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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관리자
2022-08-20
조회 461


2022년 8월 21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하나님께 꼼수 쓰지 맙시다 (레 27:1∼13)

 

레위기 27장은 서원에 관한 규례인데,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고, 나중에 무르려고 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서원의 무름’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서원(Vow)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이 무언가 조건을 내걸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면, 그 보답으로 이렇게 하겠다고 약속할 때 그것을 ‘서원’이라고 합니다. 물론,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인 헌신을 약속하는 서원도 있습니다.

1) 먼저, 성경에 나타난 서원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❶ 첫째는 위기서원입니다. → 인생의 큰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이번 위기에서 건져 주시면, 내가 이런 일을 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 밧단 아람으로 갈 때, 벧엘이라는 들판에서 야곱이 서원합니다. 창 28:20~22 →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①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②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③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위기 가운데 드린 서원’입니다.

또 사사기 11장을 보면, 사사 입다가 암몬과의 전투에 임하면서 이런 서원을 합니다. 삿 11:30∼31 →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역시 위기 가운데 드린 서원입니다. 그런데 입다의 서원은 경솔한 서원이었습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자기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맨 먼저 나와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입다는 그 딸을 여호와께 바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회했지만, 영적으로 무지하여 보속(補贖)으로 서원을 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딸을 바치고야 말았습니다.

❷ 또 하나는 감사서원입니다. → 간절한 인생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소원에 응답해 주시면, 나도 감사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서원입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가 이런 서원을 합니다. 삼상 1:11 →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의 이 서원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사무엘입니다. 한나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습니까?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뗀 후, 그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삼상 1:26∼28 →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한나는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성전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서원을 지킨 한나에게 하나님은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삼상 2:21 →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할렐루야! 사무엘은 커서 위대한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원을 지키면, 더욱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서원으로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합니까? 그것은 → 자기 자신이나 가족(3∼8절), 가축(9∼13절), 집(14∼15절), 토지(16∼25절) 등을 드릴 수 있습니다.

3) 그러면 서원은 꼭 갚아야 합니까? 네, 꼭 갚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 23:21 →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전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 5:5∼6 →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성도 여러분! 서원한 것은 꼭 갚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서원을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져서, 혹은 서원의 대상자가 거부하므로 서원한 내용을 지킬 수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2. 서원을 무르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은 ‘서원의 네 가지 종류’에 따라, 각 경우에 따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1) 사람을 두고 한 서원의 경우입니다.(2∼8) 자신이나 자녀를 드리겠다고 서원해놓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면 → 보속금(補贖金)! 일종의 ‘벌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벌금은 성별에 따라 다르고, 나이에 따라 다릅니다. 남자 어른은 50세겔, 여자 어른은 30세겔, 남자아이는 5세겔입니다. 한 세겔이 은 11g인데, 이것은 노동자 4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50세겔이면 노동자의 200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서원한 사람이 만약에 그 금액을 감당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8절을 보겠습니다. 레 27:8 →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한마디로 서원자에게 돈이 없다면 디스카운트! 깎아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성품입니다.

2) 가축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입니다.(9∼13) 하나님께 서원해서 바친 가축은 거룩한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어느 특정 가축을 바치기로 서원했는데, 그 가축과 너무 정이 들어서 바칠 수가 없다고 하면, 그 가축 값에다가 오 분의 일의 범칙금을 더해서 제사장에게 드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의도로 서원의 내용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 송아지였을 때 하나님께 서원했는데, 이 송아지가 너무 잘 먹고 잘 커서 아주 튼실한 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마음이 바뀌어서 “하나님! 이 소는 내 것으로 하고, 다른 소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바꿀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 27:10 → “그것을 변경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가축으로 가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불순한 의도로 나쁜 것으로 드리려고 하면, 둘 다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꼼수를 쓰면 안 되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산이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3) 집이나 밭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경우입니다.(14∼25) 집이나 밭은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원소유주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쳤는데 다시 무르고 싶을 때는 →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해서 그 가격에다 오 분의 일의 벌금을 더해서 드리면, 무를 수가 있게 됩니다.

4) 그런데,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해서 드릴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26∼33)

① 맏아들과 첫 새끼입니다.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서원해서 드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께서 당신 것이라고 선언하신 물건이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성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기생 라합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죽이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은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셨고 다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특정하게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서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③ 십일조는 서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해 주시면, 저는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이런 서원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당연히 드려야 할 것입니다.

소나 양 같은 가축도, 열 마리 중에 한 마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많은 가축 가운데 하나님 것을 구별하는 방법은, 외양간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에 막대기를 가로 놓고서, 가축들에게 자유롭게 지나가게 합니다. 그중에 열 번째 지나가는 것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조작해서, 소나 양을 억지로 줄을 세워서 열 번째 것을 제일 비리비리한 것이 지나가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에 속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레 27:32∼33 →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열 번째 지나갈 가축을 보니까 아주 실한 놈입니다. 이때 “아이고 왜 저렇게 튼실한 놈이 하필 거기 있어?” 하면서 그것을 빼고, 빈약한 것을 집어넣어서 순서를 바꾸면, 하나님이 그 둘 다를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기 27장의 주제는 ⇨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꼼수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신앙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책임 있는 삶입니다. 나의 신앙을 점수로 매겨본다면 몇 점을 줄 수 있겠습니까?

 

2. 서원을 이행하는 도중에 욕심이 생겨서 약속을 자기 입맛대로 변경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내 임의대로 축소했거나, 지키지 못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은 아주 정확하신 분(꼼수가 통하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 앞에, 새롭게 다짐하고 결심한 내용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8-13
조회 496


2022년 8월 14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희년의 복음 (레 25:8∼12)

 

오늘은 안식년이 7번 반복되고 그 이듬해인 50년이 되는 해, 즉 ‘희년’(Jubilee)에 대해서 ‘네 가지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희년 제도의 기본은 ‘안식년 제도’에 있습니다.

안식년에 관해서 출애굽기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 23:10~11 →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6년 동안은 씨를 심고 열매를 거두는 일에 힘써야 하지만, 7년째 안식년이 되면, 씨를 뿌리지도 말고 열매도 거두지 않음으로 일절 농사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파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열매가 있지만, 그런 열매는 자기 땅에서 난 것이라고 해도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에 열린 열매나 곡식은 특정 주인이 없는 것이고, 누구나 가져가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는 절도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심지어 짐승들까지 돌봐야 한다는 것이 ‘안식년의 첫 번째 정신’입니다.

