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영어로는 ‘Bible’이라고 합니다. → 이것은 구약과 + 신약 즉, Old Testament와 New Testament를 합쳐서 부르는 것입니다. 즉, 구약(舊約)성경은 → ‘구세주’로 오실 ‘초림(初臨)예수님’에 대한 옛 약속(Old Testament)이고, 신약(新約)성경은 →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재림(再臨)예수님’에 대한 새 약속’(New Testament)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약속은 일방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수직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논하거나 조정하거나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 고향을 떠나겠느냐? 동쪽으로 가겠느냐? 아니면 서쪽으로 가겠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떠나라. 가라. 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따르면, 약속으로 주신 모든 말씀과 복이 순종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약속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런 약속을 ‘수평적 약속’이 아닌 ‘수직적 약속’ → 곧 ‘디아데케’ (diaqhvkh)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 이것이 영어로는 ‘Testament’라는 단어입니다.
이 Testament라는 단어는! 영어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지닌 또 다른 단어 Promise와 비교되는데! 이 ‘Promise’는 → ‘상대방과 내가 서로 의논하고 동의해서 하는 약속’입니다. 반면에 ‘Testament’는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유효케 되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약속의 성격’은 → 일방적인 약속, 선언적 약속 Testament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유산을 상속받는 특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믿음의 약속이며 보상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약속’의 말씀, 언약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에는 언제나 명령이 함께 주어지고, 이에 따른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 약속과 함께 주어진 명령에 따르는 순종은! 간단하거나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길고 수고롭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면이 있고,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변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고, 능력 부족으로 지키고 실행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반드시 실행됩니다.
세상에서도 약속이 보장되는 상품, 신용이 있는 상품이라야 잘 팔립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변치 않는 약속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약속은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현재’와 ↔ ‘약속이 성취되는 그 시간’과의 사이에 ⇨ ‘믿음’과 ‘인내’와 ‘기다림’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세상 사람들! 즉,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해도, 보이는 것이 없고 증거가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뜬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세계를 바라보고 소망으로 살다가,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이런 사전 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겠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세 번이나 연속으로 “내가 속히 오리라.”(ναι ἔρχομαι ταχύ, I am coming soon)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① 계 22:7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② 계 22: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③ 계 22:20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확실성’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와 감격’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심령에 ‘마라나타’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이 말이 기쁨으로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상 받는 성도
재림하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계 22: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리고, 성도가 받을 여러 가지 상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10:41∼42 →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꼭 선지자가 되고, 의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알아주고 영접하면 똑같은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살전 2:19∼20 →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여기 ‘자랑의 면류관’은! 전도자가 누릴 영광과 기쁨, 존귀함을 의미합니다.
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기 ‘의의 면류관’은 핍박과 환란 중에서도 인내와 순종으로 믿음을 지켜낸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계 2:10b∼11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여기 ‘생명의 면류관’은 믿음의 결과로 주어지는 부활과 영생의 복! 즉, 천국에 들어가는 상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오늘날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숙제를 잘해 가면 선생님께서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여러 개 그려 주셨습니다. 그 후에는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마치는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 숙제 검사’를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으십니까? 저는 이런 도장을 꼭 받고 싶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 그런 기대를 가지고 믿음생활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생의 졸업식 = 시상식에서 상 받는 날
우리나라 대학교의 졸업식은 추운 겨울에 하기 때문에 좀 다른 풍경이지만, 미국의 대학교 졸업식엘 가보면! 5월 말 6월 초에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물론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네! 상 받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또한, 상 받는 사람을 축하해줄 가족들이 들어갑니다.
그럼 누가 상을 받을까요? 공부 잘한 사람들, 어떤 공적을 이뤄 학교의 이름을 빛낸 사람들이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학교 졸업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졸업식’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졸업식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 시상식이 있을 것인데! 수상자 명단에 여러분의 이름이 받드시 있어, 상급과 면류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좋은 상을 받으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고전 9:24∼25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에게는 썩지 않는 승리의 면류관을 주실텐데, 그 상을 받기 위해서 모든 일에 절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빌 3:14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땅의 썩어질 상이 아닌, 하늘의 영원한 상 받기를 목적하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목사인 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벧전 5:3∼4 →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양무리를 잘 인도한 사람에게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는데, 저도 이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본이 되는 신앙생활 잘하겠습니다. 끝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성도님들도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하게도 이 예배가 인생의 마지막 예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새롭게 출발하시길 바랍니다.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인생의 졸업식 날이 올 것인데, 즐거움으로 그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귀한 상을 받고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멋진 수상소감을 말하며,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약속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유효케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와 감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마음은 어느 쪽인지 나눠봅시다.
3. 인생의 졸업식 날! 나는 상 받는 자로서 즐거움으로 그 시상식에 참석할 것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날이 될 것인지? 생각하면서 가진 새 결심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서기 1,254년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코 폴로’(Marco Polo)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일찍이 실크로드를 따라 몽골제국까지 와서 ‘쿠빌라이 칸’을 만나 궁중무역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마르코 폴로가 17살 되었을 때 그 무역 여정에 동행했는데, 그때는 몽골제국의 제5대 칸(王)인 ‘쿠빌라이 칸’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어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었고, 수도를 지금의 베이징-북경으로 정한 때였습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4개월의 여정 끝에 베이징에 도착하여 황제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게 됩니다. 이때 황제는! 젊고 유능해 보이는 마르코 폴로에게 동남아 제국과 인도를 돌아보고, 그 보고서를 제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그는 약 17년 동안 중국 서남부,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의 제 국가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 24년 만에 고국 이탈리아로 귀국하는 길에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북부까지 들러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이 책은 당시 서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동방견문록’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 책에 우리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놓았어! 이제라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겠나?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자네의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지?” 그러자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그리고 내가 보고 겪은 것의 채 절반도 기록하지 못했다네.”
제가 오늘 ‘마르코 폴로’와 ‘동방견문록’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천국’의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상상으로 꾸며낸 곳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서기 1,300년 당시엔 ‘동방견문록’을 보고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늘 이 시대의 눈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다 실제 하는 세상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모두 ‘천국’을 ‘실제 하는 세계’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결코 ‘상상의 산물’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존하고 있으며’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2∼3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두고 ‘내 아버지 집’, ‘거할 곳’, ‘거처’, ‘나 있는 곳’이라고, 몇 차례나 반복해서 ‘천국은 구체적인 장소’인 것을 명백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게다가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철석같이 약속까지 해 주셨으니, ‘천국의 장소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는 천국엘 간다. (3~4) ⇨ 아직 기다리는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가 지각할 수 있고 또한, 모든 피조물을 수용하고 있는 현재의 시공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가서는 안 될 ‘지옥’도 포함하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게 될 천국은 과연 어떤 곳입니까? 오늘 성경이 말해 주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계 21:2 →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많지만! 요한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은!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움’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새로워지고 개량되고 좋아진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다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계 21:1b →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네!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전혀 새로운 장소’입니다. 계 21:2a →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물론 이 말도,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적으로 ‘하늘에서 만들어져서 이 땅에 내려왔다’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완전히 새로운 장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곳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막히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② 인생의 모든 고통이 더 이상 없는 곳입니다. 계 21:4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여기 눈물, 사망, 애통, 아픔은 다 처음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문제와 아픔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고통의 조건과 내용들이 다 치유되고 소멸되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주시고자 원했던 선물!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에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빌 3:20 →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아멘. 이 꿈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린 천국에서 살 것이다. (5∼8) ⇨ 두 세계! 천국과 지옥
① 천국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생을 누리는 장소인데, 오직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계 21:6b~7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먼저, “이기는 자”라고 한 까닭은! 천국은 말세가 될수록 더욱 거세어질 온갖 마귀의 시험과 박해 중에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은! 그 천국에서의 삶은 그저 ‘하나님과 같이 사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 처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누면서 살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홈 스위트 홈’ ‘행복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② 반면에, 천국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계 21:8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기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앞서 “이기는 자”와 대조되는 자들로서 일단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도중에 돌아서 버린 ‘배교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일시적인 신앙생활’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뒤이어 나오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 즉 불신자들과 똑같이 취급될 뿐입니다.
그 외의 “흉악한 자” “살인자” “음행하는 자” “점술가” “우상 숭배자”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이란! 곧 ‘믿지 아니하는 자’와 동격으로 불신자들의 삶에 저절로 따라오게 되는, 온갖 악행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의 사람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국’과 극적으로 대조되는 ‘지옥’에 던져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이 죽는 것을 ‘첫째 사망’이라고 한다면, 지옥에 던져져서 영벌을 받게 되는 것을 일러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두 번 태어나고(육적, 영적) 한번 죽어 천국에 이르고, 불신자들은 한 번 태어나고(육적) 두 번 죽어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부모님을 통해 한 번 태어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다 천국에 이르는 복된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③ 천국은! 성도들이 지옥에 떨어진 악한 자들과 완전히 분리되는 곳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6:26 →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그 어떤 종류의 왕래나 소통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 모여 사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쁜 사람’, ‘악한 인간’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환상적이고 완벽한 공동체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정말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은! 바로 ‘악한자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악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정말 ‘좋은 곳’이, 바로 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천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첫째 → ‘천국이 정말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나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충만한가?’라는 질문이고, 둘째 → ‘지옥이 그렇게 끔찍한 곳이라면!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이웃이 그 지옥에 가지 않도록 그들을 건져내는 일인 전도에 힘을 쓰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모쪼록 천국을 사모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다 천국에 입성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도 여러분으로 인하여 다 전도 받아 천국에 이르는 가장 놀라운 축복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천국과 지옥의 실재(實在)에 대해서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오늘 말씀을 들은 후의 변화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만이 아니라, ‘지옥’도 포함하는 세계라는 사실이 본인에겐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두 가지 질문(기대와 소망, 전도의 사명)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가 살게 될 천국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본인에게 가장 기대되는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날씨가 무더울 때,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원한 생수입니다. 요즘은 다양한 음료수도 많고 시원한 과일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그 무엇도 ‘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목이 마를 때 가끔 다른 음료를 마셔봅니다만, 그러나 역시 정말 목이 마를 때는 ‘물’이 최고입니다.
생각해 보면!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면서 수분이 부족해지지 않도록 ‘갈증’ 곧 ‘목마름’이라는 경보장치를 달아 두셨습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수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마음이 말라비틀어져 편안하고 부드러운 말이나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칠고 날카로운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 내면이 뭔가 목마름을 느낄수록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심령이 고통당하는 원인을 ‘갈등’에 있지 않고, ‘갈증’에 있다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내면적으로 무언가가 고갈되어 있으므로, 진정한 만족이나 행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등’이 아닌 ‘갈증’이 근본 문제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6절에 한 나무가 소개되고 있는데 바로 ‘떨기나무’입니다. 이 ‘떨기나무’는 당당한 거목과 비교하면 참으로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나무라기보다는 차라리 덩굴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곤핍하고 초라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또한, 한때는 대단했지만, 지금은 초라하고 메마른 ‘유럽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걱정스럽기는, 한국 교회도! 초라한 떨기나무 교회로 전락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떨기나무로 전락하거나, 반대로 거목으로 자라가는 구분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해답으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느냐? 아니면, 곧 다시 목마를 인간과 세상을 의지하느냐? 여기서부터 ‘떨기나무’가 되느냐? 아니면 ‘거목’이 되느냐? 로 나뉘게 된다고 말합니다. 본문 5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3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렘 17:5 →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① 맨 먼저, “무릇 사람을 믿으며…”라는 말에서는 사람이란 단어로 ‘아담’(אדמ)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아담(אדמ)이라는 단어는 ⇨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인류 ‘아담’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보통명사로서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을 가리킬 때, 바로 이 ‘아담’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אדמ)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사람’이라는 말은! → “사람은 다만 ‘피조물일 뿐’이니 그를 신뢰와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다음은,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여기 ‘육신’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바사르’(בשׂר)인데 →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비하여 ‘연약한 인간’ ‘깨지기 쉬운 인간’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번역하면 → “깨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을, 자신을 보호해줄 힘으로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했는데, 여기서는 ‘게베르’(גבר)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 여기 ‘게베르’는 ‘강한 자, 용사, 힘 있는 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용사처럼 살아도,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자는 결국 망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란 ‘세 단어’의 의미를 가지고 본문 5절 말씀을 해석해 보면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① 피조물인 사람을 믿으며 ② 연약한 인간을 힘으로 삼는 자는 ③ 그가 아무리 용사처럼 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망하게 될 것이다.” 아멘!
성경의 역사는, 이 말씀이 진실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나라와 백성은 결국 다 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네! 우리가 사람을 사귀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우리의 인생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고,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렘 17:7∼8 →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나무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넉넉한 수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뿌리가 물 근원에 닿아있기만 하면! 더위가 올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햇볕이 따가우면 따가울수록! 훨씬 더 크게 자라고, 그 나무가 유실수라면!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상담심리학자인 데이빗 포올리슨(David Powlison)은 오늘 본문 렘 17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상담의 원리’를 이렇게 설파합니다.
