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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이재영
2026-02-28
조회 215

제목: 빈들의 기적 (요 6:1∼13)


벳새다 광야!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 엄청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남자 장정만 5천 명이니,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쉬기는커녕 또 인파에 휩싸이게 된 예수님의 일행은 좀 짜증이 날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몰려든 무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마가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막 6:34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쉬려고 가신 곳이었지만, 오히려 저물 때까지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제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여기는 빈들입니다. 날도 저물어 가는데 사람들을 어서 마을로 돌려보내시죠. 그래야 뭐든 사 먹기도 하고 끼니를 해결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막 6:37입니다.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얼마나 황당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믿음에는 분명히 ‘기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어떻게 무리를 먹여야 할 것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 6:6입니다.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그러니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해결 ‘방법’이 아니라, 해결하려는 ‘믿음’이었습니다. 네! 기적은 방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요 6:7 →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대답이었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환산해 보면 일당을 10만 원만 쳐도 2천만 원입니다. 한마디로! 빌립의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기적이 일어난 장소는 ‘빈들’이라고 했는데! 빌립은 빈들과 빈 주머니만을 생각했지, 함께 계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빌립이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이미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그 능력으로 능히 이 군중들을 먹일 수 있음을 내가 믿습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소서. 저희가 순종하겠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오늘 ‘빈들의 기적’이 일어난 요인은 어떤 것들입니까?


첫째, 헌신입니다.

오늘 본문 요 6:9입니다.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어린아이가 제자 안드레에게 드린 것은 작은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거기엔 어린아이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면 크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헌신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드린 것입니다. 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나에게 있는 시간, 재능, 지식, 물질,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온전히 헌신하면, 빈들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수고, 이런 섬김과 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는 성도들이 계십니까? 남들은 어떻게 하나? 무엇을 하나?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손에 올려진 일상의 헌신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문제를 만나면 먼저, 계산을 합니다. 돈이 얼마나 있나? 시간이 얼마나 있나? 가능성이 있나? 제자들도 똑같이 계산했습니다. ‘여기는 빈들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에 헌신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둘째, 순종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많은 ‘계산’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자녀의 미래, 노후 준비, 직장에서의 생존 등 빌립처럼 현실적인 수치와 가능성을 따져야 하는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제가 말씀드릴 ‘사막의 펌프 이야기’를 이미 들어 보셨을 줄로 압니다. 여행자가 마중물로 병의 물을 부은 것은 ‘도박’이 아니라, ‘글로 적은 말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내 ‘경험’이라는 마개를 열고, ‘말씀’이라는 펌프에 순종의 마중물을 붓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한 병의 물’을 쪽지에 적힌 대로 순종했을 때, 자신뿐 아니라 다음 사람도 마실 수 있는 풍요의 기적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우리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산더미처럼 만들어 놓고 나눠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떡을 나눠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을 나눠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나눠주었더니, 놀랍게도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순종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순종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축복을 가져오는 열쇠입니다.


셋째, 감사입니다.

제자 안드레가, 한 어린아이가 드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예수님께로 가져왔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은 그까짓 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비웃거나 핀잔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받으시고는, 높이 들고 큰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 6:11입니다.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여기 “축사(祝謝)하셨다”는 말은 → 헬라어로 ‘율로게오’(ευλογεω)인데, ‘축복하시고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근 2만 명을 앉혀 놓고, 작은 것! 한 아이의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하나님께 큰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은, 감사의 결과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축복이 따라왔습니다. ⇨ 이것이 감사의 능력입니다. ① 감사만 했는데도 ‘원대로’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11절입니다. →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할렐루야! 감사하면 오늘도 ‘원대로의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② 감사만 했는데도 ‘배불리 먹고도 남는 풍요’가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감사 전과, 감사 후가 180°달라졌습니다. ⇨ 가난의 언어가 부요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①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다”는 말이,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로 바뀌었습니다. ② “어린아이가 가진 오병이어가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는 빈곤의 언어가, “저희가 배부른 후에”라는 풍요로 바뀌었습니다. ③ “모자랄 것 같다”는 말이 “남았나이다.”라는 즐거운 탄성으로 바뀌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병이어 작은 것이! 감사를 통해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만드는 감사는,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는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고 하는 선제적인 감사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곱하기의 은혜’를 주십니다.

땅의 법칙은 ‘더하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곱하기’입니다. 이 두 법칙의 차이를 보시기 바랍니다. → 1+1=2입니다. 그런데 1×1=그냥 1입니다. 그러니까 곱하기보다 더하기가 더 큰 숫자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법칙보다 땅의 법칙이 더 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해볼까요? 2+2=4입니다. 2×2도=4입니다. 여기서는 같습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세상의 원리나 믿음의 원리나 달라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단계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4+4는 8이지만 4×4는 16입니다. 2배 차이가 납니다. 이런 식으로 해보면, 10,000+10,000은 20,000이지만, 10,000×10,000은 1억입니다. 무려 5천 배의 차이가 납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세상의 셈법(더하기)으로는 결코 빈들을 채울 수 없지만, 주님의 셈법(곱하기)은 우주적 풍요를 만드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할 때,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감사는 기적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축복의 상속자’가 되게 하십니다. ‘헌신과 순종과 감사’로 날마다 기적을 만들어 가고, 체험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현재 나의 삶(가정, 일터, 신앙 등)에서 ‘아무것도 없는 빈들’처럼 느껴져 마음이 삭막하거나 불안한 영역은 어디이며, 문제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던 빌립의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최근의 경험을 나눠봅시다.


2. 사막의 펌프 이야기처럼, 당장의 갈증(유혹)을 참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어야 할 나의 ‘마중물’(시간, 재능, 물질, 용서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주님이 이미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오늘 내가 먼저 선포하고 싶은 ‘감사의 제목’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2-21
조회 172

제목: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믿음 (요 5:1∼15)


1. 베데스다! ‘자비의 집’인가? ‘절망의 정글’인가?

