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건은 민수기 26장에 기록된 제2차 인구조사가 막 끝났을 때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게 될 때, 그 분배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땅 분배가 현실화할 즈음에 특별한 여성 5명이 등장합니다. 슬로브핫이란 사람의 다섯 딸들입니다.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다입니다.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처음 들어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7장 1절에서 11절까지와, 36장 전체에 걸쳐 이 여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 까닭은! 이 다섯 딸의 아버지인 슬로브핫에겐 아들은 없고 딸만 다섯이 있었는데, 그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딸에게는 아무런 상속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법적으로만 따진다면 슬로브핫에게 할당된 기업은, 자연히 그에게 가장 가까운 다른 친족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슬로브핫의 딸들” 다섯 명이 모세와 이스라엘의 원로들 앞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즉, 자기 아버지 슬로브핫이 ‘아들 없이 죽은 관계’로, 자기네 가문이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분배받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민 27:3∼4 →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자기 아버지 슬로보핫 역시 가나안 땅의 기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또한 자손에게 물려 줄 권리가 있었는데, 단지 아들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 권리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딸들은 이 문제를 모세 앞에 직접 풀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여자의 이름으로 상속권을 주장하는 것도 그렇지만, 여자들이 모세에게 나와서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한 것 자체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전통으로 볼 때, 아주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가 그런 사연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다”고 그들을 지지해 주셨습니다. 민 27:5∼7 →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나아가서 슬로브핫에게 할당된 기업을 그의 딸들에게 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새로운 ‘판례’로 삼아서, 앞으로도 계속 적용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민 27:8∼11 →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딸에게 돌릴 것이요, 딸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그의 아버지의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받게 할지니라 하고, 나 여호와가 너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규례가 되게 할지니라.”
상속받을 아들이 없는 경우에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에게 기업이 넘어가던 전통을 깨고, 이제부터는 딸이 아들 다음으로 상속권의 우선 순위자로 지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조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전통사회 속에서 남자와 비교해서 완전히 무시당하던 여자들에게, 그것도 이미 죽은 사람의 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상한 조처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아주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보호해줄 남성이 없는 여성은 사회 최저 빈곤층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들의 이의 제기에는 이런 핵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들어가 살게 될 약속의 땅! 가나안! 그곳에 하나님께서 세우실 나라에는, 과연 여성이 설 수 있는 자리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여성의 경제권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는 남녀가 차별이 없는 나라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지도부가 모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관습법으로는 말도 안 되는 요구였습니다. 여성의 권리가 정당하게 인정받은 것은, 그때로부터 수천 년이 지나 현대에 이르러야 겨우 선거권, 상속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4천 년 전 고대 사회에서 이런 요구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답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 “슬로브핫의 딸들의 말이 옳도다.”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에는 아들이 없이 죽으면 딸이 유산을 상속받는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사람을 위한 율법! 어느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고 존중받는 삶을 보장해주는 율법!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막막한 가정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되어주는 율법! 여성의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수천 년 전에 이러한 일이 모세오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평등한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동체와 지도자였다는 점도 귀감이 됩니다.
2. 새로운 문제의 등장 (민 36:1∼13)
전례에 없었던 ‘여성 상속권’이 허용되자, 이스라엘 공동체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각 지파별’로 구분해서 분배했고, 각 지파는 또 그 안에서 ‘각 종족과 가족’을 따라 땅을 더 세분해서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분배된 땅은, 계속 ‘자기 자손’에게 물려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각 지파에게 나누어 준 땅의 경계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매매나 빚 청산 과정을 통해 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될 경우에도, 희년이 되면 무조건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는 것도 바로 각 지파의 땅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주어진 땅은 만일 그녀들이 다른 지파의 남자들에게 시집가면 자동으로 그 남편들의 소유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입니다. ‘므낫세 지파’에 속한 ‘수령’들은 바로 이런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것을 예견하고 이를 모세와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 제기해 왔습니다.(민 36:2b∼3)
하지만 이 난제 역시, 하나님께서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지파 수령들의 그런 말을 들으시자마자, 또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라고 맞장구쳐 주셨습니다. 민 36:5 →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
아까는 여자 상속권을 인정해 달라는 슬로브핫 딸들의 말도 옳다 하시더니, 이제는 그 여자 상속권을 인정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므낫세 지파 수령들의 말에 대해서도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주장에 하나님께는 확실한 해결책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해결책이란! 곧 슬로브핫의 딸들로 하여금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 만 시집가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 지파인 므낫세 지파에 속한 남자하고만 결혼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민 36:6∼7 →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만 시집갈지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비록 그녀들이 시집가서 그 땅이 남편의 이름으로 등기된다고 할지라도, 그 땅은 여전히 므낫세 지파에 속한 상태로 남게 되니까, 지파별로 구분된 땅의 경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례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도 계속 지켜야 할 “계명과 규례”로 삼도록 지시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규례는 슬로브핫의 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즉 그녀들이 배우자를 정함에 있어서 그 선택의 폭이 제한받게 된 것입니다. 다른 지파 남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확률적으로는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길임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들의 개인적 권리를 부분적으로 포기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마침내 성경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다섯 명 모두 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그녀들이 분배받았던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기업은, 그녀들이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종족 지파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민 36:12 →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남아 있었더라.” 즉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유익과 질서를 위하여,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했던 것입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그 속한 회원들 모두가 자기의 권리만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그 안에는 마찰과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개인의 권리는 공공의 이익과 상반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희생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주장이나 권리만 내세우는 대신, 공동의 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양보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교회는 굳건하게 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꿈마을엘림교회가 어느 누구 하나 소외되거나, 불이익을 당하거나, 무시 되는 일이 없이, 모두가 존중받고, 즐거움으로 섬길 수 있는 영적인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슬로브핫의 딸들은, 남자만 기업을 상속받는 전통은 하나님의 법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문제를 제기했습 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의 제도나 전통 중에서 개선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여성의 상속권이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모세오경이 기록된 지 4천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야 겨우 실현 되었습니다. 평등한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조직이 되기 위해, ‘공평하신 하나님’과 ‘열린공동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반면에, 공동체의 유익과 질서유지를 위해서 개인의 권리가 제한되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나눠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거의 끝내고 가나안 땅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무렵, 에돔 족속이 사는 땅을 통과하면 가나안 땅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에돔 땅을 통과해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백성들의 입에서는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원인은 에돔 족속의 배려심 없음에 있는 것 같았지만, 정작! 이 일로 인해 징계와 심판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이미 받은 은혜는 당연하고, 현실의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계를 받게 된 이유는, 그들 앞에 놓인 지름길인, 대로는 막히고, 멀고 험난한 길로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인해 불평하고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 21:4 →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여기서 ‘상하니라’의 뜻은 = 히브리어 ‘카차르’(rx'q)를 번역한 것인데, ‘짧다’라는 뜻입니다. 즉 ‘마음이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 마음에 여유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안목이 좁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안목이 좁아지니, 매사에 화가 나고,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크고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 것이나, 농사하지 않아도 매일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신 것이나,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 등등!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조그만 시련 앞에 이 모든 은혜를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5절 전반 절입니다. 민 21:5a →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말은 하나님이 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내서 고생시키고, 결국 이 광야에서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나님의 구원하심까지 원망합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님에게 “저에게 잘해주실 것이 아니라면, 왜 나를 낳았어요?” 이렇게 항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 중의 불효입니다. 혹 화가 나서 부모님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면! 오늘 당장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는 당연한 것이고, 지금 좀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고 원망과 불평을 앞세운다면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넓은 길 즉 대로를 주실 때도 있지만, 때론 좁은 길 험한 길을 걷도록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원망하면 불뱀에 물리는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짧아지지 말고, 저 멀리 뒤에서부터 ↔ 앞으로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긴 안목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은혜를 기억할 줄 알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미래를 보고, 오히려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은혜가 하찮게 여겨진다면, 영적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넓은 길, 직선도로로 가지 못하고, 좁은 길 험한 길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께 먹는 것을 두고도 불평합니다. 민 21:5b →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사실 광야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는 곳입니다.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30여 년간 광야 생활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결같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셨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서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고 마신 것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이 그럴만한 뭔가를 잘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만나를 ‘언약궤’ 안에 넣어 기념하도록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만나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그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경멸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는데, 그 사람이 그 음식을 먹으면서 “맛이 왜 이렇게 없냐고?” “입맛 버리겠다고” 말한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화가 나시겠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하찮게 여겨질 때! 우리는 그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만나’를 하찮은 음식으로 여겼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만나를 처음 먹을 때는 아주 큰 감동이었습니다. 그들의 소감은 이랬었습니다. 출 16:31 →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것이 민수기 전반부에 와서는 이렇게 변합니다. 민 11:8 →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 광야생활 막바지에 이르니 어떻게 됩니까? 만나가 ‘하찮은 음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민 21:5c →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시간이 지나니까 너무 익숙해지고, 이제는 그 은혜가 무가치하고, 도리어 경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주신 은혜가 하찮고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 우리에게 영적 위기가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혹은 그만한 수고를 해서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더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나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를 당연하고 하찮게 여기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는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서 물게 하셨습니다. 이 불뱀은 광야에 사는 맹독을 가진 뱀입니다. 물리면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기도 하시지만, 그에 합당치 않는 자들에게는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리자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뱀을 떠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뱀을 떠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까지도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라고 하셨고, 그 놋뱀을 보는 자들은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요?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믿음으로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믿지 못하고 쳐다보지 않는 자는 살지 못했습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놋뱀을 만드셔서 살리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우리를 살리실 분을 세워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3:14∼15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들었을 때,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살게 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셨는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 보면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살게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눈을 들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눈을 들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찮게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크고 편한 길을 걷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좁고 험하다고 할지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인 줄로 믿고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은혜를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신 사람들, 물질, 교회, 이 사회가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눔과 묵상
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당연히 여기고 현재의 부족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이, 꼭 우리가 부모님을 대하는 것과 닮아 있지는 않은지 나눠봅시다.
2.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람들, 물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마치 만나의 맛에 대한 평가가 꿀 섞은 과자 → 기름 섞은 과자 → 하찮은 음식으로 변한 것처럼, 낮아지고 엷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나눠봅시다.
3.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비록 좁고 험한 길이라 해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즐거움으로 걸을 수 있는 믿음의 마음을 다짐합시다.
①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믿고, 맡겨야 합니다. 레위 족속 중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가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이미 ‘미리암’이란 딸과 ‘아론’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아 학살법’이 공포된 후에 셋째로 남자아이가 태어났으니, 큰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여야 했으니 부모로서 도저히 못 할 짓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숨겨 기를 수도 없었습니다. 발각되기라도 하면 온 식구가 죽임을 당할 판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출 2:2∼3입니다. 출 2:2b∼3a →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었으니, 아마 가슴이 미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새로운 소망을 싹틔우고 계셨습니다. 갈대 상자는 인간 편에선 절망의 표현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소망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절망에 직면하면 모든 게 끝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소망의 문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로 절망을 느끼지만, 특히 자녀 문제 앞에서 한계와 절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부모도 죄인이고, 자녀도 죄인인데! 어찌 쉽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자식 내가 키운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식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못 하니까, 하나님이 해주세요!” 이렇게 자녀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 맡긴 자녀는! 다 복되게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맡기신 자녀라는 ‘청기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나면, 우리의 책임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청지기’란? 정의가 무엇입니까? → “주인(소유권자)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관리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종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종은 시키는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갈대 상자에 역청과 나뭇진을 발라 방수 처리를 한 후, 아기를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정성스럽게 작은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통해 그의 전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저는 강조합니다. “자녀를 위한 최고의 뒷바라지는 기도다!” 자녀 양육의 시작도, 마무리도 기도입니다! 공부시키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별의별 것을 다해도 ‘기도’만은 못합니다. 모든 것 다 해줘도, 기도를 빼먹으면 결국에는 뒤탈이 날 수 있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네! 모세의 부모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③ 하나님이 모세의 인생에 개입하셨습니다. 부모는 절망했지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갈대 상자’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난 것은 물론이고, 깜짝 놀랄 일들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출 2:5~6 →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이것을 성경의 기록으로 보니까 그렇지! 정말 있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치 각본을 짜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공주가 보니까 히브리 남자아이였지만, 어쩐지 측은하고 마음이 끌렸습니다. 공주에게는 치외법권이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남아 학살법’과 상관없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렸고, 그 아이의 이름을 모세 - ‘물에서 건져낸 자’ - 라고 지었습니다.
