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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2월 19일 말씀묵상지

이재영
2023-02-18
조회수 335

제목: 죽이는 사람 vs 살리는 사람 (마 12:1~8)


1875년 독일에서 두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어렸을 때, 친엄마가 유대인과 재혼하는 것으로 상처를 받았고, 그것이 유대인을 증오하는 동기가 되어 난폭한 성격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독재자가 되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학살하였고, 수천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30일 벙커에서 음독과 권총을 사용한 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또 한 사람은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신학자, 목사, 교수, 음악가,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 대륙에 사는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질병으로 죽고 있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고를 듣고는 그곳으로 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때부터 다시 의사 공부를 시작하고, 아내는 간호사 공부를 합니다. 마침내 38살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와 아내는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아프리카 ‘가봉’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50년 동안 선교와 의료 활동을 해서, 위대한 인류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는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그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건설하였습니다. 1965년 90세를 일기로 아프리카 현지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선교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프리카의 성자로 칭송받는 ‘알버트 슈바이처’입니다.

사람은 크게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와∼!’하고 탄성을 자아내는 사람과, 반대로 ‘아∼!’하고 탄식을 자아내는 사람입니다. ① 평화를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전쟁을 일으켜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②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③ 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1. 죽이는 사람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장 크게 품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종교적 권위와 영향력이 줄어드는 대신, 예수의 인기와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이삭을 훑어서 손으로 비벼서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마 12:2 →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당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안식일 규례도 모릅니까? 안식일에 밀을 훑어서 비벼 먹으니 말입니다.” 훑고 비비는 것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시며, 안식일의 본질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더는 따지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백성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실수하기를 기다렸다가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하기보다는, 말의 불화살을 쏘아 아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잘못된 말 한마디가 생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말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8:21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라고 했고, 또 잠언 15:4에서는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보다는, 바리새인처럼 오히려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로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죽이는 말, 정죄하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 이해하고 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살리는 사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살리는 사람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대표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로부터 귀신을 좇아내어 그들을 온전케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또 예수님을 음해하고 고발합니다. 안식일 날 사람을 고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안식일에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는 일이 선한 일이냐? 악한 일이냐?” 그리고 스스로 답하십니다. 마 12:12b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안식일을 범하고 율법을 어긴다’는 누명을 쓰면서도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소외된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 없는 분이시지만 죽음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너 죽고, 나 살자!’를 외치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나 죽고, 너 살라!’ ‘내가 대신 죽으니, 너는 살아라!’ 하신 분입니다.

1865년 4월 9일은 인류 역사상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땅에 살고 있던 모든 노예들에게 ‘해방을 선포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남부와, 노예를 해방하자는 북부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남북전쟁’입니다. 링컨은 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노예 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난 4월 14일,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습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워싱턴에 있는 포드 극장에 연극을 관람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노예 해방을 반대했던 연극배우인, 암살자의 총을 맞고 쓰러졌고, 그다음 날 아침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흘이 지나 링컨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주의 스프링필드로 운구하기 위해, 백악관을 떠나 펜실베이니아 대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길 양쪽에는 수많은 사람이 줄지어 서서 링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 인파 속에 아들과 함께 연도에 서 있던 한 흑인 중년이 있었습니다. 링컨의 영구차가 그들 앞으로 다가오자, 그는 아들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이렇게 크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저분을 잘 보거라. 저분이 나와 너를 위해서 죽었단다. 그래서 나와 네가 자유를 얻은 거야. 저분 덕분에 우리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거지! 저분을 잘 보아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링컨 덕분에 노예 생활하던 흑인들이 해방된 것처럼, 예수님 덕분에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해방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죽이고 자신은 살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남을 살리고 당신은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3. 죽어가는 사람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외면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관심은 ‘육신의 생명’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 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성경학자이며 부흥사인 채프먼 목사는 복음서를 샅샅이 살펴본 후, 이런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께 와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총 40명인데, 그중 34명은 친구 등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채프먼 목사님의 주장에 따르면,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은 겨우 6명으로 15%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상당한 비중인 85%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로 나와서 치유의 역사를 받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서 저는 사도 바울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롬 10:13∼15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을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을 아름답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발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발이기 때문입니다. 딤전 2:4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고도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그 사람의 죗값을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9:16 →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믿지 않는 우리 가족들의 영혼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친구나 이웃들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수요일이 ‘재의 수요일’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바라기는 이 기간을 가족 전도의 기회, 친구와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아, 4월 둘째 주일에 맞이할 ‘부활절’이 진정 ‘영적 부활의 축제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문과 묵상


1. 1875년 독일에서 태어난 두 사람, 히틀러와 슈바이처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복음서를 살펴보면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은 겨우 15%에 불과하고, 85%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로 나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본인의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3. 만약 죽어가는 영혼을 보고도 내버려 둔다면 그 피 값을 우리에게서 찾겠다고 하신 말씀을 새기며, 가족 (친구,이웃) 구원의 사명과 계획에 대해서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