내담자는 대부분! 자기에게 있는 ‘괴로움과 아픔의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보다는, 외부에 그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문제는 ‘내’가 아닌 ‘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담자는 내담자가 힘들어하고 열 받는 외부적 요인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내담자의 인생의 뿌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살필 줄 알아야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른쪽에 있는 ‘떨기나무, 가시나무’와 같이 된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자기에게 어려움을 주는 고통의 상황, 열 받는 상황의 원인이! ‘뜨거운 태양’으로 상징되는 외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과 가시 돋친 반응으로, 상대방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갉아먹고 메마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왼쪽의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인생은! 그 인생의 뿌리를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뻗어 내리고 있어 그로부터 수분을 공급받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 볕’은 그냥 고통의 상황이나 열 받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게 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외부적인 고통과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뿌리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닿아있느냐? 그렇지 못하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외부적인 요인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그 뿌리를 물의 근원에 내리고 있는 나무처럼! 믿음의 뿌리를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내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생수란 무엇이며, 그 근원은 어디입니까?
① 여호와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중요한 선언이 있습니다. 렘 17:13 →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기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살리는 ‘생수의 근원’이시라는 말씀입니다.
② 생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7:37∼39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네!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는! 주님을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3. 어떻게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까이할 수 있습니까?
①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수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영혼의 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건강하게 성장케 되는 것입니다.
②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내 인생으로 끌어오는 파이프라인과 같은 것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그 코에 하나님의 숨, 루아!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실 때 생령,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듯이,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는 진정 새롭고 능력 있는 인생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요즘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과 사람과 가까워지고 있는지? 진정 내가 멀리 하고, 내가 가까이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생수의 근원에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은 ‘영적밥먹기’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년초에 나눠드린 신앙 성장·성숙 가이드북 25∼26 페이지) 나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과 기도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그리고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3. 초라한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이 위대한 거목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 나눠봅시다. (예; 요셉, 모세 등)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가 있는 사도 요한에게 주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그 환상을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박해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기 위한 책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는 10장에 기록된, 한 환상의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환상 중에 하늘에서 주님의 음성이 사도 요한에게 들려옵니다. 계 10:8 →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천사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두루마리 책’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 책을 받아 가졌더니, 이번에는 그 책을 가지고 있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계 10:9 →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천사가 자신의 손에 펼쳐진 채로 있던, 그 작은 책을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1. 말씀을 먹어라!
성도 여러분! 성경책은 ‘읽는 것’인데, 왜 ‘먹으라’고 했을까요? →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은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삽니다.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매일 밥을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성도들에게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먹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을 듣고 읽는 것입니다. 만일 말씀의 양식을 매일 먹지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약해지고 쉽게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 말씀을 먹는 것! 말씀을 듣고 읽는 일을 매일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먹어야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밥심으로 일한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먹어야 힘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먹어야 섬기고 봉사할 힘이 생깁니다. 배고프면! 금방 지칩니다. 짜증이 납니다. 화가 납니다. 그러나 매일 말씀을 먹으면! 힘있게, 즐겁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겔 2:8∼9 →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이어지는 겔 3:1∼3입니다. →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이 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하고 있던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잡혀가 아무 희망이 없는 유대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전하라고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네가 먼저 말씀을 먹어라. 말씀을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가 먼저 말씀을 먹고 힘을 내야 한다. 네가 먼저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후에! 에스겔은 절망 가운데 있는 유대 동포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먼저 매일 말씀을 먹읍시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고 위로와 용기를 얻읍시다. 그러면, 어려운 환경을 헤쳐나갈 힘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힘도 생깁니다. 말씀을 먹어 힘을 얻은 후에, 나의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 동료 친구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조금 크면 이유식을 먹고, 밥을 먹습니다. 혼자서 먹을 줄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3년, 5년, 10년 서서히 자라납니다. 나중에는 몸집이 엄마 아빠보다 더 커집니다. 마찬가지로 3년, 5년, 10년 꾸준히 말씀을 듣고, 읽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성장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읽었다고 당장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설교 말씀을 듣고, 내일도 성경을 읽고, 다음 주일도, 다음 달도, 내년도… 이렇게 매일 꾸준히 듣고 읽으면! 우리의 생각이 서서히 바뀌고, 행동이 변화되고, 삶이 바뀌어 갑니다.
물론, 은혜받은 말씀이 내 것이 되기까지, 내 삶에 체질화되기까지, 힘든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소화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힘들 때도 있습니다. 위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꾸준히 말씀을 듣고 읽다보면! 아주 조금씩, 말씀이 내 가치관이 되고, 내 인격이 되어갑니다.
2. 말씀을 살아내라.
천사가 요한에게 말씀을 “먹어 버리라”고 했고, 요한은 순종하여 그것을 먹었습니다. 계 10:10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물론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냥 손에 가지고 다니는 책이나, 읽고 듣는 것 만의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마치 음식을 먹어 소화시켜 에너지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입으로 소리 내어 읽고, 되새김질하듯 계속 읊조리고, 묵상하고 ….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 말씀의 뜻을 분명하게 안 후,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오늘 본문은 ‘먹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과연 달기만 한가요?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그 두루마리 책을 먹을 때, 입에는 꿀같이 달겠지만, 그 배에서는 쓰디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계 10:10 →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당시 사도 요한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살아내기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수 믿는 성도임을 몰래 감추고 살아도 살까 말까 하는 시대에, “나는 성도입니다! 나는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나를 죽이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경책, 주님의 말씀은 쓰디쓴 약초와 같은 것입니다.
핍박이 심했던 사도 요한의 시대와는 다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또한 그리 쉽고 간단하지 않습니다. 경제 여건은 몹시 어렵고, 정치·사회적인 갈등도 여전하고, 기후 재앙도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습니다.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계속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가 살길입니다. 그렇게 살 때!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이 땅에 희망의 꽃이 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현실이나 삶이 힘들고, 어렵고, 괴롭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괴로울수록, 더 적극적으로 말씀의 삶을 살아낼 때, 그것이 여러분과 주변을 더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런 역설적인 말씀의 복을 이끌어 내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을 전파하라.
그런데 말씀을 ‘먹는 게’ 끝이 아닙니다. 추가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계 10:11 →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과 장소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먼저 대상입니다.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입니다. 이 말은 네 삶의 자리뿐 아니라, 말과 언어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거기 가서 보통 사람들뿐 아니라, 임금과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계시록 1장에서부터 요한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이 부탁을 하셨습니다. 계 1:11 →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즉, 주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을 글로 써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12 사도 중에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수명을 다하고 ‘자연사’한 사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순탄한 삶만을 산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전승에는 예수를 부인하기를 거절하는 사도 요한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졌으나,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놀란 박해자들은 요한을 처형하는 대신에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주님의 주시는 환상을 보고, 계시록을 쓴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쓴 책을 자신이 목회하던 소아시아 일곱교회로 보내서 읽게 했습니다. 비록 말로 전하지 못했지만, 글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아무리 지금 삶이 어렵고, 또 그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이 힘들고, 나아가서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은 더 어려울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 선교사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파송된 선교사에게 격려의 카톡 메시지를 보내고, 편지를 보내고, 물질을 보내는 것도!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는 복음을 받은 자의 피할 수 없는 사명이며, 성도의 마지막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꺼져가는 전도의 불씨를 다시 일으키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전도로 인하여! 여러분의 영혼이 살고, 가정이 살며, 교회가 살아나고, 이 시대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달았던’ 경험과, 반대로 ‘썼던’ 경험을 나눠봅시다.
2. 내가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은 연유로, 가족이나 동료 이웃에게 성도로서 가지고 지켜야 할 기본을 잃어 버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건강한 성도, 시련과 미혹을 이겨낼 힘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하여! 다시 말씀을 생활화하는 습관을 세워 갈 구체적인 계획을 나눠봅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인 서기 54년경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사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이 에베소에 가길 원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시고 유럽 쪽으로 인도하심으로, 돌아올 때에야 잠시 들를 수 있었던 곳입니다.(행 18:18∼23) 그러나 에베소야말로 선교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당시 이 에베소는! 아시아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크고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는, 이 에베소에 비교적 오랜 기간 머물면서 사역을 펼치게 됩니다. 서기 54년경부터 56년까지 약 3년 동안 이곳에 ‘두란노서원’을 개설하고, 목회자를 양성하여 배출했습니다.(행 19:8∼10) 그 결과! 소아시아 지역에 7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에베소 교회는 그 중심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정말 심혈을 기울였고, 눈물과 기도로 목회한 교회였습니다.(행 20:17∼38)
후일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도중 밀레도 항구에 기착했을 때, 본인이 에베소교회까지 올라가지는 못하고,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서 교회의 장로님들을 밀레도 항구로 청하여 만나는 장면이 사도행전 20장 17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 마지막 장면인 36절부터 38절까지를 읽어보면, 바울과 에베소교회 장로님들 간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 20:36∼38 →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을 한번 머리에 그림으로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뜨거운 눈물과 기도, 목회자와 성도 간의 끈끈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의 신뢰와 사랑이 뜨거웠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도 그런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요한계시록인데! 이 요한계시록의 기록 시기는 서기 100년경에 저술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교회가 세워진 지 4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에베소교회는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렸고 또한, 성도 간에 사랑도 식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면 과거 에베소교회는 칭찬거리가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계 2:2∼3 → “내가 ①네 행위와 수고와 ②네 인내를 알고 또 ③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④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⑤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⑥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네! 에베소교회는 ⇨ ① 주님을 위해 수고한 교회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②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고 핍박을 견뎌낸 교회입니다. 또한, ③ 이단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말씀의 진리로 무장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드러내는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점이 많은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가 책망받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계 2:4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이유는!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 머리는 가득 찼고 이성적인 판단과 분별은 잘하지만, 가슴엔 따뜻한 사랑이 없는 냉랭한 마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많이 식어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엔 믿음의 연조도 길고 꽤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속은 텅 빈, 형식적인 신앙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어떤 분이 신앙 상태를 음악과 비교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악보를 보면 다양한 기호들이 붙어 있는데, 그중에 ‘Crescendo’와 ‘Decrescendo’라는 ‘음악 기호’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호는! 음의 강약을 조절해줌으로써 악상을 살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벌어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 ‘Decrescendo’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리를 점점 줄어들게 연주하라’는 것이고, 모아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벌어지면 음악적인 용어로 ‘Crescendo’라고 하고, ‘소리를 점점 크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음악 기호’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본다면! 비록 처음에는 미약했다 할지라도, 점점 더 나아지고 뜨거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바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다, 크레셴도의 믿음! 점점 좋아지고 뜨거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하게도! 희망적인 것은,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다시 살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 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①생각하고 ②회개하여 ③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R로 시작하는 ‘세 단어’ ⇨ Remember, Repent, Restore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Remember’ -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가만히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에 대한 그 뜨겁고 순수하던 열정이 식었다면! 언제, 어느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아니면 취직하고 출세하고, 아니면!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목사가 되면서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이사하고, 돈 벌고, 아이 낳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맑씀읽기와 묵상 그리고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첫사랑과 같은 뜨거운 열정과 열심을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서,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Repent’ -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되돌아본 후!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유무에 따라서 인생이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후회’와 ‘회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잘못된 자리에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부인했고, 세 번째는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잘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라고 ‘후회’하며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잘못한 것을 깨닫고 후회는 했지만,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면! ‘후회’하고 아예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잘못된 자리를 털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Restore’- ‘회복하라(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했다 할지라도,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그 회개는 거짓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생활 속에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기도의 열심을 잃어버리셨습니까? 다시 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의 자리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용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기도의 십자가도 받았는데 기도 줄을 놓고 있었다면! 다시 기도의 십자가를 붙드시길 바랍니다. 봉사와 섬김의 열정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임명장을 받고, 직분을 가졌어도, 사명을 팽개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여러분이 서야 할 자리로 빨리 돌아오십시오.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면! 즉시,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입니다.
요 21:16 →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사랑을 확인하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에 서게 하신 예수님! 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회복’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충성하는 제자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계 2:5b →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 주님이 옮기시겠다고 하신 ‘촛대’란 ‘성령’을 의미하고 ‘구원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 은혜도, 구원의 역사도 깨닫지 못하는 개인! 결코,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 품었던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가운데 사라져가던 주님에 대한 첫사랑이 다시 한번 활활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발전하고 성숙해 가는 성도들이 되어,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귀히 여겨주시는 복된 천국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지금 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때, 잃어버리거나 식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앙의 요소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서로 나눠봅시다.
2. 10년 혹은 20년의 기간을 두고 봤을 때, 나 자신의 신앙의 성숙도와 열정이 깊어지고 뜨거워졌는지? 아니면 옅어지고 식었는지 서로 나눠봅시다.
