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아주 대단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는 ① 아람제국의 군대 장관이었고 ②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으며 ③ 백전백승의 큰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람 나라 왕의 총애와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아만에 대한 이런 화려한 평가들 맨 마지막에, 이렇게 한마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왕하 5:1c →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여기 ∼‘이나’라는 말은, ‘그러나’란 뜻입니다. 이 ‘그러나’는, 앞의 말을 180° 뒤집는 말입니다. 그는 큰 용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었지만, 그는 나병 - 한센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병환자더라”는 말은, 모든 삶의 희망을 꺾어 버리는 심각한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입니다. 불치병에 걸리고 나면! 돈이 있으면 뭐하고, 권력이 있으면 뭐하고, 왕의 총애를 받으면 뭐합니까? 그런 것들은 불치병을 치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병에 걸리면! 다 똑같아집니다. 세상의 타이틀은 의미가 없어지고, 다만 불치병환자라는 명찰을 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아만 장군뿐만 아니라, 인생은 모두 ‘그러나의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은 다른 병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 있는 병’ ‘내 속에 있는 병’입니다. 현대인들 대부분! 신앙적으로 볼 때, 영적 감각과 예민함을 잃어버린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런 가운데서 살아날 길은 무엇일까요? 치유와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2. 그에게 치유의 길을 알려 준 한 작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집에 포로로 잡혀 와서 집안일을 돕고 있던 작은 하인 소녀가 있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왕하 5:3 →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소녀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아만 장군은 자초지종을 물어봤고, 마침내 아람 나라의 왕을 만나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엘리사는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하라고 처방합니다. 나아만은 그 말대로 순종하여 깨끗하게 나음을 얻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자!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소개해준 한 작은 소녀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람 제국의 국방장관을 복음화시키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5절과 17절 말씀을 보면, 병 고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이 다시 엘리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5:15b →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왕하 5:17 →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 성경은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요나서를 통하여 나아만 장군이 아람 나라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람나라의 수도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사실 요나는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별 성의도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 심지어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한 여자아이의 소개로 복음의 씨가 나아만 장군에게 심어졌고, 그를 통해 아람 나라 백성들의 마음 밭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명의 한 소녀였지만! 위대한 전도자요 선교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3. 우리는 어떻게 소녀처럼 사람들을 치유와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①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여자아이는!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면! 나병도 거뜬히 나을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그는 비록 포로로 끌려왔지만, 그가 가진 신앙은 포로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확실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하려면! 먼저 나 자신부터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말이 길지 않아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감동시킵니다. 이런 확신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신임받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10월 셋째 주일(20일)을 → ‘새 생명 전도축제일’로 삼고, 전도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데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바로 서로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 가족, 친척, 동료, 이웃들이야말로 내가 책임져야 할 전도대상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태신자 전도’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은 → ‘관계전도’입니다. 물론 노방전도도 필요하고, 전도지도 열심히 나눠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토양을 가꾸는 일이지, 그것을 통해서 실제적인 열매를 거두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관계전도’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전도’의 기초는 → ‘신임받는데’ 있습니다. 평상시의 ‘신뢰도’가 결정적인 순간에 → ‘설득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신임받는 삶을 살아야!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성이 없이는 절대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전도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가정의 복음화와! 내 주변의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신뢰도에서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③ 소망을 심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아람 제국의 참모총장이요 국방장관이라 하더라도, 그가 나병에 걸린 이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격리, 추방,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 하녀 아이가 놀라운 희망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면! 그분은 얼마든지 주인님의 나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3절) 절망 속에 있는 그에게 놀라운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이 문제들 속에서 실의와 좌절로 살아가고 있고, 무엇보다도 원초적인 ‘죄’의 문제로 인해 심판과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도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축복과 치유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 소녀가 입을 다물고 잠잠했다면! 어떻게 나아만이 고침 받고 구원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한 달여 뒤에 있을 ‘새생명 전도축제일’에 나는 누구를 초청할 수 있을까? 그 누구를 떠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 생각되셨습니까? 그렇다면! 한 달여 동안, 그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면서 열심과 정성을 다해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뭣이 중한데!
나아만은 환자로서 의사인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료의 처방을 받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밖으로 나와서 나아만을 영접하거나 환대하지 않고, 그저 사환을 시켜 처방전을 전달했습니다. 왕하 5:10 →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이러한 처사에 나아만 장군은 확 기분이 상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에게는 지혜로운 부하가 있었습니다. 왕하 5:13(의역) → “장군님! 선지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해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저 강에 내려가 씻으면 깨끗해진다는데,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내세우고 높여야 할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입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글자 하나 차이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자존심’(Pride)은 →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자존감’(Self-esteem)은 → 누구와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를 귀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 교만한 사람은 쓰시지도 않고 은혜도 못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사람이 겸손하여, 낮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은혜를 받게 되고 기적을 체험케 된다는 것입니다. 왕하 5:14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여기 ‘내려가서’란 말과 ‘말대로’, ‘말씀대로’란 말이 중요합니다. 나아만이 높은 자존심을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여 병이 기적적으로 치료된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언제나 ‘겸손과 순종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내 생각’과 vs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씨름입니다.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교만’과 ‘자존심’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성경 인물 가운데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찾아보고, 서로 한 명씩 소개해 봅시다.
2.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뢰도’를 높이는 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신뢰도가 떨어진 이유와 회복의 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들은 ‘천국과 영생’이라는 너무나 값진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영혼 구원’을 위해! 당신이 하려는 결심과 계획을 나눠봅시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죽고 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자, 모압 나라는 매년 어린 양의 털과, 큰 양의 털을 각각 10만 마리의 분량씩 조공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보내던 것을 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재정 수입이 중단되었고, 체면도 손상되었습니다. 그러자 여호람 왕은 남 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서 함께 모압을 치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남방에 있는 에돔 왕과도 함께하기로 합니다. 드디어 북 왕국 이스라엘, 남 왕국 유다, 가장 아래쪽 에돔! 세 나라가 동맹을 맺고 모압을 치려고 출정합니다.
모압을 치기 위해서 북쪽에서 쳐내려오기보다는, 동맹을 맺은 에돔 쪽으로 내려가서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쳐 올라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출정한 지 일주일이 되어 준비된 물은 다 떨어졌는데! 모압 경계까지 왔는데, 군인들과 군마와 수레를 끄는 짐승들이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전쟁 중에! 광야 한복판에서 물이 떨어지니,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탄식합니다. 왕하 3:10 → “이스라엘 왕(여호람)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릴 죽이려고 작정하셨구나.” 한탄하면서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은 신앙적인 해결방법을 찾습니다. 11절입니다. 왕하 3:11 →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즉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뢸 만한 선지자가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두 왕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를 만나 한탄하고 원망함으로 그 문제를 잘 해결해 본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원망이나 불평에는 문제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반면에 유다 왕 여호사밧은, 문제를 만나자! 곧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습니다. 그는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의논하며 그의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역사의 운행자시오,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를 찾는 여호사밧 왕에게 한 병사가 이 근처에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여호사밧 왕은 직접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왕의 위치는 신하를 시켜서 엘리사를 불러올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의 내방을 받은 엘리사 선지자는 무어라 말합니까? 왕하 3:15 →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조금은 엉뚱하고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의 말씀과 악기를 연결해서 말씀한 곳은 신구약 성경 가운데 이곳 한 군데밖에 없는데, 여기에는 신령한 뜻이 있습니다.
‘거문고’는 어떤 악기입니까? 거문고는 현악기입니다. 줄을 튕김으로 소리가 나는 악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문고의 생명은 그 줄에 있습니다. 줄이 끊어지면 소리가 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믿었던 줄들이 끊어지고 터져 나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믿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합니다. 인간관계의 줄이 끊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업의 줄이 끊어집니다. 물질의 줄이 끊어집니다. 건강의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줄이 끊어져 버린다 해도, 우리 성도들에겐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한 가닥 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버리시지 않는 ‘사랑의 줄’입니다. 실은 우리 인생의 줄들이 다 끊어져 버린다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의 줄! 이 줄이 우리에게 남아있기만 하면! 우리 인생은 멋지게 연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흐가 작곡한 여러 위대한 음악 가운데 ‘G 선상의 아리아’는 바이올린의 G선 즉 ‘솔’! 그 한 줄만을 가지고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줄이 다 끊어져도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힘있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한 줄이 남아있다 해도, 조율이 잘 되어있어야만! 바른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나 자신의 거문고 줄은 팽팽하게 조율되어 있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바른 위치에 서 계십니까? 찬송의 줄이 풀려있지는 않습니까? 기도의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습니까? 말씀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습니까? 멋진 음을 내야 할, 당신의 거문고 줄은 제대로 조율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조율하는 것입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사이클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나도 기뻐하고 ▸그분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기보다 먼저! 나의 영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율하고, 인생의 사이클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행여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실 때, 헝클어진 삶의 자세로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과 조율된 삶, 사이클이 맞추어진 삶으로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 찬송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하는 일은! 언제나 삐꺽거리는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먼저 나의 풀어진 영성의 악기를 다듬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실패했어도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느슨했어도 괜찮습니다. 잘못 살았어도 괜찮습니다. 만일!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과의 인생조율을 제대로 하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 전쟁 중에 물이 없어 고통 중에 있게 된 이 상황은, 그저 우연히 만난 상황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어져 버린 사람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우선 왕들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졌고, 백성들도 게으르고 나태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헝클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찾아온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모압과의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 왕들의 문제요, 지도자의 문제요, 백성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 경우! 외부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가 진짜 문제입니다. 심령의 문제이며 영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드디어 엘리사 앞에 거문고를 타는 연주자가 불려 왔습니다. 조율을 마쳤습니다. 이제 엘리사는 거문고 타는 사람에게 ‘찬송’을 연주하게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던 이스라엘 왕도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자던 여호사밧도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장수들과 병사들도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찾아오셨고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엘리사를 감동하시고 영감이 임했습니다. 여기에 깊고 신령한 뜻이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메마른 에돔 골짜기에 샘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왕과 군사들의 가슴에 은혜의 샘이 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 축복의 샘물이 터지기 전에, 먼저 내 심령의 골짜기에 믿음의 샘물이 터지고, 기도의 샘이 터지고, 눈물의 샘이 터지고, 찬송의 샘이 터져야 인생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엘리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16절입니다. 왕하 3:16 →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이 말은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메마른 인생의 골짜기에 회개의 개천을 깊이 파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 10:12 →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잡초 우거진 묵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에게 “개천을 파라. 그리고 깊이 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율되고, 우리의 심령이 준비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보증하십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꿈꾸고, 기도하는 일에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 전쟁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잘 조율된 악기는 아름다운 음악, 멋진 승리를 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순종의 결과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왕하 3:20 →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아침 소제 드릴 때! 즉 온 백성이 일어나 아침 기도하는 그 시간,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른 아침! 골짜기에 흘러넘치는 물에 아침 해가 비취었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아침,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햇살이 비쳐 붉게 물든 물을 본 ‘모압’의 군인들은! 엉뚱한 판단을 합니다. 이스라엘 연합군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서로 죽이고 피를 흘려 저렇게 만히 고였구나! 네! 물이 없던 곳에 붉게 물든 물이 생겼으니, 그렇게 판단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노략질하러 다가옵니다. 그때 3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모압’은 크게 패하고 도주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여러분을 괴롭히려고 찾아왔던 인생의 문제 또한 악한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헝클어진 영성을 조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겸손히 회개하며 심령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의 생수로 가득 채워 주시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이, 승리를 연주하는 멋진 인생으로 바뀌는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문제를 만났을 때, 한탄하면서 원망하는 북왕국 여호람 왕과, 신앙적인 해결방법을 찾았던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의 모습 중,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오늘 말씀을 통해 회복되고 조율되어야 할 내 신앙의 느슨함이나 부족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나누어 보십시다.