나아가서 신명기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 15:1~2 →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형제나 이웃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안식년 끝에 가서도 빚을 갚지 못하면 탕감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면제년’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렇게 면제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식년은 가난한 사람이나 빚진 사람에게 엄청나게 좋은 해입니다.

또 신명기 15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신 15:12 →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러니까 종이 되었어도 6년 동안만이고, 7년째에는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이 되면, 토지도 쉬고, 사람도 쉬고, 빚도 면제해 주고, 노예로 삼았던 사람도 풀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안식년을 주신 목적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둘째, 사람이나 땅이나 6년을 일하고 사용했다면, 1년은 쉬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인간도 쉬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넷째, 재물을 쌓는 재미와 탐심에서 벗어나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다섯째,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은 천국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 희년의 기본정신은 ‘자유를 공포하는 것’입니다.

희년이 되면 자유를 공포해야 됩니다. 레 25:10 →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이 희년의 자유를 세 가지 ‘R’로 시작되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Return(돌아가다)입니다. 레 25:13 →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여기 ‘소유지’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2지파별로 배분해 준 땅을 일컫습니다. 이 땅은 대대로 팔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아프거나 가정사로 인해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그 땅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땅은 다가올 희년을 기준으로 값이 매겨졌습니다. 즉 희년이 40년 남았으면 40년 만큼의 값, 10년 남았으면 10년 만큼의 값으로 팔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희년이 되면 도로 원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땅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복음입니다.

둘째, Release(풀어 놓다)입니다.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에게 빚을 져 종이 되었다면 6년 동안 일하고 안식년에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6년이 채 안 됐는데 중간에 희년이 찾아오면, 그래도 무조건 자유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레 25:39~41 →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희년이 오면 무조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을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고도 하였습니다.

셋째, Rejoice(크게 기뻐하다)입니다. 희년은 기쁨을 되찾는 해입니다. 자유를 되찾은 자에게 가장 큰 감정은 ‘기쁨’입니다. 잃었던 땅과 자유를 되찾는 사람에게 큰 기쁨이 있을 수밖에 없죠! 희년을 히브리어로는 ‘요벨’이라고 하는데, 이 요벨은 ‘양각 나팔’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희년에는 양각 나팔을 불면서, 자유의 기쁨과 회복을 누리는 복된 해인 것입니다.


3. 희년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주일 날에 특별히 장사가 잘되는 직종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일날 문을 닫고 쉬기로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쉰다는 것은 곧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영업의 존폐를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이 있는 성도는 6일 동안 일하면, 주일에 쉬어도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니! 세상일을 쉬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배하는 삶이 진짜 복임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이 안식일의 개념을 잘 알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창 2:2 →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기 하나님께서 그가 하시던 일! 즉 ‘천지창조’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했습니다. 천지창조를 6일 동안에 이루고, 일곱째 날엔 그냥 쉬셨다, 노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날에 천지창조의 일을 ‘마치셨다’는 것은, 그날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말은, 어떤 일을 ‘완성, 마무리, 마감’하고 그것을 축하하고 기뻐하셨다는 뜻입니다. 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하신 일의 완성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난 6일 동안 수고하며 일한 것이, 진정 나에게 아름다운 결실이 되고, 완성이 되고,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려면, 그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 주셨고, 일터를 주셨고, 건강을 지켜주셨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신,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이 의미 있고, 감사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그냥 쉬려면 당연히 걱정되겠죠! 성경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 25:20 →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무슨 말입니까? 일하지 않고도 먹을 재주 있나?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레 25:21 →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할렐루야!

안식일이나 안식년을 지키기 위해서도 큰 믿음이 요구되지만, 희년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49년째가 안식년이고, 이어 50년째는 희년이기 때문에, 연속해서 두 해를 안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희년은 일종의 믿음 테스트 기간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믿음의 원리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이런 믿음을 하나님께 확실히 보여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년을 잘 지켰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노예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탐욕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희년은 차치해 두고 안식년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해서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가기까지, 490년 동안에 70년이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70년의 안식년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댓가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 동안 함으로써, 그 땅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대하 36:21 →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놀랍고 무섭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년을 지키지 않은 것을 하나님은 다 계수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보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안식년과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첫 설교에서 자신이 온 목적이, 희년을 선포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4:18~19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은 ‘나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의 은혜의 해가 오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으면, 죄로부터의 자유, 마귀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잃어버린 천국을 되찾게 되는 희년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안식년이나 희년을 지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까?

 

2. 안식년과 희년은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과 약자! 심지어 동물과도 함께 더불어 살라는 정신이 깃들어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입장은 무엇이었습니까?

 

3. 희년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십니까?



관리자
2022-08-06
조회 573


2022년 8월 7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더 높은 거룩성을 요구하신다. (레 21:1∼9)

 

여러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가 요구된다는 뜻입니다. 평소에 고위층으로서의 사회적 존경과 특권을 누리는 만큼, 사회가 어려울 때 그들이 누구보다 먼저 자기를 희생하고, 앞장서서 의무를 다하기를 국민들은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불러내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별된 백성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려야 하는 ‘제사장’들은 더욱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에, 거룩함의 수준이 더 높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제사장이란 직임은 신약에 와서도 일차적으로는 영적 지도자! 즉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모든 성도들은 다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벧전 2:9 →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새번역 성경)

그렇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서 구별된 영적 제사장 된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삶으로 보여주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사실은!

 

1. 영적 권위는 직책이나 지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삶에서 나옵니다.

레 21:4 →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백성의 어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단지 제사를 집례하는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모든 면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 임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더욱 성결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제사장이라는 직책이나 지위만으로는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참된 권위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권위는! 오직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에만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별 됨이 없이 단지 높은 지위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 권위를 발휘하려고 한다면, 당장에 거부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직책이나 지위에만 근거한 권위는 결코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권위 아래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있던 권위는 어떤 권위였습니까? 예수님에게 높은 지위나, 화려한 경력,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권위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거룩한 삶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바른길로 인도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위에 순복하게 해야 할 지도자들은, 먼저 자신의 성결에 힘써야 합니다. 자신이 성별 된 삶을 살지 않으면서, 바른 삶, 정결한 삶을 살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것은 허공을 치는 소리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2. 구체적으로 어떤 거룩함을 요구하십니까? - 제사장의 성결규례

 

① 시체 접촉금지 레 21:1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죽은 사람의 몸을 만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일반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직계 가족의 장례가 생기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 자녀 형제, 그리고 결혼하지 않는 누이의 장례식입니다.