오늘 본문 2절에 나오는 양문(羊門)은 예루살렘 성으로 출입하는 7개의 문 중의 하나로, 이 문은 특별히 제물로 사용할 양들을 끌고 들어갈 때 주로 사용하는 문이라 양문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양문으로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병자들은 이 연못에서는 ‘특별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는데, 그때 제일 먼저 물에 뛰어든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연못은 간헐천과 연결되어 있어서, 때때로 치료성분이 있는 온천이 솟아올랐다고 봅니다. 이렇게 이 연못에서 치유의 은혜를 입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상상력을 동원해서 지금 ‘베데스다 연못 가’에 수많은 환자가 침상을 깔아 놓고 눌러살고 있는 모습을 머리에 한 번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쉽게 그려지시지요!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그곳의 실상은, 전혀 자비롭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 ① 기약 없는 기다림의 곳이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을 때 1등으로 들어가는 사람만 낫는다는 소문 때문에, 수 많은 환자들은 그저 물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② 그곳은 무한 경쟁의 장이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선 옆에 있는 환자를 밀쳐내고서라도 먼저 들어가야만 하는 곳, 그것이 베데스다의 민낯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남들보다 앞서야 성공한다는 경쟁 사회 속에서, ‘언젠가 내게도 행운이 오겠지’하며 막연한 희망을 품지만, 실상은 점점 지쳐갑니다. 겉으로는 ‘자비’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시기하고 원망하는 세상,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판 ‘베데스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이 찾아오셨고, 마침내 그 이름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2. “네가 낫고자 하느냐?” : 무기력과 원망을 깨뜨리는 질문

예수님은 축제의 중심지인 성전보다, 절망이 깊게 배인 베데스다를 먼저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38년 동안 누워있던 한 병자 앞에 서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38년!’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긴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일어날 힘도, 도와줄 사람도 없어, 무기력하게 그냥 남아있는 ‘완벽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은 좀 어색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환자에게 낫고 싶냐고 묻는 건 이치에 맞질 않죠! 하지만, 이 질문엔 두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① 학습된 무기력을 깨뜨리는 질문입니다. 38년이라는 세월은, 그에게서 ‘소망’을 완전히 빼앗아 갔습니다. 그는 이제 ‘낫겠다는 의지’보다는 그냥 체념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② 핑계와 원망을 깨뜨리는 질문입니다. 지금 이 환자는 “내 발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나를 넣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남이 먼저 내려갑니다.”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뜨리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 된다.”, “누구 때문이다”라는 ‘학습된 무기력’과 ‘타인에게 원인을 돌리는 책임전가’는 우리를 계속 그 자리에 머물게 만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는 정말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길 원하느냐?”, “환경 탓, 남 탓만 하던 그 자리를 떠날 준비가 되었느냐?”

주님께서 병자를 보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이든, 떠난 사람이든, 다 싸잡아서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생각은! 가장 오랜 기간 머물러 있는 자기가 들어가야 맞는데, 불공평하게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먼저 들어간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긴 자비의 연못이 아니라 정글의 법칙만 통용되는 ‘생존 투쟁의 장’이라고 푸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병을 낫고자 하는 본래의 목적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불가능한 현실만 늘어놓으며, 안될 이유만 털어놓고 있습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에게도 안 될 상황, 불가능한 조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런 조건에만 매여 있는 인생은 38년이 아니라, 380년을 그 자리에 있어도 병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지금의 내 형편과 처지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것을 박차고 일어날 믿음과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 병자는 지금, 자기 앞에 서서 질문을 던지는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다만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이 사람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 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행하신 일들도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이 38년 된 병자와 똑같이 무기력하고, 원망이나 핑계만 대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절망의 자리에 그냥 머무르게 하는! 그 무기력한 생각과 핑계와 원망을 떨쳐버리고, 믿음으로 일어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저는 약하고 무력하나, 주님이 함께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무기력해진 다리가 펴지기 전에, 먼저! 생각이 펴지고, 믿음이 펴져야,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아무 변화 없이 그저 38년 된 병자에게 해 주셨듯이, 그런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건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주님을 의지하여 내가 깔고 뭉개고 있는 자리, 무기력과 핑계와 원망을 떨쳐버리고 일어나게 하옵소서.” “무기력한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성령충만 받은 후의 제자들처럼! 담대하게 하시고, 능력 있는 자로 서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고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 입은 자의 책임 :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병자의 무기력과 핑계와 원망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38년 된 저주의 사슬이 끊어졌습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오늘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그를 다시 만난 주님은 그에게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5:14 →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주님의 말씀은! 병이 나았어도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에 대한 ‘경고’이며 또한 ‘사랑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기적적으로 완쾌된 뒤에도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면! ⇨ 이 사람의 경우, 병에 걸렸던 이유가 ‘죄와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자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한 것은! ⇨ ① 죄의 무거움을 알고, 육체의 고침을 받은 것으로 다됐다고 여기지 말고, 네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길 원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② 은혜를 핑계 삼아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님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네! 이 병자는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무슨 공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 그런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감사도 모르고 다시 죄의 습관으로 돌아간다면, 더 비참한 영적 질병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다 건강하고 조화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늘 평안 속에 건강한 영적 생활을 하고, 도덕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고, 또한 육체적으로도 건강한 삶을 위해 몸을 잘 간수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갈 5:13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네! 죄의 결과는 반드시 우리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줍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기 위해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로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시길 바라는 경건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런 믿음의 기본기가 잘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역자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늘 환자의 병을 고쳐주시고 하신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 해도 ‘죄의 성향’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가 노력해야 합니다. 죄의 성향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갈라디아서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5:19∼21 →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아멘.

결론: 이제 여러분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십시오. 오늘 주님은! 여러분 삶의 베데스다에 찾아오셨습니다. 원망의 자리를 걷어치우십시오. 사람 탓, 환경 탓하던 마음을 버리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채 종교적인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거룩을 결단하십시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붙들고, 크리스천다운 단정한 삶, 정직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오랫동안 깔고 앉아 있던 그 절망의 이부자리를 들고 일어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강과 축복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명절이나 축제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더 쓸쓸하거나 소외감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서로 나눠봅시 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이런 마음을 가진 이들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배려는 무엇일지 나눠봅시다.


2. 내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 핑계 대고 있는 ‘나만의 38년 된 병’ 혹은 환경과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주님은 병을 고쳐주신 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가 은혜받은 자로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단정한 삶’을 살기 위해 끊어내야 할 습관이나 결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2-14
조회 123

제목: 기쁨의 인생이 되는 세 가지 원리 (요 2:1∼11)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결혼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축제 분위기가 식고 기쁨을 상실할 위기에, 예수님께서 평범한 물을 극상품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베푸심으로, 더 큰 잔치의 기쁨을 누리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 ‘축제의 인생,’ ‘기쁨의 인생’으로 바뀌는 기적을 맛보고 싶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드리는 3가지 원리를 잘 적용해서, 기쁨의 인생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삶의 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곳에 예수님이 초청받으셨고,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네! 우리 인생이 기쁨으로 가득 차고, 필요할 때 기적이 일어나려면! 먼저 예수님을 내 인생에 초청하고 모셔 들여야 합니다. 요 2:2 →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예수님을 초청하여,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행사, 예수님이 함께 하는 자리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든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만일 그 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거든, 여러분도 거기 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힘들어도 여러분이 안 갈 수 없는 자리, 그리고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예수님께 함께 가달라고 요청하십시오. 예수님은 기꺼이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자리를 복되게 하시고 필요하면 기적도 행하실 것입니다.

