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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관리자
2022-10-01
조회 472


2022년 10월 2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가장 비천한 자를 왕자처럼 (삼하 9:3∼8)

 

1. 배경 이야기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건국한 사울 왕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사울 왕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를 좋아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골리앗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사울은 다윗에 대한 강한 반감과 시기심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마음먹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마음을 알고, 다윗이 도망가도록 도왔습니다. 마지막 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 20:42 →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이후 다윗은 도망하는 삶을 10년 넘게하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온 나라를 찾아다녔지만, 결국은 사울이 먼저 죽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사울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지난주에 드렸던 말씀입니다. 7년 반에 걸쳐 이스라엘 12지파를 통합하고, 다윗은 공식적인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다윗의 왕국은 점점 더 견고해졌고, 안정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에 갑자기 요나단과의 언약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삼하 9:1 →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그래서 찾게 된 사람이 바로, 오늘 말씀의 또 하나의 주인공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입니다.

‘므비보셋’의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왕가에서 태어나,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황태자를 아버지로 둔 므비보셋! 장래가 보장된 ‘행운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보장된 미래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요나단과 할아버지 사울 왕이 전쟁에서 한꺼번에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중증 장애인이 되는 ‘불행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므비보셋의 장래 인생은 과연 어떤 미래가 펼쳐지게 될까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은혜 갚을 줄 알았던 사람들!

우리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길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수소문 끝에 사울 왕의 종 ‘시바’를 찾았고, 그를 통하여 ‘므비보셋’을 찾아냅니다. 므비보셋을 찾을 즈음에는 다섯 살이던 므비보셋에게 ‘미가’라는 아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삼하 9:12), 다윗이 왕이 된 지 적어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인 것 같습니다.

다윗이 찾기 전 므비보셋은 ‘로드발’이라는 곳의,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은혜를 기억하고 갚는 감동적인 사연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건은 사울이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 부음만 받고, 아직 정식으로 왕이 되지는 못했던 때에 일입니다. 삼상 11장의 이야기인데, 암몬 족속이 요단 동편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를 요구합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대항할 힘이 없으니 항복하겠다고 하였지만, 암몬 왕은 “너희 오른 눈을 모두 뽑아야 항복을 받아주겠다”고 하면서, 항복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기가 막혔지만! 일주일 기한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하고는, 뒤로는 급히 전령을 보내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삼상 11:4∼5 → “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

이 말은 들은 사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삼상 11:6∼7 →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사울은 독려에 순식간에 33만 명의 군대 자원자들이 몰려왔고, 암몬 군대를 쳐서 물리치고, 야베스 사람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줍니다. 이 일로 인해 백성들의 신임을 얻은 사울은 정식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로부터 40년의 긴 세월이 지났습니다. 블레셋과의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울과 아들들이 전사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야베스 사람들은 이렇게 합니다. 삼상 31:11∼13 →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여기 ‘에셀 나무’ 아래에 묻었다고 했는데! ‘에셀’은 ‘도움’이란 뜻으로, 이전의 사울의 도움을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 왕이 베푼 오래전의 은혜를 그렇게 갚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한 주인공! 므비보셋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로 숨어 들어가 살았습니까? 바로 요단 동편 길르앗 땅 야베스 사람들이 사는 근처인 ‘로드발’이었습니다. 그곳의 ‘마길’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던 것도, 이전에 ‘사울 왕’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는 차원에서 기꺼이 ‘므비보셋’을 받아주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에게 받은 은혜’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선한 씨앗을 많이 뿌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바로 여러분이 뿌린 그 씨앗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때론 자신이 먹지 못하게 되면, 자식들에게라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도 은혜 받은자로서, 은혜에 감사하며 삽시다.

아무튼 이렇게 숨어 사는 므비보셋에게 어느 날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다윗 왕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마 몸이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자손인 그를 살려 둘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9:7입니다. →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①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장애인’을 대하는 다윗의 지혜로운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므비보셋을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주는데, 두 가지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나는 경제적인 도움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입니다. 다윗은 정확하게 므비보셋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의 눈높이에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그를 높여줍니다. 지금까지 장애인으로 숨을 죽이며 살아왔던 므비보셋을, 자기의 밥상에서 함께 먹도록 배려합니다. 그것은 자식과 똑같이 여기겠다는 인격적인 존중이요, 최고의 사랑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가장 비천한 자의 삶에서, 왕자의 자리에 오르는 기쁨과 축복을 얻게 됩니다.

모르긴 모르되 므비보셋은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위해 가장 극적인 자리와 시간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므비보셋’이란 이름의 뜻은? → “부끄러움을 없이하는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므비보셋의 모든 부끄러움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경제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왕의 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는 왕자의 자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실은 우리들도 므비보셋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으므로, 우리는 죄인으로! 영혼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고, 하나님을 피해 숨어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이 왕을 피해 숨어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피하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베풀려고 다윗이 므비보셋를 찾아 나섰던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찾아 나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 앞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재산을 돌려줄 뿐만 아니라,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해 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 때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이라는 말을 되풀이 합니다. 우리가 은총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언약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는 말과 ⇨ “요나단으로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는 말은 같은 형식,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이 행하신 십자가의 희생에 근거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비천한 죄인 된 우리를, 왕자처럼 대우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이 은혜를 갚으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다윗은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약속과 관련하여 감동했거나 실망한 일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2. 다윗이 중증·중복 장애인에게 대한 태도를 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은총이 무엇인지 나눠보고, 당신에게 주어진 지위, 물질, 권한을 다른 사람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데 사용할 의지를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9-24
조회 485


2022년 9월 25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하나 된 나라를 이룬 다윗 (삼하 5:1∼5, 10)

 

성경 역사 속에 분열된 나라가 통일된, 단 한 번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통일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삼하 1:1 → “사울이 죽은 후에…” 그러니까 사무엘상의 맨 마지막 장인 31장엔, 사울 왕가의 몰락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삼상 31:1∼2 →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얼핏 생각하면! ‘사울도 죽고, 그의 유력한 세 아들들도 죽었으니, 이제 다음 왕으로는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이, 바로 승계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울 왕에게는 넷째 아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군사령관이었고, 사촌 동생이기도 한 아브넬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될 사람은 자기 조카 ‘이스보셋’이 정당하다고 선언합니다. 놀랍게도 유다 지파를 제외한 다른 11 지파 사람들이, 사울 왕의 막내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제2대 통치자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겪어왔던 도망자의 삶이 이제 끝나고, 새 왕조를 출범시킬 일만 남은 것 같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유다 지파만을 이끄는 통치자가 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아니라 도지사가 된 것입니다.

