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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f Vision Elim Church

말씀묵상지

요약된 말씀으로 은혜를 되새겨 보세요.

김성윤
18시간전
조회 51

피로 적셔진 채색옷 (창 37:18∼24, 29∼36)

 

1. 꿈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요셉!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형제들의 미움을 받았고, 노예로 팔려 갔고, 가까운 사람에게 모함당하고, 배신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참으로! 꿈 때문에 눈물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사람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요셉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았던 사람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니엘, 바울,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대부분 외롭고 힘들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도 불구하고 ‘외로웠고’ ‘인정받지 못했고’ ‘환영받지 못했고’ ‘칭찬받지 못했습니다.’ 소위 재미있게, 멋지게, 신나게 인생을 살질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대여섯 가지를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나는 분명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려고 결심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감이 있습니까? ▸주의 일을 잘 감당하리라는 사명감이 있습니까? ▸믿음 안에서 천국의 소망을 분명하게 갖고 있습니까? ⇨ 그렇다면! ‘인정받지 못하고’, ‘칭찬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한다고 해서’ 외롭고 쓸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당연히 걸어야 할 길이 바로 그런 길입니다. 그러므로, 시기와 질투 속에서도 의연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을 품고 꿋꿋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시기와 질투: 나를 태우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불길

여러분들에게 권면합니다. 부모님들은! 유별나게 정이 가고 사랑이 가는 자녀가 있다 하더라도, 편애하진 마시길 바랍니다. 형제자매 간에 시기와 다툼을 일으켜, 행복하고 건강해야 할 관계를 깨뜨리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편애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자녀들에게도! 권면합니다. 형제자매 간에 시기와 질투심을 갖는 것도, 우월감이나 특권의식을 갖는 것도,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문제만 일어나고, 삶의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낭비시킬 뿐입니다.

결국 요셉에게 문제가 터졌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불러 심부름을 시킵니다. 형들이 양을 치고 있는 ‘세겜’으로 가서 안부를 알아보고 오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도단’까지 가서야 양을 먹이던 형들에게 도착합니다. 그런데 형들은 멀리서도 요셉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채색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 채색옷은! 요셉에게는 ‘사랑의 징표’였으나, 형들에게는 ‘비교와 박탈감’의 상징이었고, 분노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형들의 눈에 보인 것은 ‘동생 요셉’이 아니라, 그가 입은 ‘채색옷’이었습니다. 그 옷은 형들에게 “너희는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라는 ‘거절감’을 끊임없이 속삭여 왔던 옷입니다. 시기심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가졌을 때 느끼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시기심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 존재 자체를 지워버려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합니다.

본문 1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 37:18 →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네! 요셉을 발견한 형들은 ‘야! 저기 요셉이 온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저기 꿈쟁이가 온다.’ 그랬습니다. 창 37:19 →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연스런 결론은,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져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함께 그의 꿈도 죽여, 구덩이에 던져버리자는 것입니다. 창 37:20 →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그렇습니다. 이처럼, 시기와 질투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집니다. 이는 단순히 동생이 미운 수준을 넘어,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비전과 장래까지도 짓밟아버리겠다는 오만함과 분노의 표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질투는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잘난 사람을 시기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결국 내 영혼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나에게 주신 수많은 은혜의 채색옷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기심은! → “마치 독약을 자기 자신이 마시고, 상대방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참 기가 막힌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도 ‘나보다 잘나가는 동료’, ‘나보다 자녀가 잘된 친구’를 보면서, 그를 던져버릴 마음의 구덩이를 파고 있지는 않습니까?

질투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먼저 삼키는 불길임을 꼭 기억하시고, “주여! 나로 시기나 질투에 매인 종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나에게 주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늘 이렇게 기도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르우벤의 선택: 악의 흐름을 끊어내는 불완전하지만 귀한 용기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 분노로 인해, 요셉은 정말로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이 살벌한 모의가 진행되던 순간, 12형제 중의 첫째! 장자인 르우벤이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37:21∼22 →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참 장자다운 말이고, 형제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형제들 간에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 아버지의 첩 빌하 그러니까 라헬의 여종이자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와 동침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해서, 장자의 권위와 신뢰를 대부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형제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기를 냈습니다. “요셉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피를 흘리지 말자”라는 그의 제안은! 사실 요셉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습니다. 이런 르우벤의 중재는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악행을 완전히 막아내지도 못했고, 결국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가는 것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이 작은 노력을 소중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런 르우벤의 중재가 없었다면, 요셉은 그 자리에서 형제들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도 ‘르우벤’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비난의 화살을 쏘고, 모두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소외시키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 “이것만은 하지 말자”라고 말하며, 그를 보호하는 쪽으로 흐름을 돌리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학교 폭력이 일어나는 현장에는 세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Bystander)입니다. 방관자는! 괴롭힘과 따돌림, 폭력의 현장과 그 상황을 보고도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 그런데 최근에는 ‘업스탠더’(Upstander)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 이 업스탠더는! 행동하는 사람으로 ‘옳지 않은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고 돕는 사람’입니다. 즉, 모두가 침묵하거나 동조할 때 “그건 잘못된 거야”라고, 작게나마 외치는 사람입니다.

르우벤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완벽하게 요셉을 구해내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의 악한 흐름을 끊어낸 ‘업스탠더’였습니다. 비록 르우벤의 목소리가 작고, 그의 처지가 당당하지 못했지만, 생명을 지키기 위한 그 한 마디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악의 흐름을 끊어내는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찢긴 채색옷 위에 쓰시는 새로운 역사

결국 요셉은! 구덩이에서 끌어올려져 은 20에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갑니다. 형들은 숫염소를 죽여 그 피를 요셉의 채색옷에 적셔 아버지 야곱에게로 보냅니다. 야곱은 그 피 묻은 채색옷을 보며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하며, 옷을 찢고 통곡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악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시기심이 승리했고, 거짓말이 성공했으며, 요셉의 꿈은 노예 시장의 먼지 속으로 사라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비극의 이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의 ‘채색옷’은 찢겼지만, 하나님은 요셉에게 ‘보이지 않는 은혜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판 것은! ⇨ 그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지만, 하나님은 ⇨ 그들을 통해 요셉을 애굽이라는 거대한 무대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훗날 요셉은 고백합니다. 창 50:20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함과 실수, 심지어 르우벤의 서툰 중재까지도 재료로 삼아, 구원의 카펫을 짜 내려가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피 묻은 채색옷’만 남아 있는 것처럼 절망적입니까? 하나님은 그 찢긴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미 시작하셨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요셉’의 채색옷을, 시기와 질투로 찢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르우벤처럼! 생명을 지키고, 화평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개입과 중재가! 누군가에게 살 길이 열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심한 질투심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원인은 무엇이었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느낀 바를 나눠봅시다.

 

2. 르우벤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생명을 지키려 했습니다. 혹 내 주변에 나의 ‘한 마디’나 ‘작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지 나눠봅시다.

 

3.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찢고 그를 짓밟으려 했으나, 결과적으론 도운 셈이 되었습니다. 내 삶에서 고난이 결과적으로 축복이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6-05-02
조회 104

쓰임 받는 자와 둔해진 자 (삼상 3:1∼10)

 

오늘 본문에는 두 인물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등장합니다. 수십 년간 제사장으로 섬겨왔으나 영적으로는 침체기에 접어든 ‘어른’ 엘리와, 이제 막 성전에서 자라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기 시작한 ‘아이’ 사무엘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가 엘리처럼 둔해진 신앙의 잠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아니면, 사무엘처럼 주님의 음성에 설레는 마음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영적인 민감함과 vs 영적인 둔감함의 차이

본문은 당시의 영적인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삼상 3:1b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것은 하나님이 침묵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셨지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 안테나’가 고장 난 시대였다는 뜻입니다.