또한, 결혼식 같은 큰 행사뿐 아니라, 일상의 식사 자리, 부부나 자녀와의 대화 시간, 직장에서의 회의 시간에도 예수님을 ‘VIP’로 모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내가 주도권을 쥔 자리가 아니라, 주님이 역사하시는 자리가 될 때, 그 자리는 은혜와 기쁨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 내주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늘 하늘로부터 임하는 기쁨이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가정도, 어느 공동체도 문제는 다 존재합니다. 오늘 가나 혼인 잔치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완전히 피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자크 펄만(Itzhak Perlman)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가 뉴욕 링컨 센터에서 공연하던 중, 갑자기 바이올린 줄 하나가 ‘퍽’하고 끊어져 버렸습니다. 바이올린은 네 개의 줄로 연주하는 악기인데, 그중 하나라도 없으면 제대로 된 연주가 불가능합니다. 청중들은 당연히 그가 연주를 중단하고, 줄을 교체하거나 다른 악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지휘자에게 계속 진행하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남은 세 개의 줄만으로 그 어려운 곡을 완벽하게 재구성하여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줄 하나가 없기에! 낼 수 없는 음역대를 다른 줄로 대체하며,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새롭고 신비로운 선율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연주가 끝난 후,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로는, 남은 것들만 가지고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음악가의 사명입니다.” 네! 우리 인생도 연주 도중 줄이 끊어지듯, 예상치 못한 결핍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부족함의 역설이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줄이 끊어진 것은 위기였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세 개의 줄로 만드는 ‘새로운 기적의 소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줄이 끊겼을 때 이자크 펄만이 연주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포도주가 바닥났을 때! 우리는 절망하는 대신 그 ‘끊어진 상황’을 주님께 ‘기도’로 가져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바닥난 상황’을 ‘기적의 무대’로 바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바닥은! 오히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부족할 때, 그때가 바로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에 봉착했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까? 그 문제를 주님께로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마리아는 잔칫집의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 포도주가 없다”(3절)고 잔칫집의 문제를 직고(直告)했습니다. 마리아의 기도는 길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라는 간단한 고백이었습니다. 기도는! 주님께 나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고, 그 기도는 기적의 시작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6:24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아멘.


3.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소개하는 기적의 결정적인 열쇠는 ‘순종’이었습니다. 특히 하인들의 ‘순종’이 돋보입니다.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요 2:5 →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은혜받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순종’이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하인들을 보십시오. 7절입니다. 요 2:7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어서 8절입니다. 요 2:8 →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네! 하인들은 물을 채우기만 한 게 아니라, 그것을 들고 연회장에게로 갔습니다. 아마 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맹물’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의 발걸음을 중단치 않았을 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맹물은 극상품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의 기적은! ‘믿음의 기적’이었고 ‘순종의 기적’이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끝까지 가는 것이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합리적인 이성을 존중해야 되지만, 이성에만 묶여있고 매여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믿는다’는 말과 ‘순종한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별개가 아닙니다. 믿으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순종의 대가는 생명이고 축복입니다. 순종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에 문제가 있습니까? 부족함이 있습니까?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처럼, 맹물 같은 우리 인생을 포도주와 같은 복된 인생으로 바꾸어주시길 원하십니다. ‘물’과 vs ‘포도주’는! 맛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용도나 가치도 다릅니다. 놀라운 전적인 변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물 같은 옛사람은 사라지고, 포도주 같은 값진 존재로 변화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맛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쓰임새도 달라집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으나, 예수 믿고 난 이후엔 맛있는 인생, 색깔도, 표정도, 인상도 달라진 인생,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게 기독교입니다.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을 얻게 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 점점 더 좋아지는 은혜와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표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결정적으로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믿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1절입니다. 요 2:11 →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가 처음 제자들을 위해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실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예수님에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순종을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도, 우리 가정도, 우리 교회도, 갈수록 칭찬받고, 갈수록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고, 그런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가나 혼인 잔치에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여러분의 삶의 영역(가정, 직장, 자녀, 개인적 고민 등) 중 예수님을 가장 먼저 초청하고 모셔야 할 곳은 어디인지 나눠봅시다.


2. 마리아는 문제가 생겼을 때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문제를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문제를 만났을 때 스스로 해결하려 애쓰는 편인가요? 아니면 즉시 주님께 기도로 가져가는 편 인가요?


3. 하인들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명령에도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최근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순종 중, 이성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순종의 결단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2-07
조회 173

제목: 확실하지만 더딘 하나님의 언약 (창 15:1∼7)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한, 그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실 줄을 믿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구체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하나님은 정말 신뢰할 만한 분이신가?” “약속이 확실하다면 증거라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사실 믿음생활에 있어서 구체적인 ‘증거’는 매우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1에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 ‘증거’라는 말은! 믿음은 본래 눈으로 보지 못하는 특성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막연함 속에 머물지 않도록,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결과를 ‘증거’로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에서 증거를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아브람도 그랬습니다. 평소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고민을 하나님께 꺼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창세기를 보면 볼수록, 우리의 인생에서 실제로 ‘느끼고’ ‘아파하고’ ‘고민하는’ 내용들이 아브람의 삶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마음을 접게 된 아브람!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 결과 평소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하나님께 꺼냅니다. 창 15:2∼3 →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이 푸념의 핵심은! 내게 약속하신 자식을 주시지 않았으니 ‘엘리에셀’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아브람은 자식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람의 소원을 모르셨던 것도 아니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의지가 없었던 것도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기 전에 ‘그의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창 11:30).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른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불임’은 단순히 아이를 못 낳는 고통을 넘어,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그 어떤 미래도 기대할 수 없는’ ‘완전한 절망’을 상징하는 강력한 은유입니다.

아브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높은 권세를 누린다 해도, 아브람 대에서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절대 절망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열방의 복이 되는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고,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


2. 역설로부터 출발 되는 믿음!