3. 대부분의 인생 문제가 외부적인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변하기를 기도하기보다, 나 자신이 하나님과 조율된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야곱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단 1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히 11:21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게 답니다.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야곱에 대해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할 얘기가 많았을 텐데! 히브리서는 창세기 48장에 나오는 내용을 딱 반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기억해야 할 내용이라고 여겼을까요? ‘영적인 유산을 계승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유산’을 ‘다음 세대들에게’ 넘겨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2가지 중요한 교훈’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양자의 특권’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8장을 이해해야! 그다음에 나오는 다른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창 48:1 →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48장은 ‘이 일 후에’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일’이라는 것은! 바로 앞 장인 창세기 47장의 ‘마지막 사건’을 말합니다. 여기를 보면, ‘야곱’이 애굽의 총리로 있는 아들 ‘요셉’을 부릅니다. 그래서 요셉이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야곱은 요셉에게 ‘유언적인 부탁’을 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의 묘지인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 후에 야곱이 정말 죽을 날이 임박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요셉은! 즉시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찾아뵙기 위해서 야곱에게로 갔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노환으로 기력이 쇠해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일어나 앉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창 48:3∼4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벧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고 나서 오늘의 요절이며,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 5절의 이야기를 합니다. 창 48:5 →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성도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특이한 구절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손자인데, 그 손자들을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입양해서 야곱의 첫째 아들인 르우벤과, 둘째 아들인 시므온의 서열을 뒤집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첫째와 둘째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자식으로 입양하는 얘기를 들어보셨나요? 성경 여기서 한 번 나오고,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내용을 잘 이해하셔야! 나중에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에 가서, 왜 ‘요셉’이 안 나오고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나오는지? 즉, 열두지파에 ‘요셉’의 이름은 없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게 됐는지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5절 말씀은! 할아버지가 손주를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겠다는 야곱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7절에는 라헬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들로 삼았으니, 결국 그들은 ‘라헬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성경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야곱은 ‘레아’의 첫째와 둘째 아들인 ‘르우벤’이나 ‘시므온’ 보다도, ‘라헬’의 아들인 ‘요셉’을 장자로 여겼습니다.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혔던 이유도! 야곱에게 있어서는 요셉이 ‘상속자 1순위’였기 때문이고, 이제 요셉의 두 아들을 아들로 삼음으로써 그것을 확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화’와 ‘상속법’을 알게 되면! 이게 무슨 소린지 알게 됩니다. 상속권은! 모든 아들들에게 주어지지만, 장자에게는 ‘두 몫’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맏아들에게 주는 ‘장자권의 특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로 ‘더블 포션(double portion)’ 갑절, 곱빼기라고 합니다. 맏아들에게는 두 몫을 주고,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한몫씩 주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 장자권 쟁탈전이 벌어졌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 가다 보면, 야곱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는 기록이 여호수아서에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이 ‘요셉’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양자로 입양했기 때문에, 아들이 열세 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땅을 13등분 해서 나눠 가져야 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제사장 지파가 된 ‘레위’지파 에게는 땅을 주지 않고, 대신 12지파로부터 십일조를 받아서 살도록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에브라임’이 한몫, ‘므낫세’가 한 몫! 그래서 요셉이 받을 ‘두 몫’을 장자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일까요? 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이 사건은! → 복음을 예표해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God has no grandchildren. “하나님에게는 손주가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롬 8:14∼17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상속자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똑같이 그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창 48장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자식으로 입양하는 굉장히 특이하고 이상한 구절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야곱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이어받을 상속의 특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이나 상속권이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지만! 신앙의 부모로서 이것만큼은 꼭 물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천국을 상속하는 축복!
2. ‘과분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겠습니다. 창 48:10 →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과거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눈이 어두워서 앞을 보지 못했는데! 지금 48장에서는 야곱이 자기 아버지처럼 앞을 잘 못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후손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 ‘이스라엘’이 뜻밖의 자세를 취하여 축복합니다. 창 48:14 →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야곱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냥 팔을 쭉 뻗어서 축복하면 되는데, 어떻게 한 거예요? 팔을 X자로 엇바꾸어 머리에 손을 얹은 것입니다. 그림이 그려지시죠?
성도 여러분! 야곱이 왜 그랬을까요? → 이 역시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건을 동생 ‘에브라임’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형 ‘므낫세’에게 할아버지가 오른손을 얹어야 하는데, 자기에게 오른손을 얹어서 축복하며 기도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것이 오늘 두 번째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과분한 은혜” “넘치는 은혜”입니다. → 이 축복은! 형이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내가 이 축복을 받았을까? → “자격 없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나게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요,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을 희생시켜 이루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엡 2:4∼5 / 8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잘나고 내가 잘해서 자격을 얻고,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 그 놀랍고 큰 은혜를 가슴에 되새겨야 합니다. ‘그래요, 주님! 주님의 은혜로! 자격 없는 나이지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었고! 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감사와 감격의 마음을 늘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들이, 세상에 속한 것들로 인해서 열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녀들!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자녀들! 그 능력을 힘입어 세상의 유혹과 욕심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자녀들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이끌 수 있는 부모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과, 그로 말미암아 천국의 상속권자가 된 은혜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이번 부흥회(영적인 유산을 이어가라!)에 받은 은혜와, 갖게 된 결심에 대해서 서로 나눠봅시다.
이스라엘의 주변국들 중 이스라엘에 큰 영향을 주었던 큰 나라들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애굽(이집트)만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모두 망해버렸지만, 바벨론은 유독 하나님의 멸망 예언을 받은 나라입니다. 이는 바벨론이 가장 악해서라기보다 유다 민족을 실제로 멸망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은 최후 심판을 받을 절대 악의 상징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 곧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치욕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속에서 ‘바벨론’은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나라였습니다. 앗수르는 과거 520년 이상 근동 아시아의 주인이었지만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했던 바벨론 역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정말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B.C 484~B.C 425)가 직접 현장을 답사하면서 쓴 전쟁사인 ‘역사’를 보면, 바벨론 성은 광활한 평야 가운데 세워진 대도시로, 성의 한쪽 길이가 22.5km, 둘레 전체를 합치면 90km나 됐습니다. 외벽 밖으로는 넓은 해자(물길)를 두어서 적이 쉽게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성벽은 이중벽으로 쌓았고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공간을 두었습니다.
<바벨론 성과 이어지는 도시>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바벨론의 경제력은! 전 세계의 3분의 1에 해당할 만큼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철옹성과 같은 바벨론 성!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이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멸망하기 전날 밤의 기록이 ‘다니엘서’ 5장에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를 읽어보면! 바벨론이 왜 망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 교만함으로 망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왕
좀 길지만! ‘다니엘서 5장’을 읽어 가면서,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때로는 목사의 설명보다, 성경 본문 그 자체가 더 명확하고 힘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내용을 보신대로 ‘느부갓네살’ 왕이나, 그의 아들이자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 왕 역시 교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성전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기물들을 탈취하였고, 벨사살은 전제를 붓던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짓까지 서슴없이 행하는 교만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교만하면 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따라 진실과 성실로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사는 겸손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교만과 우상숭배로 인해! 느부갓네살 왕이 영원하기를 꿈꿨던 바벨론 제국은 바사(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이후 ‘바벨론’과 ‘메데’를 정복하여 페르시아 연합 왕국을 일으킨 초대왕 ‘고레스’는 시작부터 새로운 정책으로 제국을 이끌어 가게 됩니다.
2.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고레스 왕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인 1879년, 지금의 이라크, 옛 페르시아의 신전에서 원통 모양의 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설형문자로 글이 적혀 있었는데! 문자를 해독해 보니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페르시아의 ‘인권선언문’이었습니다.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레스 실린더’>
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 “본인은 제국에 속한 여러 나라들의 전통과 관습과 종교를 존중할 것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노예제는 금지한다.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에게는 합당한 급여를 지급해야 함을 천명하는 바이다.”
네! 내용은 ⇨ ‘시민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노동의 가치’를 문서와 법령으로 분명하게 적시한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이라고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고레스가 이런 생각과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 자신이 똑똑하고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린더에 적은 내용보다도 더 명확하게, 고레스의 고백이 역대하 3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하 36:22∼23 →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어떻습니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네! 이런 ‘은혜의식’이 있는 고레스 왕 까닭에, 바벨론으로 잡혀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만에 해방되어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이 얼마나 컸던지! 시편 126편에서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126:1∼2 →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미국 내 모든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설문 투표를 했습니다. →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지도자들 중에 가장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지도자, 왕은 누구였는가?” 여러분! 이 설문 투표에 과연 누가 1등으로 선정되었을까요? 놀랍게도 바사 제국의 초대 왕 ‘고레스’가 차지했습니다.
그러면 이 고레스 왕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1등 지도자로 뽑혔을까요? 그것은 그의 ‘포용정책’과 ‘지방분권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고레스 왕은 생각의 근본부터 달랐습니다. 제국으로 끌려와 포로생활 하던 사람들을 오히려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고, 고국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을 지킬 수 있게 허용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번성하면, 세금을 거둬들여 제국 전체의 경제를 일으키는 전략을 활용했던 지도자입니다. 이전의 다른 제국들과는 달리 고레스 왕은 이렇게 선정을 베풀어서, 식민지 백성들도 그를 ‘아버지’(Father)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고레스’보다 200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고레스’ 왕이 나타나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 45:13 → “내가 공의로 그(고레스)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고레스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에게도 기도 제목이 생겼죠!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정치를 욕하고, 정치인들을 향하여 핏대를 높여 비판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장차 이 나라의 정치를 주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갈등과 분열로 갈라진 백성들의 마음을 치유하며, 민족의 평화적인 통일을 이뤄내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세워지게 하옵소서.” 네! 우리나라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바탕 위에 선, 바른 지도자들과 대통령이 세워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금요일부터 열리는 ‘부흥회’는 매우 중요합니다. 부흥회 ‘주제’가 무엇입니까? ⇨ “영적인 유산을 이어가라!”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이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믿음의 계승’이라는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이 네 명의 삶을 들여다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자칭 메시아와 예수님이 있습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이죠!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고레스’와 같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쓰시는 지도자들은 반드시 많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번 부흥회가 여러분의 가정들이 믿음의 가문으로 우뚝 서고, 교회적으로는 다음 세대들이 굳건한 신앙으로 세워져 위대한 지도자들이 배출되는 계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자만심과 교만,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징계와 패망의 원인임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 제국들이 썼던 식민지 정책과 vs 바사(페르시아)가 썼던 식민지 정책이 어떻게 달랐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나눠봅시다.
3. 이번 부흥회(영적인 유산을 이어가라!)에 어떤 기대와 기도제목을 가지고 참여할 것인지? 서로 나눠봅시다.
오늘 본문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50:17 →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패망하였고,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은 3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1차로 주전 606년 여호야김 왕 때, 2차로 9년 뒤인 597년 여호야긴 왕 때, 3차로 11년 뒤인 586년 시드기야 왕 때 끌려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깨우치고 돌이켜 미래에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차면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며 용서하시며 회복하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벨론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징계의 도구로 쓰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유다를 징벌하는 권한을 주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렘 50:11에서 바벨론을 일러 → “나의 소유를 노략하는 자여!”라고 하십니다. 즉, 성전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기물들을 탈취하였고, 전제를 붓던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짓까지 서슴없이 행하는 것은! 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권위가 주어졌을 때는 그에 따른 책임도 있음을 생각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하나님의 소유인 ‘유다’에 도를 넘는 짓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누군가의 막대기와 채찍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중에 ‘부모’라고 하는 위치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징계하고 훈육하고 때로는 때리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내 자녀이지만, 그 자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을 대해야 하고, 그들을 징계할 때도,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조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자녀가 나의 소유인 것으로 착각하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월권이고 선을 넘는 것입니다.
이제 선을 넘은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파사(페르시아)라는 막대기를 통해 징계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렘 50:19 →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렇습니다. 유다는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첫째, 포로생활 70년은! ⇨ 안식과 정화의 기간이었습니다.
먼저, 역대하 36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대하 36:21 →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포로 생활 70년은! 죄악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 땅에 안식을 주었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렘 33:5b∼8 →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지만, 죄를 정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기간을 70년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70년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같이 바벨론을 무찌르고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파사 제국’의 ‘고레스’ 왕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주전 538년! 고레스는 바벨론 시절 강제로 끌려온 자들에게 자신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포합니다. 그 후 2년간의 준비 끝에, 성경의 예언대로 70년이 꽉 찬 주전 536년, 유다 왕 여호야긴의 손자인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그러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루어짐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렘 29:12∼14 →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더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을 보겠습니다. 겔 36:37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약속)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 70년이 차면 유다를 다시 돌아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길 위해서, 다니엘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 9:2∼3 →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네!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한 것을 알고 나서, 그때부터 금식하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에스겔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가정을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오직 믿음으로 남은 자들만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70년이 차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됩니다. → 1차로 주전 536년 스룹바벨의 인도로 49,897명이 귀환합니다. 그리고 2차는 78년이 지난 458년 에스라의 인도로 1,754명이, 3차는 다시 14년이 지난 444년 느헤미야의 인도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정확하게 그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6만 명 정도였습니다.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는 인원이지만!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 이스라엘로 귀환한 것입니다.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구약성경 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주제인 → ‘남은 자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를 택하셨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킨 자만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들을 보겠습니다. 사 10:22 →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 되었음이라.”그렇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고 잘살고 있었기에, 오직 남은 자들 즉,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돌아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명의 빛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모든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 1:11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오직 믿고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대신 지셔서, 나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은혜 의식’이 있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찾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렘 50:20 → “그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아 구원받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기도합시다. 이 땅의 모든 백성! 특별히 내 사랑하는 가족이 예수님을 통해서 죄로부터 구원받고,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필요하면! 다니엘처럼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가족들이 다 예수 믿어 인가귀도 되어, 한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며 영광 돌리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바벨론이 심판받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도를 넘어 과도하게 유다를 다뤘고, 스스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부지불식간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교만과 주인의식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부모 - 내 자식, 나 - 물질)
2. 하나님은 자기 백성 유다를 징계하시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갖고 계신 계획에 대해 나눠봅시다. (자녀교육의 도)
3. 해방이 선포됐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남은 자’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다짐을 나눠봅시다.