그 중심에 엘리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2절을 보면, 엘리의 눈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상 3:2 →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져 잘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노안(老眼)으로 잘 보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통찰력이 흐려졌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보지 못하는 영적인 시각장애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3:3 →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워 있었으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는 성소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민감함은 ‘어디에 머무는가?’에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안락함에 누워 있으면! 영적으로 둔감해지지만, 주님의 보좌 앞에 머물기를 힘쓰면! 작은 음성에도 민감해질 수 있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유명한 항해사 제임스 쿡 선장의 일화입니다. 한창 항해 중이던 어느 날, 일등 항해사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습니다. “선장님! 나침반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가면 암초에 부딪힐 위험이 매우 큽니다!” 쿡 선장은 항해실로 가서 나침반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침반 자체가 고장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살펴보니, 누군가가 나침반 바로 옆 작은 선반에, 무심코 그리 크지 않은 쇠붙이 하나를 놓아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작은 쇠붙이에서 나오는 미세한 자력이, 거대한 범선의 방향을 조금씩 그러나 치명적으로 바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꼭 이와 같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멀리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타성에 빠지고, 자녀들의 죄악을 방치하는 등, 마음속에 ‘작은 쇠붙이’ 같은 세상의 가치관들을 하나둘 허용하다 보니, 결국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대한 방향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작은 쇠붙이’에 해당할 수 있는 5가지 실천적 영역(생각, 관계, 습관, 가치관, 무감각)들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① 먼저, 생각과 태도의 영역입니다. 사소한 자기합리화,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타협, 반복되는 불평과 냉소, 다른 사람에 대한 미묘한 정죄와 비교의식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② 관계에서도 비슷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쌓아두는 미움, 험담을 가볍고 자연스럽게 하는 습관,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 혹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되는 특정 인간관계 등이 우리 신앙의 방향을 흐릴 수 있습니다.

③ 습관과 생활 방식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바쁠 때는 건너뛰어도 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 끊임없이 연속극이나 유튜브에 빠져 있는 생활, 쉬지 않고 과도하게 일하거나 반대로 무기력에 빠져있는 생활 리듬도 누적되면 인생의 방향을 바꿉니다. ④ 가치관의 영역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성공, 돈, 인정, 외모, 편안함 같은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작은 쇠붙이’가 됩니다. 처음엔 최종적인 인생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어느새 의사결정의 기준을 바뀌어 버리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⑤ 또 하나는 무감각입니다. 죄나 잘못에 대해서 처음에는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반복되면서 “이 정도는 다 그렇지”하고 둔해지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방향을 가장 크게 바꾸는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 “핵심은 ‘크기’가 아니라 ‘지속적인 영향력’입니다. 눈에 띄는 큰 문제보다, 매일 조금씩 기준을 틀어버리는 요소가 더 위험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그 작은 쇠붙이와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영적 민감함을 흐리게 함을 깨닫고, 과감히 떨쳐버리고 벗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의 차이

하나님께서 밤중에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어린 사무엘은 아직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무엘의 반응 속도입니다. 그는 그 부름의 소리를 듣자마자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3:4∼5 →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여러분, 한밤중에 자고 있는데 누군가 자꾸 깨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짜증이 날 법도 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세 번 모두 즉시 일어나 달려갔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평상시 사무엘의 엘리 제사장을 향한 충성스러운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충실한 태도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충실함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쓰임 받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반면, 엘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세 번이나 아이가 찾아올 때까지,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8절에 가서야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닫습니다. 삼상 3:8c → “(그때 서야)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영적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에, 가장 늦게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찬양을 통해, 혹은 이웃의 아픔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때, 우리는 사무엘처럼 즉시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엘리처럼 한참 지나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들고 일어섭니까? 영적인 민감함과 민첩성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성공 신화, 돈의 소리, 건강 증진의 소리에는 너무나 민감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음성에는 얼마나 집중하고 계신지요? 사무엘은 육신의 잠 속에서도 하나님의 세밀한 부르심을 들을 만큼, 그 중심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이 쓰임 받게 된 이유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하고 민첩성이 있는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경청의 태도

세 번째 부르심 끝에, 엘리는 사무엘에게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삼상 3:9 →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비록 엘리는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사무엘에게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하는 법을 가르쳐 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설사 우리 자신도 엘리처럼 영적으로 둔해졌을지라도!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연결해 주는 가정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부족해도, 내 자녀로 하나님 음성을 듣게 해주는 역할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오늘 ‘어린이 주일’의 의의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가르침대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립니다. 삼상 3:10 →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히브리어로 ‘듣다’라는 단어 → ‘샤마’(שָׁמַע)는 단순히 소리를 인지하는 것을 넘어 → ‘경청하고 순종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옮길 준비가 된 ‘종’의 자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말씀하옵소서”가 아니라 “주님, 제 말을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내 계획을 승인해 달라는 일방적인 통보 형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기도는!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경청’이어야 하고,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으로 끝나지만, 이후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했던 사무엘은! 이스라엘 전체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선지자로 쓰임 받게 됩니다.

엘리와 사무엘의 차이는 단지 나이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깨어 있음’의 차이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이 부르심 앞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혹시 ‘직분과 경력’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엘리처럼 둔감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부족하지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라고 응답하며,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눔과 묵상

 

1. 나침반을 틀어지게 했던 ‘작은 쇠붙이’처럼, 최근 나의 영적 방향을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지속적으로 방해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나이가 들수록 신앙이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신은 예전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더 설레고 있는지? 아니면 직분과 경력 뒤에 숨어 ‘익숙함’이라는 잠에 빠져 있는지? 정직하게 나눠봅시다.

 

3. 엘리는 비록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사무엘이 그 음성에 반응하도록 도왔습니다. 부모 혹은 기성세대인 우리가 해야 할 제사장적 사명에 대해서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6-04-25
조회 145

잠 못 이루는 밤에 (창 28:10∼22)


야곱은 배고픈 형 에서로부터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샀습니다. 야곱의 평생 한이었던 장자권을 양도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아버지 이삭에게 ‘장자의 축복기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엄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서, 눈이 어두워진 이삭을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받게 됩니다. 마침내 야곱은 그렇게 원하던 ‘장자의 권리’를 다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형 에서가 이를 갑니다. “이놈이 나를 두 번이나 속였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만 하면, 내가 이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창 27:41 →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그러자 엄마 리브가는 야곱에게 형 에서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하란에 살고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엄마 리브가의 친정인 ‘하란’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보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창 27:45 → “에서의 노가 풀리면, 사람을 보내어 너를 불러오리라.” 그랬지만 현실은! 리브가가 죽을 때까지 에서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고, 결국 야곱이 외삼촌 집으로 떠난 때가 엄마와 둘째 아들이 얼굴을 마주 본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1. 인간의 선택은 우리를 잠 못 이루는 밤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야곱에게 닥친 이런 ‘인생의 밤’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방법으로 축복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축복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눈앞의 유익을 붙잡기 위해서 서두르고, 때로는 정직하지 않은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는 문제가 잘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마음의 평안이 사라지고 불안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잠 못 이루는 밤’은! 단순히 환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없이 얻은 것,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루려 했던 것들이, 결국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중요한 계약을 따내기 위해 거짓 정보를 사용했습니다. 계약은 성사되었지만, 이후 그는 매일 밤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누군가가 알아챌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그는 계약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고 말았습니다. 평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감정에 따라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롭고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가 틀어지고 상황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그때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한 번만 더 생각했더라면, 인생의 밤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잘못된 선택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든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신앙인의 자세로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비록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이했다고 하더라도, 그 밤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실패까지도 용납하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먼저 다가와 만나 주시는 하나님.