죽은 자의 ‘성경적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신이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는 비위생적이고 불결합니다. 특히, 전염병으로 죽은 자는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와의 접촉금지 명령은, 거룩한 제사장을 육체적으로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내려진 명령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죽은 자의 의미’는 ‘영혼이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죄인은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에 묻혀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러한 세상 가치관과 세상 문화에 젖어 사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물들 수 있기 때문에, 제사장의 영혼이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12:2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생활 하라는 뜻인 것 같지만,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서 살되 구별되게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꼭 배와 물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배는 물 없이는 무용지물입니다. 꼼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지, 물에 침몰하면 그 역할은 끝입니다. 세상 속에 사나 세상 풍조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은 비싸거나 화려한 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② 과도한 애도 금지 레 21:5 →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이 말씀은 당시 이방인의 장례 풍습과 같이, 가족이 죽었다고 해서 머리털을 대머리같이 빡빡 깎거나, 수염 양쪽을 밀어서도 안 되고,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는 표시로 자기 살을 베는 자해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슬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정신 건강에도 좋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슬픔 가운데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슬픔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적절한 답을 주고 계십니다. 살전 4:13 → “형제들아 자는 자들(죽은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③ 제사장 자신의 결혼규례 레 21:7 →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니라.” 여기 부정한 창녀란? 당시 이방 신전에서 매춘하는 여자들을 말하며, ‘이혼당한 여인’이란 음행의 부정행위로 인해 쫓겨난 여인을 말합니다. 합법적인 이혼증서를 가진 여인과 결혼할 수 있었던 일반인과 비교해 보면, 좀 더 강화된 규례입니다.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④ 제사장의 딸이 음행하면 불사르라. 레 21:9 → “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 제사장의 가족들에게도 더 엄격하게 거룩함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죽이라고까지 명령한 것은, 가정을 거룩한 신앙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딤전 3:4∼5, 12, 딛 1:6) 모든 성도들은 자녀들을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로 길러 가기 위해, 스스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⑤ 제사장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늘 생각하며 살라. 레 21:4 →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네! 제사장은 그 나이와 상관없이 백성들의 어른이므로, 스스로를 잘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딤전 4:12 →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레 21:6 →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한 마디로, 제사장은 예배를 주관하는 자이니 더욱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배자로서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⑥ 백성들은 제사장을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알아주라. 레 21:8 →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네! 일반인들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일반인을 대신하여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구별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제사장들은 그 사명과 권위에 걸맞게 구별되고 거룩한 삶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할 때 시대는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특권은 책임이다!” 제사장직은 감투로 주어진 직분이 아니라, 헌신하라고 주어진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지고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영적 분별력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눔과 묵상

 

1. 영적 리더에게 요구되는 조건들에 대해서 나눠 보고, 우리 자신들의 삶을 비춰봅시다.

 

2. 자신이 세상에서 거룩함과 구별됨을 지켜 가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이며,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서로 나눠봅시다.

 

3. 평신도는 적당히 해도 된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세상의 제사장들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더 높은 거룩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2-07-30
조회 303

제목: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자 (시 89:46∼52)

 

오늘 본문 시편 89편은, 하나님이 다윗과의 언약에 근거해서, 지금 열방의 조롱거리가 된 다윗 왕조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고 성취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89편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대해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시 89:3∼4 →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은 오늘 성경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앞의 말씀인 시 89:19∼37까지의 말씀인데, 길지만 3번으로 나눠서 읽어 보겠습니다.

① 먼저, 하나님께서 다윗을 직접 택하셨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셨은즉, 원수와 대적이 다윗을 해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시 89:20∼24 →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② 이어서,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인자하신 분으로서 언약을 굳게 지킬 것이지만, 만일 자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회초리와 채찍으로 사랑의 징계를 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시 89:28∼32 →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③ 이렇게 사랑의 징계를 할지언정, 결코 하나님의 언약을 폐하거나 깨뜨리지 않고 다윗의 후손을 장구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시 89:33∼37 →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그런데 38절부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집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어조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분명하게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는 것을 토해 놓습니다. 시 89:38∼41 →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약속하셨으면 지켜주셔야지! 이게 뭡니까? 항의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하실 때, 다윗의 후손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징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0∼32절에서도 그랬고, 사무엘하 7:13∼16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원수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은 웬일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지금 ‘당돌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연거푸 하나님께 질문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시 89:46, 49 →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前)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이런 기도는 사실 그냥 읽기에도 좀 가슴이 떨립니다. “불경스럽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기도해도 되나?” 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자녀 된 성도가 누리는 은혜요, 특권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걸 붙들고 기도하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단 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되어 이방 민족에게 끌려간 지 어언 60여 년이 흘렀습니다. 다니엘의 나이도 80세 가까이 되어, 이제는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희망도 희미해지고, 기도할 힘조차 빠졌을 때입니다. 다니엘이 왕의 서고에 들어가 이 책 저 책 살펴보다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두루마리 성경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읽다가 깜짝 놀랄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 9:1∼2 →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그때 다니엘이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날부터 다니엘은 금식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단 9:3∼4, 17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러니 약속하신 것을 지켜주세요!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황폐한 예루살렘 성을 회복시켜 주세요.” 이렇게 약속을 붙잡고 기도한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를 위하여! …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해방과 예루살렘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니, 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곧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담대함의 표현인 것입니다. 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할 때는, 이런 담대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다니엘의 기도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견고하게만 보이던 바벨론 제국이, 신흥 제국 메대에 순식간에 망하고, 곧이어 페르시아 제국에 복속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했습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당돌해 보이는 이런 기도는! 다니엘 같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동일하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네!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은혜와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드리는 기도’와 vs 그저 ‘힘듭니다.’ ‘괴롭습니다.’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는 기도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 66년 동안, 오만 번 이상의 기도 응답과, 일만 명이 넘는 고아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던 ‘조지 뮬러’ 목사님은, 세 개의 성경구절을 ‘약속의 말씀’으로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① 시 68:5 →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② 빌 4:19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③ 마 17:20 →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고 기도했기에, 그는 그 큰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 또한, 아프리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선교사 ‘리빙스턴’은 주님께서 주신 두 가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 승리했습니다. ① 요 14:18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② 마 28:20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너무나도 중요한 ‘자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글로 써서 주신 ‘보증서’와 같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땅문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곳엘 가보니, 어떤 사람이 그 땅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땅문서를 보여 주면서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찾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바로 그와 같은 책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약속을 나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믿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후 1:20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을 여러분 심령에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성도 여러분! 낙심하고 좌절하고 계십니까? 살기가 힘들고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안 하셨다면, 이제부터라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미래를 환하게 여는 확실한 길이 될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약속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와 특권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말씀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여 응답받고 승리한 오늘 예시된 사람들 중에 가장 본인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나,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7-23
조회 619


