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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김성윤
2023-08-26
조회 262


제목: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 (렘 24:1∼10)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유다 백성들은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완고하여 점점 더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급기야 오늘 예레미야 24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렘 24:1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왕자를 비롯해, 유다의 고관들과 바벨론에서 써 먹을만한 기능을 가진 사람들을 모조리 포로로 붙들어 갔으니,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애통해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교만하여!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보다 훨씬 나은 자로 착각하였고, 애굽의 도움 운운하며 완고함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 두 무화과 광주리의 환상

이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두 광주리에 무화과 열매가 가득 들어 있는데! 한 광주리에는 금방 딴 것 같은 싱싱한 무화과가 있고, 다른 광주리에는 오래돼서 신선도도 떨어지고 물러서 먹을 수 없는 상태의 무화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환상을 해석해 주시는데!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좋은 무화과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땅으로 쫓아낸 백성들이고 (24:5), 나쁜 무화과는! 이 땅에 살아남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애굽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사는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24:8)

이것은 상식을 뒤집는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판단은! 장차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끌어갈 “남은 자”는! 유다에 남아있는 자들이 아니라, 포로로 끌려간 자들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7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렘 24:7 →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얼른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지만! 좋은 무화과가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간 사람들이라는 해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한 긍휼’을 발견하게 됩니다. 포로로 끌려간다는 것은 절망에 처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오게 하셔서,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시며, 알곡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험한 환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고, 찾게 하고, 돌이키는 역사를 이뤄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잃어버린 고국 땅을 회복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으로 끌려가 당장은 비참한 노예, 포로 신세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서 겸비해지고,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이 진정한 복인 것이 맞습니다. 실제로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 스룹바벨, 에스라, 스가랴, 느헤미야 등등 정말 영적으로 각성한 인물들이 많았고, 일반 백성들도 크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많았으니, 예언의 말씀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나쁜 무화과’로 비유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레미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씀에 귀를 막고, 오로지 현실의 이득과 세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운 좋게 유다 땅에 남아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영적으로는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이었으며, 세상적으로만 약삭빨랐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직 유다에 남아 있어! 자신들은 화를 피했다는 것으로, 더 복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아둔한 결과일 뿐입니다. 유다에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는 데 소홀했습니다. 애굽으로 도망간 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보다는 당장의 위험을 피해서 달아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꾀에 의지해 사는 자들입니다. 자기 힘만 믿으며 사는 사람은! 당장에는 좋아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고생과 연단 후에 쓰신다.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을 겪을 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 앞에 겸손해진다면 고난도 축복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고난을 겪는 사람을 보면서, 마치 자신은 잘 믿어서 고난을 겪지 않는다고 착각한다면 그 평안은 저주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 평탄한 삶을 원합니다. 소위! 가내 안전, 사업번창을 바랍니다. 사람들은 젊어서부터 그런 평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유복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판단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는 좀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쓰실 그릇들은! 바벨론으로 보내듯이 매서운 삶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혹 느끼셨을지 모르지만! (물론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 귀하게 쓰실 그릇들은, 군대도 어려운 곳으로 보내십니다. 반면에, 보통으로 쓰실 그릇들은 군대도 편한 곳으로 배치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사람일수록 ‘특수 훈련’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므로 ‘평탄하게 사는 것’을 동경하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얼마 만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까? 네!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생각보다 너무 느리게 움직이십니다. 그렇게 바벨론으로 훈련을 받으러 갔으면! 길게는 2∼3년, 아무리 길어도 5년 정도 훈련받고, 남은 인생을 주님께 헌신하며 살면 좋겠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평생 훈련만 받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받고 있는 특별 훈련이! 만약 내 아들 딸을 위한 것이고, 내 손자 손녀 세대를 위한 것이라면!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마음은 많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 손들은 아버지나 어머니,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말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며 살면서도, 바르고 진실하게 사는 모습을 자녀 손들이 보고 느끼고 산다면! 진정으로 존경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삶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상관없이 매 순간 진실하고 바르게, 미음과 순전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잘 될 때도 깊이 생각해야 하고, 잘 안 될 때도 낙심 말아야!

