게 다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도 그렇습니다. 실패한 것 같지만 성공이었습니다. 마귀가 이긴 것 같은데,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모든 정죄를 이긴 것이고, 모든 사망을 이긴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런 신비로운 성취에, 우리의 삶을 다 맡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본문에는 우연인 것 같은 사건, 원수여야 할 사람이 바울은 돕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연이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 경험 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네가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약속하셨고, 바울 역시 소원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길은 결코 쉬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내십니다. 이에 대해 나눠봅시다.
3. 백부장, 천부장, 총독, 즉 세상 사람의 눈에 비친 바울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에 열심을 다 하는 것 외에는 흠을 찾기 어려운 성도가 됩시다.
거룩한 소동을 일으키자! (행 19:8∼29)
1. ‘아데미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일으킨 소동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에베소는! 당시 인구 30만 명이 넘는 굉장히 큰 도시였습니다. 이곳 도시 사람들이 섬기는 수호신은 여신인 ‘아데미’였습니다.
이 여신의 모습 중에 특이한 점은, 다산과 풍요의 여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방이 10여 개나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에게 생명의 젖을 먹여 기르듯이, 아데미 여신이 자기들에게 풍요와 다산의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에베소는 로마의 가장 중요한 무역항으로, 아시아 경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데미 신전 주변에는 몰려드는 여행객들을 위한 음식점과 숙박소,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했습니다. 특히 5월은 나무나 은으로 만든 아데미 여신상, 그리고 그것을 넣어두는 작은 함을 만들어 파는 장사들의 큰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너희들이 섬기고 가지고 있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얼마나 많이 설교했는지! 아데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업자들의 조합장 같은 사람인데, 데메드리오란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는 최근 매상이 부쩍 줄어든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그는 경기 변동과 시세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석한 결과!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 복음’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복음 전도가, 결국엔 우상으로 먹고사는 자기들의 사업을 망하게 할 수도 있음을 예견했습니다.
그래서 동종 업자들과 직공들을 다 모아 놓고 이렇게 일장 연설을 합니다. 행 19:25∼27 →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①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②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③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러자 에베소 시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행 19:29 →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당시 에베소에는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지금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폭도들의 규모와 소동이 얼마나 컸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얼핏 보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vs 아데미를 믿는 ‘우상 신앙’과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아데미 신전과 아데미 상의 위엄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매출이 떨어져 경제적 이익이 줄어드는 것에 격분하여 이런 소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의 풍족함과 직업적 명예가 모두 아데미와 관련되어 있는데, 아데미의 위엄이 떨어지면 직업을 잃고, 지금껏 누려왔던 경제적인 안정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하니 눈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데미를 신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섬긴 것은 아데미 여신이지만, 사실은 ‘돈’과 ‘자기 쾌락’이라는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근본적으로 ‘자기 숭배’입니다.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에 탐닉하는 ‘탐심’이 곧 ‘우상 숭배’입니다. 골 3:5 →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크리스천의 영성에 독보적인 영향을 끼친 ‘리차드 포스터’ 목사님이 벌써 35년 전에 쓴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근자인 2017년에는 개신교 내에서 큰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는 ‘존 파이퍼’ 목사님이 거의 같은 제목의 책을 내셨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책의 제목처럼 ‘돈, 섹스, 권력!’ 이 세 가지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줄기’에서 수많은 죄의 ‘가지’들이 뻗어 나와, 거대한 ‘죄의 나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 섹스, 권력 중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요? 사람 따라, 나이 따라, 여건 따라, 다 다르겠지만! 점점 더 세상은 ‘돈’의 힘이 세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 가지 영역 중 자신이 가장 약한 영역은 어디인가? 스스로에게 늘 질문해야 합니다. “내 약점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하나 더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돈으로 연결되는 세상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돈이면 뭐든지 해결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스포츠나 오락이나 여행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상술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물론 행복을 누리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합니다. 소득과 명예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확장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헌신도 할 줄 알아야 참 성도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단지 자기 행복과 풍요를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라면, 우상 숭배자의 마음가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데메드리오 같은 선동가가 나타나면! 쉽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2. 복음과 말씀으로 인해 일어난 거룩한 소동
오늘 성경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한 절로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행 19:20 → “이처럼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여기 ‘바울의 전한 말’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말씀’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두란노서원을 세우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계속하니 에베소뿐 아니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과 헬라인들까지 주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능력과 병을 고치는 신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행 19:11∼12 →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 결과! 에베소 전역이 바울이 전파하는 말씀과, 행하는 능력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거룩한 소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복하고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행 19:17b∼18 →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깜짝 놀랄만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에베소에 있는 ‘마술사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행 19:19 →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할렐루야!