2022년 7월 24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백성 (히 12:28∼29)

 

이 세상에 완전한 나라는 없습니다. 지금도 많은 나라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홍콩, 우크라이나, 스리랑카 같은 나라뿐 아니라,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미국도 유럽도 다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 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서 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단 2:44 →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소망해야 할 본향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 눈물도 없고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고 고통도 없고, 괴로움이 없는 저 ‘하늘나라’, 하나님이 계신 ‘천국’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6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저 천국이, 하늘나라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1.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히 12:28 →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욱 빨리 모든 것들이 변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개념도 바뀌고, 정치 이념도 바뀌고, 가치의 개념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뀌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면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① 우리가 믿고 섬기는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②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지만,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고 우리의 요새가 되십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영원한 지옥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두 길은 죽음 이후에 갈라집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과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고! 죽음이 내게 다가오는 날! 저 천국에서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근에도 여러 가정의 식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의 가정이 드리는 ‘천국 환송예배’는 세상 사람들의 초상집과는 다릅니다. 물론, 육신적으로는 사랑하는 가족을 보내는 일이니 슬프고 아프지만,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다시 기쁨으로 만날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처럼 막 울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감사한 일입니다.

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은혜!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그것이 은혜입니다.

② 이렇게 넘치는 은혜를 받은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히 12:28의 → “¹은혜를 ²받자”는 말씀에는 이런 관주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밑에 해설을 보면 1) ‘또는 감사하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28절 말씀은 →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감사하자.”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NIV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히 12:28 → “Let us be thankful.” “감사합시다”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은혜를 받자”는 말과 “감사하자”는 말은 실상 같은 말입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첫째도 감사요, 둘째도 감사요, 셋째도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하지만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은! 있던 복도 다 잃어버립니다. 늘 불평하는 사람, 부정적이고, 남을 물어뜯고 끌어내리는 사람은, 결국 인생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피다가 말고 시든 꽃처럼, 저물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쁨과 감사로 살아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2. 경건함으로 살라.

두 번째,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길 때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 12:28 →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여기 ‘경건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을 신학적으로 ‘중생’ ‘거듭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평생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중생하긴 했는데, 성화의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십 년, 이십 년 지났는데도, 별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달라져야 하고,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야 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권면한 말씀이 있습니다. 벧후 1:4∼7 →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믿음의 기초위에 ‘신앙의 집’을 지어 가는데, 제일 꼭대기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신앙의 형제자매인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믿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갈등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사랑의 사람, 돌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늘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히 4:16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늘 주님 앞에 엎드려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는데! 주님의 기대대로! 믿는 자답게! 살지 못하는 부족한 우리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

히브리서 12장 28절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히 12:28c →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3가지입니다. ① 절대 믿음 ② 절대 긍정 ③ 절대 감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11:6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절대 믿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절대 긍정),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절대 감사).” 할렐루야! 이 3가지를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모토로 삼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남 탓을 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또한 합력하여 선한 결과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 그런 긍정의 마음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세계 전체가 경제적인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어려움은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때에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주님을 꼭 붙잡고 믿음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두 개의 성경구절을 드립니다. 고전 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마태 6:33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도 여러분! 인생의 풍파가 많고 시련이 많으나, 만세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굳게 서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서 뒤흔들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만세 반석이신 주님이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가면 우리는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흔들리지 않는 터전입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젊음입니까?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터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터전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살다 영원한 천국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혹 이것은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그렇지 않음을 깨닫거나 경험한 것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부활과 천국의 소망이 있는 믿음의 사람과, 세상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비교해 보며, 믿음의 소중함에 대해 나눠봅시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① 절대 믿음 ② 절대 긍정 ③ 절대 감사 중에, 본인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나눠보며 새 다짐을 가집시다.

관리자
202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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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7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서로 돌아보아 모이기에 힘씁시다. (히 10:19∼25)

 

오늘 본문 말씀은 세 가지를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1. 우리 함께 하나님께 가까이 가자.

히 10:22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기서 말하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십자가의 도를 믿는 믿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땅에 발을 디디고 사나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필요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꼭 필요한 의식주 문제만 해결된다고 해서 사람이 만족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온통 세상 것으로 그 마음이 가득 찬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그 방향과 목적의식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물질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유와 평등, 복지나 인권의 신장 같은 주제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이루어지고 구현된다고 해서,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천국에 이르는 길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참 마음’은 어떻게 하든지 긁어모으고 부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현실의 인생을 즐기려 하지 말고, 솔로몬이 말년에 고백한 것과 같이,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전 12:13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은 서로 간에, 참 마음과 바른 믿음을 갖고 살도록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늘 만나는 사이라도 피상적으로 “저 사람은 장로님 딸이니까 당연히 믿음이 좋겠지! 저 사람은 모태 신앙이니, 내가 그의 믿음에 관하여 관심 가질 필요가 없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믿음이 충만하다가도, 어떤 계기로 시들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직분도 높고, 겉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참 잘하는 것 같이 보이는데! 보기와는 달리 거의 믿음이 없거나, 의심과 회의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 믿음의 말로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믿음을 확인하고, 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네 믿음이 참 아름답다”라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함께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격려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 함께 소망을 굳게 붙잡자.