이제 무대를 신약시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한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각종 더러운 짐승이 그릇에 담겨서 내려오고, 하나님은 그것을 ‘잡아 먹으라’고 하십니다. (행 10:9∼16) 무려 ‘세 번이나’ 똑같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베드로가 깨닫는 것이 더뎌서, 세 번이나 똑같은 환상을 반복해서 보여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베드로는 초대교회 부흥의 주역으로 매우 ‘잘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루에 수천 명씩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돌아오기도 했고, 병자들은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자기 위에 지나가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행 5:15) 유다 땅에서의 선교가 그야말로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앞서 보셨듯이 ‘이방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은 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지금 유대 선교가 너무너무 잘 되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대 사명으로 주신, “유대와 → 사마리아와 →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확장적인 선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되면, 근시안이 되어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놓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때로부터 이방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는 했지만, 베드로가 이방 선교의 주역이 되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후반부는 베드로가 아닌, 바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장면을 바꾸어, 요한복음 21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질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평생 그물질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못 잡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베드로가 만약 물고기를 많이 잡았더라면! 그는 영원히 그냥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 남은 인생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 길이 당장은 쉬운 선택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밤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잘 안 되는 기적’을 통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고, 부활 후에도 다시 재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잘 되는 것만 ‘기적’이 아닌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 잘 안 되는 것도 ‘기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왜 나라를 망하게 하고, 심지어 포로로 끌려가게까지 하시나요? 당신의 백성들을 더는 가나안 땅에 놓아두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풍요의 신 ‘바알’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에 빠져 사는데, 아무리 경고하여도 도통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을 버리면서까지, 당신의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크나큰 어려움과 아픔과 상처까지도! 나를 사랑하사 나를 붙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연단을 통하여! 나를 회복시켜 ‘좋은 무화과’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의 믿음 생활의 성향은! 회개하고 돌이키기에 빨라 ‘좋은 무화과’로 인정받을 만 한가요? 아니면 약삭 빨라 ‘나쁜 무화과’로 취급받게 될까요?


 2. 나는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로 살기를 원하는지? 세상의 능력을 추구하는 자로 사는지 스스로를 살펴 보고 나눠봅시다.


 3. 내 삶에도!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보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음을 깨달은 일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김성윤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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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20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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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2023-08-05
조회 274

제목: 거절하시는 하나님 (렘 14:1∼12)


전 세계적으로 폭염과 폭우가 이어지는 가운데, 구테흐스 UN사무총장이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는 끝났고, ‘지구열대화’(Global Boiling)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신속한 대응을 촉구했습니다. 펄펄 끓는 기상이변의 위험성을 ‘온난화’와 같은 무난한 용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지구 열대화는 한마디로! 인간의 편의주의와 과학 만능이 빚어낸 인재(人災)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닫고 각성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더는 학대(abuse)를 하지 말고, 보존하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더 나빠지지 않은 지구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어, 그들도 이 땅에서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 가뭄과 홍수 같은 재앙은 죄와 무관치 않습니다. ⇨ 우물에 가도 물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지금 가뭄으로 유다를 심판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렘 14:1∼6 →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가뭄으로 성읍마다 백성들이 기력을 잃고 피곤하여, 땅바닥에 쓰러져 탄식합니다.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초원이 메말라서 새끼 사랑이 극진하다는 암사슴도 새끼를 낳았지만 버려야 했습니다. 가장 목숨이 질기다는 들 나귀도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생명선이 끊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과 동물과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한마디로, 죄의 결과! 자연의 신음소리가 커지게 되었고, 마침내 자연의 역습으로 인간의 통곡 소리도 커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연일 수 있겠습니까?

모든 곳이 그렇지만,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사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끝장나는 곳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함께하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맞춰 내려 주시는 하나님이 계실 때에야, 비로소 약속의 땅(promise land)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과 우상을 따라가니, 땅이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주여!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 아직은 시간이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새번역 성경’으로 7∼9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렘 14:7∼9 →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마십시오.”