3. 대장장이는 쇠가 빨갛게 달구어졌을 때, 망치로 내려쳐야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쇠가 식고 난 후에는 세게 내려쳐도 원하는 모양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망치질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딤후 3장에 보면, 말세가 되면! 이 세상이 더 살기가 힘들고 고통스럽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곧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이 되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딤후 3:1∼2, 5b →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5절에 결론적으로)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해도!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마음’과 ‘입술’과 ‘삶’에 늘 감사가 풍성한 사람들이 되어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감사를 잊지 맙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이 들어서 다 잊어버리고 기억 능력이 약화되어도, 이것만은 꼭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제가 확신을 갖고 말씀드리건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욕심에 빠져서, 늘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면! 상대적으로 치매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세 차례, 꼭 감사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감사절을 지키라고 하신 까닭은! 하나님이 무슨 물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감사하는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매년 3∼4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왜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어야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감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것은! 축복받고, 사랑받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역대상 16장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대상 16:8,10 →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 그리하면(감사하면)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마음의 즐거움, 하늘로부터 임하는 유쾌함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0장 말씀입니다. 렘 30:19 →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아멘. 감사하는 자를 번성하게 하시고, 수효가 늘어나게 하시고, 존귀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네! 감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빌 4:6∼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왜 그냥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감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감사가 체질화되고 습관화되어, 늘 감사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은혜의식을 가집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다윗의 감사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싶은 열망이 무척 컸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드릴까 생각하다가,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대상 29:11∼12 →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부와 권세와 만물이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신앙고백에 바탕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자세로 감사드렸습니다. 대상 29:14 →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여기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는 받을 자격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큰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다윗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기는 자격도 없는데 높은 지위와 큰 물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그 마음 중심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왔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이 있어야, 참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일용할 양식이! 내 수고로 모으고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켜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고백하면서 ‘감사합니다.’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것을 드린다는 교만함이 아니라, 다윗처럼 “우리가 주의 손으로부터 받은 것을, 주께 드릴 뿐입니다.” 고백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먼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금과 은을 드렸습니다. 대상 29:3 →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私有)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그런데, 다윗이 얼마만큼의 금ㆍ은을 드렸는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상 29:4 →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여기 금 3천 달란트는 무게로 치면 102톤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참고로, 2025년 3월 현재 우리나라의 금 보유량은 104톤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금 전체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거기다가 은 7천 달란트는 240톤이니, 엄청난 액수의 예물을 성전건축을 위해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다윗의 봉헌에 감동한 지도자들과 백성들도, 성전건축을 위해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대상 29:6,9 → “이에 모든 가문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관이 다 즐거이 드리되,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
그렇습니다. 왕과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거운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드릴 때 ‘즐거운 마음’과 ‘자원함으로’ 드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 기뻐하시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감사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감사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힘일까요? ‘감사는! 감사를 불러오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진짜 감사한 일이 생기고, “괴롭다, 죽겠다” 하면! 정말 괴로운 일, 죽을 일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 감사가 내 삶에 임하기를 바란다면! 감사의 말을 입에 달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429장이 있는데 그 1절 가사를 보십시다. 429장 1절 →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후렴)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1절 가사에 3번이나 받은 복을 세어보라고 했습니다. 네! 복은 세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받은 복이 뭐지? 감사할 일이 뭐가 있지? 하며 손가락으로 하나둘하고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금방 생각이 나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예수 믿게 된 것,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이렇게 적다 보면 30가지, 100가지도 적을 수 있게 됩니다. 남과 비교하여 없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역대상 29장을 보면 → “드렸노니, 드리되, 드리고, 드림으로, 드렸을 뿐, 드렸사오며” 여섯 번이나 ‘드린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롬 6:12∼13절에서는 →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나의 삶을 주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연주해 주십니다. 여기 ‘무기’라는 단어는 → 영어의 weapon이 아니라(X), ‘도구’라는 뜻의 instrument입니다.(O) 이 instrument라는 단어는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제가 연주하면 어떤 소리가 날까요? 서툴게 연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찬양대 반주자가 연주하면, 동일한 피아노이지만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붙들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다윗을 하나님이 붙들고 연주하시니까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은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주께 드림으로! 더 크게 쓰임 받았던 다윗과 같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감사하지 못함으로 행복을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나는 가정 식구들에게 감사의 신앙, 감사의 문화를 계승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원망과 불평의 문화를 계승 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고 나눠봅시다.
3. 당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금 내게 있는 육체, 마음, 신앙의 질병은 무엇인지? 각자 그 원인을 나눠봅시다.
사람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것을 알고, 일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존재입니다. 아니! 그런 존재여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람들 중에는 날 때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1. 다윗은 죽기 전에 무엇을 마무리하고 죽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 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솔로몬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고,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에게 있어서 그냥 차기 왕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했지만, 평생의 소원이었던 성전 건축을 자기를 대신하여 이룰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하고 심사숙고 끝에 여러 아들 중에 ‘솔로몬’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 “너는 성전을 건축하여라. 성전 건축은 나의 평생소원이었으나, 하나님은 나의 손으로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내 아들, 너를 통해 성전 짓기를 원하셨다. 성전 건축을 위한 금, 은, 놋, 철, 재목, 돌 등은 다 준비되어 있다. 그러니 너는 여호와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여 성전을 건축하라.”
둘째, 다윗은 새롭게 시작될 성전 시대에 맞도록, 레위인들의 직무를 새롭게 재편하여 ‘성전 예배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지막 열정을 새 시대, 새 성전의 질서를 세우는 데 쏟아부었습니다. 즉 레위 사람들의 직무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여, ‘성전 예배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이전까지 회막과 각종 기물들, 특별히 언약궤를 옮길 때 그들의 어깨로 메어 옮기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레위인들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성전이 세워지게 되면! 더 이상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이들에게 각기 새로운 사명을 부여한 것입니다.
제사장을 돕는 일부터, 성전의 각 영역을 관리하고,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며, 진설병과 소제물을 준비하는 구체적인 임무까지, 다윗은 예배의 모든 과정이 세밀하고 거룩하게 이루어지도록 재정비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행정적인 개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영광스럽고 질서 있게 드려져야 한다는 다윗의 신앙고백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개혁에는 언제나 개혁을 일으키는 개혁자가 중요합니다. 개혁자가 잘못되면 그 개혁은 엉터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정치와 종교를 개혁하는 일에 영적,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다윗 자신이 직접 진행하였습니다. 과거의 성막 시대의 체제와 조직을 새롭게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조치는, 가히 종교 개혁 수준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제도와 직임의 변화는 벌써 단행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광야를 이동하던 백성들이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동식 성막을 고정식 건물로! 즉 성전을 세우고, 거기에 맞게 제도를 만들고 직무를 배정했어야 마땅했습니다. 대상 23:26 →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에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필요가 없다 한지라.”
그런데, 사사 시대 400년, 사울의 통치 40년, 다윗의 통치 40년, 거의 500년이 되도록 성전도 짓지 않고, 제사 제도도 개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백성들의 책임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책임이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그냥 안일하게 있는 대로 안주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때, 거기에 잘 대처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 때에 우리 교회는 친환경적으로 교회를 리모델링 하고, 대면하여 모이지 못해도 유튜브를 통해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하고, 밴드와 카톡방을 통해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지역 중심의 속회를 예배 시간 중심의 속회로 바꾸고, 환경과 생태문제를 목회의 중요한 주제로 채택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한 단계 더 성장·성숙케 되었습니다. 시의적절하게 사역자들을 붙여주셨고, 좋은 아이디어와 생각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을 세워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 쇠퇴하고, 타락의 길로 가게 된 이유는! 환경과 시대에 맞는 개혁을 시도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 때에 이르러 드디어 이런 일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늙은 다윗’이 멋진 모습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그냥 쉬고 싶고, 책임을 내려놓고 싶어합니다. 아니면 반대로, 노년의 탐심과 탐욕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지막까지! 미래를 준비하고 조직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다윗이 개혁적인 일을 펼쳐 가는 데 있어서 가졌던 몇 가지 원칙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백성의 원로인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다 모으고, 또한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솔로몬 왕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대상 23:2 →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었고, 원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라와 백성들을 이끌어 온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솔로몬을 중심으로 새로운 리더들이 나타날 때까지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이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그들의 동의와 동감을 얻어 개혁을 시행한 것입니다. 어떤 큰일을 행할 때일수록 전 구성원의 마음을 얻어 일하는 것이 중요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레위인들에게 임무를 맡기되 기능별, 직능별로 맡겼습니다. 대상 23:6 → “다윗이 레위의 아들들을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에 따라 각 반으로 나누었더라.”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 중에서 택했고, 찬양을 맡을 사람은 음악가 집안인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택했습니다.(대상 25:1) 문지기를 뽑는 일조차도 사사로운 관계로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공(公)과 사(私)를 잘 구별했던 것입니다.
셋째, 그 대표적인 방법이 다윗이 많은 결정을 ‘제비뽑기’의 방법으로 결정했습니다. 특별히 그 순서를 정할 때,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했습니다. 이것은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 알고 시행하는 신앙고백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대상 24:5a,31b →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장자의 가문과 막내 동생의 가문이 다름이 없더라.” 제비를 요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차별 없이 행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넷째, 다윗은 사명을 줄 때 온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주었고, 특별히 말로만 하지 않고 구체적인 계획도를 주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전 짓는 사명을 솔로몬에게 줄 때 이렇게 합니다. 대상 28:8, 10 →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여호와께서 너를(솔로몬을) 택하여 성전의 건물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 하니라.”
그리고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대상 28:11∼12 → “다윗이 성전의 복도와 그 집들과 그 곳간과 다락과 골방과 속죄소의 설계도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또 그가 영감으로 받은 모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성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설계도를 주고!”
네!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영감으로 받은 성전의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주면서 짓도록 합니다. 그냥 “이거 중요한 일이니 잘해라!” 이런 식으로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설계도”를 주면서 이렇게 건축하라고 준 것입니다. 성전 건축의 열망만 컸던 것이 아니라, 그 준비가 철저했던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다윗에게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인수인계를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일은! 언제나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가 해 온 일을 그다음 사람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여호수아에게 잘 인계했습니다. 모세가 한평생 펼쳐 온 일은 여호수아가 마무리를 잘해서 완성 시켰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잘 인계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다윗왕의 인생 마무리는 참 아름답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 건축의 사명을 아들에게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집니다. 성전 건축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고, 또한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일이니, 꾹 참고 아들에게 그 일을 맡긴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다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은! 남아 있는 후대의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넘겨주어야 합니다. 뭐든지 내가 다 하려고 하면, 거기서부터 무리수가 나오고, 욕심이 개입하게 될 소지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배워야 할 진리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시대의 변화를 읽고 그 변화에 잘 대응하고, 때론 시대를 이끌어 가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나눠봅시다.
2. 개혁에는 언제나 개혁을 일으키는 개혁자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개혁자가 잘못되면 그 개혁은 엉터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라는 말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눠봅시다.
3. 내가 현재 맡고 있는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에서의 역할 속에서 어떻게 거룩한 질서를 세워갈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어떤 소원을 품고 사느냐?’ 이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품은 소원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 여러분의 품은 소원은 무엇입니까? 왜 이런 질문을 드리냐 하면! 오늘 본문이 ‘다윗이 품은 소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소원은 무엇이었고, 하나님은 그 소원에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2. 다윗의 소원
1) 성전 건축 - 오늘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된 후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온 후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마음먹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은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는 왜 이런 마음을 먹었을까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의 중심은 늘 하나님께 가 있었기 때문에! 언약궤, 즉 법궤가 그냥 저 시골 산 동네, 한 개인의 집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언약궤를 모실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을 건축할 마음으로 먹게 됩니다.
자신은 화려한 백향목 궁전에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천막 안에 모셔져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대상 17:1 →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그래서 다윗의 마음이 편안칠 않았던 것입니다. ‘성막’은 → 직물과 가죽으로 덮힌 천막입니다.
이 성막은! 출애굽 당시 모세가 하나님께 그 자세한 설계도를 받아서 제작한 ‘이동형 천막’입니다. 그때로부터 솔로몬 성전까지 약 500년간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처럼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길법한 데도, 하나님의 성소보다 자신의 거처가 더 화려하고 안락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누구의 요청이나 조언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성도 여러분! 이런 다윗의 마음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그동안 고생 많이 했고, 이제 좀 평안하게 잘 사는 것에 대해서, 그냥 “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평안하게 잘살게 되었구나! 참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참 예쁜 생각이죠!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빚진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거하실 처소를 지어드리고 싶은 소원을 품은 것입니다. 이전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고, 품지 않았던 소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나단은 다윗의 소원을 듣고는, 즉시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당연히 기뻐하실 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 17:2 → “나단이 다윗에게 아뢰되,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 왜냐하면! 선지자 나단이 보기에 그런 다윗의 생각과 소원은 너무나 귀하고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늘 주님께로 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무언가 좋은 것을 해드리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다윗처럼! 주님을 향한 소원, 교회와 복음을 향한 선한 소원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거절 -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아주 특별한 소원을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자기의 뜻을 밝혔고, 나단이 좋다고 한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은 나의 집을 건축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선하고 아름다운 소원! 이제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위대한 소원이 거절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다윗의 소원을 거절하셨을까요? 정말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물리치셨을까요? 그래서 다윗의 위대한 꿈과 소원이 쓰레기처럼 버려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상 17:5∼6의 말씀을 풀어쓰면 이런 말입니다. → “나는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천막이 아닌 집, 즉 성전에 있어 본 적이 없고, 언제나 이 장막과 함께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내 백성을 떠난 적이 없었다. 또 늘 옮겨 다녔어도 지금까지 한 번도 사사들에게나 그 누구에게도 나의 집을 지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책망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진 그 마음과 소원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 다른 것으로 응답하심 - 대상 17:7∼8 →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①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②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 즉 ③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아멘.
