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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관리자
2024-08-17
조회 222

제목: 다시 돌아가게 하리라! (렘 50:17~20)

 

오늘 본문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50:17 →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패망하였고,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은 3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1차로 주전 606년 여호야김 왕 때, 2차로 9년 뒤인 597년 여호야긴 왕 때, 3차로 11년 뒤인 586년 시드기야 왕 때 끌려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깨우치고 돌이켜 미래에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차면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며 용서하시며 회복하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벨론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징계의 도구로 쓰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유다를 징벌하는 권한을 주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렘 50:11에서 바벨론을 일러 → “나의 소유를 노략하는 자여!”라고 하십니다. 즉, 성전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기물들을 탈취하였고, 전제를 붓던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짓까지 서슴없이 행하는 것은! 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권위가 주어졌을 때는 그에 따른 책임도 있음을 생각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하나님의 소유인 ‘유다’에 도를 넘는 짓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누군가의 막대기와 채찍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중에 ‘부모’라고 하는 위치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징계하고 훈육하고 때로는 때리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내 자녀이지만, 그 자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을 대해야 하고, 그들을 징계할 때도,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조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자녀가 나의 소유인 것으로 착각하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월권이고 선을 넘는 것입니다.

이제 선을 넘은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파사(페르시아)라는 막대기를 통해 징계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렘 50:19 →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렇습니다. 유다는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첫째, 포로생활 70년은! ⇨ 안식과 정화의 기간이었습니다.

먼저, 역대하 36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대하 36:21 →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포로 생활 70년은! 죄악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 땅에 안식을 주었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렘 33:5b∼8 →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지만, 죄를 정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기간을 70년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70년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같이 바벨론을 무찌르고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파사 제국’의 ‘고레스’ 왕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주전 538년! 고레스는 바벨론 시절 강제로 끌려온 자들에게 자신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포합니다. 그 후 2년간의 준비 끝에, 성경의 예언대로 70년이 꽉 찬 주전 536년, 유다 왕 여호야긴의 손자인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그러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루어짐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렘 29:12∼14 →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더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을 보겠습니다. 겔 36:37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약속)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 70년이 차면 유다를 다시 돌아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길 위해서, 다니엘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 9:2∼3 →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네!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한 것을 알고 나서, 그때부터 금식하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에스겔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가정을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오직 믿음으로 남은 자들만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70년이 차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됩니다. → 1차로 주전 536년 스룹바벨의 인도로 49,897명이 귀환합니다. 그리고 2차는 78년이 지난 458년 에스라의 인도로 1,754명이, 3차는 다시 14년이 지난 444년 느헤미야의 인도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정확하게 그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6만 명 정도였습니다.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는 인원이지만!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 이스라엘로 귀환한 것입니다.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구약성경 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주제인 → ‘남은 자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를 택하셨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킨 자만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들을 보겠습니다. 사 10:22 →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 되었음이라.”그렇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고 잘살고 있었기에, 오직 남은 자들 즉,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돌아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명의 빛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모든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 1:11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오직 믿고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대신 지셔서, 나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은혜 의식’이 있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찾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렘 50:20 → “그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아 구원받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기도합시다. 이 땅의 모든 백성! 특별히 내 사랑하는 가족이 예수님을 통해서 죄로부터 구원받고,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필요하면! 다니엘처럼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가족들이 다 예수 믿어 인가귀도 되어, 한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며 영광 돌리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바벨론이 심판받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도를 넘어 과도하게 유다를 다뤘고, 스스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부지불식간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교만과 주인의식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부모 - 내 자식, 나 - 물질)

 

2. 하나님은 자기 백성 유다를 징계하시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갖고 계신 계획에 대해 나눠봅시다. (자녀교육의 도)

 

3. 해방이 선포됐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남은 자’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다짐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8-10
조회 208

제목: 애굽이여! 망하였도다. (렘 46:25∼28)


오는 목요일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침략하고 민족 말살을 꾀한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지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주권 회복과 광복은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식민지 잔재와 민족분단, 전쟁으로 얼룩진 아픔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자유와 평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뜻과 원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시도록 살자!

예레미야서는 45장까지로 유다를 향한 예언은 끝나고, 46장부터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제일 먼저 ‘애굽’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이 애굽에 대한 예언의 골자는 → “네가 아무리 강성해도, 하나님이 네 편이 아니기 때문에 너는 망한다.”라는 것입니다.