지금 야곱은 기약 없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유업을 자기가 잇고 싶어 했는데, 유업을 잇는 것은 고사하고 집에서 쫓겨나 거의 유배와 다름없는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익숙한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땅, 하란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여정 내내, 거의 노숙을 했습니다. 베개도 없으니 돌멩이를 주워다가 베고 잤는데, 광야의 밤은 몹시 추웠습니다. 사막기후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막막함 가운데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신 겁니다. 이것이 소위 ‘벧엘 사건’입니다.

야곱이 절망 속에서 잠들었을 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가 보이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를 오르내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다리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야곱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회개 기도를 드린 적도 없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지쳐 잠들었을 뿐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과거를 들춰내어 꾸짖지 않으십니다. 대신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너를 지키겠다.” ▸“너를 반드시 돌아오게 하겠다.”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야곱은 도망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여전히 당신의 계획 속에 있는 소중한 자녀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을까요? 그것은 야곱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야곱 안에 있었던 ‘신앙의 열정’을 보신 겁니다. 무슨 열정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가겠다”라는 열정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그분들의 신앙 유업을 내가 이어가고 싶다는 그 열정, 이걸 하나님이 보신 겁니다. 그래서 그 광야 가운데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이 선포됩니다. 창 28:13~15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용으로 보면, 이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언약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과 거의 똑같은 언약을, 야곱과 다시 맺으신 겁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때, 야곱이 그렇게도 원했던 ‘영적 유산,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에게로 계승’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야곱이, 조상의 유업을 물려받은 것은!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거나, 속여서 축복을 받거나 해서 계승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야곱아!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비록 내용은 거의 같을지라도, “이것은 아브라함과의 언약도 아니고, 이삭과의 언약도 아니라, 내가 너 야곱과 맺은 언약이다!”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바로 이런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역사가 길어지면서 ‘모태신앙’인 분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우스갯소리로 ‘모태신앙’이란? ‘못해 신앙’이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양만 있고, 능력은 없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냥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태신앙인 사람은! 반드시 개인적인 ‘벧엘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유업이 계승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고, 믿음의 환경 가운데서 살았어도, 그것으로 내가 곧 믿음의 계승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내가 만난 하나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벧엘 사건! 개인적으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그 이후로, 야곱에게 엄청난 힘이 됐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아무 소망도 없고 도대체 내가 살 건지 죽을 건지도 모르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이런 믿음과 확신이! 야곱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진짜 힘이 되어서, 모든 위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 모두!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벧엘신앙의 체험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임재는 절망의 장소를 소망의 성소로 바꿉니다.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이제 ‘환경’이 아닌 ‘하나님’을 베개 삼아 일어서게 됩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고백을 보십시오. 창 28:16 →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세로로 세워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명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다음 날 아침 형 에서의 화가 저절로 풀리거나, 가야 할 먼 길이 단축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황은 그대로’였습니다. 여전히 그는 도망자였고, 여전히 광야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내면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두려움’이 그의 베개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힘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베개 삼아 평안히 주무십시오. 야곱은 그 밤 이후로,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여전히 갈 길은 멀고 험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그를 붙잡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잘못된 선택이나 결정으로 인생의 ‘잠 못 이루는 밤’이나 ‘광야’를 경험하신 적이 있나요?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나눠봅시다.

 

2. 야곱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내 삶 속에서도 ‘내가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찾아와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면 나눠봅시다.

 

3. 야곱이 돌베개를 기둥으로 세웠듯이,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을 어떻게 ‘믿음의 기념비’와 ‘예배와 감사의 제목’ 으로 바꿀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6-04-18
조회 168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창 25:23∼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의 순간적인 선택으로 그의 인생 전체가 어떻게 바뀌게 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종종! 길고 장대한 이야기보다, 아주 짧은 ‘순간의 선택’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드러내 줄 때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중요한 영적 진리’를 붙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육체의 욕구 때문에 쉽게 영적 가치를 팽개쳐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 당시 장자(Firstborn, 맏아들)는 가문의 대를 잇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법적·경제적·종교적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성경학자 카일(Keil)과 델리치(Delitzsch)에 의하면 ‘장자의 4가지 핵심 특권과 권리’는 ① 두 몫의 상속권 (Double Portion of Inheritance) ② 가문의 지도권과 통치권 (Leadership and Authority) ③ 영적 제사장 직분과 거룩한 구별 (Spiritual Sanctification) ④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을 권리 (Father's Special Blessing)입니다.

에서도 같은 문화권 속에서 살았기에, 이런 장자의 ‘특권과 권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고, 그것은 단순한 재산 이상의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장자인 자신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과 연결된 자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는 통로라는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장의 배고픔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육체적 욕구가 그의 판단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중요한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아는 대로 항상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피곤하고, 지치고,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 우리는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가 힘들 때, 배고플 때, 외로울 때, 분노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육체와 마음의 상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런 때에 나는 실수할 수 있고, 신앙인답지 못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스스로 알고, 경계해야 합니다.

즉, 힘들고 배고프고 외롭고 분노할 때야말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때이고, 마음을 지켜야 할 중요한 때라는 것을, 일부러 인식해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의식의 각성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육체적인 피곤함과 감정의 흔들림으로 인해서, 쉽게 영적 가치를 팽개쳐버리고, 엉뚱하게 가치 없는 선택을 하는 우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의 욕구 때문에, 쉽게 영적 가치를 내팽개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선택은 우리 인생을 수렁으로 몰고 들어가고, 실패의 인생으로 이어지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민한 분별력과 영적 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영적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선택은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동생 야곱은! 장자권의 특권과 그 복이 무엇이며 그 가치가 어떠한지를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형 에서가 장자인 이상, 자기가 그 장자권을 뺏을 수 없다는 것과, 설사 뺏으려 해도 아버지가 형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형 에서가 육체적인 힘도 훨씬 더 강했기 때문에, 질투심을 갖고 있었을 뿐 어찌할 뾰족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야말로 생각지도 않은 기회가 야곱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형 에서가 야곱이 요리한 팥죽을 달라고 했을 때, 그럼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라고 말한 것이,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치밀한 계획 가운데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사냥터에서 기진맥진해서 돌아온 한 형 에서에게 ‘장난 반, 진지함 반으로’ 그냥 한 번 던져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에서입니다. 그렇게 던져본 말을! 어리석게 덥석 물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32절입니다. 창 25:32 →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 볼 수 있는 에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장자의 명분을, 죽 한 그릇보다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현실의 배고픔에 미래의 축복을 쉽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한 번 던져본 말에 형 에서가 걸려들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에서에게 ‘그럼 맹세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에서는 생각 없이 그냥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창 25:33 →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그는 동생에게 낚인 줄도 모르고, 맹세까지 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의 평가가 다음절에 이어집니다. 창 25:34 →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성도 여러분! 이런 에서처럼 현실적인 것, 물질적인 것, 먹고 사는 문제가 영적인 가치보다 앞설 때,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든! 모든 것을 잃고 망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매일 이와 같은 선택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앞에도 ‘죽 한 그릇’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앞의 편안함일 수도 있고, 당장의 이익일 수도 있으며, 감정적인 만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선택은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창 25:34b →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 표현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에서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덜 중요한 것’과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단순한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왜곡이고 그에 따른 선택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동일한 위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더 쉽게 반응합니다. 당장의 이익, 눈앞의 기회, 즉각적인 만족은 매우 강력한 유혹이 됩니다.