이후 통일왕국의 왕권을 두고 7년 동안이나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다윗은 점점 강성해졌고, 사울의 집은 급격하게 쇠퇴해갔습니다. 삼하 3:1 →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일시키고 통합하는 일을 이루었습니까? →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의 대적, 원수들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마다 그들을 각별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들이 죽었을 때마다 기뻐하기는커녕 울며 금식하며 애통해했고, 진심과 정성을 다해서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이것으로 다윗은 이스라엘 12 지파 전체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 중요한 예,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지난 주일에 살펴본 사울 왕의 죽음과 장례입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죽는 혼란기에는, 언제나 사기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다윗 앞에 사울의 왕관과 사울의 팔찌를 가지고 와서는 “내가 당신 원수인 사울 왕을 죽였다”고 하면서, 상급을 바라고 나온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죽음을 확인한 다윗은 옷을 찢고 웁니다. 성도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좋아해야 할 상황입니다. 원수가 죽었으니 얼마나 기뻐할 일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슬픔의 노래를 지어 부르며, 사울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그 아들 요나단과의 우정을 기립니다.

다윗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본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실까?’ ‘나의 마음과 행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것을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왕관과 사울의 팔찌를 가지고 온 청년을 향하여, “네가 어찌 감히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을 죽였느냐!” 호통치고, 그 사람을 죽이라 명령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온 백성들과 함께, 사울 왕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엄숙하게 치룹니다. 다윗의 인격과 품격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고, 이를 통해 더 멀어질 사람들의 마음을 다윗에게로 향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일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의 장례가 더 이어집니다.

둘째, 북이스라엘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죽었을 때, 역시 국가장으로 승격하여 치러줍니다. 북이스라엘 왕 이스보셋의 오른팔이요,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아브넬이 사울 왕의 첩을 겁탈한 사건으로 이스보셋과 아브넬 양자 간에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불화가 생기고 맙니다. 그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점점 더 다윗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아브넬 장군은 스스로 판단해 봅니다. 이미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다윗에게로 가 있고, 자기가 세웠고 섬겼던 이스보셋 왕마저 자기를 질책하니, 차라리 선제적으로 다윗과 화친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11 지파의 장로들을 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3:17∼18 →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무슨 말입니까? 열한 지파의 장로들 대부분이, 이스보셋 대신 다윗을 왕으로 삼자는 뜻을 진작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어 아브넬 장군은 먼저 전령을 다윗이 머물고 있던 헤브론으로 보내서 이렇게 자기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나 아브넬 장군은 다윗왕에게 북이스라엘 전체를 이끌고 귀순할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첫 아내였던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그의 귀순을 허락합니다.(삼하 3:6∼21)

전령이 돌아와서 보고하니, 이제 아브넬이 직접 다윗을 찾아갑니다. 다윗은 아브넬 장군 일행을 환대합니다. 삼하 3:20 →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여기에 화답하여 아브넬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3:21 →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이에 다윗은 아브넬을 평안히 돌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귀순 의사를 밝힌 아브넬을 다윗왕이 흔쾌히 받아들이고 평안히 돌아가게 했다는 소식을, 전장에서 돌아오던 다윗 왕의 군사령관인 ‘요압’ 장군이 듣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귀순하면 다윗 왕이 그를 자기와 동급의 장군으로 받아 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요압 장군은 급히 마나하임으로 돌아가고 있는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도록 전령을 보냅니다. 그리고는 되돌아온 아브넬에게 요압은 뭔가 조용히 말하려는 척하면서, 준비한 칼로 아브넬의 배를 찔러 죽입니다. 그야말로 ‘앗’ 소리도 못 하고 북이스라엘의 군사령관이 죽은 것입니다.

이 일 역시 보통 사람 같으면 좋아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는 일은 ‘떼 놓은 당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오히려 요압 장군의 잘못을 꾸짖고 만천하에 공개합니다. 그리고 대적하던 북이스라엘의 장군 아브넬의 장례를 극진한 예를 다해서 치릅니다.

삼하 3:31∼32 →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다윗은 대적의 죽음에 금식하며 울고 애도했습니다.

이런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장례식으로 인해 북쪽 11 지파 사람들도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백성들은 다윗을 신뢰하게 됩니다. 삼하 3:36∼37 →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물론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아브넬이 죽은 것을 계기로, 다윗이 군대를 몰고 올라갔으면, 금방 물리적으로 통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때도 기다렸습니다. 영토의 통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의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셋째, 북이스라엘의 왕 이스보셋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러줍니다. 다윗은 묵묵히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문제는 북 왕국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레갑’과 ‘바아나’라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이스보셋 왕 옆에서 호위하던 장수들입니다. 이들도 생각합니다. 아브넬 군사령관이 죽었고,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결과는 뻔한데, 이제 남은 마지막 수순은 이스보셋 왕만 없어지면, 모든 권력이 다윗에게로 넘어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은 머리를 굴려, 낮잠을 자고 있던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서 다윗에게 가지고 갑니다.

하지만 다윗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은 죄인들이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합당치 않다며, 당장 이 두 사람을 처단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시체! 그의 머리는 헤브론에 있는 아브넬의 무덤에 정중하게 장사했습니다(삼하 4:5∼12). 이스보셋의 장례 역시, 국장으로 치러준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적이나 원수에게도 긍휼을 잃지 않았습니다. → 정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통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통일된 조국을 열망하고 있잖습니까? 사랑하는 내 자녀손들에게 통일된 한국을 물려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기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 반대편에 있던 사람, 그리고 현재도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과 자비를 계속 베풀었습니다. 자기에게 기회가 왔지만, 그 기회를 비겁하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정정당당한 승리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패배한 사람조차도 흔쾌히 그 패배를 인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화적인 통일!’이라는 우리 민족의 숙원을 해결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통일된 이스라엘을 만들었던 다윗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원수라도 품어내는 그 마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마음입니다.

 

나눔과 묵상

 

1.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때’(카이로스)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때가 오기까지 인내로 잘 기다렸습니다.

나의 시간표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2.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 3:1) 이 말씀이 당신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3.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북한이 진정 ‘사람이 하나 되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요?