3절 이하를 보면, 애굽의 강성한 모습이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은 작은 방패, 큰 방패, 말, 투구, 창, 갑옷 등 ‘장비를 잘 갖췄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용을 주고 이웃 나라들로부터 산 ‘용병부대도 동원’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자신만만했습니다. 렘 46:8 → “애굽은! 나일강이 불어남 같고, 강물이 출렁임 같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일어나 땅을 덮어 성읍들과 그 주민을 멸할 것이라.” 호언장담합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북쪽 ‘갈그마스’로 진격합니다. 렘 46:9 → “(애굽 군인들을 향하여!)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 (용병들을 향하여!)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동원된 말과 병거들, 수많은 용사들! 그리고 용병부대! 한마디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마지막 말은 “하거니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대단했지만! 결국, 바로 느고는 패하고 말리라는 것입니다. 주전 605년에 유브라데 강가 ‘갈그마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애굽’은 패배합니다.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그 패배의 모습입니다. → “애굽이여! 네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고,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나니,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라.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향(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도다. 그들이 그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수치와 상처를 입었고, 전사자들은 겹겹이 쌓였습니다. 마침내 세계의 패권은 애굽에서 바벨론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애굽의 바로 느고가 엄청난 전력을 동원했음에도 패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더 많은 군대와 무기를 동원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렘 46:13, 14b∼15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애굽 땅을 칠 일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말씀이라. 네(애굽)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너희 장사들이 쓰러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까닭이니라. 그가(하나님)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시매,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네! 애굽이 패한 이유를 뭐라고 말합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이 애굽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벨론을 들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이 여기에 대항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는 쪽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업도 그렇고, 입시도 그렇고, 취업도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준비가 아무리 완벽해도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모쪼록! 하나님이 함께하실만한 일이어서, 성공하고 형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자!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렘 46:17 → “그들이 그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 여기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라는 말은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렸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레미야 당시의 ‘바로 느고’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세 당시의 애굽 왕 ‘바로’(람세스 2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게도 깨달을 기회가 많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가도록 허락하라”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십니다. 그러나 그 깨달을 기회들을 다 잃어버린 결과, 모든 짐승의 초 태생과 가정의 장자들이 죽은 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재난을 앞두고는 피할 기회를 주시고, 심판을 앞두고는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를 주시지도 않고 재난과 심판을 내리시는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기회를 깨닫지 못하고,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만 있었겠습니까? 방주는 왜 만드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곧 임하니 준비하자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제가 그냥 상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 2:5 →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義)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무시하는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네! 노아는 전파하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회를 잘 활용한 사람은 삭개오입니다. 반면에,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는 무엇입니까? 그 기회를 잘 붙잡아서 버림과 망함이 아니라, 회복과 승리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오늘 말씀의 끝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반전의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시고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징계도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절인 28절부터 읽는 것이 이해에 빠릅니다. 렘 46:28 →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죄를 짓고 범죄 하면, 공의의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소망의 약속이 바로 앞 절인 27절에 있습니다. 렘 46:27 → “내 종 야곱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하며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을 넘어 ‘축복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애굽과 바벨론에게는 결코 이런 종류의 약속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당신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종 야곱’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아들에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 바벨론과 애굽은, 단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요,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지만, 그는 아들이 아니라 종입니다. 반면에, 심판받아 포로로 잡혀갔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과 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종’은 그냥 부려도 되고, 호의를 베풀어서 품삯을 주면 됩니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매번 일했다고 해서 대가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비록 아들이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말썽을 펴도, 아들은 상속자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말을 아무리 잘 듣고 100% 순종해도, 종은 종일뿐입니다. 즉 바벨론과 애굽은 종이니까 일을 시키지만, 이스라엘은 아들이니까 징계를 해도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과 종의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행패를 부립니다. 결국,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몫을 떼어 줍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간 순간부터, 아버지는 그 아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만약 그가 ‘종’이었는데도 아버지가 그토록 기다렸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들’이기에 대문을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대단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면!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애통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업으로 받아야 할 ‘천국’의 상속권을 잃어버리고 지옥 유황불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는 애굽을 구원의 동아줄로 알고 붙잡았으나, 애굽마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예루살렘처럼 망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굳게 믿고 의지한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도리어 해가 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때는 도피가 아니라 회개가 답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인 줄 깨닫고 회개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잃어버린 자의 서러움이 훨씬 더 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8-03
조회 107

제목: 기도와 응답대로 살아야! (렘 42:15∼22)


1.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멸망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과 애굽이라는 초강대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던 조국 ‘유다의 운명’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유다가 위기상황에 빠졌음을 경고했고,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어 ‘주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그의 말은! 왕과 백성들에게 먹히질 않았습니다.

마침내 전쟁의 광풍이 몰아쳤고, 앞서 앗수르를 제압하고 중근동의 패권자가 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18개월 동안 버티고 있던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자기 마음대로 산 대가는, 곧 유다 나라의 멸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 땅이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의 군사령관은 성밖에 살던 빈민들에게 포도원과 농토를 나눠주어 경작하게 했습니다. 땅을 그냥 놀리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와중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지금은 수치스럽더라도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낫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바벨론도 결국은 망하고, 새로운 제국! 바사가 들어서게 될 것을 예견한 것입니다. 네! 실제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사(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언해서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 제국>  <바사 제국>


그렇지만! 이런 역사의 안목이 없고, 기득권에 배불러 있던 당시 유다의 왕과 귀족들은 어느 사람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유다가 망하면서,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끌려가는 도중에 느부갓네살의 근위대장인 ‘느부사라단’의 호의로 풀려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예레미야는 망한 조국 유다에 남게 됩니다.


2. 정치적 혼돈 상황

바벨론 왕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는 존경받는 선비 집안 출신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의 할아버지 ‘사반’은 요시야 임금 때 서기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가 총독으로서 우선해야 할 일은!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먹고 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파괴된 집들을 수리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먹을 것을 많이 모아 두라고 백성들에게 지시합니다.

사람들은 충격과 상실감을 달래 가며,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소문이 퍼지자, 이곳저곳으로 숨어 들어가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총독 ‘그다랴’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의 군인! 지휘관들도 있었는데 특히 ‘요하난’이란 장군이 총독에게 아주 비밀스러운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내용은! 시드기야 왕의 친척인 ‘이스마엘’이, 암몬의 사주를 받아 총독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다랴’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게 오판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왕족인 자기를 제쳐놓고, 서기관 가문에 속한 ‘그다랴’가 총독으로 선임된 것에 앙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다윗 왕가를 무너뜨린 바벨론과 협력하는 자를 제거한다는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찾아왔을 때, 그를 환대하며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 식탁은, 결국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총독 ‘그다랴’와 그 자리에 있던 유대 사람들, 그리고 바벨론 군인들까지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다시 암몬으로 도망갑니다.

자! 사건이 이렇게 전개되자! 암살 정보를 전해주었던 ‘요하난’은 자신이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합니다. 총독을 죽인 장본인 ‘이스마엘’은 암몬으로 도망갔으니, 이 사실을 알렸던 자신에게 살해 공모 혐의가 씌워질 수 있다고 생각되자, 그는 갑자기 불안해진 것입니다. 바벨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빠진 ‘요하난’은 애굽으로 도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합니다. 바벨론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애굽은, 정치적 망명객을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와 하나님의 뜻을 물어달라고 합니다.


3. 중보기도를 요청했지만!

네! 요하난은 그와 함께하는 백성들과 더불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자기들이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쭤달라고 요청합니다. 렘 42:2∼3 →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그들의 요청대로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렘 42:4 →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이때, ‘요하난’과 그 일행들은 예레미야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아주 놀라운 ‘신앙적 다짐’의 말을 합니다. 렘 42:5∼6 →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네! 이런 ‘요하난’과 그 일행들의 말은! 그야말로 훌륭한 ‘기도의 모범’입니다. 지금 이들은!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든지 않든지, 그 뜻대로 따르고 순종하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네! 우리도 이래야 됩니다. 그래야 참 신앙인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즉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엎드리고 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급한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려 열흘이나 지났습니다. 아마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요하난’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본문 10∼22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다 읽어도 좋겠지만! 길기 때문에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이런 내용입니다. →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머물러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순종하지 않고, 너희들의 생각대로 애굽으로 도망하면!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쳐서 남을 자가 없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요하난 장군과 백성들은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했지만! 실상 자신들의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들의 뜻이었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들인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말뿐이었던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다짐대로 순종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하난’을 비롯한 남은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지만! 한순간도 자기들의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4. 자의적(恣意的) 믿음을 넘어서야!