히 10:23 →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새번역) →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이 세상의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에 참여하고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천국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겪는 고난과 역경과 핍박이 제아무리 크더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 6:19 →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부활과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이 있으면, 어떤 풍랑과 비바람에도 그 인생의 배를 안전하고 확실하게 붙들어 주는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과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면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낙심치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견고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교인들 가운데도 많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믿음으로 격려하고 돌아보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권고하는 성경 구절 두 군데를 보겠습니다. 욥 4:3∼4 →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성도 여러분! 물질이나 구체적인 도움도 필요하지만, 대부분은 말로 하는 ‘격려’만으로도 다시 소망으로 일어서게 하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히 12:12∼13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성도들 가운데도 너무 힘들고 지쳐서 기력이 없고, 똑바로 걸을 힘조차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다리가 아주 어그러지지 않도록, 사랑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님! 집사님! 많이 힘드시죠! 그래도 힘을 내십니다. 주님이 성도님의, 집사님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한 결과로 열매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더욱 기도하며 도전합시다. 저도 뒤에서 기도로 중보할께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놀라운 미래와 계획을 갖고 계심을 믿고 다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한다면! 낙심했던 사람도 새 용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서로를 돌아보아 모이기를 격려합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모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권고하기를 ‘서로 격려하여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십니다. 히 12:24∼25 →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장작도 모여야 불이 잘 타오릅니다. 성도들도 함께 모여야 영적 힘을 얻습니다.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쁘다는 이유로 예배를 등한히 여기고, 이런저런 이유로 예배를 건너뛰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열심히 모이지 않고 신앙이 성장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영적으로 충만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열심으로 모이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바쁘지만, 부득이한 일들이 많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모여야 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격려합시다. 속회에 빠지지 않도록, 선교회 모임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격려합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핍박 속에서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날마다 모여 찬양했습니다. 날마다 모여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모여 애찬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렇게 자주 모였기에 능력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지난 7월 5일에 우리교회에서 후원하고 있는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보내온 통계 자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온라인 예배’가 대세이니, 그 흐름을 꺾으려고 애쓰지도 말고, 결단이란 명목으로 유튜브 온라인을 중단하지도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온라인으로도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82%에 이른다는 통계 조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자료들을 보는 가운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82%가 ‘온라인으로도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대답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코로나 펜데믹이 오기 전에 현장 중심의 예배, 성경공부, 속회, 선교회, 소그룹 모임 등을 통해 이미 견고한 유대 관계와 공동체성을 확보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온라인을 통해서도 “아! 나는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 간에 소통하고 있으며, 유익한 영적 정보들을 공급받고 있으며, 목회적 돌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만일! 이런 ① 성도 간의 ② 목회자와 성도 간의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온라인을 통해서만은 결코 신앙적인 성장과 성숙!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사람으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든지 ① 온라인에 숨어 있거나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② 현장 예배공동체를 통하여 은혜 받게 하고, ③ 소그룹 공동체에 참여하여, 함께 나눔과 교제, 섬김의 기쁨을 맛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수고하신 교구장님 속장님, 선교회장님과 임원들! 모두 모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그런 열심과 수고와 헌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예배의 현장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대로 시대의 조류가 그렇다고! 그것이 편하다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권하여 함께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 침체에 빠졌던 사람들이 회복될 것입니다. 성장을 멈췄던 사람들이 다시 성장할 것입니다. 용기를 잃었던 사람들이 다시 활력을 얻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서로를 향한 진정한 영적 격려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솔로몬이 누렸던 부귀영화로도 인간의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땅에 발을 디디고 사나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함이 깨달아졌다면 나눠봅시다.

 

2. 신앙이 성장하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소그룹 활동’과 ‘격려 사역’이 매우 중요함을 나눠봅시다.

 

3. 성도 간에, 목회자와 성도 간에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온라인을 통해서만은 결코 신앙적인 성장과 성숙!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사람으로 자랄 수 없다는 것과, 이들을 향한 우리의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7-09
조회 513


2022년 7월 10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영원한 대제사장이 주시는 소망! (히 7:11∼19)

 

 

1. 예수님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히 7장은 ‘구약의 제사장’과 ‘신약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압도적인 우월성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제사장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율법’과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제사장들은 이 율법 없이는 아예 그 직분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제사장이라는 직분자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규정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즉 제사장은 어떤 지파의, 어떤 가문의 사람들이, 어떤 절차에 의해 임명되고, 어떤 예복을 입어야 하며, 또한 그가 행할 주 임무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집례해야 하는지? 이 모든 것들이 다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철두철미하게 율법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고, ‘율법과 상관없는 제사장’이나 ‘율법에서 벗어난 제사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열렸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일어난 대변혁입니다.

오늘 본문 히 7:12에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입니다. →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즉 예수님은 율법의 규정에 매이지 않는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지배하고 있던 율법을 초월하고 완성시키는 분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5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제사장 ‘멜기세덱’에 대해서 알아봐야 합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이 시날 왕을 비롯한 다섯 연합군들을 물리치고, 사로잡혀갔던 조카 롯을 비롯한 재물과 부녀자들과 친척들을 찾아서 돌아올 때, 그를 맞이했던 살렘(샬롬) 왕이며 제사장인 사람입니다. 그는 아브람을 향하여 이렇게 축복합니다. 창 14:18∼20a →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이 ‘멜기세덱’을 일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점입니다. 성경은 그가 어떻게? 언제부터? 무슨 근거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의 족보나 부모에 대해서,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냥 갑자기 나타나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을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아브람 시대였으니까!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이나 율법이 세워지기 훨씬 전, 레위 지파가 생기기도 전, 아론이 첫 제사장이 되기도 훨씬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이란 제사장은! 율법에 의해 세워진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하게 세우신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바로 멜기세덱과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보내시고 세우신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7:15 →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 제사장처럼 ‘율법과 아무 상관 없는’ 별다른 제사장! 아주 특별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6절에서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히 7:16 →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제사장들을 규정하기 위하여 있는 ‘계명의 법’을 따라서 제사장이 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던 구약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율법을 완전히 초월하여 대제사장이 되신 ‘아주 특별한 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대신 무엇에 의하여, 혹은 무엇을 근거로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십니까? 그 대답이 16절 하반 절에 있습니다. 히 7:16b →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바로 이 말씀인데, 여기 ‘불멸의 생명’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영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의 능력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운 힘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예수님이 율법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서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면, 아무리 제사장들 중에서 최고로 훌륭한 대제사장이라 해도! 여전히 율법 아래에 있는 존재, 율법이라는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제사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분명히 정죄하는 죄인을 특별 사면 시키고, 율법이 엄격히 저주하는 죄인에게 영생과 구원을 거저 베풀어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완전히 초월한 대제사장이 되셨던 것이며,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세워지신 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① ‘율법이 임명해 주어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자존 하시는 생명의 능력’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며, 또한 ② ‘율법이 선포하는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율법이 저주하는 자에게도 영생과 구원을 선포해 주실 수 있는’ 실로 놀라운 대제사장이신 것입니다.