우리의 선택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에서는 그 순간에는 배고픔을 해결했지만, 그는 평생 장자권을 잃어버린 아픔을 안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영적인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쉽고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가장 무겁고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은혜로 일하시지만 선택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지만,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며, 그 선택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성취되는 ‘신비로운 조화’의 관계, 즉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 욕구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었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이후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그것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고 선언합니다. 히 12:16∼17 →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히 팥죽을 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거룩한 것을 속된 것과 바꾸는 가치의 왜곡을 의미합니다. 에서는 영원한 언약 즉, 장자권을 일시적인 물질 즉, 팥죽보다 아래에 두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책임은! 바로 이 ‘가치 부여’에 있습니다. 무엇을 더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덜 귀하게 여기느냐가 그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며, 그 결정에 따른 결과는 고스란히 본인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책임을 그냥 없던 것으로 해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지만,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역사적·시간적 결과’까지 모두 삭제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를 받아주시지만, 그가 허비한 세월과 잃어버린 기회는 되돌려주지 않으십니다. 에서는 눈물로 구했으나, 회개할 기회! 즉 결과를 뒤집을 기회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선택의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선택의 자리에서 언제나 주저 없이 하나님을 선택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선택으로 믿음을 지키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가치를 붙드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며, 결국 우리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는 길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는 최근에 육체적으로 지치거나 감정적으로 예민해져서 ‘팥죽 한 그릇’과 같은 유혹 앞에서 나쁜 선택을 했었다면 나눠봅시다.

 

2. 죄를 ‘가치의 왜곡’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내가 영적 가치(예배, 말씀, 기도, 공동체 등)를 가볍게 여기고, 세상적인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긴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3.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받은 영적인 ‘장자의 특권’ 중(① 두 몫의 상속권 ② 가문의 지도권과 통치권 ③ 영적 제사장 직분과 거룩한 구별 ④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을 권리) 가장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특권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6-04-11
조회 140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 (창 22:1∼14)

 

창세기 22장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 앞에 선 아브라함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실 때는, 그 시험을 통과할 힘과 함께, 그 너머에 숨겨진 ‘축복의 숫양’을 준비해 두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첫째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는 뜻이요, 둘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가져가는지 유심히 살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준비만 해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축복을 받아 누리는지 지켜보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첫째, 순종의 3일 길을 걷는 자에게는 준비된 것을 보는 ‘눈’을 주십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 22:1a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은 넘어뜨리기 위한 ‘유혹’이 아니라, 믿음을 드러내고 연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테스트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설명되지 않아도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해하고 나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을 향해 3일 길을 걷는 동안 그의 마음은 무너졌지만, 그의 발걸음은 순종의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80km가 넘어, 꼬박 사흘이 걸리는 길입니다.

성경에서 이 ‘3일’은 단순한 날 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한계점, 우리가 넘어야 할 고비의 끝을 상징합니다.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아브라함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돌아가자! 이런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3일의 고비를 끝내 넘겼습니다.

오늘 성경에 중요한 단어, 키워드가 하나 나옵니다.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된 단어인데, 바로 히브리어로 ‘라아’(ha;r;)라는 단어입니다. → ‘보다’, ‘바라보다’라는 말로, 영어로는 ‘see’ 또는 ‘look’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영어로 ‘see after’ 또는 ‘look after’라고 쓰면! →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돌)봐 준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전에도 ‘보아 주다’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거나 힘이 되어 주는 것” 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봅니다.’ 그리고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도 ‘보아주십니다.’ 먼저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창 22:4 →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기 처음 ‘라아’란 단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를 보나요? 그곳이 어딥니까? ‘모리아 산’이고 오늘 14절에 표현하고 있는 대로 ‘여호와의 산’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곳을 바라보면서, 누구를 생각하면서 보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냥 ‘산’을 보는 게 아니라, 믿음의 눈을 들어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로다!” 하는 마음으로 그 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기대와 소망! 믿음!이 8절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창 22:8 →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이레)하시리라 하고…” 여기 ‘준비하시리라’ 했는데! → ‘이레’(ha;r;)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라아’(ha;r) ‘보다’라는 단어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아주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는 말은 →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보아주실 거야!’ ‘도와주실 거야!’

네! 아브라함은 지금 눈을 들어서 자기를 ‘보아주시는 하나님!’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요?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하시지만, 우리가 시험당할 때 우리를 ‘보아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너 잘하나 한번 보자!’ 이렇게 뒷짐 지고 그냥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잘할 수 있도록 돌봐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준비하심은,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들고 있는 인생의 계산기를 내려놓고, 순종의 3일 길을 걸어 보십시오. 그때 비로소 ‘여호와 이레’의 지도가 펼쳐질 것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통과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은 3일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내리치려는 순간, 하나님이 다급하게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창 22:12b →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오히려 나에게 손해를 주는 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지만, 오래도록 소원을 들어주시지도 않고, 나중엔 가장 소중한 아들까지도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본래 모습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참 좋다!” 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통째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을, 아브라함을 위해 이삭을, 이삭을 위해 리브가를, 야곱을 위해 이스라엘을, 요셉을 위해 애굽의 총리 자리를, 에스더를 위해 왕후의 자리를, 심지어 요나를 위해 지중해 깊은 곳에 물고기까지 예비해 두신 분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성도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 드리기 힘든 ‘이삭’은 무엇입니까? 정성껏 키워온 자녀입니까? 평생을 바쳐 일군 사업체입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명예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들을 우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이 요청하시면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를 테스트 하십니다. 그리고 그냥 테스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테스트! 시험을 잘 통과하는 자에게 주실 아름다운 복을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 두고 계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움켜쥔 손을 펴지 않으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을 볼 수도 없고, 그것을 잡아 제물로 드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이삭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여호와 이레’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완성된 예비하심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양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할 때 올라왔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 아래에서부터 장작을 메고 올라올 때, 산 반대편에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숫양이 이미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3일 길의 과정 중에 포기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3일이 일 년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십 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거기까지만 가면! 예비해 두신 축복을 받을 수 있는데, 중간에 그냥 돌아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 장인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조금만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조금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이 덜커덩 손에 잡힌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은 수풀에 걸린 숫양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의 인생 반대편 언덕에서 축복의 숫양을 몰고 오고 계십니다. 13절입니다. 창 22:13 →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봅니다. 뭘 봤습니까? 한 숫양이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4절도 보겠습니다. 창 22:14a →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네! ⇨ “그 땅 이름은,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는 곳 하나님이 ‘보아주신 곳!’ ‘돌봐주시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정리해 보면! 믿음은!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신뢰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 이레’의 가장 깊고도 완전한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수풀에 걸린 숫양이 이삭을 대신했듯이, 갈보리 언덕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만 생각하면, 그것은 ‘저주이고 죽음이고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 뒤에 ‘부활과 영생’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이 확고하게 믿어지고 영적으로 보여야! 우리는 순종할 수 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관계’나 ‘모임’은 무엇이며,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얻는 유익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이삭’을 요구하셨습니다. 현재 내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거나, 너무 소중해서 하나님께 맡기기를 주저하는 ‘나만의 이삭(자녀, 건강, 사업, 명예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이나 기도의 제목 중 ‘3일 길의 고비’를 지나는 것 같은 일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처럼 여호와 이레의 체험이 있었다면 나눠봅시다.