마술사들이 불태워버린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돈으로 정확하게 환산할 수는 없지만, 매우 큰 액수임은 틀림없습니다. 복음의 가치, 진리의 가치를 더 크게 여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되었기에, 더 이상 거짓을 붙잡고 살 수는 없기에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옛사람과 부끄러운 행위를 벗어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에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두 가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우상 업자 ‘데메드리오’가 자기의 경제적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일으킨 ‘세속적 소란’입니다. 자기 동네 에베소에서 복음의 놀라운 영향력을 발견했을 때, 마술사들처럼 우상숭배를 중단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동조자들을 모아 소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일으킨 ‘거룩한 소란’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누룩이 들어가면! 온 가족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됩니다. 온 직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고, 도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야 합니다.
네!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행 24:5 → “우리가 보니 이 사람(바울)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세상을 거룩하게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역사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서도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은 복음과 말씀을 따라 사는 데 필요한 손해라면, 기꺼이 감수할 신앙적 용기와 결단이 있습니까? 나눠봅시다.
2.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유혹인 ‘돈, 섹스, 권력’ 중에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나는 내 가정, 친척, 친구, 동료, 이웃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냥 ‘조용한 신앙인’입니까? 나눠봅시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행 16:5∼15)
오늘 성경의 사건은! 기독교 복음이 오랫동안 아시아 지역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이! 전 세계 - 온 땅끝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된 내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인 사도행전 16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 16:5 → “이에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이 말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이 잘 수행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6절부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행 16:6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또한,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인 16절 중반부터 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행 16:16b∼17 →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는데, 느닷없이 어느 날부터 가는 곳마다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힘써서 노력했지만 다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 주일 동안,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마게도냐 지역의 한 사람이 서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행 16:9 →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하나님의 계획은! 아시아보다 먼저, 유럽지역에 복음이 들어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본 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도의 방향을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바꿉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울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유럽 쪽으로 넘어가 ‘네압볼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육로로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는 큰 성읍이었지만! 유대인 회당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하기를 이곳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면, 안식일이 되면 반드시 정결예식을 위해서 사람들이 강가로 모일 것이다!’
과연 안식일에 강가로 나가봤더니, 여러 여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서 즉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옷감장사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말씀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할렐루야! 유럽지역에서 복음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3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도 바울처럼 자신을 향해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럽으로 복음이 확장되는 이 위대한 사건은 거창하게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것은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말하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네! 바울이 들은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은 그 음성을 잘 귀담아들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예민했고, 그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드디어 바울이 빌립보 성읍을 가로지르는 강가에, 여러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 말씀에 반응하고,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14절입니다. 행 16:14 →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 지라.” 네!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자가 심령의 문을 열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단지 한 여인이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그 한 사람 속에는 그의 ‘온 가족’이 담겨 있었습니다. 15절입니다. 행 16:15 →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아멘. 또한, 한 명의 간수가 예수를 믿었지만, 마침내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믿음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이후 33b∼34절에는 빌립보 간수가 회심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 16:33b∼34 →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네! 역시 그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속에 그의 가문이 담겨 있었고, 나아가서는 유럽 전체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문을 닫고 막으실 때, 때론 열려도 아주 작은 문이 열릴 때,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아시아로 가는 것은 막혔지만, 대신 유럽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 복음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동아시아로 전해지고 ▸우리 한국 땅에도 전해졌고, 이제 이 복음은 ▸전 세계 속으로 더 신속하고 넓게 퍼지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한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큰 사건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부르는 한 사람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한 사람의 필요를 느낄 수 있는 마음, 한 사람의 손짓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당장 수백, 수천, 수만 명을 전도하는 사람은 아니어도, 한 사람에 대한 열정만큼은 꼭 가져야 합니다.
네! 마게도니아 사람, 한 사람이 말하기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 유럽을 대표하는 한 사람, 세상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토이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 “바울이 승선하고 에게해를 건너던 그 배 위에, 유럽의 미래, 세계 인류의 미래가 있었다.”