성경의 ‘믿음’ 이야기는! ‘역설’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미 태가 닫힌 사람, 미래를 열어갈 어떤 잠재력도 가지지 못한 사람, 절대 절망에 놓여 있는 사람, 바로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시겠다는 모순적인 은혜로부터 출발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만 불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소위 믿음의 삼대 조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불임의 문제를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불임의 사람들을 선택하신 이 사실에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축복이, 인간의 능력이나 힘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 즉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 이루실 나라는! 인간적인 혈과 육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권능으로 성취되며, 하나님의 신비한 지혜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진리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불임 상태에 있는 아브람과 사래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인 믿음!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람은 믿음에 이르렀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인간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저 ‘하나님이 믿게 하신 것’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마 16:16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마 16:17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은! ⇨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오는 ‘은총’입니다. 믿음은! ⇨ ‘지식’이나 ‘이해’나 ‘설득’에 근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시의 본질이고 특성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짜고짜 그냥 믿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믿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인간의 능력이나 힘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것을 총동원한다 해도 결코 실현할 수 없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단 0.1%의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그 가능성을 먼저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가능성이 ‘0%’인 그 절벽 끝에서 비로소 진짜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던 태도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에 대한,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완전히 내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할 다른 어떤 가능성도 인간적으로 찾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아브람은 자기 나이에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0%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능히 말씀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자기는 알지 못하지만,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불임의 현실을 뛰어넘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매우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한없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이 없고, 미련한 일은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노아’를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다들 맑은 하늘 아래서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밭도 갈고, 장사도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동안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습니까? 사람들이 다들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한 사람이라고, 미친 영감이라고 침을 뱉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믿음의 길을 간다는 건! 이렇게 한없이 곤혹스러운 일이고, 한없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욱이,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이 시대에! 부활 생명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노아가 맑은 하늘 아래에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야 했던 것만큼이나 곤혹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코미디 같은 말씀을 ‘믿은 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믿음이! 세상 논리 앞에서는 한없이 곤혹스러운 것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펼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믿는 자들을 의롭다 여기시고 그들에게 기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이신칭의의 원리’가 아브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기근도 만나고, 위기도 당하고, 실망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말씀과 뜻을 성취해 가시는 분이심을 믿고 살아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 역시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응답이 더뎌서 아브람처럼 스스로 기대를 내려놓거나, 이 정도면 됐다며 마음을 접어버린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내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대 절망’의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나타나는 통로가 됨을 믿으십니까? 나의 0%의 가능성을 하나님은 100%의 약속으로 바꿔주신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노아가 맑은 하늘 아래 방주를 지을 때 겪었을 곤혹스러움처럼, 오늘날 부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믿고 사는 것도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믿음이 되도록, 내가 내려 놓아야 할 ‘내 생각과 판단’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1-31
조회 184

제목: 방주와 교회 (창 6:13∼22)


노아가 살던 시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악했습니다. 썩을 대로 썩고, 폭력과 불법이 난무했고, 성적으로도 몹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실 정도였습니다. 창 6:6 →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결국, 하나님은 회복될 가망성이 없는 세상을 대홍수를 통해서 다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구원하시기로 마음먹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하십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고, 마침내 그 방주에 들어가 대홍수의 심판 때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노아가 가졌던 믿음과 의로움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노아를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신 노아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①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음 장’인 히 11장에서, 노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 11:7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상식적이지 않은 말씀이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네! 기독교 신앙은 ‘눈으로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이성’이나 ‘경험’에 기초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이 들려질 때, 그 말씀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가가 관건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교양강좌’나 ‘인격 수양을 위한 말’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는 ‘지성인’이 될지언정 결코 ‘신앙인’은 아닙니다. 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들려질 때, 경외함으로, 생명을 걸어야 할 말씀으로 듣는 믿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런 노아와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하나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한 믿음’이었습니다.

창 6:22입니다. → “노아가 그와 같이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네! 말씀을 듣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진짜 믿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경험’과 ‘상식’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지성인처럼 보이지만, 결코 믿음을 지닌 자의 자세는 아닙니다.

사실, 노아 역시!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배를 만들라 하시는데,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높은 산에다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지난 480년을 살아오면서, 산꼭대기는커녕 그 언저리에라도 다다른 홍수를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온 세상을 뒤덮는 엄청난 홍수란! 노아의 경험이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하기도 쉽지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경외함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꼬박 120년간 노아는 산에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친 늙은이’로 ‘정신병자’로 취급했습니다.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노아의 행동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행동이었지만, 노아는 믿음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20년이 지나서, 정말 온 세상을 덮는 홍수가 났을 때야 비로소 노아 역시 그런 배의 필요성과 합당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이성이나 경험, 상식과 합리성을 뛰어넘는 도약(leap)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식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 믿음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무엇입니까?

노아 시대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면서 ‘방주’로 노아 가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는 ‘교회’를 인류구원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방주’와 ‘오늘의 교회’는 그 기능과 역할이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방주를 만들게 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창 6:19 →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네! 바로 ‘생명 보존’이 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믿는 성도들을 구원하시려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도덕교육이나 정신수양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준비하신 특별한 기관이라는 말입니다.

네! 하나님께서는 신약, ‘새로운 약속’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구원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때에는 ‘방주’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던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는 ‘교회’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구원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행 16:31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3. 방주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방주가 아니고서는 홍수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마지막 불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입니다. →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노아 시대에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었던 것 같이, 오늘 우리 시대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이요, 구원의 길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행 4:12입니다.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노아의 방주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문이 열렸을 때는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이 닫힌 다음에는, 홍수가 끝날 때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0:9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노아 시대엔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문’이었듯이, 오늘 우리에겐 ‘예수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인 줄로 믿습니다.


4. 전도는 하나님의 가장 큰 명령이요,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시고 한 가지 약속과 명령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창 6:18, 20b →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네!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방주를 구경만 해서는 안 됩니다. 방주 가까이 와서 방주를 만져보는 것도 소용없습니다. 그 방주를 자신의 거처와 피난처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꿈마을엘림’이라고 하는 방주를 허락하시며 주신 말씀! 한 가지 명령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 “네 가족을 다 방주(교회)로 이끌어 들여,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네! 교회와 예수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선이라면, 이 구원선에 승선하지 않은 가족과 이웃들의 구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상상력을 발휘하여 홍수가 시작되던 심판의 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한 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그의 세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을까요? 믿음의 사람 노아는! 자기 가족들의 구원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침묵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족들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믿다가 낙심한 성도들, 아직 구원의 방주에 승선하지 못한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해 오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최우선으로 인도하여 이 자리로 인도해 오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전도는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 아니라, 가장 크고 귀한 선물을 주는 일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마다 말씀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믿음의 사람들,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한 노아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낙심자와 불신자들을 구원의 방주인 교회로 이끌어 들여, 생명을 보존하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무시하고 농담으로 여겼던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은! 이성 이나 경험, 상식과 합리성을 뛰어넘는 도약(leap)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노아 시대의 방주의 역할과 기능은 오늘날 교회의 역할과 사명과 일치합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우리의 가족, 친척, 친구, 이웃 가운데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누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함께 지혜를 모으고 중보기도를 드립시다.

이재영
2026-01-24
조회 146

제목: 창조주 하나님 (창 1:1∼5)


오늘 우리는 성경의 가장 앞부분인 창 1:1∼5까지의 말씀을 읽었는데, 실은, 성경의 첫 장 첫 절인 1절 말씀만 믿을 수 있다면, 성경 전체의 말씀을 다 믿을 수 있습니다. 창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신앙고백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이 우연히 생겼거나, 사람이 진화되어 오늘의 우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과 설계 가운데, 천지와 만물! 그리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네! 이 ‘창조신앙’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창조신앙이 쓰러지면!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과 영생 등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이 다 쓰러지게 되어 결국 인본주의자가 되고, 극단적으로는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신앙을 철저하게 지켜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이 세상의 처음 상태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캄캄했습니다. 생명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자, 환해지기 시작하면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물러갔습니다. 모든 것이 정돈되고, 각종 생물들이 창조되면서, 죽음의 세상은 생명이 약동하는 세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빛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비취임으로 만물이 소생하고 활력을 찾듯이, 죄악의 어두움 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빛 되신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때 ⇨ ① 삶의 질서가 잡히고 ② 생명을 얻고 ③ 텅 빈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까요?