오는 목요일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침략하고 민족 말살을 꾀한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지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주권 회복과 광복은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식민지 잔재와 민족분단, 전쟁으로 얼룩진 아픔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자유와 평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뜻과 원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시도록 살자!
예레미야서는 45장까지로 유다를 향한 예언은 끝나고, 46장부터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제일 먼저 ‘애굽’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이 애굽에 대한 예언의 골자는 → “네가 아무리 강성해도, 하나님이 네 편이 아니기 때문에 너는 망한다.”라는 것입니다.
3절 이하를 보면, 애굽의 강성한 모습이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은 작은 방패, 큰 방패, 말, 투구, 창, 갑옷 등 ‘장비를 잘 갖췄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용을 주고 이웃 나라들로부터 산 ‘용병부대도 동원’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자신만만했습니다. 렘 46:8 → “애굽은! 나일강이 불어남 같고, 강물이 출렁임 같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일어나 땅을 덮어 성읍들과 그 주민을 멸할 것이라.” 호언장담합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북쪽 ‘갈그마스’로 진격합니다. 렘 46:9 → “(애굽 군인들을 향하여!)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 (용병들을 향하여!)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동원된 말과 병거들, 수많은 용사들! 그리고 용병부대! 한마디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마지막 말은 “하거니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대단했지만! 결국, 바로 느고는 패하고 말리라는 것입니다. 주전 605년에 유브라데 강가 ‘갈그마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애굽’은 패배합니다.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그 패배의 모습입니다. → “애굽이여! 네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고,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나니,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라.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향(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도다. 그들이 그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수치와 상처를 입었고, 전사자들은 겹겹이 쌓였습니다. 마침내 세계의 패권은 애굽에서 바벨론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애굽의 바로 느고가 엄청난 전력을 동원했음에도 패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더 많은 군대와 무기를 동원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렘 46:13, 14b∼15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애굽 땅을 칠 일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말씀이라. 네(애굽)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너희 장사들이 쓰러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까닭이니라. 그가(하나님)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시매,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네! 애굽이 패한 이유를 뭐라고 말합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이 애굽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벨론을 들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이 여기에 대항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는 쪽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업도 그렇고, 입시도 그렇고, 취업도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준비가 아무리 완벽해도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모쪼록! 하나님이 함께하실만한 일이어서, 성공하고 형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자!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렘 46:17 → “그들이 그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 여기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라는 말은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렸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레미야 당시의 ‘바로 느고’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세 당시의 애굽 왕 ‘바로’(람세스 2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게도 깨달을 기회가 많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가도록 허락하라”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십니다. 그러나 그 깨달을 기회들을 다 잃어버린 결과, 모든 짐승의 초 태생과 가정의 장자들이 죽은 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재난을 앞두고는 피할 기회를 주시고, 심판을 앞두고는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를 주시지도 않고 재난과 심판을 내리시는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기회를 깨닫지 못하고,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만 있었겠습니까? 방주는 왜 만드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곧 임하니 준비하자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제가 그냥 상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 2:5 →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義)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무시하는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네! 노아는 전파하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회를 잘 활용한 사람은 삭개오입니다. 반면에,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는 무엇입니까? 그 기회를 잘 붙잡아서 버림과 망함이 아니라, 회복과 승리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오늘 말씀의 끝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반전의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시고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징계도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절인 28절부터 읽는 것이 이해에 빠릅니다. 렘 46:28 →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죄를 짓고 범죄 하면, 공의의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소망의 약속이 바로 앞 절인 27절에 있습니다. 렘 46:27 → “내 종 야곱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하며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을 넘어 ‘축복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애굽과 바벨론에게는 결코 이런 종류의 약속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당신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종 야곱’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아들에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 바벨론과 애굽은, 단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요,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지만, 그는 아들이 아니라 종입니다. 반면에, 심판받아 포로로 잡혀갔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과 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종’은 그냥 부려도 되고, 호의를 베풀어서 품삯을 주면 됩니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매번 일했다고 해서 대가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비록 아들이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말썽을 펴도, 아들은 상속자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말을 아무리 잘 듣고 100% 순종해도, 종은 종일뿐입니다. 즉 바벨론과 애굽은 종이니까 일을 시키지만, 이스라엘은 아들이니까 징계를 해도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과 종의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행패를 부립니다. 결국,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몫을 떼어 줍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간 순간부터, 아버지는 그 아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만약 그가 ‘종’이었는데도 아버지가 그토록 기다렸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들’이기에 대문을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대단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면!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애통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업으로 받아야 할 ‘천국’의 상속권을 잃어버리고 지옥 유황불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는 애굽을 구원의 동아줄로 알고 붙잡았으나, 애굽마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예루살렘처럼 망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굳게 믿고 의지한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도리어 해가 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때는 도피가 아니라 회개가 답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인 줄 깨닫고 회개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잃어버린 자의 서러움이 훨씬 더 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과 애굽이라는 초강대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던 조국 ‘유다의 운명’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유다가 위기상황에 빠졌음을 경고했고,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어 ‘주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그의 말은! 왕과 백성들에게 먹히질 않았습니다.
마침내 전쟁의 광풍이 몰아쳤고, 앞서 앗수르를 제압하고 중근동의 패권자가 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18개월 동안 버티고 있던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자기 마음대로 산 대가는, 곧 유다 나라의 멸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 땅이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의 군사령관은 성밖에 살던 빈민들에게 포도원과 농토를 나눠주어 경작하게 했습니다. 땅을 그냥 놀리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와중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지금은 수치스럽더라도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낫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바벨론도 결국은 망하고, 새로운 제국! 바사가 들어서게 될 것을 예견한 것입니다. 네! 실제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사(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언해서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 제국> <바사 제국>
그렇지만! 이런 역사의 안목이 없고, 기득권에 배불러 있던 당시 유다의 왕과 귀족들은 어느 사람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유다가 망하면서,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끌려가는 도중에 느부갓네살의 근위대장인 ‘느부사라단’의 호의로 풀려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예레미야는 망한 조국 유다에 남게 됩니다.
2. 정치적 혼돈 상황
바벨론 왕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는 존경받는 선비 집안 출신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의 할아버지 ‘사반’은 요시야 임금 때 서기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가 총독으로서 우선해야 할 일은!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먹고 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파괴된 집들을 수리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먹을 것을 많이 모아 두라고 백성들에게 지시합니다.
사람들은 충격과 상실감을 달래 가며,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소문이 퍼지자, 이곳저곳으로 숨어 들어가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총독 ‘그다랴’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의 군인! 지휘관들도 있었는데 특히 ‘요하난’이란 장군이 총독에게 아주 비밀스러운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내용은! 시드기야 왕의 친척인 ‘이스마엘’이, 암몬의 사주를 받아 총독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다랴’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게 오판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왕족인 자기를 제쳐놓고, 서기관 가문에 속한 ‘그다랴’가 총독으로 선임된 것에 앙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다윗 왕가를 무너뜨린 바벨론과 협력하는 자를 제거한다는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찾아왔을 때, 그를 환대하며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 식탁은, 결국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총독 ‘그다랴’와 그 자리에 있던 유대 사람들, 그리고 바벨론 군인들까지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다시 암몬으로 도망갑니다.
자! 사건이 이렇게 전개되자! 암살 정보를 전해주었던 ‘요하난’은 자신이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합니다. 총독을 죽인 장본인 ‘이스마엘’은 암몬으로 도망갔으니, 이 사실을 알렸던 자신에게 살해 공모 혐의가 씌워질 수 있다고 생각되자, 그는 갑자기 불안해진 것입니다. 바벨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빠진 ‘요하난’은 애굽으로 도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합니다. 바벨론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애굽은, 정치적 망명객을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와 하나님의 뜻을 물어달라고 합니다.
3. 중보기도를 요청했지만!
네! 요하난은 그와 함께하는 백성들과 더불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자기들이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쭤달라고 요청합니다. 렘 42:2∼3 →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그들의 요청대로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렘 42:4 →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이때, ‘요하난’과 그 일행들은 예레미야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아주 놀라운 ‘신앙적 다짐’의 말을 합니다. 렘 42:5∼6 →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네! 이런 ‘요하난’과 그 일행들의 말은! 그야말로 훌륭한 ‘기도의 모범’입니다. 지금 이들은!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든지 않든지, 그 뜻대로 따르고 순종하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네! 우리도 이래야 됩니다. 그래야 참 신앙인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즉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엎드리고 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급한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려 열흘이나 지났습니다. 아마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요하난’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본문 10∼22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다 읽어도 좋겠지만! 길기 때문에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이런 내용입니다. →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머물러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순종하지 않고, 너희들의 생각대로 애굽으로 도망하면!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쳐서 남을 자가 없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요하난 장군과 백성들은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했지만! 실상 자신들의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들의 뜻이었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들인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말뿐이었던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다짐대로 순종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하난’을 비롯한 남은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지만! 한순간도 자기들의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4. 자의적(恣意的) 믿음을 넘어서야!
‘요하난’과 남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또 그 뜻이 무엇이든 순종하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국은 그 말씀을 외면하고 맙니다. 자기들의 판단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 이런 것을 일러 ‘자의적(恣意的:방자할 방, 내키는 대로 하는)믿음’이라 합니다. 자기 좋을 대로, 편리한 대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기 욕망’이라는 관성을 따라 사는 삶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제자도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불신앙적인 삶을 계속할 것인지?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결단할 것인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어려울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따르고 순종해야 할 근본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잠시 어려운 상황만 모면하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웠던 선택의 순간들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순종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혹시 내게도 말만 앞설 뿐, 실천하지 못했던 일은 어떤 것이었는지? 나눠봅시다.
3. 전쟁의 참화 속에 유다에 남은 백성들은 애굽으로 내려가야 살 거로 생각했습니다. 힘들 때! 무의식적으로 먼저 찾게 되는 ‘나의 애굽’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역대하 35장을 보면, 요시아 왕 당시 세계 판도는 ‘애굽’과 ‘바벨론’ 두 강대국이 양강을 이루어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역사를 움직이는 손길은 바벨론 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이래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받는 ‘요시야 왕’은 친 바벨론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요시야 왕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 ‘느고’가 세계의 열강으로 떠오르는 바벨론을 치러 올라오면서, 이스라엘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것을 유다의 ‘요시야’ 왕이 중간에서 막아서다가 애굽 군사가 쏜 화실에 맞아 죽고 맙니다. 이렇게 요시야 왕이 죽자, 백성들은 맏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똑똑한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17대 왕으로 세웁니다.(36장 1절), 하지만 애굽 왕이, 그도 아버지처럼 친 바벨론파 일 것으로 생각하고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대신 형이며 첫째 아들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36장 2∼4절).
이렇게 애굽 왕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야김’은 선대들의 ‘친 바벨론 정책’을 버리고, ‘친 애굽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렇게 되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은 바벨론에 있다고 주장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사사건건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그를 사로잡아 갑니다.(36장 5∼6절).
그리고 조카 고니야(여호야긴)를 거쳐 ‘시드기야’를 느브갓네살이 유다의 왕으로 세웁니다. 그는 처음 3년 동안은 ‘친 바벨론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백성과 신하들의 요구에 못 이겨, 결국 바벨론을 배반하고 ‘친 애굽 정책’을 쓰게 됩니다. 결국 분노한 느브갓네살 왕이 3차 공격을 해 오게 되고, 시드기야 왕과 유다의 운명은 끝이 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합니까? 바벨론 편에 서야 합니까? 아니면 애굽 편에 서야 합니까? 이것을 오늘 우리나라의 형편과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는 친 미국 정책을 펼쳐야 합니까? 아니면 친 중국 정책을 펼쳐야 합니까? 네! 이것으로 우리나라 역대 정권들이 서로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지금까지도 갈등 관계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정말 잘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친 바벨론 정책을 쓰느냐? 친 애굽 정책을 쓰느냐가 아닙니다. 친 미국 정책을 펼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친 중국 정책을 펼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친 하나님 정책’을 써야 합니다. 공의와 사랑의 정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지만! 시드기야 왕과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렘 37:2 →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 공의와 사랑을 잃어버린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나라의 운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정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틀림없이 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 바르게 살면,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고, 걱정스러운 일만 자꾸 하면, 틀림없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진정 회개하고 바르게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과! 우리나라의 흥망성쇠는! 미국에 달린 것도 아니고, 중국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 가사를 보십시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누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까? 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르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나라가 되도록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은 유보되어 있으나, 분명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예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나님은 유다를 회개케 하기 위해서 바벨론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진정 중요한 회개는 하지 않고, 우리는 바벨론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도, 거짓 선지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애굽’이라는 뒷배가 있다고 하면서, 장밋빛 미래만을 얘기했습니다.