‘요하난’과 남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또 그 뜻이 무엇이든 순종하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국은 그 말씀을 외면하고 맙니다. 자기들의 판단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 이런 것을 일러 ‘자의적(恣意的:방자할 방, 내키는 대로 하는)믿음’이라 합니다. 자기 좋을 대로, 편리한 대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기 욕망’이라는 관성을 따라 사는 삶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제자도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불신앙적인 삶을 계속할 것인지?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결단할 것인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어려울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따르고 순종해야 할 근본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잠시 어려운 상황만 모면하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웠던 선택의 순간들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순종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혹시 내게도 말만 앞설 뿐, 실천하지 못했던 일은 어떤 것이었는지? 나눠봅시다.


3. 전쟁의 참화 속에 유다에 남은 백성들은 애굽으로 내려가야 살 거로 생각했습니다. 힘들 때! 무의식적으로 먼저 찾게 되는 ‘나의 애굽’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7-27
조회 241

제목: 적당히 믿으면서도 복 받기를? (렘 37:1∼10)


1.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하는가?

역대하 35장을 보면, 요시아 왕 당시 세계 판도는 ‘애굽’과 ‘바벨론’ 두 강대국이 양강을 이루어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역사를 움직이는 손길은 바벨론 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이래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받는 ‘요시야 왕’은 친 바벨론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요시야 왕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 ‘느고’가 세계의 열강으로 떠오르는 바벨론을 치러 올라오면서, 이스라엘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것을 유다의 ‘요시야’ 왕이 중간에서 막아서다가 애굽 군사가 쏜 화실에 맞아 죽고 맙니다. 이렇게 요시야 왕이 죽자, 백성들은 맏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똑똑한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17대 왕으로 세웁니다.(36장 1절), 하지만 애굽 왕이, 그도 아버지처럼 친 바벨론파 일 것으로 생각하고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대신 형이며 첫째 아들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36장 2∼4절).

이렇게 애굽 왕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야김’은 선대들의 ‘친 바벨론 정책’을 버리고, ‘친 애굽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렇게 되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은 바벨론에 있다고 주장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사사건건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그를 사로잡아 갑니다.(36장 5∼6절).

그리고 조카 고니야(여호야긴)를 거쳐 ‘시드기야’를 느브갓네살이 유다의 왕으로 세웁니다. 그는 처음 3년 동안은 ‘친 바벨론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백성과 신하들의 요구에 못 이겨, 결국 바벨론을 배반하고 ‘친 애굽 정책’을 쓰게 됩니다. 결국 분노한 느브갓네살 왕이 3차 공격을 해 오게 되고, 시드기야 왕과 유다의 운명은 끝이 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합니까? 바벨론 편에 서야 합니까? 아니면 애굽 편에 서야 합니까? 이것을 오늘 우리나라의 형편과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는 친 미국 정책을 펼쳐야 합니까? 아니면 친 중국 정책을 펼쳐야 합니까? 네! 이것으로 우리나라 역대 정권들이 서로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지금까지도 갈등 관계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정말 잘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친 바벨론 정책을 쓰느냐? 친 애굽 정책을 쓰느냐가 아닙니다. 친 미국 정책을 펼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친 중국 정책을 펼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친 하나님 정책’을 써야 합니다. 공의와 사랑의 정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지만! 시드기야 왕과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렘 37:2 →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 공의와 사랑을 잃어버린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나라의 운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정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틀림없이 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 바르게 살면,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고, 걱정스러운 일만 자꾸 하면, 틀림없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진정 회개하고 바르게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과! 우리나라의 흥망성쇠는! 미국에 달린 것도 아니고, 중국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 가사를 보십시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누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까? 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르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나라가 되도록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은 유보되어 있으나, 분명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예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나님은 유다를 회개케 하기 위해서 바벨론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진정 중요한 회개는 하지 않고, 우리는 바벨론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도, 거짓 선지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애굽’이라는 뒷배가 있다고 하면서, 장밋빛 미래만을 얘기했습니다.

이렇게 회개는 하지 않고,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닥친 현실은 무엇입니까? 배반한 ‘시드기야’ 왕에게 분노한 바벨론이 제3차 공격을 해오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급히 기도를 요청합니다. 렘 37:3 →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그리고 한편으론 애굽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렘 37:5 →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네! 유다의 요청에 애굽 군대가 출정하자, 바벨론 군대는 잠시 예루살렘 성에 대한 포위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거짓 선지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제 바벨론 군대는 물러갔다.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다”라며 떠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2가지로 답변을 합니다.

첫째, 애굽에 대한 기대는 헛것이 될 것이라. 렘 37:7c → “유다의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애굽에 대한 기대는 헛된 것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애굽 왕 ‘호브라’는 군대를 보내 유다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바벨론 군대에 대패하고 퇴각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을!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막아보고 해결해 보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일인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길이요 방법입니다. 회개 없는 기도 요청은 아무 소용 없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불사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렘 37:8 →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잠시 바벨론이 물러간 것 같지만, 그것은 애굽 군대와 싸우기 위한 전술적인 선택이었고, 그들은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고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들은! 유다 백성들처럼, 시드기야 왕처럼,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서 자손만대 아무 걱정 없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 24:21 →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예루살렘 성이 마지막에 불 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이 세상도 불 심판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벧후 3:7∼13 →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말씀 속에 ‘불’이라는 말씀이 4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끝 날은! 불 심판을 통해 끝날 것으로 하나님이 작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랍니다. 물론 그날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생각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을 비롯해서 유다 백성들은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끝 날이 불 심판으로 끝날 것을 믿는다면! ‘회개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의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서도,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회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죄와 허물을 감추거나 외면하는 자들이 아니라,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돌이키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눈물로 회개하고, 나라의 운명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는 성도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시고,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하고 외교적 줄타기로 살길을 도모하다가 결국 패망했습니다. 우리의 살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2.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은 받고 싶어했습니다. 순종은 없고 간구만 있는 그릇된 신앙에 대해 나눠봅시다.