예레미야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② 기근으로 절망하는 이스라엘에게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③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만이 이 기근을 끝낼 수 있음을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행하고 계십니까? ① 하나님은 유다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다. ② 이스라엘의 기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처럼 그냥 계시며,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셨습니다. ③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동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유다가 하나님보다 이방신과 우상을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에! 그들이 대우한 대로, ‘무능한 하나님이 되시기로 스스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놀라운 사실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구원자시며,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니,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마시고 구원해 주옵소서.” 예레미야는 회개할 줄 모르는 유다 백성들을 대신하여 “우리의 죄악, 우리의 타락,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자신을 백성들과 연대하여 죄를 인정하면서 자복하고 있습니다. 정작 유다 백성들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동족과 하나 되어 ‘우리’라는 말을 6번씩이나 반복하면서, 유다에 긍휼과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간구와 호소에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렘 14:11 →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참으로 매정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3.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하셔도 ⇨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자고 외칩니다.

당시 하나님은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에, 선지자에게 더 이상 유다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렘 14:10∼12 →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하나님은 먼저, 유다 백성을 ‘가뭄으로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기를 좋아하고, 그들이 죄악의 발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즉,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는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들을 징벌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제 금식도 소용없고, 변제와 소제도 받지 않겠다. 단호하게 칼과 전염병으로 심판하고 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 백성을 위해 복을 빌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일말의 소망마저 꺾어버리십니다. 선지자로서는 참으로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황송한 말씀입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의 ‘심판 의지’가 단호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유다가 그동안 어그러진 길을 살아가면서, 드렸던 기도와 제사에 이미 충분히 질리셨고 괴로우셨기 때문입니다. ‘구원 의지’가 무엇보다 크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이라,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렘 14:19∼21 →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겉으로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셔도, 진정 유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그 생활을 고치고 주께로 돌아오면, 노여움을 푸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고 예레미야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십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아도! 참 기도할 일이 많고, 회개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돌보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여름 태양보다 더 뜨겁게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기만 하면, 인간의 힘으로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도 금방 해결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비가 오질 않아 화초와 곡식들이 누렇게 변하고, 축 처지면!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어보지만, 턱없이 부족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번 시원하게 비를 내려 주시면! 화초와 곡식들이 쌩쌩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힘으론 턱도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한 방에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누려야 그 영혼이 쌩쌩하지, 다른 세상 것들로 기쁨을 얻고, 만족을 누리려 해도 결코 진정한 해갈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극심한 가뭄과 기근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는 회개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의 이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우리가 아니라, 진정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고 지키라고 위탁받은 인간이! 특별히 이 사명을 깨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픈 지구를 위해 뭘 할 것인지? 뭘 할 수 있는지? 나눠봅시다.


2. 기후재난이 생명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고통을 호소하기보다 무엇에 힘써야 할지 나눠봅시다.


3. 회개하고 그 생활을 고치고 돌아오면, 노여움을 푸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도록 자신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시다.

김성윤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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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20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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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202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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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202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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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20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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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202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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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배! 복음에 합당한 삶 (롬 12:1∼5, 요 4:23∼24)

 

지난 5월 5일, 세계보건기구 WHO가 3년 4개월 동안 지속했던 ‘코로나19 펜데믹 사태’를 해제함으로써, 코로나 ‘엔데믹’을 선언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코로나’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감염병 수준에서 통제·관리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가운데, 신앙생활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마음껏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걱정과 염려를 떨쳐버리고, 열심히 모여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속회와 선교회 등 모든 소그룹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또한 ‘핵심적인 것은’ 예배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예배가 살아야 성도들이 삽니다. 만일! 예배가 습관화되고, 형식화되고, 죽어 있으면, 교회도 죽고, 성도들도 죽습니다. 문제는 예배입니다.