김성윤
2026-04-04
조회 132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찾는 것 (요 20:1∼18)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역사적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이들의 심령은! 부활에 대한 기대와 소망보다는, 상실감과 혼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그 아침에 사람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가?’라는 주관적인 갈망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 ‘마리아나 제자들이 찾고자 했던 것’과 vs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물’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역시, 매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만, 각자의 기대와 바람은! 주님이 의도하시고 원하시는 바와는 아주 동떨어진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붙잡아야 할 ‘참 신앙의 실체’는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1. 우리는 죽은 예수(과거의 유물)를 찾으나, 하나님은 살아 계신 주(현존의 능력)를 만나게 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간절했지만, 그 간절함의 대상은 놀랍게도 ‘살아계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의 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부활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이의 시신에 향유를 부어 자신의 마지막 정성이라도 기울이며, 그 곁을 잠시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도 갸륵하고 지극한 마음이긴 하지만, 정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주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부활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의 모습 속에는 이런 ‘무덤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을 저는 ‘박물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박물관에는 지금 살아 있는 것들이 있는 게 아니라, 지나간 유물, 과거의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박물관의 유물들’을 구경하면서 그냥 지나갑니다. 그리고 ‘아! 좋다. 대단하네.’ 감탄할 따름입니다.

이런 박물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대표적인 현상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 ① 신앙의 기복적 도구화: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관심 없고, 반대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예수님이나, 지친 마음을 달래줄 ‘위로용 예수님’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② 박제된 교리: 예수님에 대해서 머릿속의 지식이나, 과거의 뜨거웠던 체험 속에 가두어 두고 있지, 오늘 살아 역사하는 동적인 신앙은 없습니다. ③ 형식적 종교성: 주일 예배 참석이나 헌금을 드리면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섬김과 봉사 전도 같은 일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도자기 명장’이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그 스승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레와 도구들’을 정성껏 닦아서 전시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도구들을 보며 감탄했지만, 그 전시관에서는 더 이상 단 한 점의 도자기도 빚어지질 않았습니다. 도구는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움직일 ‘살아있는 명장의 손’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똑같습니다. 찬란한 전통, 아름다운 찬양, 화려하고 잘 정돈된 예배당 같은 ‘도구’는 소중하지만, 그것이 주님 자체는 아닙니다. 오히려 미숙한 손이라도 움직여, 오가는 사람들이 보게 될 화단을 가꾸고, 화장실이나 유아실을 깨끗이 관리하는 섬김의 일을 하고, 성악가 같은 목소리가 아니어도 찬양대나 찬양단에 합류하여 함께 찬양으로 영광 돌리고, 두렵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전도지나 전도물품을 전하면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행복하세요.’라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기대를 뒤엎고, 빈 무덤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내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 향수’에 매달리지 말고, ‘인격적인 만남’ ‘삶에서의 만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내 필요에 따라 불러내는 손님이 아니라, 내 삶의 주권을 쥐고 계신 주인(Lord)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배의 형식을 붙잡는 정성보다, 그 ‘형식 속에 임재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을 갈망하며,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리라는 거룩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는 사건의 해답(이성적 이해)을 찾으나, 하나님은 말씀을 온전히 믿는 믿음(전적인 신뢰)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력 질주하여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 안을 샅샅이 조사하며,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세마포와 수건이 잘 정돈 되어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성적으로 추론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이 “보고 믿었다”고 기록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성경의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라고 덧붙였습니다. 요 20:8∼9 →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vs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 ‘보고 믿더라’는 말은! ‘말씀’에 기반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눈으로 ‘본 것’에 기반한 ‘불완전한 믿음’ ‘반쪽짜리 믿음’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내 이성과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납득이 되는 것만 믿으려 하는 ‘합리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전적인 믿음과 신뢰’를 요구하시는 분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상황이라는 안개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아니라,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지도 삼아 발을 내딛는 용기를 말합니다. 상황이 내 기대와 정반대로 흘러갈지라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부활 신앙입니다.

새벽 일찍 무덤으로 갔던 막달라 마리아나, 달려갔던 제자들은 실상 주님께서는 몇 번이나 ‘고난받고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말씀’ ‘성경’에 더욱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듣고 깨달아, 그 말씀의 부르심과 약속 위에 인생의 닻을 내리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는 잃어버린 과거(애착과 상처)를 찾으나,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파송의 미래)을 주십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이 곁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과거의 예수님, 즉 자신이 시중들고 돌보았던 ‘육신의 예수’를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울면서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요 20:16 →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주님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실 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김춘수의 꽃과 같은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눈이 떠져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또한 주님께 손을 뻗쳤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몸을 피하시면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20:17a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과거의 방식’으로는 주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과거의 예수님! 즉 자신이 시중들고 돌보았던 ‘육신의 예수님’을 되찾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은 이제 부활의 몸을 입은 분이시기에! ‘성령을 통한 소통의 방식’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는 주님과 소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과거로 돌아가거나, 현재에 묶여 있길 원치 않으심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20:17b →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 예수님은 마리아를 무덤가의 슬픈 여인으로 그냥 두지 않으시고, 인류 최초의 ‘부활의 증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사명의 자리로 밀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거룩한 등 떠 밈(Holy Push)’입니다. 이제 ‘나의 위로’를 구하는 단계에서, ‘타인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사명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찾아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단순한 마음의 평안입니까? 아니면 삶의 꼬인 타래를 풀어줄 기적입니까? 부활의 주님은!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너는 가서 내 형제자매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 명령 하십니다.

우리는 무덤의 종교에서 부활의 종교! 생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빈 무덤만 확인하고 허탈하게 돌아가는 종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세상으로 당당히 파송 받는 사명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일터에, 가정에, 고통의 현장에 살아계십니다. “가서 전하라!” 이 주님의 명령을 품고, 부활의 생명을 온 세상에 흘려보내는 거룩한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부활의 아침에 마리아와 제자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았듯이, 지금 나는 무엇을 가장 간절히 찾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바)인지 나눠봅시다.

 

2.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예전의 영광이나 혹은 과거의 상처나 실패라면 새로운 변화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창조적 미래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인지? 솔직하게 나눠봅시다.

 

3. 이번 부활절 이후, 내 삶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또한 ‘부활의 증인으로서 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자신의 결단을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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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을 닦고, 길을 닦아 보이다. (요 13:1∼15)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심으로, 그 제자들인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길’을 닦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 ‘시간적인 끝’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완전하게’ ‘최대로’ ‘목적을 이룰 때까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고 ▸중간에 멈추지 않는 사랑이며 ▸상대의 반응에 따라 바뀌지 않는 사랑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 계십니까? 곧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보통 큰 고난을 앞두거나, 누군가에게 배신당할 것을 알면 어떻게 반응합니까?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됩니다. 내 상처, 내 두려움, 내 억울함에 집중합니다. 즉 내 감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돌볼 여유는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길을 여신 ‘사랑의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발을 씻어 주는 대상 중에는 자신을 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고, 당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 할 베드로와, 결국엔 다 도망갈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 원수까지도 품는 ‘사랑의 길’을 먼저 닦아 보이신 것입니다.