관리자
2022-09-17
조회 613


2022년 9월 18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활 노래에 담긴 다윗의 신앙인격 (삼하 1:17∼27)

 

다윗의 신앙 인격을 본받자!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극도의 애통과 슬픔을 가눌 길 없어, 옷을 찢고 울면서 금식했습니다(11∼12). 그는 애가(哀歌) 즉 슬픔의 노래를 지어, 두 용사 -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리고는 노래의 이름을 ‘활 노래’라 하였고, 모든 유다 족속에게 가르쳐 부르게 했습니다. 이 노래를 ‘활 노래’라고 한 것은! 사울 왕과 요나단이 활을 잘 쏘는 용사였고, 그들을 추모하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활 노래에는 다윗의 아름다운 신앙 인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다윗의 아름다운 신앙 인격을 배우고 본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는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십수 년을 쫓아다닌 생명의 원수입니다. 그런 사울 왕의 죽음은! 다윗에겐 곧 고난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기쁨과 감사의 말이 그 입에서 나올 법한 상황인데! 다윗은 오히려 애통해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결코 의도적이거나 가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사울의 죽음을 슬퍼했던 것은! 개인적인 이해관계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민족의 운명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활 노래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칭하면서, 그렇기에 그들의 죽음은 곧 이스라엘의 수치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할례받지 못한 이방 군대 블레셋에게 패배한 것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행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중심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두 용사!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노래에 담은 것입니다. 삼하 1:20 →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엎드러진 것! 즉 이스라엘의 수치가 이방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조치는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 소년 시절 때도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과 그 백성을 경멸하자, 불타는 의분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 17:26b →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렇게 외치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나가서 골리앗과 싸워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투철한 자긍심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십수 년이 지나서도 오늘 활 노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리고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울 왕이! 할례 없는 이방 블레셋 군대의 발굽 아래 짓밟힌 현실을! 불타는 신앙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슬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는 다윗의 참된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2. 지도자를 끝까지 존경한 충성심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삼하 1:19 →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말은, 사울의 죽음은! 곧 다윗 자신과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손실이요 재난이라고, 비통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진심으로 아끼고 귀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탁월한 지도자로 인정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안전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으며, 그들의 존재는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고 칭송합니다.

그런 이유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광인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한 길보아 산들을 저주했습니다. 삼하 1:21 →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이렇게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의 영광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지도자를 존경했던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스러운 업적을 회상하며, 칭송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삼하 1:22 →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인격을 흠모합니다. 삼하 1:23 →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사울에 대한 원한은커녕, 고상하고 탁월한 성품에 대한, 거짓 없는 흠모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고, 그것을 또한 뭇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울의 통치로 인한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화’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삼하 1:24 →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사실 초기의 사울은 용기 있고 덕망도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사울의 통치하에서 군사적인 승리를 많이 누렸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이 같은 점을 기억하고, 그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사울의 단점을 기억하거나 그의 실정이나 폭정을 떠올리기보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은 사울에게서 갖은 고난과 애매한 핍박을 많이 당했지만, 여하튼 사울을 모셨던 신하로서 끝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다윗의 충성심을 배워야 합니다. 조그만 이익이나 기분 때문에 배신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신실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친구와의 우정을 끝까지 지킨 신의의 사람이었습니다.

‘활 노래’의 마지막 부분은 다윗이 요나단과 나누었던 각별한 우정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26절에서 다윗은 요나단과의 우정이 ‘여인과의 사랑보다 더 큰’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삼하 1:26 →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참으로 다윗에게 있어 요나단은 친구 이상의 관계였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에 맞서서 생명을 내걸고 다윗을 변호하였을 뿐만 아니라(삼상 24:30∼34), 사울의 계략을 다윗에게 알려줌으로써, 다윗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참으로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은 ‘여인의 사랑’보다 크고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우정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우정 또한 못지않게 신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죽은 후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 모든 지파들이 다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고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다윗의 측근들은 과거 사울 왕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갑니다. 이렇게 사울 왕가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하게 숨어 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 왕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입니다.

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삼하 4:4 →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요나단의 아들로서 다리 장애를 입은 ‘므비보셋’이 살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조가 안정되었을 때, 사울 왕가에서 시종으로 일했던 ‘시바’라는 사람에게 묻고 이런 조치를 내립니다. 삼하 9:1∼7a 요약 →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그의 할아버지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 누리던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왕자들과 함께 한 식탁에서 식사하며, 죽을 때까지 왕의 아들로 인정받고, 대접받으며 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우정은, 요나단의 죽음 이후에도 그 빛을 발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다윗처럼, 신실한 우정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대가 악하니, 고귀한 우정도 헌신짝처럼 내어버리고, 배신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참된 성도는, 우정에 대해서도 신실한 법입니다. 우리는 신실하게 우정을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질문과 묵상

 

1. 당신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투철한 자긍심과 신앙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2. 당신이 싫어하거나, 당신에게 해를 끼친 원수 같은 사람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는데(행 13:22), 당신이 다윗에게서 꼭 본받고 싶은 점이 무엇 입니까? 서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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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1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엡 5:1∼2)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②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니!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하고, 그의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면!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 특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들은, 대부분 그 사랑 안에서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의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기의 이익과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 해도, 우리 믿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위해 희생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믿지 않는 가정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말 열일곱 마리를 유산으로 남기며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장남은 절반, 차남은 1/3, 막내는 1/9을 가지라.” 그런데 그 유언대로 따르려고 해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17÷2=8.5마리, 17÷3=5.66마리, 17÷9=1.88마리! 그러니까 장남의 몫은 8과 1/2 마리요, 차남은 5와 2/3 마리, 막내는 1과 8/9 마리가 됩니다. 그러니 산채로는 도저히 말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몫대로 나누려면 말 두 마리를 잡아서 나눠야 합니다.

옥신각신하다가 형제들은 마을의 목사님은 그래도 공평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목사님에게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연을 들은 목사님은 이렇게 처방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당신의 말, 한 마리를 내줘서 열여덟 마리의 말이 되게 했고, 아버지가 유언하신 원래의 비율대로 나누어 갖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각기 몫을 나눠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18÷2=9마리, 18÷3=6마리, 18÷9=2마리! 그리하여 장남은 아홉 마리, 차남은 여섯 마리, 막내는 두 마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나눈 모든 말의 숫자를 합하니, 신기하게도 열일곱 마리가 되었습니다. 9마리 + 6마리 + 2마리 = 17마리. 그렇게 나누고 보니, 목사님이 내주셨던 한 마리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더욱이 열일곱 마리를 가지고 나누려고 하던 때보다, 장남은 1/2마리, 차남은 1/3마리, 막내는 1/9마리를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의아해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드린 말은, 사랑의 한 마리입니다. 이렇게! →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될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해진답니다.” 목사님은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전했고, 형제들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답니다. 할렐루야!