이렇게 회개는 하지 않고,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닥친 현실은 무엇입니까? 배반한 ‘시드기야’ 왕에게 분노한 바벨론이 제3차 공격을 해오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급히 기도를 요청합니다. 렘 37:3 →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그리고 한편으론 애굽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렘 37:5 →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네! 유다의 요청에 애굽 군대가 출정하자, 바벨론 군대는 잠시 예루살렘 성에 대한 포위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거짓 선지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제 바벨론 군대는 물러갔다.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다”라며 떠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2가지로 답변을 합니다.
첫째, 애굽에 대한 기대는 헛것이 될 것이라. 렘 37:7c → “유다의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애굽에 대한 기대는 헛된 것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애굽 왕 ‘호브라’는 군대를 보내 유다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바벨론 군대에 대패하고 퇴각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을!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막아보고 해결해 보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일인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길이요 방법입니다. 회개 없는 기도 요청은 아무 소용 없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불사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렘 37:8 →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잠시 바벨론이 물러간 것 같지만, 그것은 애굽 군대와 싸우기 위한 전술적인 선택이었고, 그들은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고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들은! 유다 백성들처럼, 시드기야 왕처럼,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서 자손만대 아무 걱정 없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 24:21 →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예루살렘 성이 마지막에 불 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이 세상도 불 심판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벧후 3:7∼13 →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말씀 속에 ‘불’이라는 말씀이 4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끝 날은! 불 심판을 통해 끝날 것으로 하나님이 작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랍니다. 물론 그날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생각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을 비롯해서 유다 백성들은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끝 날이 불 심판으로 끝날 것을 믿는다면! ‘회개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의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서도,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회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죄와 허물을 감추거나 외면하는 자들이 아니라,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돌이키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눈물로 회개하고, 나라의 운명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는 성도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시고,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하고 외교적 줄타기로 살길을 도모하다가 결국 패망했습니다. 우리의 살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2.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은 받고 싶어했습니다. 순종은 없고 간구만 있는 그릇된 신앙에 대해 나눠봅시다.
3. 인생이 회복되고 밝은 미래를 여는 길은 얄팍한 처세가 아니라, 신실함과 진리를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내가 주로 선택하는 해결 방식에 대해 나눠봅시다.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남 유다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암흑기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약 40년간, 완고한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때의 일입니다. 친 애굽 정책을 펴왔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로부터 좋은 말,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은 죄악 때문에 곧 멸망하게 될 텐데, 바벨론에게 항복하고야 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취급해서 감옥에 투옥하고 맙니다.
투옥된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시 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애굽이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유다 역시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민족적인 비극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지어 부른 노래가 바로, 예레미야 애가(哀歌) 슬픔의 노래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다시 임합니다. 렘 33:1∼2 →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런데 이 말씀은! 예레미야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즉, 우리도 앞이 캄캄할 때,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응답하겠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르짖으라’고 기도를 명령하시면서 ‘세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응답하리라!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을 보여주시고,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계시하여 밝히 알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인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힘입어 살겠다는 신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인생이 더 복된 인생이 될지를 한번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보아도,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아도! 기도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들이 다 승리했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조지 뮬러(George Müller, 1805~1898)는 웨슬리 목사님보다 100년 후의 사람으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1829년 24세였던 조지 뮬러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영국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평생 영국에서 사역하게 됩니다.
하루는 뮬러가 브리스톨 거리를 걷다가, 많은 고아들을 보고 애쉴리 다운(Ashley Down)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고아원이 5개까지 늘어났고, 60년 동안 일만 명의 고아들을 돌본 고아의 아버지가 됩니다. 뮬러의 특별한 점은! 고아원 운영을 위해서 간증을 다니고, 사역을 알리며, 후원 요청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기도에만 집중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박물관에는 그가 기도의 응답으로 후원받은 물질과 물품은 현재 환율로 1억 파운드(1,793억) 이상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뮬러는 수많은 고아를 돌보다 보니, 기도 제목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 노트를 만들었고, 기도 제목이 생길 때마다 거기에 기록하고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기도 제목이 응답 되면 응답 된 표시를 하거나, 감사의 글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빽빽하게 쓴 기도 노트가 3천 페이지가 넘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기도 노트를 자세히 검토하여 보았더니, 무려 3만(5만) 번 이상 기도가 응답 된 것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기도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60년 동안 그의 기도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을 시대마다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한 땀과 눈물이 담긴 기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르짖는 기도가 복된 이유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 기도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여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기도로, 응답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고쳐 주리라!
본문 6절입니다. 렘 33:6 →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되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성을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잃은 것도 되찾게 하시고, 다시 새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불순종했고, 범죄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 고쳐 낫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병들었어도! 치료해서 고쳐 낫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다시 성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이고, 버림받았어도! 다시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렘 33:7 →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포로가 되어 붙잡혀 갔다 할지라도, 다 잃어버리고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들을 다시 세우고 축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네! 부르짖는 기도에 ‘해답’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시 30:2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고치시는 손길을 체험케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가운데! 고쳐 낫게 하시며, 무너졌던 것이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용서하리라!
렘 33:8 →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는 더 큰 죄, 더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상대방이 조금만 잘못하면, 힐책하고 나무랍니다. 용서할 줄 모릅니다.
남편은 아내를 용서할 줄 모르고, 아내는 남편을 용서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분쟁과 다툼, 갈등의 골만 깊어집니다. 그런 가정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고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며 기도하면 다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물론 우리 인간을 위한 사랑이요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 43:24b∼25 →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게 하는 우리 인간의 죄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악과 허물을 기억하고 용서하지 않고 속에 품고 있는 것은! 하나님조차도 힘들고 괴롭게 할 정도로 나쁜 것입니다. 하물며 연약한 우리 인간이야 어떻겠습니까? 네! 우리는 용서할 줄 아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할 때! 우리에게 평화가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에게 잘못한 것을 자꾸 되뇌고 기억하면! 누가 불행해집니까? 네!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기억하지 않는 용서’가 나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분노와 미움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죄를 용서하고, 자녀가 부모의 죄를 용서할 때, 부부가 서로의 죄를 용서할 때, 그 가정에 화평과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놀랍고 복된 소식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에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의롭게 여겨 주시고, 돌봐주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죄를 지었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나가 ‘부르짖어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받으시길’ 바랍니다. 주여! 나를 새롭게 하옵소서. 새 출발 하게 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 우리를 전과자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의롭다고 칭해 주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는 명령과 함께 주신 ‘세 가지 약속’을 열거해 보고,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응답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왜 꼭 기도하고 부르짖어야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겔 36:36∼27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기도의 응답으로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존 번연, 조지 뮬러, 윌리엄 부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받은 감동이나 자신의 다짐을 나눠봅시다.
오늘부터 다시 살펴보게 될 예레미야서는! 예언서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독설로 가득합니다. 이런 직설적인 책망은,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제사장들에게 매 맞고, 목에 나무 고랑을 찬 채, 감옥에 감금되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와 재앙의 선포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레미야는 이렇게 독선적인 길을 갔을까요? 그것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내가 말한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면서 선포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렘 31장만 봐도, 무려 16번이나(1, 2, 7, 14, 15, 16, 20, 23, 27, 31, 33, 34, 35, 36, 37, 38절) 나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한 메시지는 전체적으로 심판과 저주가 중심이어서 암울했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결론까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분량으로만 본다면 ‘심판 선언과 재앙의 위협’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의 선포 중에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명 ‘위로의 책’ ‘위로의 두루마리’라고 불리는 30∼33장까지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 ‘위로의 말씀’을 여는 메시지를, 우리는 29장에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마침표는 아닙니다. 바벨론에서 오히려 신앙이 회복되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7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망의 그늘에 앉아 울고 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귀환과 회복’이라는 희망의 말씀! 새 언약이 바로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위로의 두루마리’를 지배하는 메시지입니다.
2. 새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새 언약에 관해서 말하는 오늘 본문은! ‘위로의 두루마리’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데, 하나님께서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실 새로운 약속이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부터 계속 되풀이된, 같은 내용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본문 32절에 의하면 새로 세울 언약은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렘 31:32 → “이 (새)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아니! 내용이 똑같은데, 도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일종의 ⇨ ‘결혼서약’이었습니다. 남편 하나님과, 아내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부부간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신부인 이스라엘은! 남편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서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선지자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과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시듯이, 신앙적인 정절을 지키지 않는 아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는 않습니다. 어떻게든 다시 데려와 부부로 살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맺으려는 ‘새 언약의 대상자’는 변하지 않고, 그냥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남편이요 주인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아내였으나 결혼서약을 파기했던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결혼서약을 파기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그냥 ‘버림받은 아내’로 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편단심으로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버리고 간 여인인데도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여인’이라 부르시며, 또다시 아내로 맞아들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실 ‘징벌의 대상’인 이스라엘이, 다시 ‘새 언약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아내가 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는, 새 언약은 맺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순을 ‘용서’로 해결하십니다. 렘 31:34b →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런저런 다른 남편과 주인을 섬기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죄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순의 길’을 걸으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지 않는 용서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 언약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기억에서 지워버리지 못하면! 내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입혔던 사람과, 새 언약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아내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면서, 모든 죄를 기억조차 안 하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네! 이것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억하지도 않는 용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의 ‘속’과 ‘마음’에 두시고 기록하시는 새 언약
출애굽 당시의 언약은 ‘돌 판에 새겨’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억하지 않는 용서를 통해 새롭게 맺으시는 언약은! 어디에 어떻게 새겨지게 됩니까?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31:33 →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 새 언약은 속과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 ‘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법에서는 ‘내장’으로 번역되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짐승의 내장은 다 태우라고 율법으로 규정하셨습니다. 내장을 태우는 ‘언어적 용례’는 우리말에도 있습니다. ‘속을 태우다’, ‘애를 태우다’는 표현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 내장, 오장육부는! 구약성경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기관’으로 간주합니다. 한의학에서도 인간의 오장육부가 단순히 그 장기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에서 그쳐서도 안 되고, 마음에 깨닫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을 내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속에 두며, 마음에 기록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 말씀이! 그냥 눈으로 입으로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을 먹어 모든 내장 기관까지 내려가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하고,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추동물처럼! 말씀을 되씹고 곱씹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의 진미가 우리의 오장육부에 제대로 스며들게 되고, 말씀의 깊은 맛으로 우리의 체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속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둔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됩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가 됩니다. 여기서 ‘앎’이란!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저절로, 자연적으로 몸으로 알고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직관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직관적인 앎은! 모든 복잡한 것을 소화시켜, 지극히 평범한 앎으로 단순화시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작은 자이든 큰 자이든, 많이 배운 자이든 그렇지 않은 자이든, 모두 다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렘 31:34 →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이런 단순하고 직관적인 앎에서는! 앎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앎입니다. 앎과 삶이 따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억하지 않는 용서’ 같은 사랑이, 하나님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나도 행하게 되는 현실적인 용서가 됩니다. 나와 너를 새롭게 갱신하여, 보다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관계로 성숙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성경을! 그냥 ‘책’으로 알거나, ‘머리’로 알거나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나의 ‘몸’이 되고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나 자신이 ‘말씀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고,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속’과 ‘마음’에 당신의 말씀을 두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네! 그렇게 살겠습니다.’ 고백하여! 새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고, 영적 성숙의 경지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결혼서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와 엮어서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기억하지 않는 용서’에 대해서 나눠보고, 내 삶에서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와 그 결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속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둔 사람은,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런 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숙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각자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제목: 치유의 길! (왕하 5:1∼14)
1. 다 가진 완벽한 사람도 불치병에 걸리면 똑같아진다.