테니스의 4대 메이저 대회 중 ① 호주 오픈 ② 윔블던 ③ U.S.오픈에서는 ‘호크아이’라는 비디오 장비로 테니스 공이 아웃(Out)인지 인(In)인지를 판정합니다. 하지만 ④ 프랑스 오픈에서는 여전히 사람의 눈으로 판단하는 콜을 따르고 있습니다. 매 경기마다 중앙의 높은 심판석에 주심이 앉아 있고, 베이스라인과 서비스라인을 판정하는 선심들이 따로 서 있습니다. 이때 선수들이 친 공의 ‘인아웃’(in-out)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선심이 판정을 내리고 ‘콜’(call)을 합니다. 하지만 주심은 선심의 판정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오버룰’(overrule)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 ‘오버룰’이란 선심이 내린 판정을 번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같은 심판이라도 주심이 모든 선심들 위에 있는 최고의 심판이며, 최종적인 판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선심이 ‘인’이나 ‘아웃’을 ‘콜’했다 하더라도, 주심이 ‘오버룰’을 선언하면 그 주심의 판정만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 역시 ‘율법의 판정’대로 한다면, 모두 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의 공의’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이미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율법의 ‘콜’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오버룰’ 해 버리신 것입니다. 분명히 ‘죄인’인데 ‘의인’이라고 칭해 주시고, 당연히 ‘지옥 형벌’에 떨어져야 마땅한 인생인데도 ‘영생의 특사’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그렇게 ‘칭의’와 ‘구원’을 선포하시면, 율법이 내렸던 정죄의 판정은 더 이상 효력이 없으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무죄 선고만이 최종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고도 고마운 일이 아닙니까? 나 같은 죄인을 끝까지 옭아매려 하는 ‘계명을 폐하기’ 위해서 아예 ‘육체에 상관된 율법을 좇지 아니하고’ 그 대신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2. 완벽한 중보자가 되어 주신 대제사장 예수님!

히 7:25 한 절 말씀을 보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히 7:25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여기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라는 표현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만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시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심을 뜻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디모데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전 2:4∼5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과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삯인 사망의 값은 완전히 치러졌고, 구원의 길은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예수님의 공로로, 그 이름을 인하여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시원하게 해방시켜 주신 분이 바로 ‘새 언약의 멜기세덱’이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히 7:25입니다.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네!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날마다 우리를 위하여 대변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예수님이 하나님 옆에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땅에서 나를 믿고 세례받은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입니다. 보혈의 공로를 입은 사람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중보하시는 예수님! 정말 멋지고, 믿음직하고, 고맙기 짝이 없는 대제사장 예수님 아니십니까? 이 예수님을 인하여! 늘 담대하고 소망 가운데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멜리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새로운 제사장! 예수님이 세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율법이 결코 우리에게 소망이 되지 못하고, 은혜가 소망인 이유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주심은 선심의 판정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오버룰’(overrule)을 선언하여, 선심이 내린 판정을 번복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이 선언하신 ‘오버룰’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관리자
2022-07-03
조회 634


2022년 7월 3일 주일 낮 설교 말씀나눔 자료

제목: 첫 열매 신앙 (출 23:14∼19)

 

1. 첫 것과(First) 최고의 것(Best)으로!

순서! 우선순위!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나중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지켜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넘버 원 (No. 1)은 누구이고 또한 무엇입니까? ‘넘버 원’ 즉 최고의 자리에 누가? 무엇이 앉아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대단히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말로는 ‘하나님이 제일이다!’ 하면서도 실제의 삶에서는 하나님 대신 돈이나 건강, 명예나 지위, 혹은 자녀가 하나님보다 앞자리를 차지한다면 말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① ‘하나님 제일주의’ ② ‘하나님 우선주의’ ③ ‘하나님 중심주의’ ④ ‘God First!’ 이 단순한 원리만 잘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 우선주의! God First 신앙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이 낳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양을 치던 아벨은 하나님께 양을 제물로 드렸고, 농사를 짓던 가인은 농산물을 제물로 드렸는데, 문제는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안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못 이긴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난해 구절! 즉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자기가 하는 주업의 소산물을 제물로 삼아 드렸는데, 누구의 것은 받으시고 누구의 것은 안 받으셨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읽어보면! 이 말씀은 절대 난해 구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창 4:3~5 →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이 말씀을 보면! 두 사람이 드린 제물의 종류가 다른 것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인은 단순히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고 설명하는 데 반하여,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가인의 곡식 제물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 없는 걸 보면, 곡식 중에서 구별하거나 선택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그저 그냥 드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첫 새끼와 기름!이 중요합니다. 구별하여 첫 것을 선택했고,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제사법을 규정한 레위기에 보면! 짐승을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의 몫은 언제나 ‘기름’이었습니다. 레 3:12∼16 → 레 3:12∼16 → “만일 그의 예물이 염소(양)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것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그러니까 여기서 단 한 글자! ‘첫’이라는 글자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 ‘첫’이 영어로는 ‘First’입니다.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제일주의, God First 할 때 그 ‘첫’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23:19에도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요절의 말씀입니다. 출 23:19a →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농사를 짓게 되면, 토지에서 생산된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첫째는, ‘처음’ 거둔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고, 둘째는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첫 열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가인이 드린 곡식 예물은 이렇게 표현 되었어야 합니다. 창 4:3 → “가인은 땅의 소산의 첫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이렇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가인의 제물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First, Best, 첫 것 가장 좋은 것, 이 두 단어를 잘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첫 열매 신앙’입니다.