3. 인생이 회복되고 밝은 미래를 여는 길은 얄팍한 처세가 아니라, 신실함과 진리를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내가 주로 선택하는 해결 방식에 대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7-21
조회 222

제목: 부르짖는 기도와 응답! (렘 33:1∼9)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남 유다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암흑기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약 40년간, 완고한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때의 일입니다. 친 애굽 정책을 펴왔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로부터 좋은 말,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은 죄악 때문에 곧 멸망하게 될 텐데, 바벨론에게 항복하고야 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취급해서 감옥에 투옥하고 맙니다.

투옥된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시 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애굽이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유다 역시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민족적인 비극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지어 부른 노래가 바로, 예레미야 애가(哀歌) 슬픔의 노래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다시 임합니다. 렘 33:1∼2 →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런데 이 말씀은! 예레미야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즉, 우리도 앞이 캄캄할 때,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응답하겠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르짖으라’고 기도를 명령하시면서 ‘세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응답하리라!

렘 33:3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을 보여주시고,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계시하여 밝히 알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인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힘입어 살겠다는 신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인생이 더 복된 인생이 될지를 한번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보아도,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아도! 기도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들이 다 승리했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조지 뮬러(George Müller, 1805~1898)는 웨슬리 목사님보다 100년 후의 사람으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1829년 24세였던 조지 뮬러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영국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평생 영국에서 사역하게 됩니다.

하루는 뮬러가 브리스톨 거리를 걷다가, 많은 고아들을 보고 애쉴리 다운(Ashley Down)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고아원이 5개까지 늘어났고, 60년 동안 일만 명의 고아들을 돌본 고아의 아버지가 됩니다. 뮬러의 특별한 점은! 고아원 운영을 위해서 간증을 다니고, 사역을 알리며, 후원 요청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기도에만 집중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박물관에는 그가 기도의 응답으로 후원받은 물질과 물품은 현재 환율로 1억 파운드(1,793억) 이상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뮬러는 수많은 고아를 돌보다 보니, 기도 제목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 노트를 만들었고, 기도 제목이 생길 때마다 거기에 기록하고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기도 제목이 응답 되면 응답 된 표시를 하거나, 감사의 글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빽빽하게 쓴 기도 노트가 3천 페이지가 넘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기도 노트를 자세히 검토하여 보았더니, 무려 3만(5만) 번 이상 기도가 응답 된 것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기도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60년 동안 그의 기도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을 시대마다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한 땀과 눈물이 담긴 기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르짖는 기도가 복된 이유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 기도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여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기도로, 응답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고쳐 주리라!

본문 6절입니다. 렘 33:6 →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되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성을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잃은 것도 되찾게 하시고, 다시 새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불순종했고, 범죄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 고쳐 낫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병들었어도! 치료해서 고쳐 낫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다시 성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이고, 버림받았어도! 다시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렘 33:7 →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포로가 되어 붙잡혀 갔다 할지라도, 다 잃어버리고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들을 다시 세우고 축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네! 부르짖는 기도에 ‘해답’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시 30:2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고치시는 손길을 체험케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가운데! 고쳐 낫게 하시며, 무너졌던 것이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용서하리라!

렘 33:8 →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는 더 큰 죄, 더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상대방이 조금만 잘못하면, 힐책하고 나무랍니다. 용서할 줄 모릅니다.

남편은 아내를 용서할 줄 모르고, 아내는 남편을 용서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분쟁과 다툼, 갈등의 골만 깊어집니다. 그런 가정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고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며 기도하면 다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물론 우리 인간을 위한 사랑이요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 43:24b∼25 →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게 하는 우리 인간의 죄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악과 허물을 기억하고 용서하지 않고 속에 품고 있는 것은! 하나님조차도 힘들고 괴롭게 할 정도로 나쁜 것입니다. 하물며 연약한 우리 인간이야 어떻겠습니까? 네! 우리는 용서할 줄 아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할 때! 우리에게 평화가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에게 잘못한 것을 자꾸 되뇌고 기억하면! 누가 불행해집니까? 네!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기억하지 않는 용서’가 나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분노와 미움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죄를 용서하고, 자녀가 부모의 죄를 용서할 때, 부부가 서로의 죄를 용서할 때, 그 가정에 화평과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놀랍고 복된 소식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에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의롭게 여겨 주시고, 돌봐주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죄를 지었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나가 ‘부르짖어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받으시길’ 바랍니다. 주여! 나를 새롭게 하옵소서. 새 출발 하게 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 우리를 전과자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의롭다고 칭해 주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는 명령과 함께 주신 ‘세 가지 약속’을 열거해 보고,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응답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왜 꼭 기도하고 부르짖어야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겔 36:36∼27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기도의 응답으로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존 번연, 조지 뮬러, 윌리엄 부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받은 감동이나 자신의 다짐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7-13
조회 366

제목: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 (렘 31:31∼34)


1. 심판과 재앙의 선포로 가득 찬 예레미야의 메시지

오늘부터 다시 살펴보게 될 예레미야서는! 예언서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독설로 가득합니다. 이런 직설적인 책망은,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제사장들에게 매 맞고, 목에 나무 고랑을 찬 채, 감옥에 감금되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와 재앙의 선포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레미야는 이렇게 독선적인 길을 갔을까요? 그것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내가 말한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면서 선포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렘 31장만 봐도, 무려 16번이나(1, 2, 7, 14, 15, 16, 20, 23, 27, 31, 33, 34, 35, 36, 37, 38절) 나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한 메시지는 전체적으로 심판과 저주가 중심이어서 암울했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결론까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분량으로만 본다면 ‘심판 선언과 재앙의 위협’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의 선포 중에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명 ‘위로의 책’ ‘위로의 두루마리’라고 불리는 30∼33장까지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 ‘위로의 말씀’을 여는 메시지를, 우리는 29장에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렘 29:10∼11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마침표는 아닙니다. 바벨론에서 오히려 신앙이 회복되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7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망의 그늘에 앉아 울고 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귀환과 회복’이라는 희망의 말씀! 새 언약이 바로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위로의 두루마리’를 지배하는 메시지입니다.


