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용서하고 또 용서함으로! (마 18:21∼35)
1. 용서와 회개는 치유의 양대 축
인간은 누구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용서를 받기도 해야 하고, 용서를 베풀기도 해야 합니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참된 회개가 없이는 용서도 치유도 불가능하단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회개는 두 가지를 충족해야 합니다. → ① 첫째,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② 둘째, 내가 지은 죄로 인해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내가 잘못했다’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되고, 사람에게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도 해야 하고, 사람에게도 해야, 완전한 회개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자와 같이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구하지 않고’ ‘죄’에 대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문제입니다. → ① 국가적으로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 어린 ‘사죄’가 없는 것이고요 ② 사회적으로는, 학교폭력(학폭) 가해자의 ‘용서’를 구함이 없는 것입니다.
가해 국가나 개인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하고, 피해 국가나 개인은 그 ‘사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면! 깨어진 관계는 회복되고, 마음까지 치유되어 샬롬의 새 세계를 펼쳐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혹 이 자리에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구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어서 속히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서 심령의 평안과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용서’를 구하는데도 용서해 주기를 거절하고 마음을 닫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어서 속히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용서’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11:25 →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옥 가야 마땅할 우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은혜 입은 자로서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용서해 주고!’ ‘용서받고!’ 이를 통해, 완전한 치유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럼, 용서는 어디까지?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그리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대답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 18:22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은 산술적으로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일에 횟수의 제한을 두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마음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이나 기준에 상관없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받은 용서가 취소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으로 6,000일, 즉 16년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니 160,000년을 일하고 한 푼도 쓰지 않아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빚진 자가 갚지 못하자, 임금이 뭐라고 말합니까? 마 18:25b →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종이 말합니다. 마 18:26 →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임금의 마음을 달래보고자 하는 종의 간절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임금이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마 18:27 →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여기 탕감했다는 말은, 빚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삶은 도저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그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엡 2:4) 이것이 바로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가 ‘아무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은혜중의 은혜요, 용서 중의 용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으로 인해 용서받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상대를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보면, 용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엡 4:32 →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때때로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기 마음속에 기준을 정해 놓고 상대방을 용서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선을 정해 놓고 여기까지는 용서하고, 그다음은 ‘절대 안 된다’라는 기준은 참된 용서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한없는 용서를 생각하면서 제한 없는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용서의 사람 요셉을 본받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를 실천한 위대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으라면 바로 ‘요셉’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아픔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빨을 갈 일입니다. 평생을 복수로 채워도 다 채우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꿈 이야기를 하고, 잘난 체했어도! 어떻게 어린 동생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에 처넣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동생을 꺼내주는가 싶더니 노예상에게 돈을 받고 팔아먹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었지만,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창 45:5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팔려 온 자’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임을 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팔려 온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계획이 있어 나를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팔려 온 자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 손해를 끼친 사람조차,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45:7∼8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비록 자신을 팔아먹은 용서하지 못할 형들이었지만, 오히려 생명을 살리고 후손을 이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요셉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처럼 ‘사명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아픔과 상처들이 아직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이제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았습니다.
더는 미움과 분노와 증오로 인해 지옥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이제 용서를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시도하십시오. 더는 과거의 얼룩진 상처를 보지 마시고, 그 과거의 아픔과 상처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아드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과 사명을 바라보며 미래를 향해 전진하십시오.
용서는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출발점입니다. 용서는 새로운 희망의 씨앗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들의 아픔과 상처를 감싸주시고 치료해 주시십니다. 그 안에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의 응어리가 영육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경험한 바가 있다면 나눠보시고, 믿음 안에서 푸는 방법인 용서와 회개에 대하여 나눠봅시다.
2. 용서의 사람 요셉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누가 먼저 풀고, 누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할 사람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3. 당신이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한 죄, 풀어야 할 인간관계, 풀어야 할 마음의 상처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속히 해결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십시오.