오늘 본문에는 아주 대단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는 ① 아람제국의 군대 장관이었고 ②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으며 ③ 백전백승의 큰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람 나라 왕의 총애와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아만에 대한 이런 화려한 평가들 맨 마지막에, 이렇게 한마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왕하 5:1c →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여기 ∼‘이나’라는 말은, ‘그러나’란 뜻입니다. 이 ‘그러나’는, 앞의 말을 180° 뒤집는 말입니다. 그는 큰 용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었지만, 그는 나병 - 한센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병환자더라”는 말은, 모든 삶의 희망을 꺾어 버리는 심각한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입니다. 불치병에 걸리고 나면! 돈이 있으면 뭐하고, 권력이 있으면 뭐하고, 왕의 총애를 받으면 뭐합니까? 그런 것들은 불치병을 치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병에 걸리면! 다 똑같아집니다. 세상의 타이틀은 의미가 없어지고, 다만 불치병환자라는 명찰을 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아만 장군뿐만 아니라, 인생은 모두 ‘그러나의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은 다른 병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 있는 병’ ‘내 속에 있는 병’입니다. 현대인들 대부분! 신앙적으로 볼 때, 영적 감각과 예민함을 잃어버린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런 가운데서 살아날 길은 무엇일까요? 치유와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2. 그에게 치유의 길을 알려 준 한 작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집에 포로로 잡혀 와서 집안일을 돕고 있던 작은 하인 소녀가 있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왕하 5:3 →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소녀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아만 장군은 자초지종을 물어봤고, 마침내 아람 나라의 왕을 만나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엘리사는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하라고 처방합니다. 나아만은 그 말대로 순종하여 깨끗하게 나음을 얻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자!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소개해준 한 작은 소녀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람 제국의 국방장관을 복음화시키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5절과 17절 말씀을 보면, 병 고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이 다시 엘리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5:15b →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왕하 5:17 →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 성경은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요나서를 통하여 나아만 장군이 아람 나라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람나라의 수도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사실 요나는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별 성의도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 심지어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한 여자아이의 소개로 복음의 씨가 나아만 장군에게 심어졌고, 그를 통해 아람 나라 백성들의 마음 밭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명의 한 소녀였지만! 위대한 전도자요 선교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3. 우리는 어떻게 소녀처럼 사람들을 치유와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①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여자아이는!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면! 나병도 거뜬히 나을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그는 비록 포로로 끌려왔지만, 그가 가진 신앙은 포로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확실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하려면! 먼저 나 자신부터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말이 길지 않아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감동시킵니다. 이런 확신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신임받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10월 셋째 주일(20일)을 → ‘새 생명 전도축제일’로 삼고, 전도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데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바로 서로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 가족, 친척, 동료, 이웃들이야말로 내가 책임져야 할 전도대상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태신자 전도’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은 → ‘관계전도’입니다. 물론 노방전도도 필요하고, 전도지도 열심히 나눠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토양을 가꾸는 일이지, 그것을 통해서 실제적인 열매를 거두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관계전도’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전도’의 기초는 → ‘신임받는데’ 있습니다. 평상시의 ‘신뢰도’가 결정적인 순간에 → ‘설득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신임받는 삶을 살아야!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성이 없이는 절대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전도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가정의 복음화와! 내 주변의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신뢰도에서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③ 소망을 심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아람 제국의 참모총장이요 국방장관이라 하더라도, 그가 나병에 걸린 이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격리, 추방,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 하녀 아이가 놀라운 희망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면! 그분은 얼마든지 주인님의 나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3절) 절망 속에 있는 그에게 놀라운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이 문제들 속에서 실의와 좌절로 살아가고 있고, 무엇보다도 원초적인 ‘죄’의 문제로 인해 심판과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도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축복과 치유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 소녀가 입을 다물고 잠잠했다면! 어떻게 나아만이 고침 받고 구원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한 달여 뒤에 있을 ‘새생명 전도축제일’에 나는 누구를 초청할 수 있을까? 그 누구를 떠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 생각되셨습니까? 그렇다면! 한 달여 동안, 그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면서 열심과 정성을 다해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뭣이 중한데!
나아만은 환자로서 의사인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료의 처방을 받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밖으로 나와서 나아만을 영접하거나 환대하지 않고, 그저 사환을 시켜 처방전을 전달했습니다. 왕하 5:10 →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이러한 처사에 나아만 장군은 확 기분이 상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에게는 지혜로운 부하가 있었습니다. 왕하 5:13(의역) → “장군님! 선지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해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저 강에 내려가 씻으면 깨끗해진다는데,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내세우고 높여야 할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입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글자 하나 차이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자존심’(Pride)은 →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자존감’(Self-esteem)은 → 누구와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를 귀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 교만한 사람은 쓰시지도 않고 은혜도 못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사람이 겸손하여, 낮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은혜를 받게 되고 기적을 체험케 된다는 것입니다. 왕하 5:14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여기 ‘내려가서’란 말과 ‘말대로’, ‘말씀대로’란 말이 중요합니다. 나아만이 높은 자존심을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여 병이 기적적으로 치료된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언제나 ‘겸손과 순종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내 생각’과 vs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씨름입니다.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교만’과 ‘자존심’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성경 인물 가운데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찾아보고, 서로 한 명씩 소개해 봅시다.
2.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뢰도’를 높이는 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신뢰도가 떨어진 이유와 회복의 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들은 ‘천국과 영생’이라는 너무나 값진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영혼 구원’을 위해! 당신이 하려는 결심과 계획을 나눠봅시다.
제목: 영성을 조율하고 회개하라! (왕하 3:9∼20)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죽고 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자, 모압 나라는 매년 어린 양의 털과, 큰 양의 털을 각각 10만 마리의 분량씩 조공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보내던 것을 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재정 수입이 중단되었고, 체면도 손상되었습니다. 그러자 여호람 왕은 남 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서 함께 모압을 치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남방에 있는 에돔 왕과도 함께하기로 합니다. 드디어 북 왕국 이스라엘, 남 왕국 유다, 가장 아래쪽 에돔! 세 나라가 동맹을 맺고 모압을 치려고 출정합니다.
모압을 치기 위해서 북쪽에서 쳐내려오기보다는, 동맹을 맺은 에돔 쪽으로 내려가서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쳐 올라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출정한 지 일주일이 되어 준비된 물은 다 떨어졌는데! 모압 경계까지 왔는데, 군인들과 군마와 수레를 끄는 짐승들이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전쟁 중에! 광야 한복판에서 물이 떨어지니,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탄식합니다. 왕하 3:10 → “이스라엘 왕(여호람)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릴 죽이려고 작정하셨구나.” 한탄하면서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은 신앙적인 해결방법을 찾습니다. 11절입니다. 왕하 3:11 →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즉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뢸 만한 선지자가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두 왕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를 만나 한탄하고 원망함으로 그 문제를 잘 해결해 본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원망이나 불평에는 문제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반면에 유다 왕 여호사밧은, 문제를 만나자! 곧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습니다. 그는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의논하며 그의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역사의 운행자시오,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를 찾는 여호사밧 왕에게 한 병사가 이 근처에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여호사밧 왕은 직접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왕의 위치는 신하를 시켜서 엘리사를 불러올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의 내방을 받은 엘리사 선지자는 무어라 말합니까? 왕하 3:15 →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조금은 엉뚱하고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의 말씀과 악기를 연결해서 말씀한 곳은 신구약 성경 가운데 이곳 한 군데밖에 없는데, 여기에는 신령한 뜻이 있습니다.
‘거문고’는 어떤 악기입니까? 거문고는 현악기입니다. 줄을 튕김으로 소리가 나는 악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문고의 생명은 그 줄에 있습니다. 줄이 끊어지면 소리가 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믿었던 줄들이 끊어지고 터져 나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믿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합니다. 인간관계의 줄이 끊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업의 줄이 끊어집니다. 물질의 줄이 끊어집니다. 건강의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줄이 끊어져 버린다 해도, 우리 성도들에겐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한 가닥 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버리시지 않는 ‘사랑의 줄’입니다. 실은 우리 인생의 줄들이 다 끊어져 버린다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의 줄! 이 줄이 우리에게 남아있기만 하면! 우리 인생은 멋지게 연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흐가 작곡한 여러 위대한 음악 가운데 ‘G 선상의 아리아’는 바이올린의 G선 즉 ‘솔’! 그 한 줄만을 가지고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줄이 다 끊어져도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힘있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한 줄이 남아있다 해도, 조율이 잘 되어있어야만! 바른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나 자신의 거문고 줄은 팽팽하게 조율되어 있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바른 위치에 서 계십니까? 찬송의 줄이 풀려있지는 않습니까? 기도의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습니까? 말씀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습니까? 멋진 음을 내야 할, 당신의 거문고 줄은 제대로 조율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조율하는 것입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사이클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나도 기뻐하고 ▸그분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기보다 먼저! 나의 영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율하고, 인생의 사이클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행여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실 때, 헝클어진 삶의 자세로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과 조율된 삶, 사이클이 맞추어진 삶으로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 찬송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하는 일은! 언제나 삐꺽거리는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먼저 나의 풀어진 영성의 악기를 다듬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실패했어도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느슨했어도 괜찮습니다. 잘못 살았어도 괜찮습니다. 만일!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과의 인생조율을 제대로 하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 전쟁 중에 물이 없어 고통 중에 있게 된 이 상황은, 그저 우연히 만난 상황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어져 버린 사람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우선 왕들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졌고, 백성들도 게으르고 나태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헝클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찾아온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모압과의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 왕들의 문제요, 지도자의 문제요, 백성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 경우! 외부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가 진짜 문제입니다. 심령의 문제이며 영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드디어 엘리사 앞에 거문고를 타는 연주자가 불려 왔습니다. 조율을 마쳤습니다. 이제 엘리사는 거문고 타는 사람에게 ‘찬송’을 연주하게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던 이스라엘 왕도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자던 여호사밧도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장수들과 병사들도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찾아오셨고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엘리사를 감동하시고 영감이 임했습니다. 여기에 깊고 신령한 뜻이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메마른 에돔 골짜기에 샘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왕과 군사들의 가슴에 은혜의 샘이 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 축복의 샘물이 터지기 전에, 먼저 내 심령의 골짜기에 믿음의 샘물이 터지고, 기도의 샘이 터지고, 눈물의 샘이 터지고, 찬송의 샘이 터져야 인생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엘리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16절입니다. 왕하 3:16 →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이 말은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메마른 인생의 골짜기에 회개의 개천을 깊이 파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 10:12 →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잡초 우거진 묵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에게 “개천을 파라. 그리고 깊이 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율되고, 우리의 심령이 준비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보증하십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꿈꾸고, 기도하는 일에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 전쟁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잘 조율된 악기는 아름다운 음악, 멋진 승리를 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순종의 결과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왕하 3:20 →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아침 소제 드릴 때! 즉 온 백성이 일어나 아침 기도하는 그 시간,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른 아침! 골짜기에 흘러넘치는 물에 아침 해가 비취었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아침,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햇살이 비쳐 붉게 물든 물을 본 ‘모압’의 군인들은! 엉뚱한 판단을 합니다. 이스라엘 연합군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서로 죽이고 피를 흘려 저렇게 만히 고였구나! 네! 물이 없던 곳에 붉게 물든 물이 생겼으니, 그렇게 판단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노략질하러 다가옵니다. 그때 3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모압’은 크게 패하고 도주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여러분을 괴롭히려고 찾아왔던 인생의 문제 또한 악한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헝클어진 영성을 조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겸손히 회개하며 심령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의 생수로 가득 채워 주시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이, 승리를 연주하는 멋진 인생으로 바뀌는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문제를 만났을 때, 한탄하면서 원망하는 북왕국 여호람 왕과, 신앙적인 해결방법을 찾았던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의 모습 중,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오늘 말씀을 통해 회복되고 조율되어야 할 내 신앙의 느슨함이나 부족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나누어 보십시다.