성도 여러분에게는 어떤 ‘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내가 꼭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생각되는 그 한 사람이 생각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도 절대로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구원받을, 수많은 사람이 그 뒤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에게로 건너가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 마게도니아 사람의 부름을 듣고 바다를 건너 그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에게해! 바다만을 건너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건너갔던 것은! ▸‘자기의 생각’이었습니다. ▸자기의 ‘관심’을 건너간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의 기분, 자기의 감정, 이 모든 것들을 건너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계획을 건너,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따를 때, 하나님의 뜻은 위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웃에게 전도하려면 건너가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완고함’으로 막힌 마음의 담을 건너가야 합니다. ▸때로는 ‘체면과 자존심’도 건너가야 합니다. ▸또한, 나는 구원받았으니 됐다는 ‘영적 이기주의’를 건너가야 합니다. ▸혹시 내가 전도하는데 믿지 않고 대적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도 건너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낯선 쪽으로 건너는 모험을 감행하길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건너가야 합니다. 어색함도 건너가야 합니다. 체면과 자존심, 자기의 관심과 생각, 영적 이기주의를 건너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달 뒤인 7월 첫 주일인 7월 7일에 ‘보고 싶습니다’를! 그리고 10월 셋째 주일에는 ‘새 생명 전도축제’를 하려고 합니다. 아마 벌써부터 마음이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다른 것들은 다 하겠는데 제발 전도하라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건너가라. 가서 도우라. 구원하라.”…
셋째, 참된 도움은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예수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함으로 그들을 도왔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성도들을 향하여 더 많은 구제와 사회봉사를 펼치라고 요구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영생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성도와 교회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기관도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고, 궁극의 일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것을 믿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복된 일에, 모두가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이 전도함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2. 당신에게 전도가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와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당신이 건너야 하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 속회 나눔 시간에 내가 꼭 전도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나누고, 전도의 열매를 위해 서로 중보기도 합시다.
주신 복을 지켜주는 계명 – 절제 (고전 9:25)
성도 여러분! ‘절제’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도 같습니다. 인생의 과욕을 조절하여,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품이 절제입니다.
1.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 → 절제
여러분은 첫 계명 하면! 어떤 계명이 떠오르십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神)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이죠! 그러나 이 계명은 출애굽 시대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계명이고,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은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인 ‘에덴동산’을 주셨는데, 그 안에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동산의 복을 누리고 지속해 갈 수 있도록! 한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절제의 계명’입니다. 창 2:16∼17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 창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행복원칙, 에덴의 계명은!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먹고 싶은 본능을 주셔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셨지만, 절제를 통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행하게도 에덴의 행복을 지키는 ‘절제의 계명’을 지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행복을 누리고 지킬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바로 이 ‘절제의 시험’을 통하여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호시탐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절제의 능력을 통하여 행복을 지키는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9:25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사탄은 언제나 인간의 본능에 따라 살라고 유혹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이용하라고 유혹합니다. 또한,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적을 달성하라고 유혹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절제의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모든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사람 아담은 이 본능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에덴의 행복을 지키고 누릴 수 있도록 주신 유일한 계명인 ‘절제’를 잘 지킬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몰랐던 사람 → 에서
식욕이라는 욕망 앞에 절제하지 못한 ‘에서!’ 그는 주어진 엄청난 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창 25:34 →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현실주의자, 향락주의자 ‘에서’에겐 ▸영적인 것, 미래적인 것, 신앙적인 가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현실을 얻기 위해! 신앙을 팔고, 미래를 팔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에서’였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2:16∼17 →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네! 이 사건으로 인해, 에서는 주류인생에서 비주류 인생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절제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갈림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는! ‘주어진 복을 지키는 그릇’입니다.
우리가 버리는 음식만 줄여도 전 세계적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수억 명의 배고픔을 면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음식 쓰레기는 ‘기후 위기’와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음식 쓰레기는 대부분 수분 함유량이 많으므로, 이것을 수거·처리 혹은 재활용할 때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일반 쓰레기의 3∼4배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간의 욕심과 무절제로, 지구가 얼마나 아파하고 힘들어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제는 전 지구적으로 인류가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생긴 자연재해로 벌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복과 미래에 약속된 복을 누리기 위해서, 절제의 삶을 살아 인생의 성을 잘 지킬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잃어버린 계명인 ‘절제’를 다시 찾아 지킵시다.