하와이 몰로카이(Molokai)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던 다미안 신부는 33살의 나이로, 그 섬으로 들어가기를 자원해 700여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보게 됩니다. 그는 처음엔 나병 환자들에게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스스럼없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갔지만 “당신은 건강하고 깨끗하지만, 우리는 썩어가는 몸을 가졌는데, 당신이 우리의 고통을 어찌 알겠는가?”라며 냉소했습니다. 그러자 다미안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님 제가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저에게도 한센병을 허락하옵소서.”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다미안 신부도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첫 강단에 서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나병 환자 여러분!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가 ‘여러분’이 아닌 ‘우리’라고 부르는 순간! 온 회중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 발을 닦으신 것은!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우리의 ‘더러움’과 ‘낮음’ 속으로 완전히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우리’가 되셔서 사랑의 길을 닦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길 때 그 마음의 동기가 불순해서는 안 됩니다. 즉, 내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보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배신자들의 발까지 닦으시며 ‘끝까지 사랑하는 길’을 우리 앞에 닦아 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답게, 그 사랑의 길로 들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거절할 수 없는 ‘은혜의 길’을 닦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는 펄쩍 뛰었습니다. 요 13:8a →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베드로의 눈에는 주님의 그런 행동이 격에 맞지 않아 보였고, 송구스러웠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3:8b →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발을 내미는 것은! 나의 부끄러움과 허물을 주님 앞에 노출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 발은 ‘삶의 현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묻은 먼지, 죄, 상처, 피로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매일의 삶 속에서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 앞에 나아와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은 단번에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씻김 받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날마다 당신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도록 ‘은혜의 길’을 닦아 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께 첫 번째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요즘 주님께 발을 씻김 받고 계십니까? 즉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계십니까? ▸기도 가운데 마음을 씻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냥 그냥 살아가고 계십니까? 씻김 받지 않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 씻김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 날마다 발을 씻김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절대로 나를 못 씻깁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겸손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의를 지키려는 교만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주님이 닦아주시는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매일 발을 내밀어야 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 살면서 세상 욕심에 내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닦아 주시옵소서.” 이 고백을 드리므로,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은혜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먼저 행하여 ‘본을 보이는 길’을 닦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 옷을 입고 앉으신 예수님은! 이 세족식의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13:14∼15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는 말만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수건을 두르시고, 물을 떠 오시고, 허리를 굽혀 먼지 묻은 발을 만지시며 닦아주셨습니다.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야 할지 그 ‘길을 닦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말로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요 13:15 →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나는 이런 일과는 맞질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건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행하라.”

여기서 저는 여러분께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를 추구하십니까? ▸어디서든 낮은 자리를 찾으십니까? 아니면! 높은 자리를 추구하십니까? ▸보이지 않는 섬김의 자리를 선택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인정받고 드러나는 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진짜 신앙은! ‘어디에 앉아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3:17 →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네! 아는 것만으로는 복이 되지 않습니다. 발을 씻기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 역시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이웃의 발을 씻기기 위해 몸을 낮출 때, 그곳에 천국의 복이 임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닦아 놓으신 그 길을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 길은 낮은 곳으로 향하는 길이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씻어 주는 섬김의 길입니다. 주님처럼 낮아져서 섬김의 본을 보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가장 거룩한 손으로 가장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발을 닦으심으로써, 죽음조차 이기는 사랑의 길을 닦으셨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은혜의 길을 닦으셨고, ▸우리가 따라야 할 섬김의 본이라는 길을 닦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길을 뒤 따라가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이 닦아야 할 ‘발’은 누구의 발입니까? 미워했던 배우자의 발입니까? 이해되지 않던 자녀의 발입니까? 아니면 직장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동료나 상사의 발입니까? 실제 발을 씻는 것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의 허물을 들춰내는 대신 조용히 덮어주는 것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일에 먼저 손을 뻗는 것 ▸내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주님의 이름으로 한 번 더 참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의 ‘세족식’이며, ‘주님이 닦아 놓으신 길’을 걷는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음성을 가슴에 새기고, 이번 한 주간 낮은 곳에서 승리하시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나의 삶에서 ‘끝까지 사랑하기 어려운 관계’는 누구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과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는지 나눠봅시다.


2. 교회와 가정, 일터에서 나는 ‘발을 닦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발을 내미는 사람’입니까? 나의 모습에서 바꾸고 달라져야 할 한 가지를 나눠봅시다.


3. 우리는 먼저 주님께 씻김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을 씻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냥 그냥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3-21
조회 140

제목: 믿으면 보이는 것들! (요 11:38∼46)


오늘 본문 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 11:38a →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예수님은 왜 비통해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생명의 주관자인 당신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이라는 권세 앞에 압도당해 절망하고 있는 인간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절망의 돌문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오늘 그 돌문 앞에 서 계시며, 우리에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 마음의 돌문이 옮겨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목격하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현실의 돌문을 믿음으로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 서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겠다”라는 선포가 아니었습니다. 의외로 “돌을 옮겨 놓으라”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요구였습니다. 사실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돌문이 저절로 굴러가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사람들에게 그 무거운 돌을 옮기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지만, 사람은 사람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그 기적의 마중물은 인간의 ‘순종’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반응을 보십시오. 39절에서 그녀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요 11:39b →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마르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은 ‘상식’이고 ‘과학’이며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 ‘합리성’이 오히려 주님의 기적을 가로막는 ‘돌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사람이 죽고 3일까지는 영혼이 그 주변을 맴돌고 있지만, 4일째는 완전히 떠나 부패가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즉, 마르다의 말은 “이제는 주님이 오셔도 소용없는 ‘완전한 끝’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늦었어.” “상황이 너무 악화됐어.”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 와서”라며 스스로 한계를 정합니다. 내 이성과 경험이라는 ‘돌문’을 닫아놓고, 주님이 일하실 공간을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항공 역학적으로 보면! 꿀벌은 결코 날 수 없는 신체 구조를 가졌다고 합니다. 몸체는 크고 무거운 데 비해, 날개는 너무 작고 약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꿀벌이 인간의 ‘항공 역학 법칙’이라는 상식에 갇혀 있었다면, 평생 땅 위를 기어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꿀벌은 자신이 날 수 없다는 과학적 계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저 날기 위해 날개를 세차게 휘젓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웽’ 소리와 함께 공기 저항을 이겨내고, 하늘을 날며 꽃의 꿀을 땁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통계와 의학적인 소견, 경제의 전망이라는 ‘상식의 법칙’은! 우리에게 “너는 날 수 없어, 너는 끝났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날개를 저어라, 돌을 옮겨라.” 하실 때, 그 상식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자만이 중력을 거스르는 은혜의 비행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의 상식의 돌을 옮겨라. 네 경험의 돌을 옮겨라. 네가 붙들고 있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의 돌을 옮겨라!” 사실! 돌을 옮기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땀이 나고 손이 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돌을 옮길 때 비로소, 무덤 안의 생명이 밖으로 나올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종이 기적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환경 너머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봐야 합니다.

본문 40절에서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십니다. 요 11:40 →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는 보통 ‘보여주면 믿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원리는 반대입니다. ‘믿어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안목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무덤 안의 ‘시체’와 ‘냄새’라는 환경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무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계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눈앞의 환경이라는 안개를 뚫고,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안개가 자욱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 문제, 직장 문제, 건강 문제라는 안개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 환경은 ‘죽었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환경 너머에서 이미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커다란 대리석 바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계십니까? 제가 보기엔 그저 큰 돌덩어리일 뿐인데!” 미켈란젤로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이 돌덩어리 안에 갇혀 있는 다윗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 다윗을 가로막고 있는 불필요한 돌을 깎아내어, 그를 자유롭게 해주길 원합니다.” 거장의 눈에는 투박한 돌덩어리 너머에 숨겨진 걸작품이 이미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빚으시는 위대한 조각가이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시련을 보며 “저 인생은 이미 깨진 돌덩어리다.” 이렇게 조롱하지만! 주님은 그 고난을 깎아내어 만드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뜬다는 것은! 문제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크기를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네! 지금 당장은! 냄새가 나고 암담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반드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라고 선포하며 나아가십시오.