3. 대부분의 인생 문제가 외부적인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변하기를 기도하기보다, 나 자신이 하나님과 조율된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제목: 야 곱! (창 48:1∼10a)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야곱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단 1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히 11:21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게 답니다.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야곱에 대해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할 얘기가 많았을 텐데! 히브리서는 창세기 48장에 나오는 내용을 딱 반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기억해야 할 내용이라고 여겼을까요? ‘영적인 유산을 계승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유산’을 ‘다음 세대들에게’ 넘겨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2가지 중요한 교훈’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양자의 특권’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8장을 이해해야! 그다음에 나오는 다른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창 48:1 →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48장은 ‘이 일 후에’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일’이라는 것은! 바로 앞 장인 창세기 47장의 ‘마지막 사건’을 말합니다. 여기를 보면, ‘야곱’이 애굽의 총리로 있는 아들 ‘요셉’을 부릅니다. 그래서 요셉이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야곱은 요셉에게 ‘유언적인 부탁’을 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의 묘지인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 후에 야곱이 정말 죽을 날이 임박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요셉은! 즉시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찾아뵙기 위해서 야곱에게로 갔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노환으로 기력이 쇠해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일어나 앉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창 48:3∼4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벧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고 나서 오늘의 요절이며,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 5절의 이야기를 합니다. 창 48:5 →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성도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특이한 구절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손자인데, 그 손자들을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입양해서 야곱의 첫째 아들인 르우벤과, 둘째 아들인 시므온의 서열을 뒤집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첫째와 둘째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자식으로 입양하는 얘기를 들어보셨나요? 성경 여기서 한 번 나오고,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내용을 잘 이해하셔야! 나중에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에 가서, 왜 ‘요셉’이 안 나오고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나오는지? 즉, 열두지파에 ‘요셉’의 이름은 없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게 됐는지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5절 말씀은! 할아버지가 손주를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겠다는 야곱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7절에는 라헬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들로 삼았으니, 결국 그들은 ‘라헬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성경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야곱은 ‘레아’의 첫째와 둘째 아들인 ‘르우벤’이나 ‘시므온’ 보다도, ‘라헬’의 아들인 ‘요셉’을 장자로 여겼습니다.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혔던 이유도! 야곱에게 있어서는 요셉이 ‘상속자 1순위’였기 때문이고, 이제 요셉의 두 아들을 아들로 삼음으로써 그것을 확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화’와 ‘상속법’을 알게 되면! 이게 무슨 소린지 알게 됩니다. 상속권은! 모든 아들들에게 주어지지만, 장자에게는 ‘두 몫’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맏아들에게 주는 ‘장자권의 특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로 ‘더블 포션(double portion)’ 갑절, 곱빼기라고 합니다. 맏아들에게는 두 몫을 주고,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한몫씩 주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 장자권 쟁탈전이 벌어졌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 가다 보면, 야곱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는 기록이 여호수아서에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이 ‘요셉’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양자로 입양했기 때문에, 아들이 열세 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땅을 13등분 해서 나눠 가져야 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제사장 지파가 된 ‘레위’지파 에게는 땅을 주지 않고, 대신 12지파로부터 십일조를 받아서 살도록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에브라임’이 한몫, ‘므낫세’가 한 몫! 그래서 요셉이 받을 ‘두 몫’을 장자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일까요? 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이 사건은! → 복음을 예표해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God has no grandchildren. “하나님에게는 손주가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롬 8:14∼17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상속자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똑같이 그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창 48장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자식으로 입양하는 굉장히 특이하고 이상한 구절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야곱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이어받을 상속의 특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이나 상속권이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지만! 신앙의 부모로서 이것만큼은 꼭 물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천국을 상속하는 축복!
2. ‘과분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겠습니다. 창 48:10 →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과거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눈이 어두워서 앞을 보지 못했는데! 지금 48장에서는 야곱이 자기 아버지처럼 앞을 잘 못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후손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 ‘이스라엘’이 뜻밖의 자세를 취하여 축복합니다. 창 48:14 →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야곱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냥 팔을 쭉 뻗어서 축복하면 되는데, 어떻게 한 거예요? 팔을 X자로 엇바꾸어 머리에 손을 얹은 것입니다. 그림이 그려지시죠?
성도 여러분! 야곱이 왜 그랬을까요? → 이 역시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건을 동생 ‘에브라임’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형 ‘므낫세’에게 할아버지가 오른손을 얹어야 하는데, 자기에게 오른손을 얹어서 축복하며 기도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것이 오늘 두 번째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과분한 은혜” “넘치는 은혜”입니다. → 이 축복은! 형이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내가 이 축복을 받았을까? → “자격 없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나게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요,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을 희생시켜 이루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엡 2:4∼5 / 8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잘나고 내가 잘해서 자격을 얻고,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 그 놀랍고 큰 은혜를 가슴에 되새겨야 합니다. ‘그래요, 주님! 주님의 은혜로! 자격 없는 나이지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었고! 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감사와 감격의 마음을 늘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들이, 세상에 속한 것들로 인해서 열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녀들!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자녀들! 그 능력을 힘입어 세상의 유혹과 욕심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자녀들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이끌 수 있는 부모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과, 그로 말미암아 천국의 상속권자가 된 은혜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이번 부흥회(영적인 유산을 이어가라!)에 받은 은혜와, 갖게 된 결심에 대해서 서로 나눠봅시다.
제목: 바벨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렘 51:54∼64)
이스라엘의 주변국들 중 이스라엘에 큰 영향을 주었던 큰 나라들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애굽(이집트)만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모두 망해버렸지만, 바벨론은 유독 하나님의 멸망 예언을 받은 나라입니다. 이는 바벨론이 가장 악해서라기보다 유다 민족을 실제로 멸망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은 최후 심판을 받을 절대 악의 상징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 곧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치욕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속에서 ‘바벨론’은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나라였습니다. 앗수르는 과거 520년 이상 근동 아시아의 주인이었지만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했던 바벨론 역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정말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B.C 484~B.C 425)가 직접 현장을 답사하면서 쓴 전쟁사인 ‘역사’를 보면, 바벨론 성은 광활한 평야 가운데 세워진 대도시로, 성의 한쪽 길이가 22.5km, 둘레 전체를 합치면 90km나 됐습니다. 외벽 밖으로는 넓은 해자(물길)를 두어서 적이 쉽게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성벽은 이중벽으로 쌓았고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공간을 두었습니다.
<바벨론 성과 이어지는 도시>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바벨론의 경제력은! 전 세계의 3분의 1에 해당할 만큼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철옹성과 같은 바벨론 성!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이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멸망하기 전날 밤의 기록이 ‘다니엘서’ 5장에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를 읽어보면! 바벨론이 왜 망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 교만함으로 망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왕
좀 길지만! ‘다니엘서 5장’을 읽어 가면서,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때로는 목사의 설명보다, 성경 본문 그 자체가 더 명확하고 힘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내용을 보신대로 ‘느부갓네살’ 왕이나, 그의 아들이자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 왕 역시 교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성전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기물들을 탈취하였고, 벨사살은 전제를 붓던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짓까지 서슴없이 행하는 교만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교만하면 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따라 진실과 성실로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사는 겸손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교만과 우상숭배로 인해! 느부갓네살 왕이 영원하기를 꿈꿨던 바벨론 제국은 바사(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이후 ‘바벨론’과 ‘메데’를 정복하여 페르시아 연합 왕국을 일으킨 초대왕 ‘고레스’는 시작부터 새로운 정책으로 제국을 이끌어 가게 됩니다.
2.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고레스 왕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인 1879년, 지금의 이라크, 옛 페르시아의 신전에서 원통 모양의 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설형문자로 글이 적혀 있었는데! 문자를 해독해 보니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페르시아의 ‘인권선언문’이었습니다.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레스 실린더’>
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 “본인은 제국에 속한 여러 나라들의 전통과 관습과 종교를 존중할 것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노예제는 금지한다.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에게는 합당한 급여를 지급해야 함을 천명하는 바이다.”
네! 내용은 ⇨ ‘시민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노동의 가치’를 문서와 법령으로 분명하게 적시한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이라고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고레스가 이런 생각과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 자신이 똑똑하고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린더에 적은 내용보다도 더 명확하게, 고레스의 고백이 역대하 3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하 36:22∼23 →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어떻습니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네! 이런 ‘은혜의식’이 있는 고레스 왕 까닭에, 바벨론으로 잡혀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만에 해방되어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이 얼마나 컸던지! 시편 126편에서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126:1∼2 →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미국 내 모든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설문 투표를 했습니다. →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지도자들 중에 가장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지도자, 왕은 누구였는가?” 여러분! 이 설문 투표에 과연 누가 1등으로 선정되었을까요? 놀랍게도 바사 제국의 초대 왕 ‘고레스’가 차지했습니다.
그러면 이 고레스 왕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1등 지도자로 뽑혔을까요? 그것은 그의 ‘포용정책’과 ‘지방분권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고레스 왕은 생각의 근본부터 달랐습니다. 제국으로 끌려와 포로생활 하던 사람들을 오히려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고, 고국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을 지킬 수 있게 허용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번성하면, 세금을 거둬들여 제국 전체의 경제를 일으키는 전략을 활용했던 지도자입니다. 이전의 다른 제국들과는 달리 고레스 왕은 이렇게 선정을 베풀어서, 식민지 백성들도 그를 ‘아버지’(Father)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고레스’보다 200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고레스’ 왕이 나타나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 45:13 → “내가 공의로 그(고레스)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고레스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에게도 기도 제목이 생겼죠!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정치를 욕하고, 정치인들을 향하여 핏대를 높여 비판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장차 이 나라의 정치를 주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갈등과 분열로 갈라진 백성들의 마음을 치유하며, 민족의 평화적인 통일을 이뤄내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세워지게 하옵소서.” 네! 우리나라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바탕 위에 선, 바른 지도자들과 대통령이 세워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금요일부터 열리는 ‘부흥회’는 매우 중요합니다. 부흥회 ‘주제’가 무엇입니까? ⇨ “영적인 유산을 이어가라!”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이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믿음의 계승’이라는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이 네 명의 삶을 들여다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자칭 메시아와 예수님이 있습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이죠!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고레스’와 같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쓰시는 지도자들은 반드시 많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번 부흥회가 여러분의 가정들이 믿음의 가문으로 우뚝 서고, 교회적으로는 다음 세대들이 굳건한 신앙으로 세워져 위대한 지도자들이 배출되는 계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자만심과 교만,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징계와 패망의 원인임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 제국들이 썼던 식민지 정책과 vs 바사(페르시아)가 썼던 식민지 정책이 어떻게 달랐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나눠봅시다.
3. 이번 부흥회(영적인 유산을 이어가라!)에 어떤 기대와 기도제목을 가지고 참여할 것인지? 서로 나눠봅시다.
제목: 다시 돌아가게 하리라! (렘 50:17~20)
오늘 본문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50:17 →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패망하였고,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은 3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1차로 주전 606년 여호야김 왕 때, 2차로 9년 뒤인 597년 여호야긴 왕 때, 3차로 11년 뒤인 586년 시드기야 왕 때 끌려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깨우치고 돌이켜 미래에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차면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며 용서하시며 회복하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벨론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징계의 도구로 쓰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유다를 징벌하는 권한을 주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렘 50:11에서 바벨론을 일러 → “나의 소유를 노략하는 자여!”라고 하십니다. 즉, 성전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기물들을 탈취하였고, 전제를 붓던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짓까지 서슴없이 행하는 것은! 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권위가 주어졌을 때는 그에 따른 책임도 있음을 생각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하나님의 소유인 ‘유다’에 도를 넘는 짓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누군가의 막대기와 채찍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중에 ‘부모’라고 하는 위치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징계하고 훈육하고 때로는 때리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내 자녀이지만, 그 자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을 대해야 하고, 그들을 징계할 때도,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조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자녀가 나의 소유인 것으로 착각하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월권이고 선을 넘는 것입니다.
이제 선을 넘은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파사(페르시아)라는 막대기를 통해 징계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렘 50:19 →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렇습니다. 유다는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첫째, 포로생활 70년은! ⇨ 안식과 정화의 기간이었습니다.
먼저, 역대하 36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대하 36:21 →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포로 생활 70년은! 죄악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 땅에 안식을 주었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렘 33:5b∼8 →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지만, 죄를 정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기간을 70년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70년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같이 바벨론을 무찌르고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파사 제국’의 ‘고레스’ 왕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주전 538년! 고레스는 바벨론 시절 강제로 끌려온 자들에게 자신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포합니다. 그 후 2년간의 준비 끝에, 성경의 예언대로 70년이 꽉 찬 주전 536년, 유다 왕 여호야긴의 손자인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그러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루어짐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렘 29:12∼14 →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더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을 보겠습니다. 겔 36:37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약속)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 70년이 차면 유다를 다시 돌아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길 위해서, 다니엘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 9:2∼3 →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네!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한 것을 알고 나서, 그때부터 금식하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에스겔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가정을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오직 믿음으로 남은 자들만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70년이 차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됩니다. → 1차로 주전 536년 스룹바벨의 인도로 49,897명이 귀환합니다. 그리고 2차는 78년이 지난 458년 에스라의 인도로 1,754명이, 3차는 다시 14년이 지난 444년 느헤미야의 인도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정확하게 그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6만 명 정도였습니다.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는 인원이지만!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 이스라엘로 귀환한 것입니다.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구약성경 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주제인 → ‘남은 자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를 택하셨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킨 자만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들을 보겠습니다. 사 10:22 →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 되었음이라.”그렇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고 잘살고 있었기에, 오직 남은 자들 즉,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돌아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명의 빛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모든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 1:11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오직 믿고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대신 지셔서, 나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은혜 의식’이 있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찾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렘 50:20 → “그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아 구원받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기도합시다. 이 땅의 모든 백성! 특별히 내 사랑하는 가족이 예수님을 통해서 죄로부터 구원받고,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필요하면! 다니엘처럼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가족들이 다 예수 믿어 인가귀도 되어, 한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며 영광 돌리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바벨론이 심판받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도를 넘어 과도하게 유다를 다뤘고, 스스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부지불식간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교만과 주인의식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부모 - 내 자식, 나 - 물질)
2. 하나님은 자기 백성 유다를 징계하시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갖고 계신 계획에 대해 나눠봅시다. (자녀교육의 도)
3. 해방이 선포됐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남은 자’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다짐을 나눠봅시다.