다니엘은 왕이 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음식을! 맛이나 영양의 관점으로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해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즉 신앙적인 이유로 왕이 주는 진미를 ‘자신을 더럽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먹는 행위는, 단순히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나, 맛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먹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음식이 자신의 식탁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에서는, 성경에서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여 먹지 못하게 한 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먹었으며, 피를 제거하지도 않은 채 먹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음식들은 그들이 섬기는 이방 신 앞에 바쳐진 후의 음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다니엘은 그런 음식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디에 뜻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식사기도와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잔반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이 식탁이 과연 나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농민을 죽이는 과정을 거쳐 온 것이라면! 우리도 다니엘과 같이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외면하거나, 모르거나, 부인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창조신앙에 무감각한 ‘생태적 문맹’의 소치인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먹거리를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 관심사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환경선교주일’로 지키면서 특별히 ‘그린하트액션 선포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을 ‘섭씨 1.5도’ 이내로 막지 못하면, 기후체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망가지게 된다는 것을 이미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1.2°c가 높아졌는데도! 전 지구적인 생태계의 질서가 흐트러져서 폭염, 폭우, 가뭄, 난데없는 우박, 기류변화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재난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크기로 자연의 공격을 받고 있어, 자연 세계가 점점 더 두려운 존재가 되어 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좀 더 확대되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창조신앙을 가지고 자연과 환경을 보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리고 동참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녹색 심장(Green Heart)을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이것을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은 없습니다. 부서별로 각 과제를 주보에 실어 들였는데! 특별히 우리 장년들이 해야 할 일은 아주 가볍습니다. 그동안 여선교회, 남선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 플로깅을 통해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해 왔는데! 이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탄소제로 녹색교회’ 운동을 소개하는 이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함께 자연을 잘 돌봅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꼭 플로깅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양복 옷깃에 단 녹색심장 브로치와, 여성들이 팔찌나 책갈피, 혹은 핸드백에 다는 장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코바늘 뜨개질로 만든 장신구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평상시에 달거나 걸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건 뭐예요?’라고 묻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녹색마음’을 전하시면 됩니다. <Ex: 서부연회 참석 – 브로치>
그런데! 잘 전할 자신이 없으면! 이 ‘전도지’를 주면서 ‘여기 QR코드를 찍어서 한 번 들어봐!’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쉽죠! 함께 하십시다. “전도는 쉽다!” “녹색심장 전하기도 쉽다!”
성도 여러분! 성경적인 관점에서 ‘파괴된 자연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은 → ‘욕심으로 타락한 인간이, 다시 창조신앙을 가진 인간으로 회복되면 자연도 회복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입니다. 본래 신앙과 욕심은 반(反)비례해야 정상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줄이고 절제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자연을 돌보고, 이웃과 공존하는 길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많이 가지고 누리고 소비하는 것을 복된 삶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회개하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에서 내려서야 합니다.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길이 좁아 찾는 사람들이 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절제의 길’, ‘청지기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환경문제의 현안들에 대하여 전체 10분 이내로 나눠봅시다. (예: 폭염, 폭우, 가뭄, 해수 온도 상승, 물과 대기오염 등)
2. 신앙인들에게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회복하는 사명’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지? 교회에서 진행하는 ‘그린하트액션’에 참여할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3. 교회적으로 환경을 살리고, 과소비를 줄일 수 있는 실천적 일들은 무엇일지? 속회마다 정리하여 교구장 에게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가둘 수 없다 (행 10:9∼16, 34∼48)
오늘의 주제는 ⇨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복음전파를 가로막지 말자!”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선교하려면! 선교사 자신의 교만,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피선교지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 가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가족들의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인가귀도를 이루지 못한 성도님들은!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1. 성령의 역사 앞에 먼저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제자인 베드로를 변화시키고 있는 내용이 사도행전 10장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옥상 지붕 위로 올라가 낮 12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네 귀퉁이에 끈을 맨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네 발 달린 온갖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어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 ⇨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행 10:13)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즉각 ▶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을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행 10:14)라며 거부합니다.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려오기를 ⇨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행 10:15) 이런 과정이 세 번 반복된 다음에, 보자기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직접 “고넬료에게 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이상한 환상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베드로의 ‘영적 편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거듭 당부하셨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여전히! ⇨ 유대인만이 구원받은 백성이요,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 ‘영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여전히 속되고 부정한 존재’였습니다.
