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 말씀묵상지

이재영
2023-02-04

제목: 입과 귀의 신앙에서 행함의 신앙으로! (마 7:21∼27)


1. 믿음과 행함의 갈등?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부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본문의 의미를 어떻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여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말 심각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 7:21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선한 행위를 강조하시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요? 믿음을 가져도 선한 삶이 없다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여기 “믿음을 가져도, 선한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건가요?”라는 질문은 목사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받는 질문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여러 번 비슷한 질문을 받았고 설명을 해왔습니다만, 여전히 받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문제는 늘,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설명하는 저나 듣는 성도들이나, 그때마다 이해가 새로워질 만큼! 이 구원의 문제는 깊은 신비가 있는데 반하여, 우리의 이해의 폭과 깊이는 충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정답부터 말씀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100%!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2:8∼9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 에베소서 말씀뿐만 아니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성도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믿음으로 의로움에 이른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는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으로부터, 중세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통해 오늘까지 ‘개신교의 핵심 교리’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바울과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도 ‘선한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율법주의’를 거부한 것이지, 선한 행위 자체의 중요성을 거부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율법 무용론’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 행위는 은혜를 입은 자들의 삶에,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열리는 열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 7:16∼20을 통하여 ‘믿음은 나무’이고, ‘행함은 열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삶의 열매! 즉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보면, ‘그가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가 밝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즉 행함은 신앙의 정체성과 진위여부를 판별하는 시금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그의 자녀다운 삶으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온전함까지 나아가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 2:17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22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즉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나고, 행함으로 이어져야 생명이 있고 온전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함께 가야만 하는 관계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호수에서 작은 배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한 늙은 선원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이 젖는 한쪽 노에는 ‘믿음’, 다른 쪽 노에는 ‘실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승객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자! 한번 보십시오. 노인은 ‘믿음’이라는 노를 힘차게 저었습니다. 배는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맴돌았습니다. 이번에는 ‘실천’이라는 노를 저었습니다. 역시 배는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맴돌 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두 개의 노를 함께 저었습니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노인은 승객을 향해 잔잔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기독교인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믿음 없는 행위’와 ‘행위 없는 믿음’은 모두 제 자리를 맴도는 배와 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반드시 믿음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의 실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언어의 유희일 뿐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말뿐인 믿음의 허상

오늘 본문 22~23절을 보겠습니다. 마 7:22∼23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평생을 주님을 믿는다고 했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설교하고, 봉사했는데, 심지어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권능을 행했는데,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한 사람의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여, 주여!” 그냥 주여! 부른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강조하여 거듭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상당히 열정적인 신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또한, 이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사역도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의 고백을 거부하신 이유는, 말로는 주님을 불렀으되 삶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믿음이 바른 행실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이용만 했을 뿐이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권능을 행했더라도, 그것은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6:46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권능을 행했는지는 모르지만, 선하지 않고 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입술로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딤후 2:19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3. 참된 믿음은!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 말씀의 전반부에서는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대조했습니다. 이제 후반부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있고, 26절에는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마 7:24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6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네! 예수님은 이를 통해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평상시에는 그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고,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그 차이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 “너희가 내 말을 성경공부 때만 사용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너희는 모래사장에 집을 지은 미련한 목수와 같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말씀을 들은 대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심판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저 이렇게 믿어도 되려니!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때, 하나님의 심판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했는지? 아니면, 듣기는 했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았는지를 판가름할 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날은 언제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요, 참된 보상의 날이요, 결산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126:5~6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때에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는! 삶과 행함으로 스스로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속사회의 반(反)기독교적 정서가 높아진 것도, 실은 귀로만 듣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거짓 신앙인들 때문입니다.

참믿음을 가진 사람은! 신앙과 은총에 의지하여, 현실의 죄악과 탐욕과 부패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삶의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가 있는 참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께도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귀히 여김을 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인하여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 때문에 갈등해 본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믿음’이라는 노와 ‘실천’이라는 노를 함께 저어야, 배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음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3.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살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당신의 응답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