2. 새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새 언약에 관해서 말하는 오늘 본문은! ‘위로의 두루마리’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데, 하나님께서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실 새로운 약속이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부터 계속 되풀이된, 같은 내용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본문 32절에 의하면 새로 세울 언약은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렘 31:32 → “이 (새)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아니! 내용이 똑같은데, 도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일종의 ⇨ ‘결혼서약’이었습니다. 남편 하나님과, 아내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부부간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신부인 이스라엘은! 남편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서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선지자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과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시듯이, 신앙적인 정절을 지키지 않는 아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는 않습니다. 어떻게든 다시 데려와 부부로 살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맺으려는 ‘새 언약의 대상자’는 변하지 않고, 그냥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남편이요 주인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아내였으나 결혼서약을 파기했던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결혼서약을 파기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그냥 ‘버림받은 아내’로 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편단심으로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버리고 간 여인인데도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여인’이라 부르시며, 또다시 아내로 맞아들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실 ‘징벌의 대상’인 이스라엘이, 다시 ‘새 언약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아내가 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는, 새 언약은 맺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순을 ‘용서’로 해결하십니다. 렘 31:34b →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런저런 다른 남편과 주인을 섬기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죄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순의 길’을 걸으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지 않는 용서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 언약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기억에서 지워버리지 못하면! 내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입혔던 사람과, 새 언약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아내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면서, 모든 죄를 기억조차 안 하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네! 이것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억하지도 않는 용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의 ‘속’과 ‘마음’에 두시고 기록하시는 새 언약

출애굽 당시의 언약은 ‘돌 판에 새겨’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억하지 않는 용서를 통해 새롭게 맺으시는 언약은! 어디에 어떻게 새겨지게 됩니까?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31:33 →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 새 언약은 속과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 ‘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법에서는 ‘내장’으로 번역되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짐승의 내장은 다 태우라고 율법으로 규정하셨습니다. 내장을 태우는 ‘언어적 용례’는 우리말에도 있습니다. ‘속을 태우다’, ‘애를 태우다’는 표현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 내장, 오장육부는! 구약성경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기관’으로 간주합니다. 한의학에서도 인간의 오장육부가 단순히 그 장기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에서 그쳐서도 안 되고, 마음에 깨닫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을 내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속에 두며, 마음에 기록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 말씀이! 그냥 눈으로 입으로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을 먹어 모든 내장 기관까지 내려가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하고,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추동물처럼! 말씀을 되씹고 곱씹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의 진미가 우리의 오장육부에 제대로 스며들게 되고, 말씀의 깊은 맛으로 우리의 체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속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둔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됩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가 됩니다. 여기서 ‘앎’이란!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저절로, 자연적으로 몸으로 알고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직관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직관적인 앎은! 모든 복잡한 것을 소화시켜, 지극히 평범한 앎으로 단순화시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작은 자이든 큰 자이든, 많이 배운 자이든 그렇지 않은 자이든, 모두 다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렘 31:34 →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이런 단순하고 직관적인 앎에서는! 앎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앎입니다. 앎과 삶이 따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억하지 않는 용서’ 같은 사랑이, 하나님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나도 행하게 되는 현실적인 용서가 됩니다. 나와 너를 새롭게 갱신하여, 보다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관계로 성숙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성경을! 그냥 ‘책’으로 알거나, ‘머리’로 알거나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나의 ‘몸’이 되고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나 자신이 ‘말씀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고,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속’과 ‘마음’에 당신의 말씀을 두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네! 그렇게 살겠습니다.’ 고백하여! 새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고, 영적 성숙의 경지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결혼서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와 엮어서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의 ‘기억하지 않는 용서’에 대해서 나눠보고, 내 삶에서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와 그 결과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속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둔 사람은,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런 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숙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각자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7-06
조회 228


맥추절 - 첫 열매를 바치는 신앙 (출 23:14∼19)

맥추감사가, 추수감사와 다른 점은! 맥추감사는 ‘첫 열매’ ‘첫 수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주신 ‘전체 열매’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지금도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하나?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은 농경사회의 유산이고, 지금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런 절기를 지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절기의 핵심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고, 절기 속에 담긴 뜻을 바로 알고, 오늘도 마땅히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절기’는 우리가 흔히 지키는 ‘기념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통 기념일은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기념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성경의 절기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정하시고, 그다음에 사건이 벌어집니다. ‘맥추감사절’ 역시,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제정하시고 그다음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럼 맥추절을 지키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신 때와 장소는 언제, 어디서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뒤 시내산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이때는 애굽에서 나온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있을 때이고, 아직 농사를 짓기도 전인데, 하나님은 감사절기를 정하고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즉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절기부터 제정하신 것입니다.

출 23:16 →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지금 너희 눈에는 광야만 보이고 아무런 열매도 보이지 않지? 그러나 아니야! 반드시 너희가 뿌리고 가꾼 열매를 거두게 될 날이 올것이다. 네가 그것을 믿고 감사하면, 반드시 그런 복이 임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수확하게 되는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한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을 우선순위의 첫 자리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당연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2순위 3순위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첫 열매 신앙과 믿음의 상관관계

그러면!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보면, 믿는 자들이 항상 첫 열매를 잘 드리며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첫 열매를 드리는 믿음이 있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 온도를 측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도 사라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첫 열매 신앙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은 함께 가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의 예를 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성읍마다 석상과 아세라 목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온 나라에 우상의 산당과 제단이 즐비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산당들을 제거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본연의 임무를 감당하게 합니다. 마침내 예배가 다시 세워져서 번제와 화목제가 드려지고, 찬양과 감사가 회복되었습니다.