 

1.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으라!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엡 5:1 →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❶ 우리는 어떤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까? 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5:2b →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는 말씀은 자신은 가장 비참한 것을 수용하시고, 우리에게는 가장 최고의 선물을 주신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시고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사실을 요약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롬 5: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베푸신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런 사랑은!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❷ 그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으라! 1절 말씀입니다. 엡 5:1 →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성도 여러분! 부모님이 희생적으로 자기를 사랑하신 것을 아는 자녀는! 그 귀하고 값진 사랑을 베푸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그분들을 닮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닮아가게 되어있습니다. 본받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본받다’는 단어는 “따라하다, 흉내내다, 모방하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미메테스’(mimhthv")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영어가 ‘imitate’ ‘모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모방해야 할 최종적인 목표! 롤모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더!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사모하고, 닮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닮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닮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 모두에게 뜨겁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고, 또 그것을 아는 자녀들은 어떻게 행동하게 됩니까?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고, 또한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닮아! 똑같이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을 보면, 그 특징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마음 깊은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이 흘러넘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같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 삶에 점점 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미국 스탠퍼드 대학병원에 희소병을 앓고 있는 ‘엘리자베스’라는 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얼마 전! 동일한 병을 이겨내고 면역력을 소유하게 된 다섯 살짜리 오빠의 피를 수혈받는 것뿐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오빠에게 그의 피를 나눠줘야만 여동생을 살릴 수 있음을 설명하고, 그렇게 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그 어린 오빠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호흡을 가다듬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린 두 남매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수혈하는 동안, 오빠는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곤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의사 선생님에게 “저는 언제 죽게 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 오빠는! 여동생에게 수혈해 준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런데도 동생을 살리기 위해 그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사랑의 모습!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기 원한다면, 이렇게 나 자신을 버리는 희생제물이 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저 사람은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판단과 미움의 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그럴 때는 먼저 이 기억을 떠올리셔야 합니다. →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로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을 실천하셨다.” 그렇습니다. 오늘 에베소서 2장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그 희생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5:13∼14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은 당신 말대로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런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적인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되면! 예수님께서 “어! 넌 정말 내 친구다!” 이렇게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좀 부끄럽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예수님 같은 그런 ‘희생적인 사랑’에 비춰본다면, 부끄럽고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작은 일일지라도,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리라! 다짐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전 생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쏟아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주신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이 허락해주신 가정과 자녀를 사랑하고, 주위에 있는 이웃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될 뿐 아니라, 더욱 풍성해진다”는 말과 같이,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나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우리가 따르고 모방해야 할 최종적인 목표! ‘롤 모델은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말에 따라, 당신이 닮아가기 위해 시도하고 있는 것들을 나눠봅시다.

 

3.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처럼! 나 또한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 는지?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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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4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복음! 그 위대한 선물 (엡 2:1∼9)

 

저는 오늘 비밀이 숨어 있는 ‘선물’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 선물은 ‘과거’에서 나를 해방시키고, ‘현재’를 감사로 바꾸고, ‘미래’를 희망으로 채워주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기쁨과 평안을 간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선물을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선물의 가치는, 우리가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 그 자리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선물은 나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내 가족과 이웃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인사하며,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갈 수 있게 합니다. 이 선물의 이름은 바로 ‘구원’입니다. 저는 오늘, 이 구원의 선물에 대해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구원은! 행위로는 얻지 못하는 선물입니다.

‘선물’은 문자 그대로 ‘선물’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그 노력의 대가로 무엇을 얻는다면, 그것은 노력에 대한 삯이지 선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는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8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 보면,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다음 절인 9절에서 좀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 2:9 →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한’ 아무도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행위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도 중요합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적인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베풀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여야 하지,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도, 우리보다 훨씬 더 선한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신 하나님 앞에서 보면, 인간의 행위는 오십보백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이 말하는 선과 악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가톨릭에서는 뛰어나게 착했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saint’ ‘성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성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성자’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3:23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저도 포함되고, 여러분도 포함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하기를!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떤 선물일까요?

 

둘째, 구원은! 은혜로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다시 8절 말씀입니다. 엡 2:8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 첫 번째 강조된 단어가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은혜’ grace라는 단어의 뜻은 →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랑, 혹은 호의”를 말합니다. 그 ‘은혜’로 저와 여러분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 인간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2:7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자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 ‘자비’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네!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것은 알겠는데! 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들이지만 그저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아버지’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은혜가 베풀어졌고, 그 결과! 우리는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탕자와 탕자의 아버지를 잘 생각해 보시면, 하나님의 ‘자비’와 베푸시는 ‘구원’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유산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냅니다. 머잖아 돈은 다 떨어졌고 흉년까지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돼지 치는 곳에 품꾼이 되어 살지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때서야 탕자는 다시 아버지 집을 생각합니다.

가지고 나간 것 다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버지는 그가 자기 아들인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눅 15:20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자비)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사랑의 행동)…”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종에게 명하여 가장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에 신발을 신겨줍니다.

성도 여러분! 둘째 아들이 가지고 나간 유산으로 사업을 잘해서 큰돈으로 불려서 왔습니까? 성공해서 금의환향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큰아들의 말대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리고” 거지로! 부끄러운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렇게 격하게 그 아들을 맞아줍니까? 단지 이유는! 그는 ‘당신의 아들’이고, ‘당신은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아버지의 품을 떠난 죄인임에도 은혜로 다시 자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선물입니다. 네! 이 선물은 공짜입니다. 우리는 공짜라고 하면, 싸구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결코 싸구려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 선물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구원이 제공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아니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살이 찢어지고, 피 한 방울도 남지 않는 십자가에서의 희생, 그것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은 사람! 당신의 자녀를 위한 자비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시 강조해 말씀드립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가장 값비싼 선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자! 그러면, 이 구원의 선물은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셋째,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성경은 그 대답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8절입니다. 엡 2:8 → “너희는 ⇨ 그 ‘은혜’에 의하여 ⇨ ‘믿음’으로 말미암아 ⇨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들을 잘 보십시오. 먼저 붉은색으로 된 구절들을 주∼욱 붙여서 읽어보겠습니다. “그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선물이라.” 잘 이해되시죠! 그런데 중간에 ‘파란색’으로 ‘더 크게’ 쓰인 구절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믿음을 통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믿음’이라는 말은 “나는 너를 믿는다”는 식의,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주실 때, 그 선물을 받고자 ‘내미는 우리의 손’ 그 손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미는 손’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손을 내미는 것은, 공로가 아닙니다. 업적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주시는 선물로 알고, 그것을 받기 위해 손 내미는 과정이 있어야 선물이 내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구원의 선물을 주실 때, 우리는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하고, “하나님! 나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선물을 받는 순간입니다.