이때, 누나 ‘미리암’이 공주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제안합니다. “공주님! 유모를 구해드릴까요?” 아무리 공주라도 아이를 낳지 않았으니 젖을 줄 수는 없었겠죠! 이 대목을 보면서 문득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모세가 분유가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은혜였구나! 만일 공주가 “됐다~ 분유 먹이련다!” 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공주는 마리암의 제안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내 양자로 삼으리라 결심합니다. 공주는 소녀에게 유모를 구해 오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모인 ‘요게벳’이 모세를 안전하게 기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 2:8~9 →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공주는 아이를 ‘요게벳’에게 맡기면서 월급까지 주겠다고 했습니다. 명색이 애굽의 공주인데 조금 주었겠습니까? 아마 두둑하게 챙겨주었을 겁니다. 요게벳은! 자기 아들에게 젖 먹이면서, 월급까지 받은 전무후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할렐루야! 그로부터 젖뗄 때까지 요게벳은 아이를 품에 안고 기도했고, 비록 어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과 ‘여호와 하나님 경외의 신앙’을 심어주었습니다. 모세는 자라면서 애굽의 언어와 학문을 많이 배웠지만, 그럼에도 히브리인으로서 정체성과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이걸 보면! 어린 시절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기도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당장 무엇이 이뤄지지 않아도 인내하며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갈 6:9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아멘! 오늘 ‘어린이 주일’을 보내면서 여러분 각 가정에 ‘신앙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런 고백과 믿음을 가지고 모세를 양육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가 부모로부터 직접적으로 양육을 받은 것은! 젖을 떼기까지의 기간, 약 2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습니까? 히브리서에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① 거절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히 11:24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무엇을 거절했다고요? 애굽 공주 아들의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앞부분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성도 여러분! 장성한 믿음은 ‘분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계속 성장했을 때, 자신이 누리고 있는 ‘애굽의 왕자의 지위’와 ‘사회적 특권’이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왕의 진미를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혹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 해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소년들이었지만,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신앙적으로 합당치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장성하면 이렇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② 올바른 선택을 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히 11:25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선택의 능력은 ‘성숙’에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분별력이 없지만, 성장하면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구별할 줄 알고,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할 줄 압니다. 좀 더 성숙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이성적으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 앞에 직면한 문제를 판단하고 선택할 때, 자신의 욕심을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기준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가? 말씀에 합당한가?”를 먼저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왕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것을 일시적인 ‘죄악의 낙’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만약 인간적인 야망을 품은 사람이었다면,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고 왕권을 쥐기 위해 그의 백성들을 더욱 학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양육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은! 부모의 신앙적 영향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 상주심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히 11:26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눈앞에 보이는 애굽에서의 보장된 삶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 즉 고난을 더 큰 상급으로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삶의 목적은 현세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날, 그날에 받을 상급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양육하시기를 바랍니다. 거절할 때 거절할 줄 알고,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를 기뻐하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상급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로 키워서, 이 시대의 모세 같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가정(부부)의 ‘자녀관’은 무엇인지 나눠보고,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점에 대해 나눠봅시다.
(내 자녀 vs 하나님의 자녀 / 주인 vs 청지기)
2.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당장 무엇이 이뤄지지 않아도! 인내하며 계속 기도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모세가 성장 · 성숙한 증거로 나타난 ‘3가지 모습’에 대해서 나눠보고, 우리 자녀들도 이런 사람이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두 가지 위기란? 오늘날로 치면 첫째는 ‘평신도의 위기’이고, 둘째는 ‘목회자의 위기’입니다.
1. 교만한 마음이 들어간 자의 위기 (평신도의 위기)
‘평신도의 위기’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① 첫째, ‘고라’ 일당이 모세를 대항하여 반역했는데, 이는 시기심이 주된 동기였습니다. 반역의 주모자인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6장에 나타난 족보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 셋째 아들 ‘레위’를 낳았고 ⇨ 레위는 ‘고핫’을 낳았고 ⇨ 고핫은 두 아들 ‘아므람’과 ‘이스할’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므람은 ⇨ ‘아론’과 ‘모세’를 낳았고, 작은아들 이스할은 ⇨ ‘고라’를 낳았습니다. 여기서부터 모세와 고라의 계보가 갈라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고라 역시! 모세와 아론처럼 같은 레위 지파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친할아버지가 같은, 아주 가까운 핏줄입니다. 그리고 ‘고라’가 스스로를 살펴보니, 모세와 아론과 비교해서! 자신이 모자라거나 못난 점이 없습니다. 모세나 아론이 하는 일을 자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을 이끌도록 ‘지도자’로 삼으셨고,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들로 임명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라’가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게 된 원인입니다. ‘아니! 왜 아론의 가족만 제사장을 해? 우리도 레위 지파 사람이 아닌가? 왜 우리가 그들의 수종을 들어야 하는 거지?’ 이런 마음이 고개를 든 것입니다.
분명히 ‘시기’에서 시작된 마음이었지만 ‘고라’는 그럴싸한 이유로 다른 주제를 앞세웁니다. 그가 내건 표면적인 기치는 ‘평등’이었습니다. 민 16:3 → “그들이(고라 일당)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모세와 아론)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언뜻 들으면 맞는 말이고, 합리적인 주장처럼 들립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동일하게 선택받은 거룩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와 아론, 너희나 우리!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너희 둘이 백성들의 총회 앞에서 ‘스스로 높여’ 지도자 행세를 하니, 이것은 ‘분수에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시키고자 사명을 주실 때, 끝까지 사양하다가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모세의 지도자 자리와 아론의 제사장 자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책입니다.
물론, ①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수평적으로 동등한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에 ② 신앙공동체 안에 수직적인 질서를 세워, 지도자와 백성 간에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계급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영적 질서’를 위해 만드신 제도입니다.
‘고라’는 바로 이런 ‘영적 질서를 파괴하려는 장본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시기심’은 숨기고, 모두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꺾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에게 도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한 중대한 죄입니다. 우리는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하나, ‘권위’는 인정해야!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② 둘째, 무슨 일이 있어도 공동체 안에서 당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반역’을 꾸밀 때! 절대로 혼자서 하지 않습니다. 반역자는 꼭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당을 지어’ 모사를 꾸밉니다.
‘고라’는 ‘르우벤’ 자손들 중 ‘다단’과 ‘아비람’ ‘온’과 그리고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지휘관 250명과 함께 반역을 꾸몄습니다. 1~2절입니다. 민 16:1∼2 →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물론 반역을 주도하는 것이 제일 큰 악이지만, 그 반역에 당을 짓고 동조하는 것! 역시 씻을 수 없는 허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왜 이 반역에 가담했을까요? 그것은 르우벤 지파의 오래된 불만 때문입니다. 사실 ‘르우벤’은 ‘야곱’의 장남이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는 ‘자신들이 모든 형제보다 앞서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행군할 때 ‘유다’ 진에 밀려, 뒤따라가는 것이 늘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도, 장자였음에도 르우벤 지파는 여러 면에서 다른 지파들에게 밀렸습니다. 그래서 늘 셋째 아들 레위 가문인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불편한 심기에 고라가 불을 질렀고, 르우벤 자손들은 ‘이때다’ 싶어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라가 속해 있던 고핫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회막 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던 이웃이었기 때문에, 서로 만나 작당하기가 참 좋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① 우리는 영적 지도자와 신앙생활에서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있어도 기도로 태워 없애야 합니다. 불만을 안고 신앙생활 하면! 나만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불만을 없애 버리는 것이 가장 좋지만! 정 그럴 상황이 안되면!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그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② 신앙생활은 ‘누구와 함께 있고, 누구와 가까이하며,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먼저 깨달은 다윗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항상 감사하며 늘 긍정적인 사람을 가까이하십시오. 나 또한 감사의 사람! 긍정의 사람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2. 권위를 부여받은 자의 위기 (교역자의 위기)
▶ 지도자는 자기를 거스르는 자를 향하여 ‘영적 권위를 무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위기에 넘어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① 첫째,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4절입니다. 민 16:4 →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참으로 짧은 한 구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지도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위기 때 지도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엎드려 기도하는 일’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당한 문제에 개입하시도록 기도로 초청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완벽한 정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② 둘째, 끝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권고하며 설득해야 합니다. 사실 ‘고라’가 불만을 품은 것은! 모세와 아론과 그 자식들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 왜 자신들은 필요한 집기나 옮기는 허드렛일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은! 더 중한 일도, 더 사소한 일도 없습니다. 다 중요한 일이요, 다 거룩한 일입니다.
사람의 보기에는 작고 큰일이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같이 중요한 일입니다. 민 16:9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만약 고라 자손이 성막의 집기들을 옮겨주지 않으면 ‘아론’인들 제대로 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고라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점을, 모세 자신과 고라와의 관계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과 - 하나님, 고라 일당과 - 하나님의 관계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눈을 뜨게 하고, 또 기도해 줄 때, 문제는 녹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고라 일당을 심판하심으로 모세의 권위를 지켜주셨습니다.
① 주동자들인 고라 일당은 땅이 입을 열어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민 16:32∼33 →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그리고 동조자들이었던 250명의 족장들은 여호와의 불에 타 죽었습니다. 민 16:35 →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 이런 일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까? 고전 10:11 →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② 그런데 우리가 잘 살펴봐야 할, 또 하나의 일이 있습니다. 고라 일당의 멸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만으로는 고라 및 그의 자손들이 다 멸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6장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민 26:10∼11 →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고라의 아내와 아들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반역에 동조하지 않고, 그 집에서 나와 떠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혈연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긴 결과입니다. 후일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은! 성막이나 성전 문지기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또한 소제를 드릴 때 사용된 누룩 없는 떡을 굽는 일을 맡거나, 성전에서 찬송하는 찬양대와 지휘자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많은 시편을 지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고라 자손이 쓴 84편을 보면! 그들은 반역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고,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시 84:10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나눔과 묵상
1. 자신의 ‘욕망과 시기심’은 숨기고, 모두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꺾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고라의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나눠봅시다.
2. 영적 위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 평신도와 목회자에게 각기 2가지씩 주신 해법에 대해 나눠봅시다.
3. 혈연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긴 고라의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그들이 지어 부른 시 84:10에 대해 나눠봅시다.
오늘 본문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낸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와서, 가나안 땅에 대해서 그들이 본 바를 모세와 백성들에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보고 내용이 10:2로 갈렸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악평하고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보고, 믿음의 보고를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성들은 열 정탐꾼의 말을 신뢰했고 결국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믿음의 선포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음의 선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믿음에는 ‘그러나’가 없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모두가 모세와 백성들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민 13:25∼27 →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과연’ 가나안 땅은 비옥한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12명 모두가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과일을 들어 보였습니다. 이 보고에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고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2명 가운데 10명의 정탐꾼이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 13:28 →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가나안 땅은 ‘과연’ 좋은 땅이라고 했지만, 이어서 ‘그러나’가 붙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강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읍은 크고 견고해서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는 앞의 말을 180° 뒤집는 말입니다. 좋지만! ‘그림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열정탐꾼들의 입에서 나왔던 ‘과연’이라는 말이 ‘그러나’로 바뀐 까닭은 무엇일까요? 현실이 그렇기 때문입니까? 얼핏 생각하면 ‘그렇지!’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그러나’란 말이 나온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불신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러나’가 없습니다. ‘그러나’는 ⇨ ① 불신을 드러내는 말이요 ②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무시하는 말이요 ③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유도하는 말이요 ④ 이유와 변명을 대는 말입니다.
언어는 크게 ‘사실 언어’와 ‘감정 언어’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사실 언어’는 사실 그대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대로 말한 것 때문에,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감정 언어’는 긍정적이고 배려하는 말로, 상대방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줍니다. 자녀에게 “세상에서 네가 가장 소중한 아이란다.” 이렇게 말한다든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든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감정 언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힘과 용기를 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감정 언어’를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하나의 언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언어’입니다. 네! 성도는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말하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러나’를 입에 올린 열 명의 정탐꾼과, 그 말을 듣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불평한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화시키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성취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고 선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않습니다. 열 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한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가서 본 것은, 좀 과장은 있었지만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다고 보고 했는데, 사실 가나안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이고, 그들의 성은 견고하고 컸습니다. 특히 여리고 성은 대단한 성이었습니다. 난공불락의 견고한 요새입니다.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성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본 아낙 자손은 키가 장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자기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이 작아 보였다고 말합니다.