우선,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미 과거에 주신 복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양을 치던 ‘목동’ 시절부터 그와 함께하셨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도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쟁에서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우셨습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것보다 더한 일이 다윗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와 장차 주실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즉 다윗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국기는 ‘다윗의 별’이라 하여 다윗의 이름을 기리고 있으며, ‘메시아가 그의 후손으로 오시는 등’ 정말 다윗이 얼마나 존귀하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만들어 주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들에게 주실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대상 17:11∼14을 요약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네가 죽은 다음에는 네 자식 가운데 한 사람이 네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다. ▸내가 그 나라를 견고케 할 것이고, 그가 너의 소원인 ‘성전’을 지을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어,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윗의 위대한 꿈과 소원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소원은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다른 복까지 더하여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남다른 소원을 품은 다윗을 기뻐하셨습니다.
4) 다윗의 감사 -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윗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상 17:16 →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비천한 목동에 불과한 자신을 불러,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하신 것도 너무너무 감사할 일인데, 아들 대에 성전을 짓게 하시고, 또 자기 집안이 영원토록 이르게 하신다니….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다윗은 진심으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사람은 다윗만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 다윗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 인간적으로도, 자격과 조건 면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받은 사랑과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상 17:16, 18 →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영예에 대하여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네! 하나님. 저같이 보잘것없는 자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와 대우에 대해서 저로서는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 드려야겠다는 위대한 소원이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그 중심을 받아주셨고, 그 자녀들의 삶까지 보장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그 자녀들까지 복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소원을 품으십시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향한 소원으로 가득하여, 우리 인생에 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풍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에 품은 소원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나는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사는지?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다윗이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리려고 했지만, 그 순수한 의도를 기뻐 받으시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여러분이 베푼 선함이 오히려 더 크게 자신에게 큰 유익과 복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언약궤’는 →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성물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언약궤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품과, 그 위에 있는 천사의 모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히 9:4∼5 →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①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②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③ 언약(십계명)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천사들)이 있으니…”
그런데 ‘엘리’ 제사장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언약궤를 적군인 블레셋의 손에 뺏기고 맙니다. 그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긴 했지만, 높은 산동네 ‘기럇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이란 사람의 집에 들여놓게 됩니다. 이후 적어도 70년 동안 이 언약궤는 잊혀진 채 그냥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된 다윗 때에 이르러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윗은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곳에 왕궁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왕궁에 사는 다윗의 마음이 편안칠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은, 방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기로 결심했습니다.
1. 언약궤를 모셔오는 바른 방법
다윗은 무려 3만 명의 사람을 동원하고, 새 수레를 만들어 ‘아비나답’의 집으로 갔습니다. 드디어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집을 나서는데, ‘웃사’와 ‘아히오’ 형제가 소를 몰게 되었습니다. 그 집이 산꼭대기에 있었으니 길은 좁고 경사진 비탈길이었습니다. 그런 데다가,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의 겨리소가 수레를 끄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마침내 산비탈을 다 내려와 평평한 타작마당에 이르니 소들이 막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실려있던 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니까, 큰아들 ‘웃사’가 손으로 그 언약궤를 붙들었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은데! 만져서는 안 되는 언약궤에 손을 댄 ‘웃사’는 그만 현장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경사스럽고 중요한 날인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을 포기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두고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다윗은 돌아와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일찍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언약궤와 성소의 기물들을 다루는 방법들에 대해서 엄하게 명령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 4:15 →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아론과 그 자손들이 순서에 맞게 성물들을 다 싸면, 레위 지파 자손들이 해당 성물을 꼭 어깨로 메어서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때 절대로 성물을 만져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는 보아서도 안 된다고 명하셨습니다. 민 4:19∼20 →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다윗에게는 언약궤를 왕궁으로 모셔와야겠다는 열심은 있었지만, 실상 그 방법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마침내 언약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맡겨둔 ‘오벧에돔’의 집이 석 달 동안 엄청나게 재정적인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됩니다. 대상 13:14 →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그러자 다윗이 다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올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 15:12b∼13 →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과 ‘규례’를 잘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일을 더 크게 그르치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작년 표어대로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율법의 절차를 따라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에 모시게 되자 다윗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인생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늘 기뻐하는 인생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언약궤를 모셔오는 바른 자세
① 주신 사명을 즐거움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대상 15:25 →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네!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오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오벧에돔의 집에서부터 다윗성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웃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 올 때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분명히 ‘웃사’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짜증스럽고 험하게 다룬 것이 틀림없습니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멍에를 메고 비탈진 좁은 언덕길을 내려올 땐, 모는 사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소를 다뤄야 합니다. 그런데 웃사는 “아니 왕이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왔으면 그 사람들을 시켜서 갈 것이지 왜 나를 시켜?” 속으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덕에서도 소를 험하게 몬 것입니다. 그러다가 땅이 평평한 타작마당에 이르자, 소들이 막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그러다가 결국 죽기는 누가 죽습니까? 네! ‘웃사’가 죽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가져야 할 마음은! ‘즐거움’과 ‘자원함’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대상 15:25b∼26a →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아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언제나 즐거움과 자원함으로 감당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헌신하는 마음과, 함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또 중요한 마음은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대상 15:26 →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렸더라.” 구약의 제사에서 짐승을 잡아 드리는 것은 바로 ‘헌신’을 상징합니다. 앞장서서 일하는 교역자들과, 또 그것을 알아주고 기꺼이 헌신하는 평신도들의 아름다운 하나 됨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저는 우리 꿈마을엘림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라고 믿습니다.
또한, ‘찬양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이스라엘 무리는 목소리와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대상 15:27b∼28a → “노래하는 자와 그의 우두머리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뿔나팔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은혜로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성도들은 ‘박수와 아멘!’으로 크게 화답해야 합니다. 또, 찬양단이 앞서 찬양을 인도하면! 그냥 구경하는 자세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박수도 치고, 크게 입을 벌려 목소리를 내서 함께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찬양을 받으시길 원하시고, 그런 찬양 중에 거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③ 받은 은혜를 소중하고 값있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에게 사울 왕의 딸 ‘미갈’이라는 조강지처가 있었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면 내 딸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는 약속으로 얻은 아내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시기 질투로 다윗이 도망자의 삶을 사는 동안 사울 왕은 딸 미갈을 ‘발디’라는 사람에게 재혼시켜 버립니다. 아마 다윗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사울 왕가는 몰락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자 다윗은 제일 먼저 조강지처인 미갈을 찾아서 데려옵니다. 그러면 미갈은! 다윗이 아버지 사울이 한 일을 다 용서하고 다시 자기를 왕비로 맞이하는 다윗의 너그러움에 감사하고, 조강지처로서의 그 자리를 귀중하게 여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미갈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 다윗을 업신여기고 무시했습니다. 더욱이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신앙까지도 업신여겼습니다. 대상 15:29 →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이런 그녀의 모습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왕후가 되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 은혜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삼상 2:30b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삼하 6:23 →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다윗의 사랑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모시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던 다윗과 같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언제나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아무리 선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께 맡기신 일을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감당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언약궤를 꼭 어깨로 메어 옮겨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부모님을 섬길 때) 쉬운 방법이 아닌 몸으로 섬겨야 할 이유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왕도 백성도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유독 ‘미갈’만 이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예배하는 마음을 막는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를 보고 겪으면서 “아! 이것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구나!”라는 인식을 일반 대중들도 갖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2021년 코로나 팬데믹이 ⇨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임이 자유롭지 못하면서, 배달음식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택배를 통해 물건을 받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일회용품과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용기들이 엄청나게 소모되고 또한 쓰레기로 배출되었습니다.
그때, 환경문제가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고,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개입하고 변화시켜나가야 할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교회에서도 열심히 창조세계 보전과 녹색교회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그렇게 만 4년을 열심히 활동했더니, 금년 2025년에 이르러서는 교계에서도 우리의 그런 열심과 헌신을 알아주게 되었고! 지난 5월 20일 ‘한국교회협의회’를 통하여 공식 ‘녹색교회’로 인증받아 앞서 보셨듯이 인증서와 패를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점에 이르러서, 다시 한번 ‘환경문제’가 왜 ‘교회’에서 다뤄져야 할 주제인지? ‘신학적 성경적 관점에서의 문제의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인 1967년에, 전 기독교계가 깜짝 놀랄만한 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바로 린 화이트(Lynn T. White Jr.)란 분이 →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라는 제목으로 사이언스(Science)지에 논문을 발표했는데, 오늘날 환경위기, 생태위기의 주범은 ‘기독교’이고 그 책임은 ‘기독교인’에게 있다는 논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① 기독교는 인간과 자연을 차원이 전혀 다른 존재로 구별했다. ②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자신의 발전과 목적을 위해서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분의 주장은! 기독교가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창 1:28 →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을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훼손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적에 주목하고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 우리 인간은 자연을 가꾸고 돌볼 책임을 맡은 위임자, 관리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 우리는 자연의 ‘소유자’나 ‘주인’이 아니고(X), 자연을 관리할 ‘청지기’(O)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2:15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 → ‘경작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바드’(עָבַד)인데 이는 ⇨ “일한다, 봉사한다, 가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 ‘지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미르’(שָׁמַר)인데, 이는 ⇨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연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 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이며, 파괴되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할 사명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듯이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의식을 버리고, 자연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작품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우선!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가장 큰 사명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전도, 복음, 구원’ 같은 단어들이 떠올려지실 텐데, 이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답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 얻게 하는 것”입니다. 네! 아주 완벽한 대답입니다. 주님께서도 이와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6:15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우리는 말씀을 오직 ‘사람’을 향한 명령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즉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라는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뜻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의 범위는 훨씬 더 넓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막 16:15을 여러분의 성경으로 찾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 “만민에게”라는 단어 앞에 작은 숫자로 3)이란 ‘각주’ 표시가 되어 있고, 성경 아래쪽에는 그 3)번 각주를 설명하는 부분이 보일 것입니다. 거기를 보면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헬, 온 창조세계에”라고 되어있습니다. 네! 그러면 이 본래의 뜻을 잘 살려서 번역하면 어떤 말씀이 되겠습니까? 막 16:15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실제 헬라어 성경에서 사용한 단어는 → 'πᾶς κτίσις' (파스 크티시스)인데, 이는 ‘모든 피조물에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를 ‘만민에게’로 번역한 우리말 성경은, 순전히 인간 중심적으로 번역한 결과인 것입니다. 영어 번역본들을 살펴보아도, 한결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곧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만물’을 포함한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 주님이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은 ⇨ 단지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창조세계’로 그 범위가 훨씬 더 넓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 ‘복음으로 회복시켜야 할 대상과 그 범위’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성도들이 회복시켜야 할 대상은 ⇨ 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②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즉 자연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바르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사명’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 “자연을 대할 때 이기적이고 제 욕심만 채우려는 지배자의 자세가 아니라, 자연의 관리자, 청지기로서, 자연을 잘 가꾸고 보살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생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해와 달, 숲과 바람, 물과 들풀, 작은 생명 속에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돌봄의 사명, 즉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탐욕과 무관심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파괴해 왔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주 만물 가운데서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창조세계가 아파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깨지고 다치고 억눌리고 파괴되면서 소리치는 탄식소리와 그 상처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만물을 다스리도록 위탁받은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8:19∼22 →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네! 모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모든 피조물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야 피조물들이 인간의 썩어질 욕심으로 인한 파괴와 착취에서 벗어나 영광의 자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나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깨달은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모범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서 선도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이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펼쳐갈 ‘애국운동’은 ⇨ 바로 절제와 자기희생으로 ‘지구와 창조세계’를 잘 보전하는 ‘좁은 길’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나만 잘살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와 나의 후손, 우리 공동체가, 함께 복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생명운동’에 앞장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도전하는 말씀으로 신명기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 30:19 →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나눔과 묵상
1. 각자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가장 심각한 ‘환경문제’는 무엇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눠봅시다.
2. ‘소유자’와 ‘주인’이 vs ‘청지기’와 어떻게 다른지 얘기해 보고, 그동안 환경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어디에 가까웠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나눠봅시다.
제목: 시상식에서! (계 22:12∼13, 20∼21)
1.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
성경을 영어로는 ‘Bible’이라고 합니다. → 이것은 구약과 + 신약 즉, Old Testament와 New Testament를 합쳐서 부르는 것입니다. 즉, 구약(舊約)성경은 → ‘구세주’로 오실 ‘초림(初臨)예수님’에 대한 옛 약속(Old Testament)이고, 신약(新約)성경은 →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재림(再臨)예수님’에 대한 새 약속’(New Testament)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약속은 일방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수직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논하거나 조정하거나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 고향을 떠나겠느냐? 동쪽으로 가겠느냐? 아니면 서쪽으로 가겠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떠나라. 가라. 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따르면, 약속으로 주신 모든 말씀과 복이 순종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약속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런 약속을 ‘수평적 약속’이 아닌 ‘수직적 약속’ → 곧 ‘디아데케’ (diaqhvkh)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 이것이 영어로는 ‘Testament’라는 단어입니다.