 

2. 첫 것과(First) 최고의 것(Best)에, 둘 다 승리합시다.

그런데 이 First, Best에 가인은 둘 다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승리했습니다. 아벨이 드린 양은 첫 새끼니 First가 맞고, 양의 기름이란 하나님께서 받으시길 원하시는 것이니 Best가 맞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First, Best 둘 다 성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말씀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창 4:4 →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그냥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첫 열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하여 드리면, 하나님은 내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최고의 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의 말씀입니다. 롬 12:1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아벨은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First에도 실패했고, Best에도 실패했습니다. 첫 열매도 아니었고,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고도 아닌, 그저 그렇고 그런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창 4:5 →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영적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절(麥秋節)이란? → 단순히 보리를 추수하여 드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지어 거둔 첫 열매를 하나님께 감사로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초실절(初實節)’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맥추감사절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요, 맥추감사주일의 정신은 ‘첫 열매 신앙’인 것입니다.

이렇게 내 삶에서 하나님이 으뜸이시고,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분이기 때문에, 내가 거둔 열매 중에 첫 것! 그리고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 ‘첫 열매 신앙!’을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이 ‘첫 열매 신앙’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첫 열매 신앙의 영향력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첫 열매 신앙’을 가지면, 나만 복 받는 게 아니고, 그 복이 자손만대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신 5:9b~10 말씀입니다. →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우상숭배,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죄를 지으면! 나만 벌 받고 저주받는 게 아니라, 자녀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몇 대까지라고요? 네! ‘3, 4대까지’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자신만 복을 받는 게 아니라, 자녀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몇 대까지요? 네, 자그마치 ‘천 대까지’ 복을 받고 은혜를 받습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과 담을 쌓고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내 인생에서는 ① 하나님이 First! 최우선이다! ② 하나님이 Best! 최고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신앙을 두고 무슨 신앙이라고 한다고요? 네! ‘첫 열매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중요한 ‘첫 열매 신앙’을 잘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첫 번째 수확한 보리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자손들에게도 반드시 ‘맥추절’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 열매 신앙’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언제나 먼저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우리 믿음을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첫 열매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되고 귀한 열매가 끊이지 않도록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삼상 2:30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성도 여러분! 복 받는 신앙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첫 열매 신앙’에 있음을 마음에 잘 새기고 실천하고, 자녀손들에게 잘 물려주어, 신앙의 명문 가문을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인생과 신앙생활에 우선순위를 잘 지켜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임을 체험한 것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여러분에게 ‘첫 열매 신앙’(First, Best)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지 나눠봅시다. (물질, 시간, 관계, 관심 등)

 

3. 부모의 신앙이 바르면 자녀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다짐하고 결심한 바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말씀지 다운 


이재영
2022-06-25
조회 277

제목: 힘이 아닌 공평과 정의로! (시 82:1∼8)


오늘 시편 82편은 세상의 권력자들, 특별히 재판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재판관들을 선악 간에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시 82:1 →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여기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권능을 지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들의 모임’이란 말은 ‘천사’나 다른 어떤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재판관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대신 집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편에 등장하는 재판관들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그런 권위를 가지고, 사적 이익이나 악인의 편에 서서 판결을 굽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 재판관들을 소환하여 심판하십니다.

성경은 재판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나오며, 또 어떤 자세로 재판해야 할지를, 신명기 1장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신망받는 사람들 중에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우고, 그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판단할 때, 어떤 마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지를 이른 말입니다. 신 1:17 →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그렇습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사명자로서 판단하고 일 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재판관들이 그들의 직무로 인해서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권세자라고 해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통치 행위와 재판을 감찰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이런 공의로운 관심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판단이 그에게 임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재판관과 통치자의 불공정한 재판을 판단하십니다.

오늘 성경에 언급된 재판관과 통치자들이 저지른 잘못은 무엇입니까?


① 불공평한 재판을 했습니다.

시 82:2 →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즉, 너희가 언제까지 불공평한 재판을 하고, 언제까지 악인의 편을 들려 하는가?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책망입니다. 재판의 본질은 ‘공정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재판의 공정성은 모든 권위와 공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기인 됩니다. 그런데 이들 재판관들은 이 공정성을 왜곡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불공평한 재판을 한 구체적인 예로서, ‘악인의 낯’을 봐주었다는 것입니다. 왜 악인의 낯을 봐줬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뇌물을 받고 그렇게 해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신 16:19 →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그리고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했습니다. “언제까지 하려느냐?”라는 이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관행처럼 불공평한 재판을 해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란 말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참으셨지만, 이제 더는 용인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불의한 재판으로 ‘공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억울함이 생기고, 그로 말미암아 보복이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정의의 하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은,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② 약자를 억울하게 판단했습니다.

시 82:3∼4 →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여기 가난한 자, 고아, 빈궁한 자, 궁핍한 자들은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보호해 주어야만 하는데,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통치자와 재판관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가진 자들로부터, 힘 있는 자들로부터, 이들을 지켜 주고 돌보라고 권위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정반대로 가고 있지요! 오죽하면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란 말이 나오겠습니까? 세상의 판단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슥 7:9∼10 →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하셨던 ‘욥’이 참으로 위대한 것은, 바로 그렇게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족장으로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을 위해서 온갖 수고를 다 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욥 29:12∼17 →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반면에, 아모스 5장에서 말하고 있는 재판관과 위정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암 5:11a,12 →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이런 사람들의 결국은 어떻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까? 암 5:11b →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의로우신 심판 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늘 생각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③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그릇 판단해서 공의와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시 82:5 →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이 말씀은 법을 지켜야 할 재판관과 위정자들이, 법에 대하여 무지했으며, 소송 된 사건에 대하여 바로 알려고 하는 노력도 없었고, 그저 이권에 눈이 어두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무지는 고의적이며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가장 공의로워야 할 재판관들이 ‘흑암 중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땅의 모든 기초’가 흔들렸습니다. 즉 공고하게 서야 할 ‘사회질서’와 ‘도덕적 가치’가 흔들리고, 공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해야 되겠습니까? “아! 나는 약자이고, 힘없는 자이니, 내가 할 일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벧전 2:9 → “너희는 ① 택하신 족속이요 ②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③ 거룩한 나라요 ④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왕이요,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고 드러내야 할 사명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조차 하나님의 뜻과 영광, 그리고 교회를 생각지 않고, 자기 이익과 소욕을 위해 산다면 세상은 무너지게 됩니다.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않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 82:7 →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이 말씀에 우리 모두 깨어 경성 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이여 세상을 심판하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본문 마지막 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시 82:8 →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여기 ‘하나님이여 일어나사…’라고 한 것은, ‘일어나, 일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위정자와 재판관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혼란해졌고, 불신이 팽배해졌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나셔서 정리하시고 바로 잡아달라는 간구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인 동시에,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힘이 있다면, 그 힘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힘이 세니 밀어붙이면 된다는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힘 있는 자의 ‘포용과 관용’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대입니다. 빌 4장의 말씀을 오늘 결론의 말씀으로 드립니다. 빌 4:5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멘.