지금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보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황을 보고 그들 스스로 ‘못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 13:31 →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도 가나안 땅의 실상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민 14:9 →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족속들의 보호자가 그들을 떠난 것을 보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그들은 우리의 밥에 불과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좋아했다 낙심했다 하지 맙시다. 영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봅시다. 롬 8:24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언제나 믿음으로 담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렇게 믿음의 선포를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절망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민 14:8 →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과,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일찍이 주신 약속입니다. 출 3:17 →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 자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놀라운 기사와 이적으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그것으로 그 사람은 더 이상 믿음의 반열에 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광야에서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해 철저히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늘 담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믿음은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우리 성도들의 인생은! 믿음으로 개척해 나가고, 믿음으로 일구어 나가고, 믿음으로 승리하고, 믿음으로 창대해져야 합니다. 믿음의 선포를 하는 사람의 인생은! 그 선포, 그대로 됩니다. 불신의 선포, 부정적인 선포를 하는 사람의 인생도! 그 선포, 그대로 됩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이 불신의 말을 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민 14:2 →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네! 하나님은 그들이 말한 대로, 그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유명한 성경구절이 있죠! 민 14:28 →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들의 부정적인 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발을 디뎌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사실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실을 보지 않고 믿음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말이!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이고, 하나님의 손길도 움직이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은 눈으로 본 ‘객관적인 사실’을 신뢰하는 쪽입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 하는 쪽입니까? 서로 나눠봅시다.
2. ‘사실 언어’와 ‘감정 언어’ 그리고 ‘믿음의 언어’ 중에 당신에게 익숙하고 자주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고치고, 바꾸고, 새롭게 하기로 결심한 바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오늘 말씀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바램, 의심과 회의, 말씀에의 무지가 두 제자의 마음을 싸늘하게 식혔습니다. 마음이 차가워졌을 때,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 그들의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을 때 신앙이 회복되어, 오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 부활주일 아침에!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도 뜨거워지는 영적 부흥의 역사를 맛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제자와 예수님이 주막집에 들어갈 때, 이미 날은 저물고 해는 기울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은 그곳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종일 걸어서 피곤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캄캄한 밤과 피곤함이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뜨거운 마음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달려 올라갈 힘을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은 게 문제란 걸 아시길 바랍니다. 그럼! 마음이 뜨거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두 제자가 그들끼리만 걸었을 때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있었고 실망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되게 하셔야 가능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먼저 두 제자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실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눅 24:15∼16 →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동행하시는 주님께 그들은 자신들이 실망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심령이 뜨거워지려면!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슬픔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은혜의 수단, 은혜의 통로에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통로’에는 ⇨ ‘말씀’ ‘찬양’ ‘기도’ ‘금식’ ‘성찬’ ‘영적교제’ ‘선행’ 등이 있습니다.
지금 두 제자는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눅 24:27 →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리고 베푸시는 ‘성찬’을 받았습니다. 눅 24:30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렇습니다. 은혜의 통로 ‘2가지’에 접촉했습니다. 주님과 말씀의 교제를 했고, 또한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신앙적인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눈이 열리고, 마음의 뜨거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눅 24:30b∼31a →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네! 성찬을 받을 때 영적 눈이 뜨여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눅 24:32 →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고, 또한 배우기를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찬 받을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뜨거워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2. 있어야 할 자리,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눅 24:33 →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마음이 뜨거워지자마자! 가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출발한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요즘같이 가로등이 있는 것도 아니니 웬만하면 내일 올라가자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돌아가”라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① ‘회개’와 ② ‘돌이켜 행함’입니다. 이 둘은 사실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두 제자는!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진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이렇게 냉랭했던 심령이 성령충만한 뜨거운 상태로 변했을 때, 자신들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엠마오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그들이 있어야 할 곳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참 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이런 ‘깨달음’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돌이키는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두 제자는 그 밤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뜨거워진 마음은! 주막에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요?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행 1:4 →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은! 곧 ‘말씀’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말씀을 잊은 채 실망했던 두 제자는! 다시 ‘말씀’ 안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 회복은!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눅 22:61∼62 →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바른 신앙의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마리아와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화젯거리였습니다. 눅 24:33∼34 →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제자는 이들의 대화 속에 끼어들어,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서 간증했습니다. 눅 24:35 →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사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내려 가면서도 많은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한 채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셔서 실망스럽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실망의 입은 닫히고, 희망의 입이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불평이나 실망에 입이 열린 사람이 아니라, 소망과 축복에 입이 열린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입이 열려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믿음의 입이 열렸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망한 상태에서 소망을 가득 품은 마음으로 바뀐 모습, 엠마오로 내려가던 무거운 발걸음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뛰어 올라가는 힘찬 희망의 발걸음으로 바뀐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①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②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러면! ③ 여러분의 입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회복’입니다. 바라기는 기도하는 입도 열리고, 찬송하는 입도 열리고, 간증하는 입도 열리고, 전도하는 입도 열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뜨거울 때와 식었을 때, 신앙생활이 어떻게 달랐었는지 나눠봅시다.
2. 은혜의 통로에는 ‘말씀’ ‘성찬’ ‘찬양’ ‘기도’ ‘금식’ ‘영적교제’ ‘전도’ ‘선행’ 등이 있습니다. 당신 간과하고 있는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사순절 특별히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내며 가장 크게 은혜받은 예배나 기도회 등에 대해 나눠봅시다.
오늘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동안, 성도님들은 적어도 하루 한 끼 이상 금식하면서, 세상의 즐거움에서 잠시 물러나, 세상을 닮아가는 우리의 신앙을 말씀으로 치유하고, 나태했던 기도생활을 회복하고, 빗나갔던 우리의 삶을 바로 잡는 한 주간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빗나간 백성들의 기대!
2000년 전 오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게 할 자신들의 왕으로, 유대 나라를 회복할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하며 맞이했습니다.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아서 양탄자를 대신하고, 종려나무 가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힘차게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백성들은 목소리 높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마 21:9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기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 ‘호쉬아 나’(an: [v'y:)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옮겨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호쉬아’([v'y:)는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이고 + ‘나’(an:)는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겉보기엔 참 아름다운 신앙고백 같고, 간절함이 묻어 있는 부르짖음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안타깝게도 ‘세속적인 동기’ 때문에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 그래서 우의정 좌의정을 바랬던 제자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군중들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친 것은 ‘어서 우리를 로마의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그렇게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인생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백성들이 기대했던 ‘왕’은 ‘세속의 정치적인 왕’이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권세자로서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과 사역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과 영생’에 있으셨습니다. 결국, 빗나간 기대로 인해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외치는 사람들로 돌변하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성전 정화와 우리의 정화
이런 엇갈린 기대 속에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아가신 곳은 어디였습니까? ‘왕궁’이 아니라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시자마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전 정화’였습니다. 마 21:12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평소와 다르게 예수님은 과격한 행동으로 평온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대소동에 휩싸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거친 음성으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21:13 →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였는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눈에는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심각한 문제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흠이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먼저 제물을 검수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레위기 율법을 빌미로,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은 세속적인 이익을 탐하는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결탁했습니다. 대부분 집에서부터 가져온 제물은 퇴짜놓고, 상인들에게 구매한 제물만 합격시켜 줬습니다. 그러니 더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성전에서 파는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예루살렘에는 먼 디아스포라에서 순례 차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제물을 구매하려고 하면, 장사꾼들은 유대 돈이 아닌 화폐는 받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폭리를 취하며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에게 유대 돈으로 환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역기능적 구조 속에서 생긴 부정한 돈의 일부를 장사꾼들과 환전상으로부터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뒷돈으로 받아 챙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전 안에서 ‘딴 재미’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거룩한 성전에서 부패한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그 실제와 속은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성전 정화사건’ 속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살펴봐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바라보실 때, 너희들에겐 아무 문제 없다고 OK 하실까? 우리에게서는 그런 세속적이고 부패한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이에 대해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재미와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딴 재미’를 추구하고 있던 모습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장사꾼들의 의자와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너희들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주 극적인 장면이지만,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이런 부패한 종교지도자들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자기의 명예와 이익을 높이려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셨고, 그들이 앞장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 구린 냄새가 나는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속을 들여다보셔도 부끄러움이 없고, 오히려 “이만한 믿음의 사람을 내가 보지 못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 인생의 왕으로 들어오시길 원하시는 예수님
네!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완성하는 이 마지막 주간의 첫날에 ‘왕의 선포식’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왕의 대관식 장소인 예루살렘에 조용히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대관식의 주인으로서, 또한 경배받아야 할 최고의 왕으로서, 군중들의 환영 속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고, 또한 알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날 예루살렘 성에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입성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 각 개인의 인생 안에 왕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신앙생활에, 삶의 현장에,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 왕으로 입성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을 다시금 환영하고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들어가다’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0절과 12절입니다. 마 21:10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마 21:12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처럼! 성전에 들어가신 것처럼! 내 인생에도 들어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게 들어오셔야, 내가 살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밖에 계셔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문화에 익숙해지고, 사도신경을 줄줄이 외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구세주로 모셔야만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날 별 문제의식 없이, 혹은 이권에 약삭빠르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럭저럭 문제없이 살아가는 듯했어도, 빛이신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그분의 눈과 시각으로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썩어 가는 곳, 냄새나는 곳, 죽어있는 곳들을, 선명하게 바로 보게 되어야만 합니다. 무엇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암(癌)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질병은 자각 증상을 통하여 미리 알아채고 고칠 수가 있지만, 대개 암의 경우는 자각 증상을 느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치료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암은! 정기 검진과 조기 진단을 통해서 예방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병이나 무뎌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기 검진과 조기 진단을 통해서 예방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내 ‘이성의 눈’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들어오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포장되고 꾸며진 모습이 아닌, 자신의 본 모습과 본질을 볼 때야만, 비로소 치료자 되시는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 한 주간을 여러분의 ‘영적인 정기 검진’을 받는 기간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시며 왕으로 모셔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설령 자신의 썩어있는 곳, 굳어진 곳, 냄새나는 곳을 알았다 해도, 자신의 노력과 결심만으로는! 새롭게 하거나 정결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시각으로 나의 문제를 볼 때, 문제를 문제로 알 수 있고, 그분의 권세와 능력으로만, 나의 어두움과 불순종과 뿌리 깊은 죄의 습관들을 내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셔야,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쫓아내고 정결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능력의 예수님, 권세의 예수님, 어두움을 물리치는 생명과 빛 되신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왕으로 모신 자라야, 심령과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모하십시오. 그분을 환영하십시오. 그리고 왕으로 모셔 들이십시오. 진정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왕으로 모셔 들여, 인생의 고침과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주님의 눈으로 볼 때, 내 인생 속에서 쫓아내서 정화하고 깨끗게 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을 진정 당신의 왕으로 모셔 들였습니까? 예수님과 함께해도 불편하지 않을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3.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당신의 새로운 삶과 영혼을 위해 결심하고 실천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greatest commandment)과 ‘대 사명’(임무)(great commission)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큰 계명>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마 22:37∼40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어 <대 사명(임무)>은 마태복음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마 28:18∼20a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가장 큰 계명>과 <대 사명(임무)> 중 ‘두 가지 계명’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삼았는데, 이것의 본질을 살펴보면 영어 단어로는 ‘Service’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의 핵심은 ‘예배’라고 할 수 있는데, 예배를 영어로는 ‘Service’라고 합니다. 두 번째 계명인 이웃 사랑의 핵심은 ‘섬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섬김 역시 영어로는 ‘service’라고 합니다. 다만 소문자로 표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예배라는 Service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인 섬김 역시 service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 첫 번째 계명인 경천(敬天) ‘예배’(Service)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를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고 하면,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믿지 않는 친구가 여러분께 이렇게 물었다고 합시다. “너는 일요일마다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데, 예배가 뭐니? 찬송하고 기도하고, 목사님의 설교 듣고 헌금하고 오는 것을 말하니?”
이에 대하여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그러니까 예배를 시간과 공간, 혹은 어떤 틀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일(시간), 교회(공간), 예배형식(틀) 안에만 묶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행위, 그분을 미소 짓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는 나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과연 미소를 짓고 계실까요? 아니면, 그렇지 못해서 그런 삶을 살길 원해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실 수 있는 5가지 예배의 모습을 이렇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①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가장 사랑할 때 미소 지으십니다. ▷ 마 22:37∼38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②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때 미소 지으십니다. ▷ 히 11:6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③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미소 지으십니다. ▷ 창 6:22 → “노아가 그와 같이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해보다 순종이 우선입니다. 순종은 이해하게 됩니다.