이 Testament라는 단어는! 영어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지닌 또 다른 단어 Promise와 비교되는데! 이 ‘Promise’는 → ‘상대방과 내가 서로 의논하고 동의해서 하는 약속’입니다. 반면에 ‘Testament’는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유효케 되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약속의 성격’은 → 일방적인 약속, 선언적 약속 Testament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유산을 상속받는 특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믿음의 약속이며 보상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약속’의 말씀, 언약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에는 언제나 명령이 함께 주어지고, 이에 따른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 약속과 함께 주어진 명령에 따르는 순종은! 간단하거나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길고 수고롭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면이 있고,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변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고, 능력 부족으로 지키고 실행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반드시 실행됩니다.
세상에서도 약속이 보장되는 상품, 신용이 있는 상품이라야 잘 팔립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변치 않는 약속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약속은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현재’와 ↔ ‘약속이 성취되는 그 시간’과의 사이에 ⇨ ‘믿음’과 ‘인내’와 ‘기다림’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세상 사람들! 즉,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해도, 보이는 것이 없고 증거가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뜬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세계를 바라보고 소망으로 살다가,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이런 사전 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겠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세 번이나 연속으로 “내가 속히 오리라.”(ναι ἔρχομαι ταχύ, I am coming soon)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① 계 22:7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② 계 22: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③ 계 22:20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확실성’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와 감격’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심령에 ‘마라나타’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이 말이 기쁨으로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상 받는 성도
재림하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계 22: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리고, 성도가 받을 여러 가지 상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10:41∼42 →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꼭 선지자가 되고, 의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알아주고 영접하면 똑같은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살전 2:19∼20 →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여기 ‘자랑의 면류관’은! 전도자가 누릴 영광과 기쁨, 존귀함을 의미합니다.
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기 ‘의의 면류관’은 핍박과 환란 중에서도 인내와 순종으로 믿음을 지켜낸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계 2:10b∼11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여기 ‘생명의 면류관’은 믿음의 결과로 주어지는 부활과 영생의 복! 즉, 천국에 들어가는 상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오늘날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숙제를 잘해 가면 선생님께서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여러 개 그려 주셨습니다. 그 후에는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마치는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 숙제 검사’를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으십니까? 저는 이런 도장을 꼭 받고 싶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 그런 기대를 가지고 믿음생활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생의 졸업식 = 시상식에서 상 받는 날
우리나라 대학교의 졸업식은 추운 겨울에 하기 때문에 좀 다른 풍경이지만, 미국의 대학교 졸업식엘 가보면! 5월 말 6월 초에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물론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네! 상 받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또한, 상 받는 사람을 축하해줄 가족들이 들어갑니다.
그럼 누가 상을 받을까요? 공부 잘한 사람들, 어떤 공적을 이뤄 학교의 이름을 빛낸 사람들이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학교 졸업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졸업식’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졸업식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 시상식이 있을 것인데! 수상자 명단에 여러분의 이름이 받드시 있어, 상급과 면류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좋은 상을 받으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고전 9:24∼25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에게는 썩지 않는 승리의 면류관을 주실텐데, 그 상을 받기 위해서 모든 일에 절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빌 3:14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땅의 썩어질 상이 아닌, 하늘의 영원한 상 받기를 목적하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목사인 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벧전 5:3∼4 →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양무리를 잘 인도한 사람에게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는데, 저도 이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본이 되는 신앙생활 잘하겠습니다. 끝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성도님들도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하게도 이 예배가 인생의 마지막 예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새롭게 출발하시길 바랍니다.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인생의 졸업식 날이 올 것인데, 즐거움으로 그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귀한 상을 받고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멋진 수상소감을 말하며,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약속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유효케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와 감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마음은 어느 쪽인지 나눠봅시다.
3. 인생의 졸업식 날! 나는 상 받는 자로서 즐거움으로 그 시상식에 참석할 것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날이 될 것인지? 생각하면서 가진 새 결심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제목: 천국! - 있다. 간다. 살 것이다. (계 21:1∼8)
1. 우리에겐 천국이 있다. (1~2) ⇨ 이미 약속된 천국
서기 1,254년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코 폴로’(Marco Polo)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일찍이 실크로드를 따라 몽골제국까지 와서 ‘쿠빌라이 칸’을 만나 궁중무역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마르코 폴로가 17살 되었을 때 그 무역 여정에 동행했는데, 그때는 몽골제국의 제5대 칸(王)인 ‘쿠빌라이 칸’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어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었고, 수도를 지금의 베이징-북경으로 정한 때였습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4개월의 여정 끝에 베이징에 도착하여 황제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게 됩니다. 이때 황제는! 젊고 유능해 보이는 마르코 폴로에게 동남아 제국과 인도를 돌아보고, 그 보고서를 제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그는 약 17년 동안 중국 서남부,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의 제 국가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 24년 만에 고국 이탈리아로 귀국하는 길에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북부까지 들러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이 책은 당시 서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동방견문록’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 책에 우리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놓았어! 이제라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겠나?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자네의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지?” 그러자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그리고 내가 보고 겪은 것의 채 절반도 기록하지 못했다네.”
제가 오늘 ‘마르코 폴로’와 ‘동방견문록’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천국’의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상상으로 꾸며낸 곳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서기 1,300년 당시엔 ‘동방견문록’을 보고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늘 이 시대의 눈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다 실제 하는 세상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모두 ‘천국’을 ‘실제 하는 세계’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결코 ‘상상의 산물’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존하고 있으며’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2∼3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두고 ‘내 아버지 집’, ‘거할 곳’, ‘거처’, ‘나 있는 곳’이라고, 몇 차례나 반복해서 ‘천국은 구체적인 장소’인 것을 명백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게다가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철석같이 약속까지 해 주셨으니, ‘천국의 장소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는 천국엘 간다. (3~4) ⇨ 아직 기다리는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가 지각할 수 있고 또한, 모든 피조물을 수용하고 있는 현재의 시공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가서는 안 될 ‘지옥’도 포함하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게 될 천국은 과연 어떤 곳입니까? 오늘 성경이 말해 주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계 21:2 →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많지만! 요한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은!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움’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새로워지고 개량되고 좋아진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다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계 21:1b →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네!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전혀 새로운 장소’입니다. 계 21:2a →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물론 이 말도,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적으로 ‘하늘에서 만들어져서 이 땅에 내려왔다’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완전히 새로운 장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곳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막히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② 인생의 모든 고통이 더 이상 없는 곳입니다. 계 21:4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여기 눈물, 사망, 애통, 아픔은 다 처음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문제와 아픔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고통의 조건과 내용들이 다 치유되고 소멸되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주시고자 원했던 선물!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에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빌 3:20 →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아멘. 이 꿈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린 천국에서 살 것이다. (5∼8) ⇨ 두 세계! 천국과 지옥
① 천국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생을 누리는 장소인데, 오직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계 21:6b~7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먼저, “이기는 자”라고 한 까닭은! 천국은 말세가 될수록 더욱 거세어질 온갖 마귀의 시험과 박해 중에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은! 그 천국에서의 삶은 그저 ‘하나님과 같이 사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 처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누면서 살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홈 스위트 홈’ ‘행복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② 반면에, 천국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계 21:8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기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앞서 “이기는 자”와 대조되는 자들로서 일단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도중에 돌아서 버린 ‘배교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일시적인 신앙생활’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뒤이어 나오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 즉 불신자들과 똑같이 취급될 뿐입니다.
그 외의 “흉악한 자” “살인자” “음행하는 자” “점술가” “우상 숭배자”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이란! 곧 ‘믿지 아니하는 자’와 동격으로 불신자들의 삶에 저절로 따라오게 되는, 온갖 악행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의 사람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국’과 극적으로 대조되는 ‘지옥’에 던져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이 죽는 것을 ‘첫째 사망’이라고 한다면, 지옥에 던져져서 영벌을 받게 되는 것을 일러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두 번 태어나고(육적, 영적) 한번 죽어 천국에 이르고, 불신자들은 한 번 태어나고(육적) 두 번 죽어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부모님을 통해 한 번 태어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다 천국에 이르는 복된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③ 천국은! 성도들이 지옥에 떨어진 악한 자들과 완전히 분리되는 곳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6:26 →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그 어떤 종류의 왕래나 소통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 모여 사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쁜 사람’, ‘악한 인간’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환상적이고 완벽한 공동체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정말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은! 바로 ‘악한자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악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정말 ‘좋은 곳’이, 바로 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천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첫째 → ‘천국이 정말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나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충만한가?’라는 질문이고, 둘째 → ‘지옥이 그렇게 끔찍한 곳이라면!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이웃이 그 지옥에 가지 않도록 그들을 건져내는 일인 전도에 힘을 쓰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모쪼록 천국을 사모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다 천국에 입성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도 여러분으로 인하여 다 전도 받아 천국에 이르는 가장 놀라운 축복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천국과 지옥의 실재(實在)에 대해서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오늘 말씀을 들은 후의 변화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만이 아니라, ‘지옥’도 포함하는 세계라는 사실이 본인에겐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두 가지 질문(기대와 소망, 전도의 사명)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가 살게 될 천국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본인에게 가장 기대되는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제목: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떠나면! (렘 17:5∼8, 13)
1. 물은 생명의 근원
날씨가 무더울 때,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원한 생수입니다. 요즘은 다양한 음료수도 많고 시원한 과일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그 무엇도 ‘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목이 마를 때 가끔 다른 음료를 마셔봅니다만, 그러나 역시 정말 목이 마를 때는 ‘물’이 최고입니다.
생각해 보면!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면서 수분이 부족해지지 않도록 ‘갈증’ 곧 ‘목마름’이라는 경보장치를 달아 두셨습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수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마음이 말라비틀어져 편안하고 부드러운 말이나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칠고 날카로운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 내면이 뭔가 목마름을 느낄수록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심령이 고통당하는 원인을 ‘갈등’에 있지 않고, ‘갈증’에 있다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내면적으로 무언가가 고갈되어 있으므로, 진정한 만족이나 행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등’이 아닌 ‘갈증’이 근본 문제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6절에 한 나무가 소개되고 있는데 바로 ‘떨기나무’입니다. 이 ‘떨기나무’는 당당한 거목과 비교하면 참으로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나무라기보다는 차라리 덩굴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곤핍하고 초라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또한, 한때는 대단했지만, 지금은 초라하고 메마른 ‘유럽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걱정스럽기는, 한국 교회도! 초라한 떨기나무 교회로 전락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떨기나무로 전락하거나, 반대로 거목으로 자라가는 구분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해답으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느냐? 아니면, 곧 다시 목마를 인간과 세상을 의지하느냐? 여기서부터 ‘떨기나무’가 되느냐? 아니면 ‘거목’이 되느냐? 로 나뉘게 된다고 말합니다. 본문 5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3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렘 17:5 →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① 맨 먼저, “무릇 사람을 믿으며…”라는 말에서는 사람이란 단어로 ‘아담’(אדמ)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아담(אדמ)이라는 단어는 ⇨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인류 ‘아담’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보통명사로서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을 가리킬 때, 바로 이 ‘아담’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אדמ)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사람’이라는 말은! → “사람은 다만 ‘피조물일 뿐’이니 그를 신뢰와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다음은,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여기 ‘육신’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바사르’(בשׂר)인데 →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비하여 ‘연약한 인간’ ‘깨지기 쉬운 인간’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번역하면 → “깨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을, 자신을 보호해줄 힘으로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했는데, 여기서는 ‘게베르’(גבר)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 여기 ‘게베르’는 ‘강한 자, 용사, 힘 있는 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용사처럼 살아도,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자는 결국 망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란 ‘세 단어’의 의미를 가지고 본문 5절 말씀을 해석해 보면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① 피조물인 사람을 믿으며 ② 연약한 인간을 힘으로 삼는 자는 ③ 그가 아무리 용사처럼 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망하게 될 것이다.” 아멘!
성경의 역사는, 이 말씀이 진실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나라와 백성은 결국 다 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네! 우리가 사람을 사귀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우리의 인생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고,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렘 17:7∼8 →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나무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넉넉한 수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뿌리가 물 근원에 닿아있기만 하면! 더위가 올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햇볕이 따가우면 따가울수록! 훨씬 더 크게 자라고, 그 나무가 유실수라면!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상담심리학자인 데이빗 포올리슨(David Powlison)은 오늘 본문 렘 17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상담의 원리’를 이렇게 설파합니다.