첫째, 하나님은 당신의 혼돈을 질서로 바꿔 주십니다.

‘혼돈’이란 원어 토후(WhTo)의 뜻은 ⇨ ① 황량한 사막에, 길이 나 있지 않은 상태 ② 아무것도 정돈되지 않은, 무질서한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온 세상은! 과학과 의학, 컴퓨터와 첨단 기술, AI 시대임을 자랑하는 인간이지만, 그 본질 속에는 이기심과 탐욕, 핑계와 책임 전가의 죄성이 있기에, 혼란과 혼동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혼돈의 원인인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다른 나라나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러다가 뭐 좀 잘된 일이 있으면 그건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자랑하는! 그래서 마음이 갈라지고 분열되어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죄성이 문제인 것입니다.

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 안에서 성품이 새로워지는 변화를 갖지 않고는, 이리저리 아무리 열심히 뛰어보아도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바쁘게 일하기는 하지만 방황할 뿐입니다. 시 127편 말씀입니다. 시 127:1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네! 애는 많이 쓰는데, 열매가 없고 헛수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의 질서는, 부모가 잘 잡아주어야 합니다. 정리정돈을 하고, 잠자고, 일어나고,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에 가고… 이렇게 부모가 틀을 잡아주어야, 커서도 질서가 잡힌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의 역사를 보더라도 너무나도 질서 정연하게 일을 처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한 완전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 인생에 무질서가 생기고, 혼돈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가정의 모든 식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의 질서가 회복되고 참된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의 공허를 충만으로 바꿔 주십니다.

‘공허’란 원어 보후(WhB)의 뜻은 ⇨ ① 텅 비어있는 상태 ② 가치 있다고 여길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뭔가 속이 비어있는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가치 있고 귀하고 영원한 것들 - 생명, 기쁨, 평화, 행복, 사랑!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불행이 왜 오는 것입니까? 세상에 대한 소유욕!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는 ‘공허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사람이 탐욕의 종으로 전락해 버리면, 천하를 다 주어도 부족합니다. 그 무엇으로 채우려 해도, 그 공허를 다 채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자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빈자리를 세상의 것들 – 즉 물질이나, 명예나, 세상 향락 같은 것들로 채워보려 하지만, 그 만족은 잠시뿐이지 이내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빈자리는! 오직 하나님이 자리하셔야만 채워질 수 있는 자리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이스라엘의 3번째 왕이었던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그의 최종 삶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세상 것으로 겉을 치장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소유해 보았지만, 속은 여전히 공허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년에 쓴 전도서를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 1:8 →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영혼의 공허를 채울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인생의 결론으로 자녀들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전 12:1 →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그리하라.”

성도 여러분! 삶에 공허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의지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공허가 만족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후 3:5b →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아멘.

또한, 시 23:1 → “여호와(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기 ‘부족함이 없다’라는 말은! ‘모든 걸 소유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목자이시기에 ‘더는 구할 것이 없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원함이 없는 풍족한 마음! 이것이 충만한 삶입니다. 주 안에서 누리는 이런 풍요함이 여러분에게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당신의 어두움을 빛으로 바꿔 주십니다.

‘흑암’이란 원어 호셰크(&v,j)의 뜻은 ⇨ ① 죽음 ② 저주 ③ 죄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흑암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또한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라고 한 것은, 흑암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고 흑암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어두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1:21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렇게 ▸ 어두운 마음은! 어두운 생각을 낳고 ▸어두운 생각은! 죄질 계획을 갖게 하고 ▸죄질 계획은! 죄의 행위를 낳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를 죄짓게 하는 죄의 독소는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제약회사마다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개발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지만, 세상의 그 어떤 제약회사도, 탁월한 의사나 연구가도, 영원히 개발할 수 없는 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독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죄를 완전하게 예방하거나 혹은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처방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고 고백하면, 사망과 저주는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일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전 5:5 →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아멘. 네! 우리는 낮에 속한 자요, 빛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을 인도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구름 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성경에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 13:21∼22 →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네! 여기에 우리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항상 동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의 주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그를 따라가는 인생이 되어서, 선한 길, 복된 길, 안전한 길로 인도함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질문과 묵상


1. 창조주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나의 일상과 의사결정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겠는가? 구체적인 사례(가정, 직장, 재정, 관계)를 나눠봅시다.


2.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인생이 새로워졌습니다. 나에게 ‘돌아옴’이 필요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돌아 오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과, 돌아온 뒤 경험한 변화(평안, 질서, 관계 회복 등)를 나누어 보세요.


3. 지금 내 삶에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보세요.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시도했던 방법들과, 하나님께 맡기는 실제적 실천(기도, 성경 묵상, 공동체 참여 등)을 계획해 보고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1-17
조회 200

제목: 성령으로 육체의 법을 제어하라. (갈 5:16∼24)


사람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① 자연인 ②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③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사영리’ 소책자에서 많이 보신 그림이시죠!

  

<자연인>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아름답게 보실까요? 물론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갈 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성령을 따라 행하며,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저는 세 가지 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정직한 자기 성찰과 고백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죄는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나’ ‘자기’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어로 죄는 S I N 즉 sin이라고 합니다. → SIN 그런데 이 죄(sin)라는 단어 가운데에는 I 즉 ‘나’라고 하는 글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창조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지 않고, 대신 나 자신을 우주의 중심과 가치 판단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SIN의 첫 글자 S는 south 즉 남쪽을 이르는 말이며, 끝 글자 N은 north 즉 북쪽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남과 북의 한 가운데 I, 즉 ‘내’가 있으니!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가장 큰 방해요소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영어로는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 보면! 이렇게 풀어 쓸 수 있습니다. ⇨ Christ + i(I) a(am) n(nothing) 다시 말해서,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그리스도 외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거나 축소합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라는 식의 변명과 자기합리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자신의 변화를 막는 가장 나쁜 습관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를 하기보다는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여러분에게 간단하지만 꾸준한 습관을 가지실 것을 권면합니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단 5분 만이라도, 오늘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고! ▸어떤 순간에 화가 일어났는지 ▸어디서부터 욕심이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성령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결코 자기학대가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행동입니다. 고백을 통해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공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 “성령님! 내가 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제 내가 주인 된 삶을 내려놓고 성령님을 초청합니다.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자신의 죄와 허물을 직시하고,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되기를 추구하면! 그때로부터,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우리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을 의지하는 ‘의식적인 습관’이 필요합니다.