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하게 회복시키고자 한 것은! 바로 ‘첫 열매 신앙’이었습니다. 대하 31:5 → “왕이 명령을 내리니, 유다에 와서 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각종 농산물의 첫 수확을 넉넉히 가져 왔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다.”(새번역)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이 불과 4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사랴 대제사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대하 31:10 → “사독의 자손인 아사랴 대제사장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백성이 주님의 성전에 예물을 드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먹을 것을 넉넉하게 공급받았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

이렇게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명령이었지만, 대부분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첫 열매도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유월절에 장자와 초태생을 살려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 사실을 다시 깨닫고, 첫 열매를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바로 맥추감사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퇴보에는 언제나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는 것이고 반대로,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할 때’, 믿음도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닫히고 식어버리게 됩니다. 주를 향한 사랑도, 믿음도, 주님이 주시는 복도, 다 닫히고 마는 것입니다.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가 드리고 바쳐야 할 첫 열매란?

‘처음 열매’라고 할 때 ‘처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카르(rk'B)인데, 처음(First)이라는 뜻이지만,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영어로 choice의 최상급인 choicest, 그러니까 고르고 고른 것 중의 최고의 것, 제일, 으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가장 좋은 것 Best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 Good 정도가 아니라 → 좀 더 좋은 Better도 아니고 → 최상급인 Best의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첫 것’과 동시에,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역시 그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첫 예물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는, 단지 첫 월급 혹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고, 이 물질을 벌 수 있음도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 주셨고, 건강 주셨기 때문임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첫 부분을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분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내 삶 전체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잠 3:9∼10 →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말씀은 “나에게 첫 것을 주면! 너의 나머지 전부에, 내가 넘치도록 복을 주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을 더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육신도 부모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자녀가 첫 월급 타가지고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좋은 선물을 주면, 부모는 그것을 받고 그냥 있습니까? 그 이상으로, 어떤 형식으로든 보상해 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첫 열매 봉헌’은 곡식이나 과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처음 얻은 새끼도 마찬가지입니다. 출 34:19∼20 →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맏아들은 모두 목사나 선교사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해결책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민 3:45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맏아들 대신 ‘레위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맏배 대신 레위 사람의 가축 맏배를 구별하여 세워라. 레위 사람은 나의 몫이다. 나는 주다.” 맏아들을 드리는 대신 하나님께서 주의 일꾼으로 세운 레위 사람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라는 말은 ‘나귀’와 같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부정한 동물은, 대신해서 어린양을 대속물을 드려서라도 반드시 첫 것은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맥추감사절의 ‘근원적 의미’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맏아들이나 첫 것은 ‘내 것, 하나님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하나님 당신의 것’을 꼭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내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나에게 있는 무엇이 하나님의 것입니까? 네! ‘첫 열매’와 ‘맏배’입니다.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다 내 것이다”라는 믿음은 우상숭배입니다. 내 재산이나 재능이나 내 자녀나, 심지어 내 생명과 영혼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소중하고 귀하면 귀한 것일수록 먼저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맏배를 드리는 것이요, 첫 열매 신앙입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영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내 모든 귀중한 가치는 세상이 아니요,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믿음과 신앙고백은 일 년에 한 번 맥추감사절 때만 기억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받은바 그 은혜를 잊지 맙시다. 감사하되 우리의 온전한 사랑을 담은 ‘첫 열매’와 ‘맏배’ 즉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풍성한 은혜와 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첫 것, 첫 열매를 당신께 드려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 심정은 무엇인지에 대해 나눠봅시다.


2. 우리가 첫 예물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단지 첫 월급 혹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신앙고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사람에게든 하나님께든 ‘감사’하므로 ‘더 풍성한 감사’ ‘행복의 은혜’를 누린 경험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6-29
조회 270

인생의 광풍 (행 27:9∼25)

 

오늘 말씀은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과정 중에 만난 ‘유라굴로’ 광풍 이야기입니다. 이미 겨울이 시작되어 역풍이 부는 때가 되어, 여러 날 걸려 지금의 그리스에 속한 가장 큰 섬인 그레데섬(크레타섬)의 ‘미항’이란 곳에 겨우 도착합니다. 바울은 더 이상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그때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만일 항해를 강행하면 화물과 배뿐 아니라, 인명 피해까지 생길 것이라고 경고까지 합니다.

 

1. 바울의 말(하나님의 말씀) 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백부장

하지만 호송 책임을 맡은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미항에서 약 65Km 정도 떨어져 있는 ‘뵈닉스’ 항까지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다가 큰 광풍 ‘유라굴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 인생이 광풍을 만나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따르고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대신 사람의 판단과 생각을 좇기 때문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행 27:11 →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vs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정인지도 모릅니다. 선장은 항해의 전문가이고, 선주 또한 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또 배에 실린 모든 화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단지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내린 결정만은 아닌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리기에 어디가 더 좋은 곳인가? 또한,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까지 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선주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의해 결정한 것입니다. 행 27:12 → “그 항구(미항)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여기 ‘불편하므로’라는 말은, 지금 도착해 있는 ‘미항’은 숙박 시설도 열악하고, 유흥장이나 놀이시설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뵈닉스까지 가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편안함,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육신 적으로 즐길 거리들, 즉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백부장을 비롯한 선장, 선주, 선원들의 결정이 잘한 결정처럼 보였습니다. 행 27:13 →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네! 뵈닉스를 향해 출발했을 때, 순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신이 났습니다. “봐라!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바울의 말을 듣고 그냥 미항에 있었더라면 어쩔 뻔했냐?” 하면서 바울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뵈닉스 항구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그곳에서 즐길 생각에 들떴을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을 보면! 갑작스럽게 상황은 변합니다. 행 27:14 →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여기 “얼마 안 되어”라는 단어가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닥칠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무서운 광풍을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2. 잘못된 결정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그들은 모든 짐을 버려야 했습니다. 행 27:18 →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아끼는 물건들, 소중한 것들을 다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하게 포장하고, 조심스럽게 배에 실었겠습니까? 하지만! ‘취급주의’라고 딱지를 붙인 귀중한 짐들, 값비싼 짐들도 다 버렸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중품이었던 것들이고, 소중했던 수화물이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현실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물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짐들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은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 같은 배의 기구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배를 운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들이어서, 생명처럼 소중한 기구들이었지만! 자기들의 손으로 버려야만 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행 27:19 →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의 여망은 없었고,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습니다. 행 27:20∼21a →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몰아치는 광풍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노련한 경험’도 소용없었습니다. 지금 ‘다수의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광풍이 불어오자! 인간의 모든 계획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습니다. 그저 풍랑에 밀려 이리저리 밀려다니게 되고 말았습니다. 행 27:15 →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가수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광풍이 몰려오면! 마치 유라굴로 광풍 만난 배처럼, 그냥 물결에 밀려 이리저리 쓸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인간의 의지, 인간의 지식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 누가 자기 인생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한 결과가 이렇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유라굴로 광풍을 극복하는 방법 : 회개, 신뢰, 역전

그러면 이처럼 인생의 유라굴로 광풍이 몰려올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① 회개: 유라굴로 광풍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행 27:21 →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유라굴로 광풍 앞에 모두 벌벌 떨고 있는 아수라장 가운데, 누가 나섭니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나섭니다. 그는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줄을 깨닫고, 이제라도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 꿇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아무리 실타래가 얽히고설켰어도 실마리를 찾으면 다 풀어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인생의 복잡한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호 6:1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해결됩니다.