나아가서 성경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행 16:31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번 주간 우리는 ‘추석 명절’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가족 가운데, 아직 마음을 열지 않고, 구원의 은혜!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손 내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믿은 여러분들이, 믿음과 구원의 출발점이 되셔야 합니다. 복음의 출발점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먼저 믿었으니, 다른 가족들도 믿을 수 있도록 이끄셔야 합니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인 출발점이 되셔야 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이 받은 가장 ‘기억나는 선물’과 ‘구원의 선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탕자에게 용서와 구원이 베풀어진 이유에 대해서 나눠보고,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3. 당신이 믿음과 구원의 출발점이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된 가족이나 사람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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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8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더불어 성장하고 거룩하라 (살전 5:12∼14)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 7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로 본이 됨으로 성장합니다.

대부분,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께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은! 결코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성숙한 인격은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의 본을 보고 자랍니다. 부모의 본이 자녀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 긍정적인 사람들과 교제합니다.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합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반대로 시험 든 사람,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머잖아 그 사람도 시험 들고, 부정적이 되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닮아갑니다. 그러므로 먼저 긍정의 본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고, 또 그런 사람과 교제하시기를 바랍니다.

 

2. 서로 격려함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말로서 상대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리는 말보다 죽이는 말을 더 쉽게 합니다. 죽이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네가 만들었으니 오죽하겠니! 네가 하는 일이 잘될 리가 없지…” 이런 말을 들으면, 듣는 사람은 마치 독을 먹은 것처럼! 의욕이 꺾이고, 소망이 사라지고,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너의 삶은 귀중하고 목적이 있어!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실거야…” 이런 말을 들으면, 듣는 사람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새 힘이 납니다. 도전하게 됩니다.

이런 격려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격려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에게도, 주의 일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에게도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정에도, 속회와 선교회에도, 그리고 일터와 직장에도, 나의 격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격려자로 살기를 결심하십시오. 만나는 사람들의 장점을 찾고,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입으로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복된 마음과 혀를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서로 가르침으로 성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는 배우기를 힘써야 하지만, 배우면서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가르쳐야 하고, 성도들에게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배움은 축복입니다. 사람은 배운 만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주님을 배운 만큼 성장하는 것입니다. 요 17:3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 ‘안다’는 것은 곧 ‘배움’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이 어린 사람, 신앙 연조가 길지 않은 사람들이, 선배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목회자와 중직자들 그리고 믿음의 연조가 오래된 성도들을 통해서 뒤따라오는 성도들이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앞선 사람, 중직자들은 “나는 많은 사람의 주목의 대상이고, 바른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골로새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골 3:16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이 말씀을 보면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전제가 되는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가르치는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지혜로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가르침의 기준입니다. 자기 생각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배우는 사람 또한, 말씀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자기 속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되고, 성장·성숙할 수 있습니다.

 

4. 서로 권면함으로 성장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영적인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나에게 권면해준다면! 영적인 사고 없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사각지대를 보고서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영적인 사고를 일으키게 될 것이고, 상대는 침묵하므로 나를 사고자로 만드는 ‘방관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면’은 ‘사랑’입니다. 권면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관심이 없다면, 절대로 권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충고를 한다면,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우리들은 남의 훈계 즉 권면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인이 나에게 권면하면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설교를 통해서 훈계를 받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권면이 있는 공동체라야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권면을 받는 사람은 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 3:13 →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네! 권면을 잘 하기도 하고, 잘 받기도 하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5. 서로 존중함으로 성장합니다.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상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가정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역기능 가정’ 혹은 ‘순기능 가정’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여기서 역기능과 순기능은, 학력이나 경제적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부부관계, 부자관계, 형제자매관계가 깨져 있으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고학력자들이라도 그 가정은 역기능 가정입니다. 반면에 가난하더라도 온 가족이 사랑으로 연결되어있는 가정은 순기능 가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기능으로 성장하는 교회는! 성도의 수, 경제력, 건물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 교역자와 성도와의 관계,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가 얼마나 건강하고 신앙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매우 중요합니다. 상대를 빈부귀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으로 보고,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천국의 상속자로 보는 것입니다. 상대의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대하면, 가정은 순기능적인 가정이 될 것이고, 교회는 순기능적인 교회가 될 것입니다.

 

6. 서로 고백함으로 성장합니다.

죄는 우리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영적인 성장도 방해하고, 관계의 성장도 방해합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방해를 받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죄라는 담 때문에 깊은 교제가 불가능하고 피상적인 교제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고백’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주님은 곧바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십니다. 요일 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고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런데 이 고백(자백)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것으로 좁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 5:16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같은 속회나 선교회원에게 서로 죄를 고백하면서 기도하면, 병 고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의 질병만을 고쳐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깨어진 관계도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과의 화목도 이뤄지고, 심령이 온전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속회나 선교회, 이런저런 소그룹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7. 서로 용서함으로 성장합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하고 아주 가까이 살고 있는 가족, 교우, 직장 동료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십시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듯이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요, 선택입니다. 나를 공격한 사람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빚을 탕감해주고,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사면해주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용서의 혜택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받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한 그루의 나무로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독목불성림,獨木不成林)라는 한자 성어가 있습니다. 네! 홀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불어 성장하고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오늘 말씀 중 본인에게 가장 중요 하게 여겨진 것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2. 격려란 말은 익숙한 단어이지만, 실제로 격려하는 일은 힘듭니다. 격려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 상대를 보는 눈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용서하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자신이고, 용서하면 가장 큰 수혜자 역시 자신이라는 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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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1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하나님께 꼼수 쓰지 맙시다 (레 27:1∼13)

 

레위기 27장은 서원에 관한 규례인데,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고, 나중에 무르려고 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서원의 무름’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서원(Vow)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이 무언가 조건을 내걸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면, 그 보답으로 이렇게 하겠다고 약속할 때 그것을 ‘서원’이라고 합니다. 물론,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인 헌신을 약속하는 서원도 있습니다.