④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미소 지으십니다. ▷ 시 69:30∼31 →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⑤ 하나님은 우리의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 섬길 때 미소 지으십니다. ▷ 마 25:21 →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보를 접든, 전도지를 나누어 주든, 교회 안팎을 쓸고 닦든, 찬양대나 교사로 섬기든, 차량 운전을 하고, 주차 안내를 하든, 화단을 가꾸고 성전 안팎을 장식하든!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은 여러분이 예배를 돕는, Service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몸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섬김이 있습니다. 바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고후 1:20b →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을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난 특별한 달란트도 은사도 없는 너무 평범한 사람이라, 교회에서 할 만한 일이 없는데요.”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아뇨! 어떤 분이든 섬길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얼마 전부터 자발적으로 토요일마다, 화장실 청소, 계단 청소, 유아실을 정리 정돈하시는 권사님들이 생기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간단하게 보면 그저 청소하는 일이지만, 이런 일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 Service이며, 또한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도 service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예배자가 되기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받으면 심령은 건강해지고, 교회는 올바르게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2. 두 번째 계명인 애인(愛人)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를 두 글자로 줄이면 뭐가 될까요? 그것을 저는 ‘섬김’(봉사)이라고 생각합니다. 섬김이란? ⇨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입니다. 사실 사람마다 많은 상처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찾아 섬겨주는 것을 일러 ‘사역’이라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역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섬기다(service)란 의미인데, 이 말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집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사역자이며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과 이웃의 필요를 따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3가지 방향’으로 섬김의 사역을 해야 합니다.
①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Service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각종 은사를 사용하여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② 그 다음은, 믿는 성도들을 위한 섬김 사역입니다. 히 6:10 →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새번역) 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과 섬김을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③ 나아가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마 5:13∼14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는 교회와 성도만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까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 3가지 방향으로 1가지씩 작은 일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 주님을 향해 → 예배 한 번 더 드리기, 성경 0장 읽기, 가정예배, 전도하기 성도를 향해 → 안부 문자보내기, 격려 전화나 심방 하기, 밥 사주기, 기도해주기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해 → 필요한 것 채워주기, 작은 선물하기, 차 마시기
이와 함께 우리는 ‘3가지 영역’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섬김은 이 3가지를 포함해야 합니다.
① 사람들의 ‘육신의 필요’를 위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마 25:35∼36,40 마 10:42)
② 사람들의 ‘감정적인 필요’를 향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살전 5:14)
③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향한 사역을 해야 합니다. (고후 5:18)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좌우명’은 이것이었습니다.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자. 모든 수단,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어떠한 장소에서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상대가 누구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오랫동안 하자.” 바라기는 이것이 또한 우리의 좌우명이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섬김 사역을 사명으로 알고 감당할 때 우리를 통해 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② 성도들이 기뻐하고 ③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섬기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알버트 슈바이처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섬겨본 사람은 그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 다 맛보셨을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대단한 일을 해야 사명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사명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 기쁨과 행복을 찾아 나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마 22:37∼40)과 ‘대 사명’(명령, 마 28:18∼20a)의 말씀을 암송 하거나 성경을 펼쳐 읽어봅시다.
2. 가장 큰 계명을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요약했습니다. 이 두 영역의 섬김(Service)에서 ‘내가 꼭 실천 하며 살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각각 말해 봅시다.
3. 인간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3가지 영역의 필요를 채우는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아내 나 남편, 내 자녀와 부모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섬김 영역을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나눠봅시다.
우리는 지금 인류를 위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서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그 ‘제자도’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세속적인 영광을 내려놓을 마음을 가져야!
130여 년 전인 개화기에, 이 땅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고, 처음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두 가지 동기’ 있었습니다. 하나는 ① 개화를 통한 ‘사회변혁’과 ‘자기발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② 그저 순수하게 예수 믿고 구원받기 위한 ‘복음적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사람들의 예수 믿는 동기가 달라졌습니다. 바로 ‘축복의 동기’입니다. 여기서부터 복음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예수 잘 믿어도 세상적인 축복은 기대하지 말아라!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를 믿어 복 받고, 건강하기 위해서만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병이 고쳐지지 않고, 부자 되지 못하고, 출세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믿음을 버릴 수 있고 예수를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가 메시아다. 이분을 통해서 우리가 로마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예수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경험하면서, 이런 기대는 더욱더 커졌을 것입니다. 와우! 이런 기적을 행하는 분이시라면, 우리의 소원도 만족시켜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세 번째 ‘수난고지’를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거듭 당신은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참 당혹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제자 야고보·요한 형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을 하면서 이렇게 청탁합니다. 마 20:21 →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어머니도 예수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면, 틀림없이 정권을 잡고 왕의 자리에 오르시게 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서열 1위, 2위의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기적인 치맛바람을 바라보는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해서 분히 여깁니다. 마 20:24 →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한마디로 너희들이 좌의정 우의정 다 해 먹으면 우린 뭐 하라는 거냐? 이런 것이죠! 이것은 분명히 예수를 따르는 동기가 변질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예수 믿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나 역시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세속적 동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요청 앞에서, 오히려 세속적인 영광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0:26b → “너희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단·마귀는 성도들이 교회와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달콤한 목소리로 십자가를 부인하고 헛된 영광을 구하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4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왜냐하면 헛된 영광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헛된 영광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 20:27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의 이 말씀을 따라,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섬김의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마 20:28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은! 결코 ‘지배의 길’이 아니라 ‘섬김의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자가 되었어도,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지배의 욕심’을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배의 욕구’는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가장 강렬한 욕구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위협하는 밑바탕에는, 언제나 이런 권력 욕구, 지배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정생활의 갈등! 그러니까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등 모든 갈등 속에는 “누가 지배자냐? 누가 다스리느냐?” 하는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갈등, 심지어 교회 생활 속에서도 이런 갈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별히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유교의 역기능적인 요소인, 관계에서 계급화·서열화하려는 의식과 +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 겹쳐져 서 우리 사회는 좀 더 수직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아예 지위나 서열을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공동체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지위와 계급, 서열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 지위와 계급, 서열은 ‘섬김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만은, 계급의식을 극복하고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크리스천 리더십’과 vs ‘세속적인 리더십’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오늘 본문에 날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세속적인 리더십의 특징’입니다. 마 20:25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 ‘세속적 리더십의 특징’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있는데 “주관한다, 권세를 부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절에 보시면 ‘크리스천 리더십의 차별성’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20:26∼27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네! 주님의 제자라면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게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섬길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마음을 갖길 요청하십니다.
사람에게는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① 첫째 생일은! “우리의 몸, 육체가 태어난 날”이고 ② 둘째 생일은!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알게 된 날”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육체의 생일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섬길 마음을 품는 것!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마음인 것을 믿고, 그래! 내가 주님의 제자로서 ‘섬김의 삶을 실천하리라’는 마음을 품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주님으로 인해 고난이 온다면,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마지막 마음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고난’이라도 기꺼이 받겠다는 각오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섬김은 고난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난만 당하다 그냥 끝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후에 받을 영광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23절 후반부를 보겠습니다. 마 20:23b →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너희들이 고난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해 섬기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날에 ‘상급과 영광’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신앙 선배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에너지는, 바로 고난 저편에 예비하신 ‘영광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지금 당장 그 영광이 내게 오지 않아도 상관없었습니다. 눈물과 희생, 섬김, 내 동기의 순수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으로 나를 축복하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고난 저편의 영광을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롬 8:18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고, 구원이시라고 확실하게 믿는다면, 아직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에게 진지하게 여러분의 믿음을 드러내시길 바랍니다.
그런 신앙고백이나 전도 때문에 받을 수도 있는 수모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핍박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쉽게 타협하고,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 그 누구도 감동할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한 사람, 그리고 그 대가를 지불 하리라고 마음먹고 사는 사람들을 보고 감동하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런 삶만이 그들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메시지는 오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마 20:28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 성도들은 불신자들이 가는 길과는 달리! 살아가는 가치가 달라야 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불신자는 부귀영화와 향락과 땅에서의 만족을 위해 살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천국에서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 그 정신! 그 마음! 가지고 살아,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높여주시고 영광되게 하시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에게도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변질됐거나 타락한 점은 없는지 살펴보고 나눠봅시다.
2. 섬김의 삶으로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된, 이 시대의 주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 나눠봅시다.
3. 신앙 선배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바로 고난 저편에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광 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주는 힘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인간은 누구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용서를 받기도 해야 하고, 용서를 베풀기도 해야 합니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참된 회개가 없이는 용서도 치유도 불가능하단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회개는 두 가지를 충족해야 합니다. → ① 첫째,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② 둘째, 내가 지은 죄로 인해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내가 잘못했다’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되고, 사람에게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도 해야 하고, 사람에게도 해야, 완전한 회개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자와 같이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구하지 않고’ ‘죄’에 대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문제입니다. → ① 국가적으로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 어린 ‘사죄’가 없는 것이고요 ② 사회적으로는, 학교폭력(학폭) 가해자의 ‘용서’를 구함이 없는 것입니다.
가해 국가나 개인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하고, 피해 국가나 개인은 그 ‘사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면! 깨어진 관계는 회복되고, 마음까지 치유되어 샬롬의 새 세계를 펼쳐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혹 이 자리에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구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어서 속히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서 심령의 평안과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용서’를 구하는데도 용서해 주기를 거절하고 마음을 닫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어서 속히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용서’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11:25 →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옥 가야 마땅할 우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은혜 입은 자로서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용서해 주고!’ ‘용서받고!’ 이를 통해, 완전한 치유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럼, 용서는 어디까지?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그리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대답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 18:22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은 산술적으로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일에 횟수의 제한을 두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마음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이나 기준에 상관없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받은 용서가 취소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으로 6,000일, 즉 16년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니 160,000년을 일하고 한 푼도 쓰지 않아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빚진 자가 갚지 못하자, 임금이 뭐라고 말합니까? 마 18:25b →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종이 말합니다. 마 18:26 →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임금의 마음을 달래보고자 하는 종의 간절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임금이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마 18:27 →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여기 탕감했다는 말은, 빚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삶은 도저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그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엡 2:4) 이것이 바로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가 ‘아무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은혜중의 은혜요, 용서 중의 용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으로 인해 용서받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상대를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보면, 용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엡 4:32 →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때때로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기 마음속에 기준을 정해 놓고 상대방을 용서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선을 정해 놓고 여기까지는 용서하고, 그다음은 ‘절대 안 된다’라는 기준은 참된 용서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한없는 용서를 생각하면서 제한 없는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용서의 사람 요셉을 본받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를 실천한 위대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으라면 바로 ‘요셉’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아픔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빨을 갈 일입니다. 평생을 복수로 채워도 다 채우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꿈 이야기를 하고, 잘난 체했어도! 어떻게 어린 동생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에 처넣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동생을 꺼내주는가 싶더니 노예상에게 돈을 받고 팔아먹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었지만,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창 45:5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팔려 온 자’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임을 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팔려 온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계획이 있어 나를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팔려 온 자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 손해를 끼친 사람조차,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45:7∼8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비록 자신을 팔아먹은 용서하지 못할 형들이었지만, 오히려 생명을 살리고 후손을 이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요셉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처럼 ‘사명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아픔과 상처들이 아직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이제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았습니다.
더는 미움과 분노와 증오로 인해 지옥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이제 용서를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시도하십시오. 더는 과거의 얼룩진 상처를 보지 마시고, 그 과거의 아픔과 상처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아드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과 사명을 바라보며 미래를 향해 전진하십시오.
용서는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출발점입니다. 용서는 새로운 희망의 씨앗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들의 아픔과 상처를 감싸주시고 치료해 주시십니다. 그 안에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의 응어리가 영육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경험한 바가 있다면 나눠보시고, 믿음 안에서 푸는 방법인 용서와 회개에 대하여 나눠봅시다.
2. 용서의 사람 요셉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누가 먼저 풀고, 누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할 사람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3. 당신이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한 죄, 풀어야 할 인간관계, 풀어야 할 마음의 상처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속히 해결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십시오.