나눔과 묵상


1. 재판관이나 통치자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공적인 사명은 무엇인지 나눠보고, 이와 관련하여 선진국과 후진국의 개념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대리 통치자입니다. 세상을 공평하게, 약한 자를 악으로부터 건지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대해 나눠봅시다. (모범: 욥 29:12∼17)


3. 땅의 터(도덕적 질서와 공의)가 흔들리면 세상은 어두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우리나라에 잘 세워지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이재영
2022-06-18
조회 297

제목: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삼상 26:1∼12)


내 삶에서는 기적이 일어나거나, 특별한 하나님의 응답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서운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기적이 없었던 다윗의 인생!

오늘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은! 당신이 친히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 메시아를 그의 후손으로 보내신 다윗의 인생에도, 평생 뚜렷한 기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향하여 ‘내 마음에 합한 사람’, ‘나의 신실한 종 다윗’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셨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물론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도 기적이고, 10년 넘게 사울 왕의 추격을 무사히 피해 다닌 것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 같은 기적’이었고, 다윗이 정말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을 때, 하늘에서 기적이 뚝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묵묵부답, 무응답으로 일관하신 적이 더 많았습니다. 왕에게 쫓겨 다니는 삶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때의 심정을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시 10:1 →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자신을 도와주고 힘을 주셔야 할 하나님이, 멀리 서시고 숨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습니다. 시편 13편에서도 다윗의 절규를 볼 수 있습니다. 시 13:1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혹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2. 기적으로 변장한 유혹을 거절한 다윗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다윗이 ‘아! 드디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구나.’ 생각할 만한 사건이 두 번 일어납니다. 먼저 오늘 본문 2장 앞인, 삼상 24장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엔게디’ 광야의 굴속에 깊이 들어가 숨었는데, 추격하는 사울이 그 굴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잡으려고 굴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용변을 보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환한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면 잘 보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은, 밝은 곳에서 들어오는 사람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볼일을 보고 있는 사울의 모습을 발견한 다윗의 군사들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순간 ‘아! 하나님께서 나의 형편을 돌보시고, 원수를 내 앞으로 보내셨구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셨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 조금 베었습니다. 아마 사울이 볼일을 보고, 시원한 그 굴에서 낮잠을 좀 잤던 것 같아요!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먹은 것입니다. 삼상 24:6 →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26장 본문을 보면,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다윗이 십 광야에 머물고 있을 때,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밀고해서 사울이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쫓아온 것입니다. 급히 출동하여 그곳까지 쫓아오느라 지친 사울과 군사들이 밤이 되자 정신없이 다 곯아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본 다윗의 심복인 ‘아비새’가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26:8 →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아비새의 이같은 요청에, 다윗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번 찌를 필요도 없다.’라는 말은 ‘단 번’에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대답은 역시 아니었습니다. 삼상 26:9 →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것입니다. 왕을 세우고 폐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인 것을 선포하고, 부하들을 또다시 말린 것입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아쉽기 그지없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은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후대 역사가들은 평가합니다. 쉽게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회를 주시는구나! 나에게 기적을 베푸시는구나!” 이렇게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다윗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승리입니다.


3. 세상 원리로 합리화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른 다윗

사실 생각해 보면,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만한 충분한 근거와 명분도 있었습니다. 우선, 다윗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삼겠다는 분명한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을 죽이면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므로, 하나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괴롭히고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죽여도 다윗에게는 정당방위(正當防衛)가 성립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변 사람들이 주장하는 ‘기회’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따랐습니다. 세상의 성공철학은 모든 ‘기회’를 다 이용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기회가 다 하나님의 기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잠 14:12 →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의 추종자들은 아주 중요한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삼상 24:4a →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지금 이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추종자들이 말한 대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은 전혀 없습니다. 이 말은 그저 다윗의 추종자들이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고 있는 상황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추론’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자주 범하는 잘못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상상력을 동원해 추론해내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거나,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는 일들이 많습니까? 하지만 이런 것은 기회주의, 이기주의, 편의주의 세상이 만들어낸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명분과 기회가 주어질지라도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또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조금 늦더라도 ‘정도’(正道)를 걸으시기 바랍니다. 손해가 되더라도 ‘정직’(正直)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핍박과 멸시를 받더라도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펼쳐주시는 참된 기회가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한 다윗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우해 주셨습니까? 사울의 손으로부터 철저하게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셔서, 다윗이 마침내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단지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왕이 되었으며, 그래서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롬 12:17∼21을 보겠습니다. →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씀의 골자는!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우리가 직접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선대 함으로써 우리의 할 일을 다 하면, 그 후의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악에게 지지 않는 방법이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의 모범을 따라서 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② 다윗을 위대한 왕으로 높이 세우시고, 그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 같이, 여러분의 가문에서도 위대한 신앙인들이 태어나고 길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응답이나, 여러분의 인생에 임했던 기적같은 일이 있었다면 나눠보고, 그것이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2. 다윗은 어떻게 보복하고 싶은 무서운 유혹을 물리치고, 사울을 품을 수 있었을까요? ‘기회’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따랐던 다윗을 보며 자신의 고백을 나눠봅시다.


3. 자기 합리화를 위해 ‘말씀을 인용’하거나,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먹인 경우 가 있습니까? 이런 기회주의, 이기주의, 편의주의가 건강한 신앙생활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