1) 먼저, 성경에 나타난 서원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❶ 첫째는 위기서원입니다. → 인생의 큰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이번 위기에서 건져 주시면, 내가 이런 일을 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 밧단 아람으로 갈 때, 벧엘이라는 들판에서 야곱이 서원합니다. 창 28:20~22 →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①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②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③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위기 가운데 드린 서원’입니다.

또 사사기 11장을 보면, 사사 입다가 암몬과의 전투에 임하면서 이런 서원을 합니다. 삿 11:30∼31 →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역시 위기 가운데 드린 서원입니다. 그런데 입다의 서원은 경솔한 서원이었습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자기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맨 먼저 나와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입다는 그 딸을 여호와께 바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회했지만, 영적으로 무지하여 보속(補贖)으로 서원을 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딸을 바치고야 말았습니다.

❷ 또 하나는 감사서원입니다. → 간절한 인생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소원에 응답해 주시면, 나도 감사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서원입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가 이런 서원을 합니다. 삼상 1:11 →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의 이 서원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사무엘입니다. 한나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습니까?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뗀 후, 그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삼상 1:26∼28 →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한나는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성전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서원을 지킨 한나에게 하나님은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삼상 2:21 →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할렐루야! 사무엘은 커서 위대한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원을 지키면, 더욱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서원으로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합니까? 그것은 → 자기 자신이나 가족(3∼8절), 가축(9∼13절), 집(14∼15절), 토지(16∼25절) 등을 드릴 수 있습니다.

3) 그러면 서원은 꼭 갚아야 합니까? 네, 꼭 갚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 23:21 →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전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 5:5∼6 →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성도 여러분! 서원한 것은 꼭 갚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서원을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져서, 혹은 서원의 대상자가 거부하므로 서원한 내용을 지킬 수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2. 서원을 무르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은 ‘서원의 네 가지 종류’에 따라, 각 경우에 따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1) 사람을 두고 한 서원의 경우입니다.(2∼8) 자신이나 자녀를 드리겠다고 서원해놓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면 → 보속금(補贖金)! 일종의 ‘벌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벌금은 성별에 따라 다르고, 나이에 따라 다릅니다. 남자 어른은 50세겔, 여자 어른은 30세겔, 남자아이는 5세겔입니다. 한 세겔이 은 11g인데, 이것은 노동자 4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50세겔이면 노동자의 200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서원한 사람이 만약에 그 금액을 감당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8절을 보겠습니다. 레 27:8 →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한마디로 서원자에게 돈이 없다면 디스카운트! 깎아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성품입니다.

2) 가축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입니다.(9∼13) 하나님께 서원해서 바친 가축은 거룩한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어느 특정 가축을 바치기로 서원했는데, 그 가축과 너무 정이 들어서 바칠 수가 없다고 하면, 그 가축 값에다가 오 분의 일의 범칙금을 더해서 제사장에게 드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의도로 서원의 내용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 송아지였을 때 하나님께 서원했는데, 이 송아지가 너무 잘 먹고 잘 커서 아주 튼실한 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마음이 바뀌어서 “하나님! 이 소는 내 것으로 하고, 다른 소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바꿀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 27:10 → “그것을 변경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가축으로 가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불순한 의도로 나쁜 것으로 드리려고 하면, 둘 다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꼼수를 쓰면 안 되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산이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3) 집이나 밭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경우입니다.(14∼25) 집이나 밭은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원소유주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쳤는데 다시 무르고 싶을 때는 →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해서 그 가격에다 오 분의 일의 벌금을 더해서 드리면, 무를 수가 있게 됩니다.

4) 그런데,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해서 드릴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26∼33)

① 맏아들과 첫 새끼입니다.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서원해서 드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께서 당신 것이라고 선언하신 물건이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성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기생 라합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죽이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은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셨고 다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특정하게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서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③ 십일조는 서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해 주시면, 저는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이런 서원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당연히 드려야 할 것입니다.

소나 양 같은 가축도, 열 마리 중에 한 마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많은 가축 가운데 하나님 것을 구별하는 방법은, 외양간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에 막대기를 가로 놓고서, 가축들에게 자유롭게 지나가게 합니다. 그중에 열 번째 지나가는 것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조작해서, 소나 양을 억지로 줄을 세워서 열 번째 것을 제일 비리비리한 것이 지나가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에 속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레 27:32∼33 →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열 번째 지나갈 가축을 보니까 아주 실한 놈입니다. 이때 “아이고 왜 저렇게 튼실한 놈이 하필 거기 있어?” 하면서 그것을 빼고, 빈약한 것을 집어넣어서 순서를 바꾸면, 하나님이 그 둘 다를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기 27장의 주제는 ⇨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꼼수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신앙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책임 있는 삶입니다. 나의 신앙을 점수로 매겨본다면 몇 점을 줄 수 있겠습니까?

 

2. 서원을 이행하는 도중에 욕심이 생겨서 약속을 자기 입맛대로 변경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내 임의대로 축소했거나, 지키지 못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은 아주 정확하신 분(꼼수가 통하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 앞에, 새롭게 다짐하고 결심한 내용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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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4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희년의 복음 (레 25:8∼12)

 

오늘은 안식년이 7번 반복되고 그 이듬해인 50년이 되는 해, 즉 ‘희년’(Jubilee)에 대해서 ‘네 가지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희년 제도의 기본은 ‘안식년 제도’에 있습니다.

안식년에 관해서 출애굽기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 23:10~11 →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6년 동안은 씨를 심고 열매를 거두는 일에 힘써야 하지만, 7년째 안식년이 되면, 씨를 뿌리지도 말고 열매도 거두지 않음으로 일절 농사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파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열매가 있지만, 그런 열매는 자기 땅에서 난 것이라고 해도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에 열린 열매나 곡식은 특정 주인이 없는 것이고, 누구나 가져가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는 절도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심지어 짐승들까지 돌봐야 한다는 것이 ‘안식년의 첫 번째 정신’입니다.

나아가서 신명기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 15:1~2 →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형제나 이웃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안식년 끝에 가서도 빚을 갚지 못하면 탕감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면제년’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렇게 면제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식년은 가난한 사람이나 빚진 사람에게 엄청나게 좋은 해입니다.