제목: 공평하신 하나님! (민 27:1∼11)
1. 슬로브핫의 딸들의 문제 제기
오늘의 사건은 민수기 26장에 기록된 제2차 인구조사가 막 끝났을 때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게 될 때, 그 분배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땅 분배가 현실화할 즈음에 특별한 여성 5명이 등장합니다. 슬로브핫이란 사람의 다섯 딸들입니다.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다입니다.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처음 들어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7장 1절에서 11절까지와, 36장 전체에 걸쳐 이 여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 까닭은! 이 다섯 딸의 아버지인 슬로브핫에겐 아들은 없고 딸만 다섯이 있었는데, 그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딸에게는 아무런 상속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법적으로만 따진다면 슬로브핫에게 할당된 기업은, 자연히 그에게 가장 가까운 다른 친족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슬로브핫의 딸들” 다섯 명이 모세와 이스라엘의 원로들 앞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즉, 자기 아버지 슬로브핫이 ‘아들 없이 죽은 관계’로, 자기네 가문이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분배받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민 27:3∼4 →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자기 아버지 슬로보핫 역시 가나안 땅의 기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또한 자손에게 물려 줄 권리가 있었는데, 단지 아들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 권리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딸들은 이 문제를 모세 앞에 직접 풀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여자의 이름으로 상속권을 주장하는 것도 그렇지만, 여자들이 모세에게 나와서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한 것 자체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전통으로 볼 때, 아주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가 그런 사연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다”고 그들을 지지해 주셨습니다. 민 27:5∼7 →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나아가서 슬로브핫에게 할당된 기업을 그의 딸들에게 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새로운 ‘판례’로 삼아서, 앞으로도 계속 적용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민 27:8∼11 →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딸에게 돌릴 것이요, 딸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그의 아버지의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받게 할지니라 하고, 나 여호와가 너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규례가 되게 할지니라.”
상속받을 아들이 없는 경우에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에게 기업이 넘어가던 전통을 깨고, 이제부터는 딸이 아들 다음으로 상속권의 우선 순위자로 지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조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전통사회 속에서 남자와 비교해서 완전히 무시당하던 여자들에게, 그것도 이미 죽은 사람의 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상한 조처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아주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보호해줄 남성이 없는 여성은 사회 최저 빈곤층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들의 이의 제기에는 이런 핵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들어가 살게 될 약속의 땅! 가나안! 그곳에 하나님께서 세우실 나라에는, 과연 여성이 설 수 있는 자리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여성의 경제권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는 남녀가 차별이 없는 나라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지도부가 모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관습법으로는 말도 안 되는 요구였습니다. 여성의 권리가 정당하게 인정받은 것은, 그때로부터 수천 년이 지나 현대에 이르러야 겨우 선거권, 상속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4천 년 전 고대 사회에서 이런 요구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답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 “슬로브핫의 딸들의 말이 옳도다.”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에는 아들이 없이 죽으면 딸이 유산을 상속받는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사람을 위한 율법! 어느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고 존중받는 삶을 보장해주는 율법!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막막한 가정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되어주는 율법! 여성의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수천 년 전에 이러한 일이 모세오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평등한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동체와 지도자였다는 점도 귀감이 됩니다.
2. 새로운 문제의 등장 (민 36:1∼13)
전례에 없었던 ‘여성 상속권’이 허용되자, 이스라엘 공동체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각 지파별’로 구분해서 분배했고, 각 지파는 또 그 안에서 ‘각 종족과 가족’을 따라 땅을 더 세분해서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분배된 땅은, 계속 ‘자기 자손’에게 물려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각 지파에게 나누어 준 땅의 경계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매매나 빚 청산 과정을 통해 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될 경우에도, 희년이 되면 무조건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는 것도 바로 각 지파의 땅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주어진 땅은 만일 그녀들이 다른 지파의 남자들에게 시집가면 자동으로 그 남편들의 소유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입니다. ‘므낫세 지파’에 속한 ‘수령’들은 바로 이런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것을 예견하고 이를 모세와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 제기해 왔습니다.(민 36:2b∼3)
하지만 이 난제 역시, 하나님께서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지파 수령들의 그런 말을 들으시자마자, 또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라고 맞장구쳐 주셨습니다. 민 36:5 →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
아까는 여자 상속권을 인정해 달라는 슬로브핫 딸들의 말도 옳다 하시더니, 이제는 그 여자 상속권을 인정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므낫세 지파 수령들의 말에 대해서도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주장에 하나님께는 확실한 해결책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해결책이란! 곧 슬로브핫의 딸들로 하여금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 만 시집가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 지파인 므낫세 지파에 속한 남자하고만 결혼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민 36:6∼7 →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만 시집갈지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비록 그녀들이 시집가서 그 땅이 남편의 이름으로 등기된다고 할지라도, 그 땅은 여전히 므낫세 지파에 속한 상태로 남게 되니까, 지파별로 구분된 땅의 경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례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도 계속 지켜야 할 “계명과 규례”로 삼도록 지시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규례는 슬로브핫의 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즉 그녀들이 배우자를 정함에 있어서 그 선택의 폭이 제한받게 된 것입니다. 다른 지파 남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확률적으로는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길임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들의 개인적 권리를 부분적으로 포기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마침내 성경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다섯 명 모두 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그녀들이 분배받았던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기업은, 그녀들이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종족 지파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민 36:12 →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남아 있었더라.” 즉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유익과 질서를 위하여,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했던 것입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그 속한 회원들 모두가 자기의 권리만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그 안에는 마찰과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개인의 권리는 공공의 이익과 상반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희생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주장이나 권리만 내세우는 대신, 공동의 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양보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교회는 굳건하게 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꿈마을엘림교회가 어느 누구 하나 소외되거나, 불이익을 당하거나, 무시 되는 일이 없이, 모두가 존중받고, 즐거움으로 섬길 수 있는 영적인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슬로브핫의 딸들은, 남자만 기업을 상속받는 전통은 하나님의 법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문제를 제기했습 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의 제도나 전통 중에서 개선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여성의 상속권이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모세오경이 기록된 지 4천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야 겨우 실현 되었습니다. 평등한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조직이 되기 위해, ‘공평하신 하나님’과 ‘열린공동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반면에, 공동체의 유익과 질서유지를 위해서 개인의 권리가 제한되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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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KB제목: 은혜가 하찮게 여겨지면! (민 21:4∼9)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거의 끝내고 가나안 땅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무렵, 에돔 족속이 사는 땅을 통과하면 가나안 땅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에돔 땅을 통과해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백성들의 입에서는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원인은 에돔 족속의 배려심 없음에 있는 것 같았지만, 정작! 이 일로 인해 징계와 심판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이미 받은 은혜는 당연하고, 현실의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계를 받게 된 이유는, 그들 앞에 놓인 지름길인, 대로는 막히고, 멀고 험난한 길로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인해 불평하고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 21:4 →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여기서 ‘상하니라’의 뜻은 = 히브리어 ‘카차르’(rx'q)를 번역한 것인데, ‘짧다’라는 뜻입니다. 즉 ‘마음이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 마음에 여유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안목이 좁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안목이 좁아지니, 매사에 화가 나고,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크고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 것이나, 농사하지 않아도 매일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신 것이나,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 등등!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조그만 시련 앞에 이 모든 은혜를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5절 전반 절입니다. 민 21:5a →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말은 하나님이 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내서 고생시키고, 결국 이 광야에서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나님의 구원하심까지 원망합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님에게 “저에게 잘해주실 것이 아니라면, 왜 나를 낳았어요?” 이렇게 항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 중의 불효입니다. 혹 화가 나서 부모님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면! 오늘 당장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는 당연한 것이고, 지금 좀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고 원망과 불평을 앞세운다면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넓은 길 즉 대로를 주실 때도 있지만, 때론 좁은 길 험한 길을 걷도록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원망하면 불뱀에 물리는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짧아지지 말고, 저 멀리 뒤에서부터 ↔ 앞으로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긴 안목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은혜를 기억할 줄 알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미래를 보고, 오히려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은혜가 하찮게 여겨진다면, 영적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넓은 길, 직선도로로 가지 못하고, 좁은 길 험한 길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께 먹는 것을 두고도 불평합니다. 민 21:5b →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사실 광야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는 곳입니다.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30여 년간 광야 생활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결같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셨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서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고 마신 것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이 그럴만한 뭔가를 잘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만나를 ‘언약궤’ 안에 넣어 기념하도록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만나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그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경멸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는데, 그 사람이 그 음식을 먹으면서 “맛이 왜 이렇게 없냐고?” “입맛 버리겠다고” 말한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화가 나시겠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하찮게 여겨질 때! 우리는 그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만나’를 하찮은 음식으로 여겼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만나를 처음 먹을 때는 아주 큰 감동이었습니다. 그들의 소감은 이랬었습니다. 출 16:31 →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것이 민수기 전반부에 와서는 이렇게 변합니다. 민 11:8 →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 광야생활 막바지에 이르니 어떻게 됩니까? 만나가 ‘하찮은 음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민 21:5c →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시간이 지나니까 너무 익숙해지고, 이제는 그 은혜가 무가치하고, 도리어 경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주신 은혜가 하찮고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 우리에게 영적 위기가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혹은 그만한 수고를 해서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더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나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를 당연하고 하찮게 여기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는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서 물게 하셨습니다. 이 불뱀은 광야에 사는 맹독을 가진 뱀입니다. 물리면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기도 하시지만, 그에 합당치 않는 자들에게는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리자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뱀을 떠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뱀을 떠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까지도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라고 하셨고, 그 놋뱀을 보는 자들은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요?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믿음으로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믿지 못하고 쳐다보지 않는 자는 살지 못했습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놋뱀을 만드셔서 살리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우리를 살리실 분을 세워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3:14∼15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들었을 때,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살게 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셨는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 보면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살게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눈을 들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눈을 들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찮게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크고 편한 길을 걷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좁고 험하다고 할지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인 줄로 믿고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은혜를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신 사람들, 물질, 교회, 이 사회가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눔과 묵상
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당연히 여기고 현재의 부족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이, 꼭 우리가 부모님을 대하는 것과 닮아 있지는 않은지 나눠봅시다.
2.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람들, 물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마치 만나의 맛에 대한 평가가 꿀 섞은 과자 → 기름 섞은 과자 → 하찮은 음식으로 변한 것처럼, 낮아지고 엷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나눠봅시다.
3.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비록 좁고 험한 길이라 해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즐거움으로 걸을 수 있는 믿음의 마음을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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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KB제목: 모세와 같은 자녀로! (출 2:1∼10, 히 11:23∼26)
1. 모세와 같은 자녀로 길러내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과 믿음은 무엇입니까?
①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믿고, 맡겨야 합니다. 레위 족속 중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가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이미 ‘미리암’이란 딸과 ‘아론’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아 학살법’이 공포된 후에 셋째로 남자아이가 태어났으니, 큰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여야 했으니 부모로서 도저히 못 할 짓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숨겨 기를 수도 없었습니다. 발각되기라도 하면 온 식구가 죽임을 당할 판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출 2:2∼3입니다. 출 2:2b∼3a →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었으니, 아마 가슴이 미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새로운 소망을 싹틔우고 계셨습니다. 갈대 상자는 인간 편에선 절망의 표현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소망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절망에 직면하면 모든 게 끝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소망의 문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로 절망을 느끼지만, 특히 자녀 문제 앞에서 한계와 절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부모도 죄인이고, 자녀도 죄인인데! 어찌 쉽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자식 내가 키운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식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못 하니까, 하나님이 해주세요!” 이렇게 자녀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 맡긴 자녀는! 다 복되게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맡기신 자녀라는 ‘청기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나면, 우리의 책임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청지기’란? 정의가 무엇입니까? → “주인(소유권자)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관리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종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종은 시키는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갈대 상자에 역청과 나뭇진을 발라 방수 처리를 한 후, 아기를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정성스럽게 작은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통해 그의 전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저는 강조합니다. “자녀를 위한 최고의 뒷바라지는 기도다!” 자녀 양육의 시작도, 마무리도 기도입니다! 공부시키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별의별 것을 다해도 ‘기도’만은 못합니다. 모든 것 다 해줘도, 기도를 빼먹으면 결국에는 뒤탈이 날 수 있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네! 모세의 부모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③ 하나님이 모세의 인생에 개입하셨습니다. 부모는 절망했지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갈대 상자’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난 것은 물론이고, 깜짝 놀랄 일들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출 2:5~6 →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이것을 성경의 기록으로 보니까 그렇지! 정말 있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치 각본을 짜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공주가 보니까 히브리 남자아이였지만, 어쩐지 측은하고 마음이 끌렸습니다. 공주에게는 치외법권이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남아 학살법’과 상관없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렸고, 그 아이의 이름을 모세 - ‘물에서 건져낸 자’ - 라고 지었습니다.