안개가 걷히면 찬란한 태양이 나타나듯, 믿음의 안목으로 인내할 때 여러분의 삶에 감추어둔 보화가 드러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제 마침내 기적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41절에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요 11:41 →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직 나사로는 무덤 속에 있고, 기적은 일어나기 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이루어진 줄 믿고,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주를 진동시키는 권세 있는 음성으로 외치십니다. 요 11:43b →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이 한마디에 죽음의 사슬이 끊어졌습니다. 썩어 들어가던 세포가 살아나고,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이 부르심은! 단순히 한 개인을 부르는 소리가 아닙니다. 죽음의 통치 아래 있는 온 인류를 향한 ‘생명의 선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서 이름을 지정하지 않고 그냥 “나오라”고 하셨다면, 인류 역사상 죽었던 모든 자가 다 무덤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성서학자들의 해석이 있을 만큼, 이 음성에는 창조주의 권능이 담겨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한 마디를 더 하십니다. 요 11:44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이 말씀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생명을 얻었으나, 여전히 죽음의 굴레인 ‘수의’에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생명은 얻었으되 누림이 없고, 살아났으되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구원의 확신은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 가난의 저주, 열등감이라는 수의를 입은 채, 뒤뚱거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이 단순히 ‘지옥 안 가고, 천국 가는 존재’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묶고 있는 모든 결박이 풀려 ‘자유롭게 다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사로를 칭칭 감고 있던 수의 베를 풀어주듯, 오늘 이 시간! 성령의 가위가 여러분의 마음을 묶고 있는 근심의 끈을 끊어 내기를 바랍니다. “나는 원래 이래”, “우리 집안은 안 돼”라는 저주의 수의를 벗어 던지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생명의 능력은 우리를 무덤 밖으로 이끌어 낼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절망을 희망으로 뒤집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우울함, 열등감, 경제적인 위축감에서 당당히 걸어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주신 생명은! 무덤 속에 갇혀 있는 생명이 아니라, 힘차게 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역동적인 생명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으면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내 삶을 향한 주님의 계획이 보이며,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이 보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무덤 속에 머물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의 빛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 나가는 승리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눔과 묵상


1. 마르다의 ‘상식’이 기적을 가로막는 돌문이 되었던 것처럼, 현재 내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나만의 상식이나 경험의 돌문’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2. 플로렌스 채드윅이 안개 때문에 포기했던 것처럼, 요즘 나의 믿음의 눈을 가리고 있는 ‘인생의 안개(건강, 경제, 관계 등)’는 무엇인가요? 그 안개 너머에 계신 주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3.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수의에 묶여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옭아매고 있는 ‘과거의 습관, 상처, 혹은 부정적인 생각’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3-14
조회 159

제목: 선한 목자 -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 (요 10:11∼15)


<선한 목자의 세 가지 증거>


1. 이름을 알고 부르시는 목자 (인격적 관계)

요 10:14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목자는 양들을 ‘떼’나 ‘무리’로 보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특징을 알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표현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깊은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선한 목자는! 양을 그냥 한 집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느 양의 다리가 약한지, 어떤 양이 겁이 많은지, 어느 양에게 상처가 있는지 그 형편과 사정을 속속들이 압니다. 마찬가지로, 양도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압니다. 이는 훈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저 목소리를 따라가면! 푸른초장과 쉴 만한 물가가 나온다”는 경험적 신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기능’이 아닌 ‘생명’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성도를 향한 ‘관심과 책임’ 그리고 성도의 ‘신뢰와 순종’이 어우러진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목사는 단순히 설교하는 사람이고, 성도는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영혼이 연결되어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 ‘영적 가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성도의 이름이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그 성도가 지내온 교회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는 유창한 설교나 세련된 행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기도해 주는 목자이다.” “목사님은 내 이름을 알고 불러준다.” 이렇게 성도의 신뢰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또한, 양도 목자가 앞서가면 그 뒤를 따르듯, 목사가 말씀의 길을 앞서 걸어갈 때 성도들도 기꺼이 그의 영적 지도력을 신뢰하고 말씀을 따르는 순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동의 한 선교사가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한밤중에 커다란 동굴에 여러 목자의 양 떼가 뒤섞여서 잠을 잤습니다. 아침이 되자, 한 목자가 동굴 밖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휘파람 소리를 내서 양들을 불러냈습니다. 그러자 수백 마리의 양 떼 가운데, 신기하게도 그 목자의 양들만 줄지어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가 신기해서 그 목자의 옷을 빌려 입고 똑같이 휘파람 흉내를 냈지만, 양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옷’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자도 자기 양을 알지만, 양도 자기 목자를 알아야 진정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우리를 ‘교인 1, 교인 2’로 보지 않으십니다.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인 것처럼 소중히 여기며 이름을 부르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아픔, 남모를 눈물, 그리고 가장 깊은 갈망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3:1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또 응답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끝까지 곁을 지키는 목자 (책임과 보호)

요 10:12∼13 →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여기 ‘삯꾼’과 ‘목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양이 자기의 것이 아니고, 자기의 안전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쪽으로 다가가서 양들을 보호하고 돌봅니다.

삯꾼은 위기 상황에서 ‘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위기 상황에서 ‘양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시는 주님이심을, 오늘 성경은 ‘양의 문(門)이 된 목자’라는 표현에 담았습니다. 요 10:7 →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밤이 되면 돌을 쌓아 만든 우리로 양들을 들여보냅니다. 그런데 이 우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사방은 돌벽으로 막혀 있지만, 양들이 드나드는 통로에는 정작 ‘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성지 순례객이 그런 모습을 보고 목자에게 물었습니다. “문도 없는데, 밤사이에 사나운 짐승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목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바로 문입니다.” 밤이 깊어 양들이 다 잠들면, 목자는 그 좁은 출입구 바닥에 자신의 몸을 누입니다. 목자가 그 통로를 온몸으로 막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늑대 같은 사나운 짐승이 양을 잡아먹으려면, 반드시 목자의 몸을 밟고 지나가야만 합니다. 목자는 밤새 찬 이슬을 맞고, 맹수의 으르렁거림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양들의 잠자리를 지킵니다. 목자에게 양은 ‘관리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서라도 지켜야 할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 인생의 위기 앞에서 뒷짐 지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단이 우리를 삼키려 할 때, 주님은 당신의 몸으로 그 공격을 직접 막아내시는 ‘살아있는 문’이 되어 주십니다. “내가 너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나를 통과하지 않고는 그 어떤 절망도 너를 건드릴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 ‘책임감 있는 사랑’이 오늘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세상 모두가 나를 떠나도, 끝까지 우리를 지키며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치가 없을 때 우리 곁을 떠나지만, 주님은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목숨을 버려 생명을 주시는 목자 (희생적 사랑)

요 10:11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단순히 직업적인 책임감을 넘어선 숭고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선한 목자의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는 ‘희생’ victim이 아니라, 양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내어줌’ offering입니다. 세상의 리더십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랫사람을 희생시키지만, 주님의 리더십은 양들의 생존을 위해 목자가 먼저 죽는 리더십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입니다.