성도가 죄와의 싸움, 육체의 욕심과 싸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을 통해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갈 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네!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 원리를! 이어지는 17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갈 5:17a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이 말을 풀어서 말하면! ⇨ 육체의 소욕은 ‘성령과 전쟁을 치르고’, 반대로 성령은 ‘육체의 소욕과 전쟁을 치르신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즉, 성령님과 교제하며 동행할 때, 성령께서 친히 내 ‘육체의 욕심’에 대해 전쟁을 치러주신다(거스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약속이고,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정욕을 이기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은! 자기의 이를 악물거나, 자기의 굳센 의지의 능력을 동원하거나, 단호한 결단으로, 그 유혹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따르면! 죄의 유혹이 올 때, 우리는 즉시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육체의 소욕에서 자유하는 길은, 그저 ‘안 돼!’라고 말하며,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대신하여 싸워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내 속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소욕과 싸워주세요. 제가 너무 힘듭니다.”라고 기도하면 즉시 성령님께서 싸워주십니다. 놀라운 것은! 나는 육체의 소욕과 싸워 이기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능히 이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런 은혜를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초청 없이 우리의 삶 안으로 불쑥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청과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와 같고 연약함이 많습니다. 늘 유혹에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성령님! 내 삶에 들어와 내주하시고, 나를 대신하여 죄의 유혹과 싸워주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즉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날 대신하여 싸워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누리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책임과 실천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완성되긴 어렵습니다. 신앙공동체 속에서 더 잘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속회나 선교회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때로는 솔직한 권면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그룹 안에서 영적 생활을 나누고, 기도의 동역자를 맺어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 그리고 서로의 변화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여러가지 유혹이 있고, 때로는 육체의 법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직장에서의 경쟁, 가정에서의 불화, 경제적 스트레스, 자녀 양육의 부담…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실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한 개인만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은! 개인의 변화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위해 일하시기를 더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곳에 함께 계시고, 마가의 다박방에서처럼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더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회나 선교회 공동체를 단순한 조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한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영적 형제자매 공동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영적으로 지켜 주고 세워주는 중보자들! 세움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힘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속회와 선교회를 사랑하십시오.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이 소그룹 공동체를! 여러분의 믿음의 지키고 성장 성숙시키는 장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일러 죄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진정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결단하고 정리해야 할 일들, 또한 회복되어야 할 내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2. 때로 시로 넘어지고 낙심하고 실망하는 삶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보고, 진정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결심합시다. 이성과 합리, 상식과 윤리, 체면과 인정을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 것인지?


3. 속회(선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자신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그리고 변화에 대해 나눌 것을 계획하십시오.

이재영
2026-01-10
조회 193

제목: 근본으로 돌아가자! (Ad Fontes) (신 8:1∼3)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사는 게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의식주만 해결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육체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창 2:7을 보면 인간 창조의 기사가 나옵니다. 창 2:7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먼저 →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 그 코에 생기(=하나님의 숨결, 성령)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 사람이 생령(生靈, living soul)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단지 육체와 혼으로 지어진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육체’와 ‘혼’과 ‘영’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물과 구별되는 영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 원리로 볼 때 두 가지 원칙을 잘 지킬 때 비로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친화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흙에서 왔기 때문에, 의식주가 모두 흙을 가까이하는 게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원칙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친화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영혼이 건강하고, 심령에 평안과 기쁨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게 됨으로써 영혼의 참 평안과 기쁨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불행한 것입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안락하고 배불러도 공허합니다. 바로 영적인 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진정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 친화적인 삶’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의 말씀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 8:3b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육신이 배부르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영혼이 배불러야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육신의 문제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2. 근본으로 돌아가라! (ad fontes!)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며,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신학자이기도 한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ad fontes’라는 대명제를 제시했습니다. 여기 ad fontes란? 라틴어로 → ‘원천(근원)으로!’라는 뜻입니다. ad는 영어로 방향 지시사 ‘to’이고 / fontes는 ‘fountains’ 혹은 ‘sources’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기본으로 돌아가라. (Back to basics.)’ ‘근본으로 돌아가라. (Back to fundamentals.)’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명제는! 역사를 뒤흔드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르네상스 곧 ‘문예부흥’의 신호탄이 되었고, 또한 기독교 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진정한 개혁은 무엇이고 또한, 성도의 새로운 삶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네! ‘말씀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이 될 때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는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향한 선포이기도 했지만,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강력한 요청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네!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는 나의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시험당할 때, 고장 나면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모든 주의사항과 안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딤후 3:15∼17입니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아멘.

이 년초에! 우리는 다시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라!” “말씀으로 내 인생을 새롭게 하리라!” “내 신앙의 첫사랑을 회복하리라!”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근본과 기초로 세우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를 이 시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강조하고자 하는 말씀의 중심 골격은 → ① 성경 읽기 ② 성경 묵상 ③ 성경 암송 ④ 성경 필사 이 네 가지입니다. 사실 이 네 가지는 각각 독립된 훈련이지만, 함께 실천될 때 서로를 보완하며,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세워 줍니다.

첫째, 성경 읽기 — 말씀과의 첫 만남을 여는 문입니다.

성경 읽기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닙니다. 성경을 펴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귀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루의 일과 중, 말씀을 위한 시간을 의도적으로 마련할 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재정렬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읽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약속, 명령과 위로를 접하게 됩니다. 이 읽기는 ‘우리의 지성에 말씀을 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읽기만으로 끝나면 말씀이 ‘머리의 지식’에 머물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인 묵상이 필요합니다.

성경 읽기를 위한 구체적인 권면을 드리겠습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하십시오. 아침 기도 직후 20분, 점심 식사 후 10분, 또는 잠자기 전 15분이라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규칙성입니다. 우리교회 2026년 달력에도 그날 읽어야 할 성경이 기록되어 있어, 그것을 따라가면 1년에 ‘성경을 통독’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 신앙생활의 교과서인 성경을, 한 번도 안 읽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도 금년엔 반드시 완독하리라! 결심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말씀 묵상 — 읽음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입니다.

묵상은 “이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훈련입니다. 묵상은! 읽은 본문을 가슴에 품고 내 삶의 사례와 연결해 보는 것입니다. 묵상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어떻게 살게 하는지? 어떤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단순히 본문을 읽고 넘어가는 사람과, 한 구절을 가슴에 새긴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묵상의 방법을 소개합니다. 먼저, 한 절 혹은 한 본문을 선택하십시오.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고, 마음에 울리는 단어와 문장을 반복해서 읊조리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세 가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해보십시오. → ① 이 말씀이 나의 생각과 감정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②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③ 이 말씀 앞에서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꾸준히 자신에게 하다 보면! 말씀이 우리에게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행동의 동력’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셋째, 말씀 암송 — 위기에서의 무장입니다.