이때, 누나 ‘미리암’이 공주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제안합니다. “공주님! 유모를 구해드릴까요?” 아무리 공주라도 아이를 낳지 않았으니 젖을 줄 수는 없었겠죠! 이 대목을 보면서 문득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모세가 분유가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은혜였구나! 만일 공주가 “됐다~ 분유 먹이련다!” 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공주는 마리암의 제안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내 양자로 삼으리라 결심합니다. 공주는 소녀에게 유모를 구해 오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모인 ‘요게벳’이 모세를 안전하게 기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 2:8~9 →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공주는 아이를 ‘요게벳’에게 맡기면서 월급까지 주겠다고 했습니다. 명색이 애굽의 공주인데 조금 주었겠습니까? 아마 두둑하게 챙겨주었을 겁니다. 요게벳은! 자기 아들에게 젖 먹이면서, 월급까지 받은 전무후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할렐루야! 그로부터 젖뗄 때까지 요게벳은 아이를 품에 안고 기도했고, 비록 어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과 ‘여호와 하나님 경외의 신앙’을 심어주었습니다. 모세는 자라면서 애굽의 언어와 학문을 많이 배웠지만, 그럼에도 히브리인으로서 정체성과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이걸 보면! 어린 시절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기도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당장 무엇이 이뤄지지 않아도 인내하며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갈 6:9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아멘! 오늘 ‘어린이 주일’을 보내면서 여러분 각 가정에 ‘신앙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런 고백과 믿음을 가지고 모세를 양육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가 부모로부터 직접적으로 양육을 받은 것은! 젖을 떼기까지의 기간, 약 2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습니까? 히브리서에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① 거절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히 11:24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무엇을 거절했다고요? 애굽 공주 아들의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앞부분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성도 여러분! 장성한 믿음은 ‘분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계속 성장했을 때, 자신이 누리고 있는 ‘애굽의 왕자의 지위’와 ‘사회적 특권’이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왕의 진미를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혹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 해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소년들이었지만,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신앙적으로 합당치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장성하면 이렇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② 올바른 선택을 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히 11:25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선택의 능력은 ‘성숙’에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분별력이 없지만, 성장하면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구별할 줄 알고,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할 줄 압니다. 좀 더 성숙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이성적으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 앞에 직면한 문제를 판단하고 선택할 때, 자신의 욕심을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기준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가? 말씀에 합당한가?”를 먼저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왕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것을 일시적인 ‘죄악의 낙’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만약 인간적인 야망을 품은 사람이었다면,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고 왕권을 쥐기 위해 그의 백성들을 더욱 학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양육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은! 부모의 신앙적 영향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 상주심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히 11:26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눈앞에 보이는 애굽에서의 보장된 삶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 즉 고난을 더 큰 상급으로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삶의 목적은 현세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날, 그날에 받을 상급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양육하시기를 바랍니다. 거절할 때 거절할 줄 알고,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를 기뻐하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상급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로 키워서, 이 시대의 모세 같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가정(부부)의 ‘자녀관’은 무엇인지 나눠보고,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점에 대해 나눠봅시다.
(내 자녀 vs 하나님의 자녀 / 주인 vs 청지기)
2.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당장 무엇이 이뤄지지 않아도! 인내하며 계속 기도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모세가 성장 · 성숙한 증거로 나타난 ‘3가지 모습’에 대해서 나눠보고, 우리 자녀들도 이런 사람이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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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KB제목: 두 가지 위기에서 넘어지지 않기! (민 16:16∼35)
두 가지 위기란? 오늘날로 치면 첫째는 ‘평신도의 위기’이고, 둘째는 ‘목회자의 위기’입니다.
1. 교만한 마음이 들어간 자의 위기 (평신도의 위기)
‘평신도의 위기’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① 첫째, ‘고라’ 일당이 모세를 대항하여 반역했는데, 이는 시기심이 주된 동기였습니다. 반역의 주모자인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6장에 나타난 족보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 셋째 아들 ‘레위’를 낳았고 ⇨ 레위는 ‘고핫’을 낳았고 ⇨ 고핫은 두 아들 ‘아므람’과 ‘이스할’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므람은 ⇨ ‘아론’과 ‘모세’를 낳았고, 작은아들 이스할은 ⇨ ‘고라’를 낳았습니다. 여기서부터 모세와 고라의 계보가 갈라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고라 역시! 모세와 아론처럼 같은 레위 지파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친할아버지가 같은, 아주 가까운 핏줄입니다. 그리고 ‘고라’가 스스로를 살펴보니, 모세와 아론과 비교해서! 자신이 모자라거나 못난 점이 없습니다. 모세나 아론이 하는 일을 자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을 이끌도록 ‘지도자’로 삼으셨고,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들로 임명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라’가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게 된 원인입니다. ‘아니! 왜 아론의 가족만 제사장을 해? 우리도 레위 지파 사람이 아닌가? 왜 우리가 그들의 수종을 들어야 하는 거지?’ 이런 마음이 고개를 든 것입니다.
분명히 ‘시기’에서 시작된 마음이었지만 ‘고라’는 그럴싸한 이유로 다른 주제를 앞세웁니다. 그가 내건 표면적인 기치는 ‘평등’이었습니다. 민 16:3 → “그들이(고라 일당)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모세와 아론)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언뜻 들으면 맞는 말이고, 합리적인 주장처럼 들립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동일하게 선택받은 거룩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와 아론, 너희나 우리!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너희 둘이 백성들의 총회 앞에서 ‘스스로 높여’ 지도자 행세를 하니, 이것은 ‘분수에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시키고자 사명을 주실 때, 끝까지 사양하다가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모세의 지도자 자리와 아론의 제사장 자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책입니다.
물론, ①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수평적으로 동등한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에 ② 신앙공동체 안에 수직적인 질서를 세워, 지도자와 백성 간에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계급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영적 질서’를 위해 만드신 제도입니다.
‘고라’는 바로 이런 ‘영적 질서를 파괴하려는 장본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시기심’은 숨기고, 모두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꺾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에게 도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한 중대한 죄입니다. 우리는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하나, ‘권위’는 인정해야!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② 둘째, 무슨 일이 있어도 공동체 안에서 당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반역’을 꾸밀 때! 절대로 혼자서 하지 않습니다. 반역자는 꼭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당을 지어’ 모사를 꾸밉니다.
‘고라’는 ‘르우벤’ 자손들 중 ‘다단’과 ‘아비람’ ‘온’과 그리고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지휘관 250명과 함께 반역을 꾸몄습니다. 1~2절입니다. 민 16:1∼2 →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물론 반역을 주도하는 것이 제일 큰 악이지만, 그 반역에 당을 짓고 동조하는 것! 역시 씻을 수 없는 허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왜 이 반역에 가담했을까요? 그것은 르우벤 지파의 오래된 불만 때문입니다. 사실 ‘르우벤’은 ‘야곱’의 장남이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는 ‘자신들이 모든 형제보다 앞서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행군할 때 ‘유다’ 진에 밀려, 뒤따라가는 것이 늘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도, 장자였음에도 르우벤 지파는 여러 면에서 다른 지파들에게 밀렸습니다. 그래서 늘 셋째 아들 레위 가문인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불편한 심기에 고라가 불을 질렀고, 르우벤 자손들은 ‘이때다’ 싶어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라가 속해 있던 고핫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회막 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던 이웃이었기 때문에, 서로 만나 작당하기가 참 좋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① 우리는 영적 지도자와 신앙생활에서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있어도 기도로 태워 없애야 합니다. 불만을 안고 신앙생활 하면! 나만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불만을 없애 버리는 것이 가장 좋지만! 정 그럴 상황이 안되면!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그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② 신앙생활은 ‘누구와 함께 있고, 누구와 가까이하며,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먼저 깨달은 다윗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항상 감사하며 늘 긍정적인 사람을 가까이하십시오. 나 또한 감사의 사람! 긍정의 사람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2. 권위를 부여받은 자의 위기 (교역자의 위기)
▶ 지도자는 자기를 거스르는 자를 향하여 ‘영적 권위를 무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위기에 넘어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① 첫째,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4절입니다. 민 16:4 →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참으로 짧은 한 구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지도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위기 때 지도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엎드려 기도하는 일’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당한 문제에 개입하시도록 기도로 초청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완벽한 정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② 둘째, 끝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권고하며 설득해야 합니다. 사실 ‘고라’가 불만을 품은 것은! 모세와 아론과 그 자식들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 왜 자신들은 필요한 집기나 옮기는 허드렛일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은! 더 중한 일도, 더 사소한 일도 없습니다. 다 중요한 일이요, 다 거룩한 일입니다.
사람의 보기에는 작고 큰일이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같이 중요한 일입니다. 민 16:9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만약 고라 자손이 성막의 집기들을 옮겨주지 않으면 ‘아론’인들 제대로 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고라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점을, 모세 자신과 고라와의 관계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과 - 하나님, 고라 일당과 - 하나님의 관계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눈을 뜨게 하고, 또 기도해 줄 때, 문제는 녹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고라 일당을 심판하심으로 모세의 권위를 지켜주셨습니다.
① 주동자들인 고라 일당은 땅이 입을 열어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민 16:32∼33 →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그리고 동조자들이었던 250명의 족장들은 여호와의 불에 타 죽었습니다. 민 16:35 →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 이런 일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까? 고전 10:11 →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② 그런데 우리가 잘 살펴봐야 할, 또 하나의 일이 있습니다. 고라 일당의 멸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만으로는 고라 및 그의 자손들이 다 멸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6장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민 26:10∼11 →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고라의 아내와 아들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반역에 동조하지 않고, 그 집에서 나와 떠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혈연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긴 결과입니다. 후일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은! 성막이나 성전 문지기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또한 소제를 드릴 때 사용된 누룩 없는 떡을 굽는 일을 맡거나, 성전에서 찬송하는 찬양대와 지휘자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많은 시편을 지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고라 자손이 쓴 84편을 보면! 그들은 반역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고,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시 84:10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나눔과 묵상
1. 자신의 ‘욕망과 시기심’은 숨기고, 모두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꺾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고라의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나눠봅시다.
2. 영적 위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 평신도와 목회자에게 각기 2가지씩 주신 해법에 대해 나눠봅시다.
3. 혈연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긴 고라의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그들이 지어 부른 시 84:10에 대해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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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KB제목: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 (민 13:25∼14:10)
오늘 본문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낸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와서, 가나안 땅에 대해서 그들이 본 바를 모세와 백성들에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보고 내용이 10:2로 갈렸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악평하고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보고, 믿음의 보고를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성들은 열 정탐꾼의 말을 신뢰했고 결국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믿음의 선포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음의 선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믿음에는 ‘그러나’가 없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모두가 모세와 백성들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민 13:25∼27 →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과연’ 가나안 땅은 비옥한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12명 모두가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과일을 들어 보였습니다. 이 보고에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고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2명 가운데 10명의 정탐꾼이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 13:28 →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가나안 땅은 ‘과연’ 좋은 땅이라고 했지만, 이어서 ‘그러나’가 붙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강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읍은 크고 견고해서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는 앞의 말을 180° 뒤집는 말입니다. 좋지만! ‘그림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열정탐꾼들의 입에서 나왔던 ‘과연’이라는 말이 ‘그러나’로 바뀐 까닭은 무엇일까요? 현실이 그렇기 때문입니까? 얼핏 생각하면 ‘그렇지!’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그러나’란 말이 나온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불신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러나’가 없습니다. ‘그러나’는 ⇨ ① 불신을 드러내는 말이요 ②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무시하는 말이요 ③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유도하는 말이요 ④ 이유와 변명을 대는 말입니다.
언어는 크게 ‘사실 언어’와 ‘감정 언어’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사실 언어’는 사실 그대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대로 말한 것 때문에,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감정 언어’는 긍정적이고 배려하는 말로, 상대방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줍니다. 자녀에게 “세상에서 네가 가장 소중한 아이란다.” 이렇게 말한다든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든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감정 언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힘과 용기를 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감정 언어’를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하나의 언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언어’입니다. 네! 성도는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말하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러나’를 입에 올린 열 명의 정탐꾼과, 그 말을 듣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불평한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화시키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성취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고 선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않습니다. 열 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한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가서 본 것은, 좀 과장은 있었지만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다고 보고 했는데, 사실 가나안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이고, 그들의 성은 견고하고 컸습니다. 특히 여리고 성은 대단한 성이었습니다. 난공불락의 견고한 요새입니다.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성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본 아낙 자손은 키가 장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자기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이 작아 보였다고 말합니다.