 

1. 신앙생활의 기본은 예배

군인들의 제식훈련에서 ‘차렷 자세’는 모든 동작의 기본동작,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본동작인 차렷 자세가 흔들리면, 다른 모든 자세가 흐트러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기본자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가 흔들리고,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이 다 흐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예배를 살펴보면! 편의주의적 발상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인해서, 예배의 영성을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주일성수의 전통은 이미 흔들려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저녁 예배나 새벽기도를 드리는 것은 특수한 사람의 일처럼 되어 버렸고, 그나마 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조차도!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5∼10분 늦게 나왔다가, 축도가 마쳐지기가 무섭게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의 교제! 봉사와 섬김! 교육과 배움! 이런 것들과는 아무런 연관을 맺지 않으면서, 그래도 예배는 드렸다고 자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 4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4:23b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기 ‘찾으시느니라’로 번역된 → ‘제테오(zhtevw)’는 ‘집요하게 찾다(seek)’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잃어버린 어떤 것이나, 자기와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을, 성심껏! 마치 수색하듯이 샅샅이 찾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아주 적다는 말씀이고,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말씀이고,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쓰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인물 좋은 사람도 아니고,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지위 높은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입니다.

 

2.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

오늘 첫 번째 본문인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롬 12:1∼2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①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②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③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첫째,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어떻게 우리의 몸이 제사가 되는가? ① 눈으로 악한 것을 보지 아니하고, 그것으로 제물이 되게 하라. ② 혀로 더러운 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제물이 되게 하라. ③ 네 손으로 불법한 일을 행하지 말고 번제가 되게 하라. 그러나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행도 해야 한다. ④ 손으로 구제하고, ⑤ 입으로 찬송하고, ⑥ 귀로는 성경의 모든 교훈을 들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 눈과 귀와 입, 모든 지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네! 모두 그런 예배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보고 듣고 맞닥뜨리는 것은, 하나 같이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포로로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갔지만,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결심하고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움과 불편함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지만, 세속으로부터 자기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탁월한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왕 다음가는 지도자들로 세워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셋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보고 따라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의 뜻대로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면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접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으며,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을 기쁘게 받으시고, 합당한 상을 주셨습니다.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오늘 두 번째 본문인 요 4장에서는 이렇게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두 가지 요구입니다. 요 4:23∼24 → ‘① 영과 ② 진리로(in spirit and truth)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영으로 예배하라!’ 여기 ‘영’이란 헬라어 단어는 → ‘프뉴마티(πνευματι)’로 ‘외적인, 허례허식’에 반대되는 ‘진실된 마음의 자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참 예배자는 ‘마음의 자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자리에 죄의 용서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그리고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다면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온 마음과 진심을 가지고 예배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몸은 예배당에 나와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다면, 그는 성전 마당만 밟은 사람입니다.

둘째,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성경의 진리를 토대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②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될까를 생각하는 예배와, vs 그저 내 인생의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는 무속신앙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려 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힘과 능력을 구하고 ② 지혜와 길을 발견하려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3. 예배의 회복은! 모든 것의 회복의 출발점

예배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예배’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람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인에게는 ‘믿음과 사랑과 헌신’의 삶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배의 실패는 곧 삶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긴 두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다윗입니다. 다윗이 가졌던 신앙의 특징은 ‘성전사랑과 예배 중심의 삶’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올 때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던 사람입니다.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지요! 그러나 이런 다윗의 모습을 부끄러워했던 다윗의 아내 미갈은, 평생 불행한 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으며, 또한 백향목으로 만든 궁전에서 평안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마음에는 편안치 못한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아직도 천막 안에 모셔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하 7:2 →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그는 결심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을 지으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다윗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 13:22 →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는 양치기 목동 출신이었지만, 성경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위대한 성군이 되었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둘째, 느헤미야입니다. 그가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성문이란 성문은 다 불타고 없어졌습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서 3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느 3:1 →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羊門)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네! 양문을 제일 먼저 수축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우선순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양문(羊門)은 제물로 드릴 양을 끌고 들어가는 문입니다. 즉 ‘예배’의 문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가정, 무너진 곳이 많지만, 가장 시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배부터 재건해야! 거기서부터 만 가지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의 회복은 곧 삶의 회복이고, 축복입니다. 온전한 예배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의 삶에서 회복되어야 할 최우선적인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지 나눠봅시다.

 

2. 당신의 예배 생활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잘하고 있는 것과 제대로 못 하는 것은 무엇인지, 예배와 관련된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모든 삶의 문제는 곧 예배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경험과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