삶의 위기와 유혹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의 첫 반응은 우리 안에 저장된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암송된 말씀은! 즉각적인 신앙의 반응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 때에 암송하신 신명기의 말씀으로 대응하여 승리하셨습니다. 다윗과 다니엘도 말씀을 기억하며 위기를 견뎌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일상의 암송 훈련을 통해서 위기의 순간에 필요 적절한 말씀이 떠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 암송을 위해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매주 주보에 ‘요절’을 주일 낮 예배 맨 아랫 칸에 소개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속회마다 그 주의 요절을 함께 외우시길 바랍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암송을 반복하면, 기억에 꼭 남게 될 것입니다. 암송은 단지 기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암송한 말씀이 우리의 양식과 힘이 되어, 시험과 위기 때 반사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훈련입니다.

넷째, 말씀 필사 — 손으로 새기는 영성훈련입니다.

필사는! 우리가 손과 눈과 마음을 모두 사용하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행동입니다.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는 동안 생각이 정리되고, 말씀이 더 깊게 새겨집니다. 그러니까 필사는 읽기와 묵상, 암송을 통합하여 말씀을 ‘몸화’하는 과정입니다. 학습 이론에서도 ‘쓰기’는 기억과 이해에 강력한 영향을 줍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사 실습을 제안합니다. ‘400구절 & 노트’와 지난 첫 주일에 나눠드린 ‘믿음의 가정 세우기’ 필사 노트에 매일 한 페이지씩이라도 노트에 써 보십시오. 그리고 그 옆에 그날의 적용 한 줄을 적으십시오. 한 달이 지나면 자신이 필사한 노트를 통해 영적 여정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속회에서는! 한 주간 필사한 것을 가져와 서로 나누고, 기도 제목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세우는 영적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시오.

이 네 가지 훈련을! 통합적으로 실행할 때, 우리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읽기는 신앙의 폭을 넓혀주고, 묵상은 신앙의 깊이를 깊게 하며, 암송은 위기에서의 방패가 되고, 필사는 말씀의 내면화를 완성해 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일관성입니다. 하루 5분이라도 매일 지속하는 것이, 한 달에 한 번 길게 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이제 첫째, 개인 실천 계획을 세우시기도 하고 둘째, 가정적인 실천 계획도 세우시고, 셋째, 속회적인 실천계획도 세우시길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생령(生靈, living soul)인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되새기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것에 대해 나눠봅시다.


2. 다음 네 가지 ① 성경 읽기 ② 성경 묵상 ③ 성경 암송 ④ 성경 필사 중 본인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는 무엇인지? 말해보고, 그 벽을 넘을 수 있는 실천적 지혜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근본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나의 삶의 영역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1-03
조회 186

제목: 첫사랑의 감격, 회복의 은총! (계 2:1∼7)


본문 말씀을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의 결론은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중심을 이룬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소아시아지방의 정치 경제 수도였습니다. 에베소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엔 척박한 땅이었지만, 바울은 2차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3차전도 여행 때는 3년가량 이곳에 머물면서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선교적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세워졌고, 소아시아 지역에 일곱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은 제3의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사도 요한은 먼저,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최선을 다한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칭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과, ‘거짓 선지자들을 가려서 색출해 낼 수 있을 만한 영적 지혜’를 칭찬합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에베소교회는 그로 인해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제 책망하십니다. 계 2:4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 ‘그러나’라는 말은, 앞의 모든 칭찬을 뒤집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책망의 음성을! 나 자신과 가정과 우리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단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첫사랑 회복’을 위해 3가지 ‘R’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영어로는 Remember, Repent, Repeat하라는 것입니다. 네! ‘기억하라, 회개하라, 반복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1. 기억하라. (Remember)

첫사랑의 회복을 위한 첫째 단계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계 2;5a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여기 ‘생각한다’는 단어 (므네모뉴오)는 ⇨ ‘생각하는 신앙자세를 가지라’는 명령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의 시간과 vs 현재 나의 모습과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의 재산을 유산으로 미리 받아서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로 배를 채우던 탕자가 스스로 돌이켜 이렇게 생각합니다. 눅 15:18b →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눅 15:19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면서 ‘차라리 품군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굶주림과 방황속에서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회복의 첫 단계’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어디서부터 내가 잃어버린 자가 되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 때, 회복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십시다.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의 첫사랑을 기억하며, 나를 꿈마을엘림교회에 보내주시고, 여기서 좋은 성도들과 속도원과 선교회원들을 만나게 하신 것도 감사하지만, 그저 신앙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의 행복한 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좀 더 구체적으로 ▸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아직 믿지 않거나 연약한 식구들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회개하라. (Repent)

두 번째 우리를 향한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이 명령어는 ‘생각한 것’을 의지적인 결단을 갖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면,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의지적인 결단을 가지고 일어섭니다. 눅 15:20a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여기 ‘일어나서 돌아가니라.’는 말은 ⇨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네! 첫사랑의 회복을 위해서는 ‘회개하여 돌이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님이 어렸을 때, 엄마가 아끼는 램프를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떨어뜨려서 유리에 금이 갔습니다. 아예 박살 났다면! 어쩔 수 없이 고백했을 텐데, 금만 간 것 때문에 미혹을 받았습니다. 램프의 유리를 금이 간 쪽이 보이지 않도록 안쪽으로 돌려서 다시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이후에, 엄마가 그 램프의 근처에만 가도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겁니다. 오랫동안 불안해하다가 드디어, 엄마가 램프에 금이 간 것을 발견합니다. “고든! 네가 그랬니?” 그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고백하지 않고 숨기고 있던 기간은!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이 공포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가지고, 후일 목사님이 된 고든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랑하는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필요한 대답이 길지 않다. ‘네’라는 회개의 한마디면 족하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첫사랑의 회복은! ‘회개하는 심령’을 통하여 이뤄지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첫사랑의 회복을 위하여 특별히 강조된 단어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계 2:5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첫사랑이 ‘식어지고 없어진 곳’에는 주님이 머무르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습기가 없는 곳에서 사랑의 씨앗이 싹틀 수 없으며, 사랑이 없는 곳에 주님이 머무르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 속에 ‘사랑 없이도 열심’이 있을 수 있고, ‘사랑 없이도 봉사’할 수 있고, ‘사랑이 없이도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봉사나 열심이나 직분 속에서는! 결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은 가슴속에는! 차가움으로 가득 차 있고, 남의 잘못을 따지기 좋아하며, 용서할 줄 모르고,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겉모습만 봐서는 거룩한 성도의 모습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속에는 욕심과 질투로 가득한 어리석은 심령의 모습이 바로 오늘 자신의 모습이라면! 회개하는 결단을 통하여,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처음 행위를 가지라. (Repeat)

본문 말씀 5절은 ‘첫사랑의 회복을 위하여!’ ▸생각하라. ▸회개하라는 말씀에 이어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은 ⇨ 능동태 명령어로 ‘지금으로부터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해 가져야 할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로 반복해야 할 실제적‧동사적 사랑인 것입니다.