내담자는 대부분! 자기에게 있는 ‘괴로움과 아픔의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보다는, 외부에 그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문제는 ‘내’가 아닌 ‘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담자는 내담자가 힘들어하고 열 받는 외부적 요인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내담자의 인생의 뿌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살필 줄 알아야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른쪽에 있는 ‘떨기나무, 가시나무’와 같이 된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자기에게 어려움을 주는 고통의 상황, 열 받는 상황의 원인이! ‘뜨거운 태양’으로 상징되는 외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과 가시 돋친 반응으로, 상대방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갉아먹고 메마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왼쪽의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인생은! 그 인생의 뿌리를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뻗어 내리고 있어 그로부터 수분을 공급받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 볕’은 그냥 고통의 상황이나 열 받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게 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외부적인 고통과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뿌리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닿아있느냐? 그렇지 못하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외부적인 요인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그 뿌리를 물의 근원에 내리고 있는 나무처럼! 믿음의 뿌리를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내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생수란 무엇이며, 그 근원은 어디입니까?
① 여호와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중요한 선언이 있습니다. 렘 17:13 →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기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살리는 ‘생수의 근원’이시라는 말씀입니다.
② 생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7:37∼39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네!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는! 주님을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3. 어떻게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까이할 수 있습니까?
①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수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영혼의 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건강하게 성장케 되는 것입니다.
②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내 인생으로 끌어오는 파이프라인과 같은 것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그 코에 하나님의 숨, 루아!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실 때 생령,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듯이,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는 진정 새롭고 능력 있는 인생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요즘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과 사람과 가까워지고 있는지? 진정 내가 멀리 하고, 내가 가까이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생수의 근원에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은 ‘영적밥먹기’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년초에 나눠드린 신앙 성장·성숙 가이드북 25∼26 페이지) 나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과 기도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그리고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3. 초라한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이 위대한 거목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 나눠봅시다. (예; 요셉, 모세 등)
제목: 입에는 달고 배에서는 쓰다. (계 10:8∼11)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가 있는 사도 요한에게 주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그 환상을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박해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기 위한 책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는 10장에 기록된, 한 환상의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환상 중에 하늘에서 주님의 음성이 사도 요한에게 들려옵니다. 계 10:8 →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천사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두루마리 책’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 책을 받아 가졌더니, 이번에는 그 책을 가지고 있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계 10:9 →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천사가 자신의 손에 펼쳐진 채로 있던, 그 작은 책을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1. 말씀을 먹어라!
성도 여러분! 성경책은 ‘읽는 것’인데, 왜 ‘먹으라’고 했을까요? →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은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삽니다.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매일 밥을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성도들에게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먹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을 듣고 읽는 것입니다. 만일 말씀의 양식을 매일 먹지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약해지고 쉽게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 말씀을 먹는 것! 말씀을 듣고 읽는 일을 매일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먹어야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밥심으로 일한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먹어야 힘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먹어야 섬기고 봉사할 힘이 생깁니다. 배고프면! 금방 지칩니다. 짜증이 납니다. 화가 납니다. 그러나 매일 말씀을 먹으면! 힘있게, 즐겁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겔 2:8∼9 →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이어지는 겔 3:1∼3입니다. →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이 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하고 있던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잡혀가 아무 희망이 없는 유대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전하라고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네가 먼저 말씀을 먹어라. 말씀을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가 먼저 말씀을 먹고 힘을 내야 한다. 네가 먼저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후에! 에스겔은 절망 가운데 있는 유대 동포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먼저 매일 말씀을 먹읍시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고 위로와 용기를 얻읍시다. 그러면, 어려운 환경을 헤쳐나갈 힘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힘도 생깁니다. 말씀을 먹어 힘을 얻은 후에, 나의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 동료 친구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조금 크면 이유식을 먹고, 밥을 먹습니다. 혼자서 먹을 줄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3년, 5년, 10년 서서히 자라납니다. 나중에는 몸집이 엄마 아빠보다 더 커집니다. 마찬가지로 3년, 5년, 10년 꾸준히 말씀을 듣고, 읽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성장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읽었다고 당장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설교 말씀을 듣고, 내일도 성경을 읽고, 다음 주일도, 다음 달도, 내년도… 이렇게 매일 꾸준히 듣고 읽으면! 우리의 생각이 서서히 바뀌고, 행동이 변화되고, 삶이 바뀌어 갑니다.
물론, 은혜받은 말씀이 내 것이 되기까지, 내 삶에 체질화되기까지, 힘든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소화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힘들 때도 있습니다. 위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꾸준히 말씀을 듣고 읽다보면! 아주 조금씩, 말씀이 내 가치관이 되고, 내 인격이 되어갑니다.
2. 말씀을 살아내라.
천사가 요한에게 말씀을 “먹어 버리라”고 했고, 요한은 순종하여 그것을 먹었습니다. 계 10:10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물론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냥 손에 가지고 다니는 책이나, 읽고 듣는 것 만의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마치 음식을 먹어 소화시켜 에너지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입으로 소리 내어 읽고, 되새김질하듯 계속 읊조리고, 묵상하고 ….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 말씀의 뜻을 분명하게 안 후,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오늘 본문은 ‘먹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과연 달기만 한가요?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그 두루마리 책을 먹을 때, 입에는 꿀같이 달겠지만, 그 배에서는 쓰디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계 10:10 →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당시 사도 요한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살아내기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수 믿는 성도임을 몰래 감추고 살아도 살까 말까 하는 시대에, “나는 성도입니다! 나는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나를 죽이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경책, 주님의 말씀은 쓰디쓴 약초와 같은 것입니다.
핍박이 심했던 사도 요한의 시대와는 다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또한 그리 쉽고 간단하지 않습니다. 경제 여건은 몹시 어렵고, 정치·사회적인 갈등도 여전하고, 기후 재앙도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습니다.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계속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가 살길입니다. 그렇게 살 때!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이 땅에 희망의 꽃이 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현실이나 삶이 힘들고, 어렵고, 괴롭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괴로울수록, 더 적극적으로 말씀의 삶을 살아낼 때, 그것이 여러분과 주변을 더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런 역설적인 말씀의 복을 이끌어 내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을 전파하라.
그런데 말씀을 ‘먹는 게’ 끝이 아닙니다. 추가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계 10:11 →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과 장소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먼저 대상입니다.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입니다. 이 말은 네 삶의 자리뿐 아니라, 말과 언어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거기 가서 보통 사람들뿐 아니라, 임금과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계시록 1장에서부터 요한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이 부탁을 하셨습니다. 계 1:11 →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즉, 주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을 글로 써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12 사도 중에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수명을 다하고 ‘자연사’한 사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순탄한 삶만을 산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전승에는 예수를 부인하기를 거절하는 사도 요한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졌으나,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놀란 박해자들은 요한을 처형하는 대신에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주님의 주시는 환상을 보고, 계시록을 쓴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쓴 책을 자신이 목회하던 소아시아 일곱교회로 보내서 읽게 했습니다. 비록 말로 전하지 못했지만, 글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아무리 지금 삶이 어렵고, 또 그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이 힘들고, 나아가서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은 더 어려울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 선교사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파송된 선교사에게 격려의 카톡 메시지를 보내고, 편지를 보내고, 물질을 보내는 것도!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는 복음을 받은 자의 피할 수 없는 사명이며, 성도의 마지막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꺼져가는 전도의 불씨를 다시 일으키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전도로 인하여! 여러분의 영혼이 살고, 가정이 살며, 교회가 살아나고, 이 시대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달았던’ 경험과, 반대로 ‘썼던’ 경험을 나눠봅시다.
2. 내가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은 연유로, 가족이나 동료 이웃에게 성도로서 가지고 지켜야 할 기본을 잃어 버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건강한 성도, 시련과 미혹을 이겨낼 힘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하여! 다시 말씀을 생활화하는 습관을 세워 갈 구체적인 계획을 나눠봅시다.
제목: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까? (계 2:1~7)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인 서기 54년경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사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이 에베소에 가길 원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시고 유럽 쪽으로 인도하심으로, 돌아올 때에야 잠시 들를 수 있었던 곳입니다.(행 18:18∼23) 그러나 에베소야말로 선교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당시 이 에베소는! 아시아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크고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는, 이 에베소에 비교적 오랜 기간 머물면서 사역을 펼치게 됩니다. 서기 54년경부터 56년까지 약 3년 동안 이곳에 ‘두란노서원’을 개설하고, 목회자를 양성하여 배출했습니다.(행 19:8∼10) 그 결과! 소아시아 지역에 7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에베소 교회는 그 중심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정말 심혈을 기울였고, 눈물과 기도로 목회한 교회였습니다.(행 20:17∼38)
후일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도중 밀레도 항구에 기착했을 때, 본인이 에베소교회까지 올라가지는 못하고,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서 교회의 장로님들을 밀레도 항구로 청하여 만나는 장면이 사도행전 20장 17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 마지막 장면인 36절부터 38절까지를 읽어보면, 바울과 에베소교회 장로님들 간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 20:36∼38 →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을 한번 머리에 그림으로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뜨거운 눈물과 기도, 목회자와 성도 간의 끈끈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의 신뢰와 사랑이 뜨거웠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도 그런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요한계시록인데! 이 요한계시록의 기록 시기는 서기 100년경에 저술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교회가 세워진 지 4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에베소교회는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렸고 또한, 성도 간에 사랑도 식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면 과거 에베소교회는 칭찬거리가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계 2:2∼3 → “내가 ①네 행위와 수고와 ②네 인내를 알고 또 ③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④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⑤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⑥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네! 에베소교회는 ⇨ ① 주님을 위해 수고한 교회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②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고 핍박을 견뎌낸 교회입니다. 또한, ③ 이단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말씀의 진리로 무장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드러내는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점이 많은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가 책망받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계 2:4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이유는!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 머리는 가득 찼고 이성적인 판단과 분별은 잘하지만, 가슴엔 따뜻한 사랑이 없는 냉랭한 마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많이 식어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엔 믿음의 연조도 길고 꽤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속은 텅 빈, 형식적인 신앙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어떤 분이 신앙 상태를 음악과 비교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악보를 보면 다양한 기호들이 붙어 있는데, 그중에 ‘Crescendo’와 ‘Decrescendo’라는 ‘음악 기호’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호는! 음의 강약을 조절해줌으로써 악상을 살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벌어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 ‘Decrescendo’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리를 점점 줄어들게 연주하라’는 것이고, 모아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벌어지면 음악적인 용어로 ‘Crescendo’라고 하고, ‘소리를 점점 크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음악 기호’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본다면! 비록 처음에는 미약했다 할지라도, 점점 더 나아지고 뜨거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바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다, 크레셴도의 믿음! 점점 좋아지고 뜨거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하게도! 희망적인 것은,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다시 살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 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①생각하고 ②회개하여 ③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R로 시작하는 ‘세 단어’ ⇨ Remember, Repent, Restore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Remember’ -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가만히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에 대한 그 뜨겁고 순수하던 열정이 식었다면! 언제, 어느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아니면 취직하고 출세하고, 아니면!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목사가 되면서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이사하고, 돈 벌고, 아이 낳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맑씀읽기와 묵상 그리고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첫사랑과 같은 뜨거운 열정과 열심을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서,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Repent’ -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되돌아본 후!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유무에 따라서 인생이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후회’와 ‘회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잘못된 자리에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부인했고, 세 번째는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잘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라고 ‘후회’하며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잘못한 것을 깨닫고 후회는 했지만,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면! ‘후회’하고 아예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잘못된 자리를 털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Restore’- ‘회복하라(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했다 할지라도,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그 회개는 거짓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생활 속에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기도의 열심을 잃어버리셨습니까? 다시 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의 자리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용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기도의 십자가도 받았는데 기도 줄을 놓고 있었다면! 다시 기도의 십자가를 붙드시길 바랍니다. 봉사와 섬김의 열정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임명장을 받고, 직분을 가졌어도, 사명을 팽개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여러분이 서야 할 자리로 빨리 돌아오십시오.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면! 즉시,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입니다.
요 21:16 →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사랑을 확인하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에 서게 하신 예수님! 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회복’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충성하는 제자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계 2:5b →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 주님이 옮기시겠다고 하신 ‘촛대’란 ‘성령’을 의미하고 ‘구원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 은혜도, 구원의 역사도 깨닫지 못하는 개인! 결코,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 품었던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가운데 사라져가던 주님에 대한 첫사랑이 다시 한번 활활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발전하고 성숙해 가는 성도들이 되어,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귀히 여겨주시는 복된 천국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지금 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때, 잃어버리거나 식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앙의 요소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서로 나눠봅시다.
2. 10년 혹은 20년의 기간을 두고 봤을 때, 나 자신의 신앙의 성숙도와 열정이 깊어지고 뜨거워졌는지? 아니면 옅어지고 식었는지 서로 나눠봅시다.