2. 유대인은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유대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생각은! 배타적이며, 부정적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은 ⇨ 유대인으로서는 심지어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 하더라도, 생각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고, 뚫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의 근원으로 택하고 부르셨습니다. 창 12:2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네!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모든 민족이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 하나님의 축복이 단 한 방울도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세계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독선과 욕심의 장벽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선민의식이고, 유대주의의 병폐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세 번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익숙하고, 인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바랐고, 그 범위를 벗어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런 편견과 고정 관념을 먼저 깨뜨리시고, 복음전파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겸허하게 경청하며,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3.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
드디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 이 사건은 선교사(宣敎史)적으로 대 전환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사건은, 외형적으로 보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혁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비로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처음으로 ‘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행 11:18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서 성령과 세례를 받는 이야기이고, 11장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 곧 자기가 이방인 백부장을 만나 그를 개종시킨 일의 경과를 보고하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행 15장에 가서는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되는 길에 대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15:11∼20 요약 → “우리는 그들이(이방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온 무리가 가만히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① 우상의 더러운 것과 ② 음행과 ③ 목매어 죽인 것과 피째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옳으니…” 네! 마침내 이방인들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지켜야 하는 규정에서 벗어나,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이방인 고넬료 가정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마치 드라마처럼 아주 세세한 내용들을 이 이야기 속에 담아놓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흥미로운 사실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던 곳이 ‘욥바’라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행 10:5∼6 →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성도 여러분! ‘욥바’ 하면 성경에서 생각나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네! ‘요나’입니다. ‘욥바’는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이방 땅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이 지시한 이방 땅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배를 타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욘 1:3 →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는 이방인을 회개시켜 구원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바로 그 ‘욥바’ 항구 도시에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베드로의 본래 이름이 무엇입니까 ‘시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바요나 시몬”, 즉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소개합니다. 마 16:17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Simon son of Jonah) 네가 복이 있도다.”
그런데 요나의 아들인 그 ‘시몬’이 구약성경의 요나처럼, 바로 그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서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욥바’란 지명이 갖고 있는 이런 의미 때문에,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을 만나 개종시키는 이야기에 이 ‘욥바’라는 지명을 6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행 10:5, 8, 23, 32, 행 11:5, 13 이것은 구약성경의 요나가 ‘욥바에서’ 이방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일을 상기시킴으로써, 사도행전에서의 요나의 아들인 시몬 베드로는 “욥바에서” 성령의 지시를 따라 이방인 백부장을 개종시킨 일을 ‘대조하여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 그러면 어떻게 복음은 유대인 장벽을 넘게 되었습니까? ⇨ 먼저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베드로의 회심’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행 10∼11장의 내용을 가리켜 일반적으로는 “고넬료의 회심”(X)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베드로의 회심”(O)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그의 온 집안 식구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베드로의 신앙과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던 ‘유대주의’를 떨쳐내고, 변화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선! 먼저 이런 베드로의 변화와 회심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저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그가 구원받기는 글렀어!”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네!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로 작정하고 천국의 보자기에 담아 주신 이방인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신 환상에 순종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변화와 회심이 있었기에 고넬료 가정의 구원이 가능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와 전도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까지 어떤 감정의 앙금이 있거나, 어떤 선입견과 편견이 있습니까? 혹은 어떤 이념과 사상의 간극이 있어서입니까? 오늘 선포된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십시다. 그래서 복음을 우리의 생각에 가두어 두지 말고, 세상 모든 삶이 구원 얻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자신에게 있는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관계가 틀어졌던 일이 있다면 나눠봅 시다. 그리고 누가 먼저 변해야 할 사람인지? 그 변화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모든 민족이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독선과 욕심의 장벽을 쌓았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구약의 요나 선지자와 vs 사도행전의 요나의 아들 베드로의 차이점에 대해서 나눠보고, 나는 ‘하나님의 뜻과 원하심’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 나눠봅시다.
복음은 막을 수 없다 (행 7:54∼60)
1. 예루살렘과 유다에 머무는 복음
사도행전은 글의 짜임새가 매우 치밀한 책입니다. 먼저, 행 1:8에 저 유명한 예수님의 명령과 위임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 “오직 ⇨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예루살렘과 ⇨ 온 유대와 ⇨ 사마리아와 ⇨ 땅끝까지 이르러 ⇨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대로 사도행전의 첫머리에는, 제자들을 비롯한 120문도에게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성령강림절’로 지키는데! 바로 그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념하고, 우리 또한 그런 성령충만함을 사모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 그리고 유대 땅에서 펼쳐가는 사도들의 사역이 소개됩니다. 처음 예루살렘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부흥 성장하고 은혜로웠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히브리어를 쓰는 본토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헬라어를 쓰는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끼리 친밀하고 사랑하고 나누면서 살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 같지만! 결국 구심력만 강한 친교 공동체는 내적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에 따라, 낯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확장해 가는 원심력을 가진 선교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그런 갈등조차도 복음전파를 위해 이용하시는 놀라운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의 전개를 보면, 앞에서 보셨듯이 ▸성령이 임재하신 뒤에, 먼저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이어서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복음전파가 확산 되는 일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사도들조차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 주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처럼 복음전파는 예루살렘과 유다라는 장벽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행 6∼7장에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유대인 사이에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사람을 쓰시는데, 바로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상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들에 비해서,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헬라어를 쓰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집사로 뽑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일곱 집사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위한 목회자로 선출된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은 교회 안에서는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으로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힘썼지만, 그의 사역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교회 밖으로 나가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지난주에 살펴본 베드로와 요한처럼 ‘산헤드린 공회’로 끌려갑니다. 거짓 증인을 앞세워 작정하고 함정을 파서 스데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행 6:10∼13a →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하지만 성령충만한 스데반의 마음과 얼굴은 평안했습니다. 행 6:15 →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은 차분하고도 담대하게 과거 조상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으로 얼마나 강퍅하게 살았는지, 조목조목 지적하며 설교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조차 죽였다고 책망합니다.