어떤 여성이 남편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같이 있으면 지겹고, 없으면 아쉬운 사이”입니다. 유명한 동물학자인 ‘데즈먼드 모리스’의 대표적인 책가운데 ‘피플 워칭’(People Watching)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가 동물과 사람부부를 관찰한 결과를 쓴 책인데, 결혼한 지 오래된 - 묵은 부부일수록, 서로 간에 말수가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자! 저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식사시간 때에만 잠깐 그 이름을 부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신다면! 그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시길 바랍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으시길 바랍니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며 그 편지를 묵상해 보고, 베껴 적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가 되는 구절들은 암송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봉사와, 지식과, 땀 흘림의 수고와, 인내가 있었던, 에베소 교회라고 할지라도! 첫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주님은 그 촛대를 옮기리라고 무서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첫사랑의 회복을 이룰 수 있는 세 가지 ‘3R 법칙’을 주셨습니다.

① 생각하라. (Remember)- 구원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② 회개하라. (Repent)- 즉각적으로 돌이키는 결단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③ 반복하라. (Repeat)- 첫사랑의 행위를 반복하면서 삶에 새기고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나는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시간 ‘생각하시고’ ‘회개하며 결단하여’ 1년 내내 ‘반복해서 시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과의 사랑은 놀랍도록 뜨거워지고 생생해질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활력과 생명력으로 충만케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내가 처음 예수님을 사랑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지? 솔직하게 나눠 봅시다.

2. 최근에 ‘회개’가 필요하다고 느낀 구체적인 상황이 있었습니까? 그때 나는 어떻게 반응했고, 앞으로 어떤 실천적 결단을 할 수 있는지 나눠 봅시다.

3.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반복적으로 시행해야 할 ‘영적 습관’은 무엇인지? 자신의 실천 계획을 나눠 주세요.

김성윤
2025-12-27
조회 181

목말라 합시다! (눅 19:1∼10)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만드시면서 ‘갈증’ 곧 ‘목마름’이라는 경보장치를 달아 두셨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수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마음이 말라비틀어져서, 편안하고 부드러운 말이나, 감사한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칠고 날카로운 신경질적인 말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만족이 없고, 뭔가에 목마름을 느끼면 느낄수록 마음은 공허해 집니다. 가진 것도 많고 이룬 것도 많은데, 정작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이런 ‘근원적 목마름’으로 고뇌하며 살았던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살던 여리고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고, 경제적인 부가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그런 도시의 세관장이었습니다. 그러니 지위도 높았고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뭔가 2% 부족했습니다. 지위나 돈이 채워줄 수 없는, 심령적인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을 꼭 만나기를 목말라 합시다.

2천 년 전 여리고라는 도시는 대단한 무역도시였습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여의도나 강남과 같은 금융과 무역의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삭개오는 세관장이었고,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예수님을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눅 19:3 →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이 “보고자 하되”란 말은, 단순한 호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앞서 달려가,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어지는 4절입니다. 눅 19:4 →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성경은 아주 현장감 있게 삭개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① 달려가 ② 보기 위해 ③ 올라갔다. 이런 모습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체험하고 싶은 목마른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커다란 나무 위로, 키가 작고, 잘 먹어서 얼굴에 기름이 끼고, 운동량은 모자라 배가 나온 삭개오! 누구나 알만한 그 도시의 유명인사가 버둥대며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자기 체면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회적인 지위, 명성, 체면을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삭개오는 창피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이나 손가락질을 괘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만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수고와 댓가도 지불할 각오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삭개오 같은 마음과 행동력을 가진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만나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삭개오의 열정과 적극성이 없기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체험 없는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체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Experience ‘체험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체험하고자 얼마나 배고파하며 목말라 하십니까? 당시 여리고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 정도를 구경하고 싶어 했으나, 삭개오는 직접 예수님 그분을 만나는 체험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삭개오 같은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굶주린 마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너무나 정겨운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5절입니다. 눅 19:5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서 묵어야겠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네!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면! 주님은 우리를 주목하여 보십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고 친히 만나주십니다. 또한,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주십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목마른 영혼에게 참 만족을 주시려고, 영혼의 생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 4:14입니다.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길 원하고, 은혜를 체험하길 원하고, 능력 체험하길 원하고, 성령충만 하길 원하고, 목말라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사모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만나주시고 채워주시는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 합시다.

삭개오는 외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시대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과 행복은 별개입니다.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속으로는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 밖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성공 후의 허탈, 번영 후의 허무, 명예 이후의 허전함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입니다.

네! 삭개오는 지금 외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주는 만족이나, 사회적 신분이 주는 즐거움보다, 인간 본연의 행복에 목마른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의 시대지만 오히려 ‘내려놓음과 비움의 영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영혼의 행복을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는 자가, 배부르고 만족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금세기 설교가 토니 에반스(Tony Evans)가 지적하듯이 →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실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너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굶주린 심령으로 갈망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목마름이 필요합니다. 나와 하나님만이 아는 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누리고자 하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날마다 이런 고백을 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에게, 이런 놀라운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요 7:37∼38입니다.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네!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셔서, 주님께서 주시는 갈함이 없는 만족, 마르지 않는 내면의 행복이, 생수의 강같이 흘러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 합시다.

그날 예수님의 주위를 둘러쌓던 군중들과 삭개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군중들은 예수님의 팬클럽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근본적인 변화’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변화를 목말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군중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앞으로 달려갔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곧바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삭개오는, 그동안 생명처럼 아껴오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정리하겠다는 결심을 공표합니다. 근원적인 변화를 목말라했기에 내린 결단입니다. 지금까지는 그에게 ‘돈’이 주님이고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심령에 진정으로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이 주인이 되셔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근원적인 변화를 목말라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 받고자 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즉시 놀라운 축복을 선언해 주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눅 19:9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은 Today, ‘오늘’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5절과 9절에서 두 번이나 ‘오늘’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체험을 목말라 하고,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 하고,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곧 바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오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 받고 변화 되는 것을 자꾸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아직은 세상적으로 할 일이 많고 재미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6:2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삭개오는 예수님 체험을 목말라 했고, 내면의 행복을 목말라 했고, 새로운 변화를 목말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무화과나무에라도 올라가서, 그 은혜 입기를 열망했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갈망, 거룩한 갈망(divine desire)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그를 만나주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 가정에 들어와 주시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나눔과 묵상

 

1.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근원적인 삶의 변화를 갈망하고 실천했던 일들 중에, 내가 본받고 실천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혹 하나님이 나를 채우실 수 없을 정도로, 내 속이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오늘’ 나의 변화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참 만족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의 전제하에, 내가 지금 목말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비우고 채워야 야 할 것에 대해서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