지금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보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황을 보고 그들 스스로 ‘못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 13:31 →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도 가나안 땅의 실상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민 14:9 →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족속들의 보호자가 그들을 떠난 것을 보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그들은 우리의 밥에 불과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좋아했다 낙심했다 하지 맙시다. 영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봅시다. 롬 8:24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언제나 믿음으로 담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렇게 믿음의 선포를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절망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민 14:8 →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과,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일찍이 주신 약속입니다. 출 3:17 →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 자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놀라운 기사와 이적으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그것으로 그 사람은 더 이상 믿음의 반열에 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광야에서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해 철저히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늘 담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믿음은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우리 성도들의 인생은! 믿음으로 개척해 나가고, 믿음으로 일구어 나가고, 믿음으로 승리하고, 믿음으로 창대해져야 합니다. 믿음의 선포를 하는 사람의 인생은! 그 선포, 그대로 됩니다. 불신의 선포, 부정적인 선포를 하는 사람의 인생도! 그 선포, 그대로 됩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이 불신의 말을 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민 14:2 →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네! 하나님은 그들이 말한 대로, 그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유명한 성경구절이 있죠! 민 14:28 →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들의 부정적인 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발을 디뎌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사실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실을 보지 않고 믿음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말이!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이고, 하나님의 손길도 움직이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은 눈으로 본 ‘객관적인 사실’을 신뢰하는 쪽입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 하는 쪽입니까? 서로 나눠봅시다.
2. ‘사실 언어’와 ‘감정 언어’ 그리고 ‘믿음의 언어’ 중에 당신에게 익숙하고 자주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고치고, 바꾸고, 새롭게 하기로 결심한 바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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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KB제목: 마음이 뜨거워질 때! (눅 24:13∼35)
오늘 말씀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바램, 의심과 회의, 말씀에의 무지가 두 제자의 마음을 싸늘하게 식혔습니다. 마음이 차가워졌을 때,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 그들의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을 때 신앙이 회복되어, 오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 부활주일 아침에!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도 뜨거워지는 영적 부흥의 역사를 맛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제자와 예수님이 주막집에 들어갈 때, 이미 날은 저물고 해는 기울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은 그곳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종일 걸어서 피곤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캄캄한 밤과 피곤함이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뜨거운 마음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달려 올라갈 힘을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은 게 문제란 걸 아시길 바랍니다. 그럼! 마음이 뜨거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두 제자가 그들끼리만 걸었을 때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있었고 실망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되게 하셔야 가능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먼저 두 제자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실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눅 24:15∼16 →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동행하시는 주님께 그들은 자신들이 실망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심령이 뜨거워지려면!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슬픔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은혜의 수단, 은혜의 통로에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통로’에는 ⇨ ‘말씀’ ‘찬양’ ‘기도’ ‘금식’ ‘성찬’ ‘영적교제’ ‘선행’ 등이 있습니다.
지금 두 제자는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눅 24:27 →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리고 베푸시는 ‘성찬’을 받았습니다. 눅 24:30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렇습니다. 은혜의 통로 ‘2가지’에 접촉했습니다. 주님과 말씀의 교제를 했고, 또한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신앙적인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눈이 열리고, 마음의 뜨거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눅 24:30b∼31a →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네! 성찬을 받을 때 영적 눈이 뜨여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눅 24:32 →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고, 또한 배우기를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찬 받을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뜨거워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2. 있어야 할 자리,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눅 24:33 →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마음이 뜨거워지자마자! 가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출발한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요즘같이 가로등이 있는 것도 아니니 웬만하면 내일 올라가자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돌아가”라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① ‘회개’와 ② ‘돌이켜 행함’입니다. 이 둘은 사실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두 제자는!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진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이렇게 냉랭했던 심령이 성령충만한 뜨거운 상태로 변했을 때, 자신들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엠마오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그들이 있어야 할 곳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참 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이런 ‘깨달음’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돌이키는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두 제자는 그 밤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뜨거워진 마음은! 주막에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요?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행 1:4 →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은! 곧 ‘말씀’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말씀을 잊은 채 실망했던 두 제자는! 다시 ‘말씀’ 안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 회복은!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눅 22:61∼62 →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바른 신앙의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마리아와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화젯거리였습니다. 눅 24:33∼34 →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제자는 이들의 대화 속에 끼어들어,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서 간증했습니다. 눅 24:35 →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사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내려 가면서도 많은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한 채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셔서 실망스럽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실망의 입은 닫히고, 희망의 입이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불평이나 실망에 입이 열린 사람이 아니라, 소망과 축복에 입이 열린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입이 열려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믿음의 입이 열렸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망한 상태에서 소망을 가득 품은 마음으로 바뀐 모습, 엠마오로 내려가던 무거운 발걸음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뛰어 올라가는 힘찬 희망의 발걸음으로 바뀐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①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②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러면! ③ 여러분의 입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회복’입니다. 바라기는 기도하는 입도 열리고, 찬송하는 입도 열리고, 간증하는 입도 열리고, 전도하는 입도 열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뜨거울 때와 식었을 때, 신앙생활이 어떻게 달랐었는지 나눠봅시다.
2. 은혜의 통로에는 ‘말씀’ ‘성찬’ ‘찬양’ ‘기도’ ‘금식’ ‘영적교제’ ‘전도’ ‘선행’ 등이 있습니다. 당신 간과하고 있는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사순절 특별히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내며 가장 크게 은혜받은 예배나 기도회 등에 대해 나눠봅시다.
제목: 들어와 깨끗게 하소서! (마 21:6∼13)
오늘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동안, 성도님들은 적어도 하루 한 끼 이상 금식하면서, 세상의 즐거움에서 잠시 물러나, 세상을 닮아가는 우리의 신앙을 말씀으로 치유하고, 나태했던 기도생활을 회복하고, 빗나갔던 우리의 삶을 바로 잡는 한 주간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빗나간 백성들의 기대!
2000년 전 오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게 할 자신들의 왕으로, 유대 나라를 회복할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하며 맞이했습니다.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아서 양탄자를 대신하고, 종려나무 가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힘차게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백성들은 목소리 높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마 21:9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기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 ‘호쉬아 나’(an: [v'y:)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옮겨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호쉬아’([v'y:)는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이고 + ‘나’(an:)는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겉보기엔 참 아름다운 신앙고백 같고, 간절함이 묻어 있는 부르짖음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안타깝게도 ‘세속적인 동기’ 때문에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 그래서 우의정 좌의정을 바랬던 제자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군중들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친 것은 ‘어서 우리를 로마의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그렇게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인생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백성들이 기대했던 ‘왕’은 ‘세속의 정치적인 왕’이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권세자로서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과 사역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과 영생’에 있으셨습니다. 결국, 빗나간 기대로 인해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외치는 사람들로 돌변하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성전 정화와 우리의 정화
이런 엇갈린 기대 속에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아가신 곳은 어디였습니까? ‘왕궁’이 아니라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시자마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전 정화’였습니다. 마 21:12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평소와 다르게 예수님은 과격한 행동으로 평온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대소동에 휩싸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거친 음성으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21:13 →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였는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눈에는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심각한 문제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흠이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먼저 제물을 검수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레위기 율법을 빌미로,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은 세속적인 이익을 탐하는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결탁했습니다. 대부분 집에서부터 가져온 제물은 퇴짜놓고, 상인들에게 구매한 제물만 합격시켜 줬습니다. 그러니 더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성전에서 파는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예루살렘에는 먼 디아스포라에서 순례 차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제물을 구매하려고 하면, 장사꾼들은 유대 돈이 아닌 화폐는 받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폭리를 취하며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에게 유대 돈으로 환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역기능적 구조 속에서 생긴 부정한 돈의 일부를 장사꾼들과 환전상으로부터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뒷돈으로 받아 챙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전 안에서 ‘딴 재미’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거룩한 성전에서 부패한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그 실제와 속은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성전 정화사건’ 속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살펴봐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바라보실 때, 너희들에겐 아무 문제 없다고 OK 하실까? 우리에게서는 그런 세속적이고 부패한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이에 대해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재미와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딴 재미’를 추구하고 있던 모습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장사꾼들의 의자와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너희들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주 극적인 장면이지만,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이런 부패한 종교지도자들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자기의 명예와 이익을 높이려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셨고, 그들이 앞장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 구린 냄새가 나는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속을 들여다보셔도 부끄러움이 없고, 오히려 “이만한 믿음의 사람을 내가 보지 못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 인생의 왕으로 들어오시길 원하시는 예수님
네!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완성하는 이 마지막 주간의 첫날에 ‘왕의 선포식’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왕의 대관식 장소인 예루살렘에 조용히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대관식의 주인으로서, 또한 경배받아야 할 최고의 왕으로서, 군중들의 환영 속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고, 또한 알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날 예루살렘 성에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입성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 각 개인의 인생 안에 왕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신앙생활에, 삶의 현장에,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 왕으로 입성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을 다시금 환영하고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들어가다’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0절과 12절입니다. 마 21:10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마 21:12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처럼! 성전에 들어가신 것처럼! 내 인생에도 들어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게 들어오셔야, 내가 살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밖에 계셔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문화에 익숙해지고, 사도신경을 줄줄이 외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구세주로 모셔야만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날 별 문제의식 없이, 혹은 이권에 약삭빠르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럭저럭 문제없이 살아가는 듯했어도, 빛이신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그분의 눈과 시각으로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썩어 가는 곳, 냄새나는 곳, 죽어있는 곳들을, 선명하게 바로 보게 되어야만 합니다. 무엇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암(癌)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질병은 자각 증상을 통하여 미리 알아채고 고칠 수가 있지만, 대개 암의 경우는 자각 증상을 느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치료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암은! 정기 검진과 조기 진단을 통해서 예방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병이나 무뎌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기 검진과 조기 진단을 통해서 예방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내 ‘이성의 눈’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들어오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포장되고 꾸며진 모습이 아닌, 자신의 본 모습과 본질을 볼 때야만, 비로소 치료자 되시는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 한 주간을 여러분의 ‘영적인 정기 검진’을 받는 기간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시며 왕으로 모셔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설령 자신의 썩어있는 곳, 굳어진 곳, 냄새나는 곳을 알았다 해도, 자신의 노력과 결심만으로는! 새롭게 하거나 정결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시각으로 나의 문제를 볼 때, 문제를 문제로 알 수 있고, 그분의 권세와 능력으로만, 나의 어두움과 불순종과 뿌리 깊은 죄의 습관들을 내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셔야,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쫓아내고 정결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능력의 예수님, 권세의 예수님, 어두움을 물리치는 생명과 빛 되신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왕으로 모신 자라야, 심령과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모하십시오. 그분을 환영하십시오. 그리고 왕으로 모셔 들이십시오. 진정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왕으로 모셔 들여, 인생의 고침과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주님의 눈으로 볼 때, 내 인생 속에서 쫓아내서 정화하고 깨끗게 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을 진정 당신의 왕으로 모셔 들였습니까? 예수님과 함께해도 불편하지 않을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3.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당신의 새로운 삶과 영혼을 위해 결심하고 실천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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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KB제목: 경천애인(敬天愛人) (마 22:34∼40)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greatest commandment)과 ‘대 사명’(임무)(great commission)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큰 계명>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마 22:37∼40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어 <대 사명(임무)>은 마태복음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마 28:18∼20a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가장 큰 계명>과 <대 사명(임무)> 중 ‘두 가지 계명’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삼았는데, 이것의 본질을 살펴보면 영어 단어로는 ‘Service’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의 핵심은 ‘예배’라고 할 수 있는데, 예배를 영어로는 ‘Service’라고 합니다. 두 번째 계명인 이웃 사랑의 핵심은 ‘섬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섬김 역시 영어로는 ‘service’라고 합니다. 다만 소문자로 표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예배라는 Service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인 섬김 역시 service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 첫 번째 계명인 경천(敬天) ‘예배’(Service)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를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고 하면,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믿지 않는 친구가 여러분께 이렇게 물었다고 합시다. “너는 일요일마다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데, 예배가 뭐니? 찬송하고 기도하고, 목사님의 설교 듣고 헌금하고 오는 것을 말하니?”
이에 대하여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그러니까 예배를 시간과 공간, 혹은 어떤 틀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일(시간), 교회(공간), 예배형식(틀) 안에만 묶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행위, 그분을 미소 짓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는 나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과연 미소를 짓고 계실까요? 아니면, 그렇지 못해서 그런 삶을 살길 원해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실 수 있는 5가지 예배의 모습을 이렇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①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가장 사랑할 때 미소 지으십니다. ▷ 마 22:37∼38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②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때 미소 지으십니다. ▷ 히 11:6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③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미소 지으십니다. ▷ 창 6:22 → “노아가 그와 같이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해보다 순종이 우선입니다. 순종은 이해하게 됩니다.