② 신뢰: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는, 그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습니다. 행 27:23~24 → “내가 속한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여기 ‘내가 속한 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신뢰가 있으면, 우리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 43:1~2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속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심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이제 바울은 용기백배하여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행 27:25 →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은 믿음의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기적은 한 사람의 분명한 믿음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③ 역전: 바울이 리더십을 쥐고 이끌어가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 나타났습니다. 행 27:35~37 →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광풍이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바울은 마치 ‘성찬식’을 집례하듯, 떡을 들어 축사하고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14일간 굶었던 그들인데! 바울이 축복기도를 하고 나눠주자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받아먹었습니다. 그 후에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되는데 276명 전원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자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을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요, 성도들이 전도하는 이유입니다. 풍랑 만난 이 민족이! 한국교회 때문에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 때문에 풍랑 만난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울처럼 이 시대에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 소망을 주는 사람, 나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바로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의 현재 가치 판단 기준은 무엇이 1순위인지? 나눠보고 잘못된 결정으로 큰 손해나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바울이 담대할 수 있었던 근거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절망 속에서 소망을 주고, 캄캄한 앞길에 빛을 비추는 사람이었던 바울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빛과 소망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와 ‘전도’의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4-06-22
조회 258

하나님의 비밀 작전 (행 23:11∼32)

 

1.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암살단이 조직되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열심이었던 유대교 신자에서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간증하자, 바울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한 암살단원이 4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암살 음모와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유대교 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가 중심이 되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공회의 이름으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을 다시 심문하겠으니, 그를 공회에 출석하도록 군인들의 영내에서 나오게 해 달라는 공문을 천부장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을 공회로 이송하는 도중에, 암살대가 매복했다가 죽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2. 악인들의 암살 계획이 탄로나다.

하지만! 이런 암살 계획은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이 비밀 정보를 빼낸 사람은 바울의 ‘조카’였습니다. 행 23:16 →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바울의 조카가 예수를 믿었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바울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바울의 조카가 군인들의 영내로 들어가 바울에게 유대인들의 암살 계획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바울도 이 사실을 한 백부장에게 알렸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는데, 로마 시민권자가 암살당하면 일이 복잡해질 것을 직감한 백부장은, 바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직속 상관인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바울의 조카를 천부장에게로 보냅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의 조카를 맞아드려서 묻습니다. 행 23:19∼21 → “천부장이 그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천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만일 로마인인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천부장의 입장도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천부장은 필사적으로 바울을 보호하려고 애를 씁니다. 비록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일 뿐이지, 그 속은 100%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족인 유대인들은 악착같이 바울을 죽이려 하고, 이방인인 천부장은 악착같이 바울을 지키려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비밀 작전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최상의 호위병으로 호송하다.

천부장은! 바울의 암살 계획을 듣자마자, 바울을 당장 안전한 곳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물론 천부장 자신이 지키고 있는 ‘안토니아 요새’도 안전하긴 합니다. 천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천부장은! 그날 밤으로 바울을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고, 총독이 거주하는 훨씬 더 안전한 ‘가이사랴’로 호송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천부장의 바울 ‘호송 작전’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첫째, 호송 시간입니다. 23절에 ‘밤 제 삼시에’라고 했는데,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면 밤 9시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바울을 호송한 것은! 그만큼 긴급하게, 비밀리에 옮기겠다는 뜻입니다. 둘째, 호송하는 군사의 규모입니다. 역시 23절을 보면,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을 동원합니다. 합계 470명이나 됩니다. 죄수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병력이 동원된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셋째, 바울의 이송 방법입니다. 24절을 보면, 천부장은! 말을 준비하여 바울을 태워서 보냅니다. 보통 죄수를 그런 식으로 호송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사람은!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안전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생명의 위협을 받는 분들이 계십니까?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다른 어떤 종류의 위협을 받고 계십니까? 육신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위협을 받습니까? 명예가 위협받습니까? 어떤 종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실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행 23:11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 역시 로마로 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계획을 세우고, 방법까지 내가 다 정해 놓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걱정하고, 안달합니다. 왜 일이 이렇게 틀어졌을까? 한탄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을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방법대로 따라가세요.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로마로 가려고 했는데, 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죄수의 신세가 되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죄수가 되었다고 로마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수인 바울을, 자유인인 바울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로마로 보내셨습니다.

 

4. 바울의 무죄를 총독에게 편지로 알리다.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 총독부로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함께 보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벨릭스 총독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본문 행 23:25∼30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 로마시민인 바울이란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죽게 된 상황에서 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구해냈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보니, 단지 종교 문제일 뿐, 죽이거나 결박할 사안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당신께 보내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송사도 있으니, 당신이 심문해 보시고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런 내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부장이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변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벨릭스 총독도 비록 탐관오리였지만, 바울에 대해서 좋은 대접을 하게 됩니다. 행 24:23 →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참으로 놀랍고도 특별한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악한 사람도 나에게 악하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착한 대접을 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에스더를 왕비로 뽑은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은 폭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큰 유익을 끼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르면! 모든 사람이 내 편이 됩니다. 잠 16:7 →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이런 삶의 원리를 터득하시고, 원수라도 나를 돕는 자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하나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한, 내 삶의 길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로마 전도의 사명’을 주신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동안 모든 신상의 안전을 지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이 있는 한! 삶과 생명은 보장됩니다.