3. 대장장이는 쇠가 빨갛게 달구어졌을 때, 망치로 내려쳐야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쇠가 식고 난 후에는 세게 내려쳐도 원하는 모양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망치질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제목: 감사함이 축복입니다. (대상 29:1∼14)
딤후 3장에 보면, 말세가 되면! 이 세상이 더 살기가 힘들고 고통스럽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곧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이 되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딤후 3:1∼2, 5b →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5절에 결론적으로)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해도!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마음’과 ‘입술’과 ‘삶’에 늘 감사가 풍성한 사람들이 되어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감사를 잊지 맙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이 들어서 다 잊어버리고 기억 능력이 약화되어도, 이것만은 꼭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제가 확신을 갖고 말씀드리건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욕심에 빠져서, 늘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면! 상대적으로 치매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세 차례, 꼭 감사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감사절을 지키라고 하신 까닭은! 하나님이 무슨 물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감사하는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매년 3∼4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왜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어야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감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것은! 축복받고, 사랑받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역대상 16장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대상 16:8,10 →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 그리하면(감사하면)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마음의 즐거움, 하늘로부터 임하는 유쾌함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0장 말씀입니다. 렘 30:19 →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아멘. 감사하는 자를 번성하게 하시고, 수효가 늘어나게 하시고, 존귀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네! 감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빌 4:6∼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왜 그냥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감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감사가 체질화되고 습관화되어, 늘 감사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은혜의식을 가집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다윗의 감사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싶은 열망이 무척 컸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드릴까 생각하다가,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대상 29:11∼12 →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부와 권세와 만물이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신앙고백에 바탕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자세로 감사드렸습니다. 대상 29:14 →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여기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는 받을 자격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큰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다윗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기는 자격도 없는데 높은 지위와 큰 물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그 마음 중심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왔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이 있어야, 참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일용할 양식이! 내 수고로 모으고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켜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고백하면서 ‘감사합니다.’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것을 드린다는 교만함이 아니라, 다윗처럼 “우리가 주의 손으로부터 받은 것을, 주께 드릴 뿐입니다.” 고백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먼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금과 은을 드렸습니다. 대상 29:3 →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私有)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그런데, 다윗이 얼마만큼의 금ㆍ은을 드렸는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상 29:4 →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여기 금 3천 달란트는 무게로 치면 102톤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참고로, 2025년 3월 현재 우리나라의 금 보유량은 104톤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금 전체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거기다가 은 7천 달란트는 240톤이니, 엄청난 액수의 예물을 성전건축을 위해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다윗의 봉헌에 감동한 지도자들과 백성들도, 성전건축을 위해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대상 29:6,9 → “이에 모든 가문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관이 다 즐거이 드리되,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
그렇습니다. 왕과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거운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드릴 때 ‘즐거운 마음’과 ‘자원함으로’ 드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 기뻐하시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감사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감사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힘일까요? ‘감사는! 감사를 불러오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진짜 감사한 일이 생기고, “괴롭다, 죽겠다” 하면! 정말 괴로운 일, 죽을 일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 감사가 내 삶에 임하기를 바란다면! 감사의 말을 입에 달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429장이 있는데 그 1절 가사를 보십시다. 429장 1절 →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후렴)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1절 가사에 3번이나 받은 복을 세어보라고 했습니다. 네! 복은 세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받은 복이 뭐지? 감사할 일이 뭐가 있지? 하며 손가락으로 하나둘하고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금방 생각이 나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예수 믿게 된 것,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이렇게 적다 보면 30가지, 100가지도 적을 수 있게 됩니다. 남과 비교하여 없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역대상 29장을 보면 → “드렸노니, 드리되, 드리고, 드림으로, 드렸을 뿐, 드렸사오며” 여섯 번이나 ‘드린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롬 6:12∼13절에서는 →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나의 삶을 주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연주해 주십니다. 여기 ‘무기’라는 단어는 → 영어의 weapon이 아니라(X), ‘도구’라는 뜻의 instrument입니다.(O) 이 instrument라는 단어는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제가 연주하면 어떤 소리가 날까요? 서툴게 연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찬양대 반주자가 연주하면, 동일한 피아노이지만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붙들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다윗을 하나님이 붙들고 연주하시니까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은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주께 드림으로! 더 크게 쓰임 받았던 다윗과 같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감사하지 못함으로 행복을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나는 가정 식구들에게 감사의 신앙, 감사의 문화를 계승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원망과 불평의 문화를 계승 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고 나눠봅시다.
3. 당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금 내게 있는 육체, 마음, 신앙의 질병은 무엇인지? 각자 그 원인을 나눠봅시다.
새 시대 새 환경에 맞는 제도와 직무! (대상 23:1∼6, 24∼32)
사람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것을 알고, 일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존재입니다. 아니! 그런 존재여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람들 중에는 날 때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1. 다윗은 죽기 전에 무엇을 마무리하고 죽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 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솔로몬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고,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에게 있어서 그냥 차기 왕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했지만, 평생의 소원이었던 성전 건축을 자기를 대신하여 이룰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하고 심사숙고 끝에 여러 아들 중에 ‘솔로몬’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 “너는 성전을 건축하여라. 성전 건축은 나의 평생소원이었으나, 하나님은 나의 손으로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내 아들, 너를 통해 성전 짓기를 원하셨다. 성전 건축을 위한 금, 은, 놋, 철, 재목, 돌 등은 다 준비되어 있다. 그러니 너는 여호와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여 성전을 건축하라.”
둘째, 다윗은 새롭게 시작될 성전 시대에 맞도록, 레위인들의 직무를 새롭게 재편하여 ‘성전 예배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지막 열정을 새 시대, 새 성전의 질서를 세우는 데 쏟아부었습니다. 즉 레위 사람들의 직무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여, ‘성전 예배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이전까지 회막과 각종 기물들, 특별히 언약궤를 옮길 때 그들의 어깨로 메어 옮기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레위인들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성전이 세워지게 되면! 더 이상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이들에게 각기 새로운 사명을 부여한 것입니다.
제사장을 돕는 일부터, 성전의 각 영역을 관리하고,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며, 진설병과 소제물을 준비하는 구체적인 임무까지, 다윗은 예배의 모든 과정이 세밀하고 거룩하게 이루어지도록 재정비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행정적인 개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영광스럽고 질서 있게 드려져야 한다는 다윗의 신앙고백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개혁에는 언제나 개혁을 일으키는 개혁자가 중요합니다. 개혁자가 잘못되면 그 개혁은 엉터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정치와 종교를 개혁하는 일에 영적,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다윗 자신이 직접 진행하였습니다. 과거의 성막 시대의 체제와 조직을 새롭게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조치는, 가히 종교 개혁 수준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제도와 직임의 변화는 벌써 단행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광야를 이동하던 백성들이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동식 성막을 고정식 건물로! 즉 성전을 세우고, 거기에 맞게 제도를 만들고 직무를 배정했어야 마땅했습니다. 대상 23:26 →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에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필요가 없다 한지라.”
그런데, 사사 시대 400년, 사울의 통치 40년, 다윗의 통치 40년, 거의 500년이 되도록 성전도 짓지 않고, 제사 제도도 개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백성들의 책임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책임이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그냥 안일하게 있는 대로 안주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때, 거기에 잘 대처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 때에 우리 교회는 친환경적으로 교회를 리모델링 하고, 대면하여 모이지 못해도 유튜브를 통해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하고, 밴드와 카톡방을 통해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지역 중심의 속회를 예배 시간 중심의 속회로 바꾸고, 환경과 생태문제를 목회의 중요한 주제로 채택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한 단계 더 성장·성숙케 되었습니다. 시의적절하게 사역자들을 붙여주셨고, 좋은 아이디어와 생각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을 세워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 쇠퇴하고, 타락의 길로 가게 된 이유는! 환경과 시대에 맞는 개혁을 시도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 때에 이르러 드디어 이런 일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늙은 다윗’이 멋진 모습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그냥 쉬고 싶고, 책임을 내려놓고 싶어합니다. 아니면 반대로, 노년의 탐심과 탐욕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지막까지! 미래를 준비하고 조직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다윗이 개혁적인 일을 펼쳐 가는 데 있어서 가졌던 몇 가지 원칙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백성의 원로인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다 모으고, 또한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솔로몬 왕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대상 23:2 →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었고, 원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라와 백성들을 이끌어 온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솔로몬을 중심으로 새로운 리더들이 나타날 때까지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이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그들의 동의와 동감을 얻어 개혁을 시행한 것입니다. 어떤 큰일을 행할 때일수록 전 구성원의 마음을 얻어 일하는 것이 중요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레위인들에게 임무를 맡기되 기능별, 직능별로 맡겼습니다. 대상 23:6 → “다윗이 레위의 아들들을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에 따라 각 반으로 나누었더라.”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 중에서 택했고, 찬양을 맡을 사람은 음악가 집안인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택했습니다.(대상 25:1) 문지기를 뽑는 일조차도 사사로운 관계로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공(公)과 사(私)를 잘 구별했던 것입니다.
셋째, 그 대표적인 방법이 다윗이 많은 결정을 ‘제비뽑기’의 방법으로 결정했습니다. 특별히 그 순서를 정할 때,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했습니다. 이것은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 알고 시행하는 신앙고백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대상 24:5a,31b →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장자의 가문과 막내 동생의 가문이 다름이 없더라.” 제비를 요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차별 없이 행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넷째, 다윗은 사명을 줄 때 온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주었고, 특별히 말로만 하지 않고 구체적인 계획도를 주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전 짓는 사명을 솔로몬에게 줄 때 이렇게 합니다. 대상 28:8, 10 →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여호와께서 너를(솔로몬을) 택하여 성전의 건물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 하니라.”
그리고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대상 28:11∼12 → “다윗이 성전의 복도와 그 집들과 그 곳간과 다락과 골방과 속죄소의 설계도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또 그가 영감으로 받은 모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성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설계도를 주고!”
네!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영감으로 받은 성전의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주면서 짓도록 합니다. 그냥 “이거 중요한 일이니 잘해라!” 이런 식으로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설계도”를 주면서 이렇게 건축하라고 준 것입니다. 성전 건축의 열망만 컸던 것이 아니라, 그 준비가 철저했던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다윗에게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인수인계를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일은! 언제나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가 해 온 일을 그다음 사람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여호수아에게 잘 인계했습니다. 모세가 한평생 펼쳐 온 일은 여호수아가 마무리를 잘해서 완성 시켰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잘 인계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 바울은 디모데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인계를 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의 왕위가 굳건히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다윗왕의 인생 마무리는 참 아름답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 건축의 사명을 아들에게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집니다. 성전 건축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고, 또한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일이니, 꾹 참고 아들에게 그 일을 맡긴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다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은! 남아 있는 후대의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넘겨주어야 합니다. 뭐든지 내가 다 하려고 하면, 거기서부터 무리수가 나오고, 욕심이 개입하게 될 소지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배워야 할 진리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시대의 변화를 읽고 그 변화에 잘 대응하고, 때론 시대를 이끌어 가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나눠봅시다.
2. 개혁에는 언제나 개혁을 일으키는 개혁자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개혁자가 잘못되면 그 개혁은 엉터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라는 말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눠봅시다.
3. 내가 현재 맡고 있는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에서의 역할 속에서 어떻게 거룩한 질서를 세워갈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소원을 품자! (대상 17:1∼15)
1. 소원이 삶을 결정짓는다
‘어떤 소원을 품고 사느냐?’ 이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품은 소원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 여러분의 품은 소원은 무엇입니까? 왜 이런 질문을 드리냐 하면! 오늘 본문이 ‘다윗이 품은 소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소원은 무엇이었고, 하나님은 그 소원에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2. 다윗의 소원
1) 성전 건축 - 오늘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된 후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온 후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마음먹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은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는 왜 이런 마음을 먹었을까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의 중심은 늘 하나님께 가 있었기 때문에! 언약궤, 즉 법궤가 그냥 저 시골 산 동네, 한 개인의 집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언약궤를 모실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을 건축할 마음으로 먹게 됩니다.
자신은 화려한 백향목 궁전에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천막 안에 모셔져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대상 17:1 →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그래서 다윗의 마음이 편안칠 않았던 것입니다. ‘성막’은 → 직물과 가죽으로 덮힌 천막입니다.
이 성막은! 출애굽 당시 모세가 하나님께 그 자세한 설계도를 받아서 제작한 ‘이동형 천막’입니다. 그때로부터 솔로몬 성전까지 약 500년간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처럼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길법한 데도, 하나님의 성소보다 자신의 거처가 더 화려하고 안락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누구의 요청이나 조언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성도 여러분! 이런 다윗의 마음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그동안 고생 많이 했고, 이제 좀 평안하게 잘 사는 것에 대해서, 그냥 “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평안하게 잘살게 되었구나! 참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참 예쁜 생각이죠!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빚진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거하실 처소를 지어드리고 싶은 소원을 품은 것입니다. 이전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고, 품지 않았던 소원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나단은 다윗의 소원을 듣고는, 즉시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당연히 기뻐하실 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 17:2 → “나단이 다윗에게 아뢰되,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 왜냐하면! 선지자 나단이 보기에 그런 다윗의 생각과 소원은 너무나 귀하고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늘 주님께로 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무언가 좋은 것을 해드리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다윗처럼! 주님을 향한 소원, 교회와 복음을 향한 선한 소원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거절 -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아주 특별한 소원을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자기의 뜻을 밝혔고, 나단이 좋다고 한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은 나의 집을 건축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선하고 아름다운 소원! 이제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위대한 소원이 거절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다윗의 소원을 거절하셨을까요? 정말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물리치셨을까요? 그래서 다윗의 위대한 꿈과 소원이 쓰레기처럼 버려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상 17:5∼6의 말씀을 풀어쓰면 이런 말입니다. → “나는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천막이 아닌 집, 즉 성전에 있어 본 적이 없고, 언제나 이 장막과 함께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내 백성을 떠난 적이 없었다. 또 늘 옮겨 다녔어도 지금까지 한 번도 사사들에게나 그 누구에게도 나의 집을 지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책망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진 그 마음과 소원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 다른 것으로 응답하심 - 대상 17:7∼8 →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①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②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 즉 ③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아멘.