그러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부인하려는 듯이, 이를 갈며 스데반에게 무차별적으로 돌을 던졌습니다. 그렇게 스데반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유대교인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성경에서는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행 7:60 →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왜 스데반이 죽었는데 ‘잔다’라고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죽음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잠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것처럼,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잠시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잠잔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장차 부활 후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복락의 삶이 시작될 그 날을 기다리며, 잠시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죽음 때문에 무너질 수 없고, 중단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루살렘과 유다를 뛰어넘어서 이방 세계로 전파되는 복음!
스데반의 순교는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뛰어넘게 되었고, 힘 있게 이방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둑이 무너진 뒤 물이 논으로 밭으로 집으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밀려 들어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끝까지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일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행 8:1b입니다. →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유대교 신자들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박멸할 태세로 거세게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행 8:4입니다. →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피난 가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흩어져 가면서 입을 닫고 있어야 하고, 조용히 숨어야 상식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을 전하며 흩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에 영향받은 결과입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이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가게 됐던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행 8:1a입니다. → “사울이 그(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고,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장의 시작에, 굳이 이 말을 써 놓았을까요? 그것은 사울이 표면적으로는 변화되지 않았지만, 이때 그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9장에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이때 마음의 동요를 주님께서 보시고 그를 전격적으로 만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의 회심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어 이방 세계, 곧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복음전파는 대규모로 진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놀라운 영적 영향력을 끼친 죽음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전파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면서 복음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아울러 죽어서도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 어떤 위협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의 각오로 나서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한, 복음의 확산은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스데반과 같이 성령충만 하여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여, 주의 나라 확장에 크게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람은 세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자연인 ②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③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충만 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에 대해 나눠봅시다.
2. 구심력만 강한 ‘친교 공동체’는 내적 갈등에 휩싸이게 되고, 원심력을 가진 ‘선교 공동체’가 되어야, 건강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음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거룩한 복음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자신의 각오와 다짐을 나눠봅시다.
고난을 이기는 복음의 능력! (행 4:13∼22)
1. 사도행전 서론
사도 바울의 동역자요 의사였던 ‘누가’는 신약성경의 두 권을 저술했는데!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는 이 두 책을 ‘데오빌로’라고 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썼습니다.
‘누가’는 첫 번째 저술인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가르치고 행하신 일,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에 대해서’ 기록했고, 두 번째 저술인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약속대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를 통해 복음이 증거되는 과정을 자세히 통해 적었습니다. 만일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는 유다와 갈릴리 지역에 머물던 교회가 어떻게 세계로 확장되어 갔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5월과 6월, 2달 동안 다루게 될 사도행전은! 사실 ‘사도행전’이라는 이름보다는 ‘성령행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임한 ‘성령강림’은 사도행전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인 ‘선교와 교회 성장을 이끈 원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도들이 방언을 말하게 하고, 각종 기적을 행하게 했으며, 예수 부활을 담대하게 증언할 용기를 주신 ‘증언의 영’이셨습니다. 또한 ‘선교의 영’으로 전도할 열심을 갖게 하시고, 헌신케 하시고, 전도를 위해 제자들을 특정한 지역과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때론 그들이 계획했던 여정을 가로막아 하나님이 계획하신 다른 방향으로 돌려 그곳에서 전도하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전도의 주도권을 ‘성령’께서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이라기 보다는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것이 더 걸맞다는 것입니다.