또 신명기 15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신 15:12 →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러니까 종이 되었어도 6년 동안만이고, 7년째에는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이 되면, 토지도 쉬고, 사람도 쉬고, 빚도 면제해 주고, 노예로 삼았던 사람도 풀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안식년을 주신 목적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둘째, 사람이나 땅이나 6년을 일하고 사용했다면, 1년은 쉬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인간도 쉬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넷째, 재물을 쌓는 재미와 탐심에서 벗어나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다섯째,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은 천국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 희년의 기본정신은 ‘자유를 공포하는 것’입니다.

희년이 되면 자유를 공포해야 됩니다. 레 25:10 →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이 희년의 자유를 세 가지 ‘R’로 시작되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Return(돌아가다)입니다. 레 25:13 →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여기 ‘소유지’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2지파별로 배분해 준 땅을 일컫습니다. 이 땅은 대대로 팔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아프거나 가정사로 인해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그 땅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땅은 다가올 희년을 기준으로 값이 매겨졌습니다. 즉 희년이 40년 남았으면 40년 만큼의 값, 10년 남았으면 10년 만큼의 값으로 팔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희년이 되면 도로 원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땅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복음입니다.

둘째, Release(풀어 놓다)입니다.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에게 빚을 져 종이 되었다면 6년 동안 일하고 안식년에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6년이 채 안 됐는데 중간에 희년이 찾아오면, 그래도 무조건 자유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레 25:39~41 →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희년이 오면 무조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을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고도 하였습니다.

셋째, Rejoice(크게 기뻐하다)입니다. 희년은 기쁨을 되찾는 해입니다. 자유를 되찾은 자에게 가장 큰 감정은 ‘기쁨’입니다. 잃었던 땅과 자유를 되찾는 사람에게 큰 기쁨이 있을 수밖에 없죠! 희년을 히브리어로는 ‘요벨’이라고 하는데, 이 요벨은 ‘양각 나팔’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희년에는 양각 나팔을 불면서, 자유의 기쁨과 회복을 누리는 복된 해인 것입니다.


3. 희년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주일 날에 특별히 장사가 잘되는 직종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일날 문을 닫고 쉬기로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쉰다는 것은 곧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영업의 존폐를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이 있는 성도는 6일 동안 일하면, 주일에 쉬어도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니! 세상일을 쉬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배하는 삶이 진짜 복임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이 안식일의 개념을 잘 알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창 2:2 →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기 하나님께서 그가 하시던 일! 즉 ‘천지창조’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했습니다. 천지창조를 6일 동안에 이루고, 일곱째 날엔 그냥 쉬셨다, 노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날에 천지창조의 일을 ‘마치셨다’는 것은, 그날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말은, 어떤 일을 ‘완성, 마무리, 마감’하고 그것을 축하하고 기뻐하셨다는 뜻입니다. 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하신 일의 완성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난 6일 동안 수고하며 일한 것이, 진정 나에게 아름다운 결실이 되고, 완성이 되고,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려면, 그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 주셨고, 일터를 주셨고, 건강을 지켜주셨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신,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이 의미 있고, 감사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그냥 쉬려면 당연히 걱정되겠죠! 성경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 25:20 →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무슨 말입니까? 일하지 않고도 먹을 재주 있나?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레 25:21 →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할렐루야!

안식일이나 안식년을 지키기 위해서도 큰 믿음이 요구되지만, 희년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49년째가 안식년이고, 이어 50년째는 희년이기 때문에, 연속해서 두 해를 안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희년은 일종의 믿음 테스트 기간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믿음의 원리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이런 믿음을 하나님께 확실히 보여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년을 잘 지켰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노예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탐욕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희년은 차치해 두고 안식년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해서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가기까지, 490년 동안에 70년이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70년의 안식년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댓가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 동안 함으로써, 그 땅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대하 36:21 →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놀랍고 무섭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년을 지키지 않은 것을 하나님은 다 계수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보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안식년과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첫 설교에서 자신이 온 목적이, 희년을 선포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4:18~19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은 ‘나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의 은혜의 해가 오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으면, 죄로부터의 자유, 마귀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잃어버린 천국을 되찾게 되는 희년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안식년이나 희년을 지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까?

 

2. 안식년과 희년은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과 약자! 심지어 동물과도 함께 더불어 살라는 정신이 깃들어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입장은 무엇이었습니까?

 

3. 희년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십니까?



관리자
2022-08-06
조회 557


2022년 8월 7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더 높은 거룩성을 요구하신다. (레 21:1∼9)

 

여러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가 요구된다는 뜻입니다. 평소에 고위층으로서의 사회적 존경과 특권을 누리는 만큼, 사회가 어려울 때 그들이 누구보다 먼저 자기를 희생하고, 앞장서서 의무를 다하기를 국민들은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불러내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별된 백성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려야 하는 ‘제사장’들은 더욱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에, 거룩함의 수준이 더 높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제사장이란 직임은 신약에 와서도 일차적으로는 영적 지도자! 즉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모든 성도들은 다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벧전 2:9 →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새번역 성경)

그렇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서 구별된 영적 제사장 된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삶으로 보여주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사실은!

 

1. 영적 권위는 직책이나 지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삶에서 나옵니다.

레 21:4 →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백성의 어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단지 제사를 집례하는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모든 면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 임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더욱 성결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제사장이라는 직책이나 지위만으로는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참된 권위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권위는! 오직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에만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별 됨이 없이 단지 높은 지위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 권위를 발휘하려고 한다면, 당장에 거부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직책이나 지위에만 근거한 권위는 결코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권위 아래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있던 권위는 어떤 권위였습니까? 예수님에게 높은 지위나, 화려한 경력,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권위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거룩한 삶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바른길로 인도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위에 순복하게 해야 할 지도자들은, 먼저 자신의 성결에 힘써야 합니다. 자신이 성별 된 삶을 살지 않으면서, 바른 삶, 정결한 삶을 살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것은 허공을 치는 소리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2. 구체적으로 어떤 거룩함을 요구하십니까? - 제사장의 성결규례

 

① 시체 접촉금지 레 21:1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죽은 사람의 몸을 만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일반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직계 가족의 장례가 생기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 자녀 형제, 그리고 결혼하지 않는 누이의 장례식입니다.