제목: 용서하고 또 용서함으로! (마 18:21∼35)
1. 용서와 회개는 치유의 양대 축
인간은 누구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용서를 받기도 해야 하고, 용서를 베풀기도 해야 합니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참된 회개가 없이는 용서도 치유도 불가능하단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회개는 두 가지를 충족해야 합니다. → ① 첫째,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② 둘째, 내가 지은 죄로 인해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내가 잘못했다’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되고, 사람에게만 용서를 구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도 해야 하고, 사람에게도 해야, 완전한 회개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자와 같이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구하지 않고’ ‘죄’에 대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문제입니다. → ① 국가적으로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 어린 ‘사죄’가 없는 것이고요 ② 사회적으로는, 학교폭력(학폭) 가해자의 ‘용서’를 구함이 없는 것입니다.
가해 국가나 개인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하고, 피해 국가나 개인은 그 ‘사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면! 깨어진 관계는 회복되고, 마음까지 치유되어 샬롬의 새 세계를 펼쳐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혹 이 자리에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구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어서 속히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서 심령의 평안과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용서’를 구하는데도 용서해 주기를 거절하고 마음을 닫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어서 속히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용서’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11:25 →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옥 가야 마땅할 우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은혜 입은 자로서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용서해 주고!’ ‘용서받고!’ 이를 통해, 완전한 치유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럼, 용서는 어디까지?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그리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대답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 18:22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은 산술적으로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일에 횟수의 제한을 두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마음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이나 기준에 상관없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받은 용서가 취소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으로 6,000일, 즉 16년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니 160,000년을 일하고 한 푼도 쓰지 않아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빚진 자가 갚지 못하자, 임금이 뭐라고 말합니까? 마 18:25b →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종이 말합니다. 마 18:26 →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임금의 마음을 달래보고자 하는 종의 간절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임금이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마 18:27 →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여기 탕감했다는 말은, 빚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삶은 도저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그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엡 2:4) 이것이 바로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가 ‘아무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은혜중의 은혜요, 용서 중의 용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으로 인해 용서받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상대를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보면, 용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엡 4:32 →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때때로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기 마음속에 기준을 정해 놓고 상대방을 용서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선을 정해 놓고 여기까지는 용서하고, 그다음은 ‘절대 안 된다’라는 기준은 참된 용서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한없는 용서를 생각하면서 제한 없는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용서의 사람 요셉을 본받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를 실천한 위대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으라면 바로 ‘요셉’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아픔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빨을 갈 일입니다. 평생을 복수로 채워도 다 채우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꿈 이야기를 하고, 잘난 체했어도! 어떻게 어린 동생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에 처넣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동생을 꺼내주는가 싶더니 노예상에게 돈을 받고 팔아먹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었지만,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창 45:5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팔려 온 자’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임을 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팔려 온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계획이 있어 나를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팔려 온 자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 손해를 끼친 사람조차,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45:7∼8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비록 자신을 팔아먹은 용서하지 못할 형들이었지만, 오히려 생명을 살리고 후손을 이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요셉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처럼 ‘사명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아픔과 상처들이 아직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이제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았습니다.
더는 미움과 분노와 증오로 인해 지옥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이제 용서를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시도하십시오. 더는 과거의 얼룩진 상처를 보지 마시고, 그 과거의 아픔과 상처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아드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과 사명을 바라보며 미래를 향해 전진하십시오.
용서는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출발점입니다. 용서는 새로운 희망의 씨앗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들의 아픔과 상처를 감싸주시고 치료해 주시십니다. 그 안에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묵상
1. 마음의 응어리가 영육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경험한 바가 있다면 나눠보시고, 믿음 안에서 푸는 방법인 용서와 회개에 대하여 나눠봅시다.
2. 용서의 사람 요셉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누가 먼저 풀고, 누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할 사람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자신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3. 당신이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한 죄, 풀어야 할 인간관계, 풀어야 할 마음의 상처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속히 해결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