둘째, 로마로 가는 방법은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수로 가든지, 자유인으로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밤중에 가든지, 낮에 가든지 ▸즉시 가든지 머물다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육로로 가든지, 배를 타고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즐겁게 가든지, 괴롭게 가든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셋째,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비하게 다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도 그렇습니다. 실패한 것 같지만 성공이었습니다. 마귀가 이긴 것 같은데,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모든 정죄를 이긴 것이고, 모든 사망을 이긴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런 신비로운 성취에, 우리의 삶을 다 맡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본문에는 우연인 것 같은 사건, 원수여야 할 사람이 바울은 돕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연이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 경험 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네가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약속하셨고, 바울 역시 소원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길은 결코 쉬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내십니다. 이에 대해 나눠봅시다.

 

3. 백부장, 천부장, 총독, 즉 세상 사람의 눈에 비친 바울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에 열심을 다 하는 것 외에는 흠을 찾기 어려운 성도가 됩시다.

김성윤
2024-06-15
조회 481

거룩한 소동을 일으키자! (행 19:8∼29)

 

1. ‘아데미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일으킨 소동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에베소는! 당시 인구 30만 명이 넘는 굉장히 큰 도시였습니다. 이곳 도시 사람들이 섬기는 수호신은 여신인 ‘아데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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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신의 모습 중에 특이한 점은, 다산과 풍요의 여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방이 10여 개나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에게 생명의 젖을 먹여 기르듯이, 아데미 여신이 자기들에게 풍요와 다산의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에베소는 로마의 가장 중요한 무역항으로, 아시아 경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데미 신전 주변에는 몰려드는 여행객들을 위한 음식점과 숙박소,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했습니다. 특히 5월은 나무나 은으로 만든 아데미 여신상, 그리고 그것을 넣어두는 작은 함을 만들어 파는 장사들의 큰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너희들이 섬기고 가지고 있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얼마나 많이 설교했는지! 아데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업자들의 조합장 같은 사람인데, 데메드리오란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는 최근 매상이 부쩍 줄어든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그는 경기 변동과 시세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석한 결과!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 복음’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복음 전도가, 결국엔 우상으로 먹고사는 자기들의 사업을 망하게 할 수도 있음을 예견했습니다.

그래서 동종 업자들과 직공들을 다 모아 놓고 이렇게 일장 연설을 합니다. 행 19:25∼27 →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①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②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③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러자 에베소 시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행 19:29 →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당시 에베소에는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지금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폭도들의 규모와 소동이 얼마나 컸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얼핏 보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vs 아데미를 믿는 ‘우상 신앙’과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아데미 신전과 아데미 상의 위엄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매출이 떨어져 경제적 이익이 줄어드는 것에 격분하여 이런 소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의 풍족함과 직업적 명예가 모두 아데미와 관련되어 있는데, 아데미의 위엄이 떨어지면 직업을 잃고, 지금껏 누려왔던 경제적인 안정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하니 눈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데미를 신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섬긴 것은 아데미 여신이지만, 사실은 ‘돈’과 ‘자기 쾌락’이라는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근본적으로 ‘자기 숭배’입니다.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에 탐닉하는 ‘탐심’이 곧 ‘우상 숭배’입니다. 골 3:5 →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크리스천의 영성에 독보적인 영향을 끼친 ‘리차드 포스터’ 목사님이 벌써 35년 전에 쓴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근자인 2017년에는 개신교 내에서 큰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는 ‘존 파이퍼’ 목사님이 거의 같은 제목의 책을 내셨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책의 제목처럼 ‘돈, 섹스, 권력!’ 이 세 가지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줄기’에서 수많은 죄의 ‘가지’들이 뻗어 나와, 거대한 ‘죄의 나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 섹스, 권력 중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요? 사람 따라, 나이 따라, 여건 따라, 다 다르겠지만! 점점 더 세상은 ‘돈’의 힘이 세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 가지 영역 중 자신이 가장 약한 영역은 어디인가? 스스로에게 늘 질문해야 합니다. “내 약점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하나 더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돈으로 연결되는 세상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돈이면 뭐든지 해결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스포츠나 오락이나 여행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상술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물론 행복을 누리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합니다. 소득과 명예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확장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헌신도 할 줄 알아야 참 성도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단지 자기 행복과 풍요를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라면, 우상 숭배자의 마음가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데메드리오 같은 선동가가 나타나면! 쉽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2. 복음과 말씀으로 인해 일어난 거룩한 소동

오늘 성경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한 절로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행 19:20 → “이처럼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여기 ‘바울의 전한 말’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말씀’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두란노서원을 세우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계속하니 에베소뿐 아니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과 헬라인들까지 주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능력과 병을 고치는 신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행 19:11∼12 →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 결과! 에베소 전역이 바울이 전파하는 말씀과, 행하는 능력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거룩한 소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복하고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행 19:17b∼18 →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깜짝 놀랄만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에베소에 있는 ‘마술사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행 19:19 →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할렐루야!

마술사들이 불태워버린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돈으로 정확하게 환산할 수는 없지만, 매우 큰 액수임은 틀림없습니다. 복음의 가치, 진리의 가치를 더 크게 여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되었기에, 더 이상 거짓을 붙잡고 살 수는 없기에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옛사람과 부끄러운 행위를 벗어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에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두 가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우상 업자 ‘데메드리오’가 자기의 경제적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일으킨 ‘세속적 소란’입니다. 자기 동네 에베소에서 복음의 놀라운 영향력을 발견했을 때, 마술사들처럼 우상숭배를 중단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동조자들을 모아 소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일으킨 ‘거룩한 소란’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누룩이 들어가면! 온 가족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됩니다. 온 직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고, 도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란이 일어나야 합니다.

네!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행 24:5 → “우리가 보니 이 사람(바울)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세상을 거룩하게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역사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서도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당신은 복음과 말씀을 따라 사는 데 필요한 손해라면, 기꺼이 감수할 신앙적 용기와 결단이 있습니까? 나눠봅시다.

 

2.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유혹인 ‘돈, 섹스, 권력’ 중에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길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나는 내 가정, 친척, 친구, 동료, 이웃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냥 ‘조용한 신앙인’입니까?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