죽은 자의 ‘성경적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신이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는 비위생적이고 불결합니다. 특히, 전염병으로 죽은 자는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와의 접촉금지 명령은, 거룩한 제사장을 육체적으로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내려진 명령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죽은 자의 의미’는 ‘영혼이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죄인은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에 묻혀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러한 세상 가치관과 세상 문화에 젖어 사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물들 수 있기 때문에, 제사장의 영혼이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12:2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생활 하라는 뜻인 것 같지만,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서 살되 구별되게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꼭 배와 물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배는 물 없이는 무용지물입니다. 꼼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지, 물에 침몰하면 그 역할은 끝입니다. 세상 속에 사나 세상 풍조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은 비싸거나 화려한 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② 과도한 애도 금지 레 21:5 →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이 말씀은 당시 이방인의 장례 풍습과 같이, 가족이 죽었다고 해서 머리털을 대머리같이 빡빡 깎거나, 수염 양쪽을 밀어서도 안 되고,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는 표시로 자기 살을 베는 자해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슬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정신 건강에도 좋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슬픔 가운데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슬픔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적절한 답을 주고 계십니다. 살전 4:13 → “형제들아 자는 자들(죽은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③ 제사장 자신의 결혼규례 레 21:7 →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니라.” 여기 부정한 창녀란? 당시 이방 신전에서 매춘하는 여자들을 말하며, ‘이혼당한 여인’이란 음행의 부정행위로 인해 쫓겨난 여인을 말합니다. 합법적인 이혼증서를 가진 여인과 결혼할 수 있었던 일반인과 비교해 보면, 좀 더 강화된 규례입니다.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④ 제사장의 딸이 음행하면 불사르라. 레 21:9 → “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 제사장의 가족들에게도 더 엄격하게 거룩함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죽이라고까지 명령한 것은, 가정을 거룩한 신앙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딤전 3:4∼5, 12, 딛 1:6) 모든 성도들은 자녀들을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로 길러 가기 위해, 스스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⑤ 제사장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늘 생각하며 살라. 레 21:4 →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네! 제사장은 그 나이와 상관없이 백성들의 어른이므로, 스스로를 잘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딤전 4:12 →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레 21:6 →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한 마디로, 제사장은 예배를 주관하는 자이니 더욱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배자로서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⑥ 백성들은 제사장을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알아주라. 레 21:8 →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네! 일반인들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일반인을 대신하여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구별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제사장들은 그 사명과 권위에 걸맞게 구별되고 거룩한 삶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할 때 시대는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특권은 책임이다!” 제사장직은 감투로 주어진 직분이 아니라, 헌신하라고 주어진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지고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영적 분별력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눔과 묵상

 

1. 영적 리더에게 요구되는 조건들에 대해서 나눠 보고, 우리 자신들의 삶을 비춰봅시다.

 

2. 자신이 세상에서 거룩함과 구별됨을 지켜 가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이며,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서로 나눠봅시다.

 

3. 평신도는 적당히 해도 된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세상의 제사장들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더 높은 거룩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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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자 (시 89:46∼52)

 

오늘 본문 시편 89편은, 하나님이 다윗과의 언약에 근거해서, 지금 열방의 조롱거리가 된 다윗 왕조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고 성취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89편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대해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시 89:3∼4 →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은 오늘 성경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앞의 말씀인 시 89:19∼37까지의 말씀인데, 길지만 3번으로 나눠서 읽어 보겠습니다.

① 먼저, 하나님께서 다윗을 직접 택하셨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셨은즉, 원수와 대적이 다윗을 해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시 89:20∼24 →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② 이어서,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인자하신 분으로서 언약을 굳게 지킬 것이지만, 만일 자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회초리와 채찍으로 사랑의 징계를 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시 89:28∼32 →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③ 이렇게 사랑의 징계를 할지언정, 결코 하나님의 언약을 폐하거나 깨뜨리지 않고 다윗의 후손을 장구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시 89:33∼37 →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그런데 38절부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집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어조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분명하게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는 것을 토해 놓습니다. 시 89:38∼41 →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약속하셨으면 지켜주셔야지! 이게 뭡니까? 항의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하실 때, 다윗의 후손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징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0∼32절에서도 그랬고, 사무엘하 7:13∼16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원수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은 웬일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지금 ‘당돌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연거푸 하나님께 질문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시 89:46, 49 →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前)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이런 기도는 사실 그냥 읽기에도 좀 가슴이 떨립니다. “불경스럽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기도해도 되나?” 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자녀 된 성도가 누리는 은혜요, 특권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걸 붙들고 기도하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단 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되어 이방 민족에게 끌려간 지 어언 60여 년이 흘렀습니다. 다니엘의 나이도 80세 가까이 되어, 이제는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희망도 희미해지고, 기도할 힘조차 빠졌을 때입니다. 다니엘이 왕의 서고에 들어가 이 책 저 책 살펴보다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두루마리 성경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읽다가 깜짝 놀랄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 9:1∼2 →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그때 다니엘이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날부터 다니엘은 금식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단 9:3∼4, 17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러니 약속하신 것을 지켜주세요!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황폐한 예루살렘 성을 회복시켜 주세요.” 이렇게 약속을 붙잡고 기도한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를 위하여! …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해방과 예루살렘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니, 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곧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담대함의 표현인 것입니다. 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할 때는, 이런 담대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다니엘의 기도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견고하게만 보이던 바벨론 제국이, 신흥 제국 메대에 순식간에 망하고, 곧이어 페르시아 제국에 복속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했습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당돌해 보이는 이런 기도는! 다니엘 같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동일하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네!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은혜와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드리는 기도’와 vs 그저 ‘힘듭니다.’ ‘괴롭습니다.’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는 기도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 66년 동안, 오만 번 이상의 기도 응답과, 일만 명이 넘는 고아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던 ‘조지 뮬러’ 목사님은, 세 개의 성경구절을 ‘약속의 말씀’으로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① 시 68:5 →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② 빌 4:19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③ 마 17:20 →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고 기도했기에, 그는 그 큰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 또한, 아프리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선교사 ‘리빙스턴’은 주님께서 주신 두 가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 승리했습니다. ① 요 14:18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② 마 28:20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너무나도 중요한 ‘자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글로 써서 주신 ‘보증서’와 같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땅문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곳엘 가보니, 어떤 사람이 그 땅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땅문서를 보여 주면서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찾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바로 그와 같은 책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약속을 나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믿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후 1:20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을 여러분 심령에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성도 여러분! 낙심하고 좌절하고 계십니까? 살기가 힘들고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안 하셨다면, 이제부터라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미래를 환하게 여는 확실한 길이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약속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와 특권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말씀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여 응답받고 승리한 오늘 예시된 사람들 중에 가장 본인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나,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