제목: 애굽이여! 망하였도다. (렘 46:25∼28)
오는 목요일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침략하고 민족 말살을 꾀한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지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주권 회복과 광복은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식민지 잔재와 민족분단, 전쟁으로 얼룩진 아픔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자유와 평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뜻과 원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시도록 살자!
예레미야서는 45장까지로 유다를 향한 예언은 끝나고, 46장부터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제일 먼저 ‘애굽’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이 애굽에 대한 예언의 골자는 → “네가 아무리 강성해도, 하나님이 네 편이 아니기 때문에 너는 망한다.”라는 것입니다.
3절 이하를 보면, 애굽의 강성한 모습이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은 작은 방패, 큰 방패, 말, 투구, 창, 갑옷 등 ‘장비를 잘 갖췄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용을 주고 이웃 나라들로부터 산 ‘용병부대도 동원’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자신만만했습니다. 렘 46:8 → “애굽은! 나일강이 불어남 같고, 강물이 출렁임 같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일어나 땅을 덮어 성읍들과 그 주민을 멸할 것이라.” 호언장담합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북쪽 ‘갈그마스’로 진격합니다. 렘 46:9 → “(애굽 군인들을 향하여!)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 (용병들을 향하여!)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동원된 말과 병거들, 수많은 용사들! 그리고 용병부대! 한마디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마지막 말은 “하거니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대단했지만! 결국, 바로 느고는 패하고 말리라는 것입니다. 주전 605년에 유브라데 강가 ‘갈그마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애굽’은 패배합니다.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그 패배의 모습입니다. → “애굽이여! 네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고,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나니,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라.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향(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도다. 그들이 그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수치와 상처를 입었고, 전사자들은 겹겹이 쌓였습니다. 마침내 세계의 패권은 애굽에서 바벨론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애굽의 바로 느고가 엄청난 전력을 동원했음에도 패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더 많은 군대와 무기를 동원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렘 46:13, 14b∼15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애굽 땅을 칠 일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말씀이라. 네(애굽)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너희 장사들이 쓰러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까닭이니라. 그가(하나님)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시매,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네! 애굽이 패한 이유를 뭐라고 말합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이 애굽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벨론을 들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이 여기에 대항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는 쪽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업도 그렇고, 입시도 그렇고, 취업도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준비가 아무리 완벽해도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모쪼록! 하나님이 함께하실만한 일이어서, 성공하고 형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자!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렘 46:17 → “그들이 그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 여기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라는 말은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렸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레미야 당시의 ‘바로 느고’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세 당시의 애굽 왕 ‘바로’(람세스 2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게도 깨달을 기회가 많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가도록 허락하라”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십니다. 그러나 그 깨달을 기회들을 다 잃어버린 결과, 모든 짐승의 초 태생과 가정의 장자들이 죽은 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재난을 앞두고는 피할 기회를 주시고, 심판을 앞두고는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를 주시지도 않고 재난과 심판을 내리시는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기회를 깨닫지 못하고,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만 있었겠습니까? 방주는 왜 만드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곧 임하니 준비하자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제가 그냥 상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 2:5 →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義)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무시하는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네! 노아는 전파하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회를 잘 활용한 사람은 삭개오입니다. 반면에,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는 무엇입니까? 그 기회를 잘 붙잡아서 버림과 망함이 아니라, 회복과 승리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오늘 말씀의 끝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반전의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시고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징계도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절인 28절부터 읽는 것이 이해에 빠릅니다. 렘 46:28 →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죄를 짓고 범죄 하면, 공의의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소망의 약속이 바로 앞 절인 27절에 있습니다. 렘 46:27 → “내 종 야곱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하며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을 넘어 ‘축복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애굽과 바벨론에게는 결코 이런 종류의 약속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당신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종 야곱’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아들에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 바벨론과 애굽은, 단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요,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지만, 그는 아들이 아니라 종입니다. 반면에, 심판받아 포로로 잡혀갔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과 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종’은 그냥 부려도 되고, 호의를 베풀어서 품삯을 주면 됩니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매번 일했다고 해서 대가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비록 아들이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말썽을 펴도, 아들은 상속자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말을 아무리 잘 듣고 100% 순종해도, 종은 종일뿐입니다. 즉 바벨론과 애굽은 종이니까 일을 시키지만, 이스라엘은 아들이니까 징계를 해도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과 종의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행패를 부립니다. 결국,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몫을 떼어 줍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간 순간부터, 아버지는 그 아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만약 그가 ‘종’이었는데도 아버지가 그토록 기다렸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들’이기에 대문을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대단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면!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애통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업으로 받아야 할 ‘천국’의 상속권을 잃어버리고 지옥 유황불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는 애굽을 구원의 동아줄로 알고 붙잡았으나, 애굽마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예루살렘처럼 망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굳게 믿고 의지한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도리어 해가 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때는 도피가 아니라 회개가 답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인 줄 깨닫고 회개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잃어버린 자의 서러움이 훨씬 더 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제목: 기도와 응답대로 살아야! (렘 42:15∼22)
1.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멸망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과 애굽이라는 초강대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던 조국 ‘유다의 운명’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유다가 위기상황에 빠졌음을 경고했고,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어 ‘주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그의 말은! 왕과 백성들에게 먹히질 않았습니다.
마침내 전쟁의 광풍이 몰아쳤고, 앞서 앗수르를 제압하고 중근동의 패권자가 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18개월 동안 버티고 있던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자기 마음대로 산 대가는, 곧 유다 나라의 멸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 땅이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의 군사령관은 성밖에 살던 빈민들에게 포도원과 농토를 나눠주어 경작하게 했습니다. 땅을 그냥 놀리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와중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지금은 수치스럽더라도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낫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바벨론도 결국은 망하고, 새로운 제국! 바사가 들어서게 될 것을 예견한 것입니다. 네! 실제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사(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언해서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 제국> <바사 제국>
그렇지만! 이런 역사의 안목이 없고, 기득권에 배불러 있던 당시 유다의 왕과 귀족들은 어느 사람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유다가 망하면서,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끌려가는 도중에 느부갓네살의 근위대장인 ‘느부사라단’의 호의로 풀려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예레미야는 망한 조국 유다에 남게 됩니다.
2. 정치적 혼돈 상황
바벨론 왕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는 존경받는 선비 집안 출신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의 할아버지 ‘사반’은 요시야 임금 때 서기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가 총독으로서 우선해야 할 일은!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먹고 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파괴된 집들을 수리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먹을 것을 많이 모아 두라고 백성들에게 지시합니다.
사람들은 충격과 상실감을 달래 가며,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소문이 퍼지자, 이곳저곳으로 숨어 들어가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총독 ‘그다랴’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의 군인! 지휘관들도 있었는데 특히 ‘요하난’이란 장군이 총독에게 아주 비밀스러운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내용은! 시드기야 왕의 친척인 ‘이스마엘’이, 암몬의 사주를 받아 총독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다랴’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게 오판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왕족인 자기를 제쳐놓고, 서기관 가문에 속한 ‘그다랴’가 총독으로 선임된 것에 앙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다윗 왕가를 무너뜨린 바벨론과 협력하는 자를 제거한다는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찾아왔을 때, 그를 환대하며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 식탁은, 결국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총독 ‘그다랴’와 그 자리에 있던 유대 사람들, 그리고 바벨론 군인들까지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다시 암몬으로 도망갑니다.
자! 사건이 이렇게 전개되자! 암살 정보를 전해주었던 ‘요하난’은 자신이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합니다. 총독을 죽인 장본인 ‘이스마엘’은 암몬으로 도망갔으니, 이 사실을 알렸던 자신에게 살해 공모 혐의가 씌워질 수 있다고 생각되자, 그는 갑자기 불안해진 것입니다. 바벨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빠진 ‘요하난’은 애굽으로 도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합니다. 바벨론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애굽은, 정치적 망명객을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와 하나님의 뜻을 물어달라고 합니다.
3. 중보기도를 요청했지만!
네! 요하난은 그와 함께하는 백성들과 더불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자기들이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쭤달라고 요청합니다. 렘 42:2∼3 →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그들의 요청대로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렘 42:4 →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이때, ‘요하난’과 그 일행들은 예레미야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아주 놀라운 ‘신앙적 다짐’의 말을 합니다. 렘 42:5∼6 →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네! 이런 ‘요하난’과 그 일행들의 말은! 그야말로 훌륭한 ‘기도의 모범’입니다. 지금 이들은!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든지 않든지, 그 뜻대로 따르고 순종하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네! 우리도 이래야 됩니다. 그래야 참 신앙인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즉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엎드리고 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급한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려 열흘이나 지났습니다. 아마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요하난’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본문 10∼22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다 읽어도 좋겠지만! 길기 때문에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이런 내용입니다. →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머물러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순종하지 않고, 너희들의 생각대로 애굽으로 도망하면!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쳐서 남을 자가 없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요하난 장군과 백성들은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했지만! 실상 자신들의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들의 뜻이었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들인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말뿐이었던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다짐대로 순종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하난’을 비롯한 남은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지만! 한순간도 자기들의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4. 자의적(恣意的) 믿음을 넘어서야!
‘요하난’과 남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또 그 뜻이 무엇이든 순종하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국은 그 말씀을 외면하고 맙니다. 자기들의 판단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 이런 것을 일러 ‘자의적(恣意的:방자할 방, 내키는 대로 하는)믿음’이라 합니다. 자기 좋을 대로, 편리한 대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기 욕망’이라는 관성을 따라 사는 삶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제자도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불신앙적인 삶을 계속할 것인지?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결단할 것인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어려울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따르고 순종해야 할 근본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잠시 어려운 상황만 모면하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웠던 선택의 순간들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순종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혹시 내게도 말만 앞설 뿐, 실천하지 못했던 일은 어떤 것이었는지? 나눠봅시다.
3. 전쟁의 참화 속에 유다에 남은 백성들은 애굽으로 내려가야 살 거로 생각했습니다. 힘들 때! 무의식적으로 먼저 찾게 되는 ‘나의 애굽’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제목: 적당히 믿으면서도 복 받기를? (렘 37:1∼10)
1.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하는가?
역대하 35장을 보면, 요시아 왕 당시 세계 판도는 ‘애굽’과 ‘바벨론’ 두 강대국이 양강을 이루어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역사를 움직이는 손길은 바벨론 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이래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받는 ‘요시야 왕’은 친 바벨론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요시야 왕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 ‘느고’가 세계의 열강으로 떠오르는 바벨론을 치러 올라오면서, 이스라엘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것을 유다의 ‘요시야’ 왕이 중간에서 막아서다가 애굽 군사가 쏜 화실에 맞아 죽고 맙니다. 이렇게 요시야 왕이 죽자, 백성들은 맏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똑똑한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17대 왕으로 세웁니다.(36장 1절), 하지만 애굽 왕이, 그도 아버지처럼 친 바벨론파 일 것으로 생각하고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대신 형이며 첫째 아들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36장 2∼4절).
이렇게 애굽 왕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야김’은 선대들의 ‘친 바벨론 정책’을 버리고, ‘친 애굽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렇게 되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은 바벨론에 있다고 주장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사사건건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그를 사로잡아 갑니다.(36장 5∼6절).