2. 성도는 무엇으로 담대해질 수 있는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힘써 기도하던 제자들을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담대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엡 5:18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이 왜 술 이야기와 성령 충만함의 이야기를 했을까요? 이유는 술 취함과 성령 충만함이 현상적으로 비슷한 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가 바로 둘 다 용감무쌍해 진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비겁했고, 무능했고, 주님께 근심이 됐던 복음서의 제자들이, 어떻게 사도행전에 가서는 담대한 제자들이 되어 복음 전파에 거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바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충만함’을 받기 이전과 이후의 사람들로 나눠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온전하고 능력 있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겠다고 하신 주님께서 충만하게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한 걸인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여 그를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약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과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산헤드린 공회를 열었습니다.
먼저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는가?”라고 질문합니다(7절).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8절 말씀대로!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담력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말할 것을 생각나게 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해서 거침없이 변론하는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 산헤드린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병 고침을 받은 못 걷던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었으므로, 무슨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14절). 그러자 산헤드린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는 엄명과 함께 경고했습니다.
점잖은 훈계 정도가 아니라, 위협이었습니다. 17절입니다. 행 4:17 →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또한 29절입니다. 행 4:29 →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당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자기들이 내린 경고와 말의 위협이 통하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매질과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때로는 재산을 빼앗거나 투석형을 가했고, 심지어는 목숨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이런 심문과 위협 앞에서 사도들이나 당시 초대교회 신앙인들이 보여주었던 태도가 잘 드러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13절의 ‘담대하게’라는 단어입니다. 행 4:13 →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네! 베드로와 요한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행 4:19∼20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즉, 우리는 죽는다고 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이렇게 용기 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 공회원, 빌라도 총독, 헤롯 왕 앞에서 부인한 것도 아닙니다. 대제사장 집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아이 앞에서 부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이전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했을 때는!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 그들은 지금 죽어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의 위협과 협박이 있었지만,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담대함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선지자들은! 당시 권력자들이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목숨을 빼앗으려는 위험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 당시의 개혁자들 역시 담대히 복음의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교황이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복음을 붙잡는 일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그들은 담대히 그렇게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또한, 성령충만함으로 담대한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코람데오 의식을 가지고 살자!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말이 있습니다. ‘Coram’은 ‘∼앞에’란 뜻이고, ‘Deo’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Coram Deo’ 하면!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1521년에 독일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를 5세는 마틴 루터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루터에게 질문합니다. ‘네가 주장하는 95개 조항을 철회할 의사가 있느냐?’
그때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사로잡혀 있고,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주장을 철회할 수도 없거니와,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앙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나를 도우시옵소서. 아멘” 루터는 사람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종교개혁자들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신념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력 때문도 아니고! 어떤 지식이나 깨달음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은! 바로 코람데오(Coram Deo)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행 4:19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네,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서 있었고, 그러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보다 사람이 기뻐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 서 있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믿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봉독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갈 1:10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고 초대교회를 이끌면서, 그는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성도는 무엇으로 담대해질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을 근거로 답을 나누시고, 또한 그 은혜받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2. 성령이 충만하면! 담력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하나님께서 말할 것을 생각나게 하심을 경험해 보셨습 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권능의 삶을 살아갑시다.
3. 오늘 우리의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것입니다. 코람데오(Coram Deo) 믿음에 대해 나눠봅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존귀케 되자! (삼하 7:8∼9)
1.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을 위대하게 높여주십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귀한 이름으로 여겨, 스스로를 그의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본래부터 그렇게 위대한 이름의 사람은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목동 집안인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막내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고, 그의 이름을 높여주셨을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늘 피해를 주는 이웃 나라인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군대’를 모욕합니다. 다윗의 마음에는 의분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아니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다니!” 그는 사울 왕이 입혀주는 갑옷과 칼을 다 버리고, 단지 물매 돌만을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섭니다.
그리고는 담대하게 외칩니다. 삼상 17:45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46 →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목을 베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한마디로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게 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나선 것입니다. 네!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다윗의 마음 중심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2. 우리의 자녀·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가 되게 합시다.
처음에는 좋은 신앙의 사람이었고, 높은 영적 직분도 가졌지만, 나중에는 치욕적인 이름과 가문으로 몰락한 가정의 예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가정’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조목조목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상 2:12 →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둘째, 그들은 제사(예배)를 무시했습니다. 삼상 2:17 →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셋째, 그들은 성소에서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삼상 2:22 →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넷째, 그들은 다른 사람까지 범죄케 했습니다. 삼상 2:24b →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다섯째,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삼상 2:25 →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하나님은 엘리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삼상 2:31, 33b~34 →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네 집에서 출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결국, 그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3만 명의 병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들은 같은 날에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4:11). 이런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 역시 충격을 받아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죽음으로 40년 동안의 사사 생활을 마감했습니다(삼상 4:18). 또한, 둘째 아들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었는데,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놀라 갑자기 해산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고 그도 역시 죽었습니다. ‘이가봇’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삼상 4:21)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또한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유산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영적유산을 물려주시길 바랍니다.