우선,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미 과거에 주신 복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양을 치던 ‘목동’ 시절부터 그와 함께하셨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도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쟁에서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우셨습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것보다 더한 일이 다윗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와 장차 주실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즉 다윗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국기는 ‘다윗의 별’이라 하여 다윗의 이름을 기리고 있으며, ‘메시아가 그의 후손으로 오시는 등’ 정말 다윗이 얼마나 존귀하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만들어 주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들에게 주실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대상 17:11∼14을 요약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네가 죽은 다음에는 네 자식 가운데 한 사람이 네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다. ▸내가 그 나라를 견고케 할 것이고, 그가 너의 소원인 ‘성전’을 지을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어,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윗의 위대한 꿈과 소원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소원은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다른 복까지 더하여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남다른 소원을 품은 다윗을 기뻐하셨습니다.
4) 다윗의 감사 -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윗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상 17:16 →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비천한 목동에 불과한 자신을 불러,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하신 것도 너무너무 감사할 일인데, 아들 대에 성전을 짓게 하시고, 또 자기 집안이 영원토록 이르게 하신다니….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다윗은 진심으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사람은 다윗만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 다윗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 인간적으로도, 자격과 조건 면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받은 사랑과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상 17:16, 18 →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영예에 대하여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네! 하나님. 저같이 보잘것없는 자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와 대우에 대해서 저로서는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 드려야겠다는 위대한 소원이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그 중심을 받아주셨고, 그 자녀들의 삶까지 보장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그 자녀들까지 복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소원을 품으십시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향한 소원으로 가득하여, 우리 인생에 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풍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에 품은 소원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나는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사는지?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다윗이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리려고 했지만, 그 순수한 의도를 기뻐 받으시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여러분이 베푼 선함이 오히려 더 크게 자신에게 큰 유익과 복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언약궤를 맞이하는 자세! (대상 15:25~29)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언약궤’는 →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성물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언약궤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품과, 그 위에 있는 천사의 모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히 9:4∼5 →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①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②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③ 언약(십계명)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천사들)이 있으니…”
그런데 ‘엘리’ 제사장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언약궤를 적군인 블레셋의 손에 뺏기고 맙니다. 그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긴 했지만, 높은 산동네 ‘기럇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이란 사람의 집에 들여놓게 됩니다. 이후 적어도 70년 동안 이 언약궤는 잊혀진 채 그냥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된 다윗 때에 이르러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윗은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곳에 왕궁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왕궁에 사는 다윗의 마음이 편안칠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은, 방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기로 결심했습니다.
1. 언약궤를 모셔오는 바른 방법
다윗은 무려 3만 명의 사람을 동원하고, 새 수레를 만들어 ‘아비나답’의 집으로 갔습니다. 드디어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집을 나서는데, ‘웃사’와 ‘아히오’ 형제가 소를 몰게 되었습니다. 그 집이 산꼭대기에 있었으니 길은 좁고 경사진 비탈길이었습니다. 그런 데다가,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의 겨리소가 수레를 끄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마침내 산비탈을 다 내려와 평평한 타작마당에 이르니 소들이 막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실려있던 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니까, 큰아들 ‘웃사’가 손으로 그 언약궤를 붙들었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은데! 만져서는 안 되는 언약궤에 손을 댄 ‘웃사’는 그만 현장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경사스럽고 중요한 날인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을 포기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두고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다윗은 돌아와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일찍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언약궤와 성소의 기물들을 다루는 방법들에 대해서 엄하게 명령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 4:15 →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아론과 그 자손들이 순서에 맞게 성물들을 다 싸면, 레위 지파 자손들이 해당 성물을 꼭 어깨로 메어서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때 절대로 성물을 만져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는 보아서도 안 된다고 명하셨습니다. 민 4:19∼20 →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다윗에게는 언약궤를 왕궁으로 모셔와야겠다는 열심은 있었지만, 실상 그 방법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마침내 언약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맡겨둔 ‘오벧에돔’의 집이 석 달 동안 엄청나게 재정적인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됩니다. 대상 13:14 →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그러자 다윗이 다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올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 15:12b∼13 →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과 ‘규례’를 잘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일을 더 크게 그르치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작년 표어대로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율법의 절차를 따라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에 모시게 되자 다윗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인생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늘 기뻐하는 인생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언약궤를 모셔오는 바른 자세
① 주신 사명을 즐거움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대상 15:25 →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네!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오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오벧에돔의 집에서부터 다윗성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웃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 올 때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분명히 ‘웃사’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짜증스럽고 험하게 다룬 것이 틀림없습니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멍에를 메고 비탈진 좁은 언덕길을 내려올 땐, 모는 사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소를 다뤄야 합니다. 그런데 웃사는 “아니 왕이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왔으면 그 사람들을 시켜서 갈 것이지 왜 나를 시켜?” 속으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덕에서도 소를 험하게 몬 것입니다. 그러다가 땅이 평평한 타작마당에 이르자, 소들이 막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그러다가 결국 죽기는 누가 죽습니까? 네! ‘웃사’가 죽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가져야 할 마음은! ‘즐거움’과 ‘자원함’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대상 15:25b∼26a →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아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언제나 즐거움과 자원함으로 감당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헌신하는 마음과, 함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또 중요한 마음은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대상 15:26 →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렸더라.” 구약의 제사에서 짐승을 잡아 드리는 것은 바로 ‘헌신’을 상징합니다. 앞장서서 일하는 교역자들과, 또 그것을 알아주고 기꺼이 헌신하는 평신도들의 아름다운 하나 됨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저는 우리 꿈마을엘림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라고 믿습니다.
또한, ‘찬양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이스라엘 무리는 목소리와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대상 15:27b∼28a → “노래하는 자와 그의 우두머리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뿔나팔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은혜로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성도들은 ‘박수와 아멘!’으로 크게 화답해야 합니다. 또, 찬양단이 앞서 찬양을 인도하면! 그냥 구경하는 자세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박수도 치고, 크게 입을 벌려 목소리를 내서 함께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찬양을 받으시길 원하시고, 그런 찬양 중에 거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③ 받은 은혜를 소중하고 값있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에게 사울 왕의 딸 ‘미갈’이라는 조강지처가 있었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면 내 딸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는 약속으로 얻은 아내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시기 질투로 다윗이 도망자의 삶을 사는 동안 사울 왕은 딸 미갈을 ‘발디’라는 사람에게 재혼시켜 버립니다. 아마 다윗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사울 왕가는 몰락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자 다윗은 제일 먼저 조강지처인 미갈을 찾아서 데려옵니다. 그러면 미갈은! 다윗이 아버지 사울이 한 일을 다 용서하고 다시 자기를 왕비로 맞이하는 다윗의 너그러움에 감사하고, 조강지처로서의 그 자리를 귀중하게 여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미갈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 다윗을 업신여기고 무시했습니다. 더욱이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신앙까지도 업신여겼습니다. 대상 15:29 →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이런 그녀의 모습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왕후가 되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 은혜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삼상 2:30b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삼하 6:23 →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다윗의 사랑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모시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던 다윗과 같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언제나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아무리 선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께 맡기신 일을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감당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언약궤를 꼭 어깨로 메어 옮겨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부모님을 섬길 때) 쉬운 방법이 아닌 몸으로 섬겨야 할 이유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3. 왕도 백성도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유독 ‘미갈’만 이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예배하는 마음을 막는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오늘은 1984년에 제정되어, 올해 42회째 지키는 ‘환경선교주일’입니다.
1. 창조세계 보존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과 인식변화
최근 몇 년 사이에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를 보고 겪으면서 “아! 이것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구나!”라는 인식을 일반 대중들도 갖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2021년 코로나 팬데믹이 ⇨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임이 자유롭지 못하면서, 배달음식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택배를 통해 물건을 받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일회용품과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용기들이 엄청나게 소모되고 또한 쓰레기로 배출되었습니다.
그때, 환경문제가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고,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개입하고 변화시켜나가야 할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교회에서도 열심히 창조세계 보전과 녹색교회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그렇게 만 4년을 열심히 활동했더니, 금년 2025년에 이르러서는 교계에서도 우리의 그런 열심과 헌신을 알아주게 되었고! 지난 5월 20일 ‘한국교회협의회’를 통하여 공식 ‘녹색교회’로 인증받아 앞서 보셨듯이 인증서와 패를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점에 이르러서, 다시 한번 ‘환경문제’가 왜 ‘교회’에서 다뤄져야 할 주제인지? ‘신학적 성경적 관점에서의 문제의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인 1967년에, 전 기독교계가 깜짝 놀랄만한 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바로 린 화이트(Lynn T. White Jr.)란 분이 →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라는 제목으로 사이언스(Science)지에 논문을 발표했는데, 오늘날 환경위기, 생태위기의 주범은 ‘기독교’이고 그 책임은 ‘기독교인’에게 있다는 논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① 기독교는 인간과 자연을 차원이 전혀 다른 존재로 구별했다. ②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자신의 발전과 목적을 위해서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분의 주장은! 기독교가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창 1:28 →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을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훼손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적에 주목하고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 우리 인간은 자연을 가꾸고 돌볼 책임을 맡은 위임자, 관리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 우리는 자연의 ‘소유자’나 ‘주인’이 아니고(X), 자연을 관리할 ‘청지기’(O)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2:15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 → ‘경작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바드’(עָבַד)인데 이는 ⇨ “일한다, 봉사한다, 가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 ‘지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미르’(שָׁמַר)인데, 이는 ⇨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연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 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이며, 파괴되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할 사명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듯이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의식을 버리고, 자연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작품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우선!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가장 큰 사명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전도, 복음, 구원’ 같은 단어들이 떠올려지실 텐데, 이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답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 얻게 하는 것”입니다. 네! 아주 완벽한 대답입니다. 주님께서도 이와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6:15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우리는 말씀을 오직 ‘사람’을 향한 명령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즉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라는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뜻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의 범위는 훨씬 더 넓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막 16:15을 여러분의 성경으로 찾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 “만민에게”라는 단어 앞에 작은 숫자로 3)이란 ‘각주’ 표시가 되어 있고, 성경 아래쪽에는 그 3)번 각주를 설명하는 부분이 보일 것입니다. 거기를 보면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헬, 온 창조세계에”라고 되어있습니다. 네! 그러면 이 본래의 뜻을 잘 살려서 번역하면 어떤 말씀이 되겠습니까? 막 16:15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실제 헬라어 성경에서 사용한 단어는 → 'πᾶς κτίσις' (파스 크티시스)인데, 이는 ‘모든 피조물에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를 ‘만민에게’로 번역한 우리말 성경은, 순전히 인간 중심적으로 번역한 결과인 것입니다. 영어 번역본들을 살펴보아도, 한결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곧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만물’을 포함한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 주님이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은 ⇨ 단지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창조세계’로 그 범위가 훨씬 더 넓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 ‘복음으로 회복시켜야 할 대상과 그 범위’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성도들이 회복시켜야 할 대상은 ⇨ 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②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즉 자연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바르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사명’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 “자연을 대할 때 이기적이고 제 욕심만 채우려는 지배자의 자세가 아니라, 자연의 관리자, 청지기로서, 자연을 잘 가꾸고 보살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생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해와 달, 숲과 바람, 물과 들풀, 작은 생명 속에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돌봄의 사명, 즉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탐욕과 무관심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파괴해 왔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주 만물 가운데서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창조세계가 아파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깨지고 다치고 억눌리고 파괴되면서 소리치는 탄식소리와 그 상처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만물을 다스리도록 위탁받은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8:19∼22 →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네! 모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모든 피조물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야 피조물들이 인간의 썩어질 욕심으로 인한 파괴와 착취에서 벗어나 영광의 자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나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깨달은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모범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서 선도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이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펼쳐갈 ‘애국운동’은 ⇨ 바로 절제와 자기희생으로 ‘지구와 창조세계’를 잘 보전하는 ‘좁은 길’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나만 잘살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와 나의 후손, 우리 공동체가, 함께 복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생명운동’에 앞장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도전하는 말씀으로 신명기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 30:19 →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나눔과 묵상
1. 각자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가장 심각한 ‘환경문제’는 무엇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눠봅시다.
2. ‘소유자’와 ‘주인’이 vs ‘청지기’와 어떻게 다른지 얘기해 보고, 그동안 환경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어디에 가까웠는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