④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미소 지으십니다. ▷ 시 69:30∼31 →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⑤ 하나님은 우리의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 섬길 때 미소 지으십니다. ▷ 마 25:21 →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보를 접든, 전도지를 나누어 주든, 교회 안팎을 쓸고 닦든, 찬양대나 교사로 섬기든, 차량 운전을 하고, 주차 안내를 하든, 화단을 가꾸고 성전 안팎을 장식하든!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은 여러분이 예배를 돕는, Service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몸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섬김이 있습니다. 바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고후 1:20b →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을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난 특별한 달란트도 은사도 없는 너무 평범한 사람이라, 교회에서 할 만한 일이 없는데요.”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아뇨! 어떤 분이든 섬길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얼마 전부터 자발적으로 토요일마다, 화장실 청소, 계단 청소, 유아실을 정리 정돈하시는 권사님들이 생기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간단하게 보면 그저 청소하는 일이지만, 이런 일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 Service이며, 또한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도 service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예배자가 되기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받으면 심령은 건강해지고, 교회는 올바르게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2. 두 번째 계명인 애인(愛人)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를 두 글자로 줄이면 뭐가 될까요? 그것을 저는 ‘섬김’(봉사)이라고 생각합니다. 섬김이란? ⇨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입니다. 사실 사람마다 많은 상처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찾아 섬겨주는 것을 일러 ‘사역’이라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역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섬기다(service)란 의미인데, 이 말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집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사역자이며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과 이웃의 필요를 따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3가지 방향’으로 섬김의 사역을 해야 합니다.
①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Service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각종 은사를 사용하여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② 그 다음은, 믿는 성도들을 위한 섬김 사역입니다. 히 6:10 →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새번역) 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과 섬김을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③ 나아가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마 5:13∼14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는 교회와 성도만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까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 3가지 방향으로 1가지씩 작은 일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 주님을 향해 → 예배 한 번 더 드리기, 성경 0장 읽기, 가정예배, 전도하기 성도를 향해 → 안부 문자보내기, 격려 전화나 심방 하기, 밥 사주기, 기도해주기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해 → 필요한 것 채워주기, 작은 선물하기, 차 마시기
이와 함께 우리는 ‘3가지 영역’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섬김은 이 3가지를 포함해야 합니다.
① 사람들의 ‘육신의 필요’를 위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마 25:35∼36,40 마 10:42)
② 사람들의 ‘감정적인 필요’를 향한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살전 5:14)
③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향한 사역을 해야 합니다. (고후 5:18)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좌우명’은 이것이었습니다.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자. 모든 수단,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어떠한 장소에서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상대가 누구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오랫동안 하자.” 바라기는 이것이 또한 우리의 좌우명이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섬김 사역을 사명으로 알고 감당할 때 우리를 통해 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② 성도들이 기뻐하고 ③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섬기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알버트 슈바이처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섬겨본 사람은 그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 다 맛보셨을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대단한 일을 해야 사명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사명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 기쁨과 행복을 찾아 나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마 22:37∼40)과 ‘대 사명’(명령, 마 28:18∼20a)의 말씀을 암송 하거나 성경을 펼쳐 읽어봅시다.
2. 가장 큰 계명을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요약했습니다. 이 두 영역의 섬김(Service)에서 ‘내가 꼭 실천 하며 살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각각 말해 봅시다.
3. 인간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3가지 영역의 필요를 채우는 섬김 사역’을 해야 합니다. 아내 나 남편, 내 자녀와 부모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섬김 영역을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나눠봅시다.
제목: 제자로서의 마음가짐! (마 20:20∼28)
우리는 지금 인류를 위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서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그 ‘제자도’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세속적인 영광을 내려놓을 마음을 가져야!
130여 년 전인 개화기에, 이 땅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고, 처음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두 가지 동기’ 있었습니다. 하나는 ① 개화를 통한 ‘사회변혁’과 ‘자기발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② 그저 순수하게 예수 믿고 구원받기 위한 ‘복음적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사람들의 예수 믿는 동기가 달라졌습니다. 바로 ‘축복의 동기’입니다. 여기서부터 복음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예수 잘 믿어도 세상적인 축복은 기대하지 말아라!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를 믿어 복 받고, 건강하기 위해서만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병이 고쳐지지 않고, 부자 되지 못하고, 출세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믿음을 버릴 수 있고 예수를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가 메시아다. 이분을 통해서 우리가 로마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예수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경험하면서, 이런 기대는 더욱더 커졌을 것입니다. 와우! 이런 기적을 행하는 분이시라면, 우리의 소원도 만족시켜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세 번째 ‘수난고지’를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거듭 당신은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참 당혹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제자 야고보·요한 형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을 하면서 이렇게 청탁합니다. 마 20:21 →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어머니도 예수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면, 틀림없이 정권을 잡고 왕의 자리에 오르시게 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서열 1위, 2위의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기적인 치맛바람을 바라보는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해서 분히 여깁니다. 마 20:24 →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한마디로 너희들이 좌의정 우의정 다 해 먹으면 우린 뭐 하라는 거냐? 이런 것이죠! 이것은 분명히 예수를 따르는 동기가 변질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예수 믿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나 역시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세속적 동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요청 앞에서, 오히려 세속적인 영광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0:26b → “너희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단·마귀는 성도들이 교회와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달콤한 목소리로 십자가를 부인하고 헛된 영광을 구하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4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왜냐하면 헛된 영광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헛된 영광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 20:27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의 이 말씀을 따라,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섬김의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마 20:28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은! 결코 ‘지배의 길’이 아니라 ‘섬김의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자가 되었어도,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지배의 욕심’을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배의 욕구’는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가장 강렬한 욕구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위협하는 밑바탕에는, 언제나 이런 권력 욕구, 지배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정생활의 갈등! 그러니까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등 모든 갈등 속에는 “누가 지배자냐? 누가 다스리느냐?” 하는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갈등, 심지어 교회 생활 속에서도 이런 갈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별히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유교의 역기능적인 요소인, 관계에서 계급화·서열화하려는 의식과 +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 겹쳐져 서 우리 사회는 좀 더 수직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아예 지위나 서열을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공동체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지위와 계급, 서열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 지위와 계급, 서열은 ‘섬김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만은, 계급의식을 극복하고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크리스천 리더십’과 vs ‘세속적인 리더십’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오늘 본문에 날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세속적인 리더십의 특징’입니다. 마 20:25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 ‘세속적 리더십의 특징’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있는데 “주관한다, 권세를 부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절에 보시면 ‘크리스천 리더십의 차별성’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20:26∼27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네! 주님의 제자라면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게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섬길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마음을 갖길 요청하십니다.
사람에게는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① 첫째 생일은! “우리의 몸, 육체가 태어난 날”이고 ② 둘째 생일은!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알게 된 날”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육체의 생일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섬길 마음을 품는 것!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마음인 것을 믿고, 그래! 내가 주님의 제자로서 ‘섬김의 삶을 실천하리라’는 마음을 품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주님으로 인해 고난이 온다면,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마지막 마음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고난’이라도 기꺼이 받겠다는 각오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섬김은 고난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난만 당하다 그냥 끝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후에 받을 영광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23절 후반부를 보겠습니다. 마 20:23b →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너희들이 고난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해 섬기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날에 ‘상급과 영광’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신앙 선배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에너지는, 바로 고난 저편에 예비하신 ‘영광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지금 당장 그 영광이 내게 오지 않아도 상관없었습니다. 눈물과 희생, 섬김, 내 동기의 순수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으로 나를 축복하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고난 저편의 영광을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롬 8:18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고, 구원이시라고 확실하게 믿는다면, 아직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에게 진지하게 여러분의 믿음을 드러내시길 바랍니다.
그런 신앙고백이나 전도 때문에 받을 수도 있는 수모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핍박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쉽게 타협하고,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 그 누구도 감동할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한 사람, 그리고 그 대가를 지불 하리라고 마음먹고 사는 사람들을 보고 감동하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런 삶만이 그들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메시지는 오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마 20:28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 성도들은 불신자들이 가는 길과는 달리! 살아가는 가치가 달라야 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불신자는 부귀영화와 향락과 땅에서의 만족을 위해 살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천국에서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 그 정신! 그 마음! 가지고 살아,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높여주시고 영광되게 하시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에게도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변질됐거나 타락한 점은 없는지 살펴보고 나눠봅시다.
2. 섬김의 삶으로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된, 이 시대의 주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 나눠봅시다.
3. 신앙 선배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바로 고난 저편에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광 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주는 힘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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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KB제목: 용서하고 또 용서함으로! (마 18:21∼35)
1. 용서와 회개는 치유의 양대 축
인간은 누구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용서를 받기도 해야 하고, 용서를 베풀기도 해야 합니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참된 회개가 없이는 용서도 치유도 불가능하단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회개는 두 가지를 충족해야 합니다. → ① 첫째,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② 둘째, 내가 지은 죄로 인해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내가 잘못했다’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되고, 사람에게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도 해야 하고, 사람에게도 해야, 완전한 회개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자와 같이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구하지 않고’ ‘죄’에 대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문제입니다. → ① 국가적으로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 어린 ‘사죄’가 없는 것이고요 ② 사회적으로는, 학교폭력(학폭) 가해자의 ‘용서’를 구함이 없는 것입니다.
가해 국가나 개인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하고, 피해 국가나 개인은 그 ‘사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면! 깨어진 관계는 회복되고, 마음까지 치유되어 샬롬의 새 세계를 펼쳐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혹 이 자리에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구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어서 속히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서 심령의 평안과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용서’를 구하는데도 용서해 주기를 거절하고 마음을 닫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어서 속히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용서’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11:25 →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옥 가야 마땅할 우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은혜 입은 자로서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용서해 주고!’ ‘용서받고!’ 이를 통해, 완전한 치유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럼, 용서는 어디까지?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그리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대답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 18:22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은 산술적으로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일에 횟수의 제한을 두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마음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이나 기준에 상관없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받은 용서가 취소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으로 6,000일, 즉 16년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니 160,000년을 일하고 한 푼도 쓰지 않아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빚진 자가 갚지 못하자, 임금이 뭐라고 말합니까? 마 18:25b →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종이 말합니다. 마 18:26 →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임금의 마음을 달래보고자 하는 종의 간절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임금이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마 18:27 →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여기 탕감했다는 말은, 빚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삶은 도저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그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엡 2:4) 이것이 바로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가 ‘아무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은혜중의 은혜요, 용서 중의 용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으로 인해 용서받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상대를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보면, 용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엡 4:32 →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때때로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기 마음속에 기준을 정해 놓고 상대방을 용서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선을 정해 놓고 여기까지는 용서하고, 그다음은 ‘절대 안 된다’라는 기준은 참된 용서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한없는 용서를 생각하면서 제한 없는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용서의 사람 요셉을 본받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를 실천한 위대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으라면 바로 ‘요셉’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아픔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빨을 갈 일입니다. 평생을 복수로 채워도 다 채우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꿈 이야기를 하고, 잘난 체했어도! 어떻게 어린 동생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에 처넣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동생을 꺼내주는가 싶더니 노예상에게 돈을 받고 팔아먹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었지만,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창 45:5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팔려 온 자’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임을 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팔려 온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계획이 있어 나를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팔려 온 자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 손해를 끼친 사람조차,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45:7∼8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비록 자신을 팔아먹은 용서하지 못할 형들이었지만, 오히려 생명을 살리고 후손을 이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요셉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처럼 ‘사명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아픔과 상처들이 아직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이제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았습니다.
더는 미움과 분노와 증오로 인해 지옥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이제 용서를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시도하십시오. 더는 과거의 얼룩진 상처를 보지 마시고, 그 과거의 아픔과 상처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아드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과 사명을 바라보며 미래를 향해 전진하십시오.
용서는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출발점입니다. 용서는 새로운 희망의 씨앗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들의 아픔과 상처를 감싸주시고 치료해 주시십니다. 그 안에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의 응어리가 영육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경험한 바가 있다면 나눠보시고, 믿음 안에서 푸는 방법인 용서와 회개에 대하여 나눠봅시다.
2. 용서의 사람 요셉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누가 먼저 풀고, 누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할 사람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3. 당신이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한 죄, 풀어야 할 인간관계, 풀어야 할 마음의 상처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속히 해결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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