3. 신사임당·이율곡이 근 현대사에 가장 높은 명문가를 이룬 이유는?
저는 우리나라 근 현대사에서 가장 높은 명문가는 신사임당·이율곡의 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돈, 지폐의 표지 인물로 이 모자(母子)가 등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지폐는 4종류로 1천 원, 5천 원, 1만 원, 5만 원권입니다. 이 지폐들의 표지 인물이 누구입니까? → 1천원 - 퇴계 이황 (1501~1570년) / 5천원 - 율곡 이이 (1536~1584년) / 1만원 – 세종대왕 (1397∼1450년) / 5만원 – 신사임당 (1504~1551년)
이들 네 사람은 모두, 불교국가였던 고려가 망하고, 유교국가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율곡 집안이 명문가가 된 데에는 예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곡은 효성이 지극한 분이었는데, 그의 아버님 제사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모자라는 부인이 제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슬금슬금 집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문중 선비들의 눈에 이 광경이 얼마나 한심하고 기막히게 보였겠습니까? 참다못한 문중의 다른 이들이 율곡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아! 이 사람아! 좀 말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불평스럽게 얘기하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율곡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둡시다. 선친께서는 비록 모자라지만 저 며느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데, 당신의 제상에 오른 음식 좀 집어 먹었다 해서, 그를 책망하고 나무라면 제사 받으시는 아버님 마음이 어찌 기쁘시겠습니까?”
유학자 율곡이 공자의 가르침에 본질을 꿰뚫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 중에 ‘祭如在(제여재)’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 “죽은 사람을 제사할 때, 마치 그 사람이 거기 살아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제사를 드려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율곡은 예법이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사 받으시는 아버님이 마치 살아서 거기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제사와 예배를 동일시하게 취급할 수는 없지만 “제사 때에는 죽은 이가 살아서 거기 있는 듯 대한다”는 ‘祭如在(제여재)의 정신’을 우리의 예배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여기 오셔서 예배를 받으시고 지켜보신다’는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우리의 자녀·손들이 화폐의 표지 인물로 선정되는 꿈을 꾸어봅시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현재 우리 시대의 돈의 표지 인물은 모두 ‘유교문화가 배출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네 명 가운데 가장 늦게 태어난 사람이 율곡 이이로, 그는 유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45년이 지난 1,537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올해로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된 지 139년이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의 자녀 손들 가운데, 장차 우리나라 ‘지폐의 표지 인물’로 등재될, 위대한 인물들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꿈을 꾸고 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제가 이런 설교를 해왔지만!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속으로 “에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겠어!?”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미국에서 이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난 2024.04.20. <조선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한국계 첫 미국 화폐 인물 스테이시 박”이란 제목입니다.
Stacey Park Milbern Quarter Dollar
기사를 요약해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장애인 인권 향상에 앞장섰던 스테이시 박 밀번(Stacey Park Milbern, 1987~2020, 한국 이름 박지혜)이란 여성의 얼굴이 새겨진 25센트 동전이, 2025년에 미국 조폐공사에서 발행한다는 것입니다. 스테이시 박 밀번은 주한미군인 백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1987년 5월 서울에서 태어났고,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딸아이가 혹시라도 남들과 다른 처지에 주눅 들까 염려해, 늘 성경 구절을 인용한 말로 용기를 북돋워 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만들어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은 뜻하신 바가 있어서란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일이니!…”
초등학교 때부터 장애인 인권 관련 글을 쓰고, 블로그를 운영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의 감리교대학을 졸업한 이후 미 전역을 다니며 열성적으로 장애인 인권 개선을 위해 일해왔던 여성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명가를 꿈꾸며, 기도의 씨앗을 심읍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자녀들의 대에서는 더 높아지고 좋아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믿었던 하나님, 부모가 받아들인 복음의 씨앗이, 대(代)를 더하면서 숲을 이루고, 산을 이루는 성장과 성숙이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는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 안에서 높아지고 넓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서 가지고 나갔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맷돌 vs 하나님의 이름) 이를 통해 느낀 바와 결심한 바를 나눠봅시다.
2.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불량자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보면, 부모의 직분이나 신앙연조가 영적인 가문을 이어가는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녀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할 일에 대해 나눠봅시다.
3. 우리의 자녀·손들이 장차 화폐의 표지 인물로 선정되는 꿈을 꾸어보자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