그리고 조카 고니야(여호야긴)를 거쳐 ‘시드기야’를 느브갓네살이 유다의 왕으로 세웁니다. 그는 처음 3년 동안은 ‘친 바벨론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백성과 신하들의 요구에 못 이겨, 결국 바벨론을 배반하고 ‘친 애굽 정책’을 쓰게 됩니다. 결국 분노한 느브갓네살 왕이 3차 공격을 해 오게 되고, 시드기야 왕과 유다의 운명은 끝이 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합니까? 바벨론 편에 서야 합니까? 아니면 애굽 편에 서야 합니까? 이것을 오늘 우리나라의 형편과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는 친 미국 정책을 펼쳐야 합니까? 아니면 친 중국 정책을 펼쳐야 합니까? 네! 이것으로 우리나라 역대 정권들이 서로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지금까지도 갈등 관계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정말 잘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친 바벨론 정책을 쓰느냐? 친 애굽 정책을 쓰느냐가 아닙니다. 친 미국 정책을 펼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친 중국 정책을 펼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친 하나님 정책’을 써야 합니다. 공의와 사랑의 정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지만! 시드기야 왕과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렘 37:2 →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 공의와 사랑을 잃어버린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나라의 운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정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틀림없이 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 바르게 살면,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고, 걱정스러운 일만 자꾸 하면, 틀림없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진정 회개하고 바르게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과! 우리나라의 흥망성쇠는! 미국에 달린 것도 아니고, 중국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 가사를 보십시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누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까? 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르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나라가 되도록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은 유보되어 있으나, 분명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예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나님은 유다를 회개케 하기 위해서 바벨론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진정 중요한 회개는 하지 않고, 우리는 바벨론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도, 거짓 선지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애굽’이라는 뒷배가 있다고 하면서, 장밋빛 미래만을 얘기했습니다.
이렇게 회개는 하지 않고,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닥친 현실은 무엇입니까? 배반한 ‘시드기야’ 왕에게 분노한 바벨론이 제3차 공격을 해오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급히 기도를 요청합니다. 렘 37:3 →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그리고 한편으론 애굽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렘 37:5 →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네! 유다의 요청에 애굽 군대가 출정하자, 바벨론 군대는 잠시 예루살렘 성에 대한 포위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거짓 선지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제 바벨론 군대는 물러갔다.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다”라며 떠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2가지로 답변을 합니다.
첫째, 애굽에 대한 기대는 헛것이 될 것이라. 렘 37:7c → “유다의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애굽에 대한 기대는 헛된 것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애굽 왕 ‘호브라’는 군대를 보내 유다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바벨론 군대에 대패하고 퇴각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을!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막아보고 해결해 보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일인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길이요 방법입니다. 회개 없는 기도 요청은 아무 소용 없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불사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렘 37:8 →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잠시 바벨론이 물러간 것 같지만, 그것은 애굽 군대와 싸우기 위한 전술적인 선택이었고, 그들은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고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들은! 유다 백성들처럼, 시드기야 왕처럼,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서 자손만대 아무 걱정 없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 24:21 →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예루살렘 성이 마지막에 불 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이 세상도 불 심판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벧후 3:7∼13 →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말씀 속에 ‘불’이라는 말씀이 4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끝 날은! 불 심판을 통해 끝날 것으로 하나님이 작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랍니다. 물론 그날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생각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을 비롯해서 유다 백성들은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끝 날이 불 심판으로 끝날 것을 믿는다면! ‘회개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의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서도,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회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죄와 허물을 감추거나 외면하는 자들이 아니라,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돌이키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눈물로 회개하고, 나라의 운명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는 성도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시고,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하고 외교적 줄타기로 살길을 도모하다가 결국 패망했습니다. 우리의 살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2.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은 받고 싶어했습니다. 순종은 없고 간구만 있는 그릇된 신앙에 대해 나눠봅시다.
3. 인생이 회복되고 밝은 미래를 여는 길은 얄팍한 처세가 아니라, 신실함과 진리를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내가 주로 선택하는 해결 방식에 대해 나눠봅시다.
제목: 부르짖는 기도와 응답! (렘 33:1∼9)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남 유다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암흑기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약 40년간, 완고한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때의 일입니다. 친 애굽 정책을 펴왔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로부터 좋은 말,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은 죄악 때문에 곧 멸망하게 될 텐데, 바벨론에게 항복하고야 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취급해서 감옥에 투옥하고 맙니다.
투옥된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시 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애굽이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유다 역시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민족적인 비극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지어 부른 노래가 바로, 예레미야 애가(哀歌) 슬픔의 노래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다시 임합니다. 렘 33:1∼2 →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런데 이 말씀은! 예레미야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즉, 우리도 앞이 캄캄할 때,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응답하겠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르짖으라’고 기도를 명령하시면서 ‘세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응답하리라!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을 보여주시고,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계시하여 밝히 알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인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힘입어 살겠다는 신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인생이 더 복된 인생이 될지를 한번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보아도,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아도! 기도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들이 다 승리했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조지 뮬러(George Müller, 1805~1898)는 웨슬리 목사님보다 100년 후의 사람으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1829년 24세였던 조지 뮬러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영국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평생 영국에서 사역하게 됩니다.
하루는 뮬러가 브리스톨 거리를 걷다가, 많은 고아들을 보고 애쉴리 다운(Ashley Down)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고아원이 5개까지 늘어났고, 60년 동안 일만 명의 고아들을 돌본 고아의 아버지가 됩니다. 뮬러의 특별한 점은! 고아원 운영을 위해서 간증을 다니고, 사역을 알리며, 후원 요청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기도에만 집중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박물관에는 그가 기도의 응답으로 후원받은 물질과 물품은 현재 환율로 1억 파운드(1,793억) 이상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뮬러는 수많은 고아를 돌보다 보니, 기도 제목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 노트를 만들었고, 기도 제목이 생길 때마다 거기에 기록하고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기도 제목이 응답 되면 응답 된 표시를 하거나, 감사의 글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빽빽하게 쓴 기도 노트가 3천 페이지가 넘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기도 노트를 자세히 검토하여 보았더니, 무려 3만(5만) 번 이상 기도가 응답 된 것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기도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60년 동안 그의 기도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을 시대마다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한 땀과 눈물이 담긴 기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르짖는 기도가 복된 이유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 기도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여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기도로, 응답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고쳐 주리라!
본문 6절입니다. 렘 33:6 →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되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성을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잃은 것도 되찾게 하시고, 다시 새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불순종했고, 범죄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 고쳐 낫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병들었어도! 치료해서 고쳐 낫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다시 성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이고, 버림받았어도! 다시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렘 33:7 →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포로가 되어 붙잡혀 갔다 할지라도, 다 잃어버리고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들을 다시 세우고 축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네! 부르짖는 기도에 ‘해답’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시 30:2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고치시는 손길을 체험케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가운데! 고쳐 낫게 하시며, 무너졌던 것이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용서하리라!
렘 33:8 →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는 더 큰 죄, 더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상대방이 조금만 잘못하면, 힐책하고 나무랍니다. 용서할 줄 모릅니다.
남편은 아내를 용서할 줄 모르고, 아내는 남편을 용서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분쟁과 다툼, 갈등의 골만 깊어집니다. 그런 가정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고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며 기도하면 다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물론 우리 인간을 위한 사랑이요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 43:24b∼25 →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게 하는 우리 인간의 죄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악과 허물을 기억하고 용서하지 않고 속에 품고 있는 것은! 하나님조차도 힘들고 괴롭게 할 정도로 나쁜 것입니다. 하물며 연약한 우리 인간이야 어떻겠습니까? 네! 우리는 용서할 줄 아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할 때! 우리에게 평화가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에게 잘못한 것을 자꾸 되뇌고 기억하면! 누가 불행해집니까? 네!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기억하지 않는 용서’가 나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분노와 미움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죄를 용서하고, 자녀가 부모의 죄를 용서할 때, 부부가 서로의 죄를 용서할 때, 그 가정에 화평과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놀랍고 복된 소식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에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의롭게 여겨 주시고, 돌봐주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죄를 지었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나가 ‘부르짖어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받으시길’ 바랍니다. 주여! 나를 새롭게 하옵소서. 새 출발 하게 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 우리를 전과자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의롭다고 칭해 주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는 명령과 함께 주신 ‘세 가지 약속’을 열거해 보고,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응답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왜 꼭 기도하고 부르짖어야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겔 36:36∼27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기도의 응답으로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존 번연, 조지 뮬러, 윌리엄 부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받은 감동이나 자신의 다짐을 나눠봅시다.
제목: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 (렘 31:31∼34)
1. 심판과 재앙의 선포로 가득 찬 예레미야의 메시지
오늘부터 다시 살펴보게 될 예레미야서는! 예언서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독설로 가득합니다. 이런 직설적인 책망은,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제사장들에게 매 맞고, 목에 나무 고랑을 찬 채, 감옥에 감금되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와 재앙의 선포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레미야는 이렇게 독선적인 길을 갔을까요? 그것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내가 말한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면서 선포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렘 31장만 봐도, 무려 16번이나(1, 2, 7, 14, 15, 16, 20, 23, 27, 31, 33, 34, 35, 36, 37, 38절) 나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한 메시지는 전체적으로 심판과 저주가 중심이어서 암울했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결론까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분량으로만 본다면 ‘심판 선언과 재앙의 위협’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의 선포 중에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명 ‘위로의 책’ ‘위로의 두루마리’라고 불리는 30∼33장까지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 ‘위로의 말씀’을 여는 메시지를, 우리는 29장에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마침표는 아닙니다. 바벨론에서 오히려 신앙이 회복되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7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망의 그늘에 앉아 울고 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귀환과 회복’이라는 희망의 말씀! 새 언약이 바로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위로의 두루마리’를 지배하는 메시지입니다.
2. 새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새 언약에 관해서 말하는 오늘 본문은! ‘위로의 두루마리’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데, 하나님께서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실 새로운 약속이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부터 계속 되풀이된, 같은 내용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본문 32절에 의하면 새로 세울 언약은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렘 31:32 → “이 (새)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아니! 내용이 똑같은데, 도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일종의 ⇨ ‘결혼서약’이었습니다. 남편 하나님과, 아내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부부간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신부인 이스라엘은! 남편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서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선지자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과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시듯이, 신앙적인 정절을 지키지 않는 아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는 않습니다. 어떻게든 다시 데려와 부부로 살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맺으려는 ‘새 언약의 대상자’는 변하지 않고, 그냥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남편이요 주인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아내였으나 결혼서약을 파기했던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결혼서약을 파기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그냥 ‘버림받은 아내’로 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편단심으로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버리고 간 여인인데도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여인’이라 부르시며, 또다시 아내로 맞아들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실 ‘징벌의 대상’인 이스라엘이, 다시 ‘새 언약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아내가 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는, 새 언약은 맺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순을 ‘용서’로 해결하십니다. 렘 31:34b →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런저런 다른 남편과 주인을 섬기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죄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순의 길’을 걸으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지 않는 용서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 언약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기억에서 지워버리지 못하면! 내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입혔던 사람과, 새 언약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아내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면서, 모든 죄를 기억조차 안 하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네! 이것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억하지도 않는 용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의 ‘속’과 ‘마음’에 두시고 기록하시는 새 언약
출애굽 당시의 언약은 ‘돌 판에 새겨’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억하지 않는 용서를 통해 새롭게 맺으시는 언약은! 어디에 어떻게 새겨지게 됩니까?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31:33 →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 새 언약은 속과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 ‘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법에서는 ‘내장’으로 번역되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짐승의 내장은 다 태우라고 율법으로 규정하셨습니다. 내장을 태우는 ‘언어적 용례’는 우리말에도 있습니다. ‘속을 태우다’, ‘애를 태우다’는 표현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 내장, 오장육부는! 구약성경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기관’으로 간주합니다. 한의학에서도 인간의 오장육부가 단순히 그 장기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에서 그쳐서도 안 되고, 마음에 깨닫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을 내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속에 두며, 마음에 기록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 말씀이! 그냥 눈으로 입으로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을 먹어 모든 내장 기관까지 내려가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하고,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추동물처럼! 말씀을 되씹고 곱씹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의 진미가 우리의 오장육부에 제대로 스며들게 되고, 말씀의 깊은 맛으로 우리의 체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속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둔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됩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가 됩니다. 여기서 ‘앎’이란!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저절로, 자연적으로 몸으로 알고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직관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직관적인 앎은! 모든 복잡한 것을 소화시켜, 지극히 평범한 앎으로 단순화시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작은 자이든 큰 자이든, 많이 배운 자이든 그렇지 않은 자이든, 모두 다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렘 31:34 →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이런 단순하고 직관적인 앎에서는! 앎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앎입니다. 앎과 삶이 따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억하지 않는 용서’ 같은 사랑이, 하나님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나도 행하게 되는 현실적인 용서가 됩니다. 나와 너를 새롭게 갱신하여, 보다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관계로 성숙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성경을! 그냥 ‘책’으로 알거나, ‘머리’로 알거나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나의 ‘몸’이 되고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나 자신이 ‘말씀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고,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속’과 ‘마음’에 당신의 말씀을 두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네! 그렇게 살겠습니다.’ 고백하여! 새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고, 영적 성숙의 경지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결혼서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와 엮어서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기억하지 않는 용서’에 대해서 나눠보고, 내 삶에서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와 그 결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속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둔 사람은,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런 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숙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각자의 결심을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