한 젊은 엄마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영국 웨일스 남부의 언덕길을 걷다가,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사방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목적지에 도착하질 못했습니다. 눈보라가 잦아든 후 수색대는 눈더미 속에서 그녀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품에 있는 아기는 살아 있었고 건강했습니다. 엄마가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아기를 감싼 덕분에 엄마의 온기와 덮어싼 옷이 체온을 보존하여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 아기가 자라, 훗날 세계 1차대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 수상(1916∼1922)이 되어 승리로 이끈 ‘데이빗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입니다.

이렇게 ‘자기 목숨을 버려,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고 신비입니다. 양을 살리기 위해 목자가 죽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의 눈보라를 주님이 온몸으로 막아내셨기에, 오늘 우리는 따뜻한 생명의 품 안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 한 사람도 하찮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친히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셨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당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위험을 감수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양을 살리기 위해 목자가 죽는 것은, 세상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보통은 양이 희생되고 목자가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목자가 죽고 양이 삽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분이 버려지심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분이 정죄 받으심으로, 우리가 용서받았습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도전이 있습니다. 먼저는, ‘위로’입니다. 혹시 삶이 두렵고 외롭습니까? 버려진 것 같습니까?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 것 같습니까?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목자다. 나는 너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뒤에는 이미 죽음까지 건너오신 목자가 서 계십니다.

다음으로 ‘도전’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의 양이라면, 그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 속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짜 사랑은 말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시간의 대가, 물질의 대가, 때로는 자존심의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나눔과 묵상


1. 주님이 나의 형편과 사정,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 못한 내 마음의 응어리를 다 알고 계신다고 느껴졌던 따뜻한 위로의 순간이 있었다면 나눠봅시다.


2.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로이드 조지 수상처럼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고백을 들을 때, 나의 삶의 태도나 가치관에서 변화가 필요한 점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세상의 수많은 소리가 있지만, 선한 목자의 음성을 더 선명하게 듣기 위해서 내가 실천해야 할 영적 습관 (예: 새벽 혹은 금요기도, 5분 묵상, 감사 일기 등)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이재영
2026-03-07
조회 178

제목: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 (요 9:1∼8)


1. 고난의 이유를 미래에서 찾자! ⇨ 관점이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즉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요 9:2 →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고통당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판단에는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단정적으로 전제하고’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생각과 태도는! 정죄하고, 판단하고, 공격하며, 고통받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절입니다. 요 9:3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네! 맹인 당사자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선언하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이 불행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현재의 불행을 → “과거의 죄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의 불행을 → “미래의 행복을 위한 밑거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해석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도약의 기회로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은! →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통해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를! 과거의 죄나, 과거의 원인으로 풀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사라지고 정죄만이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말은! → ‘무슨 일이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과 계획이 있다는 ‘미래’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성경 이야기’입니다. ▶ 모세는 애굽의 궁중에서 40년간 왕자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모든 학문과 문물을 배우고, 많은 혜택을 누리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이후 40년간을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하며 살게 되었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저지른 ‘살인죄’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동족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화가 나서 한 대 쳤는데,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결국 모세는 왕궁에서 도망쳐 나와, 광야 40년간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아! 그때 내가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그때 내가 철이 없어서… 참 재수도 없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세가 왕궁에서 나와 광야생활 40년을 하게 된 것은, 살인을 저지른 것이 원인이 아닙니다. 그가 광야에서 고생한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지도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야 40년은 미래를 위한 훈련이요,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 ‘돈을 많이 번 부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 “내가 돈을 많이 번 것은! 내가 땀 흘리고, 고생하고, 노력해서, 열심히 일해서 번 것이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적인 해석’입니다. 이것을 ‘미래적인 해석’으로 한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나에게 돈을 많이 벌게 하셨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서 나에게 이런 번영을 허락하셨는가?” 이런 질문을 할 줄 알 때, 비로소 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그것이 고난이든 형통이든, 그것을 미래적으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 “나를 통해 일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다!” 이런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살아, 진정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오늘을!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며 살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9:4a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여기 ‘아직 낮이매!’라는 말은, ‘아직 내가 살아있으니!’라는 말입니다. 살아있으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는 구절을 → 영어 성경은 ‘We must do’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일들은 전기밥솥이나, 세탁기나, 청소기나 컴퓨터, 파출부가 대신 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의 ‘섬김’은 남이 해줄 수가 없고, 자신이 직접 해야만 합니다. / 즉! 자기 예수, 자기 말씀,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 자기 천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남의 예수가 아닌 자기 예수님이 되어야 하고, 밖의 예수가 아니라 내 안의 예수님이 되셔야 하고, 어제나 혹은 내일 일하는 자가 아니라, 오늘 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세 가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 ① 하나님이 왜 나에게 ‘생명’을 주셨는가? ② 하나님이 왜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는가? ③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오늘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오늘을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자세로 살기를 주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시간을 계수할 줄 아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 90:12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사도 바울은 오늘을 성실하게 살라고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엡 5:16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성도 여러분! ‘오늘’ 내가 그 무엇인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일할 때,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지! 다음에,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그때 잘하겠다는 말은 허무한 말일 뿐입니다.

여기 ‘낮일 때’라는 말은! ⇨ ‘책임을 맡았을 때’를 말합니다. ‘기회를 가졌을 때’를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일을 맡고 계십니까? 어떤 책임을 맡고 계십니까?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일해야 합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충성해야 합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요 9:4b →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네! 밤이 오면 일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인간에게는 일할 수 없는 밤이 찾아옵니다. ① 건강의 밤이 찾아옵니다. ② 죽음의 밤이 찾아옵니다. ③ 재물의 밤이 찾아옵니다. ④ 기회가 다 사라지는 밤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밤이 오기 전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때를 잘 사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있을 때 하나님께 잘해야 합니다. 건강이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재물이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능력이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활동력이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밤이 오기 전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밤이 오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네! 지금은 일할 수 있는 낮입니다. 오늘을 성실하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나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명감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맹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실로암’의 뜻이 무엇입니까? 요 9:7 →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이 맹인이 순종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보냄을 받은 그곳! 실로암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라고 한 대로 그 진흙을 물로 씻어냈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열려 밝은 눈이 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사람마다 ‘자신의 실로암’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깝건, 멀건 간에, 내가 보냄을 받은 곳,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의 현장은 어디인가?’ ‘나의 실로암은 어디인가?’ ‘오늘 나에게 맡겨진 일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냄을 받은 그곳이! ▸자기가 원하는 곳이 아니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시 봅시다.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의 행동이나 명령이 이해되십니까? - 아니! 시각장애인인 이 사람이, 어떻게 멀리 실로암 연못까지 가서 씻으라는 것입니까? 그냥 말씀만으로도 낫게 해주신 적이 많았는데, 이왕 낫게 해주실 거면 그냥 간단하게 처리해 주시면 안 됩니까? 어디가 어딘지도 잘 분간 못하는 맹인인데, 꼭 거기까지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 이것은 맹인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잘 이해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맹인은! 보냄을 받은 곳으로 가서,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따지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떠졌습니다.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할렐루야!


나눔과 묵상


1.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문제’나 ‘고난’을 주로 과거의 탓(자신의 잘못, 환경, 타인)으로 돌리지는 않았 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문제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실 기회’로 본다면, 어떻게 새롭게 해석할 수 있 을지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은 “밤이 오기 전에 낮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낮(기회, 건강, 재능, 직분 등)’은 무엇이며, ‘나중에’가 아닌 ‘오늘’ 내가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섬김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3. 맹인이 눈에 진흙을 바른 채 실로암까지 가는 과정은 번거롭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현재 나의 삶의 자리(가정, 일터, 교회)에서 “내 생각에는 이해되지 않지만, 주님이 보내셨기에 순종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